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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막 추워지기 시작한 바람이 전신을 감쌌다.
카이저린플라츠(Kaiserinplatz)ㅡ'황후의 광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수도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을 정도로 크고, 유명하다.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광장은 밤낮 상관없이 항상 사람으로 넘치고 또 넘친다.
갓 상경한 촌뜨기가 오면 눈이 휘둥그레질 '황후의 품'. 말하기 좀 그렇지만, 수도권 변방의 영지에서 온 나도 처음엔 그 규모와 인파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 풀밭만 보고 자라온 내겐 보이는 모든 게 생소한 자극이었으니까.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것들도 있고. 그런 식으로 날 촌티 못 벗은 아가씨라고 놀렸다간 내 창으로 친히 얼굴 가죽을 떠줄 테다ㅡ그래, 스승에게 하는 것처럼.
신묘하게도 스승은 내 공격을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지만, 이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르바이트 구하러 나왔다고 했잖아, 멍청한 나.
"끄윽."
……라고 해도, 술에 전 상태로는 면접도 제대로 못 보겠지. 스승이 미워서 일단 나오긴 했는데, 여기서 뭘 해야 잘 했다는 칭찬을 들을까.
일단 분수 쪽으로 좀 걸어볼까. 스승도 내가 정말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분수대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보는 게 좋겠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돈과 숙소 문제가 가장 클 테니.
생각을 정한 나는, 억지로 멀쩡함을 가장하며 광장 중앙을 향해 발을 옮겼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제대로 걸으려고 노력하는데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 행인들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따갑고 아프다. 뭐 볼 일 났나 싶어서 불쾌했지만 수치스럽기도 했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언제 어디서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행동하라고 스승이 가르쳤으니까. 다행히도 분수대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몇 걸음만 더 내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아 보였다.
……잠깐. 가만히 보니 이 사람들,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 무슨 재밌는 게 있다고 내 손을 자꾸 노려보ㅡ
"으억!"
"꺅!"
ㅡ는지 확인하려는 찰나,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사람과 부딪친 건 확실한 모양이다. 시야가 빙글 돌자 나도 모르게 밑에서 올라올 뻔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을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고, 창피한 상황이 되기 전에 급히 자세를 고치고 앞을 바라보았다. 구경꾼이 생긴 것은 애써 무시했다.
나와 부딪친 피해자는, 흰색 로브를 두른 여성.
복장이 구시대적인 건 둘째 치고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턱선으로 보아 미소녀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분홍빛 감도는 머리칼이 후드 밖으로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색은 매우 드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여자는 제일 먼저 주변을 살폈다. 급한 용무라도 있는 듯 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겠는데 계속 두리번거리고만 있으니, 왠지 나는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어 뱃속이 울렁거렸다. 네 사정은 내 알 바 아닌데, 최소한 서로 사과 정도는 하고 넘어가자고. 그런 식으로 굴면 기분 나빠지니까.
내 기준으로 소소한 불평을 하며, 먼저 사과할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상대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
조심성 없이 다녀서 죄송하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음?"
처음 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터. 갤러리가 있는데다 행동도 아주 당당해서 나는 살짝 겁을 먹었다. 무슨 속셈으로 손을 잡았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상대편에서 후드를 조금 걷어 자신의 얼굴을 내 앞에 공개해 보였다.
분홍빛 머리와 어우러져 인형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여자인 나도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초월적인 미모다.
하지만 그와 달리 눈빛은 불안했고, 입은 말 못하는 사람처럼 우물거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날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긴장시킬 만큼의 위력은 있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묻고 싶어지는 모습ㅡ그래, 이 여자는 뭔가 위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와 부딪친 일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왜 하필 나야?
"저기, 죄송한데 혹시 기사이신가요?"
여자가 다급히 던진 그 질문은 필사적이었다. 내가 교복을 입은 것을 보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네? 아, 아뇨. 형식상으론 기사인데 시험에 떨어져서 아직은 지망생이고……."
"확실히 대답해주세요! 경은 기사학교의 교복과 무장을 하고 있잖아요. 어느 쪽에 서 계신지 똑바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급히 부탁할 게 있어요."
"그, 그러니까 아직 지망생이라고요.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난리야? 네 급한 일이 내 급한 일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기까지……. 학교 졸업한 뒤에도 지망생인 게 자랑이 못 되는 걸 모르고 있나?
"우선 부주의해서 죄송하고요, 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 없어요. 그러니 의뢰를 하실 거면 머리에 예의부터 박고 '정식 기사'를 찾아가서 하세요."
미안한 마음마저 사라져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상대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백색 교복…… 제국 중앙 기사학교 소속이시네요. 갑주도 그 학교에서 제공한 것이고……."
내가 입은 교복과 팔다리를 감싼 경갑을 살펴보며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나 보일 법한 전형적인 태도. 차분할 것 같은 이미지와 괴리가 있어서 나는 혐오감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이마를 찌푸리며 거칠게 따졌다.
"저기요, 지금 술 취했다고 사람 무시하세요? 사정이 급한 건 알겠는데, 그딴 식으로 행동하면 들어줄 사람이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길을 걷다 부딪친 사람한테 무슨 부탁을 하시게요? 내가 그걸 들어줄 보장도 없는데."
"아,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여자. 나는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정중히 사과하고 넘어가려는 저한테 무슨 수작을 걸 생각이셨는지는 몰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그렇게 막 부탁하지 마세요. 남이…… 남이 어떤 심정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울컥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교양 있는 아가씨였기에 참았다. 사수생으로 전락한 것도 서러운데, 이런 면식도 없는 사람한테까지 자존심에 상처를 받다니. 서글프고 또 서글프고 엄청 서글퍼서 다시 가게로 돌아가 맥주나 더 마시고 싶어졌다.
여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수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갑작스런 부탁이긴 하지만, 저는 정말로……."
거기까지 여자가 말한 순간,
"경찰입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인파를 헤치며 경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카이저린플라츠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마경찰부대다. 말이 기마경찰이지 저 사람들도 다 '정식 기사'다. 자기들의 상징인 군청색 제복에 기다란 이지창을 들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둘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이변에 여자는 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자, 잠깐!"
어딜 가려는가 싶어 붙잡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녀의 팔을 놓쳤다. 체구가 작은 탓인지 여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파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금세 사라져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추측으로 좇으며 나는 허망하게 그곳에 서 있기만 했다. 말굽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 왜 여기에 있나?"
내가 올려다보자 먼저 도착한 경찰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 이지창을 내 쪽으로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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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바운드 윙 외전 Angel Bound - 2화
밖으로 나오자, 막 추워지기 시작한 바람이 전신을 감쌌다.
카이저린플라츠(Kaiserinplatz)ㅡ'황후의 광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수도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을 정도로 크고, 유명하다.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광장은 밤낮 상관없이 항상 사람으로 넘치고 또 넘친다.
갓 상경한 촌뜨기가 오면 눈이 휘둥그레질 '황후의 품'. 말하기 좀 그렇지만, 수도권 변방의 영지에서 온 나도 처음엔 그 규모와 인파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 풀밭만 보고 자라온 내겐 보이는 모든 게 생소한 자극이었으니까.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것들도 있고. 그런 식으로 날 촌티 못 벗은 아가씨라고 놀렸다간 내 창으로 친히 얼굴 가죽을 떠줄 테다ㅡ그래, 스승에게 하는 것처럼.
신묘하게도 스승은 내 공격을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지만, 이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르바이트 구하러 나왔다고 했잖아, 멍청한 나.
"끄윽."
……라고 해도, 술에 전 상태로는 면접도 제대로 못 보겠지. 스승이 미워서 일단 나오긴 했는데, 여기서 뭘 해야 잘 했다는 칭찬을 들을까.
일단 분수 쪽으로 좀 걸어볼까. 스승도 내가 정말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분수대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보는 게 좋겠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돈과 숙소 문제가 가장 클 테니.
생각을 정한 나는, 억지로 멀쩡함을 가장하며 광장 중앙을 향해 발을 옮겼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제대로 걸으려고 노력하는데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 행인들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따갑고 아프다. 뭐 볼 일 났나 싶어서 불쾌했지만 수치스럽기도 했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언제 어디서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행동하라고 스승이 가르쳤으니까. 다행히도 분수대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몇 걸음만 더 내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아 보였다.
……잠깐. 가만히 보니 이 사람들,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 무슨 재밌는 게 있다고 내 손을 자꾸 노려보ㅡ
"으억!"
"꺅!"
ㅡ는지 확인하려는 찰나,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사람과 부딪친 건 확실한 모양이다. 시야가 빙글 돌자 나도 모르게 밑에서 올라올 뻔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을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고, 창피한 상황이 되기 전에 급히 자세를 고치고 앞을 바라보았다. 구경꾼이 생긴 것은 애써 무시했다.
나와 부딪친 피해자는, 흰색 로브를 두른 여성.
복장이 구시대적인 건 둘째 치고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턱선으로 보아 미소녀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분홍빛 감도는 머리칼이 후드 밖으로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색은 매우 드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여자는 제일 먼저 주변을 살폈다. 급한 용무라도 있는 듯 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겠는데 계속 두리번거리고만 있으니, 왠지 나는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어 뱃속이 울렁거렸다. 네 사정은 내 알 바 아닌데, 최소한 서로 사과 정도는 하고 넘어가자고. 그런 식으로 굴면 기분 나빠지니까.
내 기준으로 소소한 불평을 하며, 먼저 사과할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상대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
조심성 없이 다녀서 죄송하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음?"
처음 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터. 갤러리가 있는데다 행동도 아주 당당해서 나는 살짝 겁을 먹었다. 무슨 속셈으로 손을 잡았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상대편에서 후드를 조금 걷어 자신의 얼굴을 내 앞에 공개해 보였다.
분홍빛 머리와 어우러져 인형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여자인 나도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초월적인 미모다.
하지만 그와 달리 눈빛은 불안했고, 입은 말 못하는 사람처럼 우물거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날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긴장시킬 만큼의 위력은 있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묻고 싶어지는 모습ㅡ그래, 이 여자는 뭔가 위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와 부딪친 일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왜 하필 나야?
"저기, 죄송한데 혹시 기사이신가요?"
여자가 다급히 던진 그 질문은 필사적이었다. 내가 교복을 입은 것을 보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네? 아, 아뇨. 형식상으론 기사인데 시험에 떨어져서 아직은 지망생이고……."
"확실히 대답해주세요! 경은 기사학교의 교복과 무장을 하고 있잖아요. 어느 쪽에 서 계신지 똑바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급히 부탁할 게 있어요."
"그, 그러니까 아직 지망생이라고요.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난리야? 네 급한 일이 내 급한 일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기까지……. 학교 졸업한 뒤에도 지망생인 게 자랑이 못 되는 걸 모르고 있나?
"우선 부주의해서 죄송하고요, 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 없어요. 그러니 의뢰를 하실 거면 머리에 예의부터 박고 '정식 기사'를 찾아가서 하세요."
미안한 마음마저 사라져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상대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백색 교복…… 제국 중앙 기사학교 소속이시네요. 갑주도 그 학교에서 제공한 것이고……."
내가 입은 교복과 팔다리를 감싼 경갑을 살펴보며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나 보일 법한 전형적인 태도. 차분할 것 같은 이미지와 괴리가 있어서 나는 혐오감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이마를 찌푸리며 거칠게 따졌다.
"저기요, 지금 술 취했다고 사람 무시하세요? 사정이 급한 건 알겠는데, 그딴 식으로 행동하면 들어줄 사람이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길을 걷다 부딪친 사람한테 무슨 부탁을 하시게요? 내가 그걸 들어줄 보장도 없는데."
"아,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여자. 나는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정중히 사과하고 넘어가려는 저한테 무슨 수작을 걸 생각이셨는지는 몰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그렇게 막 부탁하지 마세요. 남이…… 남이 어떤 심정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울컥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교양 있는 아가씨였기에 참았다. 사수생으로 전락한 것도 서러운데, 이런 면식도 없는 사람한테까지 자존심에 상처를 받다니. 서글프고 또 서글프고 엄청 서글퍼서 다시 가게로 돌아가 맥주나 더 마시고 싶어졌다.
여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수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갑작스런 부탁이긴 하지만, 저는 정말로……."
거기까지 여자가 말한 순간,
"경찰입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인파를 헤치며 경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카이저린플라츠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마경찰부대다. 말이 기마경찰이지 저 사람들도 다 '정식 기사'다. 자기들의 상징인 군청색 제복에 기다란 이지창을 들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둘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이변에 여자는 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자, 잠깐!"
어딜 가려는가 싶어 붙잡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녀의 팔을 놓쳤다. 체구가 작은 탓인지 여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파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금세 사라져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추측으로 좇으며 나는 허망하게 그곳에 서 있기만 했다. 말굽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 왜 여기에 있나?"
내가 올려다보자 먼저 도착한 경찰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 이지창을 내 쪽으로 겨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