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때는 단군 기원 4240(서기 1907년) 몇 해 어느 달, 어느 날이던가 땅은 서울이던가, 시골이던가 해외 어디던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데 이 몸은 어디로 해서 왔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무궁화 몇 만 길 되는 가지 위 넓기가 큰 방만한 꽃송이에 앉았더라.
별안간 하늘 한복판이 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그레한 광선이 뻗쳐 나오더니 반공에 테를 지어 두르고 그 위에 뭉울뭉울한 고운 구름으로 갓 쓰고 그 광선보다 더 붉은 빛으로 두루마기 입은 한 천관이 앉아 오른손으로 번개칼을 두르며 우레 같은 소리로 말하여 가로되
“인간에는 싸움뿐이니라,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나니 님(神)의 명령이 이러하다.”
그 소리가 딱 그치며 광선도 천관도 다 간 곳 없고 햇살이 탁 퍼지며 온 바닥이 반듯하더니 이제는 사람 소리가 시작된다.
동편으로 닷동아리 갖춘 빛에 둥근 테를 두른 오원기(五員旗)가 뜨며 그 기 밑에 사람이 덮여 오는데 머리에 쓴 것과 몸에 장속(裝束)한 것이 모두 이상하나 말소리를 들으니 분명한 우리나라 사람이요, 다만 신체의 장건(壯健)과 위품의 늠름함이 전에 보지 못한 이들이어라.
또 서편으로 좌룡우봉(左龍右鳳) 그린 그 밑에 수백 만 군사가 몰려오는데 뿔 돋친 놈, 꼬리 돋친 놈, 목 없는 놈, 팔 없는 놈, 처음 보는 괴상한 물건들이 달려들고 그 뒤에는 찬바람이 탁탁 치더라.
이때에 한놈이 송구한 마음이 없지 않으나 뜨는 호기심이 버럭 나 이 몸이 곧 무궁화 가지 아래로 내려가 구경코자 했더니 꽃송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너는 여기 앉았거라. 이곳을 떠나면 천지가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보이리라.” 하거늘 들던 궁둥이를 다시 붙이고 앉으니 난데없는 구름장이 어디서 떠들어 와 햇빛을 가리우며, 소낙비가 놀란 듯 퍼부어 평지가 바다 되었는데 한편으로 우르릉 꽝꽝 소리가 나며 거의 “모질”다는 두 자료만 형용하기 어려운 큰 바람이 일어 나무를 치면 나무가 꺾어지고 돌을 치면 돌이 날고 집이나 산이나 닥치는 대로 부시는 그 기세로 바다를 건드리니 바람도 크지만 바다도 큰물이라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바람이 물을 치면 물도 바람을 쳐 바람과 물이 반공중에서 접전할새 미리(龍)가 우는 듯 고래가 뛰는 듯 천병만마가 달리는 듯 바람이 클수록 물결이 높아 온 지구가 들먹들먹하더라.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싸워보자!”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보던 동편의 오원기와 서편의 용봉기 밑에 모여 있는 장졸들이 눈들을 부릅뜨고 서로 죽이려 달려드니 바다에는 바람과 물의 싸움이요 물 위에는 두 편 장졸의 싸움이더라.
그러나 이 싸움은 동양 역사나 서양 역사에서 보던 싸움은 아니러라. 싸우는 사람들이 손에는 아무 연장도 가지지 않고 오직 입을 딱딱 벌리면 목구멍에서 불도 나오며, 물도 나오며, 칼도 나오며, 화살도 나와 칼이 칼과 싸우며 활이 활과 싸우며, 불과 불이 서로 치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맞히니 그 맞은 사람은 목이 떨어지면 팔로 싸우며 팔이 떨어지면 또 다리로 싸우다가 끝끝내 살이 다 떨어지고 뼈가 하나도 없이 부서져야 그만 두는 싸움이라 몇 시 몇 분이 못되어 주검이 천리나 덮이고 비린내 땅에 코를 돌릴 수 없으며 피를 하도 뿌려 하늘까지 빨갛게 물들었도다.
한놈이 이를 보고 우주가 이 같이 참악한 마당인가 하여 차마 못해 눈을 감으니 꽃송이가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한놈아, 눈을 떠라! 네 이다지 약하냐? 이것이 우주의 본면목이니라.
네가 안 왔으면 할 일 없지만 이미 온 바에는 싸움에 참가하여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너의 책임만 방기(放棄)함이니라. 한놈아 눈을 빨리 떠라.”
하거늘 한놈이 하릴없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눈을 들어 살피니 그 사이에 벌써 싸움이 끝났는지 천지가 괴괴하며 풍우도 또한 멀리 간지라. 해는 발끈 들어 온 바닥이 따뜻한데 깊은 구름을 헤치고 신선의 풍류 소리가 내려오니 이제부터 참악한 소리는 물러가고 경화한 소리가 대신함인가 보더라.
이 소리 밑에 나오는 사람들은 곧 별 사람들이 아니라 아까 오원기를 받들고 동편 진에 섰던 장졸들이니 대개 서편 진을 깨쳐 수백 만 적병을 씨 없이 죽이고 전승고를 울리며 돌아옴이라.
일원대장(一員大將)이 앞머리에서 인도하는데 금화절풍건(金花折風巾)을 쓰고 어깨엔 어린장(魚鱗章)이며 몸엔 조의(皂衣)를 입었더라. 그 얼굴이 맑은 듯 위엄 있고 매운 듯 인자하여 얼른 보면 부처 같고 일변으로는 범 같아 보기에 사랑도 스럽고 무섭기도 하더라. 그가 한놈이 앉은 무궁화나무로 향하여 오더니 문득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허허 무궁화가 피었구나.” 하더니 장렬한 음조로 노래를 한 장(章) 한다.
이 꽃이 무슨 꽃이냐
희여스름한 머리(白頭山)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아침(朝鮮)의 빛이로다.
이 꽃을 북돋우려면
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핏물만 뿌려 주면
그 꽃이 잘 자라리
옛날 우리 전성할 때에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쓸리에 늘어졌더니
어이해 오늘날은
이 꽃이 이다지 여위었느냐
이 몸도 일찍 당시의 살수 평양 모든 싸움에
팔뚝으로 빗장 삼고 가슴이 방패되어
꽃밭에 울타리 노릇해
서방의 더러운 물이
조선의 봄빛에 물들지 못하도록
젖 먹은 힘까지 들였도다.
이 꽃이 어이해
오늘은 이 꼴이 되었느냐
한 장 노래를 다 맞추지 못한 모양이나 목이 메어 더 하지 못하고 눈물을 씻으니 무궁화 송이도 그 노래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같이 눈물을 흘리며 맑은 노래로 화답하는데
봄비슴의 고운 치마님이 나를 주시도다.
님의 은덕 갚으려 하여
내 얼굴을 쓰다듬고 비바람과 싸우면서
조선의 아름다움 쉼 없이 자랑하려고
나도 이리 파리하다.
영웅의 시원한 눈물
열사의 매운 핏물
사발로 바가지로 동이로 가져오너라.
내 너무 목마르다.
그 소리 더욱 아프고 저리어 완악한 돌이나 나무들도 모두 일어나 슬픔으로 서로 화답하는 듯하더라.
꽃송이 위에 앉았던 한놈은 두 노래 끝에 크게 느끼어 땅에 엎드려져 울며 일어나지 못하니 꽃송이가 또 가만히
“한 놈아.” 부르며 꾸짖되
“울음을 썩 그쳐라. 세상일은 슬퍼한다고 잊는 것이 아니니라.”
하거늘 한놈이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니 아까 노래하던 대장이 곧 앞에 섰더라. 그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마치 언제 뵌 어른 같다. 한참 서슴다가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눈매듭과 이맛살과 채수염이며 또 장속한 것을 두루 본즉 일찍 평안도 안주 남문 밖 비석에 새겨 있는 조각상과 같으니 내가 꿈에라도 한 번 보면 하던 을지문덕이신저.’ 하고 곧 일어나 절하며 무슨 말을 물으려 하나 무엇이라고 칭호 할는지 몰라 다시 서슴으니 이상타, 을지문덕 그이는 단군 2천년(서기 전 333년)경의 어른이요, 한놈은 단군 4241년(서기 1908년)에 난 아기라 그 어간이 2천 년이나 되는데 2천 년 전의 어른으로 2천 년 뒤의 아기를 만나 자애스런 품이 마치 친구나 집안 같다. 그이가 곧 한놈을 향하여 웃으시며
“그대가 나의 칭호에 서슴느냐? 곧 선배라 부름이 가하니라. 대개 단군이 태백산에 내리어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위하여 삼경오부(三京五部)를 베풀고 이를 만세자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려 하실 새 삼부오계(三部五戒)로 윤리를 세우시며 삼랑오가(三郞五加)로 교육을 맡게 하시니 이것이 우리나라 종교적 무사혼(武士魂)이 발생한 처음이니라.
이 혼이 3국 시대에 와서는 드디어 꽃피듯 불붙는 듯하여 사람마다 무사를 높이어 절하고 서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자랑할새 신라는 소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도령이라 이름하니 『삼국사기』에 적힌 ‘선랑’(仙郞)이 그 뜻 번역이요, 백제는 장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수두라 이름하니 『삼국사기』에 적힌바 ‘소도’(蘇塗)가 그 음 번역이요, 고구려는 군자스러운 무사를 사랑하여 선배라 이름하니 『삼국사기』에 적힌바 ‘선인’(先人)이 그 음과 뜻을 아울러한 번역이라 이제 나는 고구려의 사람이니 그대가 나를 선배라 부르면 가하니라.”
한놈이 이에 다시 고구려의 절로 한 무릎은 세우고 한 무릎은 꿇어 공손히 절한 뒤에
“선배님이시여, 아까 동편 서편에 갈라서서 싸우던 두 진이 다 어느 나라의 진입니까?”
묻는대 선배님이 대답하되
“동편은 우리 고구려의 진이요, 서편은 수나라의 진이니라.”
한놈이 놀라며 의심 빛으로 앞에 나아가 가로되
“한놈은 듣자오니 사람이 죽으면 착한 이의 넋은 천당으로 가며 모진 이의 넋은 지옥으로 간다더니 이제 그 말이 다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영계(靈界)도 육계(肉界)와 같아 항상 칼로 찌르며 총으로 쏘아 서로 죽이는 참상이 있습니까?”
선배님이 허허 탄식하며 하시는 말이
“그러하니라. 영계는 육계의 사영(射影)이니 육계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날에는 영계의 싸움도 그치지 않느니라. 대저 종교가의 시조된 석가나 예수가 천당이니 지옥이니 한 말은 별로 우의(寓義)한 곳이 있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말을 집어먹고 소화가 못되어 망국멸족 모든 병을 앓는도다. 그대는 부디 내 말을 새겨들을지어다. 소가 개를 낳지 못하고 복숭아나무에 오얏 열매가 맺지 못하나니 육계의 싸움이 어찌 영계의 평화를 낳으리요? 그러므로 육계의 아이는 영계에 가서도 아이요, 육계의 어른은 영계에 가서도 어른이요, 육계의 상전은 영계에 가서도 상전이요, 육계의 종은 영계에 가서도 종이니 영계에서 높다, 낮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도깨비들이 모두 육계에서 받던 꼴과 한가지라 나로 말하더라도 일찍 살물(薩水) 싸움(살수대첩, 612)에 승리자 되므로 오늘 영계에서도 항상 승리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저 수주양광(隨主楊廣)은 그때에 전패자로 되므로 오늘도 이같이 패하여 군사를 2백만이나 죽이고 슬피 돌아감이어늘 이제 망한 나라의 종자로써 혹 부처에게 빌며 상제께 기도하여 죽은 뒤에 천당을 구하려 하니 어찌 눈을 감고 해를 보려 함과 다르리오.”
을지(을지문덕) 선배의 이 말이 그치자마자 하늘에 붉은 구름이 일어나 스스로 글씨가 되어 쓰였으되
“옳다, 옳다, 을지문덕의 말이 참 옳다. 육계나 영계나 모두 승리자의 판이니 천당이란 것은 오직 주먹 큰 자가 차지하는 집이요, 주먹이 약하면 지옥으로 쫓기어 가느니라.”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