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초 - 마인드 더 갭 1화
"어쩌다가 그럴 용기를 냈어?"
"용기는 무슨. 그냥 한 거지."
"그냥? 너 멋져 보이려고 괜히 그러는 거지?"
으아, 차라리 죽여줬으면.
친구가 전화로 뭐라고 따지든 간에 윤서주는 정말로 별생각이 없었다.
"야! 웃기지 마! 날 찬 사람한테 폼 잡아서 어디다 써?"
윤서주는 남이 쳐다보는 걸 무시하고 광장 한복판에서 소리쳤다. 어제는 소설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편을 집어들자 아침 햇살이 침대 언저리에서 어른거렸다. 시계를 보러 핸드폰을 켜보니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 있었다.
"너 내가 좋아한다고 했더니 뭐라 그랬어! '미안해, 서주야. 나 사실 백목이를 더 좋아해.' 진짜 너무하네!"
윤서주가 예전에 자기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걸 듣자마자 친구는 깔깔댔다. 좀 전까지 손에 잡힐 듯했던 친구가 바다 건너 저편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미는 것 같았다. 약 올리나.
[한국에서 학교 안 다닌다길래, 나한테 차여서 갔나 했지.]
"헹, 교장 선생님 추천서는 그 전에 받았거든."
[사귀자는 말에 내가 좋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윤서주는 여기까지 온 거 다 질러버리자는 마음으로 귀도 붉히지 않고 말했다.
"그럼 안 왔지."
[나 때문에 떠난 거네?]
"됐네요! 끊어! 남자 친구랑 잘 지내라! 아주 알콩달콩 사세요!"
윤서주는 즐겁고 시원하게 웃어버리고 전화를 끊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동안 못 만났지만, 친구도 잘 지내고 있나 보다. 친구 말대로 난 어쩌다가 여기로 올 용기를 냈을까. 두려움이란 번지점프 같아서, 이겨내려면 눈을 꽉 감고 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용기가 무모했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좀 더 해야만 했다.
오스카 J. 골든은 적을 쫓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보다 일찍 걸어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언제든 할애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오스카는 단 한 번도 타이밍을 맞춘 적이 없었다.
집어치우자. 어차피 백 년도 더 된 이야기가 아닌가.
고층 빌딩 전광판이 번쩍이며 광고가 흘러나왔다. 앞니가 튀어나온 TV 호스트가 새로 출시된 스포츠카의 장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빌딩을 올려다본 오스카의 얼굴은 열여섯에서, 많게는 열일곱으로 보였다. 그러나 앳된 얼굴에 눈빛만이 제 나이답지 않게 강렬해서, 외모가 오스카의 진짜 나이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걸 드러냈다.
오스카는 입을 벌린 시체를 두고 잡생각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피가 등으로 쏠려 피부가 하얗게 변한 시체는 마치 무생물 같았다.
그는 시체의 눈을 감겨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한 명의 눈을 감겨주고 싶다면 수십 명의 눈도 일일이 쫓아다니며 감겨줘야 했다.
오스카는 친절하고 어수룩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니와,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하지만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지표가 사람 시체이길 바랄 만큼 비뚤어진 성격은 아니었다.
바람에 새카만 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로스! 켈리! 썩 나와! 집합 장소에서 1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나를 뺑뺑 돌게 만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잖아!"
오스카는 어두운 사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제대로 걷기나 할까 싶은 왜소한 할머니가 부러진 지팡이를 놓친 채 죽어있었다. 그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법한 아이가 배가 찢겨 내장을 흘리며 죽어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젊은 남자가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죽어있었다.
그런 식으로 거리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즐비했다. 오스카는 자신이 너무 늦었단 점에 분통을 터트렸고, 로스와 켈리가 약속만 지켰어도 이런 꼴은 나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로스! 켈─ 이런 빌어먹을!"
오스카는 골목 뒤편 쓰레기장에서 두 사람을 찾아냈다. 로스는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켈리는… 켈리는 몸통이 반쯤 잘려나간 채였다.
"살아있어? 아직 안 죽었냐고!"
오스카는 로스를 다그쳤다. 로스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죽어있었다.
오스카는 현기증을 느끼고 벽을 지지대 삼아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뒤에서 신음이 들렸다. 쓰레기장 한복판에 쓰러진 켈리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벙긋대자 반 토막 난 몸이 꿈틀거렸다. 그 반동으로 창자가 쓰레기더미 위에 쏟아져 내렸다.
오스카는 더는 지켜보지 못했다.
"목소리가 안 나오면 그냥 가만히 있어. 목소리가 나와도 아무 말도 하지마."
그런 꼴로는 살 가망이 없다. 오스카는 뒷말을 삼켰다. 켈리는 입에서 피를 울컥 토하더니,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고개를 꺾었다. 숨이 멎은 것이다.
오스카는 초점을 잃은 눈을 감겨주러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손이 그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어찌나 강한 힘이었는지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켈리의 시체에 코를 박을 뻔했다.
먼지와 피, 그리고 땀에 푹 절은 남자가 쓰레기를 헤치며 기어 나왔다. 남자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오, 오, 오스카─"
오스카는 혀에 힘이 풀린 남자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오스카 골든이다. 두 사람이 협력자를 더 불렀나 보지. 일어서서 똑바로 대답해!"
"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쓰, 쓸모는 없었지만요."
말투에 힘이 없는 남자였다. 오스카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딘입니다. 와, 와쳐이기도 합니다."
"와쳐(Watcher) 딘."
오스카는 그가 말한 이름을 되뇌었다. 최근 들어 정말 흔해진 성씨였다.
반쯤 넋이 나간 딘은 여전히 말을 더듬었다.
"켈리와 로스가 당하고… 저, 저는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뇨, 죽은 척을 했죠. 아마 제가 죽었다고 여겼을 겁니다."
"죽었다고 여겼을 거?"
오스카가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그가 얼굴을 어찌나 가까이 들이댔던지, 딘은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사냥꾼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이 있어.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해낸 사람이 없긴 하지만, 거의 맞다고 봐도 돼."
시체들이 흘린 피로 젖은 골목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적색자는 자신이 죽인 자가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을 증오한다."
먼 곳에서 여자가 흐느끼며 웃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시체를 다시 죽이기 위해 반드시 돌아온다."
딘이 비명을 질렀다.
"위에!"
그것은 빌딩 옥상에서 이쪽을 내려다봤다. 여자의 얼굴이었다.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입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얼굴을 따라 끔찍한 몸뚱이가 드러났다. 그것은 네 발로 움직였고 발톱은 짐승과 같았다. 기괴한 몸통에, 정면에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만이 사람의 형상이었다. 광기였다.
적색자, 그것이야말로 오스카가 쫓고 있는 사냥감이었다.
괴물은 오스카와 눈이 마주치자, 반대편 건물에 몸을 날렸다.
"잠깐, 잠깐! 저 자식이 어디로 내빼는 거야! 네 먹잇감은 여기 있잖아!"
"저를 머, 먹잇감이라고 했나요?"
"미끼라고 부를 걸 잘못했어. 쫓아!"
오스카는 멱살을 잡고 그를 집어던졌다. 딘은 바닥을 굴러 사거리로 빠져나왔다. 타이어 바퀴에 찍힌 이마에 자국이 났다. 정신을 차린 딘은 오토바이 주인으로 보이는 시체를 끙끙대며 옮겼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좀 빌리겠습니다.' 그리고 피로 벌겋게 젖은 주머니에서 오토바이 열쇠를 찾아냈다.
"먼저 가볼까."
오스카가 말했다. 그는 바닥을 걷어차더니, 반대편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블록 하나를 건너뛰었다. 매서운 속도였다. 얼음 위를 질주하는 유령 같았다.
딘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시동을 켜고 그 뒤를 쫓았다.
오스카는 달리면서 위를 살폈다. 귓가에는 바람을 가르는 소음이 요란했다. 뒤에서 오토바이 엔진음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딘이 그를 제대로 따라오든 말든 사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와쳐(Watcher)라고 해도 말이다.
착해빠진 겁쟁이.
오스카는 버나비 딘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유성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꽃이 뿜어내는 뜨거운 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그에게 코트를 덮어주면서….
아니야. 너는 용감했어, 누구보다 용감했지. 제기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