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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만이소원의 세계

이야기터

외전 윤희순전

‘왜놈대장 보거라.
너희 놈들이 우리 사람을 이용하여 우리 임금을 위협해 네놈들이 무슨 통치를 한단 말이냐? 우리 조선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네놈들이 살아갈 줄 아느냐?
빨리 사과하고 돌아가라. 오랑캐, 마적놈들아. 우리가 너희를 살려 보내 줄소냐?’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출처: 독립기념관 ‘윤희순 가사집’)
 
‘이대로 두면 죽는다. 업어서라도 데려가야 한다.’ 생각한 선생은 아들을 업고 집으로 향하며 “돈상아 정신 차려야 한다. 너마저 가면 이 애미는 누굴 믿고 사느냐? 절대 정신 줄 놓치 말거라.” 하고 “어~” 어머니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들을 업은 선생은 오열을 한다.
 
1935년 아들 유돈상의 처참한 몰골을 보곤 이내 오열하는 선생은 돈상을 겨우 업고, 집으로 향한다.
돈상은 일제에 잡혀 고문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버려지고, 아들 소식을 듣고는 선생은 아들이 버려진 곳으로 간다.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내보려 하지만 돈상은 그조차도 못하고 죽고 만다.
“돈상아 돈상아 흑흑~” 하며 울던 것이 “아흑 윽 윽” 하며 오열로 바뀌고 만다.
시아버지 유홍석[1]선생이 죽고, 남편 유제원[2]선생이 죽으며, 믿고 의지하던 장남 돈상[3]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자 10여 일을 앓다가 순국한다.
 
“이보시게들 우리가 이럴게 아니네. 안사람들도 의병활동을 해야 할 것이야.”
이때 지나는 의병대를 본 선생은 집안의 곡식을 탈탈 털어 밥을 해준다.
 
이를 본 여성들은 즉시 감화되어 의병대를 조직하여 30여 명이 의병이 훈련하는 훈련장으로 몰려 가고, 부인들이 몰려오자 의병대가 오히려 놀란다.
“집에 애들은 어쩌고 오시오.”
“맡기고 왔으니 걱정마세요.”
 
유제원 선생은 말리지 못한다.
“내가 가사 적어서 우리가 필사한 것이예요. 나누어주세요.”
희순이 ‘병정가’ 라고 적힌 노래를 부르는데 따라 하기 쉬운 리듬이다.
 
이내 노래는 의병 사이에 퍼지고, 가사가 주는 내용은 왜적을 우리가 못 잡으면 후세가 잡으며 뼈와 살을 갈라내자는 내용으로 자주 불린다.
“화약을 제조함세. 자네는 염초, 자네는 유황, 자네는 규조토 가져와서 섞게나. 섞을 때 조심들 하게나.”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출처: 동일 ‘안사람의병가’
를 지으며 화약을 만드는 여성 의병대에게 “조심하게나” 연신 이른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윤희순의 집에는 난리가 난다.
“아버님 뭐라도 드셔야죠. 3일째입니다. 이러시다 탈나세요.” 며느리인 희순이 가져다 주는 밥상을 거들떠도 안 보는 시아버지다.
 
“오늘도 상을 물리셨소.” 남편이 묻는다.
“네 저러다 탈 나시겠어요. 어떡하든 뭘 좀 해봐요.”
“그러리다. 내가 형님들과 삼촌들을 모셔 와야겠어요. 이러다 상 치르겠소.”
당도한 이들에 의해 미음을 먹는 시아버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먼저 아버님 모시고 가세요. 저는 애들하고 뒤 따를게요. 그래야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아요.”
“그럽시다. 그게 좋겠소. 몸조심하시오.” 남편이 당부한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떠나고, 갑자기 들이닥친 일제 헌병경찰과 부일 반역자들이 행방을 묻고 “모른다.” 하며 버티자, 아들인 어린 돈상을 매질한다.
 
“이놈들 내 아들을 패 죽여보거라. 내가 말할 성 싶으냐. 어디 나도 패보거라”
말과는 달리 아들을 뒤로 한 채 완강하게 버틴다.
“빨리 대라. 빠가야로”
 
“네가 왜놈이구나. 어디 오늘 죽기 살기로 싸워보자. 이놈”
“이기 미칬나.” 뺨을 후려갈기는 부일 반역자다.
“그래 네놈도 이리 오거라.” 머리채를 휘어잡자 “아 아” 하며 끌려온다.
머리카락을 일본도로 내리친 헌병경찰이 “가자. 내일 또 올 것이므니다.” 한다.
 
“맘대로 하거라. 이놈들”
“순양댁 내가 급히 피해야 하니 우리 집하고, 내 패물하고 다 팔아서 이리로 좀 부쳐주오. 그러면 내가 찾아서 요긴하게 쓰리다. 욕심 내면 내 돌아올 것이오.”
“아따 성님 뭔 말을 그리 한다요. 솔찬히 섭섭하지라.”
 
“미안해요 시절이 하도 어수선해서 부탁해요.”
아들 돈상과 밤길을 떠나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에서 노학당을 설립하여 독립영웅을 길러내지만 일제의 간섭에 의해 폐교되고, 아들 돈상을 시켜 조선 독립단이란 단체를 만든다.
 
중국인들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백발의 여인이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며 맨 앞에서 총을 들고 뛰는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가 그들을 교화하고, 아들을 내세워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전선에서 싸운다.
 
“그때 우리는 조선 독립단 가족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중에 산속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지요. 윤할머니는 중국인 가정을 방문하여 일제와 함께 맞서 싸울 것을 선전하고 다니셨지요.” 중국 촌로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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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인석 선생의 사촌 아우이다.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에 유중락, 유봉석 선생등과 거병하고, 1907년 다시 일어나 가평에서 왜적과 접전하다 다리에 총을 맞는다. 이후 만주로 가서 학교를 세우고, 후학양성에 힘쓴다.

[2] 유제원 선생은 아버지와 부인 아들과 같이 활동하나 보훈처엔 공훈록이 없다. 신기한 일이다.

[3] 유돈상 선생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망명을 알고 찾아 온 일제 경찰과 부일 반역세력에게 얻어터지기도 한 일화에서 보듯이 부모에 의해 교화된 중국인들을 끌어들여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싸운다. 1928년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기도 한다. 본문처럼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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