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 귀찮은 그가 호위무사로 전직한 이유. (3)
“여기가 상점가야!”
“작은 마을치고는 꽤 넓군.”
몇 분간 걷다보니 어느덧 상점가에 도착했다. 여자아이가 상점가를 등지고 팔을 펼쳐보이자, 주변을 둘러보던 루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빠는 뭘 사러 온 거야?”
“향……”
“향……?”
여자아이는 향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루크는 아마도 이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과 향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잡화점에 가면 될 것 같은데.”
“아, 잡화점은 이쪽으로 쭉 가면 돼!”
여자아이는 그제 서야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그렇군.”
그러자, 루크는 여자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한 번 스윽- 쳐다보고는-
“방향만 알면 찾아가는 거야 쉽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오빠 어디가?”
“아……”
여자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쪼르르 쫓아와 자신의 팔을 잡자, 루크는 그제 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 역시 길치 맞지~?”
“…….”
결국 여자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썩은 얼굴을 하고 있는 루크를 잡화점 앞까지 안내해주고 떠났다.
‘……이름도 못 물어봤네.’
멀어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크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잡화점 안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청년이군. 이런 촌구석에는 무슨 일인가?”
“……이 마을에서 산 지 10년 됐습니다만.”
“엥?”
“뭐, 그런 건 어찌되든 좋으니. 향이라는 것을 하나 주시겠습니까?”
루크는 대충 대답하고,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700골드라네.”
“흠……”
상점 주인의 말에 루크는 지갑을 살펴보았다. 어찌된 우연인지, 운 좋게도 지갑에는 딱 700골드가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꼬마 마스터의 부탁으로 들여놓긴 했다만……”
꼬마 마스터란 필히 마스터 라트리아를 말하는 것이겠지.
“다음에 또 오게.”
루크가 돈을 지불하자, 상점 주인은 넉살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루크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물건을 살 돈이 있다면요.”
흐어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생기가 없는 젊은이구만.”
상점 주인은 멀어지는 루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더워 죽겠네.”
루크는 다시 어기적어기적-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주민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걸 느껴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졌다.
“하……”
툭-
허리도 목도, 뭐든 간에 구부정하게 숙이고 한숨을 쉬면서 걸어가던 루크는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충격에 고개를 들었다.
“음?”
누군가가 부딪힌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돌려받고 싶으면 잡아보시지!”
“…….”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소녀가 그렇게 외치며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돌려받는다고……?”
루크는 저 소녀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몇 분간 서서 고민하다가, 자신의 주머니가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지갑을 도둑맞은 건가……!”
지갑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눈치 챈 루크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뭐, 텅 빈 지갑이니까. 괜찮겠지. 빨랑 집에나 가자.”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고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누구시죠?”
도로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제인은 자신의 눈앞을 막고 선 정체불명의 물체를 눈치 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게지?”
그녀의 앞을 막고 선 여인이 물었다.
하얀 백발에 황색 눈동자, 창백한 잿빛 피부가 특징인 화사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신기한 느낌을 풍기는 2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아, 그런데요…….”
“음, 그런가!”
제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발의 여인은 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나이에 맞지 않은 말투에 의문을 품은 제인이었지만, 일일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있는 곳에 와서 일해 볼 생각 없나?”
“…….”
“왜 그러나? 방금까지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만…….”
여인의 물음에 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음? 무슨 소문?”
제인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세요? 이미 그라시아에 있는 헌터 클랜에는 다 퍼졌는데…….”
“그런 거 몰라. 난 헌터가 아니니까.”
“……?”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럼 내 소개를 하지.”
백발의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모험가 길드, 럼블 파티의 마스터 라트리아! 방황하고 있는 너에게 모험가로서의 길을 추천하는 바이다!”
“엑, 모험가셨나요…….”
“그래!”
약간 실망한 듯한 얼굴로 묻는 제인의 모습에, 마스터 라트리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럼블 파티라면 ‘답이 없는 모험가 길드’라고 불리는 그……”
“무슨 문제라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내미는 마스터 라트리아를 보며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대단하시네요.”
“그런가! 그래서, 어때? 나와 함께 모험가의 길을 걸어보지 않을래?”
제인이 나지막이 중얼 거리자, 마스터 라트리아는 한차례 웃음을 터뜨리고는 제인에게 물었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요? 저는……”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 것 같아 보였다.
“아……?”
하지만 마스터 라트리아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말 안 해도 돼. 네가 무슨 짓을 했던, 어떤 안 좋은 소문이 너를 감싸고 있던…… 그건 ‘헌터’였을 때의 이야기다. 너는 앞으로 ‘모험가’로서 변해가면 되는 거야.”
아까와는 다른 마스터 라트리아의 진중한 태도에 제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뭐, 조금만 해보고 그만둬도 돼. 잠시만 헌터 업계를 떠나서 좋은 성과를 내면 평판이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다른 좋은 직장을 구한 것도 어렵지는 않겠지.”
“……고마워요. 친절하시네요.”
‘닮았군.’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친 제인이 당찬 미소를 짓자, 마스터 라트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제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 마음에 준비가 되었으면 눈을 잠깐 감아보렴.”
“뭐, 뭘 하시려고요?
“일단 눈 감아봐.”
“아, 네……!”
제인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눈 떠도 돼.”
그러자, 3초도 지나지 않아서 마스터 라트리아가 그런 소리를 해왔다.
“저, 정말 떠도 되는 거예요……?”
제인은 눈을 감은 채로 불안한 듯 마스터 라트리아에게 물었다.
“그럼.”
마스터 라트리아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조심스럽게 한쪽 눈만 가늘게 뜨자, 그녀의 눈앞에는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이내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제인은 놀란 눈으로 마스터 라트리아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해안가 마을 코로나 타운. 우리 ‘럼블 파티’가 상주하고 있는 마을이지.”
“바, 방금 전까진 그라시아 거리였는데……!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무슨 짓을 하던 신경 쓸 필요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지.”
제인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지만, 마스터 라트리아는 기지개를 켜며 대충 얼버무려 버리고는-
“자, 갑작스럽겠지만 지금부터 길드 입단 테스트 시작이다!”
제인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네에에에?”
하지만 제인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길드에 들기로 했다지만, 난데없는 순간이동에 이어서 입단 테스트라니…….
“하아…… 한번 들어나 보죠.”
그러나 이내 한숨을 쉬고는 마스터 라트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스터 라트리아는 천천히 제인에게 다가가서는-
몰캉-
절도 있는 동작으로 제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깜짝 놀란 제인은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쳤다.
“응? 순간이동하려고.”
마스터 라트리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제인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자, 제인은 팔로 몸을 감싸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순간이동을 하는데 왜 가슴을 만지는데요!”
“후햐~ 그나저나 정말 굉장한 가슴이로구만~ 아하핫!”
“말 돌리지 좀 말아주세요…….”
하지만 마스터 라트리아는 화내는 제인이 무색하게도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인은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힘이 빠진 듯이 한숨을 쉬었지만, 마스터 라트리아의 손은 그녀의 가슴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간이동은 나한테 닿아있기만 하면 되거든.”
“그렇다고 굳이 가슴을…….”
“흐흐, 엉덩이는 어때?”
“안 돼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제인을 보며 마스터 라트리아는 음흉하게 웃었다.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가져갔지만, 제인은 찰싹- 하고 마스터 라트리아의 손을 쳐냈다.
“피이-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하던 대로 할 수밖에.”
그러자, 마스터 라트리아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다시 제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아예 없으시군요…….”
제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가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