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초 - 마인드 더 갭 2화
괴물은 먼지를 일으키며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충혈된 시선 끝에 소박한 가정집이 들어왔다. 23이라고 적힌 번호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길목을 지켜야 했을 철문은 힘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괴물이 거대한 앞발로 창문을 내리쳤다. 유리 파편이 거실 바닥에 후두두 쏟아졌다. 괴물은 집 안으로 몸을 구겨 넣고, 여기저기를 마구 들쑤셨다. 열흘을 굶어 미쳐버린 들개처럼 입에서 침이 흘렀다. 썩은 고기를 찾아 소파 아래, 장롱 속, 침대 뒤… 오오, 화장실. 화장실은 가보지 않았는데 거기 있으려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문이 가까워질수록 배가 더 고파왔다. 괴물은 귀까지 찢어진 입을 쩌억 벌렸다.
"나쁜 자식일수록 발이 빠른 법이야."
강한 압력으로 쏘아진 충격이 괴물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괴물은 붕 날아가 수조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금붕어들이 사방에서 펄떡거렸다.
오스카는 화장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아, 아─, 아!"
"딘!"
어린 여자아이가 변기 뒤에 웅크리고 있었다. 혀가 공포에 마비되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딘이 달려들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루, 루시. 루시."
겁에 질린 아이는 누군가의 이름을 정신없이 불렀다. 오스카는 난로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루시&로지. 사랑을 담아서.' 사진 속에 똑같이 생긴 아이 둘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오스카가 자기 머리를 쓸어올렸다.
"쌍둥이야. 생긴 게 같으니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닌다고 착각한 거겠지."
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루시라는 아이는 주, 죽었─"
"달릴 준비를 해, 딘. 놈이 일어난다."
수조에 처박힌 괴물이 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쳐들었다.
딘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쩐지 놈의 신체 일부가 굴절되어가고 있었다. 배경과 경계가 뒤섞이면서 왜곡은 점점 더 커졌다. 전파가 불안정한 TV 화면 같았다.
"엄마, 살려줘요."
아이가 울었다.
괴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스카가 뒤를 돌아본 틈을 타, 커다란 몸통이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른쪽입니다! 이로 목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어요!"
딘이 아무것도 없는 곳을 보며 외쳤다. 오스카가 선 자리에서 발로 바닥을 힘주어 차자, 매서운 압력이 쇠공처럼 내리꽂혔다.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대리석 타일에 부딪히면서 우두둑 부러졌다.
놈은 투명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드러냈다. 목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었고, 흰자위는 핏줄이 다 터져나간 몰골이었다.
깔깔깔! 괴물은 신음 대신 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나를 잡을 수 없다는 조롱이었다.
놈은 힘이 빠진 척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약을 올리듯 다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바,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인비저블(Invisible)!"
오스카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놓여있던 꽃병이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본 오스카는 거실 한쪽에서 죽어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딘은 품에 안은 아이의 눈을 가렸다. 레이스가 달린 아동용 붉은 원피스. 사진 속에 찍혀있던 루시였다.
생각에 잠긴 오스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쪽이 로지인가? 로지를 미끼로 삼아서 놈을 끌어내 볼까?"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입니까?"
딘은 언성을 높였다가, 오히려 자기가 내뱉은 말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오스카는 속으로 아차 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을 홀로 싸워왔고, 효율만 따지는 나쁜 버릇이 들어있었다.
"제, 제 말은 그러니까…. 꼭 당신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딘 때문에 속이 터졌다.
"이 와중에도 저놈에게 붙은 현상금은 하염없이 오르고 있어! 네 말은 놈이 사람을 죽이게 내버려 두라는 소리밖에 안 돼!"
"오스카 골든! 목숨은 숫자로 세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말해줄까요? 가족을 잃은 소녀 앞에서 위로의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냉혈한이죠!"
딘은 감정에 휩쓸려 버렸다.
"여자앨 미끼로 삼겠다는 사람에게 대장 자격이 있습니까? 현상금? 당신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돈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당신이 죽은 사람 하나 살릴 수 없으면 잘난 척 하지 마!"
침묵이 마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오스카는 사과할 기회를 원치 않게 잃어버렸다. 딘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제가 할게요."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났다. 딘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가 미끼가 될게요, 사랑하는 루시가 천국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딘의 품 안에서 로지가 얼굴을 들었다.
늦은 밤, 오스카는 밖으로 나와 창고 옆에 섰다. 벽에 잠깐 기댔을 뿐인데 코트에 녹이 묻었다. 창고 안에는 집주인이 벽에 칠하려고 놔둔 페인트통이 놓여있었다.
끼익. 현관이 열렸다. 딘이 창고로 다가와 머그잔을 내밀었다. 초콜릿과 우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낮에는 죄송했습니다. 말이 지나쳤어요."
딘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여기가 이쯤에서 화해하느냐, 아니면 계속 싸우느냐 하는 갈림길이었다.
"오밤중에 남자 둘이서 코코아야?"
오스카는 혀를 차면서도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잔만 받아들었다 뿐이지 오스카는 마시지도 않은 잔을 바닥에 바로 내려놓았다.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청년과 그가 코코아 잔을 들고 있는 모습부터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한편, 기껏 코코아를 가져온 딘은 이 청년에게 선뜻 말을 걸지도 못하고 땅바닥만 보면서 쩔쩔맸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저만한 체구가 내는 팔심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딘을 쓰레기더미에서 일으켰을 때나 골목 밖으로 던졌을 때, 오스카는 180센티를 훌쩍 넘는 딘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자기 발이 허공에 붕 뜨는 경험을 한 딘은, 오스카에게 차마 말을 놓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딘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이는… 아이는 겁에 질려 있습니다. 로지가 용기를 낸 것은 나와 당신이 다퉜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저런 것쯤은 조무래기일 줄 알았습니다."
조무래기야. 눈에 안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해서 성가신 거지. 오스카가 혼자 중얼거렸다.
딘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요. 보이기만 한다면 쉬웠겠죠. 그렇다면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 나라에 와쳐가 없으면 불러들여도 됐고, 나도 있었죠."
불만이 쌓이면 아무리 얌전한 사람도 폭발하기 마련이었다. 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스카가 힘에 취해 남들을 우습게 본다고 여겼다.
"저건 자그마치 수백 명이나 사, 사람을 죽이고 다녔어요."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
오스카가 무겁게 다물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자존심 때문이군요."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를 뿐이다. 오해가 오해를 낳는 일이 반복되자, 오스카는 사람들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오스카는 남에게 자기 치부를 흔쾌히 드러내는 사람이 못 되었다. 까칠한 데다, 배려심도 없고, 사과할 줄 모르며, 고집스럽기까지 하다. 남의 비위를 맞추는 짓은 결단코 사양한다. 그렇다고 고독이 늘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어요. 사냥꾼이라면 누구든 동료가 필요합니다."
딘이 바른말을 늘어놓았다. 오스카는 일순간 감상에 젖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혀를 찼다.
"아, 또 시작이군. 너희들은 세상이 친절과 사랑으로 가득하다고 착각하지. 그걸 남에게 설교하는 게 무슨 의무인 양 굴어. 불필요한 친절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참견은 집어치워."
"당신은 전화할 곳조차 없나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사람은 있잖습니까."
전화할 곳이라면 있다. 오스카는 오늘쯤 연락하겠다고 말해놓고선 뒤로 미뤄둔 약속을 기억해냈다.
"말다툼하긴 귀찮아. 내 가치관이 네 도덕론과 맞지 않더라도 우리 일에 영향을 끼치진 못해. 사냥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시지."
딘은 이 까칠한 청년이 여태껏 총에 맞지 않은 게 대단할 지경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따듯했던 코코아가 차게 식었다.
찌익. 벌레가 울음을 그쳤다. 새카만 이불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쓴 양, 거리에 음울한 정적이 깔렸다.
두 사람은 제자리에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쿵…! 진동이 땅을 타고 느껴졌다. 페인트통을 든 오스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마당에 깔린 잔디가 짓밟혀 짙은 풀냄새를 풍겼다. 현관 앞에 도착했지만, 오스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시 방향! 아, 아니, 반대편으로 꺾었습니다!"
"똑바로 말해!"
"지그재그로 달려서 뭐라 할 수가 없어요!"
딘이 가리키는 방향이 중구난방이라, 목표를 제대로 겨냥하기 어려웠다. 애꿎은 꽃밭이 헤집어지고, 화분들이 박살 났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딘은 팔을 벌려 온몸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그러자 괴물은 딘을 정면으로 노리고, 대범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딘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한걸음도 도망치지 않았다.
괴물이 딘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물어뜯었다. 아악! 쇄골에 이를 꽂아 넣은 걸로도 모자라서, 놈은 딘을 물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맹수가 먹잇감의 뼈를 으스러트리려 턱을 비트는 짓과 닮아있었다.
오스카가 코트를 벗어 던지고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괴물의 목덜미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묵직한 주먹을 몇 방이나 후려갈겼다. 관자놀이와 눈을 거칠게 얻어맞은 괴물이 날뛰었다. 놈의 광대가 시퍼렇게 멍들고, 찢어진 눈에서 폐수처럼 피눈물이 흘렀다.
으흐흐! 얼굴이 피떡이 되었음에도, 딘을 문 이에 더욱 힘을 주며 괴물은 오스카를 비웃었다. "제기랄!" 가까운 곳에 있는 딘이 휩쓸릴까 봐, 오스카는 손이 묶인 사람처럼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끔찍한 몰골을 턱밑에서 지켜봐야 했던 딘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울부짖었다. 딘과 괴물이 흘린 피가 뒤섞이면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끝까지 버티겠다 이거지!"
오스카는 양손을 괴물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손을 끼우고 힘주어 벌렸다. 딘은 그 틈새로 어깨를 간신히 빼냈다.
캬앗. 괴물은 억지로 입이 벌려진 데에 분풀이하듯,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오스카의 손가락을 단두대처럼 물어뜯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손끝에서 기어오른 세찬 뜨거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열 손가락이 후두둑 잘려나가 잔디 위에 흩뿌려졌다. 딘은 반쯤 까무러쳤다.
오스카는 이를 꽉 깨물고, 바닥에 놓인 쇳덩이를 발끝으로 걷어차 올렸다. 창고에서 가져온 페인트통이 공중을 날았다. 괴물은 사각에서 날아든 노란색 페인트를 흠뻑 뒤집어썼다.
"저리 꺼져버려!"
잔뜩 쉰 목소리로 오스카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 소리가 방아쇠라도 된 마냥, 엄청난 힘의 격류가 휘몰아쳤다. 채찍 모양을 한 충격파가 부메랑처럼 휘어 괴물에게 날아들었다.
급소를 노린 공격을 피하려다가, 놈은 옆구리를 거칠게 얻어맞았다. 장기가 눌렸는지 배가 움푹 패였다. 괴물은 아스팔트에 녹색 위액을 게워냈다.
붉은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괴물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어둠 속으로 도주했다.
오스카는 다 잡은 사냥감이 멀어지는 걸 막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잘린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예상보다 심각했다. 고통을 억누르느라 진땀이 흘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지만, 말에 가쁜 숨이 섞여 나왔다.
"적색자의 머리가 인간과 같은 크기라 다행이야. 턱이 육식동물만큼 컸으면 네 어깨가 뜯겨나갔겠지."
"소, 손가락이…. 당신 손가락이 잘려나가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알아서 자라날걸. 너야말로 어깨가 빠졌잖아."
관절이 어긋난 딘의 왼쪽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딘은 정작 자기 쇄골이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된 아픔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당신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조용히 해. 로지가 깨버렸어."
딘이 얼빠진 얼굴을 들었다. 현관이 열리더니, 로지가 그 틈새로 빨간 구두를 내밀었다.
"다 끝났어요?"
로지는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았는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주저했다. 딘을 대신해 오스카가 대답했다.
"놓쳤어."
피를 많이 흘렸을 텐데 떨리는 기색이 사라졌다. 어조는 조금 전보다 더 또렷해졌나 싶었다. 딘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손가락들을 불안한 눈짓으로 힐끗거렸다.
"저건 주, 주워둬야겠죠?"
"필요 없어."
"빠, 빨리 이어붙이면 괜찮다고 들었어요."
"필요 없다니까. 말 좀 들어."
오스카가 피 묻은 손바닥으로 딘의 얼굴을 떠밀었다. 딘은 기겁하며 자기 눈에 들어간 피를 닦아냈다.
"당신은 정말 어린애 같─"
오스카의 손을 본 딘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자라난다고 했잖아."
언제 잘려나갔냐는 듯, 손가락이 흉터 하나없이 멀쩡하게 돌아왔다.
손가락이 잘린 게 꿈이나 착각은 아니었다. 오스카의 옷엔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피가 여전히 흥건하게 남아있었다. 딘은 너무 놀라 사레가 들렸는지 목이 쉬도록 기침을 해댔다. 잊고 있었던 아픔이 뼈마디에 다시 찌릿하게 밀려들었다.
오스카는 바닥에 벗어 던졌던 코트를 들어 올렸다.
"아스피린 몇 알 먹고 와서 로지를 챙겨. 이번에는 우리가 놈을 쫓자."
"쿨럭! 쿨럭! 무, 무슨 수로요?"
"페인트."
그가 코트에 가려졌던 바닥을 가리켰다. 노란색 페인트가 괴물이 지나간 길을 따라 줄줄 흘러나와 있었다.
"가자."
세 사람은 페인트 자국을 쫓아 한참을 걸었다. 새벽 동이 트면서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페인트가 끊겼다. 시청역 3번 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