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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원작 |

13화. 유이!! 너 혹시 이사했어!?


<유이 방>

부르르르르

유이: 아, 유미코다.  스슥

유이: 여보세요. 유미코? 

유미코 [유이!! 너 혹시 이사했어!?]

유이: 어, 어!? 가, 갑자기 왜 그래? 

유미코 [왜 그래고 뭐고 너한테 택배로 보낸 화장품 세트 주소지 불명으로 반송됐거든!!]

유이: 앗…… 미, 미안……

유미코 [이사를 했으면 했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우리 신제품 나오면 써보고 싶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이게 지금 뭐하는 건데?]

유이: 우으…… 진짜로 미안해……

유미코 [후우― 그래서? 이사는 언제 간 건데?]

유이: ……작년 12월 중순에.

유미코 [하아!? 12월이면 벌써 3개월 전이잖아!] 

유이: 미, 미안! 깜빡했어!

유미코 [……뭐, 됐어. 바뀐 주소나 불러봐. 다시 보내줄 테니까.]

유이: 으, 응! 주소는 치바현 치바시…… 아……

유미코 [응? 왜 그래?]

유이 (지금 주소를 가르쳐줘도 괜찮을까……? 유키농네 집에서 힛키랑 시즈카 언니랑 넷이서 같이 살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 못하고…… 설마 들키는 건 아니겠지……? 우으……) 

유이: 아, 아무것도 아냐! 주소는 치바현 치바시(중략)

유미코 [응? 뭐야, 전에 살던 곳보다 우리 집에서 가까워졌잖아. 진작에 좀 말하지.]

유이: 아하하…… 요즘 정신이 좀 없었거든.

유미코 [유이, 주말에 언제 시간 되는 날 있어? 히나도 불러서 집들이나 갈까 하는데.]

유이: 어!? 아, 아냐아냐! 안 와도 돼!

유미코 [뭐, 뭐어……? 설마 나랑 히나가 가는 게 싫은 거야……?]

유이: 어!? 아냐아냐! 그런 게 아니라…… 싫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있거든…… 

유미코 [같이 산다고!? 유이, 너 드디어 남자가 생긴 거야!?]

유이 (우으…… 남자가 생겼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상대가 힛키라고 말하면 유미코 분명 폭발하겠지?)

유이: 그게 아니라 실은 지금 유키농이랑 같이 살고 있어.

유미코 [하아!? 왜 네가 유키노시타랑 같이 사는 건데? 걘 진작에 결혼한 거 아니었어?]

유이: 실은 유키농 작년에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었거든…… 여자 혼자 살기 불안하기도 하고, 적적하기도 해서 그래도 둘이 같이 살게 됐어……

유미코 [후우…… 저기 말이야 유이. 너 결혼은 포기한 거야? 평생 혼자 살다 죽을 거야?]

유이: 아, 아니 난……

유미코 [이 나이에 여자랑 동거한다는 건 사실상 결혼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거든?]

유이: ……

유미코 [나 말이야,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유이 너 설마 아직도 히키오를 못 잊어서 그러는 거야?]

유이: ……

유미코  [유이 너 요즘도 히키오랑 만나는 것 같던데 진짜로 그런 거야?]

유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결혼에 흥미가 없는 것뿐이야.

유미코 [그 말 진짜야?]
 
유이: ……응.

유미코 [……그렇다면 됐어. 요즘은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어중간한 남자랑 결혼할 바엔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유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미코 [하지만 말이야, 만약에 진짜 히키오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이젠 그만 잊어버려. 언제까지 그럴 건데? 걔는 히라츠카 선생님이랑 결혼한 지 벌써 10년도 넘었잖아?]

유이: ……

유미코 [나 유이라면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유이는 동안이라서 아직 30대 초로 보이고. 하지만 앞으로 2년이면 우리도 40이라고. 40대가 돼버리면 그때는 진짜로 늦어버리니까.]

유이: ……그러네. 이제 곧 40이네. 아하하, 우리도 이젠 늙어버렸구나.

유미코 [하아? 난 아직도 탱탱하거든?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할망구라도 된 것 같잖아!]

유이: 아하하, 미안미안.

유미코 [그건 그렇고 유이 너 이번 동창회 나올 거지?]

유이: 아…… 미안, 이번에는 못 나갈 것 같아.

유미코 [뭐야, 요즘 그렇게 바빠? 토요일 저녁에 한다는데 시간 안나?]

유이: 우음…… 못 나간다기 보다는…… 나가기 싫다고 할까? 아하하……

유이 (우리 반에서 아직도 결혼 안 한 여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나가봐야 분명 비참한 기분만 들 테고……)

유미코 [하아…… 나 다음날 일요일에 쇼핑하러 갈까 생각 중인데.]

유이: 으, 응! 그건 갈게. 
 
유미코 [아, 유이, 동창회 얘기 히키오에게도 전해줘. 하야토가 히키오를 보고 싶어하더라고. 히키오의 연락처를 아는 건 너 정도니까.]

유이: 하야토가? 음― 분명 안 나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말은 해볼게.

유미코 [그래, 알았어. 난 슬슬 저녁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끊을게. 다음에 보자 유이.]

유이: 응, 그럼 다음에……          

하치만: 유이―! 저녁 다 됐다―!

유이: !?  

유미코 (응? 지금 남자 목소리가……)

유이: 다음에 봐!    

유이 (유미코, 지금 힛키 목소리 들었을까? 괜찮겠지……?)



<​거​실>​

유이: 힛키, 있잖아. 이번에 2학년 F반 동창회를……

하치만: 어, 안가.

유이: 대답 너무 빠른 거 아니야!?

하치만: 내가 그런데 안 갈 거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나가봐야 좋은 소리도 못들을 텐데 뭐 좋다고 그런 델 가겠냐?

유키노: 그래, 유이. 애당초 하치만은 초대받지도 못했는데 동창회에 나가라니 너무 가혹하잖니.

하치만: 초대받지 못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유키노: 어머, 나는 초대는 언제나 받고 있어. 그저 가지 않는 것뿐이야.

하치만: 아 그러십니까……

유이: 실은 하야토가 힛키를 보고 싶어 하나 봐.

하치만: 엥? 하야마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유이: 응, 유미코가 그러더라고. 저번 동창회 때도 나한테 힛키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봤었고.

하치만: 난 딱히 보고 싶지 않다만……

어떻게 지내는지 문뜩 궁금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동창회 같은 데를 나가서 직접 대면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만나지도 않은 사이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테지.

유키노: 하야마라……

하치만: 응? 아, 그러고 보니 하야마네 아버지가 너희 집 전속 변호사였었지. 넌 지금도 하야마랑 얼굴 보고 그러냐?

유키노: 결혼해서 집을 나간 후로는 부모님의 얼굴도 제대로 안 봤는데 그럴 리가 없잖니. 

하기야 유키노는 하야마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럴 리도 없겠군.

유이: 힛키, 힛키는 이번에도 안 나갈 거야? 아마 사이도 올 거로 생각하는데.

하치만: 안가. 토츠카는 굳이 동창회 같은데 나가지 않아도 마음먹으면 만날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런 건 두 번 다시 나가지 않겠다고 진작에 다짐했거든.

유이: 응? 두 번 다시? 힛키 동창회 나가본 적 있었어?

하치만: 예전에 시즈카의 부부동반 동창회에 나갔던 적이 있다. 

유이: 힛키가 부부동반 동창회에…… 헤에~ 그렇구나~

유키노: 자의가 아니었다곤 해도 네가 그런 곳엘 나갔었다니 의외네.

하치만: 그동안 무시당하고 동정받았던 서러움을 떨쳐버리고 싶다고 우는 얼굴로 부탁하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냐. 

유이: 시즈카 언니 우는 얼굴로 부탁한 거구나……
 
유키노: 훗…… 그래, 연상의 누님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웠겠구나.

하치만: 야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야말로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결국, 시즈카도 놀림만 잔뜩 받았고.

13살이나 어린 제자에게 손을 대다니 교사 실격이라느니, 도둑년이 따로 없다느니, 젊은 남편 덕분에 원기보충 좀 했겠다느니 정말 별별 소리를 다 들었었지…….

유이: 아하하, 힛키는 시즈카 언니보다 13살이나 어리니까 언니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5살만 어려도 능력 있다고 놀림당하는걸.

하치만: 뭐, 그건 그렇지.

13살이나 어려서 놀림당한 건 사실이지만, 그 덕분에 본래라면 비웃음당했을 전업주부라는 내 직업도 '이렇게 젊은 애랑 결혼했으면 당연히 네가 먹여 살려야지!'라며 농담처럼 넘어갔었다.
만약 내가 시즈카와 동년배거나 연상이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 분명 자다가 이불을 걷어찰 정도로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남자 전업주부에게 각박하니까.

하지만 그 끔찍했던 부부동반 동창회도 이번에 한다는 2학년 F반의 동창회와 비교하면 아마 양반일 것이다.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다.

내가 무시당하고 놀림당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시즈카의 얘기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좋은 안줏거리도 없으니까. 그리고 시즈카가 안줏거리처럼 씹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내 분노게이지는 분명 MAX까지 치솟아버릴 테지.

유이: 우음― 힛키는 역시 안가는 건가. 힛키가 가면 나도 갈까 생각했는데.

하치만: 엥? 너 동창회 안 나가는 거냐?

유이: 이번엔 나도 안 가려고.

하치만: 모임이란 모임은 다 나가던 네가 그런 데를 안 나가다니 별일이네.

유이: 나가봐야 좋은 소리는 못들을 테니까. 우리 반에서 아직도 결혼 안 한 여자는 나뿐이고……

하치만: 그, 그렇군……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의 경우는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모임 내에서 지위가 달라질 정도니까 말이지. 유이는 교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기인이었고, 지금도 동년배와 비교해서 젊고 예쁘니까 골드미스라고 둘러대면 무시당하거나 동정받는 일은 없겠지만, 사실은 결혼하고 싶었는데 못한 거니까 일부러 안 한 거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괴로울 거다.
남편과 자식 자랑을 듣는 것도,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네가 부럽다며 신세 한탄을 듣는 것도 분명 비참한 기분이 들 테지. 그야 가기 싫어할 만도 하다.

유키노: 다른 사람들이 뭐라든 신경 쓸 필요 없어. 결혼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 

유이: 유키농……

하치만: ……

유키노: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복을 손에 넣으면 돼.  

유이: ……응, 그러네. 결혼 같은 거 하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유키농과 힛키와 그리고 시즈카 언니와 사이좋게 함께 살 수 있으면 난 그걸로 충분해.

하치만: ……

사이좋게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더는 바랄 게 없지만 시즈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시점에서 그런 건 무리다. 겉으로 아무리 정답게 웃고 떠든들 결국은 가식에 불과하다. 그조차도 분명 길지는 않겠지…….

유이: 아, 맞다! 힛키, 좀 있으면 결혼기념일이지?

하치만: 응?

유키노: 그러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었으니까 슬슬 ​결​혼​기​념​일​이​겠​구​나​.​

하치만: 아,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결혼기념일이었네. 깜짝할 뻔했다.

유이: 쫌! 중요한 날이니까 제대로 기억하라고! 설마 여태껏 결혼기념일 안 챙겨줬던 거야!?

하치만: 아니, 잠깐 잊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결혼기념일은 매년 제대로 챙겨줬다. 평소보다 특별히 신경 쓴 저녁 식사와 평소보다 비싼 고급 맥주를 대접해줬다고.

유이: 결혼기념일에 맥주!? 뭐야 그게!

유키노: 와인을 마신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결혼기념일에 맥주를 마신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봤어…… 언니답다면 답지만……

하치만: 시즈카는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하니까 상관없잖아.

유이: 그거 말고 달리 한 건 없어? 꽃다발이라든가, 촛불이라든가 여러 가지 있잖아?

하치만: 훗, 네 눈엔 내가 촛불켜고 꽃다발을 안겨주는 이벤트 같은 걸 할놈처럼 보이냐? 

유이: 그야 그렇진 않지만!

유키노: 그런 말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하다니 정말 너답구나……

하치만: 야야, 꽃다발이나 촛불 같은 건 안 켰지만, 선물은 제대로 챙겨줬다고.

유이: 진짜? 하긴 힛키는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잘 챙겨주니까.

하치만: 뭐, 시즈카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서 산거지만.

유키노: 결혼기념일 선물 정도는 스스로 번 돈으로 사주렴……

하치만: 전업주부의 노동가치는 월 20만 엔이니까 사실상 정당하게 일해서 번 돈이나 마찬가지라고.

유키노: 또 그런 궤변을…… 뭐, 내게 받는 가정부 월급은 네가 정당하게 일해서 번 돈이니까 올해는 그 돈으로 사주렴.

유이: 힛키, 올해는 좀 결혼기념일다운 분위기 좀 내봐! 사실은 시즈카 언니도 근사한 레스토랑 같은 데서 같이 와인을 마신다든가, 분위기 있게 촛불로 꾸민 하트 안에서 장미 꽃다발을 받는다든가 하고 싶었을 거라고!

묘하게 구체적이군…… 혹시 해보고 싶었던 건가…….

하치만: 아니, 근데 우리 결혼기념일 가지고 왜 너희가 더 난리인 건데? 

유이와 유키노의 입장에서는 내가 시즈카와의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모습이 탐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씁쓸해하거나 우울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결혼기념일 얘기를 먼저 꺼내며 좀 더 챙겨주라는 말까지 해오니 조금 당황스럽다.

유이: 시즈카 언니는 친언니 같은 존재니까 당연하다고.

유키노: 그래, 친언니보다 더 소중한 언니니까.

하치만: …………

뭐지……? 농담이나 비꼬는 의미로 한 말 같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도 없다. 친언니처럼 소중하다니, 도저히 그 '소중한 언니'의 남편인 나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그녀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최근 유이와 유키노는 이런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곤 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들을 마음이 지금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하기야, 그녀들의 괴로움도 눈치채지 못한 내가 뭘 알겠느냐마는…….

……뭐, 그녀들의 진의야 어쨌든 유이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평소 보이는 모습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시즈카는 의외로 여성스러운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지. 할리퀸 소설도 좋아하고. 한 번도 내색은 안 했지만 어쩌면 그런 MAX 커피처럼 달달한 이벤트를 원했을지도 모르지.

하치만: ……

그렇다곤 해도 나이 50의 아내에게 그런 젊은 감성의 이벤트를 해주는 것도 어떨까 싶다만…….

하치만: 뭐, 지금까지 한 번도 해준 적 없었으니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유이: 그렇다고~ 시즈카 언니도 분명 기뻐할 거야~

유키노: 그래, 가끔은 그런 진부한 애정표현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치만: 근데 이벤트라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온다만. 대충 하트 모양으로 촛불이라도 늘어놓으면 되는 거냐?

유이: 우음― 힛키에게는 너무 난이도가 높으려나? 아! 그래! 그러면 전문업체에 맡기는 건 어떨까?

하치만: 전문업체?

유이: 결혼기념일이나 프로포즈 등을 도와주는 전문업체도 있거든. 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 예쁘게 풍선도 달아놓고, 촛불도 준비해주고, 꽃도 준비해주고, 현수막도 달아준대.

하치만: 별것이 다 있군. 세상 참 편리해졌네.

유키노: 풍선과 촛불과 꽃다발을 준비하는 정도의 일에 굳이 돈을 들여 업체를 쓸 필요가 있나 싶은데……

유이: 기왕이면 힛키가 전부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만 잘할 자신이 없다면 전문업체에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흐음, 전문업체라…… 굳이 그런데 의뢰하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알아보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도 되겠지.



― 며칠 후 ―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늘은 16번째 결혼기념일. 10주년도 20주년도 하다못해 15주년도 아닌 애매한 숫자지만 어찌 됐건 특별한 날이다.

그 후 하룻밤 곰곰이 생각한 결과, 결혼기념일 이벤트는 전문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전문업체에 맡겨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즈카의 눈을 피해 준비하기도 쉽지 않고, 집을 꾸미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돈을 생각해보면 크게 비싼 건 아니다. 돈 아끼겠다고 어설프게 하느니 차라리 좀 더 돈을 들여서 제대로 하는 게 낫겠지.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축하하는 것도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고.

모처럼 거창하게 하는 거기도 하고, 결혼기념일이라고 유키노에게 보너스까지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다. 시즈카와 나의 이름이 새겨진 이니셜 커플링이다. 무려 6만 엔이나 들었다. 이벤트 전문업체에 들인 돈까지 합치면 거의 8만 엔 가까이 쓴 셈이다. 실로 나답지 않은 짓이지만, 시즈카가 좋아하는 할리퀸 소설적으로 생각해서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삑삑삑 철컥

하치만: 엥?

유키노: 다녀왔어.

하치만: 어, 어어. 어서 와. 근데 아직 3시도 안 됐다만……

유키노: 적당히 둘러대고 나왔어. 모처럼의 결혼기념일이니까 저녁이라도 차려주고 싶었거든.

하치만: 적당히 둘러대면 이 시간에 퇴근할 수 있다니 너 진짜 대단하구나…… 근데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가뜩이나 결혼기념일이라고 보너스까지 받은 판국에 저녁까지 차리게 하는 건 너무 미안하다고.

유키노: 그건 시즈카 언니를 위해 한 거고, 저녁은 너를 위해 해주려는 거야.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시즈카 언니만이 아니니까. 

하치만: 어, 어어 그렇군…… 고맙다 유키노. 

유키노: 게다가…… 하지 않은지 벌써 보름은 지났으니까.   싱긋

하치만: …………



― 한 시간 후 ―

유키노: 그러면 나도 씻고 올게.

하치만: 어. 아, 4시에 업자가 오기로 했으니까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들어가라.

유키노: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하치만: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다만……

유키노: 후훗.    총총

하치만: ……

결국, 저질러 버렸다. 평일 대낮부터, 그것도 하필이면 결혼기념일에 다른 여자와 정사를 나누다니…… 확실히 외도군…….

처음으로 유이와 잤을 때는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란해서 좀처럼 서지도 않았었는데, 이제는 별다른 노력없이도 자연스럽게 서버린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도 점점 엷어져만 간다. 이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거다.

사실은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마음이 병든 유키노와 유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전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게 거짓 없는 사랑을 쏟아내는 그녀들에게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으니까. 2년도 아니고 20년을 나만 바라봤다니, 보통은 질겁하고 내뺄 정도로 무거운 사랑이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나는 오히려 기쁨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들과 몸을 겹치는 시간이 어느새 괴롭지만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 내게 더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할 자격은 없다.

하치만: …………

딩동―

하치만: 아, 왔나 보군.

하치만: 네―

???: 안녕하세요! 러벤트입니다! 히키타니 하치만 고객님 맞으시죠?

하치만: ……아, 네 맞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집에 히키타니라는 녀석은 없다고…….

히키가야라는 이름이 그렇게 읽기 어렵나? 이름을 잘못 불리는 건 비단 이번만의 일이 아니다. 택배원들도 종종 히키타니라고 잘못 부르곤 한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인데 일일이 정정하는 것도 귀찮다 보니 적당히 넘겨왔지만, 역시 히키타니라고 불리는 건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서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안 든다.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던 학창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을 잘못 부르는 녀석들과는 대체로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이제 와서 만나봐야 좋은 일은 없을 테고, 행여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

뭐, 일부러 동창회 같은 걸 나가지 않는 한 이제 와서 만나는 일은 없겠지.

똑똑똑

하치만: 네―   철컥

???: 안녕하세요! 러벤트…… 응?

뭐야, 이 인간. 왜 남의 얼굴을 뚫어지라 보는 건데? 혹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 ……이름을 보고 설마 했는데 진짜로 히키타니였구나!

하치만: 엥……?

???: 나야 나! 기억 안 나?

하치만: …………

나야나 사기냐? 그걸로 어떻게 알라는 건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를 히키타니라고 부르고 일부러 아는 척을 한다는 점에서 짐작 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 기억 안 나? 히키타니 너무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토베라고. 같이 캠프도 가고, 고백하는 것도 도와주고 그랬었잖아~

하치만: ……어, 어어. 오랜만이구나.

뭐야 이거…… 몰래 카메라? 몰래 카메라야? 날 놀래주려고 일부러 섭외해온 거야?

토베: 오랜만이야! 소부고를 졸업한 후로 처음이지?

하치만: ……그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이네.

토베 카케루.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녀석과는 몇 번이나 얽혔었으니까.

토베: 히키타니는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네. 한눈에 알아봤어.

하치만: ……그러는 너는 제법 인상이 달라졌구나. 머리도 검은색이고.

토베: 그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회인이니까 당연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금발은 무리라고~

하치만: ……그것도 그렇군.

내 기억 속의 토베는 금발에 장발에 생각 없고 시끄러운 녀석이었으니까 말이지. 많이 변했구나. 하기야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거다. 뭐, 시끄러운 점은 변함없는 것 같지만…….

토베: 히키타니는 히라츠카 선생님이랑 결혼한 거 맞지?

하치만: ……어, 맞아.

이런 식으로 고등학교 동창과 재회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몇 개나 되는 사이트에서 적당히 고른 게 하필이면 이 녀석이 일하는 곳이었다니…… 최악이다…… 정말 최악이다…… 이런 우연은 필요 없다고…….

토베: 선생님은 잘 계셔? 

하치만: 어. 뭐…… 건강하게 잘 있어.

토베: 히키타니가 히라츠카…… 아니지, 히키타니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선생님이랑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무슨 농담인가 싶었는데 진짜로 선생님이랑 결혼했구나~ 

하치만: …………뭐, 그렇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잘도 알고 있군.
하기야 우리 결혼식 때는 시즈카의 제자들이 제법 왔었으니까 소문이 났었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학창시절 당시 최고위 카스트에 속해있었고, 가십거리에 민감한 토베가 알고 있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토베뿐만이 아니라 아마 동창회에 나갔던 녀석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교내 제일의 미움받는 사람과 미인 노처녀 여교사의 결혼. 이런 좋은 안줏거리도 흔치 않으니까.

토베: 선생님이랑 결혼한 지 10년도 넘었는데 이런 이벤트를 해주는 걸 보니 아직도 뜨겁나 봐~

하치만: …………

마흔을 눈앞에 둔 나이에 아내에게 이런 젊은 감성의 이벤트를 해주려는 걸 친하지도 않은 동창에게 들키다니 장난 아니게 민망하네…….

토베: 그건 그렇고 히키타니 진짜 멋지다! 나는 이런 일을 하면서도 아내한텐 이런 이벤트 잘 안 해주거든. 

하치만: 아니,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만……

토베: 그래? 그래도 대단하다고~ 선생님 이젠 50 가까이 되시지? 결혼한 지 한참 된, 그것도 50에 가까운 아내를 위해 이런 이벤트를 해주는 건 아무나 못 한다고~

하치만: ……그러냐.

야야, 오십오십 거리지 말라고. 확실히 시즈카는 폐경기까지 온 50의 나이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아마 그냥 별 생각 없이 하는 악의 없는 말일 테지만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다.

토베: 그나저나 히키타니네 집 진짜 좋네~ 나, 이 일 하면서 이집저집을 다 가봤지만 이렇게 넓고 좋은 집은 별로 없었거든. 선생님 월급으로는 무리일 테고, 히키타니가 돈 많이 버나 봐? 

하치만: 어, 어어…… 뭐, 그냥……

토베: 히키타니는 무슨 일 해? 평일인데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걸 보니 오늘은 쉬는 날인가 봐?

역시 묻는 건가…… 전업주부를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해서 그다지 말하고 싶진 않다. 남녀가 거의 평등해진 지금도 남자 전업주부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으니까. 같은 전업주부 여자들조차 은근하게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판국에 밖에서 돈을 벌고 있는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한 것이다. 은근히 무시하거나, 부러움을 가장한 조소를 보내거나,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리겠지. 어느 쪽도 유쾌한 반응은 아니다.

하치만: 아니, 난 전업주부를 하고 있다.

토베: 전업주부? 헤에~ 그래? 전업주부라니 부럽다~ 나도 일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치만: ……아 뭐, 그렇지.

전업주부라고 해서 딱히 편하게 노는 건 아니거든? 그야 밖에 나가서 일하는 노고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전업주부도 제대로 임하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나의 경우는 양육할 자식이 없다 보니 비교적 편한 부류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편하게 노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난 전업주부로서 가사도 내조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뭐, 이런 소릴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토베: 근데 전업주부면 한가하지 않아? 히키타니 한 번도 동창회에 안 나오길래 엄청 바쁜 줄 알았거든. 

나가봐야 잘근잘끈 씹히고 무시당하고 소외당할 게 뻔한데 너 같으면 나가겠냐?

하치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토베: 그래? 그래도 이번엔 나올 거지? 나도 그랬지만 하야토도 히키타니가 보고 싶은 모양이더라고.

하치만: 엥? 그래?

하야마는 어쨌든 이 녀석까지 날 보고 싶어 했다니 의외군. 아마 깊은 의미는 없는 립서비스로 하는 말이겠지만.

토베: 그렇다고~ 실은 내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건 히키타니의 영향도 있으니까.

하치만: 뭐?

토베: 고등학교 때 내가 히나에게 고백하려는 걸 히키타니가 도와줬었잖아? 실은 나 그때 엄청 감동했었거든. 사이가 좋지도 않았던 히키타니가 내 일처럼 열심히 도와주는 게 엄청 기뻤달까?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싶어졌거든. 

하치만: …………

토베: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건 그게 계기였다고 생각해. 

하치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만. 마지막엔 오히려 방해나 했고.

토베: 에이~ 그렇지 않아. 나 그땐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치만: ……그런가.

딱히 도움을 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토베가 에비나와 사귀게 되는 일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베가 내가 도와줘서 기뻤다고 생각한다면…… 나쁜 기분은 아니다.

하치만: 토베, 미안한데 바로 작업 시작해주면 안되겠냐? 한 시간 반 정도 후면 시즈카가 집으로 돌아오거든.

토베: 아, 그렇겠네. 미안미안! 바로 시작할게.

좋지 않다…… 위험한 상황이다…… 동창이라고 해도 얼굴과 이름 정도나 아는 오다와 타하라? 같은 애들이었다면 그다지 문제 될 게 없었겠지만, 이 토베는 위험하다…….

토베와는 친구라고 부를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몇 번인가 같이 어울린 적이 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고백하는 걸 도와준 적도 있다. 그렇다 보니 동창 대부분을 기억도 못 하는 내가 이 토베는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토베도 분명 마찬가지일 테지.

그리고 그 고백 의뢰를 기억하는 토베는 의뢰를 도운 봉사부의 다른 두 명도 물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같은 팸이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유이와 교내 제일의 미소녀로 유명했던 유키노. 나를 기억하는 것처럼 당연히 토베는 유키노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거다. 내가 시즈카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는 토베가 유키노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유키노는 지금 이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욕실은 거실에 있기 때문에 유키노가 욕실에서 나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토베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같은 동아리였던 유키노가 공휴일도 뭣도 아닌 이런 평일에, 그것도 시즈카가 없는 시간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토베가 어떤 결론을 도출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치만: ……엄청 빠르네.

토베: 그야 이 일을 한 지도 10년은 됐으니까. 나름 프로라고~

토베가 갈 때까지 욕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몰래 유키노에게 메일을 보내는 게 베스트겠지만,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사는 유이라면 또 모를까, 유키노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갔을 거라곤 기대하기 힘들다.

워낙 방음이 잘되는 집인지라 지금 이 집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토베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 집에 방문한 업자가 토베라는 사실을 유키노가 눈치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치만: …………

어쩔 수 없군. 욕실에 들어가서 토베가 갈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전해두자. 욕실 문을 열게 되면 샤워하는 소리 때문에 누군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토베에게 들키게 되겠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다. 혹시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동생이 놀러 와서 씻고 있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겠지. 한 시간 가까이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상황에서 토베를 유키노와 대면시키는 것보다는 백배 낫…….

유키노: 후우……  철컥

토베: 응? 다른 사람도 집에 있었……어라……?

하치만: …………

토베: ……혹시 유키노시타?

유키노: 네? 누구신지……?  갸웃

토베: 유키노시타 맞지? 나 같은 소부 고등학교에 다녔던 토베인데. 그 왜 같이 치바캠프도 가고, 디즈니랜드도 갔었던.

유키노: …………그러네.

하치만: …………

토베: 이야~ 오랜만이야. 근데 왜 유키노시타가 이런 시간에 히키타니네 집에? 게다가……

​…​…​…​…​최​악​이​다​…​…​…​…​

유키노: …………

토베: 아…… 그…… 나 혹시 보면 안 될 걸 본 건가? 아하하……

이 녀석 절대로 불륜현장을 목격했다고 생각하고 있군. ……뭐, 틀린 건 아니지만.

후우,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돼버린 이상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그나마 나을 거다.

하치만: ……아니,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거 아니니까.

토베: 응?

하치만: 실은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유키노시타네 집이거든.

유키노: …………

토베: 뭐? 어? 히키타니 혹시 선생님이랑 이혼하고 유키노시타랑 재혼한 거야?! 

하치만: 그런 게 아니라 실은 나와 시즈카는 지금 유키노시타네 집에 신세를 지고 있거든.

토베: 엥? 어째서?

하치만: 보증을 섰다가 재산을 다 날려 먹었거든.

토베: 켁! 진짜로!?

유키노: ……그래. 그래서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같이 살자고 내가 말했어. 은사인 시즈카 선생님과 친구인 히키가야가 길바닥에 나앉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토베: 진짜냐……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유키노시타 진짜 대단하다~ 

유키노: ……이 집은 워낙에 크니까. 방 하나 내주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치만: 아무튼 부끄럽지만 그렇게 된 거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토베: 시, 싫다~ 별로 이상한 생각 같은 거 안 했다고~

이 녀석 절대로 생각했군…….

유키노: 그러면 난 그만 방에 들어가 볼게. 

하치만: 어, 그래.

토베: 아, 나도 이제 진짜 일해야겠다. 다섯 시까지는 끝낼 테니까 걱정 마 히키타니.

하치만: 어, 어. 그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분위기를 봐선 토베는 지금도 입이 가벼울 것 같다. 때마침 이번에 동창회가 있다니 나와 시즈카가 유키노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은 술자리의 안줏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던 사실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섣부르게 입막음을 하려고 했다간 오히려 그럴 생각도 없던 토베의 호기심을 자극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일 수밖에.

후우…… 왜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되는 거냐고…….



― 한 시간 후 ―

토베: 휴우― 히키타니, 다 끝났어!

하치만: 오. 수고했어.

한 시간 동안 토베의 손길을 거친 거실은 정말 그럴싸하게 변해있었다.

천장과 벽에 예쁘게 장식된 풍선들과 현수막, 바닥에 하트모양으로 놓인 촛불과 붉은 장미 꽃송이들, 그리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조명.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프로의 솜씨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적당히 흉내 냈다면 분명히 이 정도로 그럴싸한 분위기는 내지 못했을 거다.

토베: 그러면 히키타니, 난 이만 가볼게. 결혼기념일 축하하고, 선생님께도 축하한다고 전해줘. 유키노시타도 잘 지내.

하치만: 그래, 고맙다.   

유키노: 수고했어. 조심히 가렴.

토베: 아 맞다. 이번 주 토요일에 2학년 F반 동창회가 있는 거 알지? 올해는 히키타니도 나오라고~

하치만: ……글쎄다. 생각해볼게.

토베: 시간 되면 꼭 오라고. 히키타니가 오면 나도 하야토도 기쁠 거야.

그보다는 에비나가 더 기뻐하지 않을까 싶다만…….

하치만: 어, 어어……

토베: 그럼 진짜로 가볼게. 잘 지내~   철컥 탕

유키노: 그렇다는구나. 의외로 인기 있네.

하치만: ……그럴 리가 있겠냐. 저런 건 그냥 립서비스로 하는 말이라고. 

그렇다곤 해도 의외였다. 토베가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내게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정말로 의외였다.

하치만: 유키노, 너도 저녁 만드느라 수고했어. 고맙다.

유키노: 별거 아니야. 꼭 오늘 같은 날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면 이 정도는 언제든지 해줄 수 있어.   

하치만: 그, 그러냐……

나는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너무 기특해서 눈물이 다 나오는군. 하지만 그래서야 가정부가 아니라 ​기​둥​서​방​이​니​까​…​…​.​

유키노: 그건 그렇고 정말 그럴싸하게 변했구나. 유이가 전문업체에 맡기라는 얘기를 했을 땐 솔직히 회의적이었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

하치만: 그러게. 토베를 만나게 된 건 상정 외였지만.

유키노: 그러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

하치만: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유키노: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사는 걸 들킨 것 말이니?

하치만: 어. 솔직히 위험했어. 시즈카도 같이 있었다면 모를까, 이런 평일날 둘만 있는 모습을 보여버렸으니까. 게다가 넌 이런 애매한 시간에 샤워까지 하고 나왔고. 어떻게 봐도 불륜현장이라고. 사정을 설명해서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지만 진짜로 위험했다.

유키노: 그러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니.

하치만: ……그러니까 위험한 거라고. 소문이 퍼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나도는 소문이 시즈카와 유키노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까지 퍼질 리는 없겠지만, 왜곡돼버린 소문이 시즈카의 귀에까지 닿을 가능성은 있다.

회사에 출근했을 유키노가 이런 애매한 시간에 집에 있었고,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는 사실이 시즈카에 귀에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 너무나도 수상쩍다. 불륜을 의심하기엔 충분한 이야기다.

유키노: 하치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떠들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니까.

하치만: 뭐? 아니, 그건 아니지……

유키노: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니까.

하치만: …………

너는 언제부터 그렇게 긍정적이고 태평한 녀석이 된 거냐…….

뭐, 토베의 입에서 나온 소문이 시즈카에게까지 닿아서 시즈카가 우리의 불륜을 의심하는 건 그야말로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겠지. 아마도…….

유키노: 그보다 하치만, 시즈카 언니가 오기 전에 연습이라도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니?

하치만: 뭐? 연습이라니?

유키노: 이렇게 집을 꾸몄을 정도니 언니가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겠다고 계획한 게 있을 거 아니니.

하치만: 아니, 딱히 계획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없는데…… 그냥 현관에서부터 시즈카의 손을 잡고 이 하트 장식까지 안으로 들어와서 반지를 끼워주는 게 전부다. 그 후에는 네가 준비해준 저녁을 먹는 거지.

유키노: 그러네. 계획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할 건 없구나. ……하지만 간단한 일이라도 처음으로 하는 일은 미리 연습을 해두는 게 좋은 법이니까.

하치만: …………

아, 예…… 이해했습니다…….

뭐, 시즈카가 돌아올 때까지 적어도 30분은 여유가 있으니 괜찮으려나…….

하치만: 미안한데 유키노, 미리 연습해보려는데 시즈카 역 좀 맡아줄래?

유키노: 어쩔 수 없구나. 좋아. 나 말고는 달리 이런 걸 부탁할 사람도 없을 테고.

왜 내가 부탁하는 것처럼 되는 거냐…….

하치만: ……그래, 부탁한다.

유키노: 너도 준비가 필요할 테니 나갔다가 5분 후에 다시 들어올게.  철컥 

하치만: 그래.
 
준비라고 해봐야 미리 꺼내놓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거실 불을 끄는 게 전부니까 5분이면 충분하다.

유이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입었던 정장. 이 옷을 이렇게 빨리 다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굳이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시즈카는 제복 차림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는 이 정장이 이 분위기에 가장 어울릴 테니까.

왁스로 삐친 머리도 다 정돈했고, 거실 불도 껐다. 좋아, 준비 끝.

거실 불을 켜고 있을 때도 그럴싸했지만 이렇게 불을 끄고 나니 정말 분위기 있군. 시즈카가도 틀림없이 기뻐할 거다.

삑삑삑 철컥

유키노: 다녀왔어.

하치만: 어서와.

유키노: 불도 다 꺼 넣고 무슨 일이니?

연기까지 받아줘야 하는 건가…… 생각보다 본격적이군…….

하치만: 아, 그 뭐냐…… 오늘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거든.

유키노: 어머, 날 위해 준비했다니 뭘까?

하치만: 와보면 알 거야.   스륵

어째 실전보다 더 긴장되는군…… 결혼한 지 16년이나 된 아내에게 이제 와서 새삼 긴장할 리도 없으니 사실 연습 같은 건 필요 없지만…….

유키노: ……놀랐어. 네가 이런 로맨틱한 이벤트를 해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하치만: 뭐, 확실히 나답지 않은 행동이다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잖아?

유키노: 그러네…… 그래서 하치만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하치만: 이쪽으로 와.

유키노: 후훗, 그래.   총총

하치만: 오늘이 우리의 16번째 결혼기념일인 거 알지?

유키노: ……그래, 알고 있어.

하치만: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뒤적뒤적 스윽  

유키노: 이건……

하치만: 너와 나의 이니셜을 새긴 커플링이야. 

유키노: …………   스륵

엥? 이거 연습인데 반지까지 끼워줘야 하는 거냐? 연습이긴 하지만 손가락을 내밀어 왔는데 반지를 도로 집어넣는 것도 거시기하니 어쩔 수 없군…….

유키노: …………

하치만: 그 뭐냐…… 평소에 말은 잘 안 했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줘.

유키노: …………끝이니?

하치만: 응?

유키노: 보통은 이럴 때 키스도 해주는 모양이던데……

하치만: …………

이거 연습 아니었냐? 아니, 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하치만: 사랑한다.

유키노: 나도…… 나도 사랑해……

하치만: ………………

유키노: ………………

결혼기념일에 다른 여자와 섹○하고, 연습이란 명목하에 아내에게 줄 반지를 끼워주고 키스까지 하다니 나란 놈은 정말 쓰레기군…… 시즈카가 이 사실을 안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하치만: 연습은 이걸로 끝내자. 다음은 같이 식사하는 것뿐이니…… 엑!? 갑자기 왜 우는 건데!?

유키노: …………기뻐서.    

하치만: …………

유키노: 후훗…… 눈물은 정말로 기쁠 때도 나오는 거구나……

하치만: 유키노……

유키노: 자, 반지 돌려줄게. 이건 시즈카 언니거니까.  스윽

하치만: 어, 어어……

유키노: 하치만, 언젠간 내게도 반지를 끼워줘.   

하치만: …………

유키노: 슬슬 언니가 돌아올 시간이구나. 나도 나가야겠네. 

하치만: 엥? 어딜 가려고?

유키노: 오늘은 유이와 둘이서 외식하기로 했거든. 밤 11시 정도에 들어올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시즈카 언니와 둘이서 오붓하게 보내렴.  

하치만: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유키노: 너는 괜찮아도 언니는 분명 너와 둘만 있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하치만: ……미안하다 유키노. 신세 지고 있는 주제에 집주인인 널 내쫓는 것처럼 되어버려서……

유키노: ……그렇지 않아.

하치만: 응?

유키노: 내게 신세 지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나는 오히려 네가 와줘서 기쁜걸. 

하치만: …………

유키노: 그리고 이 집은 더는 나만의 집이 아니야. 우리 모두의 집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하치만: …………

유키노: 그러면 나갔다 올게. 결혼기념일 축하해. 좋은 시간되렴.   철컥 쾅

하치만: ……고맙다.



― 30분 후 ―

시즈카: 후우, 지쳤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나도 진짜 늙긴 늙었나 보군……

삑삑삑 철컥

시즈카: 다녀왔…… 어? 왜 불이 다 꺼져있지?

하치만: 어서 와.

시즈카: 어, 다녀왔다 하치만. 근데 왜 불을 다 꺼놓은 거냐? 설마 정전인가!?

하치만: 뭐, 와보면 알 거야.  스윽

시즈카: 음? 왜 손을? 아직 그렇게까지 밤눈이 어두운 건 아니다만……  스윽

시즈카 (어라? 잘 보니까 정장을 입고 있네? 오늘 무슨 날인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었군! 멋지게 정장까지 차려입은 걸 보니 오늘은 평소처럼 맥주가 아니라 분위기 잡고 와인이라도 마시는 건가!?)

시즈카: 하하핫! 별일이구나.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엥……?

시즈카: …………

하치만: 응? 시즈카? 왜 그래? 

시즈카: …………

하치만: 여보세요?   손 흔들흔들

시즈카: ​…​…​…​…​에​에​에​에​에​에​에​엑​!​?​!​?​!​?​

하치만: 깜짝이야……

시즈카: 지, 지금 일어났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할게! 결혼기념일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샌가 거실이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장소로 변해있었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을 거로 생각하지만,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하치만: 아니아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시즈카: 이, 이게 말로만 듣던 촛불 이벤트인가……!? 이걸 날 위해서……!?

하치만: 당연히 널 위해 준비했지 그럼 누구를 위해 준비했겠냐.

시즈카: 네가 이런 걸 해주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설마 이거 꿈은 아니겠지……?

하치만: 뭐, 나답지 않은 짓이긴 하다만…… 한 번쯤은 이런 것도 괜찮잖아?

시즈카: 그, 그렇구나…… 

하치만: 자, 이리로 와봐.

시즈카: 어, 어어……

시즈카 (촛불과 장미로 만들어진 커다란 하트 안에서 마주 보고 서다니 이, 이건 설마……!?)

하치만: 오늘이 우리의 16번째 결혼기념일인 거 알지?

시즈카: 어, 어!? 무, 물론이지!.

시즈카 (조금 전까지 깜빡 잊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 못하겠군……)

하치만: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뒤적뒤적 스윽  

시즈카 ​(​으​오​오​오​오​오​옷​―​!​!​ 꿈의 시츄에이션 반지 떴다―!!)

하치만: 너와 나의 이니셜을 새긴 커플링이야.   탈칵

시즈카: 어, 어어…… 그, 그렇군……  덜덜덜

하치만: 평소에 말은 잘 안 했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줘.

시즈카 (너무 좋아서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군…… 이니셜 반지인가…… 돈도 얼마 없을 텐데 이런 비싸 보이는 반지를…… 크으―!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아친다―!)

시즈카: 나, 나도!! 나도 사랑한다!!

하치만: 그래, 사랑한다 시즈카.   쪽

시즈카: 하으윽…… ///

시즈카 (틀림없이 지금이 올해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다……! 올해라고 해봐야 아직 겨우 3월이긴 하지만!)

하치만: 시즈카, 배고프지? 먼저 식사부터 할까? 유키노랑 유이는 오늘은 밖에서 먹고 들어온다고 했거든.

시즈카: 아, 아니 난 그 전에 먼저 샤워부터 하고 올게!

하치만: 그래, 그럼 다 씻으면 주방으로 와.

시즈카: 그, 그래 알았다!!

하치만: 흐음……

시즈카, 정말 기뻐 보이네.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 유이의 말처럼 내심 이런 이벤트를 동경했었던 건가…… 더 늦기 전에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군.

토베와 만났을 때는 진짜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지만…… 시즈카가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전문업체를 쓰길 잘한 것 같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전문업체를 쓴다는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역시 그날 토베와는 만나지 말아야 했다. 유키노와 함께 사는 사실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딩동―

엥? 누구지? 택배라도 왔나?

하치만: 네― 

???: 유이가하마 유이씨 댁 맞나요?

하치만: 네, 누구시죠?   

???: 세상에…… 믿을 수 없어…… 진짜로 히키오랑 같이 살고 있었어……

하치만: 엥……?

유미코: 나― 유이의 친구인 유미코인데. 

하치만: !?

유미코: 나 히키오랑 좀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 이 문 좀 열어줄래?

어째서 미우라가…….

하치만: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유미코: 발뺌해도 소용없거든? 네가 유이랑 동거하고 있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하치만: 뭣……

유미코: 아, 유키노시타도 함께였던가?

하치만: …………

유미코: 유이 일로 히키오랑 할 말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이 문 열어. 아니면 네가 밖으로 나오든가. 

하치만: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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