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땅은 짙은 녹색의 들풀로 가득했다. 하늘은 선명한 하늘색 그대로였다. 더할 나위 없는 여름의 대초원. 그 지평선 가운데, 백색의 성벽이 두드러졌다.
왕국의 수도 백관(白冠).
그 이름은 도시를 둘러싼 백색 성벽에서 따온 것이었다. 요철 모양의 성가퀴가 왕관을 닮아있었는데, 어찌보면 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용의 모습은 누가보더라도 위협적이었다. 용은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용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치켜들어야했다. 뼈처럼 새하얀 용의 몸뚱이는 무기적(無機的)이라 흰 돌을 깎아 만든 동상처럼 보였다.
마법사는 왕자에게 대열을 정비시키라 지시하곤, 용에게 외쳤다.
"라 페카코프! 무슨 이유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법사는 조마조마 했다.
백룡, 라 페카코프는 왕국의 수호룡이었고, 왕자의 군대는 왕을 퇴위시키기 위한 반란군이었기 때문이다. 수호룡은 왕국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의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용이 불을 뿜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법사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왕자 또한 왕가의 피를 이어 받은 정당한 왕위계승자 였고, 왕은 마법(魔法)에 빠져 국정을 살피지 않아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수호룡이 진정 왕국을 생각한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는 안심할 수 없었다. 용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 대개 인간이 예측 불가능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용을 잡는다는 남부의 사냥꾼들까지 불러들였다.
용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는 순간 불길이 터져나올까, 움찔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여(余)는 왕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왔다."
요란하던 군대가 조용해졌다. 마법사는 왕자를 돌아봤고, 왕자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사실 마법사는 방금 용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왕자가 뭔가 알고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왕자는 알려진 신념과 기지와는 달리 그냥 멍청한 기회주의자였다.
마법사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용이 말했다.
"여는 왕국의 수호룡이다. 왕이 미치기 시작할 때 부터 여는 왕국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다만 직접적인 관여는 할 수 없으므로, 계속해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희의 군대가 결집되고, 왕이 백관의 백성들을 학살하기 시작할 때 쯤엔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마법사는 말을 끊었다.
"잠깐."
마법사는 뒤를 돌아보곤 왕자와 군사들의 창백한 표정을 확인했다.
마법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왕이 뭘 어쨌다고……?"
용은 자신의 말이 끊어진 것에 괘념치 않고 답했다.
"백관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였다. 왕국 내에서 성급한 쿠데타가 일어난 게 화근이었다. 너희들의 왕이 자신의 백성을 죽였다. 지금 백관 안에 살아있는 인간은 왕 그 자신 밖에 없다."
"그 외엔 아무도?"
"그 외엔 아무도. 왕족이건, 귀족이건, 시민이건, 노예건 누구라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용의 목소리는 반란군 모두가 들을 수 있을만큼 컸고, 백관 안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왕자는 실성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법사가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막지 않았습니까?"
"왕국의 존속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여는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관의 백성은 수 천 명이나 되는데도?"
"여의 계산이 맞다면 그대의 왕국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도 존속될 수 있다."
마법사는 용을 노려봤지만 보이는 것은 용의 커다란 턱 뿐이었다.
마법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라면, 이 군대가 백관으로 들어서는 것 또한 관여하지 않겠군요."
용은 인간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종류의 제스쳐는 크고 거대한 생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가 왔다. 왕은 인간을 넘어 선 힘을 가지고 있고, 그대들은 많은 병졸을 데리고 있지. 게다가 두 인간 중 하나는 왕위를 이을 마지막 인간이다. 이 싸움은 누가 이기던 왕국의 큰 해가 되겠지."
용은 고개를 좀더 숙였다. 마법사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하지만 두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는 건 쉽지않기 때문에, 용은 얼굴을 한 쪽으로 기울이곤 커다란 하나의 눈동자로 마법사를 바라봤다. 유리구슬 만큼이나 투명한 눈동자는 마법사의 머리 보다 컸다.
마법사가 엉겁결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을 때, 용이 말했다.
"여는 고민했다. 왕을 도울 것인가? 그렇지만 미치광이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는 일이지. 왕자를 도울 것인가? 하지만 왕를 죽여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전통적이지 않으면서도, 부당하지. 결국 여는, 각자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서로의 선택에 서로가 책임지는 것이다. 여가 알고 있는 많은 다른 용들도 이런 식으로 분쟁을 해결해왔음을 여는 알고 있다. 여는 방금 왕의 소원을 듣고 왔다. 이제 왕자의 소원을 듣고 싶다."
마법사는 용의 귀에 대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했다.
마법사가 생각하기에, 왕은 미쳤고, 왕자는 바보였다. 두 사람다 탐욕적이기 그지 없었으니 왕국에 도움이 되는 소원을 빌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소원이 설사 왕국을 파멸로 이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화를 낼지언정 납득은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막 기운을 차린 왕자가 입을 뻐끔거리며 소원을 말하겠다는 걸 좌우에 있던 대신이 입을 틀어막으며 말렸다.
마법사가 휘청거리며 외쳤다.
"라 페카코프! 두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정말 왕국의 안위를 지키는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용은 조금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여는 이쯤에서 솔직하게 시인할 수 밖에 없군. 여는 인간이 지겹다. 지긋지긋하다. 한 즈믄은 용에게도 짧지않은 시간이지. 여는 많은 인간을 보아왔고,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인간들에게 여는 더이상 무엇을 기대해야하는가? 없다.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해서 여가 부여받은 책임을 방기하겠다는 이야긴 아니다. 들어라, 여의 말을." 용은 몸을 약간 비틀었다. "여가 준 것은 선택이다. 여의 일방적인 힘의 행세가 아니다. 여는 인간들에게 실망했지만, 인간처럼 독선적으로 행동하진 않는다. 생각해보라. 왕과 왕자가 정말 왕국을 위한다면 그들의 소원은 그들 뿐만 아니라 왕국의 백성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다. 왕국에 더 없는 번영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반대라면 그대가 우려하는 결과가 나타나겠지만."
마법사는 침을 삼켰다.
"왕은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그것은 말해주지 않겠다. 말하게 된다면 공평하지 않지."
"그렇다면, 왕자가 불가능한 소원을 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에게 불가능한 것은 많지 않지만, 만약 그 일이 어려울거라 판단되면 그것을 일러주고 다른 소원을 빌라고 말하겠다."
마법사는 용을 지긋이 올려보다가 말했다.
"왕자와 이야기를 나눠봐도 되겠습니까?"
"좋다. 하지만 명심하라, 마법사. 여는 용이다. 거짓말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여가 왕자에게 바라는 것은 소원이다. 소원이란 것은 거짓 없는 순수한 바람이다. 강요된 바람은 소원이라 할 수 없다."
즉, 강요시킬 수는 없지만 설득시킬 수는 있다는 말이군. 마법사는 주억였다. 용은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몸을 세우곤 해가 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 마법사와 대신과 왕자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리한 이야기가 나누어졌다.
한 대신이 말했다.
"그냥 왕을 죽여달라 소원하면 되는 것이 아니오?"
마법사가 말했다.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왕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죠."
"왕은 용에게 우리를 죽여달라고 빌었을게 틀림없소. 그가 그것 말고 달리 무슨 소원을 빌 수 있단 말이오?"
"생각해보시길. 우리가 가진 군사는 많습니다. 게다가 남쪽의 용 사냥꾼들도 함께 있습니다. 용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싸워 이기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게 용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않소?"
"부탁이나 원조가 아니라, 소원입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을 소원이라 받아줄 수 없죠. 왕이 만약 그런 종류의 소원을 빌었다면, 용은 최소한은, 그 일이 어렵다고 말하고 다른 소원을 빌라고 말했을 겁니다. 게다가, 왕에겐 더 유리한 소원이 있으니까요."
"그게 뭐요?"
마법사는 주저하다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왕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왕자님을 죽여달라는 겁니다."
왕자의 낯빛이 나빠졌다.
왕자가 말했다.
"아바마마가 날 죽인다고? 왜? 어째서?"
"간단한 이유 입니다. 용이 지금 저 짓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왕가의 피를 이은 두 사람이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 시점에서 한 사람이 죽는다면, 용은 다시 자신의 자리인 수호룡의 위치로 돌아오겠죠. 아니,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라 페카코프가 그런 꾀를 부린건 수호룡이라는 책무를 자의로 관둘 수 없다는 말이니까요.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된다면, 왕과 용은 힘을 합칠 수 있고 이 군세로도 역부족일 겁니다."
이번에는 모두의 낯빛이 나빠졌다.
한 대신이 말했다.
"왕자를 최대한 지킬 수는 없겠소?"
"용은 바로 코 앞에 있습니다. 용에게서 뭔가를 지키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죠. 그냥 싸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왕을 죽여달라 소원해야 하는 것 아니오? 왕이 죽는다면 용 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는 용 사냥꾼들과 함께 있지 않소?"
"안됩니다. 만약 왕자도 죽고 왕도 죽는다면 용은 수호룡의 위치를 버리고 사라질겁니다. 그리고 왕국의 역사와 위치를 볼 때, 수호룡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타국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만은 않겠죠."
또 다른 대신이 말했다.
"그럼 왕을 살려둔다고 해서 나은 점은 뭡니까? 미친 왕의 폭정이 다른 나라의 침략보다는 낫다는겁니까?"
"왕을 죽여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용에게 다른 소원을 빌 수 있어요. 왕을 제압해달라, 왕을 가두어달라, 왕가의 피를 다른 이로 하여금 잇게 해달라…… 비슷한 종류의 소원은 많고, 그 중 하나라도 용이 가능하다 말하면 성공입니다."
그러자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는데, 왕자였다.
왕자는 탁상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일어났다.
"잠깐! 너희들 내 이야긴 쏙 빼놓고 있잖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며?"
"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왕이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내가 죽을 확률이 높은 건 맞잖아? 그럼 아바마마의 소원을 취소시켜 달라는 소원을 빌어야하는 거 아냐?"
"불가능할 겁니다."
"어째서?"
"할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어요. 그렇지만 용이 그 소원을 받아들인다면, 용은 다시 왕에게 다른 소원을 들으러 갈겁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겠죠. 하지만 용은 바보가 아니니까, 상대의 소원을 취소시키겠다는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테죠. 그런 의미에서 상쇄되거나 모순되는 소원도 불가능하다고 말할겁니다."
왕자는 힘이 빠진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러자 여러 대신들이 아무래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거라며 이야기를 이리저리 둘러대기 시작했다. 불현듯 마법사는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마법사는 평소 왕자에겐 어느 정도의 애국심, 양심, 윤리, 혹은 그 비슷한 것들을 가지고 있고, 왕자가 안하무인에 덜떨어진데다 욕심이 많긴해도 그러한 생각들을 얇게나마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이 반란군을 이끌겠다고 말한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자의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왕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
그러나 마법사의 생각이 끝마치기 전에 곧 왕자는 뭔가 결심한 듯 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 좋아. 그렇게 할게. 아닐 수도 있는거잖아? 그치?"
"그렇사옵니다."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마법사는 이상하게 등덜미가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왕자는 여러 대신들을 물리고 용에게 다가갔다.
용이 왕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결정을 내렸나?"
왕자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혹시, 아바마마의 소원을 취소시킬 수 있나?"
대신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마법사는 잠자코 있었다.
용이 말했다.
"불가하다."
"좋아, 그럼."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를 죽여줘. 왕을 죽여."
앗, 하고 말릴 틈도 없었다. 왕자가 날개를 퍼덕이듯 말을 쏟아냈다.
"내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다는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늬들은 내가 겁을 먹고 멋대로 소원을 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냐. 잘 생각해보라고. 소원은 비는 건 너희들이 아니라, 나란 말이야. 내가 죽고나면 왕국이고 뭐고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게다가 만약에 아바마마가 날 죽이기로 했다면, 그렇다면 내가 아바마마를 죽여달라고 소원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누가 내 복수를 갚아줄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소원은 정당하단 말이야. 너희들은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왕자의 입을 틀어막으려 달려들던 좌중이 침묵에 빠졌다.
홀로 용만이, 용이 "좋다. 소원을 받아들이지."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마법사는 용과 눈을 마주쳤다. 마법사는 용의 말을 떠올렸다. '여가 왕자에게 바라는 것은 소원이다. 소원이란 것은 거짓 없는 순수한 바람이다. 강요된 바람은 소원이라 할 수 없다.' 그 말은 왕자를 설득시키라는 힌트가 아니었나? 왕자를 속여야했었나?
인간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이던 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거대함이 더해졌다.
왕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법사는 물러섰다.
그러나 용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몸을 돌려 백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왕은 다른 소원을 빌었나보오." 왕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마법사만이 용을 뒤쫒았다.
인간이 용의 큼직한 걸음걸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가 반란군과 백관 사이를 반쯤 뛰어갔을 땐 이미 용은 백관의 높은 성벽을 뛰어넘어 사라지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부탁이나 원조가 아니라, 소원이다. 무엇이든 빌 수 있는 것인데, 왕이 무엇을 빌지 짐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법사의 머릿속으로 갖은 생각들이 스쳤다. 마법사는 무형의 힘으로 외곽문을 열어 젖히고 백관으로 들어섰다.
피와 시체가 가득했다. 썩는 냄새에 마법사는 코를 틀어막았고, 피가 섞힌 진흙을 신발에 묻히며 나아갔다. 용이 말한 그대로였다. 파리들이 앵앵거리고 구더기들이 찔꺽였다. 그 외에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그제서야 왕이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짐작이되었다.
반란군에 의해 위기에 처한 왕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 질문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천 년 간 인간을 지켜본 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걸까? 이 모든 일은 용의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마법사는 대로를 가로질러 내성에 들어섰다. 복도로 퍼진 피가 붉어 거대한 생물의 내장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마법사는 이를 악물며, 왕의 홀로 뛰어갔다.
왕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새빨간 왕관을 쓰고 웃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알고 있는 왕이 아니었다. 백관에는 이제 살아있는 인간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마법사가 외쳤다.
"당신이 왜 거기에 있습니까!"
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은 여에게, 자신이 죽으면 왕의 자리를 대신해달라고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