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혼
“사십이 불혹이라는데….”
“봄날인 탓일까?”
발 뒤축을 도로 짚고 저편 북쪽을 넘겨다보았다.
몇 개의 지붕마루를 넘어서 그쪽에는 분명 불빛이 뜰에 비치고 있다.
“밤도 꽤 깊었는데 아직 아니 자는가?”
을지는 잠깐 넘겨다보다가 도로 바로 섰다.
그리고 관심이 가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내 나이 사십에 비기건대 딸뻘도 안 되는 소녀 국향이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진제(陣帝)가 국향이를 자기에게 부탁하는 그 편지투로 보아서, 분명 진제는 국향이의 장래 운명을 자기에게 부탁함일시 틀리지 않았다.
삼천의 후궁이 국향이의 앞에는 무색하였다는 진나라 국색(國色)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콧매, 입매, 눈매, 능히 육척 남자의 간장을 녹일 만한 국색이었다. 게다가 국향이는 오직 나만을 믿고 의지하러 만리길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이가 마흔 고개에 올라 선 을지 문덕으로서는 차마 염치에 딸같은 소녀에게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을지 자기의 부인은 여러 번 을지에게 제이 부인으로 간택하기를 권하였다. 시집온 이듬해에 한 아들을 낳았다가 일곱 살에 죽여 버리고 이래 생산을 못하는 부인은 을지가(家)의 가문을 위하여 한 소부인을 취하기를 권고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사천만의 신앙의 표가 되어 있는 을지로서는, 이십 년 함께 늙어 온 아내 이외의 여인을 가까이 할 생각은 염치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웃어 넘겨 오던 것이었다.
그런데 진제가 제 딸을 부탁하면서,
'만약 내 딸 국향이에게서 그대의 가문을 이을 사자(嗣子)라도 생기면, 이야말로 진나라 제실의 다행으로 보노라.'
고 제 딸을 부탁한 것은 분명 내게 시집보낸 것이다.
말하자면 제명(帝命)이요, 칙명이다. 게다가 동탕한 국향이의 체격은 사내의 품에 안기어 꼭 좋을 만큼 발육되었다. 이를 물리치는 것은 제명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천리에 어그러지는 것이다.
을지는 제게 좋을 대로 생각을 해오다가, 또 한번 지붕들을 넘어서 국향이의 거처하는 후당 쪽을 넘겨다보았다.
고구려의 교육은 부인―아낙네의 질투를 강짜라 하여 천하게 보는 한편,사내의 부당한 욕심을 천박한 행사로 멸시하는 것이다.
고구려 만성의 표지인 을지문덕답지 못한 생각에 스스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때에 무엇이 걸핏 을지의 시야 한귀퉁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홱 그쪽으로 눈을 돌리니, 분명 한 사람의 그림자가 후당 쪽으로 살그머니 더듬는 것이었다.
―수상한 놈!
그 모퉁이를 돌아가면 거기는 후당 밖에는 없다. 후당 근처에는 튼튼한 하인들이 둘러 있으니까 잡히는 밖에는 없다.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인물일까?
승상은 내내 의아하여 발돋움하며 후당 쪽으로 주의하였다.
벌깃벌깃 무엇이 이리 번적 저리 번쩍 하더니, 이놈 잡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인들이 한쪽으로 모여들며, 그 모여드는 쪽에서는 웬 한 괴한이 뛰쳐 솟아서 자빠질 듯이 도망친다.
그 도망치는 괴한은 을지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을지는 잠깐 비켜 주었다. 집 위로 감추였다 나타났다 하는 괴한은, 종내 승상의 가슴 한가운데 들어와 안겼다.
가슴으로 들어와 안기는 괴한을 을지 승상은 가벼이 쳐들어서 집안으로 옮겼다.
뒤를 쫓아온 하인들이 차례로 뜰안에 대령하는 것을 승상은 내가 맡았으니 걱정 말라고 모두 물리친 뒤에, 숨이 턱에 닿아서 씩씩거리는 괴한을 고요히 굽어보았다.
“너는 뭐냐 ?”
괴한은 승상의 비교적 온화한 음성에 눈을 들어 승상을 보았다.
뜻밖에도 자기가 승상과 단둘이 마주 대하고 있는 현실에 깜짝 놀란 듯,
“아이,승상님!”
하며 앉은 걸음으로 뒤로 물렀다.
“그래, 내가 을지로다.”
“승상님, 제발 소인의 처를 소인께 돌려 주십쇼.”
“네 처? 을지는 사십 평생 남의 처를 빼앗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고구려의 승상으로 앉아서, 왜며 한이 공녀로 바치는 여인들도 다 처치를 못하겠거늘, 인처까지 빼앗아서 무얼 하랴. 같지도 않은 소리라 승상은 고소하며 머리를 돌이켰다.
“승상님께서 모르고 하신 일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소인의 처가 이 을지궁에 잡혀 와 있습니다.”
“그래, 네 처를 빼 내려고 여기 숨어 들었더냐?”
“소인이 말해 봐서 가겠다고 대답이 나면 데리고 가려고․…….”
“그래서 이 엄중한 을지의 집에 숨어 든단 말이냐?”
“아내를 찾는 사내의 심정은 무엇으로든 막지 못합니다.”
“네 처는 그래 누구냐?”
“진국향이라는― 고구려 넓다 해도 다시 없을 미녀입니다.”
국향이라면 진의 천자가 이 나 을지에게 하사한 미녀다. 열일곱 살의 아직 시집 안 간 처녀다.
그런데 ‘처’란 웬 말이며,‘내 처’란 웬 말인가?
승상의 머리에는 문득 의혹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네 이름은 뭐냐?”
이렇게 묻는 승사의 어조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증오가 현저히 나타나 있었다.
“이름은 장량이라 하옵니다.”
“장량이라, 장자방이냐?”
“자방은 아닌 장량이올시다.”
“그래, 국향 공주와 내외가 된 지 몇 해나 되느냐?”
“하루도 함께 살지는 아직 못했습니다.”
“그럼 부모가 정하신 게냐?”
소위 장량이는 주저하지 않고 곧 대답하였다. 그러나 말은 좀 더듬으면서,
“국향 공주가 만고 절색이라는 소문이 하도 높길래, 소인이 담―궁장너머로 잠깐 엿보고 그 이래 신명께 축원드렸읍니다. 저런 아낙을 제 처로 줍시사고, 그래서 제 처올시다.”
승상은 고소하였다.
“맹랑한 녀석! 그리고 그 아내 뒤를 쫓아서 만여 리 길을 오단 말이냐?”
“네―……․”
“그리고 내 집에 잘못 들어오다가는 붙들리면 당장 박살을 당하느니라. 그걸 무릅쓰고 삼동을 노숙하며 만리 타국엘 온단 말이냐? 어이없는 녀석이다. 한인다운 생각이로다.”
“승상님, 그래두 소인의 이십대 조(租) 인가 삼십대 조인가 삼한서 건너온 이라고― 그래 소인도 한씨 성을 쓴답니다.”
“삼한이고 백제이고 간에, 단군님 후예로는 너 같은 멍청한 놈은 없어져! 국향이는 진제가 내게 하사하신 처녀야. 내 나이 사십에 딸 같은 처녀를 맡아 무얼 하랴마는 내게 아직 후사가 없거든. 그래서 좋은 밭이 생기면 거기 종자 뿌려 후사라도 얻을까 해서 맡아 둔 바인데, 한 소녀를 뒤따라 만여리 고행을 한 제 정성으로 보아서는 제게 주고 싶은 생각도 난다마는, 너같은 멍청한 녀석에게 주기는 국향이가 아까와.”
“승상님 ! 제발 소인께 주세요. 만여 리라 합지만, 내 여러 가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장차 국향의 의견도 따져 보고서 좋도록 처리하마.”
“만여 리 길을 굶으며 삼동에 한데서 자며 아내를 찾아 예까지 왔읍니다.”
“너희 진나라에 나라를 위해 그만치 정성 쓴 사람이 열 사람만 되었던들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을… 야, 자방이라고?”
“자방 아닌 장량이올시다.”
“응, 야 장량아! 진장에 감춘 호구는 도적해 낼 재간이 없느니라. 국향이는 수십 명 호위 아래 진궁보다 더 깊이 감추였으니, 네 재간 따위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딴 생각 낼 염도 말고 내 집에 방 하나 내어줄 터이니, 거기 나가서 쉬노라면 내 잘 생각해 보아 좋도록 주선해 주마.”
“네, 잘 생각하셔서 제발 국향이를 소인께 주십사― 소인도 여편네 데리고 살아 보고 싶습니다.”
“여편네는 얻어 주마.”
장량이는 협실로 내보내서 묵게 하였다.
그 지위로든 나이로든 청춘 남녀의 수위 사랑 문제에서는 초월하였을 을지 승상이었다. 그러나 소위 장량이라 하는 젊은이의 죽은 소리 한 마디 산소리 한 마디 하는 말의‘국향이는 내 처’라는 말이 유난히 마음에 걸리어 적지 않게 불쾌하였다.
그 자체로 보아서 대국 공주이며 인물 똑똑하고 영리하여, 씨암탉감으로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는 국향이에게 대하여 승상도 아주 무관심하던 것이 아니었다. 더우기 승상 부인이 나이 사십으로 이젠 단산할 나이요, 을지 가문의 뒤를 이을 자식을 아직 갖지 못한 을지 승상으로서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씨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우기 나이 사십에 아직 강장한 사나이로서 여인 몇 개 넉넉히 건사할 만한 승상이었다.
죽은 소리 한 마디 산 소리 한 마디 하는 장량이의 말을 일일이 관심할바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무관심할 수 없는 승상은 얼마간 불쾌한 기분으로 그 밤을 보내고, 이튿날 소상하게 국향이에게 따져 볼 심산으로 조반 뒤에 국향이를 불렀다.
춘광(春光)이 유난히도 명랑한 날씨였다. 문 열어 젖히고 볕 잘 드는 방에 호상(胡床)을 내다 놓고 호상에 걸터앉아, 뜰에 돋아나는 나무 움을 굽어보며 국향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국향이가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부르셨어요? 승상님―.”
을지는 약간 자리를 비켜 앉아 국향이가 앉을 자리를 내면서 거기 앉으라고 가리켰다.
“네, 공주를 좀 뵙고 싶어서….”
그러나 국향이는 감히 가리키는 자리까지 오지 못하였다. 승상이 앉아 있는 호상 맞은편에 읍하고 서 버렸다.
“공주는 혹 장량이라는 젊은이를 아십니까?”
“장량이란? 사람의 이름입니까?”
“사람은 중국 사람이고, 그 사람 말로는 진나라 국향 공주의 남편이라 던데요?”
“소녀의 남편이라고요? 소녀는 부왕께서 지정해 주신 남편 밖에는 남편을 모르겠읍니다.”
“미친 녀석의 미친 수작을 일일이 신빙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장량이라는 젋은이는 공주를 사모해서, 공주 떠나신 뒤를 좇아서 만여 리 길을 고구려 장안까지 뒤따라 왔답니다.”
“여기까지요? 그 장모라는 사람은 그래 지금 어디 있읍니까?”
“내게 제발 아내를 돌려달라고 조르고 조릅니다. 공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그 지성에 감천은 못한다 할지라도 감인도 안 되리까?”
“승상님, 그 장모를 소녀에게 한 번 보여 주세요. 소녀를 그토록 따르다니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보여 드리지요. 좌우간 이리 좀 와서 앉으세요. 자리가 기다립니다.”
승상은 국향이 앉으라는 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호상으로 돌아와 걸터앉는 국향이를 승상은 팔을 펴서 고요히 끌어안았다. 국향이는 온몸을 승상께 기대며 손을 들어 자기를 안은 승상의 양손을 잡았다.
“공주, 나를 위해서 내 집 후사가 될 아이를 낳아 주시오.”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는 이말에 대하여 국향이는 손을 힘껏 잡으며 작은 소리로,
“―네…….”
하고 응하였다.
“치만 이 나라에서 장가를 들려면 먼저 나랏님의 칙허가 있어야 됩니다.”
“딸을 내어 주시는 천자도 칙허하셨는데 나랏님께서 안하실까요?”
승상은 자기의 손 안에 잡힌 국향이의 손을 폈다 오므렸다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한 뒤에 말을 꺼낸다.
“공주 ! 딸을 내어 주는 이는 내어 주기만 하면 그뿐이니까 쉽지만, 그 딸을 받아오는 사람으로는 그리 간단하지 못합니다. 그 딸이 내 가풍에 맞을는지 좋은―우수한 자식을 낳을는지, 모든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내어 주는 사람과는 입장이 다릅니다. 게다가 공주, 나랏님의 칙허도 칙허려니와 내 집안 을지 부인의 허락도 또한 있어야 할 겝니다.”
“…….”
“을지 부인으로 말하면 열여덟 살에 을지 가문에 시집을 와서 곧 요행 자식을 낳았지만, 그 자식을 일찍 잃은 이래 아직 생산을 못합니다. 게다가 나이도 이제 단산할 나이가 됐습니다. 여인이 어느 가문의 상속자를 낳지 못한다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을지 부인도 제 죄를 대속할 만한 사람을 물색중이지만, 그러니만치 아무나 허투루 골라 내지 못할 형편이라, 을지 부인 자신을 대신할 만한, 인격으로건 지식으로건 부족이 없는 사람을 고르는게 그의 소망일 겝니다. 그러니까 을지 부인의 의향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일 겝니다.”
“승상님!”
국향이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도록 작았다.
“저는 승상님께 좋은 아드님을 꼭 낳아 드리고 싶은데요―어떤 자식이 좋은 자식일까요?”
“나라에 충성되고 부모께 효성 있고 형제 우애하고 용감하고 의롭고―말하자면 고구려 젊은이로 추호 부끄러운 데가 없을 아이라야 좋은 자식이라 할 수 있을 겝니다.”
“저는 그런 자식을 꼭 승상 가문에 낳아 드리겠어요. 승상님이 볼 것 없는 소녀를 용납해 주세요.”
승상은 잡고 만지작거리던 국향이의 손을 놓고, 팔을 펴서 국향이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승상의 품안에서 국향이는 그의 아리따운 눈을 푹 내리뜨고 고요히 있었다. 그의 눈썹과 입술만이 흥분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좀 거닐어 볼까요?”
이리하여 승상과 공주는 함께 뜰로 나섰다.
“공주께서는 기승(騎乘)에 꽤 능하시다고.”
“진궁에서 약간 기승을 배웠읍니다.”
공주는 이상한 소리를 내어 제 말을 불렀다. 저편 뒤에서 무슨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마부 서넛이 외치며 야단하는 틈으로 국향이의 타고 온 호마가 사람들을 머리로 헤치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달려온 말에 공주는 가벼이 올라 앉았다.
그 올라 타는 격식이며 올라 앉은 자세를 관찰한 승상은 내심 혀를 둘렀다.
“기승은 얼마나 닦으셨소?”
“일곱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꼭 십 년을 닦았읍니다.”
승상의 애마도 등대되었다.
승상과 국향이는 말을 몰아 대문 밖으로 나섰다. 대문 밖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좌로 우로 내왕하는 것이었다.
“승상님, 장성하는 고구려의 모습은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공주!”
말을 천천히 거닐면서 승상의 말하는 어조에는 약간 창연한 기색이 있었다.
“쇠운으로 향한 고구려입니다. 삼사십 년 전 내가 소년 적의 일을 생각해도, 고구려에는 한길에 나서면 반드시 젊은 아낙네는 한 아이를 손목을 끌고 한 아이를 등에 업고 뱃속에 한 아이를 밴, 아이 수두룩한 여인이 한길에 가득히 있었읍니다. 아이가 많은 것은 만성이 늘어나 가는 증거요, 이야말로 고구려 흥성의 증거였는데, 근년에는 이처럼 손목 끌고 등에 업고 뱃속에 넣은 여인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분명 쇠운에 들었읍니다.”
“그것을 깨칠 도리가 없으리까?”
“하늘이 아니면 무가내하겠지요. 이 나라의 승상부터가 겨우 한 자식을 낳았다가 그나마 기르지도 못하고 죽여 버린걸!”
하늘을 우러르며 길이 탄식하였다.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의 새 목숨이 많이 나고 안 남으로 결정이 되는겝니다. 이 나라 창성할 시절― 평안 호태왕과 장수왕의 두 명군 시절에, 이 나라 만성 사천만이라는 게 결정이 된 그 이래 더 늘지 않는 건, 성운이 다하고 쇠운이 이를 증거―이 쇠운 시절에 승사의 임에 앉은 내 책임은 중대합니다. 장차 이 나라가 기울면 기운 책임과 욕은 죄 이 을지에게 돌아올겝니다. 이 나라 만성의 기상도 줄어서, 예전에는 아낙들이 아이 업고 지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알더니, 지금은 그걸 창피스럽다고 아이 보는 애를 두고 하인을 두고 아이 업기를 꺼립니다그려! 사천만 인을 팔천만으로 일억만으로 끌어 올리려던 을지의 고심은 죽어 버리고, 몇 십 년째 사천만 그대로 잦아 버리니 한심한 일입니다.”
그들은 말을 거닐어 골짜기를 건너고 언덕을 타고 넘어 을밀대(乙密臺)까지 이르렀다.
“이 골짜기를 말 탄 채 건너겠소?”
“승상님이 건너시면―.”
을밀대의 큰 구렁텅이 같은 골짜기를 굽어보며, 승상은 말을 교묘히 움직여 건너편에 건너 섰다. 국향이 역시 진실로 교묘하게 말을 다루어 승상의 뒤를 따랐다. 건너 서 보매 거기는 굉장히 찬란한 무슨 전각이 너저분히 벌이어 있는 것이었다.
“여기도 대궐―별궁이오니까?”
“절간이오. 대궐 원당이오.”
그 절에는 수천 명의 승려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중국에도 이런 거찰은 쉽지 않겠는데요.”
“고구려는 중국보다 오히려 더 큰 줄을 아시오.”
부벽루까지 이르렀다. 감감하게 굽어보이는 대동강에는 고구려 만성들의 봄을 즐기는 뱃놀이들이 벌어져 있었다.
“뱃놀이도 많기도 해라!”
“고구려는 중국과 달라서 지아비에게는 반드시 지어미가 따르는 법이라, 부부가 쌍쌍이 노니까 곱으로 보일 게요. 그러나 예전에는 꼭 뱃속에 아이, 등에 업은 아이 해서 아이의 패거리가 많았는데, 이 근처의 경개가 너무 미려하기 때문에 고구려 만성의 기개가 죽어져서 아이 없는 놀이들을 하고 있는 형편이외다.”
인생 사십에 아직 한 자식을 못 가진 승상은 자식이 무척 그리운 모양으로 사사에 자식 문제를 꺼낸다.
영명사 일대를 휘돌아서 차차 도로 내려오는 동안 승상을 알아본 고구려 만성들은 승상과 동반한 한 아리따운 처녀에게 주의를 던지며, 그 처녀의 능란한 말타기에 모두들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뭇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승상에 배행하여 장안 서울 북쪽 끝을 한 바퀴 돌 동안 국향이는 고구려의 크고 작은 가멸음을 충분히 보았다. 그 세우는 전각이며 건물들의 웅대함은 물론이요,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벌써 강건하고 경첩함을 주삼아 만든 것으로서 모두들 깨끗이 희게 차렸다. 이 나라 이만성이 한 번 창을 잡고 칼을 들고 일어나는 날이면, 천하가 그의 아래 굴할 것은 그 걸음걸이며 몸 동작의 기개를 보아서도 알수 있었다.
아아, 가면 나라의 효용한 종족이여! 이 종족에게 어버이로 알리운 사람은 얼마나 큰 사람일까? 천하의 나라 진나라 황녀(皇女)로도 넘볼수 없는 대고구려의 굳셈과 부력에 국향이는 내심 한없이 감탄하였다.
소위 장량이는 승상의 의견으로 석다산(石多山) 석굴(石窟)에 있다는 석다선인(石多仙人)에게로 수양을 보냈다.
석다선인이란 예전 을지 승상이 소년 시절에 십 년간 사사(師事)한 일이 있는 이 동방의 큰 도인(道人)이었다.
며칠 뒤 승상은 둘째 아내를 맞겠노라는 뜻을 임금께 아뢰어 칙허를 얻었다.
“승상도 또 아내가 쓸데 있소?”
“소신도 사내인 이상 여인이 쓸데 있읍니다. 소신의 가운이 불운하와 국가의 죄인이 되었읍니다. 그 봉창으로 새 아내를 맞으면 백 천의 자식을 볼까 하옵니다,”
“진국향이라면 진나라 삼천 궁녀를 압도하던 진나라 만고 절색이라는 소문은 짐도 들은 법한데….”
“약간 예쁘옵니다.”
“아직 열 소리 하는 소녀를 사십 승상이 넉넉히 감당할까?”
“고구려 사천만 만성을 담당하는 을지로소이다. 소녀 여남은 명은 아직 넉넉히 감당하오리다.”
군신은 서로 마주 보고 미소하였다.
“그저 우리 승상 다복하지! 어떻게 진제가 만 리 밖 동이 고구려 승상에게 제 딸을 줄 생각을 했을까?”
“나랏님의 다복하심이 넘치시어 소신께까지 흘러내렸읍니다.”
“새 아내를 맞아서 승상보다도 부여 혼이 넘치는 자손을 많이 낳으시오.
평안 호태왕 같은 성운을 짐의 대에서도 한번 만들어 봅시다.”
승상은 뒤에, 부인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보았다.
부여의 아낙으로 질투라는 데서 완전히 해탈되어 있는 부인은,
“일찍부터 그런 생각이 있어서 제가 공주의 몸을 유심히 보고 어루만져 보고 했는데, 아이 잘 낳게 생기고 몸 튼튼해서 소임 넉넉히 감당할만합지만, 부여의 씨가 아니라서 약간 주저하던 바이옵니다.” 한다.
“부여의 정신만 가진 자면 문제 없을 게고, 내 손고 K부인의 손 아래서 부여 정신만 길러 주면 그만이 아니겠소?”
“좋도록 하세요. 전 생산치 못한 죄인이 무슨 말을 하리까?”
그로부터 국향이는 고구려의 아내로서의 훈련과 수련이 주입되었다.
고구려의 아낙― 본시부터 무척 벼르고 부러워하던 일이다. 비상한 열성으로써 수련하고 훈련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구려의 아내로서의 아무 부족이 없도록 쌓아 올렸다.
그해 가을, 길일 받아서 진나라 공주 국향이는 고구려 승상의 제이 부인으로 영입이 되었다.
그 결혼식에는 임금까지 거둥하고, 고구려 만성들은 제 집안 일같이 기뻐서 경축하였다.
이리하여 국향이는 고구려 대승상 을지문덕의 제이 부인으로 승상께 좋은 아들을 낳아 드리려는 결의로써 을지 가문의 작은 여주인으로 들어 앉게 되었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하늘의 소관사다. 하물며 좋은 자식 나쁜 자식은 사람의 관여할 바 아니다.
국향이의 커다란 야망은 달성이 될 것인가?
을지 승상에게서 석다산 석다선인께로 전갈 편지와 함께 석다선인께로 수도차로 와 있는 장량은, 얼마 있는 동안 우연한 기회에 을지 승상이 진나라 공주 국향이와 이 가을에 혼인한다는 소문이 들었다.
장량이에게는 이 소식은 청천의 벽력이었다.
장량이는 아직 국향이의 얼굴조차 본 일이 없었다. 진궁 삼천 궁녀를 압도하는 천하 일색이라는 소문만 듣고, 한 번 보면 하여 누차 담 틈으로 엿보았지만, 진궁의 제도가 황녀 국향이를 손쉽게 엿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제의 침입을 받아 지궁이 엉망진창이 되는 그 찰나에 이런 때마다 잠깐 엿보이려고 소란의 진궁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공주는 부왕의 글월을 받들고 동이의 나라 고구려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차피 망한 나라에 있느니 공주를 따라 고구려로 가려고, 그 길로 고구려로 떠난 것이다.
반 년―남아의 멀고 고된 길이었지만, 장량이는 그야말로 일편단심으로 국향이의 뒤를 쫓아 만리길을 왔다. 오면서도 고구려 장안에는 진인이라고는 자기와 국향이 밖에는 없으려니, 좀더 국향이와 가까워진 것 같아서, 국향이는 이제는 내 아내거니 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뒤를 따르는 가련한 남편이로라는 심경으로 그냥 따랐다.
국향이가 을지 승상 댁에 몸을 잠근 것을 알고, 승상 댁에 잠입해서 아내를 찾고자 하다가 하인들에게 붙들렸다.
발악을 하여 승상께 아내를 돌려 달라고 떼를 썼지만, 승상은 만나게 해주마 하고는 그 약속은 이행하지 않고, 뚱딴지 석다선인께로 귀양을 보낸 것이다.
국향이를 만나면 어떻게 한다는 아무런 안(案)도 없었다. 사고무친한 동이의 나라에서 국향이와 만나면 그래도 향인(鄕人)으로서의 정분이 서로 통하리라, 남보다야 그래도 향인이 정답겠지, 그러면 서로 의사 통하는 데도 있겠지―이만한 배짱으로 승상께 내 처를 돌려 주십사고 떼쓴 것이다.
그랬는데 승상은 나를 슬며시 따서 귀양 보내고, 내 처 빼앗아서 제이부인이란 그게 웬말이냐?
기회 보아 석다 석굴을 탈출하여 승상께 달려가서 따져 보고자 결심하였다. 멀리 동이의 나라까지 달려온 것은 석다산 석굴 속에서 더러운 늙은이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자의 나라 진궁에서도 첫손가락 꼽는 아리따운 색시를 뒤따라 ―온 것이다. 그랬는데 을지라는 늙은이는 제가 그 소녀에게 마음 두고 나를 이 더러운 석굴로 정배를 보냈구나!
이번 다시 을지에게 가면 기묘하게 국향 공주에게 숨어 들어가서, 공주께 이 내 구슬픈 사정을 직소하여 공주의 처분을 기다리리라. 사고무친한 만리 타향에 와 있는 공주는, 이 내 사정 하소연하면, 여자의 나약한 마음으로 그래도 무슨 응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서 장량이는 이 석다굴을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벼르는 동안에 한 기회가 이르렀다.
석굴에서 성 안으로 무슨 심부름을 갈 일이 생겼다. 장량이는 이 심부름을 자진하여 맡았다.
이번 가면 꼭 공주를 만나 보리라는 비장한 결의로, 장량이는 조반을 일찍기 먹고 성 안으로 길을 떠났다.
이튿날 조반상을 방금 물릴 때쯤 장량은 승상 앞에 나갔다.
“너는 석다 도장에서 수양하고 있을 사람이 어떻게 여기 왔느냐?”
승상은 장량을 보고 의외의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네, 사처증이 지극하와 잠깐 아내를 보고자 왔읍니다.”
“너 도망해 왔구나?”
“아니옵니다. 이 고구려 천하에서 도망하면 어디를 갑니까? 승상께서도 그때 약속하신 바, 제 아내를 자깐 만나게 해줍시사.”
“네 이름이 장량이가 아니고 소진이랬으면 좋겠다. 그래 꼭 진 공주를 만나 보고야 말 심산이냐?”
“네이!”
“그래도 공주의 말은 장량이란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데?”
“……네, 아마 그럴 겝니다. 그래도 소인은 만나 보겠읍니다. 소인의 아내올시다.”
“아내가 남편을 듣도 보도 못했단 웬일일까?”
“…….”
“게다가 장량아! 똑똑히 듣거라. 네가 네 아내라고 연해 말하는 진의 국향 공주는, 자기 아버니의 승낙으로 나 을지와 혼약을 한 사이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만날 사람은 네 아내가 아니요, 승상 부인이란 말이다. 승상 부인이니만치 소홀함이 있었다가는 고구려 만성이 용서치 않는다.“
승상은 하인을 시켜 공주를 잠깐 나오라 하였다. 그리고 승상이 마주나가서 공주에게,
“공주의 남편이로라는 장량이가 좀 뵙겠답니다.”
고 알렸다.
공주가 방에 들어서자 장량은 한순간 힐끗 공주를 우러러보고는 황홀한 듯 그 자리에 넓적 엎드렸다.
“네가 장량이라는 진아(陣兒)냐?”
공주가 장량이에게 대한 태도는 그야말로 진 천자의 황녀가 한 개 서민에게 대하는 태도였다.
“네이…….”
“네가 내 남편이로라고?”
“황공무지하옵니다.”
장량은 몸둘 곳을 모르는 모양으로 그저 머리만 조아렸다.
“나를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천자와 고구려 나랏님께 칙허를 받은 을지 승상 밖에는 세상에 없을 게다. 네가 어쩌면 감히 내 남편이로라고 공언을 하느냐?”
“공주님, 죽여 주십쇼, 마는 공주님 뒤를 사모하와 만리길을 뒤쫓아온 사람입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무엄한 소리는 말렸다!”
이 호령에 장량이는 기가 질린 듯 잠담하여 버렸다. 국향이의 앞에 꿇어앉은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만 비오듯 하였다.
저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승상은, 이 자리에서 몸을 피해 주는 뜻으로 살며시 뜰로 내려섰다.
잠깐 잠잠하였던 장량이는 다시 국향이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면 진나라 오 세의 사직은 공주의 대에서 끊어지고 맙니다. 진나라 몇 천만 적자는 어버이 찾을 길이 없으오리까? 진실의 혈통은 아주 없어지고 맙니까? 이것이 하늘의 섭리오니까?”
“내게는 한 형이 있었는데…… 사내동생들은 다 참화를 보았겠지만, 내형은 무사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선화(宣華)공주 말씀이오니까?”
“그래!”
“말씀 마십쇼. 그 분은 수궁(隋宮)에 영입해 수제(隨帝) 견(蜸)이의 총애를 받고 있답니다. 장차 수제의 아니나 더럭더럭 낳겠지요.”
정량이는 사뭇 더럽다는 듯이 외면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형 선화는 수제의 아이를― 그러면 나는 고구려의 자식을― 이리하여 진실은 아주 끊기는건가?
국향이는 창연한 얼굴빛으로 장량을 굽어보았다.
“장량이라고! 망국의 유민은 아예 될 게 아니다. 그저 다 망국민 된 탓이니 하늘이나 원망할 밖에…….”
“그러기에 민은 공주를 대하옵고 망한 나라 진을 회복할 꿈을 꾸는 바로소이다.”
“네가 나를 아내로 삼고 진제가 되어 보고 싶단 말이냐?”
“공주를 동이 을지에게 주기는 과연 아깝습니다.”
“그렇지만 야, 을지라는 이는 인걸이니라, 여자로 태어나서 인걸을 남편으로 맞아서 그 자손을 몸으로 받아 본다는 건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니라.”
“진나라 몇 천만 유민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고 살리까?”
“새 임금 수제, 견이를 믿으면 그만이 아니냐?”
“수제를…….”
“내 형이 수제에게 시집을 갔으랴? 내가 동이에게 시집을 왔으랴?
하여간 장량이 그대는 이목도 번거롭고 하니, 내 언제 조용한 기회에 그대를 조용히 찾을 테니 오늘은 물러가라, 석다선인께 가 있으면 수양도 되고 할 테니, 선인께 가서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있으라. 내 잊지 않을 테
니…….”
저편으로 돌아갔던 승상이 차차 이편으로 도로 왔다.
“공주, 이야기는 대강 끝났소?”
장량이가 맞받아 대답하였다.
“승상님! 잠깐만 더…….”
“더 피해 달라고? 그래…….”
승상은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장량은 꿇어앉은 채 약간 국향이에게 가까이 오며 말하였다.
“공주민, 진실의 혈통을 잊지 말아 주십쇼.”
국향이는 팔을 늘여 나앉은 장량이에게 손잡힐이만큼 가까이 내밀며,
“장 서방! 진국향이는 이미 죽었소이다. 지금 진국향이 대신 을지 부인이 있을 뿐이외다.”
그리고 슬며시 손을 펴서 장량이의 손을 잡았다.
엄엄하여 감히 잡을 생각도 못하던 공주가 자진하여 장량이의 손을 잡아주니 장량이는 그 손을 잡아 제 얼굴에 문지르며,
“공주님! 진의 혈통을 잊지 마시옵소서! 길지 못한 진의 사직은 오직 공주님께 달려 있읍니다.”
한다.
국향이는 소리를 좀 높여,
“승상님, 이리 와 주세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다 끝났읍니다.”
하였다.
승상은 다시 천천히 앞으로 돌아왔다.
국향이는 을지 승상께 보이지 않게 장량이의 손을 꼭 쥐며,
“장 서방이라고? 국향이는 부왕의 처분으로 을지 부인이 되었으니 국향이의 남편은 오직 을지 승상뿐이오.”
하면서 장량이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국향 공주, 부왕의 일년상이나 지낸 뒤에야 시집가고 오고 할 게니까, 아직 몇 달 더 있어야 을지 부인이 될 게요.”
국향이는 장량이의 손을 얼른 놓고 승상 쪽으로 나아갔다.
“아직 몇 달― 지루도 해라!”
그리고는 진나라 말로 장량이에게 말하였다.
“옛말에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했소. 장 서방도 좋은 세월을 좀 기다리오,”
무슨 의미가 있는 듯한 이 말을 들은 장량이는, 국향이의 말을 좇아서 좋은 세월 기다리기로 내심 작정한 모양이었다.
“승상님, 공주를 만나 뵙게 해주셔서 감사 만만하옵니다. 소인은 성안에서 볼일 좀더 보고 석다선인께로 가겠읍니다.”
“응, 가려느냐? 공주는 내 아내니까 네 처란 생각은 아주 버려라. 그리고 선인께 가거든 내가 문안드리더라고 여쭈어 다고.”
“네, 소인은 물러가겠읍니다.”
“오오!”
이리하여 장량이는 석다산서 성 안에 달려와서 그의 목적인 공주와의 회견을 달성하고 다시 석다산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