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파 (1)
“끄윽~ 아야야야얏…….”
그렇게 신음하며 허리 근처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 움직임 때문에 팔과 어깨에 무시무시한 격통이 밀려왔다.
그 아픔을 달래려 허리를 비틀자 또 다른 통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통증이 통증을 부르는 쳇바퀴 같았다.
야구대회 2일째―2학년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린’은 여느 때와 같은 통학로를 괴로워하며 걷고 있었다.
A반은 야구와 배구에서 우승, 축구에서는 준우승이라는 꽤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그 대가는 강렬한 근육통이었다.
통증에 몸부림치느라 보통 속도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만일을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선 점은 정말 칭찬받을 일이었다. 그래도 학교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언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
상쾌한 아침 인사와 함께 ‘린’의 등을 내리치는 강렬한 힘! 이 괴력의 소유자는…… 시노하라 사키였다.
근육통으로 버틸 기력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던 ‘린’은 사키의 일격에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해! 그러면 내가 꼭 괴력 소녀 같잖아!”
‘그럼 아닌 줄 알았냐?!’
가즈히로는 마음속으로 츳코미를 날렸다. 입 밖에 냈다가는 열 배로 돌아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서 일어나. 이런 데서 자면 사람들한테 민폐예요, 민폐♪”
귀여운 애니메이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은근히 가혹한 대사. 이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키와 마찬가지로 ‘린’의 친구 중 하나인 아베 토코였다.
토코는 종종 독설을 내뱉는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조금은 근육통에 시달리는 ‘린’의 몸을 걱정해 주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 들어 가즈히로는 마음속으로 입을 삐죽였다.
사키와 토코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린’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혹시 근육통이야?”
“으…… 응.”
치마에 묻은 흙을 털며 사키의 물음에 대답했다. 근육통이라는 점을 굳이 알려줄 필요
도 없었다. 걷는 자세가 지금 막 태어난 새끼 양 같았으니까.
“린, 너 꼭 꼬부랑 할머니 같아!”
“그 안짱다리는 또 뭐야~!”
치마에 안짱다리라니,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히 흉하기는 하지만 고관절 주위의 근육까지 당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사키와 토코는 ‘린’을 사이에 놓고 걷기 시작했다. 물론 ‘린’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말할 것도 없는 두 사람 나름의 배려였다. 평소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린’을 놀리지만, 그런 장난 또한 친하다는 증거였다. 역시 셋은 사이가 좋았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린’, 사키, 토코처럼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점차 늘어났다. 아이들은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세 사람을 차례로 앞질러 갔다. 그때 가즈히로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어? 왜 다들 한 번씩 쳐다보고 가지……?’
앞질러갈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린’을 힐끗 돌아보고 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던 가즈히로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금방 납득했다.
노파처럼 느리게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으니 호기심에 찬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겠지.
“다들 한 번씩 쳐다보고 가네~.”
“할 수 없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라며 사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사키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렇게 눈에 띄었으니까.”
‘린’은 딱히 먼지가 많지도 않은데 갑자기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읏…… 그게 뭔 소리야?”
당황하는 ‘린’의 모습에 사키와 토코는 서로 마주 봤다.
“정말 못 말려. 아직도 모르겠어? 넌 이제 유명인이야.”
“응응. 어제 네 얘기 벌써 소문 다 퍼졌거든.”
일이 그렇게 커진 줄은 모르고 있던 가즈히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우승 후보였던 E반을 쓰러뜨린 장본인이 여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가즈히로도 당연히 관심을 두었을 테니까.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응응. 유명세를 치러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뭐든 유명해지면 사소한 일로도 주목받기 십상이다. 학교생활이 지금보다 불편해지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미치겠네……. 가즈히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주목을 받은 게 꼭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여어!”
E반의 야구 멤버였던 야마자키가 ‘린’을 쫓아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친한 사이처럼 말을 걸어 오다니, 가즈히로는 그 변화에 적지 않게 놀랐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부터 쓸데없이 상큼하기는!”
사키의 시선이 뛰어가는 야마자키의 등을 쫓는다. 약간 빈정거리는 그 말투에서 전부터 아는 사이임을 엿볼 수 있었다.
“징그럽게 질긴 인연이지♪”
“그러니까, 정말 징글징글하다.”
사키가 귀찮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즈히로는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우에노를 선두로 같은 반 여자애들과 남자 야구 멤버들이 연달아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구기대회 덕분에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와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명세라고 다 나쁜 건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의 대형 괘종시계가 8시를 가리킬 때쯤 간신히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출발한 덕에 지각은 면한 듯했다.
학생용 현관으로 들어가 아픈 몸을 삐걱거리며 신발장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봉투 같은 물체가 하나…… ‘린’의 발밑에 떨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주우려 했지만 이놈의 근육통이 저지했다. 떨어진 봉투를 눈치챈 사키가 ‘린’ 대신 재빨리 그걸 주워들었다.
“뭐야, 이건?”
사키는 너무 자연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을 봤다. 유감스럽게도 ‘린’의 프라이버시는 없었다. 사키는 봉투를 ‘린’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자애가 보냈나 봐?”
‘린’보다도 토코의 오른손이 더 빨리 그걸 움켜쥐었다.
“어디, 어디? 나도 볼래♪”
사키에게서 편지를 받으려 한 ‘린’의 손은 그냥 그대로 허공에 떠 버렸다. 역시 ‘린’의 프라이버시는 없었다.
“진짜네♪ 이거, 누름꽃이야!”
무슨 이유에선지 토코는 처진 눈을 반달처럼 뜨고 이 사태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린’은 토코에게서 낚아채듯 봉투를 탈환했다.
“꺄앙! 린이 훔쳐갔어!!”
‘내 편지거든! 애초에 내 거라고!’
뺨을 부풀리며 항의하는 토코의 말은 무시하고 봉투와 그 안을 확인했다.
묘하게 귀여운 필체의 수신인 이름과 파스텔 색조로 도배된 소녀틱한 봉투, 그리고 안에는 봉투와 세트인 편지지가 한 장. 보라색 누름꽃은 그 편지지에 싸여 있었다.
확실히 남자가 보낸 편지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편지지에는 아무런 말도 없어서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키가 뭔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이거 프리지아 아냐?”
“프리지아?”
생소한 단어였다. ‘린’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사키는 ‘린’의 무지함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 꽃 이름이야.”
“자, 잘 아네…….”
자랑은 아니지만, 가즈히로는 꽃이나 나무에는 약했다. 특히 식물도감은 싫어하는 책 중 하나였다.
사키는,
“여자라면 상식이지…….”
라며 가슴을 쭉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몽우리가 티도 안 날 정도로 절벽인 건 애교로 넘어가 주자.
“덤으로 내 탄생화야♪”
토코가 묻지도 않은 토막지식을 자랑했다. 그 말처럼 보라색 프리지아는 2월 탄생화였다.
“꽃말은 아마 ‘동경’일 걸?”
끄응…… 가즈히로는 마음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7년, 신발장에 러브레터라는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은 세일러복으로 몸을 감싼 여고생이다. 그리고 프리지아 꽃잎이 든 편지의 주인공은 여자아이인 듯했다. 더구나 꽃말은 ‘동경’.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팬레터네.”
사키가 숨겨진 내막이라도 밝히듯 말했다.
“팬레터……?”
“그래, 보면 여자애가 여자애를 동경하는 일도 종종 있잖아. 그거야, 그거!”
가즈히로는 여자란 그런 생물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으로 편지의 주인공을 어림해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봉투를 가방에 넣은 뒤 ‘린’과 사키, 그리고 토코는 2학년 A반 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항상 시끌벅적한 교실 안이 오늘은 한층 더 소란스러웠다. 셋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마주보며 교실로 발을 내디뎠다.
이미 학생 대부분이 등교한 뒤였지만, 그 중에도 아줌마 체형의 우에노가 중심을 차지한 집단이 소음의 근원지였다.
“와우~! 린, 드디어 왔구나―!”
우에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며 간신히 교실에 도달한 ‘린’의 옆으로 득달같이 쫓아왔다.
“있지~ 아까 여자 테니스부랑 여자 수영부 주장이 왔었어.”
‘린’은 크게 고개를 갸웃했다. 3학년은 오늘 구기대회 마지막 날의 주역인데 왜 2학년에 교실에 나타났을까?
“‘입부하지 않겠냐’고 하던데?!”
이른바 ‘입부 권유’였다. 호메이 고교에서도 연례 행사로 입부 권유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매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입학한 1학년들 중 유망해 보이는 아이들에게 입부를 권하지만, 그건 갓 입학한 1학년의 경우였다. 그런데 2학년인 ‘린’에게…… 그것도 3학년 주장이 직접 권유하러 오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역시 남달라. 아주 자랑스럽다!”
무슨 이유인지 우에노는 몇 번이고 ‘린’의 등을 두드리며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뜬 ‘린’을 향해 이번엔 사키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어제 우리 주장이 너 데려오랬는데.”
“응응! 어제 분명히 그랬어!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이걸로 세 번째 권유다.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 라며 한숨을 내쉰 ‘린’에게 우에노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럼, 우리 소프트볼 동호회도 일단 권유해 둘까?”
소프트볼 동호회는 아직 정식 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야구부나 축구부, 육상부가 쓰는 운동장 한 구석을 빌려 근근이 활동하고 있다. 주장은 우에노였다. 그 주장의 직접 권유였다.
테니스부, 수영부, 농구부…… 그리고 소프트볼 동호회. 네 개의 부에서 권유를 받았지만, 그 중 가즈히로가 원하는 ‘야구부’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시엔을 목표로 하는 야구부에 여자가 들어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난처해진 ‘린’에게 재빨리 구원의 손을 내민 사람은 토코였다.
“자, 자~ 모처럼의 기회인데 일단 체험 입부를 해 보고 나서 결정하면 되잖아?”
“체험 입부?”
체험 입부도 호메이 고교에서는 일상적인 이벤트 중 하나였다. 하루만 시험삼아 부활
동에 참가할 수 있는 이벤트다.
매몰차게 거절하기보다 이왕이면 체험 입부를 한 뒤에 거절하는 게 나중에 문제도 생기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가즈히로는 이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에노가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어쨌든 내일부터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니까, 우선은 시험부터 끝내 놓고―”
기껏 잊고 있었는데……, 라는 원망에 가까운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고사 전 일주일은 시험 준비 기간…… 구체적으로는 학생의 시험공부 시간 확보를 위해 좋든 싫든 부활동 종료 시간이 오후 5시로 당겨진다. 즉, 속 편하게 부활동이나 체험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물론 ‘린’도 시험공부를 해야 하니 체험 입부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단 중간고사가 끝난 뒤로 미루자…… 는 결론을 내렸을 때 교실의 누군가가 외쳤다.
“선생님 오셔!”
담임 타네다가 왔다는 건 이제 곧 홈룸이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다들 서둘러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린’도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묘한 시선을 느끼고 멈춰 섰다.
“……?”
교실 출입구에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인가…… 라며 자리에 앉았다.
가즈히로에게 입부 권유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것도 갓 입학해 아직 부가 정해지지 않은 1학년이라면 모를까, 2학년이 권유를 받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2학년이라면 보통은 이미 어느 부에든 들어가 있을 테니까.
‘잠깐……?’
가즈히로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가야사카 린’은 왜 아무 부에도 안 들었을까―?’
‘가야사카 린’의 운동신경이 평균 이상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부에든 들어가기만 했다면 나름 활약했으리라.
오랜만에 ‘린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 부에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그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 담임 타네다가 교실로 들어왔다. 당번이 기립 구령을 외쳤다. 가즈히로는 기억을 더듬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모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