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
“개 후레 아들놈을 보랑께” 서태석이 화를 내며 모두를 보고, 태석의 동생 민석이 형의 말을 도우며 “대매에 쳐죽일 자슥이 지 배때시 불리자고 우덜 다 죽으란 소리지라.” 하곤 어느새 다가온 죄 없는 개를 걷어찬다.
케겡~하며 주인인 박복영 쪽으로 도망친다.
목포와 6시간 거리에 떨어진 암태도는 기암괴석으로 둘러 싸여 그 이름이 붙여진 곳으로 1923년 암태도에 불어온 바람은 일제가 강제적으로 심는 저미가 정책과 산미증식 계획으로 인해 수탈의 바람으로 불어온다.
1923년 8월 품앗이를 이야기하러 온 기장리 숭보산 기슭의 박복영의 집엔 단고리 대표인 자들도 있어 낮에 부일 악질 지주 문재철의 집에 다녀온 박복영의 입에 모두 시선을 두고 있고, 소문은 재철에 의해 삽시간에 퍼져 이미 마을의 개까지 알 정도로 삼삼오오 쑤근거리며 대책을 논의해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는 중공업우선 정책으로 많은 공장을 기형적으로 자국내에 짓고, 이는 농민의 도시 이주를 가져와 자국의 쌀값이 폭등하자 조선의 쌀을 침탈할 목적으로 구조적, 폭압적으로 이루어진다.
한술 더 뜬 부일 반역지주들은 당시 막 소개되어 소작농에게 개념파악이 어려운 미터법으로 위장계약서를 작성하여 더 빼앗고, 소작권의 강제강탈이나 이동 등을 통해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며 1년 단위로만 계약하며 불이익을 준다.
“8할을 소작료로 가져가믄 다 가져가는 거 아닌게라.” 하고 서동오가 모두에게 말하고, “개 후레자식이 느자구 없는 짓이랑께.” 똑 같은 소리가 분통이 터진 김연태와 손학진에 의해 터져 나온다.
모두는 알고 있는 사실에 흥분하고 욕을 해대지만 박복영은 이렇게 흥분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이미 절감하고, 드디어 입을 연다.
“성님들 그리고 동상들 야그 잘 알아 들었어라. 지가 촌장님 뵙고 베를 안 비기로 합의를 봐야지라. 그리고, 단고리 성들도 힘을 합쳐야 쓰겠구만이라.”
복영의 집이 있는 기장리와 단고리의 너른 평야를 갖고 있는 문재철은 밭에선 3할, 논에선 4할이던 소작료를 4할씩 더 얹어 받겠다는 통보를 해왔고, 이내 소작농들이 분노하여 추수거부투쟁을 계획하는 것이다.
“영판 재철이 글마가 거적대기 맹키로 가만 있지 않을 거인데.” 섬의 중심인 기장리에 이어 남쪽을 차지한 단고리의 대표로 온 김문철, 박필선, 박병완은 후에 있을 일을 조심하는 듯 하고, “영판 무슨 뜽금없는 소리당가. 우덜을 다 죽일것이여 어쩔것이여.” 하며 태석, 민석의 형 창석이 침착한 행동과 달리 흥분을 한다.
지금이야 배로 25분 거리지만 동력선이 없던 당시는 노를 저어 가야 했고,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수백에 달하는 추수노동력을 목포에서 사오는 것은 힘들었으며 그들을 추수가 끝나는 기간까지 먹이고, 재우는 일만도 힘들고, 더구나 그 많은 인원이 숙식할 장소도 없으니 추수 거부투쟁이야말로 현실적인 방안이다.
9월이 다가오고 어느덧 벼는 익어 고개를 숙이며 땅에 떨어질 듯 하니 속이 터진 문재철은 아무 이야기도 없는 복영을 불러 “왜 부른지 안당가” 하며 채근하고, 복영은 “알지라.” 하며 대답한다
평시 같으면 “나리” 하고 부르는 복영이 짧게 대답하자 일순 긴장한 재철은 어험~하며 헛기침을 하고, 이를 지켜보던 태석이 “베를 비기도 전에 다 가져감시롱 베를 비라는데 우덜은 우짜 살라고 그런당께요.” 하며 격하게 말을 하며 이를 들은 재철은 긴장을 더 하며 하인들을 부르려 한다.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한 복영이 “태석이성 아무리 근다고 나리께 그리 이바구하믄 쓴다요.” 하고 긴장 사태를 단박에 해결해 내며 재철이 “우짜믄 좋겠당가” 복영에 게 묻는다.
“나리께서 하문하신다믄 지 생각은야 나리께서 6할, 우덜이 4할 그라고 괴깃배 선주하고 우덜을 소개만 시켜주심 되지라.”
“그라믄 우덜은 겨울에 괴기를 잡아서 2할을 채우면 안되겠서라.”
재철은 땅에 떨어져 썩을 벼를 생각하면서 “그러세” 하고 약속을 한다.
다시 복영의 집에 모여드는 장정들은 빽빽히 모여 복영은 산기슭 바위가 놓인 평지로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한다.
목포나 광주에서 유학을 한 박복영은 계몽사상과 민족의식에 고취되어 사투리를 고치고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해 온 탓에 지금은 많이 사투리가 적어진다.
형들에게 언제나 신뢰를 받는 30살도 안된 청년 박복영은 마을의 촌장이 있지만, 언제나 솜씨 있는 말주변으로 그 동안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하여 왔고, 늘 성실하여 가장 먼저 논과 밭에 나왔으며 저수지의 물을 끌어다 쓰는 대역사를 문재철과 천후빈을 설득하여 만들어낸 암태도의 지략가다.
“제가 낮에 합의한 내용은 일단 6할을 소작료로 하고, 고기잡이 배를 주선해 주면 우리가 그걸 타고 고기를 잡아 목포에 고기를 팔아 쌀을 사와서 넘겨야 할 듯 합니다. 배타는 일이 고되지만 벼를 안 베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일단 밥술이나 떠주게 해준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그들도 이 이상의 해결책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따라야 할 뿐이고, 그나마 계몽사상이 암태도 사립학교에 의해 많이 퍼져 이 정도이다.
다른 지역은 이렇게 올려 받아도 대책 없이 일제 헌병경찰과 결탁한 부일 악질 지주에 의해 만주나 연해주의 추운 곳으로 어쩔 수 없이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이동한 사람들이니 독립군에게 헌신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석이 성은 나랑 갈 곳이 있어라.”
“어델”
“후빈성 집이어라.”
“거긴 와”
“글씨 가보믄 안당께요.”
천후빈은 2할의 소작료만을 받는 조선의 몇 안 되는 지주 중 하나로 복영의 매제 이기도 하다.
천후빈이나 유일한[1]선생 같은 분들이 있어 이상재[2]선생 등이 ‘구휼사업회’ 같은 기관을 만들어서 빈민구제에 그나마 나서는 것이니 당시 조선백성의 삶은 극악한 것으로 일제가 철저하게 정책으로 수탈해 간 것이다.
“워메 잘왔다. 야 어서 들가자.” 후빈이 태석과 복영의 손을 잡으며 반긴다.
복영의 동생 복녀에게 ‘주안상을 마련하라.’ 한 후 방에 들은 후빈은 둘을 보며 어쩐일이냐는 듯이 눈으로 묻는다.
태석 또한 모르고 왔으니 복영을 볼 뿐이다.
“후빈이 성이 좀 도와줬음 하는게 있어라.”
“워메 답답시러워라. 빨리 좀 말하랑께” 태석이 보챈다.
“우덜이 낮에 재철이 집에 가서 6할하고 괴깃배 주선을 이바구 하구 왔지라. 근데 솔찬히 찜찜한 구석이 있어라. 재철이 갸가 연결해 줄리가~.” 말끝을 흐린다.
“후빈이가 좀 도와야 안쓰겄냐 새겨 들어라잉” 태석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후빈보다 나이가 많아 후빈에게 반말로 강조한 것이다.
후빈은 복영이 마을 주민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지 새삼 깨닫고, 태석도 마을 주민을 아끼는 복영의 선견지명에 혀를 내두르며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식견에 탄복하며 존경하기에 이른다.
“지가 아는 선주가 있지라. 복영이 말맨키로 소개를 해줄랑께요. 너무 걱정 마시지라 태석성.” 지주임에도 소작인에게 깍듯한 후빈이다.
이윽고 주안상이 차려지고, 일동은 먹고 마시며 즐긴다.
“성 그만 좀 놀리랑께. 그건 복순이 쟈가 내한테 뛰오다 부딪쳐서 빠진걸 내가 밀었다 안하였소. 아부지한테 허벌나게 안 맞았소.”
사태는 막냇동생을 업은 복영이 복순의 머리에 꽂아 줄 꽃을 따려 허리를 굽히는데 복순이 달려오다 부딪혀 넘어지고, 이내 저수지의 경사진 곳으로 미끄러져 빠지며 죽을 위기를 후빈이 구해 인연을 계속 이어가 이제는 처가 된 것이다.
복순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상황이지만 태석이 자꾸 놀리며 웃은 것이다.
그렇게 먹고 마시며 떠들다 돌아간 그들은 내일 추수에 대비해 잠자리에 이른다.
단고리 장정들마저 낫을 들고, 기장리에 품앗이를 오자 기장리 추수는 예년보다 금새 끝나며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즐긴다.
한편, 문재철은 거두어 들인 쌀을 전부 목포에 팔았는데도 일제의 저미가 정책에 의해 전보다 훨씬 적어진 수입에 울상이고, 암태도 아니 조선의 쌀 전부를 입에 넣어도 양이 차지 않을 욕심의 배를 지닌 자다.
문재철은 즉시 목포에 연통하여 수십의 일경들을 부르고 목포의 부일 반역자들에게 왈패들을 사들여 암태도로 데려온다.
그렇게 모인 50여명의 모리배들은 문재철에 의해 집마다 방문하여 다시 2할의 쌀을 더 뺏어오고, 이에 서태석 등은 동와전리로 몰려가 봉기를 촉구하며 문재철 아비의 송덕비를 때려 부수는 사태가 일어난다. 1924년 1월 일이다.
하필 복영이 목포에 나가 고기를 팔고 쌀을 사오는 과정에서 일이 벌어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아비의 송덕비가 파괴되자 다시 모리배 50여명을 몰아 서태석, 서동오, 박종유 등이 몰매를 맞고 목포로 나가 진단서를 첨부해 고소하자, 문재철은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목포지청에 맞고소를 한다.
기장리 촌장의 배신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문재철은 촌장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을 쌀 100섬으로 유혹하고, 목포에서 암태도로 오다가 손자 넷만 남기며 작년에 죽은 아들과 며느리를 생각하고는 손자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촌장은 이내 마을 주민을 떠올리며 복영을 떠올리지만 당장 굶을 손자들을 위해 어쩌지 못하고 재철의 말을 따른다.
재판에서 그렇게 거짓증언이 이어지자, 억울한 사람이 갇힌다.
창석은 그런 촌장을 욕하다 재판정에서 퇴장당한다.
“성 지가 생각한 게 있었서라. 괴기를 잡으믄서 우덜이 괴기잡는 기술을 익히고, 베를 심는 거슨 부업할라 했지라. 그라믄 재철이 갸가 우덜한테 설설 길거 아닌게라. 그때 소작료를 솔찬허게 깍아버릴라 안했서라.”
“지금 해 불자.”
“아녀라. 우덜을 이간질해 불고 다니는 느자구없는 재철이 땜시 짐은 안되지라. 차라리 우덜이 목포로 가서 성하고 동상들을 구해오고 할 일이지라.”
평소 잘 흥분하지 않는 침착한 창석마저 흥분하는 것을 보고, 복영이 결심한다.
더 이상 마을 주민을 이간질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문재철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생각한 복영은 서창석을 위원장으로 하고 자신을 간사로 임명해 태석이 형과 친구 종유 등을 구해 낼 결심을 한다.
한편, 거짓증언으로 풀려난 문재철은 모리배들을 동원, 집집마다 방문하여 위협하고, 단고리 촌장의 집으로 무리를 이끈다.
내년에 이어질 추수거부투쟁의 싹을 뿌리 뽑으려는 듯이 추수거부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대라는 재철의 으름장에 단고리 촌장은 “모릅니다요.” 하며 버티었고, 몰매가 가해진다.
이 소식은 마을의 대표인 박필선, 서창석 등에게 전해지며 청년들이 몰려간다.
노인을 구타하면서 웃고 있는 녀석들의 배에 분노의 주먹을 꽂으며 싸움이 시작되고, 수적으로 우세한 왈패를 믿고 일경들은 일본말을 지껄이며 방관한다.
그러나 암태도 사립학교에서 태껸을 배운 청년들은 왈패들을 하나씩 눕히고,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일경들은 총을 쏘며 싸움을 제지한다.
다행이 하늘로 향해 총구가 향해 사망자는 없었지만 사망했다손 치더라도 거칠 것이 없는 왜적이다.
또 다시 문재철은 풀려나고 서창석과 박필선 등 10여 명만 구속되자, 복영은 즉시 면민대회를 열어 7척의 범선에 나누어 타고, 목포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고 면회를 요구하며 밤을 새고는 목포지청으로 몰려간다.
여기서 합의를 얻어내자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7월 3일 서태석 일행의 재판이 열리고, 상해, 소요죄 등이 선고된다
7월 8일 이 소식을 들은 600여명의 주민들이 아사동맹을 맺고 법원앞에서 연좌 농성을 하고, 3일이 지나자 쓰러져 실려가는 주민이 생기기 시작하며 사태는 악화된다.
이에 경찰서장, 목포지청장 등이 나와 회유하나 주민들은 듣지도 않고 굶으며 투쟁하는데 여기엔 백발에 수염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노인부터 아이를 업은 아낙까지 있었으니 국내외로 삽시간에 알려져 무료변론과 후원금이 잇따른다.
서울의 김병로, 김응로, 김태영 변호사와 광주의 서광설, 목포의 김영수 변호사 등이 무료변론을 자처하고 나섰고, 전국에서 후원금이 암태도 소작인위원회에 전달된다.
1924년 9월 1일 공판이 이루어지고, 이를 검사는 소작쟁의가 아닌 단결행동으로 보고 징역형을 선고하고, 문재철에 대한 각 지역 진보단체의 압박과 일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문재철은 결국 소작위원회의 요구 모두를 즉각 수용하고 재발이 없을 것이란 협상에 응하고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하였으나, 서태석은 3년, 서창석은 1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1923년에 일어나서 1924년까지 이어진 암태도 소작쟁의는 결국 소작인들의 작은 승리로 끝났고, 이에 전국에서 들불처럼 소작쟁의가 일어나고 탄압되는 일이 매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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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일한 선생은 유한양행의 설립자이기도 하고, 1937년 일제 강점기에서 종업원 지주제를 최초 시도한 민족기업가이다. 중일전쟁으로 의약품이 딸리자 모르핀(마약성 진통제)를 팔자는 간부를 그 자리에서 내친 일화는 유명하다. 중독이 강한 모르핀을 파는 건 결국 마약중독자 양성이니 이를 자신의 부로 이용하려는 간부를 내친 일은 당연한 것이다.
[2] 월남 이상재 선생은 충청남도 서천(舒川)분으로 1881년에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그의 수원이 되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 도중에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도 선진제국에 낙후되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을 꾀할 것을 역설하였다.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수사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홍영식이 참살당하자,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駐美)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도미(渡美)하였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치 아니하고 주미청국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자기가 대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주미조선공사의 독립적 활동을 저지하려 하자, 크게 분개하여 청국공사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하여 자주독립외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개한 청국이 조선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1888년에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정부는 다른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사범학교, 관립중학교, 관립소학교, 외국어 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직을 다시 사임하였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설을 서재필과 함께 추진하여 완성했으며, 「토론회」를 조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1898년 2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치로수구파 정부가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어 더 이상의 이권양여를 저지하였다. 계속하여 의회(議會)를 설립해서 전제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친로수구파에 의하여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모략에 걸리어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어이상재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경히 요구했으므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에는 초야에 묻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었다. 이 때 감옥 안에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기독교도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일본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東亞基督敎協會)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일제 통감부는 기독교세력을 반일독립세력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주로 기독교청년운동에 종사하여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려고 하였다.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여,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기독교 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남궁억(南宮檍)등 동지들과 함께 분쇄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와 종교단체 친목회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4개월 만에야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의원단들을 만나 한국의 탄압받는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그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되는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게 탄압받는 한국기독교운동을 폭로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일본 기독교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려서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하여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추대되어 당시 새로 대두되는 자치론을 저지하고 완전독립을 민족운동노선으로 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노환으로 서거하여, 10만 군중의 애도속에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