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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숲 (3)


“무슨 생각이 희한하다는 말씀이신지?”

“글쎄. 감히 황후의 외양 따위를 평가해서 비교하는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폐하께서야말로 모르시는 말씀이군요. 굳이 평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만 달렸다면 전부 알 거예요. 외모만큼 사람을 즉물적으로 평가하는 방법도 드무니까요.”

“친구 중에 미인이라도 있나보군? 아까 말한 그 서사시를 좋아한다는 사람인가?”

세스는 그 파고드는 듯한 예리함에 놀랐다.

“혹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시나요?”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황당한 소리요.”

“전설 속 생물이라는 용도 데리고 계시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오? 굳이 마음을 읽는다는 소리까지 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소만.”

“그렇군요. 멍청한 생각을 했군요.”

세스는 자신이 ‘비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그가 추측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순순히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말씀하신대로. 미셸은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로 예쁜 애예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만 앉아 있어도 말 한 번 걸어보고 싶은 남자들이 줄을 서죠.”

잠시 심미안이라는 저울에 눈앞에 있는 황제와 미셸을 달아보았다. 남자와 여자를 외모로 비교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상상 속에서의 둘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래서 저는 비교당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어요.”

어라. 세스는 놀라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 안에 자신을 갈무리했다. 가슴이 뛰었다. 서늘한 바람을 타고 무심결에 튀어나간 말은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진실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나는 은연중에 미셸을 질투하고 있었구나.

세스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깨달음을 얻은 세스와는 달리 옐렌 황제의 얼굴은 어딘가 시큰둥해보였다.

“글쎄. 별로 부러워할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예?”

“그대의 친구 앞에 줄 선다는 그 많은 남자 중에 한 명이라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있었소? 무례한 추측이지만 없었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자들은 잘생긴 남자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소? 신분도, 재력도, 성격도? 그건 아닐 텐데.”

세스는 차분하게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사흘 후면 남편이 될 코시카 황제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대공가의 아들이나 손자라면 몰라도, 자작이나 남작 정도의 신분이라면 역시 아무리 얼굴이 잘생겼다고는 해도 결혼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룻밤 상대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역시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사내라고 별다를 건 없소. 사람을 겉가죽의 미추로만 평가하는 건 하룻밤 상대로 대할 때 정도요. 혹은 옆에 끼고 다닐 정부. 그런데 얼굴만으로 지분대는 자들 중 쓸모있는 자가 있을 리 없잖소. 하물며 황녀의 ‘친구’씩이나 되는 가문의 아가씨라면 그런 쪽 말고도 다른 쪽으로 흑심을 품은 놈들도 잔뜩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대의 친구는 참 피곤하겠다는 말이오.”

말을 늘어놓은 황제는 쑥스럽게 구둣발로 땅을 비비고는 말을 뱉었다.

“그러니 비교니 뭐니 이상한 생각할 건 없소.”

“그 말씀은 제가 미인은 아니라는 뜻이시로군요?”

세스가 장난스럽게 꺼낸 말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평생 거짓말 따위는 할 필요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아내 될 사람의 외양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소.”

“제가 궁금하다면요?”

“그건.”

“역시 제가 미인이 아니라서 대답을 피하시는 거로군요.”

세스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실망한 시늉을 해보였다.

“그건 아니고…….”

“그럼요?”

세스는 어떤 말이 나오는지 궁금해, 고개를 한껏 꺾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런 집요함은 숙녀답지 못한 못된 버릇이었지만 세스는 끝끝내 고치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키가 컸다. 키가 작은 세스로서는 발이 부르틀 정도로 높은 구두를 신고 나왔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으면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우아한 뺨에 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찾는 듯했다.

싫은 사람이었다면 뭘 이렇게 머뭇거려, 말주변 없기는! 하고 벌컥 화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신중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아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운 편이라고 생각하오.”

기어코 그 말이 나왔다. 억지로 재촉한 말인데도 마음이 막 유치가 나려는 잇몸처럼 간질거렸다. 큰일이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세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밤이어서 그럴까. 마음이 이토록 쉽게 흔들리고.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입에 발린 말로 미모를 칭찬해주는 것은 남쪽에서는 당연한 예의였으므로, 이보다 훨씬 화려한 말도 수백 번은 들어왔지만.

불쑥 충동이 들었다. 이 불공평한 상황을 타파하고 싶다는 충동이.

“정말요?”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소.”

“진심이시라면 키스해주세요.”

황제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코시카의 옐렌 1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황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마당에 그건 온당하지 않소.”

“하지만 사흘 뒤면 결혼식인걸요.”

부러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적극적으로 한 발짝 다가가자, 넓은 어깨가 움찔했다. 세스는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눌러 참느라 평생의 연기력과 참을성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흰 얼굴이 귀까지 붉어져 있어서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밤의 전나무처럼 키가 큰 남자가 세스처럼 작은 여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예쁘다고 해주셨잖아요? 헛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세요.”

연녹색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하지만 이미 정원에서 모든 사람을 물렸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세스는 그 모습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일그러진 입술에 덧입혀놓은 빛깔과, 우아한 콧날과, 곧은 눈썹 같은 것. 빛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얼굴에 어린 그늘의 모양이 바뀌었기 때문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건…….”

마침내 황제의 등이 나무 둥치에 닿았다. 뒤를 돌아보고 지은 표정은 정말이지 걸작이었다.

전 대륙에 무시무시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남자가 자신 때문에 쩔쩔 매는 모습을 실컷 감상한 세스는 손으로 입도 가리지 않고 소리 내서 웃었다. 구슬 같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황​녀​(​g​r​a​n​d​e​-​d​u​c​h​e​s​s​e​,​ 여대공)?”

검은 속눈썹에 눈물마저 맺혔다.

“하하하하. 실례했어요, 폐하. 핫. 장난이었답니다.”

“장난……?”

​“​하​하​하​하​하​하​하​하​.​ 네.”

그리 숙녀답지 못한 웃음이라는 꾸중은 항상 들어왔다. 숙녀라면 항시 입술만을 움직여 우아하게 미소 짓는 것이 옳다고. 그래도 한 번 버릇이 들자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배가 아프도록 웃었지만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세스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 웃었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는 여러 빛깔이 굽이치고 어깨에 두른 망토도 털 한 올 한 올 유쾌하게 춤을 추었다.

“죄송해요. 농담이었는데, 너무 진지해보이셔서 그만.”

“황녀!”

“아하핫.”

한창 웃고 나자 차가운 밤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온 몸을 휘감아 돌았다. 만족감이 가득 찼다. 세스는 황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늦었을 것 같은데, 다른 곳을 둘러봐도 될까요? ​안​내​해​주​시​겠​어​요​?​”​

“…….”

“아니면 들어가는 것도……, 어?”

손을 잡았다. 당겼다. 반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세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힘 때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당황해 눈을 감는 것도 잊어, 세스는 점차 커지는 자신의 모습을 꼼짝없이 들여다보아야 했다.

“아…….”

서툴게 입술을 스쳤다. 마음에 맞았다.

아, 이번 화 쓰는 거 진짜 힘들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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