6화. 비참하게 승리할 것인가, 명예롭게 패배할 것인가.
"힛키, 여기 앉아봐. 왁스 발라 줄게."
"됐어."
거절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어 보라며 내 말을 무시한 유이가 나를 의자에 앉히고 왁스를 묻힌 손끝을 뻗어왔다.
따스한 손길이 내 머리 이곳저곳을 손질해간다. 익숙지 않은 왁스의 이물감이 거북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거니까."
기왕이면 잘 꾸미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러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왁스를 발라본 게 언제인지도 생각 안 나는 내가 어설프게 바르는 것보다 유이에게 맡기는 편이 백배는 낫겠지.
"이상한 기분이야…… 힛키를 부모님께 소개하러 간다니."
"뭐, 가짜지만……"
문득 머리를 만지고 있던 유이의 손길이 멈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어쩐지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가짜지만……"
멈춰있던 손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건 아니었지만 단정하다고도 할 수 없던 머리가 멋스럽게 정돈되어간다.
미용사 같은 그 솜씨에 역시 유이가하마 유이구나 하고 새삼스레 감탄하게 된다.
"다됐어. 응, 역시 힛키는 꾸미면 멋있어!"
자신이 꾸며놓은 머리가 만족스러웠는지 유이는 이 각도 저 각도로 내 머리를 보며 웃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과 익숙지 않은 머리 모양이 멋쩍어 나는 가렵지도 않은 뺨을 긁었다.
"준비도 다 끝났고 이제 슬슬 가볼까?"
"그렇구나. 약속시각에 늦을 수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힐끗하고 머리 모양을 확인하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시즈카와 유키노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키농, 시즈카 선생님 어때요? 힛키, 멋있죠?"
마치 자식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을 펴며 유이가 말했다.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유키노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카가 대조적이다.
"내 남편이지만 참 잘생겼군. 슈트가 정말 잘 어울린다."
"……그러네요. 전업주부로 두기엔 아까울 정도예요."
오래전 그녀에게 네 얼굴을 보니 잠기운이 가신다는 혹평을 들었던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외모를 칭찬받아도 반응하기 곤란하다. 고등학교 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화자찬했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무리다.
"정장 정말 오랜만에 입어보네. 마지막으로 입어본 게 아버님 장례식 때였나?"
"그럴 거다. 그때는 상복으로 입은 거였지만."
전업주부다 보니까 정장을 입을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야말로 가족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나 입는 정도.
그런 정장을 몇 년 만에 옷장에서 꺼낸 거다. 유이의 애인으로서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산지는 벌써 15년 가까이 지났지만, 실제로 입은 건 채 10번도 안 되기 때문에 정장은 여전히 깨끗했다.
유키노와 유이는 이참에 새로 한 벌 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오늘 하루를 위해서 새로 사는 건 아무리 그래도 돈 낭비니까.
"역시 내가 차로 데려다 줄까?"
"아냐, 모처럼의 휴일인데 편히 쉬고 있어. 그냥 전철 타고 가면 되니까."
"네, 괜찮아요.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카는 복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의 연인으로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다.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아내로서 복잡한 심정이겠지.
"하치만군, 잘할 수 있겠니?"
시즈카와 함께 현관까지 배웅 나온 유키노가 말했다.
걱정스럽다는 말투와는 달리 미소 지은 그 얼굴은 너라면 잘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걱정하지 마라. 제대로 애인행세를 하고 올 테니까."
"그래……"
돌연 유이를 따라 구두를 신고 있는 내 목을 향해 유키노가 두 손을 뻗었다.
"……넥타이, 삐뚤어졌어."
"어, 어. 고마워."
넥타이를 고쳐주는 유키노의 손길이 너무나도 상냥했기에, 그래서 그만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같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하치만군, 이 현관문을 나가서 다시 들어올 때까지 너는 유이의 연인인 거야."
"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하는 거냐? 굳이 말하자면 유이네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겠지."
"유이를…… 내 소중한 친구를 잘 부탁할게."
그 말에 말없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이가 더는 못참겠다는 듯이 유키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유키농…… 정말 고마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변함없이 사이 좋은 녀석들이다.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해도 믿을 레벨.
"유이, 하치만군. 잘 다녀와."
"……조심히들 다녀와라."
인사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어째선지 유이는 나올 생각을 안 하고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유이가 시즈카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인사였다.
"시즈카 선생님,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해 죄송하고,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유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일은 남자인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숨소리도 내기 힘든 엄숙한 분위기가 돼버렸잖아.
"유이, 빨리 나와라."
시즈카의 대답을 기다리는 유이와 힘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인 시즈카.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유이를 재촉했다.
"응.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이가 현관문 밖으로 나오고서야 나는 한참을 잡고 있던 문 손잡이를 놓았다.
변함없이 평온한 미소로 작게 손을 흔드는 유키노. 어느샌가 뒤로 돌아선 시즈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초로의 아내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느새 왜소해진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위로의 선물이라도 하나 해줘야 할 것 같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전철역에서 전철을 타고 10정 거장. 걷는 시간까지 합쳐서 대충 한 시간 정도의 거리.
우리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살고 있던 그때 그 집에 지금도 여전히 유이의 부모님은 살고 계신다고 한다.
전철에 탄 우리는 운 좋게도 나란히 비어있던 두 자리에 앉았다.
"……"
"……"
평소라면 가만히 있어도 먼저 말을 걸어왔을 유이가 오늘은 말이 없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전철 안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무리하게 말 거는 것도 내 주의가 아니지만, 오늘만은 예외로 치자.
"유이, 네가 따로 나가 살기 시작한 게 8년 전이었던가?"
"응? 어 맞아. 사브레가 죽고 얼마 후에 독립했으니까."
"사브레인가……"
사브레. 갈색 털과 커다란 눈동자, 짧은 다리와 졸랑졸랑 흔들리는 꼬리를 가진 동물. 유이가 키웠던 개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나는 목줄을 빼고 차도로 뛰어든 그 녀석을 구하려다 유키노가 타고 있던 차에 치여 병원 신세를 졌었다.
차에 치일 뻔한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주인인 유이보다 나를 더 좋아하고 따르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죽었을 때 너 엄청나게 울었었지."
"아하하, 그랬었지."
사브레가 죽던 날, 유이는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어찌나 우는지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땐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줄 알았다.
나에겐 그다지 와 닿지 않았지만 사브레를 친동생처럼 예뻐하던 유이에게 있어선 분명 그에 못지않게 슬픈 일이었던 거겠지.
우리 집 고양이 가마쿠라가 죽던 날 코마치도 그렇게 울었었다.
"그래도 힛키가 위로해줘서 금방 기운 차릴 수 있었어."
"딱히 아무것도 해준 것 없었다만."
"아냐, 힛키는 열심히 위로해줬어."
그때 내가 했던 거라곤 우는 유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가볍게 어깨를 다독여준 것 정도였다.
덕분이란 말을 들을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옆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됐어."
"……그러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응, 그런 거야." 하고 유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차창으로 쏟아지는 저녁노을이 유이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분명 내 얼굴도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역에서 내린 우리는 유이네 부모님 집으로 가기에 앞서 역 앞에 있는 대형마트에 들렀다. 선물로 드릴 과일 바구니를 사기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런 자리에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냐."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친구로서 찾아뵙는 거라면 모를까, 애인으로서 찾아뵙는 건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치만 힛키 전업주부라 돈도 얼마 없잖아?"
"확실히 돈은 얼마 없지만 과일 바구니 하나 못살 정도는 아니라고."
날이 갈수록 올라가고 있는 물가지만 과일의 평균시세를 생각해보면 7천엔 정도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제일 작은 과일 바구니의 가격도 1만 엔이었다.
"여, 역시 내가 사는 게……"
눈치 빠른 유이가 내 표정이 경직되는 걸 보고 그렇게 말했다.
"……됐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인 너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별로 허세를 부리려는 건 아니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봐야 유이의 마음만 불편해질 테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유이가 우리 부부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다.
"……역시 힛키는 상냥하네."
딱히 그런 거 아니라고 해봐야 뭐라고 그럴지 눈에 선했기 때문에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넘어지지 않도록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이 길을 따라 앞으로 10분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거의 10년 만에 와보는 것 같네."
"그래?"
"널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와본 게 전부니까.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어떻게 갔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렇구나. 나도 설이나 어머니의 날 정도나 오니까. 독립해서 나간 후로 이 동네도 많이 변했어."
20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변모시켰다. 이 한적한 주택가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에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변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혹시 우리 집 옆에 작은 놀이터가 있었던 거 기억해?"
"아니."
"거기 벤치에 앉아서 힛키랑 얘기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가?"
"응, 있었어. 지금은 이미 없어졌지만."
유이에겐 미안하지만, 얘기를 들어도 기억이 안 났다. 아마도 대단한 얘기는 나누지 않았을 거다.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별것 없는 어느 날의 이야기. 그래도 그녀에게 있어선 소중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전부 변해가는구나……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나 봐."
"엉?"
"친했던 친구들이랑도 하나하나 연락이 끊기고, 지금도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건 유미코와 히나, 유키농이랑 힛키 정도야."
"야 유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다만."
교사라는 녀석이 그런 걸 틀려도 되는 거냐? 아무리 초등학교라지만 너 용 캐도 교사가 됐구나.
"대충 넘어가! 아무튼, 많은 것이 변해버렸지만 힛키랑은 지금도 변함없이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얘기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특별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유이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부끄러운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듣고 있으니 나까지 묘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옛날 얘기만 하게 되는 게, 늙은이가 된 느낌이라 좀 슬퍼지는데.
"고등학교 땐 너나 유키노랑 이렇게 오랜 인연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내가 노력 많이 했으니까."
"뭐?"
"힛키는 진짜 힛키였으니까. 내가 먼저 안 하면 전화도 메일도 안 했고, 쉬는 날에는 집에만 박혀있으려고 했고. 나 정말 노력 많이 했다고."
"……부정은 못 하겠네."
한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든 남자와 쇼핑백을 든 여자.
추억을 나누며 나란히 걷는 우리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몇 분 후, 우리는 유이네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 앞에 도착했다.
반평생을 교제한 친구다 보니 이 집 앞까지 유이를 바래다준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여름 축젯날, 3학년 때의 크리스마스, 대학생 때의 어느 가을날, 나는 그녀를 그 집 앞까지 바래다줬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그 집 안에 들어가 보는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녀의 부모님을 뵙게 되는 것 또한 그녀의 결혼식 때일 거로 생각했었다.
"막상 집까지 오니까 뭔가 긴장되네. 힛키는 괜찮아?"
"뭐, 나야 경험자니까. 결혼식도 해봤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긴장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귀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유이가 부모님에게 의절 당하는 걸 막는 거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이건 부모님께 따님을 주십시오!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결국엔 딸을 받아가지 않는다는 뒤통수까지 치는 거다. 하물며 그 상대는 유부남. 그야말로 악인!
"아하하, 그것도 그러네."
내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유이는 웃음을 작게 터뜨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나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클레식 음악이 흘러나오다가 이내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아, 엄마? 나야 나!"
"나야나 사기냐……"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초로의 부인이 나왔다.
초로라곤 해도 나이가 그렇다는 거지 얼굴 자체는 시즈카보다 두세 살 연상인 걸로 밖에 안 보인다. 터무니없는 동안이다.
검은색 투피스 위에 검은 밍크 숄을 걸친 모습도 매우 우아했다. 딱 봐도 모임 나갈 때 입는 승부복이란 느낌이다.
그야 노처녀 외동딸이 남자를 데려온다는 초유의 사태니까, 어느 정도는 신경 쓸 거로 생각했지만 말이지.
"유이! 어서 오렴. 잘 지냈니?"
"응, 엄마도 잘 지냈지?"
유이의 어머니가 유이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일인지 유이도 자연스럽게 어머님의 등에 팔을 둘렀다. 감동의 모녀상봉이다.
아무래도 유이가 유키노를 끌어안는 버릇을 가진 건 모전여전이었던 모양이다.
예상치 못하게 펼쳐진 두 사람만의 공간에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놓쳐버렸지만, 뻘쭘하게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녕하십니까. 따님과 교제하고 있는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합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로 어머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이 유이의 어머님이 나를 쳐다보셨다.
"어머! 유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힛키 군이었구나! 오랜만이네~ 어서 들어오렴~"
유이의 어머니가 호텔 종업원 같은 과장된 손짓을 하며 옆으로 물러나셨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은 유이가 웃을 때와 똑 닮아있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어머님 날 기억하고 계시잖아…… 이거 괜찮은 거냐…….
"실례하겠습니다."
가지런히 구두를 벗어놓고 유이를 뒤따랐다. 그런 나의 뒤를 어머님도 뒤따랐다.
"어라…? 그런데 힛키 군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던 거 아니었니?"
"네? 아,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엄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머, 미안해~ 엄마가 착각한 모양이야."
놀란 가슴을 마음속으로 쓸어내리며 나는 작게 심호흡한다.
실수했다. 유이의 어머니가 나를 기억하고 계실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까지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시는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건 위험했다…….
"미안해 힛키. 설마 엄마가 지금도 힛키를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
발걸음을 늦춘 유이가 면목없다는 얼굴로 내게 붙어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유이의 어머님을 따라 들어간 거실에는 명백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유이의 아버님이 앉아계셨다.
나 오늘 신경 좀 썼다는 티를 내는 어머님는 달리, 하얀 와이셔츠 위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은 수수한 차림 세셨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까지 더해지니 왜 내가 네 녀석을 위해 차려입어야 하는 거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 나왔어요."
"그래, 어서 와라."
어머님 때와는 달리 다소 퉁명스럽게 유이가 인사한다. 아버님도 아버님대로 오랜만에 온 딸의 인사를 건성으로 대꾸하셨다.
유이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나만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신다.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코마치가 이 사람과 결혼할 거라며 매제를 데려왔을 땐 나와 아버지도 죽일 듯이 노려봤었으니까.
"이쪽은 지금 교제 중인 히키가야 하치만씨."
나는 아버님에게 흠 잡히는 일이 없도록 어머님 때보다 신경 써서 정중하게 인사드렸다.
긴장한 나머지 장인·장모님 앞에서 추태를 보였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따님과 교제하고 있는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합니다."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너 같은 놈에게 우리 유이는 못 준다!!"
"……"
유이의 아버님은 호통을 쳤다. 효과는 굉장했다!
어머님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리셨고, 유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내 얼굴은 아마 새하얗든지 새파랗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실례잖아!!"
유이도 아버님에게 호통을 쳤다. 평소의 유이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가끔 부모님과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유이도 집에서는 화도 내고 짜증도 내는 모양이다.
병적으로 남들에게 맞추던 시절에도 집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미안해 힛키. 우리 아빠가……"
"……라는 말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얼굴로 내게 사과하려는 유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네?"
"딸이 남자를 데려오는 날이 오면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오랜 생각이었다네."
"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이의 아버님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셨다.
"환영하네! 히키가야군. 유이의 아비일세."
호화로운 저녁 식사 후, 한동안 아버님과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여기 한잔 더 받게."
"네, 아버님. 감사합니다."
유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얼마나 소중한 딸인지, 이런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지 않는 모습에 얼마나 많은 근심·걱정을 했는지.
유이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아버님은 딸이 데려온 남자가 다소 하자가 있더라도 어지간하면 좋게좋게 봐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딸이 나이 차이도 안 나고, 인물도 좋고, 건실한 직업을 가진 미혼남을 데려와 정말 만족스럽다고 하셨다.
실은 전업주부인 유부남이고, 당연히 결혼할 생각도 없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얼마나 슬퍼하실지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가슴이 쓰라렸다.
유이의 부모님은 유이와 의절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딸을 생각하는 부모다. 분명 딸이 자극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거겠지.
"친구들의 자식들은 진작에 다 결혼해서 이제는 손자가 중학생인 녀석도 있네."
"그렇군요."
아버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으셨다.
"손자의 얼굴은 못보더라도 하다못해 하나뿐인 딸이 결혼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거든."
"……"
하나뿐인 딸이 결혼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인어른도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히키가야군, 내 딸을 사랑하고 있는가?"
돌연, 아버님이 내게 물었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 의중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진지한 눈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네, 사랑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소중한 친구로서 나는 유이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유이의 아버님이 물은 것은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 거짓말이다.
"그런가……"
내 대답에 아버님은 만족했다는 듯이 눈을 감으셨다. 오랜 근심이 사라졌다는 듯한 안도의 한숨.
"딸을…… 유이를 잘 부탁하네."
못난 딸을 잘 부탁한다며 내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숙이셨다.
"……"
그리고 그런 아버님의 모습에 나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았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속이려 들어선 안 되는 거였다. 제삼자가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유이가 부모님께 자신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진심을 털어놓았다면, 그분들도 마지막엔 분명 이해해주셨을 거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할 생각에 부모님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그분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과 상처가 될지를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나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던 거다.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그 미소가 죄스럽고 죄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이네 부모님의 집을 나선 건 한밤중이 돼서였다.
유이의 어머님은 집 앞까지 배웅을 나와 딸을 잘 부탁한다고, 언제든지 또 오라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 어머님.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집을 다시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 이걸로 벌써 몇 번째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유이와 함께 집을 뒤로했다.
어두운 밤길을 말없이 걸었다.
별 탈 없이 잘 끝났다. 전부 예정대로다.
이걸로 유이의 부모님도 더는 의절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실 테고, 유이도 당분간은 결혼을 재촉받지 않게 될 거다.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다. 유이의 부모님께 죄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늘은 도와줘서 고맙다고 한마디 한 이후로 유이도 계속 말이 없었다. 유이도 분명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밤중에 이 동네를 힛키랑 둘이 걷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
돌연 유이가 그런 말을 꺼냈다.
"있잖아…… 처음으로 날 집까지 바래다줬던 날 기억해?"
"여름방학 때 같이 갔던 불꽃 축젯날 말이지?"
"응, 기억하고 있구나."
그야 기억하고 있다. 오히려 잊을 리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 외의 여자와 갔던 축제니까.
"가기 싫어하는 힛키를 코마치가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겨우 같이 갔었는데."
"뭐, 그때는 나도 삐뚤어져 있었으니까. 중학교 때 워낙 여자한테 데인 적이 많다 보니 호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아하하, 그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해졌지."
쉽게 신용하지 않은 것뿐이지 난 언제나 솔직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싫은 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니까 말이지.
"지금이니까 하는 소리지만, 실은 나 그 날 힛키에게 고백하려고 했었어."
별도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유이가 말했다. 이제는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추억이 되어버린 이야기.
"고백하려던 찰나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결국 못했지만."
"……그랬냐."
사실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 인제야 눈치챈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때 고백했더라도 힛키는 분명 받아들여 주지 않았을 거로 생각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때의 내게는 유이가하마를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힛키는 힛키다운 이상한 이유로 날 거절했을 거고, 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옷도 안 갈아입고 방 침대에 누워 엉엉 울었을 거야."
"그랬을지도. 그날 고백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하마터면 네 흑역사가 하나 더 늘어날 뻔했으니까."
"그렇진 않다고 생각해. 흔히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하잖아?"
"반대로 하고 나서 차라리 하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하지만 그 말에 유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난 역시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하지 못했던 건 언제까지고 후회로 남으니까……"
했는데도 결국 안된 거라면 포기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유이의 눈은 내가 아닌 먼 추억 속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하지 못한 일을 그녀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거다.
"종종 그날 고백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 그날 고백했다면 힛키도 좀 더 날 의식해줬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애절한 목소리로 유이는 이어 말했다.
"그날 내가 힛키에게 고백했더라면 우리 관계는 달라졌을까?"
"……모르지."
솔직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기다려도 답이 없는 사람은 안 기다린다며, 기다리는 대신 이쪽에서 다가가는 거라고 말했던 유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백해온 유이를 떨쳐내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나를 쫓아, 유이는 분명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겠지.
다시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유이는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도 없이 홀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유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친구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도 있다.
그래,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다. 그러니 말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무의식중에 피해왔던 오랜 의문은, 유이가하마 유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말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의 괜한 걱정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흔히 그러는 것처럼 단순히 혼자 사는 게 편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너까지 잔소리냐며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나는 시시한 농담을 건넬 것이고, 우리는 웃으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조금 전 그녀가 한 말들도, 밤에 취해, 추억에 취해 말했을 뿐인, 단순한 주정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이 질문이 지뢰였다면.
결코, 밟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우정이란 믿음조차 흔들려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버릴 수 없기에, 떠날 수 없기에, 언젠가는 밟을 수밖에 없기에. 더 늦어버리기 전에 나는 확인해야 한다.
서로 함께 하는 것만이 아닌 진실한 관계라고 믿고 있기에, 나는 확인해야 한다.
"유이, 너 말이야…… 왜 결혼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유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마음이 술렁인다. 숨이 막혀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유이와 얼굴을 마주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아득한 옛날을 그리는 듯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슬퍼하는 듯한 얼굴.
이제는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없다고, 그녀는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있잖아, 만약에 내가 시즈카 선생님보다 먼저 또 힛키에게 고백했다면, 힛키는 날 선택해 줬을까?"
그 순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을, 나는 확신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그 이유를,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해하고 있다는 건 아늑하고 달콤한 환상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이해받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힛키의 옆에 있는 건 선생님이 아니라 나였을까?"
성별을 초월한 우정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과 나의 관계가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어야만 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나와 친구가 되는 게 아니었다.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주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넘어지는 운명의 동반자 관계.
계속 함께 있고 싶다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던 거다.
"……있잖아, 힛키."
마음조차 전할 수 없었던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 부부를 지켜봐 왔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상상만으로도 구토할 것 같은 그 무거움을 감히 이해하고 있노라 말할 수 없다.
그토록 커다란 아픔을, 괴로움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깨달으려 하지 않은 내게, 그녀를 친구라고 부를 자격은 없었다.
"……난 이대로 여자의 행복도 모른 채 늙어 죽게 되는 걸까?"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유이를 나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