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조용히 그녀들의 눈물은 응어리진다.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성난 내방자의 말에 숨이 막힌다. 어째서……? 어째서 미우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순간 머릿속에 유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이가 나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유이는 바보 같은 면이 있지만,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을 구분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오히려 남들보다 신중할 정도다. 아무리 미우라가 친한 친구 사이라 한들 말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친한 친구이기에 모든 것을 비밀로 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사를 했다는 것 정도는 미우라에게 말했던 거겠지. 실제로 요전에 미우라가 유이에게 보내는 택배가 왔었던 걸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아마도 유이는 이사를 한 곳이 유키노네 집이고, 그곳에서 그녀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했을 거로 생각한다. 조심성 없는 행동이긴 하지만 그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로 생각한 거겠지. 유이의 집에 유키노가 신세를 지고 있는 거라면 몰라도, 유키노네 집에 유이가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키노와 악우인 미우라가 집으로 찾아오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테니까. 당연히 유이의 동거인이 유키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우라가 깨닫게 되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미우라는 어떻게 유이가 나와도 동거하고 있는 걸 알게 된 것인가? 내게는 한가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토베 카케루. 얼마 전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그에게 우리 부부가 보증 빚으로 집으로 잃고 유키노네 집에서 신세 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던 거다. 달리 원인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사실 토베는 입이 가벼워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지인의 불행을 가십 삼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녀석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 근황을 물어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싸였던 내 근황을 궁금해할 사람은 기껏해야 하야마 정도고, 그 하야마도 설마 토베가 내 근황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불행히도 토베와 재회한 나와 시즈카의 결혼기념일 며칠 뒤에는 소부고 2학년 F반의 동창회가 있었다. 본래라면 오를 리 없는 화제고, 설사 오르더라도 미우라의 귀에 닿는 일은 없었겠지만, 동창회라는 특별한 자리가 그 오르지 않았을 터인 화제를, 닿지 않을 터인 목소리를 닿게 해버렸으리라.
유이가 말하길 하야마는 동창회 때면 곧잘 지나가는 말처럼 내 근황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에비나도 질리지도 않고 하야하치 드립을 치는 모양이고. 아마도… 아니, 이번에도 분명 그랬던 거겠지. 하야마나 에비나가 내 얘기를 꺼냈고, 그 말을 들은 토베가 며칠 전 우연히 나와 만난 사실을, 자신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으리라. 그리고 옛 하야마 팸으로서 한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미우라는 유이와 동거하고 있는 게 유키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 거다.
미우라는 분명 유이가 오랫동안 나를 좋아해 왔었던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눈치 없는 자이모쿠자조차도 눈치챈 사실을 유이의 절친한 친구인 그녀가 모르고 있을 리는 없겠지.
실연한 지 15년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던 친구가 자신에게는 비밀로 유부남이 된 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미우라의 처지에서 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겠지.
물론 이성으로서 좋아했던 건 이미 옛말이고, 이제는 순수하게 친한 친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묘한 상황이지만, 셰어하우스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15년이란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짝사랑하고 있다는 거야말로 무리가 있는 얘기인 거다. 하지만 미우라는 그 가능성을, 자신의 친한 친구가 명백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렇게 내가 집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노려서 기습적으로 찾아왔다. 만약 미우라가가 지금도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나와 만나기 위해 힘들게 시간을 냈다는 게 된다. 상당한 각오를 하고 찾아왔으리라. 얼렁뚱땅 넘기는 건 불가능하겠지.
후우 하고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한 일이니까.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나는 법이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노려서 찾아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지만,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머리로는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인터폰 너머 미우라의 언짢은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듣고 있다. ……미안하지만 5분 정도만 기다려줘라. 당장은 좀 힘들거든."
"……알았어."
희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인터폰 종료 버튼을 누른다. 눈앞이 깜깜한 기분이었지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유예 시간은 길지 않다.
나는 우선 거실에 잔뜩 늘어져 있는 개다만 빨래들을 긁어모아 가까운 유이의 방에 전부 집어넣었다. 속옷이 잔뜩 어질러져 있는 이런 상태로 미우라를 집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에 들이지 않고 그냥 내가 밖으로 나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제부터 미우라와 어떤 얘기를 나누게 될지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눈과 귀가 있는 공개적인 장소보다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얘기를 나누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미우라의 불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얘기를 나누는 도중 언성을 높여서 주변의 이목을 끌 가능성도 있으니까.
빨래를 다 집어넣은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딱히 속옷 차림인 건 아니니만 아무리 그래도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미우라와 대면하는 건 주저하게 된다.
옷장에서 아직 한번 밖에 입지 않은 새 옷을 꺼내 갈아입는다. 요전에 우리 집 여자들 셋이 쇼핑하고 오면서 사온 봄옷이다. 제법 비싸기도 해서 실내복으로 입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 정도는 입어주지 않으면 복장에서도 기선제압을 당할 것 같단 말이지. 그 뭐냐, 게임에서 보스전을 치를 때 최대한 방어력이 높은 좋은 장비를 착용하는 거랑 비슷한 거다.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현관문을 향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아직 5분이 지난 건 아니지만, 미우라의 성격이 지금도 여전하다면 문을 열어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다.
현관문 앞에서 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심호흡했다. 최악의 기분이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루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나빴다. 적어도 지금은 상대방의 말에 아내가 불륜을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해 할 필요는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동치던 가슴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래,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은 분명 최악의 인간이겠지…….
각오를 다진 나는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늦어. 춥다고."
현관문을 열자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 어…… 미안하다."
"……뭐,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다."
뒤늦게 이어지는 미우라의 인사에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나저나 거진 17년 만에 대면해서 한다는 첫마디가 짜증이라니, 불꽃의 여왕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불같던 성격은 지금도 죽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16년이나 지나버리면 성격은 어쨌든 외모는 변할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게 미우라라고 알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난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내 안의 미우라 유미코는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젊고 아름답던 대학생 시절의 모습인 채로 계속 멈춰있었으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갈색 머리. 맵시 있게 채워 입은 검은색 트렌치코트에 검은색 스타킹과 부츠. 스커트가 짧다 보니 마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37살의 아줌마가 입기에는 다소 젊은 느낌의 코디였지만, 관리를 열심히 했는지 지금도 여전히 날씬한 몸매와 본래의 나이보다는 젊어 보이는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먹고 변한 모습에 눈이 쏠리는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미우라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러더니 다소 감탄한 기색으로 말한다.
"뭐야, 전업주부라길래 배 나온 아저씨가 됐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전보다 좋아졌잖아."
"엉? 그, 그래?"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당황하고 있는데 미우라가 눈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긴… 그랬다면 유이도 안 그랬겠네……."
여기서 '응? 뭐라고?'라며 물어볼 정도로 눈치가 없지도, 난청인 것도 아니기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집에 히키오 혼자지?"
"뭐, 그렇지. 왜? 나 혼자 있으면 곤란하기라도 하냐?"
"하, 일부러 네가 혼자 있을 시간에 찾아온 거거든?"
내가 농담이라도 하듯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미우라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아니, 어이없어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거든? 만약 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은 떳떳한 상태였다면 미우라의 이 뜬금없는 언행에 황당하기 짝이 없었을 거다. 뭐, 실제로는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훤히 짐작하고 있다 보니 쓴웃음 밖에 안 나온다만.
"유이 일로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뭐냐? 내가 여기서 사는 건 또 어떻게 안 건데?"
"재촉하지 않아도 전부 말할 거야. 그보다 어쩔 건데? 설마 이대로 계속 현관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자는 건 아니겠지?"
미우라가 코트 옷깃을 여미며 살짝 몸을 떤다. 젊은 시절에는 한겨울에도 맨다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었던 그녀였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이제는 예전처럼 추위에 강하진 않은 모양이다.
"……일단 들어와라."
"그래."
내 허가가 떨어지자 미우라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현관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부츠를 벗기 시작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집 안으로 들어온 미우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흥미 없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계단이나, 창문, 바닥 같은 평범한 부분까지도 빠짐없이 훑어보는 게, 마치 예비 사위가 마련한 집을 품평하는 장모님 같은 느낌이라 살짝 부담스럽다.
"거기 앉으면 돼."
거실로 안내한 내가 앉을 것을 권하자 미우라는 순순히 4인용 소파에 앉았다. 양 끝자리가 아니라 한가운데에 떡하니 앉은 것은 아마 나와 같이 앉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이리라.
"홍차랑 커피랑 중에 뭐가 좋냐?"
한가롭게 차를 마실만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한잔 내주는 게 예의다. 게다가 꽃샘추위에 떨고 있었으니 미우라도 분명 뭔가 따뜻한 걸 마시고 싶을 거다.
그런 배려심 있는 내 말에 미우라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한다.
"나 히키오랑 한가하게 차나 마시러 온 거 아닌데."
"아, 예……."
차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건가. 모처럼 생각해서 한 말인데 그렇게 거절하니 민망하군. 뭐,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나로서는 결론만 빨리 말해주면 고마운 일이다만…….
나는 뺨을 긁적이며 미우라가 앉아있는 거실 소파 앞쪽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미우라를 올려다보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파에 나란히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커피로. 각설탕은 세 개 넣어줘."
"……안 마시는 거 아니었냐."
웬만하면 자리에 앉기 전에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보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설탕량을 주문하는군……. 집에선 남편이 여왕님처럼 떠받들어주고 그러려나.
나는 거실 바닥을 짚고 일어나 주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슬쩍 고개를 돌려 미우라 쪽을 돌아봤더니,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우라와 눈이 맞아버렸다. 그러자 미우라의 눈살이 한층 더 찌푸려진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적대하는 거 아니냐…….
예전이라고 해서 미우라가 내게 상냥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나오면 기가 죽고 만다. 유이에게 화내는 걸 말리려고 했던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과는, 토베와 에비나를 이어주려고 했던 수학여행 때와는 다른 혐오감이 깃든 적의.
만약 미우라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남이었다면 적의를 보이든, 뒤에서 욕을 하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유이의 손에 꼽을 정도로 친한 친구다. 비록 나와는 친구가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몇 번이나 그녀와 행동을 같이했었다.
치바 마을, 수학여행, 디스티니 랜드, 하야마의 진로가 알고 싶다던 그녀의 의뢰까지…… 내게는 어느 것 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미우라 유미코는 내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람 중 하나인 거다. 그런 그녀의 적의 어린 시선은 솔직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벌써 나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우라와의 대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드래곤볼로 치면 이제 겨우 굴드와의 싸움이 끝났을 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지옥이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받아 전기 레인지의 전원을 켰다. 정수기가 있기 때문에 실은 따로 끓일 필요가 없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래봐야 1, 2분 차이긴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미우라가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상상이 간다. 아마도 그녀는 내게 유이와 헤어지라는 말을 할 것이다. 반대로 시즈카와 이혼하고 유이와 재혼하라는 말을 할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만,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진 않았으리라.
미우라가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다. 따라서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들려주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위기를 넘길 뿐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 헤어지라는 미우라의 말에 순순히 헤어지겠다고 대답하면 된다.
물론 실제로 헤어지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말뿐이지만, 아내의 눈을 피해 집안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불륜을 한지붕에 사는 것도 아닌 미우라가 파악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루노처럼 집을 구해서 나가라며 돈이라도 준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미우라에게 그 정도의 경제적 여유는 없을 것이다.
불륜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도 있다. 어디까지나 심증만으로 찾아온 미우라에겐 나와 유이가 불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물증이 없다. 확실히 수상쩍은 상황이긴 하지만 물증이 없는 이상 아니라고 잡아떼면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우라의 처지에서 보면 불륜 자체가 자신의 착각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착각이었다면 자신은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엉뚱한 행패를 부린 셈이 된다. 터무니없는 민폐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면 몰라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은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 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면 미우라의 입장에서는 역으로 사과하는 수밖에 없어진다.
반면 불륜을 인정하면서 헤어지는 걸 거부할 경우는 미우라의 분노를 한몸에 받게 될 것이다. 최악에는 멱살을 잡히거나 뺨을 맞을지도 모르고,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더라도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으려 들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피해가 작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속이는 것에 망설이게 된다. 유이와 불륜한 적 없다고, 전부 네 착각이라고 잡아떼는 거로 원만하게 끝낼 수 있는데도,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소중한 친구인 유이를 위해 찾아온 미우라의 마음을 기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
나 참, 어처구니가 없군…….
사랑하는 아내조차 기만하고 있으면서 15년이 넘도록 얼굴 한번 본적 없는 동창을 속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다니 웃기는 일이다.
애당초 사실대로 말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유이와 헤어질 생각이 없는 거다. 언젠가는 그래야 할 테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설령 미우라가 내게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한들 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미우라의 행동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거짓말로 속이는 거야말로 그녀를 위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괜한 착각이었다며 근심과 걱정을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행여 이 일로 인해 유이와 불화가 생기는 일도 없겠지.
뭐, 자다가 이불은 좀 찰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소중한 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답답함과 무력감, 분노에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문득 유이의 부모님을 뵈러 갔던 그날밤의 일이 떠오른다. 지금도 머릿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드게 만드는 그 처량한 모습……. 만약 그날 내가 유이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유키노의 한맺힌 절규를 뿌리쳤다면,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의외로 대단한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까지처럼 친하게 지낼 수는 없겠지만, 그녀들도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이번에야말로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낙관적인 추측이다. 단지 나와 그녀들의 인연이 끊기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그 가능성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상, 섣부른 도박은 할 수 없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한들 아내를 배신하고 불륜했다는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날 눈물짓는 그녀들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큰 후회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끓기 시작한 주전자의 열기가 얼굴을 스친다. 나는 싱크대 위의 찬장에서 커피잔을 꺼냈다. 인스턴트커피를 잔에 붓고, 끓는 물을 따른다. 커피 향기가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미우라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과 지금의 이 생활을 지키는 것. 히키가야 하치만에게 있어 중요한 건 어느 쪽인가.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 × ×
소파 앞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은 후,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끼고 미우라와 마주 보는 위치에 털썩 앉는다. 내 눈을 들여다보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미우라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다.
하지만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좀 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내가 그런 것처럼 미우라도 그사이 마음을 가다듬은 모양이다.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할 얘기라는 게 뭐냐? 미우라."
미우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나 미우라가 아니라 이노우에인데."
"아…… 그렇겠네."
생각해 보니 결혼했으니까 더는 미우라가 아니겠군.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내 이름도 히키오가 아니거든? 뭐, 상관없지만.
결혼한 여성의 성이 바뀌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건만, 결혼해해서 성이 바뀐 여성과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보니 그만 깜빡하고 있었다. 유이는 결혼을 안 했고, 유키노는 전 남편이 데릴사위로 들어간 지라 그대로 유키노시타였고, 아내인 시즈카와 여동생인 코마치는 성으로 부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런 점에서도 자신의 인간관계가 좁디좁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뭐, 미우라면 됐어."
귀찮다는 양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우라가 말한다. 남편의 성으로 부르든 구성(舊姓)으로 부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
"아니, 딱히 짐작 가는 게 없다만……."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치미를 뗐다.
사실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지만 그걸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우라의 목적이 나와 유이를 헤어지게 하는 거라면 나의 목적은 최소한의 피해로 일을 무마시키는 거다. 불륜 같은 건 없다고, 나와 유이는 어디까지나 친한 친구로서 동거하고 있는 거라고 주장하는 수밖에 없다.
"흐응~ 그래?"
"16년 넘게 얼굴 한번 본적 없던 네가 나한테 대체 무슨 볼일이 있는 건데?"
만약 내가 결백했다면 당연하게 품었을 의문을 입에 담는다.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미우라는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너 유이랑 바람 피고 있지?"
"………."
준비동작도 없이 날려오는 돌직구에 잠시 사고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서론을 생략하고 본론만 말하는 건 나도 싫어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생략하는 거 아니냐?
"그 침묵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아니거든?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잊은 것뿐이거든?"
나는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실제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갑작스러운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결백을 가장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설마 너 고작 그런 헛소리나 하려고 찾아온 거냐?"
"발뺌할 생각마. 다 알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미우라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매섭게 쏘아본다. 다 알고 있다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당사자인 유이가 직접 털어놓지 않는 이상 미우라가 모든 걸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유이는 결코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을 거다.
유이에게는 이미 유키노라는 동병상련의 이해자가 있다. 절대로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거라고 알고 있으면서,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미우라에게 상담할 필요가 없는 거다. 다 알고 있다는 건 분명 미우라의 허세일 것이다.
"황당하다 못해 기도 안 차는군. 대체 왜 내가 유이랑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는 건데? 애당초 내가 여기서 사는 건 어떻게 안 거냐?"
우선은 미우라에게서 정보를 모아 보기로 하자. 내가 이 집에서 살고 있다는 정보의 출처는 토베라고 봐도 틀림없겠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경위였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은 작지만 나와 유이가 러브호텔에 들어가는 걸 미우라가 목격했거나, 우리를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목격하고 미우라에게 전했을 수도 있다.
온갖 가능성을 고려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처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표정으로 드러나 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우선은 내 생각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다.
"동창회에서 토베에게 들었어. 너희 부부가 보증 빚 때문에 집을 잃고 유키노시타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고."
"그런가……."
역시 그런가. 예상했던 대로라 딱히 충격은 없군. 오히려 안도할 지경이다. 만약 토베가 아닌 제3의 정보 출처가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당황스러웠을 거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미우라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뭐, 히키가야 선생님은 날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시고, 히키오에게도 뭐……. 이래저래 신세 진 적이 있으니까…….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한 건 안타깝게 생각하거든."
그리운 학창시절의 일이 떠오르기라도 한 건지 미우라의 날카로운 표정이 한순간 부드럽게 풀린다.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너 지금 히키가야 선생님이라고 한 거냐?"
"뭐? 히키가야 선생님 맞잖아? 너랑 결혼했으니까."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내 이름이 히키가야인 걸 알고 있었던 거냐…… 계속 히키오라고만 불러대니까 당연히 토베처럼 잘못 알고 있는 줄만 알았지 뭐야. 당연히 시즈카도 히키오 선생님이라고 부를 줄 알았다.
"아무튼, 너희 부부가 유키노시타네 집에서 사는 건 충분히 이해하거든.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지만, 유키노시타는 너랑 친한 사이였고, 히키가야 선생님과도 잘 아는 사이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미우라가 고개를 돌려 집안을 훑어보며 옮겨가며 말을 잇는다.
"이렇게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거니 방 하나 내줘도 딱히 문제는 없었을 테고."
토베에게는 굳이 유키노가 이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미우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건 유이일 것이다. 아마 유키노와 함께 사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키노가 이혼한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유키노시타랑 너희 부부가 함께 사는 건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유이까지 너와 함께 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거든."
날카로운 시선과 목소리에는 확신과도 같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전부 네 오해일 뿐이라며 미우라를 속여넘기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뭐,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이상하다니, 대체 뭐가 이상한데?"
내 말에 미우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간을 찡그린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럼 유이가 이 집에서 함께 사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거야? 완전 이상하거든?"
"아니,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도 말이지…… 유이는 우리 부부가 신세 지기 전부터 이미 유키노랑 같이 살고 있었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유이는 우리 부부가 오기 전부터 유키노와 동거하고 있었다. 뭐, 고작 3일 먼저지만.
당연하지만 그걸 미우라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다. 한 두세 달 전부터 살고 있었다면 모를까, 3일이라는 부자연스럽게 짧은 시간은 미우라의 의심을 부풀게 할 뿐이다. 행여라도 말할 순 없다.
"나 작년 가을에 유이에게 나중에 혹시 이사하게 되면 우리 동네로 이사 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단 말이지. 집이 가까우면 자주 볼 수 있고, 챙겨주기도 쉬우니까. 그랬더니 유이가 그러더라고. 집 인테리어 새로 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자기는 지금 사는 집이랑 동네가 좋으니까 앞으로도 이사할 생각은 없다고……."
확실히 유이가 전에 살던 집은 외관에 비해 상당히 깔끔했고, 입지조건도 괜찮은 편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는 걸어서 5분, 전철역까지도 10분이면 갈 수 있었다. 편의점이나 마트 역시 가까이에 있었으니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랬던 유이가 한 달도 안 돼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뭘까?
"……그 뭐냐, 요즘 여자 혼자 사는 집을 노리는 범죄가 잦다 보니 혼자서 사는 게 불안해진 거 아니겠냐? 이혼으로 마음이 심란할 유키노도 걱정됐을 테고."
예전에 유이가 내게 했던 말을 살짝 바꿔서 미우라에게 말한다. 이렇게 직접 입에 담아보니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아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유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마 자신만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랬을 거라고, 그리운 봉사부 시절의 멤버끼리 함께 살면 즐겁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그랬을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나는 유이가 여전히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고 있을 가능성에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궁색한 이유에 미우라는 납득하지 않았다. 납득은커녕 가소롭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며 코웃음 쳤다.
"하, 웃기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남자라서 이상한 오해를 하나 본데,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거든? 난 이미 아내가 있다고. 유이랑은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죄책감마저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인지 자신이 내뱉은 뻔뻔한 거짓말이 바늘처럼 심장을 쿡쿡 찔러온다. 그 아픔에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백번 양보해서 너한테는 그냥 친구라고 해도 유이한테는 아니거든요?"
"뭐?"
미우라가 조금 전까지의 드센 분위기하고는 다른, 어딘가 분하다는 듯이, 괴롭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문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유이는…… 유이는 너를 잊지 못해서 이런 나이가 될 때까지 연애 한번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눈을 돌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나는 어째서 유이가 연애를 하지 않는 건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걸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진실을 깨달아버리면 더는 유이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럴 리가 없다며 자기 자신을 어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내가 무엇보다 혐오하던 거짓된 이해와 기만의 관계.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잃고 싶지 않았다.
시즈카와 결혼한 거로 인해 그녀들과의 관계가 자연소멸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유이가 숨겨왔던 진심을 깨닫는 거로 인해 더는 그녀와 친구로 있을 수 없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리 더럽고, 추하고,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그녀들과의 인연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 마음은 분명 잘못된 것이리라.
처음부터 잘못됐다. 설령 그녀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게 되더라도, 더는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없게 되더라도, 진정으로 그녀들을 생각했다면 제대로 대답을 돌려줬어야 했다. 비록 그녀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이상, 오랫동안 나를 좋아해 준 그녀들에게 제대로 대답해줬어야 했다.
결국, 나는 그녀들을 상처 주는 거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는 게 두려웠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미우라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유이는 사교성도 좋고 예쁘니까 남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았어. 하지만 아무리 좋은 남자가 다가와도 유이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절했지. ……그리고 그건 네가 결혼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어."
"…………."
"남들은 한둘씩 결혼하기 시작하는데 결혼은커녕 연애 한번 안 하고 있으니 걱정돼서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했던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유이는 그것도 거절했어. 그러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내가 언제까지 히키오를 못 잊고 그럴 거냐고, 평생 혼자 살 거냐고 화를 낸 적이 있거든. 그랬더니 유이가 뭐랬는 줄 알아?"
"……글쎄."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미우라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는 연애 같은 건 질려버렸다고 하더라. 씁쓸하게 웃으면서 더는 사랑 같은 건 안 하겠다고 말했어."
미우라의 말에 힘없이 미소 짓는 유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얼굴을, 그 목소리를, 그 심정을 상상하자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고, 그것을 얼버무리기 위해 나는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드물긴 해도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 나쁜 남자한테 호되게 데인 탓에 연애 그 자체를 질색하게 되는……. 난 유이도 그런 건 줄 알았지……. 그런데 그렇지도 않더라고."
말끝을 흐려가며 힘겹게 말을 잇는 미우라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그런 유이가 너랑 함께 사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없잖아."
미우라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이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이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이후로는 그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함께 살기 전부터 이미 유이와 유키노는 나를 유혹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리를 가르쳐달라는 명목으로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덥다는 이유로 시선을 두기 곤란할 정도로 얉은 차림을 하기도 했다. 만약 내게 전업주부로서 아내의 저녁밥은 직접 차려줘야 한다는 프로정신이 없었다면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는 그녀들의 유혹에 넘어가 진작에 사달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은 한낱 추측일 뿐이다. 몰래 찍은 증거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목격증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미우라의 말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유이가 날 좋아했던 것도 연애에 질색하게 된 원인이 내게 있다는 것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건 너무 황당한 소리 아니냐? 대체 몇 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벌써 16년이나 지났거든?"
"……그래, 황당한 소리지.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설마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너와 살고 있잖아?"
"미우라, 네가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친구 관계일 뿐이야. 애초에 한지붕 아래 살면서 시즈카와 유키노의 눈을 피해 불륜 행위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
"오히려 한집에서 같이 사니까 더 쉬웠겠지. 히키가야 선생님이나 유키노시타가 늘 집에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유키노시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교사인 히키가야 선생님보다는 초등학교 교사인 유이가 더 빨리 들어올 거 아냐? 섹○는 무리더라도 키스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지."
나와 한집에서 사는 이 상황 자체가 명백한 증거라는 미우라의 믿음은 확고해 보였다. 몇 번을 부정해도 그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하면 할수록 미우라의 그 믿음은 확신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정말 사람 짜증 나게 하네……."
나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을 건데? 완전 민폐거든? 미우라, 네가 유이의 친구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쫓아냈을 거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미우라가 이를 아드득 갈며 자신의 팔을 꾹 움켜쥔다.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그 긴 손톱에 살이 패여 피가 나왔을지도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을 주며 분노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계속 그렇게 거짓말을 하겠다 이거지?"
"……너야말로 적당히 해라. 나와 유이와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금방이라도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거실에 감돈다.
"……잠깐 화장실."
후우~ 하고 노골적인 한숨을 토해낸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화장실 변기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다. 미우라가 찾아오고 나서 겨우 3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3시간은 지난 것 같은 피로가 느껴진다.
미우라에게는 짜증스럽게 화를 냈지만 실제로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저 씁쓸하고 우울할 뿐이다.
언제까지 이런 날들이 계속되는 걸까.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제야 겨우 아픔에 무뎌졌다는데도 현실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분명 나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시즈카에게 들킬까 봐 가슴을 졸이며,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그런데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정을 가장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사랑받고 있는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
미우라를 원만하게 돌려보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너무 안의한 생각이었다. 미우라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유이를 불행하게 만들어버린 원인이니까.
아마 제삼자의 시선으로 잘잘못을 따진다면 내 잘못은 그렇게까지 크진 않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유이와 정식으로 사귀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 경우 실제로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이의 아군인 미우라로서는 머리로는 유이 본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만 아니었다면 하는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걸 멈출 수 없었으리라.
분명 이대로 대화를 계속한들 평행선을 달릴 뿐이겠지. 미우라에게는 나와 유이의 불륜 관계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고, 내게는 미우라를 설득할만한 수단이 없으니까.
강제로 쫓아낼 수는 있겠지만 돌아가라고 해서 얌전히 돌아갈 미우라가 아니다. 최악에는 정말로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뭐, 폭력사태라고 해봐야 미우라가 내 뺨을 때리는 정도겠지만…… 그런 식으로 일이 커지는 건 좋지 않다. 행여라도 유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로 좋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녀가 제풀에 지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아……."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자 변기 앞쪽에 깔린 팬돌이 발 매트가 눈에 들어온다. 옆으로 누워 태평하게 술병을 나발 불고 있는 판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사실 아이도 없는 이 집에 이런 유아용 발 매트가 깔린 건 이상한 일이지만 37살 먹은 어른이는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니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화장실에 박혀서 팬돌이나 쳐다보고 싶었지만, 미우라에게 변비가 있다는 오해를 사는 것도 곤란하다. 길지는 않지만, 이 정도 시간이면 미우라도 조금은 분노를 삭일 수 있었겠지.
나는 앉아있던 변기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폰이 짧게 진동했다.
정오가 될 때까지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있는 이런 애매한 시간에 메일을 보내오는 건 아마존이나 자이모쿠자 정도다. 중요한 메일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굳이 뒤로 미룰 정도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도 아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일이 한 통 와있었다.
보낸 사람은 유이가하마 유이.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구보다도 거북한 그 이름에 가슴이 철렁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뿐이다. 집안에 휴대폰과 연동되는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다면 모를까, 유이가 미우라가 집으로 찾아온 사실을 깨닫고 전화와 메일을 했을 리는 없다. 이런 시간에 메일을 보내오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지만,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메일을 확인했다.
발신자: ★☆유이★☆
제목: 힛키, 혹시 자?
본문: 아까 전화했는데 자는지 안 받더라고. 혹시 오늘 낮에 어디 나갈 예정 있어?
역시 괜한 우려에 불과했다. 메일 내용을 보건대 어디 나갈 예정이 있으면 나가는 김에 뭐 좀 사와 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거겠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딱히 나갈 예정은 없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사오겠다고 짧게 답장 메일을 보냈다.
화장실을 나와서 거실을 향해 걷는다.
이제는 우리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해진 유키노의 집. 거주민들 중 누구보다 이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어느새 이 집에 애착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집안일을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동안은 괴로운 일들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한동안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거실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이 미우라 유미코의 모습이 떠올라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미우라의 앞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미우라가 입을 열었다.
"……너 유이가 임신한 건 알고 있어?"
그것은 무척이나,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차분한 목소리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내 귓속에 박혀 끝없이 메아리쳤다.
휘청. 머릿속이 흔들리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순식간에 다리의 힘이 빠진 나는 발이 꼬여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오른쪽 볼과 팔꿈치, 무릎에 격통이 일었다.
"크으윽……."
요란하게 고꾸라진 내 모습에 살짝 놀란 듯 미우라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인다.
……크흑! 젠장, 완전 쪽팔려! 이건 멍이 들지도 모르겠군…… 아니, 지금은 그보다도…….
바닥을 짚고 일어난 나는 욱신거리는 볼을 어루만지며 다시 미우라의 정면에 앉았다.
"……지금 뭐라고 했냐?"
"유이가 임신한 건 알고 있냐고 했어."
미우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고한다.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그 말에 눈이 절로 크게 떠지고 숨이 막힌다.
"그 반응과 표정을 봐서는 아직 몰랐나 보네."
"아니, 그럴 리가……."
"내가 말했지? 다 알고 있다고."
유이와 동침한 건 지금까지 두 번. 보통 4주는 지나야 임신이라는 걸 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큰 건 처음으로 그녀와 잤던 그 날 밤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제대로 콘돔을 착용했었다. 그날만이 아니라 두 번째로 했을 때도 콘돔을 착용했었다. 실수로 콘돔 없이 한 적이 있는 유키노라면 모를까, 유이가 임신했을 리는…….
아니지, 콘돔을 낀다고 해서 100% 피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낮은 확률이지만 임신의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콘돔이 불량이었을 수도 있다. 설마 그건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내가 샤워를 하는 사이에 유이가 콘돔에 구멍을 냈을 가능성도 있다.
"유이가 히키오 말고 다른 남자랑은 한 적 없다는 거 알고 있지?"
"……그래, 그렇겠지."
본래라면 부정해야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수긍하고 만다. 하지만 유이가 임신했다는 미우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건 더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유이가 임신했다는 건 어떻게 안 거냐?"
"며칠 전에 유이랑 만났었거든. 너랑 같이 사는 게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근데 막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에 유이가 갑자기 헛구역질하더라고. 그래서 설마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혹시 입덧이냐고 그랬거든. 그랬더니 유이가 당황해서는 부정하지 뭐야. 그걸 보고 촉이 와서 계속 물고 늘어졌더니 전부 실토했어. 뭐, 애 아빠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지만, 너희가 같이 사는 건 토베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37살이 되도록 순결을 지키고 있었던 유이가 이제 와서 내게 비밀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을 리는 없다. 유이가 임신을 했다면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나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임신과는 연이 없었던 탓일까, 미우라의 그 말은 꼭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고, 동시에 이제는 어쩔 방도가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끔찍한 현실성이 있었다.
"……거짓말이지?"
망연자실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화답하듯 미우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거짓말이야."
"………."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고개를 들어 미우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미우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뜨기는 찾아낸 모양이네."
당했다…… 완전히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만약 유이가 임신했다는 말이 사실이고 미우라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긴말 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유이의 임신 사실을 밝혔으면 끝나는 얘기였다. 굳이 내 입으로 시인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미우라의 태도도 이렇게 적대적이진 않았으리라. 적어도 헤어지라는 말을 하러 오진 않았을 테니까.
유이가 다른 남자와는 한 적 없는 거 아느냐는 말에 그렇다고 수긍해버린 이상, 더는 어떤 변명을 한들 소용없을 것이다. 설마 그 미우라 유미코가 함정을 팔 줄이야…….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인가.
전업주부가 되어 온실 화초처럼 살아온 나와 달리 미우라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왔다. 직장이란 계급사회에서 그녀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다. 음지를 모르던 학생 시절의 그녀와는 다른 것이다.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서로를 괴롭게 만들 뿐인 무의미한 대화일 뿐이겠지만, 이제는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 네 말대로 유이와 불륜 관계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란 거냐?"
"이제야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 유이와 헤어져."
미우라가 싸늘하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대답한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인데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우라, 네가 상관할만한 문제가 아니야."
"난 유이의 20년 지기 친구야. 충분히 상관할 자격이 있어."
"네가 이러는 걸 유이가 바라기라도 할 것 같냐?"
그 말에 나를 노려보고 있는 미우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질끈 쥔다.
유이는 결코 미우라가 이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우라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미우라는 유이에게는 비밀로 독단적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바라지는 않겠지. 너한테 이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엄청 화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거든요?"
친구인 유이를 생각하는 미우라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유이를 그렇게까지 소중히 여기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도 기쁜 일이다. 그녀의 그 올곧은 마음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울 뿐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올바르다 해도 당사자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한 민폐일 뿐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와 헤어질 것을 강요한들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거다.
"네가 뭐라고 한들 유이와 헤어질 생각은 없어."
"그러면 히키가야 선생님과는 이혼하고 유이랑 재혼하겠다는 거야?"
"…………."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이대로 미우라를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원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몇 달의 시간은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는 그 한마디가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수도 없이 거짓말을 해놓고서, 사랑하는 아내조차 속였으면서, 그 한마디만은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이혼할 생각은 없나 보네. 유이는 그냥 가볍게 즐기다 헤어지는 상대라 이거지?"
그 말에 순간적으로 발끈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유이랑 재혼할 게 아니라면 결국 마찬가지야."
부정할 수 없는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유혹한 건 누구야? 역시 유이? 아니면 너?"
"…………유이다."
"흐응~……."
미우라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연다.
"나 딱히 히키오만 잘못했다고 할 생각은 없어. 불륜은 양쪽 다 나쁜 거니까. 그치만 누가 더 나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네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거든. 유이는 미혼이지만 넌 유부남이잖아?"
"…………."
"아내가 있으면서 유이가 유혹했다고 해서 넘어가면 안 되지. 히키가야 선생님께 미안하지도 않아?"
그렇게 정론을 말해오면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그 어떤 이유가 있든 아내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까.
"나 애초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도 네게 원인이 있다고 보거든. 너 결혼하고 나서도 유이랑 계속 만났다며?"
"……그래."
"뭐, 결혼한 이성 친구와는 만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만났던 것 자체는 뭐라고 할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 너 유이랑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주 만났더라?"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유이와의 만남 자체를 탓하는 듯한 태도에 초조해져 변명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기껏해야 한 달에 두세 번 봤을 뿐이다만……."
"하,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닌데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난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학생 때라면 몰라도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거든요?"
미우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그보다 더 자주 만났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동성 친구인 자이모쿠자나 토츠카보다도 자주 만난 셈이다.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네가 유이 말고 히키가야 선생님이랑 결혼한 걸 탓할 생각 없어. 유이보다 히키가야 선생님이 좋았으니까 선생님이랑 결혼한 거겠지. 근데 그렇게 유이를 차버렸으면 네가 알아서 거리를 뒀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나 자주 만나댔으니 유이도 널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겠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만났던 거였다.
하지만 미우라의 말대로 유이가 날 잊지 못한 원인은 틀림없이 내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유이가 나에 대한 마음을 떨쳐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녀를 멀리했어야 했다.
"너 히키가야 선생님이랑 이혼할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그러면 언젠가는 결국 유이랑 헤어질 거란 거잖아? 어차피 헤어질 거면 유이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
그러겠다고 거짓으로 대답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흥신소라도 이용하지 않는 이상 미우라에게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미우라를 설득하지 못했을 경우는 그러기로 마음 먹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대체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생각인데! 유이 몸이 질릴 때까지?"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미우라가 언성을 높인다.
"하아……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
"하, 그런 게 아니면 뭐? 설마 유이를 위해서 바람을 피우는 거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떨까…… 그것은 정말로 유이와 유키노를 위하는 행동이었을까?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고민해도 나는 결국 답을 알 수 없었다. 내게는 그것 외에 달리 좋은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다.
"유이도 이제 곧 38살이야. 이젠 노처녀는커녕 아줌마라고. 결혼을 일찍했으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야."
아이가 없는 내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지만, 확실히 미우라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이제 곧 38살. 벌써 38살이다. 40대가 되는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은 것이다.
"이젠 나이가 나이다 보니 능력 있고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유이는 예쁘고 동안이고 직업도 나쁘지 않으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거든. 하지만 이대로 너와 불륜 관계인 채로 나이를 더 먹어버린다면 그때는 진짜 무리야. 이혼했거나, 아이가 딸려 있거나, 어딘가 하자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고. 타협하고 타협하고 또 타협하는 수밖에 없게 돼버린다고……."
미우라가 화를 억누르며 마치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게 유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 그게 유이를 위하는 길이야."
그것만이 내가 유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담담히 고하는 미우라.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유이를 위한 행동일까? 10년만 빨랐더라면 미우라의 말대로 그것이 유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미우라, 너는 아무 것도 몰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뭐? 내가 뭘 모른다는 건데?"
"만약 내가 지금 유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해버리면…… 유이는……."
차가운 겨울밤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던 유이의 덧없는 모습이, 눈물을 흘리며 발광하던 유키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눈을 감으며 작게 심호흡한 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 가능성을 힘겹게 입에 담았다.
"…………자살해버릴지도 몰라."
침묵이 드리운다.
미우라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미우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에 짓눌려 어깨가 축 늘어진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불편한 침묵. 그것을 깨뜨린 건 미우라의 불같은 호통이었다.
"…………웃기지 마!!"
미우라가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소파를 내리친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을 것 같은 매서운 안광으로 나를 노려본다.
"자살이라고? 네가 뭔데!? 네가 유이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 것 같아!? 너 같은 게 없더라도 유이는 잘 살 수 있거든요? 그야 처음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분명 떨쳐낼 수 있어! 실연 같은 건 누구나 한번 쯤은 겪는 일이라고! 나도 그랬다고!!"
미우라가 분노로 어깨를 떨며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학창시절, 하야마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그녀는, 하야마에 대해 알고 싶다며 눈동자를 적셨던 그녀는, 지금 하야마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열에 아홉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지금은 삶의 전부인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열을 냈던 걸까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우라 역시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실연의 아픔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히 드물지만,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왕바보도 있는 거다.
나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우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우라, 누구나 너처럼 실연의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냐. 세상에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 대답에 미우라가 분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문다.
사실은 미우라도 깨닫고 있었을 거다. 20년이란 시간 동안 변함없이 날 사랑하고 있는 유이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유이의 마음이 얼마나 병들어있는지를. 나의 우려가 결코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가 자살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큭…… 그렇다면 네가! 네가 유이랑 재혼해주면 되잖아……!"
미우라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한 번 소파를 내리친다.
하지만 멱살을 잡고 협박한들, 눈물로 호소한들 안 되는 건 안 되고, 무리인 건 무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건 무리야."
그것을 끝으로 말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에 정적만이 고요하게 감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나는 유이와 헤어지겠다는 거짓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 것인가. 그랬더라면 적어도 미우라 만큼은 이렇게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를 하고 있던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우라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께 말하겠어……."
"뭐……?"
"……히키가야 선생님께 네가 바람피우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하겠어……. 그걸로 네가 선생님과 이혼하게 되면…… 유이도 너와 재혼할 수 있겠네."
미우라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며 도발적이고 냉혹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있던 가능성. 하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는 그것이 허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왜? 내 말이 틀렸어?"
"하아…… 유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불륜 가해자다. 만약 네가 시즈카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우리 부부가 이혼하게 된다면 유이도 가해자로서 적지 않은 위자료를 물게 되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분명 지금처럼은 있을 수 없게 될 테고. 유이의 입장에선 너에게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를 맞은 셈인 거다. 그러고도 네가 유이와 친구로 있을 수 있을 것 같냐?"
미우라가 깊고 깊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오열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못 지내겠지…… 하지만…… 그걸로 유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런 식으로 이혼한들 내가 유이랑 재혼할 것 같냐? 미우라, 그건 네 자기만족일 뿐이야."
사실 위자료 같은 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키노는 물론이거니와 유이도 전에 살던 집을 팔아서 생긴 돈이 있을 테니까. 필요하다면 내 몫의 위자료까지도 아낌없이 지급하려 들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와 재혼한들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그녀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내게 시즈카와 이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들 중 누군가와 재혼하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남은 일생을 지금보다 더 큰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래선 결국엔 마찬가지잖아…… 빠르고 늦고의 차이일 뿐이잖아……."
미우라가 머리를 감싸 쥐며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 얼굴에는 절망의 낯빛이 드리워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그녀의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미우라, 이것만큼은 믿어줘라. 네게 유이가 소중한 친구이듯이 내게도 유이는 소중한 사람이다."
"…………."
"그리고 나라고 해서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냐."
단지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뿐이다. 아직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유이와 유키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끔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낙관적인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다. 좋은 방법 따윈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우라의 말대로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그녀들을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도 믿고 싶은 거다. 이대로 우리 네 사람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줘라."
"……내가 널 뭘 믿고 기다리라는 건데?"
당연하다는 듯 미우라가 반문한다. 그럴 만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도움을 줬던 건 진작에 유효기간이 지나버렸을 테니까. 대학교 시절 우연히 만났던 걸 포함하더라도 그녀와는 17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거다. 그런 나와 그녀 사이에 신뢰 관계가 존재할 리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억지로나마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유이가 20년 동안이나 좋아하고 있는 남자잖냐."
"하, 뭐야 그게. 그게 문제거든?"
그렇게 말하며, 미우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현관 앞에서 서서 부츠를 신고 있는 미우라에게 말을 건넨다.
"배고프면 점심 먹고 가도 상관없는데."
"됐어. 조금 전까지 그래놓고서 거북하게 어떻게 같이 밥을 먹겠어."
뭐, 완전 동감이다. 솔직히 예의상 한말에 불과하니까 진짜로 먹고 간다고 해도 곤란하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고, 미우라는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앞으로도 미우라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못하겠지. 그리고 나도 그런 미우라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언제까지고 말없이 기다려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미우라가 시즈카에게 유이와 나의 관계를 이실직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 볼에 멍든 건 괜찮아? 엄청 아파 보이는데……."
"조금 아프긴 하지만 딱히 네 잘못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뭐, 그건 그렇지. 히키오 혼자서 바보같이 자빠진 거니까."
"야야……."
부츠를 다 신은 미우라가 몸을 돌려 뒤돌아보며 눈에 힘을 주고 말한다.
"아~ 그래. 이것만은 기억해둬. 만약 유이가 잘못되는 일이 생긴다면…… 나 널 절대로 용서안할거야."
"으, 으응……."
후에엥…… 미우라땅, 너무 무서운 고야…….
잠시 나를 노려보고 있던 미우라가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그리고는 살짝 분하다는 듯이 코트 소매를 살짝 쥐며 말한다.
"뭐……. 너는 나나 히나보다 유이랑 자주 만나왔을 정도니까, 유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사실이겠지."
"그래, 그것만큼은 믿어도 된다."
이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잔뜩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내게 있어 유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그 말만큼은 한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니까.
미우라가 부츠를 신은 오른발 끝을 톡톡 두드리고는 뒤돌아서며 말한다.
"그러면 난 이만 가볼게. 뭐…… 히키오도 잘 지내."
어쩌면 이것이 나와 그녀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유이를 통해 이따금 소식을 전해 들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겠지. 그야말로 유이가 잘못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분명 그럴 것이다.
"너도 조심해서 가라."
미우라가 현관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미우라의 가녀린 손끝이 문 손잡이에 닿으려던 그 순간, 현관문의 잠금 해제 소리가 울리며 벌컥 문이 열렸다.
"힛키~ 나왔……어!?"
"어, 어!?"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유이와 얼굴이 마주친 미우라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친다.
눈앞에 있는 인물, 유이가하마 유이도 잔뜩 놀란 얼굴로 말문이 막혀 있었다.
"……어, 어라? 왜…… 유미코가 여기 있는 거야……?"
그런 의문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유이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평일의 12시 20분을 조금 넘긴 시각. 이런 시간에 유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없어야 했다…….
"너, 너야말로 이런 시간에 왜 집에……."
"난 그…… 집에 지갑을 두고 나와서…… 오늘 저녁에 학교 선생님들끼리 회식이 있어서……. 학교에서 집까지 빨리 걸으면 20분이면 오니까…… 점심은 힛키랑 같이 먹으려고……."
유이가 아연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그리고는 나와 미우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대답을 재촉한다.
"아, 그…… 유이 널 만나려고 왔다가……."
"그 뭐냐…… 찾아온 손님을 그대로 돌려보내기도 뭣해서 내가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했어."
미우라의 어색한 변명을 거들며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싯적의 유키노라면 몰라도, 이런 부자연스러운 말에 속아 넘어갈 유이가 아니다.
"……이런 평일 이 시간에 내가 집에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럴 리가 없잖아…… 원래라면 유미코도 회사에 있을 시간이고……."
"아니, 그건……."
미우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어보지만 한참을 뜸을 들이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는다.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미우라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 오른쪽 볼을 포착한 그 순간, 유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린다.
"……힛키, 얼굴이 왜 그래?"
"어, 어?"
황급히 멍든 볼을 손으로 가려보지만 유이는 내 오른쪽 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유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빛이 사라져 간다.
"…………유미코가 그런 거구나."
유이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한기에 미우라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 아니…… 난……."
"아니, 이건 그냥 내가 바보같이 혼자 넘어져서 멍든 것뿐이다."
"………거짓말."
넘어져서 멍이 들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이가 임신했다는 말에 놀라 혼자 고꾸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다. 본래라면 있을 리가 없는 미우라와 볼에 멍이 든 나. 미우라가 때려서 그런 거라고 유이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얼굴에 멍이 들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할 것 같은 변명 베스트 3에 들어갈 것 같은 이유라는 건 나도 알지만, 진짜로 넘어져서 그런 거라고……."
나는 왼쪽 뺨을 긁적이며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믿을 수 없는지 유이는 미우라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본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유이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운 얼굴을 하는 건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미우라도 마찬가지이리라.
"유이, 네 오해다. 진짜로 넘어져서 멍든 거라고. 미우라와는 그냥 얘기만 나눴을 뿐이야."
"…………."
미우라가 겁먹은 기색으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네가 히키오를 못 잊고 불륜까지 저지르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러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아무 잘못도 없는 힛키에게 그러면 안 되잖아……."
두려움이 깃든 미우라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유이가하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미우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짜내듯이 힘겹게 말을 잇는다.
"히키오만 아무 잘못 없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원인을 따지고 보면 히키오가……."
"내가 부탁한 거야! 힛키는 아무 잘못 없다고!"
"유이!"
분노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유이가 불끈 쥔 두 주먹을 허공에 내리치며 소리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참견하지 마!!"
숨이 막혔다. 목소리도, 말도, 침조차도 삼킬 수 없다. 유이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새하얗게 질린 미우라가 실이 뚝 끊긴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돌연 느껴지는 바늘로 명치를 찌르는 듯한 아픔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끔찍한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되돌리자 미우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흐윽…… 어떻게……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소중한 친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걸…… 흑……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냐고……."
그 모습에 유이의 매서운 표정이 서서히 풀려간다. 정신을 차렸다는 듯 얼굴에 미안함과 슬픔이 깃들어간다.
"유미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미우라가 말을 잇는다.
"내게는 말해주지도 않았잖아…… 흐윽…… 걱정된다고…… 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네가 가장 친한 친구란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유이가 미우라에게 한 걸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미우라의 어깨를 바싹 끌어당겨 안고는 괴로운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우라는 유이에게 안긴 채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계속 훔친다.
나는 바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유이에게서 온 미확인 메일이 한 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조짐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유이에게서 온 메일을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죄스러운 마음과 깊은 후회가 가슴 속에 응어리진다.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껴 우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