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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세상


남양수비대와 싸우다


너른 평야를 가로지르는 개울가는 졸졸~거리는 맑은 소리를 내며 끝없이 흐른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벌써부터 물장구를 치는 평화로운 마을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이 연상되나 이곳의 풍경은 다닥다닥 붙은 조선의 초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얼기설기 쳐 놓은 울타리는 집의 경계를 알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을 무너트리는 데엔 많은 힘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쟁기를 모는 농부에 의해 소들은 음매에~하며 이리저리 쟁기를 끈다.

“순돌네 소식 들었는감. 어제 밤에 독립군 30여명이 강을 넘어 왜놈들을 작살내고 왔다누만.”
“야 성님 들었지라. 지도 홍장군님 봐부렸는데 아따 무섭던디요.”

“순돌네 모르는 소리 말어. 홍장군님이 월매나 다정한데.”
“아따 성님 바람 나시겄소잉.”

“예끼~”
아낙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독립군의 국내진공 작전의 일부다.

이도구의 밀림지대에서 삼도구, 봉오동의 산세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넓은 평야지대는 조선백성들에 의해 개간된 황무지로 어느새 농사짓기 좋게 바뀐다.

청은 신해혁명을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이곳 만주는 청의 건국시기처럼 중요시한 땅이 아니었고, 유수의 군벌들이 있지만 그들도 길림성 이남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해서인지 해마다 마적들이 들끓어 독립군들이 마적을 막아주는 수비병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조선백성은 다시 독립영웅들에게 밥을 해주고, 군자금을 대주며 숨겨주는 선 순환의 구조로 이도구, 삼도구, 봉오동을 중국과 일제에 대항하여 지켜가는 조선의 땅이 된지 이미 오래다.

전투의 세세한 일들이 의도적으로 빠르게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가지 전략적 의도에서 행해지는 일이다.

첫 번째는 청진의 나남에 주둔한 19사단의 병력이 말을 달리면 2시간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주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선 빠른 소문이 필요했다.

독립군들이 아무리 굶고, 동상에 걸려가며 싸운다지만 언젠가는 먹어야 했고, 쉬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백성은 독립군이 싸우는 이유였고, 지켜야만 하였다.

두 번째는 민족의식의 고취다.

만주와 조선의 백성에게 독립군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하여 마을 아낙들의 입에서 입으로 조용히 멀리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1920년 6월 4일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잠입한 신민단의 30여 명의 독립군들은 후쿠에가 이끄는 헌병경찰을 쓸어버리고, 삼둔자 인근 일광산으로 유유히 튄다.

“박승길이 욕봤슴둥.” 여천 홍범도 장군의 칭찬이 있자, 25살이 어린 박승길[1]선생은 몸 둘 바를 모르지만 전설의 노장군의 칭찬이 기쁘기만 하다.

이 무렵 19사단장 오니와 지로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다 못해 불쾌하다.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의 국내진공이 알려진 것만 32회에 달했으니 자신이 부임한 후에 부쩍 많아진 독립군의 활동에 못마땅했다.

야스히로[2]는 오니와의 질책에 얼어붙은 채 연신 ‘죄송하다.’ 외칠 뿐이었다.

“빠가야로 나는 총독각하의 너에 대한 신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무식한 머슴에 포수 출신이란 놈한테 대 일본제국의 헌병들이 매번 당한다. 어찌 생각하나?”

“하 장군. ​죄​송​하​므​니​다​[​3​]​.​”​

따르릉~울리는 전화소리를 들은 오니와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교환은 사이토 마코토의 전화가 왔음을 알리자, 오니와는 마치 사이토가 앞에 있다는 듯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전화를 받는데 우스운 꼴에 야스히로는 웃지도 못한다.

“지난 새벽 또 당했다?”

“하 총독 각하. 송구합니다.”

“야스히로 바꿔라”

​“​야​스​히​로​입​니​다​.​”​

‘하 각하. 하’ 야스히로의 대답만 있는 전화는 오래되었고, 오니와에게 수화기가 다시 넘겨지자, 다시 부동자세로 전화를 받고는 끊는다.

“보고서가 있다는 총독의 말씀은 뭔가?”

“제가 일전에 총독께 보고 드린 내용입니다.”

“왜 말이 없었나? 가져와 봐”

“하 장군.”

길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오니와는 야스히로의 보고서를 쭈욱 읽어내려 가곤 야스히로를 보며 아래위를 다시 훑는다.

야스히로의 보고서는 치밀했지만 치졸했다.

어떻게 사건을 조작하고, 중국군벌을 압박하며 3면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독립군을 토벌할 것인지 자세하게 나왔다.

“책임지고 해보도록. 총독각하의 재가가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야스히로의 간보기가 시작이 된다.

명령을 받은 니히미중좌는 자신의 중대와 독립군과 전투경험이 있는 헌병경찰 1개 중대로 편성하여 두만강을 최초로 도강하여 독립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화일[4]이. 여기까지만 몰고 오라우.” 여천의 명령이 내려지자, 잠시 머뭇한 이화일선생은 일광산[5]의 가파른 산을 나는 듯이 뛰어 내려간다.

두만강을 넘는 왜적들을 자신이 직접 정찰하였으니 일광산과 두만강 사이에 자리잡은 그곳의 둔덕이 아니면 왜적들과 개활지에서 조우할 것이다.

그리되면 개틀링기관총을 넘어선 맥심기관총으로 독립군의 전력은 크게 손상될 것이다.

전투전의 긴장도 참을 수 없이 심장을 압박해 오는데 산길을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독립영웅들은 심장이 터질 듯하여 숨을 헉헉~대며 쉬면서도 다리는 빠르게 움직여 다행이 둔덕에 먼저 몸을 숨긴다.

‘박격포에 기마대까지 이놈들 작정을 하고 왔구만’ 이화일은 자신만을 쳐다보며 사격을 언제 시작할 지를 눈으로 묻는 대원들에게 손짓으로 명령하곤 왜적들을 꼬나 본다.

‘아직은 이르다. 박격포 사수를 빠르게 제압할 거리가 되야한다.’ 이화일은 성급하게 전투를 그르치지 않는 현명함을 보인다.

니히미는 정찰대를 따라 조심스런 진군을 한다.

가깝게 적들을 맞이하여 싸워야 맹사를 줄일 수 있음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전투전의 긴장감은 심장을 조이고, 왜적들이 250m의 거리에 다다르자 이화일의 총구에서 타앙~하는 소리가 나며 결사대의 사격이 이어진다.

독립군의 조준사격은 십수명의 정찰대에 가해지고, 타라락~둔탁한 소리를 내며 정찰대가 쓰러지자 나중에 총성이 울린다.

“엎드려라.” 니히미는 곧장 명령을 내리지만 재차 가해지는 사격으로 우왕좌왕하던 정찰대의 나머지가 도륙이 된다.

‘둔덕 너머에 숨어 있는 놈들에게 타격은 박격포뿐이다.’ 니히미는 박격포 사수에게 발사를 명령한다.

그러나 앉은 채로 박격포의 각도를 계산하던 박격포 사수들은 김춘진[8]과 조병록[9]선생의 조준사격에 머리를 내주며 죽는다.

‘이놈들 사격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니히미는 박격포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장교답게 빠르게 계산을 하고, 박격포의 포신에 포탄을 넣는다.

이를 본 이화일은 “달려” 명령을 내리고, 다시 전속력으로 결사대가 튄다.

일광산의 초입에 다시 매복한 이화일과 결사대는 멀리서 조심스레 진군하는 니히미를 바라보곤 다시 보고를 올릴 결사대원 한 명을 여천에게 보낸다.

“중좌님. 놈들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기마대로 ​쓸​어​버​리​겠​습​니​다​.​”​

“아라요시 좋다. 자네의 충성과 용기는 내 보고하겠다.”

“감사합니다. 대일본제국 만세”

이 무렵 독립군들의 최대 관심사는 맹사(盲射 목표를 겨누지 않고 함부로 사격)을 조심하여 탄약을 아끼는데 주력을 한다.

이는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독립군을 지원하는 조선백성에 대한 배려다.

특히 여천은 맹사를 항상 경계하며 늘 명령하고, 독립군을 훈련시키는데 주력한다.

아라요시는 기마대의 선봉에서 달빛에 반짝이는 날의 일본도를 들고 앞을 향해 말을 내달린다.

말을 빠르게 달리지만 기마대는 조준사격에 노출이 되어 50m의 거리에 다다르자 이미 1/3에 달하는 전사자를 낳고도 다다닥~하는 소음을 내며 결사대를 향해 달려온다.

“수류탄을 던져라.” 명령이 떨어지고, 수류탄이 날라 펑~하는 굉음을 낸다.

겁이 많은 말들은 굉음에 놀라 앞발을 치켜들어 기수를 떨구고, 달리지 못하는 앞의 말 때문에 뒤의 말들은 급격히 서게 되어 기수들이 나동그라진다.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왜적들은 수류탄에 의해 몸이 찢어지며 죽어간다.

피는 콸콸 쏟아지더니만 곧 꿀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 빠져 나온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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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승길 선생은 함북 온성(穩城)분으로 1919년 3월 간도 왕청현(汪淸縣) 백초구(白草溝)에 망명한 후 주민 수천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한편, 감리교인 10여명과 함께 신민단(新民團)을 조직, ​석​현​지​부​(​石​峴​支​部​)​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무장군 500여명을 양성하였다. 

동년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간도 및 함경북도 지방에서 모금한 군자금 3,500원으로 노령에서 권총 20정, 소총 30정, 탄환 등을 구입하여 독립군의 무장에 만전을 기하였다. 동년 12월에는 ​해​삼​위​(​海​蔘​威​)​에​서​ 소련군 린쉬비크파 군사령관 셉첸코 및 김규만(金奎晩)과 밀약하여 노령에서 소총 500정, 탄환 10만발을 무상으로 공급받아 신민단군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1920년 3월경에는 부하 20명을 인솔하고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나남(羅南) 19사단 아스가와부대와 교전하여 일분군 300여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명월구(明月溝) 이청림(李靑林)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10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단체를 통합하여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립하였는데 그는 김창순(金昌順)과 함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표로 참석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날이 팽창되어 가는 일군의 세력을 감당할 수 없어 1922년에는 노령(露領) '고로시카'로 망명하여 젊은 교민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1935년에는 일본 자작농 토벌대의 선두에 섰다가 붙들려 모진 고문에 고막을 잃기도 하였으며 탈옥한 후 다시 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2] 극에서 여천 선생의 전담 수사 장교로 등장한다. 1904년부터 자신들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힌 여천 선생을 전담한 수사팀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야스히로로 대치한다.

[3] 일본인들의 짧은 혀를 생각하며 극화해 봅니다. ^^

[4] 이화일 선생은 함북 경성(鏡城)분으로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이 ​홍​범​도​(​洪​範​圖​)​・​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의 주둔지인 봉오동지역을 포위하고 진격해오자 그는 대한독립군 이원(李園)부대의 제1중대 제1분대장으로서 고려령북쪽 1천 2백미터 고지와 그 북쪽 마을 앞에 잠복하여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기다려 유인하였다. 

중국 영토에 불법 침입하여 속전을 서두르는 일본군 부대가 6월 4일 아침 6시경에 보병을 선두로 그의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지점에 도착하자 그는 부대를 양쪽으로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지리적인 이점과 완벽한 작전으로 당황한 적을 섬멸하고 통쾌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적군 12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일군의 추격을 피하여 쏘련으로 피신하였다가 귀만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기록인데 6월 5일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5] 삼둔자 전투라고 알려진 남양수비대와의 전투는 도문에 위치한 일광산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발로 쓰는 청산리전투의 역사적 진실(김춘선)’ 책을 보면 삼둔자 전투의 유족이 삼둔자가 아닌 일광산에서 전투가 있었다 증언한다. 가족의 시신을 직접 거둔 유족이었을 테니 증언에 상당한 신빙성을 필자는 둔다.

[8] 김춘진 선생은 홍범도 일지에는 존재하나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엔 선생의 이름은 없다. 조명이 시급하다. 남북한의 위정자들은 독립영웅들의 기록을 남겨 후손에게 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있는 사람들이다. 정치적인 목적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빨리 영웅들을 조명해 내야 한다.

[9] 조병록 선생도 김춘진 선생과 사정이 같다. 공훈록에 없다. 이 두 분은 사실 1906년 전투에서 전사하나 필자가 조명하기 위해 극화한다. 두 선생은 일지를 본 바로는 포수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야스히로와 오니와 지로와의 만남은 개연성이 충분합니다만

1920년 7월이 되어서야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이 입안됩니다.

실제로는 오니와지로가 병력을 운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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