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화에 잠수함 패치가 있었습니다ㅠㅠ
죄송합니다. 수정 전 8화를 보신 분들께서는 8화를 다시 한 번 읽어주세요!
-전하! 계십니까! 대공 전하!
근위대 장교의 목소리였다. 옐렌 파블로비치 키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오히려 작은 몸을 더욱 둥글게 말고 몸을 숨겼다.
-전하!
봄에 땅을 뚫고 나와 내리누르는 자갈을 들어 올리는 쌍떡잎 같은 연둣빛 눈이 어린아이답지 않은 서늘한 총기를 발했다. 오른다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가 몸을 웅크린 곳은 상록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가을 하늘이 청명했다. 바닥에 깔린 이끼나 잔디 등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밟으면 사박사박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넉살 좋은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안 들리십니까!
소년은 손톱을 깨물었다. 모양이 좋지 않은 손톱이 층져서 뜯겨나가고, 초승달 모양으로 피가 맺혔다. 들키지 않을 리 없다. 샅샅이 뒤지면 곧 발견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다리를 하고 오래 걸을 수도 없다. 움직인다 해도 핏자국이 남아 금방 들킬 것이다.
북쪽 제국 코시카의 계승 서열 2위에 위치한 소년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기했다.
그는 현재 키옌 가문의 선조가 다스리던 성(城)인 키예프 지역에 와 있었다. 황실의 직계 대공이나 여대공은 어렸을 때 반 년에서 이 년 정도 키예프 공 작위를 받아 이 지역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옐렌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지역에 석 달 째 머물고 있었다.
키예프에 오면서 누이 알렉산드라에게 물려받은 말 즈베즈다를 타고 산 속에 있는 호수까지 말을 몰고 있는데 나무 사이에서 뜬금없이 거대한 곰이 튀어나왔다.
이 근처는 곰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흉포한 짐승은 그에게 놀랄 시간을 주지 않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를 호위하고 있던 근위대 장교 넷이 일제히 검을 뽑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치라고 소리 질렀다. 그들은 한 몸처럼 용맹하게 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무장했다고 해도 곰을 이길 수 없다. 특히 키가 이층 천장까지 닿을 듯 거대한 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날램이나 힘 모두 수준이 다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비명, 유언, 으득으득 살과 뼈를 씹는 소리, 말의 단말마.
그 모든 무게를 뒤로 하고 옐렌은 즈베즈다를 채찍질했다. 황족에게 있어서 호위란 여분의 목숨이다. 옐렌이 살아 도망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된다. 그들의 죽음은 그의 생명으로 보답하면 된다.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옐렌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곰이 호위기사의 살을 씹어 먹는 동안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시카 근위대 장교는 전원 세습귀족 출신으로서, 키예프에 온 뒤로는 항시 붙어 다니며 옐렌과 낯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특히 코르사코프 경은 옐렌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를 호위해온 사람이었다.
그 순간 석궁의 방아쇠 소리가 들렸다. 옐렌은 그 순간 교육받은 대로 머리를 숙였고, 화살은 그의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반응하지 못했더라면 화살을 어깨에 맞고 낙마했을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그의 다리를 스쳤다.
기막힌 통증에 낙마할 뻔했지만 간신히 고삐를 붙들었다.
저격수가 두 명 뿐이었는지 석궁 재장전 중 그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말을 모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허벅지 바깥쪽에 화살이 스쳐 큰 혈관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해도, 승마는 하반신이 어느 정도 버텨주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옐렌은 간신히 시냇가에 도착해서 즈베즈다를 풀어주었다. 즈베즈다는 훈련이 잘 된 말이었다. 고삐를 묶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서서 큰 눈을 껌뻑이며 옐렌을 지켜보았다.
-가!
자갈을 세 개 정도 던졌다. 하나가 그녀의 얼굴에 맞았다. 말이 날뛰며 사라져갔다.
소년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며 시냇물 속에 들어가 물을 거슬러 걸었다. 예가체프 장군에게 배운 생존술이었다. 그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장군에게 감사했다. 전설적인 전공을 세운 예가체프 장군은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코시카의 후계자인 어린 대공이 전장에 나가 미아가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아는 것을 꿋꿋이 가르쳤고, 그 지식의 얼개는 훌륭하게 옐렌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라.
어린아이도 기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이었다. 한참 절뚝거리며 거슬러 올라간 옐렌은 적당히 커다란 가시덤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배운 대로 옷을 찢어 상처를 감싸려고 시도했지만, 힘이 모자라 옷을 찢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찾으러 온 사람이 가짜 근위대원이라니. 옐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사람 모른다. 입은 옷은 장교인데,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전하!
그는 이를 악물고 후회했다. 갑자기 산책을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황궁을 떠나기 싫어서 누이의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던 때가 언제냐는 듯, 그는 키예프 생활에 잘 적응했다. 딱딱한 예법도, 귀찮은 공부 선생도 없었다. 한 번 황궁을 나가려면 서른 가지의 이유와 서류를 대야 했는데 키예프 공이 된 지금은 나가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옐렌의 마음대로였다. 거기에 취해서 안전을 잊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사람 목숨 넷, 그리고 즈베즈다를 잃어버렸다.
속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킁, 옐렌은 소리 죽여 코를 들이마시고는 흐느껴 울었다.
갑자기 정수리를 덮고 있던 덤불 그림자가 사라졌다.
-아하, 여기 계셨군요.
말투는 정중한데 눈은 살인자의 것이었다. 옐렌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흐끅. 흑. 흐끅.
-전하. 일어나십시오.
예비 살인마의 손에 들린 무거운 구식 장검이 번뜩였다. 귀밑까지 찢어지게 웃자 충치 가득한 누런 이가 드러났다.
-너는, 흐끅, 누구냐.
저 자는 근위대 장교가 아니었다. 혹시나 오늘 황도에서 막 키예프로 내려온, 옐렌이 모르는 근위대 장교일 수도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근위대는 코시카 황족에게 충성한다. 대공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지 않는 근위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서 무엇 하려 하십니까?
-너는 제국 대공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느냐? 당장 무릎을 꿇어라!
발악 같은 고함에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이구, 어린 분이 패기가 대단하십니다?
-누구냐. 사주한 자가.
-왜요, 돈이라도 더 얹어주시려고요?
-그래. 달라는 대로 주마.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소인이야 감읍할 따름이지요. 헤헤헤. 이 꼬맹이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악!
옐렌은 허벅지에 칼이 박힌 순간에도 마지막 문장을 알아들었다. 북부 코시카를 비롯한 근방 속국에서 사용하는 캬트 어가 아닌 중부 어였다. 외국인이다. 옐렌은 칼이 박힌 위치를 보고 부르르 떨었다. 절망적이었다. 허벅지 안쪽은 가장 피부에 가까운 동맥인 대퇴동맥이 지나간다. 칼을 뽑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오고, 옐렌은 빠르게 절명할 것이다.
-어차피 뒤질 거 화살 한 대에 좀 죽어주면 안 되나. 여기까지 따라오게 하고 지랄에 거품을 무네. 그런다고 목숨 보전할 줄 아냐? 응?
곱게 자란 소년은 그의 말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천박한 중부 어 비속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무서웠다.
석 달만 있으면 알렉산드라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내가 오늘은 씨발, 응? 꼭 마을에 내려가서 따뜻한 걸 좀 주둥이에 처넣으려 했더니만, 내 계획에 초를 쳐? 씨발. 똥개훈련도 정도가 있지.
-아아아아악!
칼날을 비틀자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어린 대공은 그 순간 자신의 소망을 강렬하게 발했다.
누가 좀 살려줘! 날 살려줘!
-푸른 피 좋아하네. 북부 황족 피도 이렇게 새빨갛잖아? 킥킥킥.
남자가 소년을 발로 뻥 걷어찼다. 소년은 텅 빈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죽여 버린다.
그 때 어디선가 구원의 악마가 말을 걸었다.
[이름을 말해라, 어린 마법사.]
응?
[내 이름을 줄 테니 네 이름을 다오. 그러면 살려주겠다.]
살려준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옐렌은 벌써부터 고통으로 시야가 검어진 도중에도 힘겹게 혀를 놀렸다.
-옐렌.
-뭐라는 거야. 퉤.
-옐렌 파블로비치 키옌.
흡족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설산이 성큼 움직여 여기까지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옐렌은 눈에 힘을 주었다. 거대한 용이었다. 영혼을 태우는 불처럼 푸른 눈에, 몸은 희기만 했다. 몸은 성채만 하고 날개가 컸다.
-씨, 씨발!
남자가 도망쳤다. 땅이 쾅쾅 울려서 아팠다. 용이 퍼덕거리더니 생각 외로 사뿐하게 지면에 내려앉았다. 용은 짐짓 뽐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파프너다.]
그 순간 용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옐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아픔이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수정 전 8화를 보신 분들께서는 8화를 다시 한 번 읽어주세요!
기억
-전하! 계십니까! 대공 전하!
근위대 장교의 목소리였다. 옐렌 파블로비치 키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오히려 작은 몸을 더욱 둥글게 말고 몸을 숨겼다.
-전하!
봄에 땅을 뚫고 나와 내리누르는 자갈을 들어 올리는 쌍떡잎 같은 연둣빛 눈이 어린아이답지 않은 서늘한 총기를 발했다. 오른다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가 몸을 웅크린 곳은 상록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가을 하늘이 청명했다. 바닥에 깔린 이끼나 잔디 등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밟으면 사박사박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넉살 좋은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안 들리십니까!
소년은 손톱을 깨물었다. 모양이 좋지 않은 손톱이 층져서 뜯겨나가고, 초승달 모양으로 피가 맺혔다. 들키지 않을 리 없다. 샅샅이 뒤지면 곧 발견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다리를 하고 오래 걸을 수도 없다. 움직인다 해도 핏자국이 남아 금방 들킬 것이다.
북쪽 제국 코시카의 계승 서열 2위에 위치한 소년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기했다.
그는 현재 키옌 가문의 선조가 다스리던 성(城)인 키예프 지역에 와 있었다. 황실의 직계 대공이나 여대공은 어렸을 때 반 년에서 이 년 정도 키예프 공 작위를 받아 이 지역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옐렌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지역에 석 달 째 머물고 있었다.
키예프에 오면서 누이 알렉산드라에게 물려받은 말 즈베즈다를 타고 산 속에 있는 호수까지 말을 몰고 있는데 나무 사이에서 뜬금없이 거대한 곰이 튀어나왔다.
이 근처는 곰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흉포한 짐승은 그에게 놀랄 시간을 주지 않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를 호위하고 있던 근위대 장교 넷이 일제히 검을 뽑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치라고 소리 질렀다. 그들은 한 몸처럼 용맹하게 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무장했다고 해도 곰을 이길 수 없다. 특히 키가 이층 천장까지 닿을 듯 거대한 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날램이나 힘 모두 수준이 다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비명, 유언, 으득으득 살과 뼈를 씹는 소리, 말의 단말마.
그 모든 무게를 뒤로 하고 옐렌은 즈베즈다를 채찍질했다. 황족에게 있어서 호위란 여분의 목숨이다. 옐렌이 살아 도망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된다. 그들의 죽음은 그의 생명으로 보답하면 된다.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옐렌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곰이 호위기사의 살을 씹어 먹는 동안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시카 근위대 장교는 전원 세습귀족 출신으로서, 키예프에 온 뒤로는 항시 붙어 다니며 옐렌과 낯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특히 코르사코프 경은 옐렌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를 호위해온 사람이었다.
그 순간 석궁의 방아쇠 소리가 들렸다. 옐렌은 그 순간 교육받은 대로 머리를 숙였고, 화살은 그의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반응하지 못했더라면 화살을 어깨에 맞고 낙마했을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그의 다리를 스쳤다.
기막힌 통증에 낙마할 뻔했지만 간신히 고삐를 붙들었다.
저격수가 두 명 뿐이었는지 석궁 재장전 중 그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말을 모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허벅지 바깥쪽에 화살이 스쳐 큰 혈관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해도, 승마는 하반신이 어느 정도 버텨주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옐렌은 간신히 시냇가에 도착해서 즈베즈다를 풀어주었다. 즈베즈다는 훈련이 잘 된 말이었다. 고삐를 묶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서서 큰 눈을 껌뻑이며 옐렌을 지켜보았다.
-가!
자갈을 세 개 정도 던졌다. 하나가 그녀의 얼굴에 맞았다. 말이 날뛰며 사라져갔다.
소년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며 시냇물 속에 들어가 물을 거슬러 걸었다. 예가체프 장군에게 배운 생존술이었다. 그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장군에게 감사했다. 전설적인 전공을 세운 예가체프 장군은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코시카의 후계자인 어린 대공이 전장에 나가 미아가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아는 것을 꿋꿋이 가르쳤고, 그 지식의 얼개는 훌륭하게 옐렌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라.
어린아이도 기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이었다. 한참 절뚝거리며 거슬러 올라간 옐렌은 적당히 커다란 가시덤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배운 대로 옷을 찢어 상처를 감싸려고 시도했지만, 힘이 모자라 옷을 찢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찾으러 온 사람이 가짜 근위대원이라니. 옐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사람 모른다. 입은 옷은 장교인데,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전하!
그는 이를 악물고 후회했다. 갑자기 산책을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황궁을 떠나기 싫어서 누이의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던 때가 언제냐는 듯, 그는 키예프 생활에 잘 적응했다. 딱딱한 예법도, 귀찮은 공부 선생도 없었다. 한 번 황궁을 나가려면 서른 가지의 이유와 서류를 대야 했는데 키예프 공이 된 지금은 나가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옐렌의 마음대로였다. 거기에 취해서 안전을 잊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사람 목숨 넷, 그리고 즈베즈다를 잃어버렸다.
속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킁, 옐렌은 소리 죽여 코를 들이마시고는 흐느껴 울었다.
갑자기 정수리를 덮고 있던 덤불 그림자가 사라졌다.
-아하, 여기 계셨군요.
말투는 정중한데 눈은 살인자의 것이었다. 옐렌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흐끅. 흑. 흐끅.
-전하. 일어나십시오.
예비 살인마의 손에 들린 무거운 구식 장검이 번뜩였다. 귀밑까지 찢어지게 웃자 충치 가득한 누런 이가 드러났다.
-너는, 흐끅, 누구냐.
저 자는 근위대 장교가 아니었다. 혹시나 오늘 황도에서 막 키예프로 내려온, 옐렌이 모르는 근위대 장교일 수도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근위대는 코시카 황족에게 충성한다. 대공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지 않는 근위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서 무엇 하려 하십니까?
-너는 제국 대공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느냐? 당장 무릎을 꿇어라!
발악 같은 고함에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이구, 어린 분이 패기가 대단하십니다?
-누구냐. 사주한 자가.
-왜요, 돈이라도 더 얹어주시려고요?
-그래. 달라는 대로 주마.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소인이야 감읍할 따름이지요. 헤헤헤. 이 꼬맹이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악!
옐렌은 허벅지에 칼이 박힌 순간에도 마지막 문장을 알아들었다. 북부 코시카를 비롯한 근방 속국에서 사용하는 캬트 어가 아닌 중부 어였다. 외국인이다. 옐렌은 칼이 박힌 위치를 보고 부르르 떨었다. 절망적이었다. 허벅지 안쪽은 가장 피부에 가까운 동맥인 대퇴동맥이 지나간다. 칼을 뽑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오고, 옐렌은 빠르게 절명할 것이다.
-어차피 뒤질 거 화살 한 대에 좀 죽어주면 안 되나. 여기까지 따라오게 하고 지랄에 거품을 무네. 그런다고 목숨 보전할 줄 아냐? 응?
곱게 자란 소년은 그의 말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천박한 중부 어 비속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무서웠다.
석 달만 있으면 알렉산드라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내가 오늘은 씨발, 응? 꼭 마을에 내려가서 따뜻한 걸 좀 주둥이에 처넣으려 했더니만, 내 계획에 초를 쳐? 씨발. 똥개훈련도 정도가 있지.
-아아아아악!
칼날을 비틀자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어린 대공은 그 순간 자신의 소망을 강렬하게 발했다.
누가 좀 살려줘! 날 살려줘!
-푸른 피 좋아하네. 북부 황족 피도 이렇게 새빨갛잖아? 킥킥킥.
남자가 소년을 발로 뻥 걷어찼다. 소년은 텅 빈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죽여 버린다.
그 때 어디선가 구원의 악마가 말을 걸었다.
[이름을 말해라, 어린 마법사.]
응?
[내 이름을 줄 테니 네 이름을 다오. 그러면 살려주겠다.]
살려준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옐렌은 벌써부터 고통으로 시야가 검어진 도중에도 힘겹게 혀를 놀렸다.
-옐렌.
-뭐라는 거야. 퉤.
-옐렌 파블로비치 키옌.
흡족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설산이 성큼 움직여 여기까지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옐렌은 눈에 힘을 주었다. 거대한 용이었다. 영혼을 태우는 불처럼 푸른 눈에, 몸은 희기만 했다. 몸은 성채만 하고 날개가 컸다.
-씨, 씨발!
남자가 도망쳤다. 땅이 쾅쾅 울려서 아팠다. 용이 퍼덕거리더니 생각 외로 사뿐하게 지면에 내려앉았다. 용은 짐짓 뽐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파프너다.]
그 순간 용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옐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아픔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