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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월담 (1)


 다리가 길다. 팔도 길다. 시선이 높다. 세스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휘청휘청 걸었다. 처음 몇 걸음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넘어질 뻔했다. 탁자를 잡지만 않았더라면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나동그라졌으리라. 갑자기 키가 두 뼘은 커졌는데 바로 적응이 될 리 만무했다.

세스는 걷다 말고 금속으로 된 기둥에 흘긋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옅은 금빛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겨우 덮을 정도로 짧았고, 키가 컸다. 비법을 알아내고 싶을 정도로 흰 피부는 붉은 혼례복과 잘 어울렸다.

“큼. 크흠.”

헛기침을 해보니 목소리도 영락없이 변성기가 막 끝난 남자의 것이었다.

동화에라도 나올 것처럼 신기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요정 할멈이 나타나 비비디 바비디 부를 외치지나 않을까? 하긴 상드리용의 요정 할멈은 다람쥐 구두와 호박 마차,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주었지 상드리용을 남자로 변신시켜주지는 않았다.

세스를 변신시켜준 것은 코모도, 도마뱀의 이름을 붙인 용이었다.

결혼식 닷새 째, 세스와 옐렌 황제는 단상에 앉아 지루함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무리 숙녀들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몇 시간이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세스라고 해도, 단상 위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웃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슬슬 코시카식 복장에 들어간 수의 의미를 대부분 외웠다. 의복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남편 될 사람인 황제의 사소한 취향까지 탐욕스레 기억에 넣었는데도 머리 한 쪽이 남아도는 기분이었다. 수틀 하나, 책 한 권이라도 있으면 신나게 할 텐데. 하품을 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세스는 오후가 될 때까지 견디고 견디다가 말을 내뱉었다.

“지루하군요.”

“경고했잖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나왔다. 신부 뿐만 아니라 신랑 역시 대단히 따분해보였다. 흰 이마에 ‘나 지루해’라고 박아도 이보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둘은 해바라기를 하는 여름날 고양이처럼 어깨를 늘어뜨린 채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지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세스는 결혼식 이튿날부터 코시카까지 오는 동안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고, 황제도 나름대로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북해에서 많이 잡히는 연어며 이런저런 생선들을 맛보고, 요리 방법의 차이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짜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스는 사흘 내내 떠들면서

세스가 코시카까지 오는 동안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흘 만에 동이 났다. 그리고 코시카 황제는, 대륙의 절반을 공포로 휘어잡을 능력이나 한 처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과거를 남에게 재미있게 풀어놓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 지난 사흘 동안 판명되었다.

옐렌 1세는 자신이 눈치를 보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간 경험이 거의 없는 듯했다.

“앞으로 이틀인가요?”

“오늘을 제한다면.”

“절망적이군요. 산책도 티타임도 없이 내내 앉아있어야 한다뇨. 공연은 밤에나 하는 건가요?”

“인사 올 사람이 많으니까. 도망치고 싶소?”

“거짓말은 하지 않겠어요. 로렌에서는 결혼식이 하루면 끝나거든요. 성당에서 혼인미사를 올리고, 저녁에는 식사와 무도회가 있고, 불꽃놀이를 봐요. 그리고 신랑 신부가 침실에 들어가면 그걸로 결혼식이 끝이 나지요.”

세스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다가, 옐렌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 침실.

세스는 별 부끄러울 일도 없는 여상스러운 언급이라고 생각했건만, 신랑이 그리 반응하니 도리어 같이 부끄러워졌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이 천국에 닿았는지, 마침 한 쌍의 부부가 인사를 왔다. 행복을 축원하는 기원을 들으며 얼굴을 수습한 황제는 괜히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을 돌렸다.

“하루만 결혼식을 하면 손님들이 올라오기 힘들겠군. 일정이 하루나 이틀 늦어지는 일은 흔하지 않소?”

“글쎄요. 중요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블린에 살고 있는걸요. 딱히 올라오길 기다릴 이유가 없지요.”

일 년에 한 번 하는 대회의에는 반드시 여섯 명의 대공 혹은 그 후계자가 참석해야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영지와 이블린을 오가는 것은 낭비였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대부분의 대공가 직계들은 이블린에서 일 년 내내 지냈다.

“대공가의 결혼식은?”

“이블린에 있는 홀을 빌려서 한 번 열고, 고향에서 한 번 더 연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문의 본성에서 하는 식은 조촐하게 하는 것이 유행인가 봐요.”

드디어 쓸 만한 주제를 잡은 세스는 재잘재잘 최근 있었던 형제의 결혼식에 대해서 떠들었다. 황제는 이야기를 차분히 듣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 시끄럽겠군.”

“아무래도 그렇지요. 방에서 정원으로만 나가도 수십 명하고 마주쳐야 한다니까요. 예법에 신분 높은 사람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말을 걸 수 없다고 정의해놓은 건, 아마 시끄러운 돌림노래를 견딜 수 없었던 어떤 선조가 아닐까요? 그러지 않았다간 산책 한 번 할 때마다 ‘어머나, 마담 르와이얄’ 소리를 백 번은 넘게 들어야 했을 거예요.”

옐렌 황제는 의례적으로 잔을 들어 한 모금 과일 음료를 머금더니, 물었다.

“황녀, 아직 지루하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요. 무슨 일이신가요?”

남쪽의 피가 섞였음을 드러내는 옅은 새싹빛 눈에 희귀하게도 소년다운 장난기가 반짝였다.

“도망칠 용의가 있는지 물어보는 거요.”

옐렌 황제의 어머니인 옐레나 대공비는 보르디 대공녀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칼레의 아델라이드 선황후의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칼레의 아델라이드 선황후는 세스의 할머니였다. 즉 옐렌 1세와 로렌의 세스는 육촌으로서, 둘 모두 선선대 칼레 대공의 증손이었다. 세스는 그 새싹빛 홍채를 물려준 조상에게서 똑같이 물려받았지만, 그 색채만은 사뭇 다른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게 가능한가요?”

“첫날에도 말했지만, 신랑은 얼마든지 일어나서 도망칠 수 있소.”

“어머나, 서운하군요. 폐하께서는 저만 놔두고 가려고 하셨나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황녀의 생각을 묻지 않았겠지. 그래서 황녀의 의사는?”

“물론 좋답니다. 흥미진진하군요. 그런데 결혼식에서 신부가 사라져도 괜찮을까요?”

세스가 동의를 표하자, 옐렌 황제는 소매의 매듭을 풀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호리호리한 팔목이 드러났다. 소매 안쪽에는 작은 월장석으로 보이는 보석이 여분의 단추처럼 붙어있었다.

“나와.”

[싫어.]

보석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세스는 경탄했다.

“코모도 님?”

옐렌이 흘끗 세스를 쳐다보았다.

“들리오?”

“그럼요. 방금 여기에서 싫다고.”

[마담 르와이얄. 대체 코모도는 뭐냐.]

“어머나! 정말이네.”

세스의 눈이 반짝였다.

“코모도 님이시죠? 이런 것도 되는군요? 신기하네요.”

“그것보다 나오라고.”

황제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단추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흰 보석이 깜빡이며 빛을 뿜어냈다.

[과식해서 졸리다. 그 정도의 장난은 네가 알아서 하지 그래.]

“나만 빠져나가면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나가야 하잖아. 앉아 있을 사람 필요하니까 나와.”

황제는 용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더니 테이블에서 작은 칼을 들었다. 칼을 손가락에 살짝 대자 용이 벌컥 짜증을 냈다.

[아, 정말.]

보석이 소맷단에서 굴러 나오더니, 세스가 처음 코시카에 도착하던 날 만난 작은 짐승 모양으로 화했다. 세스는 진심으로 미셸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환호했다.

용은 짐짓 날개를 퍼덕이며 목을 쭉 펴보였다.

[아니, 코모도가 뭐냐고 물었는데. 대답부터 하고 마저 놀라면 안 되겠나. 남쪽의 황녀.]

“폐하께서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제가 도감을 보고 골랐어요.”

[웃긴 이름이군.]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 나쁘지 않군. 이 몸을 그렇게 불러도 좋다.]

지극히 위엄 넘치는 말투에, 비밀을 알고 있는 황제가 큭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웃는 동안 세스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용은 순순히 옐렌 황제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세스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왔다. 결혼식장에서 신부는 내내 자리를 뜰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허점이 있었다. 아마 그런 예법을 만든 사람들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신부가 ‘신랑이 되면’ 얼마든지 식장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세스는 옐렌 황제의 얼굴로 생긋 웃어보였다. 날카로운 눈이 부드럽게 가늘어지며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런 얼굴로 태어났더라면 매일 거울만 보고 살 텐데.

뒤에서 누군가가 ‘폐하’를 몇 번이고 불렀지만 듣지 못했다.

그녀는 키가 미루나무처럼 훌쩍 크고, 어깨가 넓은 호리호리한 소년의 몸으로, 얌전히 긴 치마에나 어울릴법한 종종걸음을 치며 식장을 빠져나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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