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2)
용은 어미가 입에 문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자연히 앞다리와 뒷다리가 한 곳에 모였다. 날개가 몇 번 파닥였다.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항의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라니.]
“쓸데없는 소리가 쓸데없는 소리지.”
용은 안면을 기이하게 움직여 비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건 내 사생활이라고 말 할 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린…….]
황제는 다시 용의 말을 잘랐다.
“그것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아.]
어린(petite)? 어디까지나 꼬맹이에게 쓰는 말이 아닌가. 황제는 아직 스물도 안 되었지만 petite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그보다 이거 놔라.]
손가락이 풀렸다. 늘어나있던 목 가죽이 탄력 있게 줄어들었지만, 몸은 다리를 오므린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역시 날개는 쓸모없는 거였나.
용은 거만하게도 목을 쭉 빼서 흔들었다.
[말이나 나눌까 했더니 방해꾼이 나타나 꼴이 말이 아니로군. 그럼. 나중에 보지.]
“네.”
이 신기한 생물 앞에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스쳤다. 적어도 손등에 입 맞추거나, 비주를 나누는 건 오답이겠지. 무릎을 꿇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세스가 어물거리는 사이 용은 빛가루로 변해 허공에 사르륵 흩어졌다.
“어머나.”
“놀랄 것 없소. 그냥 날아가도 될 것을 일부러 뽐내는 거니.”
황제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미간을 문질렀다. 불공평하게도, 그냥 있을 때 예쁜 사람은 찡그려도 예뻤다.
“하지만 신기하군요. 정말 세상에 용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름이 뭔가요?”
“용의 이름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오.”
“언령 때문에요?”
“잘 아는군?”
황제는 이채를 띤 얼굴로 세스를 내려다보았다. 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 덕이에요. 제 친구가 요정이라든가 마법 같은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설마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
사랑하는 친구이자 사촌인 오를레앙의 미셸이 그런 신비한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썼다. 미셸이 이런저런 책에 대해서 신나서 떠들면 세스는 옆에서 수를 놓으며 얻어듣곤 했다.
“옛날에는 이름이 중요한 마법이라서 아무에게도 알려주면 안 되는 거였다는 말은 들었지만요. 사실 그게 용에게도 적용될 거라는 생각은 처음 했답니다.”
미셸은 이블린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을 샅샅이 뒤지고, 서사시집을 모아다가 판본까지 비교해가며 족보를 그리는 별종이었다. 반짝이는 미모를 보고 그녀에게 다가선 남자들은 미셸이 쏟아내는 이야기에 질려 뒷걸음질 치곤 했다.
“그러니 이름을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양해해주길 바라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나요?”
“부를 것도 없소. 적당히 생략하시오.”
“그럴 수야 있나요. 제가 괜찮은 이름을 하나 지어드려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시오. 그런데 날이 춥다고 하지 않았소? 이렇게 나와 있어도 괜찮은 거요.”
“새벽에는 상당히 추웠는데 해가 뜨니 훨씬 다닐 만하군요. 폐하께선 어쩐 일이신가요?”
“그 녀석이 멀리서 보이기에 무슨 일을 할까 해서 와봤소. 제멋대로라 내 말이 아니면 듣지 않으니까.”
“그러시군요.”
세스는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황제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한 박자 늦게 손등을 높이 올려 턱만 살짝 숙이고 입술을 댔다.
아.
바람이 불었다. 땀이 난 손가락에 휘감겨 서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입술이 닿은 부분은 따뜻했다. 미지근한 살결이 셋째 손가락 뿌리에 닿았다. 겨울햇살 같은 앞머리가 흔들리면서 석고상처럼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마 아래로 곧게 뻗은 콧날과 뺨만 보였다. 입술은 세스의 손등에 가려 유독 눈이 두드러져 보였다.
속눈썹조차 금빛이었다. 그 광채에 감싸인 여린 연둣빛.
세스는 자신의 검은 머리칼이 날리는 것은 느끼지 못하면서도, 옐렌의 가볍게 떨리는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볼 수 있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세스는 얼빠진 소녀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적절한 때에 손을 거두었다. 한없이 늘어났던 찰나가 끝났다. 손수 장갑을 끼자 사슴가죽이 손가락을 포근하게 감쌌다. 셋째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산책을 계속 할 거요?”
“폐하께서 에스코트 해 주신다면요.”
잠시 그 매끈한 얼굴에 곤란한 빛이 스쳤다.
평생을 황제의 딸로 자라난 세스는 ‘남자들의 일’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아마 바쁘겠지. 대사와 할 얘기도 있을 테고, 평소에 하던 일이 신부가 오는 날이라고 하루 빼먹고 찾아올 리도 없는 거고.
오늘 만난 사람이다.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지금부터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조금…….”
“바쁘시다면 저는 괜찮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실망했다. 세스는 숙녀답게 고개를 저었지만 눈을 내리깔자 사위가 조금 어두워졌다. 깃털이나 풀잎처럼 가벼운 호감이라 해서 그가 가져오는 실망까지 같은 무게라면 세상을 살기가 얼마나 편할까.
황제의 구두가 잔디를 밟아 비볐다. 풀잎이 짓이겨졌다.
“혹시 밤이라도 괜찮다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세스는 이러한 감정적 유희를 몇 번이고 겪어봤다. 그런데도 처음 시작할 때는 설렌다. 재미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세스는 마음의 빛을 얼굴에 끌어모은 듯 환하게 웃었다.
“네.”
정확히 열두 시간 뒤, 세스는 흰 용을 만난 그 자리에 황제의 손을 잡고 다시 나왔다.
전나무 가지에 내려앉은 것은 햇빛이 아니라 달빛과 별빛, 그리고 보드라운 어둠이었고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열이었다. 정원 여기저기에 있는 높은 장대에는 유리로 만든 등불이 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 하나하나 양초가 들어 있어 환한 빛을 냈다.
유리는 상당히 복잡한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어서, 빛이 희한한 곳에서 무리를 이루었고, 옅게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나무 그림자와 어우러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낮과는 완전히 달랐다. 세스는 감탄하며 꽃 한 송이 없는 정원이라 은근히 폄하하던 과거의 자신을 꾸짖었다. 대체 무슨 기름을 썼기에 이렇게 밝은 빛을 낼까?
세스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호위를 물렸기 때문에 세스의 옆에는 황제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미모를 감상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폐하께서 지나치게 잘생기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세스는 코시카의 옐렌 파블로비치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혈육의 피를 묻히고 광소를 터트리는 미친 남자를 상상해왔다.
처음에는 사람이 아니라 털이 부숭부숭 난 곰의 형상을 띠었다가, 나중에 백금발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털이 부숭부숭 난 백금색 곰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갸름한 얼굴 위에 배치된 이목구비는 섬세하면서도 시원했다. 세스는 대단히 억울해졌다. 이블린 거울의 홀에 데려다 놓는다면 여자들이 근처에도 가지 않을 미모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집올 때 조금이라도 화장을 열심히 했을 텐데. 누가 이렇게 눈부시게 예쁜 남자일 줄 알았나.
“여자 같은 얼굴이지.”
“잘 아시는군요. 그래서 비교 당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스스로 추녀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미녀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있으면 그 곳 때문에 내가 이렇다 원망이라도 할 것을 세스의 눈, 코, 입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고칠 곳이 없었다.
기실 끼리끼리 결혼하여 오랜 근친혼을 거듭해온 황족이나 공족 중에서 눈부신 미인을 찾기란 지난한 일. 거울의 홀에 돌아다니는 미인들은 대부분 사창가 출신의 코르티잔인 것이 현실이 아닌가. 물론 세스의 소중한 친구인 미셸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여자였다!
대체 왜 이 남자는 남자면서도 이렇게 곱상하단 말인가. 그의 어머니인 보르디(로렌의 여섯 대공가 중 하나)의 엘리엔이 시대를 풍미한 눈부신 미인이었다고는 해도 그 미모가 꼭 아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대는…….”
게다가 어리기까지 하고. 이렇게나 어리고, 잘생기고, 지위 높은 남자라니. 주님께서는 세상의 일부를 통치할 권위를 그에게 내리셨으면 됐지, 뭐가 부족해서 저 많은 것들을 안겨주셨을까? 어쩌면 창조를 하실 때 실수로 선물의 주머니를 쏟으신 것일지도 모르지.
세스는 설마 자신이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와 결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옐렌 파블로비치는 올해 생일이 지나 열여덟이라고 했던가. 세스는 지난 여름 생일이 지나서 스물 셋이었다.
황제는 미간을 문지르더니 세스와 달리 참지 않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참 희한한 생각을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