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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Aile_Lager
유이 시에스트라 폰 리. 단짝 중 한 명이자 수석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선의의 라이벌.
갑작스레 사태에 개입한 그녀는,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날 데리고 근처 교회로 향했다.
도중에 경찰이 뒤따라왔지만 설득으로 어떻게든 넘겼다. 추가 조사를 하려던 그들은 자기가 잘 타이르겠다는 유이의 말을 어째서인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유이는 '물의 제단'의 넓은 계단폭에 날 앉히고는, 담요를 갖고 오겠다며 어느 방 안으로 사라졌다.
"만난 김에 치마도 수선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나타난 유이는 작은 반짇고리 외에 어떤 바구니를 들고 왔다.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는 탓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유이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늘구멍에 실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엄마 같은 모습이어서 사과는커녕 감사의 인사도 전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식이면 정말 어색해서 숨도 못 쉬게 된다.
다행히 침묵은 얼마 안 가 깨졌다. 유이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배 채울 거라도 줄까? 술만 마시면 속 쓰릴 텐데."
"으응? 배 채울 거?"
왜 그런 진상을 부렸냐고 혼낼 줄 알았는데, 반대로 걱정을 하고 있어? 얼떨떨해진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유이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바구니에 손을 가져갔다.
천이 걷히면서 드러난 것은, 엄청난 수의 삶은 계란.
무려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넘친다. 문양으로 장식된 껍데기는 깨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정교했다. 하늘, 노랑, 진홍 등 색도 제각각이어서 먹고 싶다기보단 그냥 눈이 즐겁다. 수제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종교적 기념일의 한 상징물이었다.
유이는 바구니에서 계란 세 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해피 파스카(Pascha). 무녀님들과 모여서 파스카 에그를 좀 만들었거든. 여기에 있는 건 전부 내가 만든 거야. 어때, 잘 그렸지?"
"어, 응. 그러네."
얼떨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 시절의 유이는 미술부 부장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달걀을 깨려 해도, 껍데기의 장식이 너무 아름다워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서 씹어 먹는 맛이 날 것만 같다.
이래저래 결정이 안 나 한숨을 내쉬고 옆을 바라보았다. 유이의 바느질 솜씨는 생각 외로 능숙했다.
"네가 배속됐다고 한 교회가 여기였어?"
그렇게 묻자 유이는 자기가 입고 있는 무녀복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순백의 바탕을 감싼 빨간 선. 2급, 혹은 중급 무녀의 상징이다.
"중앙 교구 소속, 카이저린플라츠 교회야. 추첨할 때 여신의 가호가 따랐지."
무려 집과 가까운 곳이라구ㅡ라고 덧붙이는 이 녀석의 모습에서 아까 전의 기백과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유이의 본모습이다. 1년이나 지났는데 바뀐 곳이 하나도 없구나. 엉큼한 자식.
"음, 그렇구나. 넌 취직해서 좋겠네."
"마릴리(Marily)는 아직도 합격 못했어?"
뜬금없이 애칭 부르기냐.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영 신통치 않아. 잘 풀린다 싶으면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혀. 삼세판 모두 졌으니, 앞으로 1년간은 보잘 것 없는 아마추어 사수생 백수 신세지."
"그래. 그래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광장을……."
윽, 그건 유이에게 미안하게 됐다. 반쯤 허리를 숙여 사과하자 유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써. 이맘때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거든."
그 사람이 너였다는 게 좀 의외였지만ㅡ이라고 작게 덧붙여주신다. 많이 엉큼한 자식.
"입단 시험은 난이도가 까다롭잖아. 그 압박을 못 견딘 학생들이 상심해서 술을 마시는 걸 자주 봐. 음주야 개인의 선택이니까 참견할 수 없다 해도, 공공장소에서 주사를 부리는 건 확실하게 문제가 돼. 개중엔 분수에 토를 하거나 행인과 시비가 붙은 경우도 있어."
"그, 그건 좀 심각한데."
"응. 타인에게 피해를 주니까. 보통 같으면 기마경찰이 나서서 처리하겠지만, 정도가 약하다 싶을 땐 우리 무녀들이 개입해. 술이 깰 때까지 데리고 있는 거지. 경찰도 우릴 신뢰하고 있어서 중한 사태가 아닌 이상은 쉽게 물러나주는 편이야."
"경찰이 그렇게 무른 집단인 줄은 몰랐어."
"무른 게 아냐. 만일의 사태를 기다릴 뿐. 한 명 정도는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걸."
"엑……."
학생이라서 봐주는 것도 한 번뿐이라는 건가. 일단 경찰들이 유이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 이유는 알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허기가 돌아, 나는 들고 있던 삶은 달걀 중 하나를 까기 시작했다.
아, 허기에 굴복해버린 나의 감성이여.
"어쨌든,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뻐. 2급 무녀가 되기 전까진 일로 바빠서 친구 얼굴도 제대로 못 봤거든. 그 사이에 변한 게…… 별로 없구나. 교복도 그대로고, 갑주도 그대로야."
심지어 가슴도ㅡ라고 아주 작게 덧붙인 것 같았지만 그냥 흘려들었다. 짜증나게 엉큼한 자식. 얘 진짜로 성직자 된 거 맞아?
"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 안경 빼고는."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지. 이 나이에 벌써 늙었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연락 주고받고 있는 친구 있어?"
"젖탱…… 크흠, 연 외엔 아무도 없어."
"풋, 랭 가문의 아가씨 말이구나."
말이 헛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이께선 가볍게 웃어 넘겨주신다. 오오 인성 오오. 저거 분명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고 좋아하는 거겠지. 이 녀석은 어떻게 무녀 시험에 합격했는지 몰라.
꽃다운 19세인데, 내 인생도 참 험난하다. 이 답답함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나는 삶은 달걀을 한 번에 입 안에 넣어버렸다.
"천천히 먹어. 싱겁고 뻑뻑할 텐데."
내 상태가 걱정됐는지, 이쪽을 향해 엄마 같은 시선을 보내는 유이. 충분히 씹어 삼킬 수 있었기에 나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를 우걱우걱 처먹는 내 꼴이 단정치 못한 건 알겠는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탄식을 내뱉은 유이는 멈췄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찾아온 어색한 침묵.
"……그런데 있잖아."
아, 이거 정말로 뻑뻑하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과는 연애 잘 하고 있어?"
"푸흑!"
방심했던 부분을 찔리고 말았다! 내가 그 쓰레기 같은 인간과 무슨 연…… 코, 콜록, 커헉, 켁! 무의식중에 사레가 들러버리고 말아, 입에 넣었던 달걀을 전부 기침으로 토해버리고 말았다. 흰색과 노란색의 무언가가 뒤섞인 채 대리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괜찮아?! 그러니까 조금씩 베어 물었어야지."
이번엔 유이도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다. 속이 진정될 때까지 손으로 가슴을 치던 나는, 숨통이 좀 트이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뭐, 뭔 뜬금없는 소리야! 내가 그 인간이랑 무슨 연애를 해! 너도 참 말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파고 들어온다?"
"어라,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사이 좋아 보이던데."
이쪽은 말 한 마디에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데, 쟤는 저렇게 태연하게 대답을 건넨다. 뭘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은지는 몰라도 사람 엄청 짜증나게 할 정도로 엉큼한 녀석이다. 젠장!
"그 자식과는 그냥 스승과 제자 사이야.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고 싶지도 않아. 아니, 연애 감정이 생기기 이전에 남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어."
"그래? 예전엔 다르게 말했던 것 같은데."
참고로 유이도 스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내가 그 인간에 대해 말해준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었든지 장난을 칠 작정이던지 둘 중 하나일 테다.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 너무 평온하고 욕심이 없어서 끔찍할 정도로 지루한 사람이야. 거기에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내가 그것 때문에 술병 들고 밖으로 나왔다니까?"
"헤에……."
그것만 있는 게 아냐, 라고 하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사수생이란 스트레스에 술을 마신 이야기, 광장에서 이상한 여자와 부딪친 이야기, 위로는커녕 사람 약 올리기만 했던 스승의 이야기, 경찰이 왔는데도 자길 도와주러 오지 않아 화가 났다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존경심은 개뿔 존중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는 이야기.
그리고…… 못 볼꼴을 다 당했는데도, 여전히 스승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는 이야기.
치마를 고치면서 유이는 내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었다. 경청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말을 하는 내 기분은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마침내 분풀이가 끝나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유이는 그러냐는 듯 무언가를 툭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어디가 좋아?"
"음, 자상하고 신사적이고, 아는 게 많아서 잘 가르쳐줘.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고…… 어?"
잠깐만. 대화가 꼬인 것 같다. 왜 내가 그 자식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고 있지? 함정에 빠진 건가?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랄 게 어디 있겠어. 왜 미워하지 못할까 싶어서 질문을 뒤집어본 것뿐이야. 여전히 이런 부분은 약하구나, 마리엘. 감정적일 때 대화에 너무 쉽게 휩쓸려."
"크윽."
역시, 유이가 파놓은 함정에 걸린 듯하다. 녀석은 내 옆에서 이겼다는 듯 승리의 V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양쪽 뺨이 붉어지고 말았다.
한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교복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펴보자 스승의 전화가 와 있었다.
“짜잔, 치마 다 고쳤어.”
대단한 일을 했다는 양 유이가 치마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것을 건네받은 나는 누가 볼세라 교회 문을 주시하며 허겁지겁 착의를 끝냈다.
스승과 통화를 하는 동안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모양이다.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자 유이는 살짝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흥 떨어지게 벌써 가는 거구나. 이왕 시간 많은 거 조금만 더 있다 가도 괜찮을 텐데.”
“그러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이제부터 바빠질 거거든.”
다시 쭈그려 앉아 바구니에서 달걀 몇 개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스승에게 가져다준다는 이유를 대며 유이에게 미리 허락을 구해놓은 상태다. 내가 바닥에 토해낸 달걀의 잔해는…… 유이가 알아서 치워준다고 한다.
“이제 영지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집엔 안 갈 거야. 당분간 이 근처에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나 알아보려고.”
“돈이 모일 때까진 스승과 같이 있겠다는 뜻이네.”
“그런 셈이겠지.”
지금 돌아가 봤자 좋은 일은 없으니까. 스승이 함께 있어주는 한, 있는 힘껏 돈을 모아볼 계획이다. 가능하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금이 모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시험에도 다시 응시하고, 유이도 만날 수 있겠지.
옷을 바로 하고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그리고 유이와 함께 나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잘 하면 오늘 밤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선두에 선 유이가 나긋나긋하게 운을 뗐다.
“파스카는 내일 아냐?”
“내일이니까, 오늘 밤에 미리 파스카 에그를 나눠줘야지. 이곳 주변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내가 오는 때에 맞춰서 신호를 줘.”
“그 시간에 자고 있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스승이 새로 잡은 여관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10분이다. 얼굴을 보고 싶으면 충분히 짬을 내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스카로 바쁠 유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달걀 나눠준다는 게 말이 쉽지, 실상은 이 넓은 구역을 발로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이는, 거절이나 다름없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래.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귀찮으면 안 만나도 되지만, 그 때가 아니면 잡을 수 없는 기회야.”
“기회?”
“응.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르바이트를 알고 있어.”
뜬금없이 이건 무슨 소리? 내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유이는 그 이상의 의문은 해소해주지 않았다. 의중을 떠보려는 것 같은데 표현 참 감질나게 한다. 엉큼한 자식.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문이 가까워졌다. 유이는 한쪽 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면 그분께 말씀드려볼게. 성과가 좋으면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르바이트 하나로 기사가 될 수 있다고? 그거 암흑가의 주민이 주로 쓰는 수법 아냐?”
그런 비슷한 종류의 수법을 신문과 TV에서 많이 보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유이는 곤란한 듯 손을 내저으며, 결국 ‘그 분’이 누구인지 실토하고 말았다.
“아, 아냐! 성녀님 얘기를 하는 거야, 성녀님! 그 분이 직접 아르바이트를 주실 거라고!”
“아, 그런 거였냐.”
의뢰인이 성녀라면 이해가 간다. 잘은 몰라도, 그 사람이 카이저린플라츠 교회와 연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무슨 아르바이트인지는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뭐. 내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 일단 거절은 하지 말자.
“이야기는 들어볼게. 보수는…… 좀 짭짤해야 할 거고. 그 대신 스승을 갈궈서라도 늦게까지 깨어 있을 테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와.”
“알았어.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보자.”
그것을 끝으로 유이와는 헤어졌다. 나는 스승이 알려준 새 여관을 향해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그곳에서 스승과 만나, 자기 돈으로 직접 샀다는 ‘날 위한 사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내 무기를 가게에 놓고 왔다는 말을 듣고 스승을 단죄한 건 덤이다.
트위터: @Aile_Lager
언바운드 윙 외전 Angel Bound - 4화
유이 시에스트라 폰 리. 단짝 중 한 명이자 수석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선의의 라이벌.
갑작스레 사태에 개입한 그녀는,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날 데리고 근처 교회로 향했다.
도중에 경찰이 뒤따라왔지만 설득으로 어떻게든 넘겼다. 추가 조사를 하려던 그들은 자기가 잘 타이르겠다는 유이의 말을 어째서인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유이는 '물의 제단'의 넓은 계단폭에 날 앉히고는, 담요를 갖고 오겠다며 어느 방 안으로 사라졌다.
"만난 김에 치마도 수선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나타난 유이는 작은 반짇고리 외에 어떤 바구니를 들고 왔다.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는 탓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유이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늘구멍에 실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엄마 같은 모습이어서 사과는커녕 감사의 인사도 전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식이면 정말 어색해서 숨도 못 쉬게 된다.
다행히 침묵은 얼마 안 가 깨졌다. 유이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배 채울 거라도 줄까? 술만 마시면 속 쓰릴 텐데."
"으응? 배 채울 거?"
왜 그런 진상을 부렸냐고 혼낼 줄 알았는데, 반대로 걱정을 하고 있어? 얼떨떨해진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유이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바구니에 손을 가져갔다.
천이 걷히면서 드러난 것은, 엄청난 수의 삶은 계란.
무려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넘친다. 문양으로 장식된 껍데기는 깨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정교했다. 하늘, 노랑, 진홍 등 색도 제각각이어서 먹고 싶다기보단 그냥 눈이 즐겁다. 수제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종교적 기념일의 한 상징물이었다.
유이는 바구니에서 계란 세 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해피 파스카(Pascha). 무녀님들과 모여서 파스카 에그를 좀 만들었거든. 여기에 있는 건 전부 내가 만든 거야. 어때, 잘 그렸지?"
"어, 응. 그러네."
얼떨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 시절의 유이는 미술부 부장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달걀을 깨려 해도, 껍데기의 장식이 너무 아름다워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서 씹어 먹는 맛이 날 것만 같다.
이래저래 결정이 안 나 한숨을 내쉬고 옆을 바라보았다. 유이의 바느질 솜씨는 생각 외로 능숙했다.
"네가 배속됐다고 한 교회가 여기였어?"
그렇게 묻자 유이는 자기가 입고 있는 무녀복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순백의 바탕을 감싼 빨간 선. 2급, 혹은 중급 무녀의 상징이다.
"중앙 교구 소속, 카이저린플라츠 교회야. 추첨할 때 여신의 가호가 따랐지."
무려 집과 가까운 곳이라구ㅡ라고 덧붙이는 이 녀석의 모습에서 아까 전의 기백과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유이의 본모습이다. 1년이나 지났는데 바뀐 곳이 하나도 없구나. 엉큼한 자식.
"음, 그렇구나. 넌 취직해서 좋겠네."
"마릴리(Marily)는 아직도 합격 못했어?"
뜬금없이 애칭 부르기냐.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영 신통치 않아. 잘 풀린다 싶으면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혀. 삼세판 모두 졌으니, 앞으로 1년간은 보잘 것 없는 아마추어 사수생 백수 신세지."
"그래. 그래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광장을……."
윽, 그건 유이에게 미안하게 됐다. 반쯤 허리를 숙여 사과하자 유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써. 이맘때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거든."
그 사람이 너였다는 게 좀 의외였지만ㅡ이라고 작게 덧붙여주신다. 많이 엉큼한 자식.
"입단 시험은 난이도가 까다롭잖아. 그 압박을 못 견딘 학생들이 상심해서 술을 마시는 걸 자주 봐. 음주야 개인의 선택이니까 참견할 수 없다 해도, 공공장소에서 주사를 부리는 건 확실하게 문제가 돼. 개중엔 분수에 토를 하거나 행인과 시비가 붙은 경우도 있어."
"그, 그건 좀 심각한데."
"응. 타인에게 피해를 주니까. 보통 같으면 기마경찰이 나서서 처리하겠지만, 정도가 약하다 싶을 땐 우리 무녀들이 개입해. 술이 깰 때까지 데리고 있는 거지. 경찰도 우릴 신뢰하고 있어서 중한 사태가 아닌 이상은 쉽게 물러나주는 편이야."
"경찰이 그렇게 무른 집단인 줄은 몰랐어."
"무른 게 아냐. 만일의 사태를 기다릴 뿐. 한 명 정도는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걸."
"엑……."
학생이라서 봐주는 것도 한 번뿐이라는 건가. 일단 경찰들이 유이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 이유는 알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허기가 돌아, 나는 들고 있던 삶은 달걀 중 하나를 까기 시작했다.
아, 허기에 굴복해버린 나의 감성이여.
"어쨌든,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뻐. 2급 무녀가 되기 전까진 일로 바빠서 친구 얼굴도 제대로 못 봤거든. 그 사이에 변한 게…… 별로 없구나. 교복도 그대로고, 갑주도 그대로야."
심지어 가슴도ㅡ라고 아주 작게 덧붙인 것 같았지만 그냥 흘려들었다. 짜증나게 엉큼한 자식. 얘 진짜로 성직자 된 거 맞아?
"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 안경 빼고는."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지. 이 나이에 벌써 늙었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연락 주고받고 있는 친구 있어?"
"젖탱…… 크흠, 연 외엔 아무도 없어."
"풋, 랭 가문의 아가씨 말이구나."
말이 헛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이께선 가볍게 웃어 넘겨주신다. 오오 인성 오오. 저거 분명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고 좋아하는 거겠지. 이 녀석은 어떻게 무녀 시험에 합격했는지 몰라.
꽃다운 19세인데, 내 인생도 참 험난하다. 이 답답함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나는 삶은 달걀을 한 번에 입 안에 넣어버렸다.
"천천히 먹어. 싱겁고 뻑뻑할 텐데."
내 상태가 걱정됐는지, 이쪽을 향해 엄마 같은 시선을 보내는 유이. 충분히 씹어 삼킬 수 있었기에 나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를 우걱우걱 처먹는 내 꼴이 단정치 못한 건 알겠는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탄식을 내뱉은 유이는 멈췄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찾아온 어색한 침묵.
"……그런데 있잖아."
아, 이거 정말로 뻑뻑하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과는 연애 잘 하고 있어?"
"푸흑!"
방심했던 부분을 찔리고 말았다! 내가 그 쓰레기 같은 인간과 무슨 연…… 코, 콜록, 커헉, 켁! 무의식중에 사레가 들러버리고 말아, 입에 넣었던 달걀을 전부 기침으로 토해버리고 말았다. 흰색과 노란색의 무언가가 뒤섞인 채 대리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괜찮아?! 그러니까 조금씩 베어 물었어야지."
이번엔 유이도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다. 속이 진정될 때까지 손으로 가슴을 치던 나는, 숨통이 좀 트이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뭐, 뭔 뜬금없는 소리야! 내가 그 인간이랑 무슨 연애를 해! 너도 참 말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파고 들어온다?"
"어라,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사이 좋아 보이던데."
이쪽은 말 한 마디에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데, 쟤는 저렇게 태연하게 대답을 건넨다. 뭘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은지는 몰라도 사람 엄청 짜증나게 할 정도로 엉큼한 녀석이다. 젠장!
"그 자식과는 그냥 스승과 제자 사이야.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고 싶지도 않아. 아니, 연애 감정이 생기기 이전에 남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어."
"그래? 예전엔 다르게 말했던 것 같은데."
참고로 유이도 스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내가 그 인간에 대해 말해준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었든지 장난을 칠 작정이던지 둘 중 하나일 테다.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 너무 평온하고 욕심이 없어서 끔찍할 정도로 지루한 사람이야. 거기에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내가 그것 때문에 술병 들고 밖으로 나왔다니까?"
"헤에……."
그것만 있는 게 아냐, 라고 하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사수생이란 스트레스에 술을 마신 이야기, 광장에서 이상한 여자와 부딪친 이야기, 위로는커녕 사람 약 올리기만 했던 스승의 이야기, 경찰이 왔는데도 자길 도와주러 오지 않아 화가 났다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존경심은 개뿔 존중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는 이야기.
그리고…… 못 볼꼴을 다 당했는데도, 여전히 스승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는 이야기.
치마를 고치면서 유이는 내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었다. 경청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말을 하는 내 기분은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마침내 분풀이가 끝나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유이는 그러냐는 듯 무언가를 툭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어디가 좋아?"
"음, 자상하고 신사적이고, 아는 게 많아서 잘 가르쳐줘.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고…… 어?"
잠깐만. 대화가 꼬인 것 같다. 왜 내가 그 자식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고 있지? 함정에 빠진 건가?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랄 게 어디 있겠어. 왜 미워하지 못할까 싶어서 질문을 뒤집어본 것뿐이야. 여전히 이런 부분은 약하구나, 마리엘. 감정적일 때 대화에 너무 쉽게 휩쓸려."
"크윽."
역시, 유이가 파놓은 함정에 걸린 듯하다. 녀석은 내 옆에서 이겼다는 듯 승리의 V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양쪽 뺨이 붉어지고 말았다.
한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교복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펴보자 스승의 전화가 와 있었다.
“짜잔, 치마 다 고쳤어.”
대단한 일을 했다는 양 유이가 치마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것을 건네받은 나는 누가 볼세라 교회 문을 주시하며 허겁지겁 착의를 끝냈다.
스승과 통화를 하는 동안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모양이다.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자 유이는 살짝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흥 떨어지게 벌써 가는 거구나. 이왕 시간 많은 거 조금만 더 있다 가도 괜찮을 텐데.”
“그러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이제부터 바빠질 거거든.”
다시 쭈그려 앉아 바구니에서 달걀 몇 개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스승에게 가져다준다는 이유를 대며 유이에게 미리 허락을 구해놓은 상태다. 내가 바닥에 토해낸 달걀의 잔해는…… 유이가 알아서 치워준다고 한다.
“이제 영지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집엔 안 갈 거야. 당분간 이 근처에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나 알아보려고.”
“돈이 모일 때까진 스승과 같이 있겠다는 뜻이네.”
“그런 셈이겠지.”
지금 돌아가 봤자 좋은 일은 없으니까. 스승이 함께 있어주는 한, 있는 힘껏 돈을 모아볼 계획이다. 가능하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금이 모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시험에도 다시 응시하고, 유이도 만날 수 있겠지.
옷을 바로 하고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그리고 유이와 함께 나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잘 하면 오늘 밤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선두에 선 유이가 나긋나긋하게 운을 뗐다.
“파스카는 내일 아냐?”
“내일이니까, 오늘 밤에 미리 파스카 에그를 나눠줘야지. 이곳 주변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내가 오는 때에 맞춰서 신호를 줘.”
“그 시간에 자고 있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스승이 새로 잡은 여관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10분이다. 얼굴을 보고 싶으면 충분히 짬을 내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스카로 바쁠 유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달걀 나눠준다는 게 말이 쉽지, 실상은 이 넓은 구역을 발로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이는, 거절이나 다름없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래.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귀찮으면 안 만나도 되지만, 그 때가 아니면 잡을 수 없는 기회야.”
“기회?”
“응.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르바이트를 알고 있어.”
뜬금없이 이건 무슨 소리? 내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유이는 그 이상의 의문은 해소해주지 않았다. 의중을 떠보려는 것 같은데 표현 참 감질나게 한다. 엉큼한 자식.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문이 가까워졌다. 유이는 한쪽 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면 그분께 말씀드려볼게. 성과가 좋으면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르바이트 하나로 기사가 될 수 있다고? 그거 암흑가의 주민이 주로 쓰는 수법 아냐?”
그런 비슷한 종류의 수법을 신문과 TV에서 많이 보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유이는 곤란한 듯 손을 내저으며, 결국 ‘그 분’이 누구인지 실토하고 말았다.
“아, 아냐! 성녀님 얘기를 하는 거야, 성녀님! 그 분이 직접 아르바이트를 주실 거라고!”
“아, 그런 거였냐.”
의뢰인이 성녀라면 이해가 간다. 잘은 몰라도, 그 사람이 카이저린플라츠 교회와 연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무슨 아르바이트인지는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뭐. 내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 일단 거절은 하지 말자.
“이야기는 들어볼게. 보수는…… 좀 짭짤해야 할 거고. 그 대신 스승을 갈궈서라도 늦게까지 깨어 있을 테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와.”
“알았어.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보자.”
그것을 끝으로 유이와는 헤어졌다. 나는 스승이 알려준 새 여관을 향해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그곳에서 스승과 만나, 자기 돈으로 직접 샀다는 ‘날 위한 사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내 무기를 가게에 놓고 왔다는 말을 듣고 스승을 단죄한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