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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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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너와 나는 이제 더는……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결국 노처녀가 되어버린 여자. 누구 못지않게 아름다울 그 꽃을 한 번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여자. 
아아, 감동적인 이야기다. 빌어먹게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드라마나 소설 속 이야기였다면 너무나도 감동적인 내용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일이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이야기도 내 눈앞의 현실이 되어버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웃음은커녕 입조차 떨어지질 않는다.

 "힛키, 나…… 역시 힛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그 어떤 말도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니, 과연 정답이 있을 런지조차 의문이다. 
무엇이 도의인지는 명백한데도 쉽사리 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힛키가 시즈카 선생님이랑 결혼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잊겠다고, 지우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유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물기를 띈 목소리는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미안해. 소름 끼치지? 결혼한 지 10년도 넘은 남자를 포기 못 하다니, 나도 미쳤다고 생각해……."
 "……."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만약 상대가 20년 지기인 유이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평생 정조를 지키며 살았다는 여인의 이야기는 미담으로서 칭송받았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평생 정조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는 과연 어떨까.  
그것이 1, 2년이라면 많은 이들이 안쓰럽게 여길 것이다. 4, 5년이라면 아직 그 깊은 사랑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10년이 넘어가면 제정신이 아니라며 모두가 혀를 내두르리라.

 "혹시 힛키가 결혼하기 전년도의 크리스마스날을 기억해? 나랑 유키농, 힛키 셋이서 파티를 하려고 했다가 힛키가 시즈카 선생님을 데려와서 넷이서 파티했었던……."

그야 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내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니까. 

 "……그래, 기억하고 있어."

유이가 내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더니 뒤로 한걸음 떨어졌다.

 "사실은 말이야…… 그날 유키농이랑 둘이서 힛키에게 고백하려고 했었어…… 시즈카 선생님이 계셔서 결국 그러지 못했지만……."
 "뭐……?"

유이와 유키노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결같이 나를 좋아해 준 유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무렵엔 유키노조차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라고 그때는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하려고 했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고백하지 못하게 일부러 시즈카 선생님을 데려왔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네." 
 "……."

그 시절의 나는 유이와 유키노 둘 중 하나와 사귀게 되면 더는 셋이 함께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어느 한쪽을 택하는 걸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조차 망가질 거라고 멋대로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감정을 깨닫지 못한척했다. 자신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한척했다. 그녀들을 친구라고 못 박고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시즈카를 파티에 데려갔던 것에 그런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대형마트 안에서 우연히 시즈카와 만나, 크리스마스날 방구석에서 홀로 눈물의 술잔을 기울이려 하는 옛 스승을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서 권했던 것뿐이었다. 그런 결과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힛키, 실은 그때 이미 시즈카 선생님과 사귀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랬구나."

유이가 작게 미소 지었다. 지독히도 씁쓸한 미소였다. 내 두 눈 너머로 오랜 추억을 그리는 듯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는 듯한 그 표정이, 내 마음을 한층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 말이야, 매일 밤 생각해. 만약 그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조금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만약 그날 뭐뭐 했더라면, 만약 그날 뭐뭐 했더라면. 
그것은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눈앞에 있는 다른 행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힛키와 내가 결혼해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힛키가 내게 잘 자라고 키스해주고, 아침에 눈을 뜨면 좋은 아침이라고 또 키스해주는 거야. 그런 신혼을 보내다가 아이가 생기고, 그래서……." 

그러나 인생에 만약이란 건 없다. 있었을지도 모를 미래 같은 건 자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순간의 달콤한 위안 후에 찾아오는 것은 깊은 허무감뿐이다.

 "그런 상상을 하고 나면, 잠시나마 외로움도 가셔서, 잠들 수 있는 거야……."

그럼에도 유이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꿈꾸는 걸 멈출 수 없었던 걸 테지. 그것이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리란 것을 알면서도, 한순간의 달콤함에 중독되어, 멈출 수 없었던 걸 테지.

 "……."

유이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시즈카 선생님의 일이 없었더라도 내가 선택받진 못했겠지만…… 상대가 유키농이었다면 나도 분명 포기할 수 있었을 거로 생각해……."

유키노라면 포기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해서 유키노가 아니면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시즈카로는 안된다고, 유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아…… 너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지……."

사랑이 무겁구나. 바다 같이 깊어서 숨이 다 막히는구나. 눈물이 나는구나.
너라면 분명 나보다 잘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네. 사회경험 제로의 전업주부보다 조건 좋은 남자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야야……."

유이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비록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조금은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조건 같은 건 상관없어. 힛키가 회사원이든 전업주부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난 그냥 힛키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날 사랑해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가식도 거짓도 없는 진솔한 말.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유이라면 어쩌면 단칸방에서 살더라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지도 모르겠다.
이런 좋은 여자는 흔치 않다. 딱히 내 친구여서 하는 말은 아니다. 유이 같은 여자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난다. 
그래서 더더욱 안타깝다. 이런 좋은 여자가 나 같은 거에 얽매여 행복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시들어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안타깝고 슬프다. 

 "……야, 유이."
 "……응."

오래전 유이가 말했다. 샤브레를 도와준 게 계기가 되어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내가 차에 치일 뻔한 샤브레를 구해준 건 21년 전이다. 그렇다면 유이는 벌써 20년도 넘게 나를 좋아해 왔다는 얘기다.
20년이다. 무려 20년이다. 반평생이 넘는 시간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의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유이가 나와 시즈카를 어떤 심정으로 지켜봐 왔는지 나는 모른다. 감히 그 심정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응."

다만, 제정신으론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만은 안다. 마음이 망가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유이가하마 유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다른 좋은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 같은 건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말에 마음을 고쳐먹을 정도라면 진작에 새로운 사랑을 찾았을 테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힛키, 나말이야. 처음에는 힛키와 한지붕 아래서 살 수 있게 돼서, 매일매일 힛키를 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어……."

유키노네 집으로 유이가 이사 온 이유. 이제 와서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근데 말이야. 역시 그것만으론 부족한가 봐…… 나도 시즈카 선생님처럼 힛키에게 안기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

서 있으면 앉아있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어지는 법이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니, 처음부터 무리한 이야기였다. 같은 집에 사는 이상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아니, 같은 집에 살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되고 말았겠지만.

 "미안해…… 욕심쟁이라……."

유이가 면목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일이 되어버린 게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그야 말할 필요도 없이 유이의 잘못이다. 내 잘못은 없다.
설령 내가 유이와 사귀고 있다가 시즈카와 바람이 났던거라 해도 도의적 비난은 받을지언정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하물며 그런 것조차 아니다. 나와 유이는 어디까지나 친구 관계였을 뿐이다. 끌어안고 키스한 일조차 없다. 
그러니 내 잘못은 아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인생을 망가뜨린 건 어디까지나 유이 본인이다. 그것에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책임을 느껴버린다. 유이의 인생이 망가져 버린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책임을 느껴버린다. 

 "저기, 있잖아. 나 친구들 사이에선 동안이라는 소리 듣는다?"
 "뭐……?"

유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있어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매 좋다는 소리도 자주 듣고, 어디 가면 아가씨란 소리도 종종 듣고 그래."
 
아니, 말 안 해도 알고 있다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 나 정도면 어, 얼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

유이의 얼굴이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이제는 자랑도 아니지만…… 나 처, 처녀고…… 가슴도 크고……!"
 "너 대체 무슨 소리를……."

자기가 한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유이의 모습은 30대가 꺾인 노처녀라는 사실도 잊게 할 만큼 귀여운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자존감이 낮고 겸손한 유이가 이렇게 자신의 외모를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경험은 없으니까 잘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힛키가 바라는 건 뭐든지 할거고……."

불안하다는듯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웃는것처럼도 보이고 우는것처럼도 보이는 묘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는 그 모습은, 마치 도게자라도 하는 것처럼 비굴하고 비참해보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제서야 나는 유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깨닫고 눈을 크게 떳다.

 "하룻밤 불장난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으니까…… 나……"
 "……그만둬! 그 이상 말하지 마!"

유이의 말을 자르듯 소리쳤다. 그 이상은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질 않는다. 유이가하마 유이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믿지 못할 것이다.

 "……."
 "……."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밤길에 오래 서 있던 탓일까,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눈앞에 있는 유이가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것도 추위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하하…… 역시 나로는…… 안되는 거구나……."

유이가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고개를 떨구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힘이 없어서, 잠시라도 눈을 떼버리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러면? 이라고 묻는 것처럼 유이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하룻밤 불장난이라니…… 소중한 친구인 너를 그런 취급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소중한 친구. 쥐어짜듯 겨우겨우 꺼낸 말이었지만, 분명 유이가 바라는 대답은 아닐 거다. 그 증거로 유이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유이, 넌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네가 소중한 것처럼 시즈카도 내게 있어 소중해. 아내와 헤어질 생각은 결코 없어."

아내인 시즈카와 헤어질 생각은 없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심이다.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헤어지자는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아니,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어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진심이 아닌 이상.

 "힛키, 난 시즈카 선생님과 헤어지라고 말할 생각 없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유이가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즈카 선생님은 내게도 소중한 분이니까."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시즈카는 우리 세 사람의 은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졸업한 후에도 셋이서 이따금 찾아뵐 정도로 특별한 선생님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유이도 아내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원망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유이의 마음을 병들게 한 하나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힛키, 나는 힛키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친구야?"
 "……한 손으로도 다 세는 많지 않은 친구 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한 친구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힛키의 특별히 소중한 친구로서 부탁할게." 

말릴 틈도 없이, 유이는 두 손을 바로 모아 내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제발 저를 안아주세요."
 "뭣!? 너……!!"

가뜩이나 추위 때문에 아픈 머리가 한층 더 지끈지끈 아파졌다.

"가끔…… 가끔만이라도 좋으니까……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충격적인 모습들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친구가 아닌 여자로서 저를 사랑해주세요."

나는 결국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쭈그려 앉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지뢰다.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밟을 수밖에 없는 지뢰밭 길뿐이다.

 "……."

유이는 여전히 내게 허리를 숙인 채였다.
야밤에 길바닥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여자. 그야 이상하겠지. 지나가는 사람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도 별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이의 부모님과 하하호호 떠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일주일은 지난 것 같다.
정말 최악이다. 앉아있는 땅바닥이 눈으로 젖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네. 안 그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엉덩이마저 축축해져 버리면 정말 울어버렸을 거다.

 "……."

여자의 자존심도 모두 집어던지고 고개를 숙인 유이. 이렇게까지 하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버리면 어떻게 돼버리는 걸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대로 함께 집으로 돌아가,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설사 그렇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겉으로 맴돌 뿐인 공허한 관계가 될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비통한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어쩌면 유이는 자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나는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약 입장을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유부녀가 된 유이나 유키노를 잊지 못하고……. 
우와, 반대로 생각해보니까 정말 장난이 아니네. 여기서 거절당하면 진짜로 속세를 떠나거나, 저세상으로 떠나는 수밖에 없다……. 

 "하하 막장이네……."

친구와는 섹스하지 않는다. 친애의 뜻으로 포옹하고 뽀뽀하는 문화권에서조차 친구와 섹스는 하지 않는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만약 그 선을 넘어버린다면, 더는 친구라고는 할 수 없겠지. 

 "하핫……."

유키노도 분명 유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정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들도, 우정이 아니라 연정이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알기 쉽다.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나니 자신의 부주의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절친을 둘이나 잃어버렸군……."

아니, 친구라고 생각하고 바랬던 건 나 혼자였으니까 그것도 아닌가. 
뭐,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친구 실격이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도 친구의 감정을 깨닫지 못한 내게, 일방적으로 이해받고 있었을 뿐이었던 내게, 그녀들을 절친이라 부를 자격은 없겠지.
아스팔트 땅바닥을 집고 천천히 일어나 먼지 묻은 손과 엉덩이를 털었다.

 "……유이, 그만 가자."
 "……우읏…… 흑…… 크흣……."

어차피 밟을 수밖에 없는 지뢰라면,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나중에 밟는 편이 낫겠지.

 "러브호텔이 역 근처에 있었던가?"
 "……어?"

그제야 유이는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했을 화장도 이제는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응!"

가끔 내킬 때만이라도 좋다. 하룻밤 불장난이라도 좋다. 거짓말이라도 좋다. 그러니까 사랑해달라. 안아달라.
유이, 너는 정말 그런 걸로 괜찮은 거냐? 아내와 헤어지고 결혼해달라는 거라면 차라리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그런 걸로도 행복을 느낀다면…… 그걸로 좋은 거겠지…….


×         ×         ×


시즈카가 아닌 유이를 택함으로써 나는 얼마간의 유예를 얻었다. 
이 유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른다. 내일이면 끝날지도 모르고, 내년까지도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가 됐든 분명 끝은 찾아올 것이고, 그날이 오면 나는 선택을 뒤로 미룬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우응…… 힛키……."

코알라처럼 내 팔에 꼭 붙어 자는 유이가 잠꼬대로 나를 불렀다.
자면서까지 나를 찾다니 대체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 거냐고…….
잠든 유이의 얼굴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나는 안쓰럽고 사랑스럽고 원망스러운 옛 친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친구 관계가 하룻밤 만에 훌륭한 불륜 관계가 되어버렸구나."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혹시 넌 알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네 애인 행세를 할 사람으로 나를 꼽은 건 유키노였지…… 어쩌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걸지도.

 "하아……."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시즈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오랜만에 말살의 라스트 불릿을 날리려나?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눈물샘이 많아졌으니까 어쩌면 이전에 이혼하자는 말을 했을 때처럼 펑펑 울지도 모르겠다.
하아…… 도게자로 빌면 한 번 정도는 용서해주려나…… 그래도 지금까진 좋은 남편이었으니까 한 번쯤은 용서해줄지도 모르겠네. 
문제는…… 한번만으론 끝날 것 같지 않는다는 거지만…….

 "앞으론 주부의 프로라고도 못하겠군……."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한들 불륜을 정당화할 순 없다. 그것은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며 범죄이다. 
설령 마음이 병든 유이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해도, 나는 시즈카를 위해 그녀를 뿌리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20년이란 시간 동안 유이가하마 유이는 내게 있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아내만큼이나 소중한 그녀를 나는 결국 잘라버릴 수 없었다.
그런 내게, 남편이 지켜야 할 도리와 의무를 지키지 못한 내게, 더는 주부의 프로를 자칭할 자격은 없겠지.

 "……."

앞으로도 나는 유키노와 유이가 있는 그 집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집은 내 마음의 안식처인데……! 오아시스인데……! 
하기야 거긴 우리 집도 아니지만.

 "아…… 토츠카가…… 토츠카가 보고 싶다……."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도 기억 안 나는 눈물이 흘러버린 건 분명 토츠카가 그립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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