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그 몸으로 죄를 갚으세요.
붉은색과 어둠색 전이마법진에서 나타난 건, 남은 두 머티리얼――슈테른과 디아키였다.
곤란해. 얼간이 레비 하나라면 나노하가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둘까지 나왔다간 어쩔 도리가 없다.
나노하도 아까까지와 돌변해, 심각한 표정으로 둘의 출현을 바라보고 있다.
“임금님―, 슈테룽―! 봐봐 봐봐―. 얘들 제대로 찾았어―! 칭찬해줘 칭찬해줘!”
어쩌지.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지. 싸워도 승산은 없다.
생각해라. 어떤 방법이라도 좋다. 다른 애들을 빼낼 방법을. 아니, 그리 쉽게 떠오르면 고생 할 일 있겠냐!
초조해하며 머리를 굴리는 중에, 슈테른과 디아키는 우리와 레비를 흘겨본다.
레비, 나노하, 스즈카, 알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눈길을 보낸 슈테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그 몸으로 죄를 갚으세요.」
슈테른이 디바이스를 높게 들어, 나직히 읊는다.
“큭?!”
“안돼?!”
이 위치선 나노하도 어쩔 수단이 없다.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하려 날개를 펼쳐, 다른 애들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뛰어오른다.
그리고 내쏘인 붉은 빛의 격류.
“어째서―――?!”
“에.”
슈테른이 내쏜 포격. 그건 빗나감 없이 레비를 두드려, 쳐날렸다.
나도 나노하도. 눈 앞에서 뭐가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해, 무방비한 상태로 멍하니 바라봤다.
“이 멍청이가! 이 자식은 머리가 비었냐?! 뭘 위해서 우리가 이런 곳까지 왔는지 잊었어?!”
디아키가 쳐날아간 레비를 잡곤, 목 언저리를 잡곤 부들부들 몸을 떤다.
“에? 에에…………아, 아차! 녀석의 얼빠진 얼굴을 봤다가 열받아서 까먹었다?!”
“………….”
조용히 레비의 머리를 때리는 디아키. 뭐야, 이 콩트. 것보다 얼빠진 얼굴이라는 건 내 이야기냐, 어이.
“레비가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 아니, 으음…….”
천천히 눈앞에 착지해, 치마를 살포시 잡곤 고개를 숙이는 슈테른. 눈 앞에서 일어난 사태에 머리가 좀 따라가질 못한다.
아, 그래도 이 포즈를 한 슈테른은 좀 귀엽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늦게 나노하도 천천히 착지해, 당황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어본다. 그러니까 내가 알겠냐.
“저희에게 싸울 의사는 없어요. 조금 길어질 수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어요?”
“………….”
나랑 나노하는 서로를 당황스런 표정으로 마주봤다.
거기서 울려퍼지는, 꼬르륵하는 소리.
“………….”
말없이 소리가 난 곳에 눈을 향한다.
“으으~. 임금님―, 슈테룽―, 배고파―.”
배우는 소리를 최대 음량으로 틀며, 풀썩 주저앉는 레비의 모습이 보였다.
또냐. 또 이 패턴이냐. 그건가, 페이트의 유전자는 내 앞에서 꼬르륵하는 인자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어이.
“……일단 크로노 군에게 연락 할까.”
“……그렇네.”
나노하의 말에 대답한다.
이녀석들이 우리를 죽일 생각이라면, 바로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대화하자고 하는 거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싸우면 진다.
지금 모습을 보면 바로 어떻게 당할 위험은 없어 보인다.
뭐가 목적인진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아스라쪽이나 볼켄리터를 부르는 게 먼저겠지.
아차, 그 전에.
“스즈카랑 알리사는 안 다쳤――”
“다친 건 너잖아! 남 걱정을 하기 전에 자기를 걱정 하라고!”
“맞아! 빨리 병원 가야돼! 피가 잔뜩 나오잖아!”
아아, 듣고 보니까 머리에서 절찬 출현중이얐지.
긴장을 놓고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빈혈이네, 이거.
일단 둘은 코트같은 게 좀 더럽혀진 정도고 다친데는 없는 것 같다.
“뭐야, 이 쯤은 문제 없어. 냅두면 나아.”
머리라는 건 피가 잔뜩 나온다고 들은 기분이 든다. 겉보기만큼 큰 부상은 아니겠지. 아마.
이 이상 걱정을 끼칠 수도 없으니, 적당히 큰소리친다.
“뭣하면 빨래?”
“……아, 안빨아! 그보다 빨리 병원!”
지금 머뭇거린건 뭐였나요, 스즈카 양. 어라, 밤의 일족은 피를 빠는 거였었나? 뭐, 그건 제쳐 두고.
“병원은 조금…….”
눈길을 슬쩍 머티리얼들에게 향한다. 역시나 이 녀석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는 건 주저되고, 그렇다고 해서 나노하에게 맡기는 것도 마음이 걸린다.
아니, 내가 있어도 도움이 안 될 건 알고 있지만.
“그럼, 우리집에 와. 수혈용 혈액도 있고, 노엘이라면 제대로 응급처치도 할 수 있으니까.”
이쪽의 사정을 감안해준 모양인지 스즈카가 그렇게 제안하곤, 벌써 휴대폰을 꺼내 전화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길을 머티리얼들에게 향한다.
“걱정마세요. 그쪽에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요. 왕이나 이 애도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할겁니다.”
라는 말을 들어도 저번에 그만큼 두드려 맞은 끝에, 방금 전에도 공격을 막 먹은 참인데.
뭐어, 지금 상태를 생각하면 믿을 수 밖에 없지만.
“더이상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이미 충분히 말려들었어! 제대로 납득 가는 설명을 할 때 까지 안 돌려보낼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알리사가 손수건을 내 이마에 누르려 한다.
“멍청아, 더러워지니까 됐다니까. 이런 거 냅두면 낫는다고.”
“안 괜찮아! 됐으니까 이쯤은 하게 둬!”
아니아니, 아가씨의 손수건이 피에 젖은 손수건이 된다거나 하는 건 싫은데, 나. 씻어도 안 빠지고, 대신할 손수건같은 걸 사서 선물하는 것도 싫고.
도망치려고 한순간 다리가 휘청인다.
“아.”
하고 깨달은 순간엔 발에서 힘이 빠져, 한순간에 시야가 꺼메졌다.
이대로 자빠지려나, 하고 생각한 참에 뒤에서 안아 세우는 감각이.
“너무 무리하면 안돼요.”
이 소린 슈테른인가.
무리시킨 건 어디의 누구냐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리지만 움직일 수 없다.
“유토 군, 여기는 스즈카가 말하는 대로 하자?”
“조금 있으면 노엘이 맞으러 와 줄테니까.”
“……그동안 설명은 전부 맡길게.”
“에엣?!”
나노하가 놀라는 걸 무시하고, 천천히 위를 향해 눕혀진 뒤 머리에 뭔가가 올려졌다.
잠시 뒤 이마에 천 같은 걸 눌러온다.
시야가 돌아오자, 예상대로 알리사가 손수건을 누르고 있었다.
“……고마워.”
불만을 토할 상황도 아니니, 솔직히 감사해 두자.
“괜찮아, 딱히. 진짜 넌, 이상한데 구애받네.”
“그 소린 자주 들어.”
내 이마에 손수건을 계속 누르는 알리사와, 그걸 걱정스러운 듯 보고 있는 스즈카와 나노하.
뒤에선 “배고파―”와 “시끄러! 좀 더 못 참겠냐!” 식의 대화가 들려온다.
“바꿔 드릴까요?”
“됐어. 것보다 너희들은 대체 뭐야?”
식으로, 머리 위에서 대화가 오간다.
조금 눈길을 돌려보자 슈테른의 얼굴이 보였다.
어라, 혹시나 나 슈테른의 무릎을 베고 있는 상탠가.
진짜 뭐지, 이 상황.
“이 사람의 딸이에요.”
“잠깐 기다려!”
슈테른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꺼냈기에 저도 모르게 딴죽걸었다.
슈테른은 뭐가 잘못됐나요? 라는 느낌으로 약간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 하지 마!”
알리사도 스즈카도 나노하도 눈이 점이 됐잖아!
“잘못된 부분 없어요? 당신의 마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얻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말해! 과정을 잔뜩 생략하지 마! 저도 모르게 말로 딴죽 넣어 버렸잖아!”
“큰 소리를 내면 상처에 안 좋은데요?”
…………너무나 담담히 말하는 슈테른의 대응에, 왠지 슬슬 어찌됐든 상관없어지기 시작했다.
“나노하, 알리사랑 스즈카에게 설명.”
“으, 응.”
노엘 씨가 맞으러 올 때까지, 어째서 이렇게 됐는질 수없이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 뭐라고 할까.”
노엘 씨에게 처치를 받고, 안내받은 방에 들어간 나는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어째서 이렇게 된거지.
테이블에 늘어선 요리가 차례차례 사라져 간다.
파린 씨가 요리를 늘어놓는 순간 사라져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대체 저 작은 몸의 어디에 저걸 다 넣는거지. 레비만이 아니라 슈테른도 디아키도 굉장한 기세로 요리를 평정해 나간다.
나만이 아니라, 시노부 씨를 포함한 모두가 얼이 나가있다.
“얼마나 굶은 거야, 너희들.”
“지금까지 있던 곳은 멀쩡하게 먹을 게 없는 세계뿐이었기에.”
“냠, 쩝, 이 세계에 도착한 지도 얼마 안됐어, 우걱우걱, 임금님! 슈테룽! 이것도 맛있어!”
“에에잇, 식사 정돈 좀 더 조용히 못 하겠냐, 멍청아!”
치료중에 북돋고 있던 경계심이나 적의 같은 게 굉장한 기세로 빠져나가는게 느껴진다.
머티리얼은 굶으면 죽는 건가? 볼켄리터는 어땠었지? 응, 모르겠어. 뭐, 이제 어찌됐든 됐어.
사양 좀 하라고 태클거는 것도 귀찮아졌다. 본모습인지 계산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로 느껴지니까 곤란하다.
괜찮아? 하고 물어보는 애들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머티리얼들의 식사를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지켜본다.
크로노와 린디 씨 등이 이쪽에 올 때까지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슬슬 도착하려나.
시노부 씨에게 식비를 요구받았다간 관리국에 떠넘기자고 마음속으로 결심하며, 이 녀석들의 목적을 생각한다.
제일 그럴싸한건 저번의 보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선 그것도 수상쩍다.
그럼 그거 말고 대체 뭐지. 관리국의 보호를 받으러 왔다……는, 이 녀석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닐 것 같다.
애초에 나는 이 녀석들에게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다.
배가 가득 찬 순간 덮쳐오면 어쩌지. 크로노, 빨리 와 줘―
“한 그릇 더!”
레비가 텅 빈 접시를 내민다.
“쫌 사양해라.”
“아하하. 요리는 잔뜩 있으니 괜찮아요―.”
파린 씨는 메이드의 귀감이네요! 저희집에도 주세요. 신부라도 괜찮아요.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레비는 내 말 따윈 듣지도 않은 모양이다.
“잘 먹었습니다.”
“음, 꽤 맛있었다고. 칭찬해 주마.”
“슈테른은 어찌됐든, 밥을 얻어먹어 놓고 으스대는 넌 대체 뭐야.”
“당연하잖아? 나야말로 왕이야!”
없는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임금님에게 바깥을 가리키며 말한다.
“돌아가.”
“아니아니, 안된다고?! 크로노 군 올 때 까지 기다려야지!”
레비가 배를 다 채웠을 즈음, 드디어 아스라가 도착했다.
시노부 씨 등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알리사와 스즈카에게 다음에 다시금 사정을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하고, 우리는 아스라를 향했다.
치료중인 하야테와 리인포스를 뺀 볼켄리터와, 크로노, 린디 씨, 그리고 나와 나노하가 머티리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즉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너희는 저번 싸움의 대미지로 스스로 마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우리들이 어떻게든 해줬으면 한다. 그런 거지?”
린디 씨가 말하는 대로, 셋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다.
정식 절차를 거쳐 어둠의 서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온 시그넘과는 다르게, 머티리얼들은 어둠의 서 시스템과 아직 연결된 상태였다.
그 상태로 어둠의 서 시스템째로 펠릭스가 소멸되어 버린 결과, 머티리얼들의 프로그램에 이상이 생겨 자력으로 마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게임 세이브 중에 전원을 내려서 세이브 파일이 망가진거랑 비슷한 이미질까.
이대론 존재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기에, 그걸 어떻게든 하기 위해 우리에게 왔다는 이야기.
“뭐어, 그런 거다. 네놈들의 힘을 빌리는 건 나로선 굉장히 본의가 아니긴 하지만.”
“그대로 사라져버려.”
쓸데없이 거만한 디아키에게 나직히 말을 내뱉는다.
사람의 힘을 빌리러 온 거라면 좀 더 거기에 어울리는 태도를 취하라고.
내 한마디에 디아키가 험한 눈길을 향해 오지만, 지금 녀석들은 아스라에 타기 전에 마력 봉인 처치를 받고 있다. 무서워할 이유는 어디도 없다.
“유토 군!”
나노하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말을 꺼낸다.
“나는 이 녀석들 탓으로 지독한 꼴을 봤다고. 이런 태도로 힘을 빌려달라고 한대도 말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쪼잔하다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노하처럼 지난 일이라고 조건 없이 봐줄 만큼 사람이 좋지 않다.
이 녀석들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페이트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원인 중 일부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빠져나갔던 적의가 다시 솟아오른다.
“저기저기, 슈테룽. 이녀석 사람 쪼그매.”
“시끄러!”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그땐 우린 태어난 직후였고, 주인에게 거스르는 것도 불가능 했는 걸.”
“…….”
목소리를 높이는 내게, 레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뺨을 부풀리며 입을 빼쭉인다.
“잠깐, 나 쳐날려댄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어이.”
“그건, 에, 그, 으……무심코, 울컥해서. 미안!”
에헷, 하고 웃으며 혀를 내미는 레비. 반성 안 했잖아, 너!
“사과로 끝나면 관리국은 필요 없어!”
“거듭 죄송합니다. 이 애는 저희가 잘 타이를테니까.”
“슈테룽! 아퍄아퍄!”
슈테른이 레비의 뱜을 바깥쪽으로 집어당기며 고개를 숙인다.
“적어도 지금의 우리에게 적의는 없고, 앞으로도 관리국의 법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믿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뭐어, 지금까지의 대화를 보면 확실히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주인인 펠릭스를 쓰러뜨린 것에 대해, 너희에게 원한은 없니?”
“……워언하안?”
린디 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비. 멍청이에겐 어려운 말이었던 모양이다.
린디 씨는 그걸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알기 쉬운 말로 설명을 고친다.
“우리를 원망하거나, 화나거나 하지 않냔 소리야.”
“으음―, 그 때 당한 건 화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확실히 펠릭스는 우리를 낳은 주인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충성이나 정 따윈 없어.”
“당신들과 싸운 것도 주인에게 따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기 때문. 우리 개인으로선 당신들에게 적대할 이유는 없어요.”
“그런 거니?”
린디 씨가 머티리얼들이 아니라, 수호기사들에게 물어봤다.
“하야테보다 전의 주인들에 대해선 거의 같은 의견이야. 열받는 녀석뿐이라서, 그 녀석들이 당했으니까 복수해 주겠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고―.”
“비타가 말하는 대롭니다. 주에게 따를 의무는 있어도, 충의나 친애를 안을 때는 없었습니다. 주 하야테가 특별한 겁니다.”
수호기사들의 취급은 상당히 지독했던 모양이니, 그 말에도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머티리얼들의 말도 어느정도 믿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야기한 한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나 마찬가지고, 펠릭스와의 교류도 없었을 거고.
단지.
“그런 것치곤 굉장히 신나서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만.”
크로노의 말에 나도 끄덕인다. 그걸 “단순히 강제됐으니까 싸웠습니다”로 마치는 건 무리가 있겠지.
“예.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마음껏 저질렀습니다. 당신들과의 싸움은 실로 의의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머잖을 때에 다시 상대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자랑스런 표정으로 대답하는 슈테른.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정말 전투민족적인 사고회로군요!
“그렇대, 나노하.”
“응. 기꺼히.”
……틀림없이 거절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리지널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아스라에 오기 전에 좀 이야기도 했었고, 이녀석 안에선 이미 슈테른이랑 친구인 걸까.
시그넘과의 싸움은 진지하니까 싫다고 했었는데, 슈테른의 경우에는 다른 인상이라도 받았는지 비슷한 사람끼리 묘한 공감이라도 느끼고 있는건지.
“흥. 레비나 슈테른은 어쨌든, 나로선 네놈들에게 빚을 백배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긴 하다만.”
험악한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는 디아키의 말에, 자리의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이쪽도 지지 않겠다는 듯 되노려보지만, 디아키는 그걸 코웃음으로 넘기곤 입을 연다.
“원래라면 네놈들을 모아 피의 축제를 올리고 싶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한순간 레비와 슈테른에게 눈을 옮긴 디아키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 둘을 소멸시킬 순 없네. 왕으로서 신하를 지킬 책임이 있으니.”
“헤에…….”
의외다.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려버렸다.
이런 방약무인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는 것 같은 녀석이 제대로 슈테른과 레비를 신경쓰고 있었다니.
“임금님……상냥해! 굉장해! 멋져!!”
바라보자, 레비가 글썽글썽 눈물 맺힌 눈으로 디아키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슈테른도 왠지 모르게 기쁜 듯 디아키를 바라보고 있다.
것보다, 이 자리의 사람들 대부분이 훈훈해한 듯이, 따뜻한 눈으로 디아키를 바라보고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실태를 번뜩 깨달은 디아키.
“차, 착각하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왕으로서의 책무고, 딱히 슈테른과 레비가 없어지면 쓸쓸하다거나 곤란하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입이 헛나온다는 건 이런 건가.
이렇게나 전형적인 새침데기의 모습을 보여주면, 거꾸로 상쾌하다.
나는 딴죽 대신에 어떠냐는 듯 따스한 눈길을 보내줬다.
“으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마!!”
“그래서, 결국 너희는 우리가 뭘 어떻게 해 주길 원하나.”
디아키가 일단 침착을 되찾은 뒤, 이야기를 재개하는 크로노.
마력봉인을 안 했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흥! 간단한 거다. 우리와 계약해서 시종이 돼!”
“나갈 길은 저쪽입니다.”
잘난듯 으스대는 디아키에게 정중히 출구를 지도해 준다.
“쿠쿠쿡, 뭐, 그렇게 사양하지 마. 네놈 따위가 말석이라곤 해도, 내 신하가 돼……아니, 돌아가지 마?!”
대강 머티리얼들의 사정은 이해했으니 이 뒤는 끝난 뒤 크로노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되겠다 싶어 혼자 퇴장하려고 했더니 굉장한 기세로 디아키가 쫓아왔다.
“아니, 이제 나 필요 없을 것 같고. 그럼, 그런 걸로.”
일단 이 녀석들이 뿌리부터 악인같은 게 아니라 철이 안 든 어린애라는 건 알았다. 이 뒤는 린디 씨에게 맡기면 문제 없겠지.
“그러니까 기다려! 네놈이 없으면 이야기가 안 돼잖아!”
“에―?”
“에―?가 아냐! 애초에 네놈과 번개 꼬맹이의 일격이 모든 원흉이잖아―?! 그 공격이 우리 프로그램에 제일 대미지를 크게 줬다고?! 제대로 책임 져어어어어엇!”
“그치만 시종은 싫고.”
“뭐가 불만이야! 왕인 내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진력할 수 있는 거라고. 영광의 극이잖아!”
너는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를 사전으로 조사하든 구글링 해라.
“허나 거절한다. 주인이라면 생각 못할 것도 없지만, 시종따위 질색이야.”
뭐가 슬퍼서 이런 꼬맹이의 시종이 돼야 하는 건데. 나한테 메리트는 뭐하나 없다.
누가 내게 진력하는 건 정말 좋지만, 이런 거한테 진력한다니 싫어.
상대가 미인이고 가슴 크고 상냥한 누님이라면 좀 생각 못할 것도 아니다.
“주인? 제대로 마도도 못쓰는 쓰레기 주제에……? 핫.”
있는 힘껏 비웃었냐, 이짜식.
“이뱌! 녜뇨믄 무슨셰미냐! 뇨아줘! 아퍄! 아퍄!”
“오―, 잘 늘어난다 늘어난다. 아무리 임금님이라도 자기 입장을 분별하는 법은 배워둬야 한다고―.”
좀 열받아서 양뺨을 집어당겨줬다.
디아키는 날뛰어댔지만, 마력이 봉인된 꼬맹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네놈! 나중에 두고보자!!”
적당히 하고 놔 줬더니, 허둥지둥 슈테른과 레비의 뒤로 도망쳤다. 후하하, 귀엽구먼~.
“유토 군, 너무 여자애를 괴롭히면 안돼.”
“나노하 양. 저는 아까의 백억배는 아픈 꼴을 당했습니다. 저 정도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응, 확실히.”
“지극 당연한 권리네요.”
“네놈들이 동의하지 마, 멍청이들!!”
동의하는 레비와 슈테른에게 딴죽거는 디아키. 좋은 트리오구나, 너희.
“그리고 내가 아니라도 괜찮겠지. 린디 씨한테 적당히 사람 찾아달라고 하라고.”
요는 사역마랑 똑같이 마력공급이나 라인을 연결하잔 거겠지.
나노하같은 게 입후보할 것 같고, 괜찮겠지.
“아뇨, 그건 어려울까 하고.”
확 하고 손을 들곤 말하는 슈테른.
“자랑이 됩니다만, 저희는 보통 사역마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합니다. 그렇기에 계약자에게 걸리는 부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보통 마도사라면 견딜 수 없겠지요.”
스스로 우수하다거나 자랑하는 걸 보면 과연, 슈테른 씨. 그래도 전투력은 어쨌든 다른 부분은 좀 그렇지 않나 싶지 않은것도 아닌데, 여긴 조용히 있자.
“나한테도?”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보통 행동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전력으로 마법전투를 할 때는 나름대로 지장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부담이 너무 큰 거 아냐?”
크로노의 말에 수긍한다. 나노하 클래스로도 지장이 나온다니 대체 얼마나 연비가 나쁜거야.
“애초에 원래는 상정되지 않았던 이레귤러적인 수단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설령 남의 손을 빌린다 해도, 소멸을 면할 수단을 찾은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할 수 있겠죠.”
“감지덕……지?”
“나중에 사전 찾아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노하에게 딱 잘라 말한다.
“아무래도 나노하 양 클래스 이상이면서 이 애들과 계약해 줄 것 같은 사람을 찾는 건, 어렵겠네…….”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마력 잔량도 그리 여유는 없습니다. 이대로 계약자가 나오지 않으면 소멸까지는 2주정도일까요.”
린디 씨와 슈테른의 말에, 필연적으로 내게 모두의 눈길이 모인다.
뭐―, 나라면 어차피 계약하든 안하든 제대로 마법은 못 쓸 거고.
이 녀석들과 이야기해 보면, 뿌리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연기나 계산이 아니라면 말이지만.
“부디 저희와 계약을 맺어주지 않겠습니까……?”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슈테른의 눈길이 곧게 이쪽을 향하고, 레비와 디아키도 약간이나마 긴장한 묘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이 녀석들에게 당한 걸 감안해도, 앞으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소멸이라는 말로는 불쌍해서 어떻게든 해 주고 싶은 느낌이다.
“이제 남들한테 폐가 될만한 짓은 안 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합니다.”
“맹세 맹세!”
“……맹세해 주지.”
슈테른, 레비, 그리고 마지못해하며 디아키도 수긍한다. 얼마나 신용하면 될진 모르겠지만, 마력봉인을 해 두면 당분간은 괜찮겠지.
“30분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줘.”
“에―?!”
“하아?! 남한테 맹세를 시키고 이거야?! 장난치지 마, 지금 당장 여기서 계약해!”
“……그러니까, 너희는 남에게 뭘 부탁할 때 그 태도는 어떻게든 해라.”
소리를 높이는 레비와 디아키에게 한숨을 내쉬며, 방의 출구를 향한다.
“어디 가냐?”
“산책.”
크로노의 질문에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 뒤, 캬악 캬악 시끄러운 디아키 일행의 소리를 무시하고 방을 나선다.
향하는 곳은 에이미 씨가 있을, 통신실.
“이런 이야긴데, 페이트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원인의 일부는 녀석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애초에 원흉이 나라는 건 일단 놓아두고.
에이미 씨에게 부탁해서, 미드의 페이트와 이야기를 하게 해 달라고 했다.
녀석들과 계약을 맺는다면, 우선 제일 큰 피해자인 페이트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만에 하나, 아니 억에 하난가? 페이트가 녀석들과 계약하는데 곤란을 나타내면, 계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어,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유토는 어떻게 생각해?』
“먼저 너부터 가르쳐줘.”
내가 그렇게 말하자, 페이트는 쿡쿡 웃었다.
『유토가 그 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가르쳐 줬으면 해. 부탁해.』
양손을 맞대고,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페이트.
“쓸데없이 치사한데.”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런거. 미묘하게 캐릭터 다르지 않나.
내가 딴죽걸자, 순식간에 페이트의 얼굴이 새빨개지곤 침울해져간다.
『스, 스즈카한테 배워서 해 봤는데, 역시 무리였으……려나?』
“뭘 가르치는 거야, 녀석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누르는 내 옆에서, 에이미 씨가 쿡쿡 웃음을 흘린다.
“아니아니 페이트, 지금 건 귀여웠어―. 확 확 더 하자―!”
당신도 쓸데없이 부채질하지 말아 줘요.
“뭐어, 무리는 안 할 정도로 해. 그래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나 말인데.”
이전에 내 말로 말하는 건 다 듣겠다고 선언한 직후, 페이트에게 부탁받으면 거절할 수도 없다.
생각하는 걸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렇네. 좋든 나쁘든 녀석들은 바보야.”
『아, 아하하…….』
바보인 부분을 강조하면서 딱 잘라 말한 내 말에 페이트가 쓴웃음 짓는다.
“갓 태어나서, 단순히 세상을 모른다고 할까 선악의 구별이 안 된다고 할까, 애들인 거야. 뭐, 뿌리부터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응, 유토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오―오―, 둘 다 통하네―.」
“누구든 대부분 비슷한 생각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놀리는 에이미를 둘이서 시원스레 받아넘겼다.
“그럼, 그런 걸로.”
『그래도, 알프의 마력도 부탁하고 있는데, 머티리얼 셋까지 계약해도 괜찮아?』
알프와는 페이트가 눈을 뜬 날에 마력공급 계약을 마쳐 뒀다. 주인은 페이트 그대로고, 마력 공급만 내가 하는 꼴이다.
페이트는 총 4인분의 마력 부하가 내 부담이 되지 않을지 걱정인 거겠지.
“괘안아 괘안아. 마력이 넘치는 건 특기니까. 나머진 린디 씨한테 맡길 거고.”
마력을 공급한 뒤는 린디 씨에게 전부 떠넘길 생각이다. 초3으로선 꼬맹이 셋의 신상을 어찌 해 줄수도 없고. 하야테는 특례.
녀석들이 다음에 어떤 길을 고를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린디 씨에게 맡기면 나쁘게 하진 않겠지.
범죄행위에 손을 물들이지 않는다면, 나머진 녀석들의 자유다. 뭘 할지는 전혀 상상이 안 되지만.
혹시나 페이트랑 마찬가지로 할라오운 가의 양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된 대로 크로노의 얼굴이 기대된다. 자연스레 뺨이 풀어지는 것도 별 수 없다.
아차, 여기 페이트는 프레시아가 죽으면 어쩔 셈인 걸까. 조금 신경 쓰였지만, 프레시아가 살아있는 지금 그걸 묻는 건 아무래도 섬세함이 부족하니 자중한다.
『그렇구나.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가르쳐 줘.』
“그건 나보다 에이미 씨같은 사람들한테 묻는 게 좋을 거라곤 생각하는데, 뭐, 알았어. 너무 기다리게 해도 시끄러울 거고, 슬슬 갈게.”
『응, 힘내.』
“너도.”
뭘 힘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계약을 맺는 건 괜찮지만, 우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보증은 있어?”
방에 돌아가 계약할 의사를 전하자, 바로 계약하자는 흐름이 되어서 장소를 넓은 훈련실로 옮겼다.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고, 계약의 술식에 넣어 뒀습니다.”
“술식은 이미 여기서 검증을 마쳤어. 마력 공급 외에도, 계약자에게 위해를 주지 않을 것, 계약자의 뜻으로 임의로 계약을 파괴할 수 있을 것 정도려나.”
“마력 외에 네게 부담이나 위해를 미칠만한 게 없다는 건 보장하지. 안심하고 계약하도록 해.”
샤말만이라면 의심하겠지만, 크로노가 그렇게 말한다면 괜찮겠지.
이 녀석들이 나쁜 짓을 할 때의 억제력으로는 부족한 기분도 들지만, 이 정도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경계선 같은 걸까.
계약자의 명령은 절대 강제라거나 하는 걸 짜넣었다간, 디아키 같은 게 맹반발할 것 같다. 뭐어……괜찮은, 걸까. 조금 불안하다.
페이트와 이야기하는 사이 검증을 마쳤다는 건, 내가 계약하리라는 걸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 같아서 좀 열받지만.
그 외에도 뭔가 이래저래 물어볼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뭐, 나중에 해도 되나.
후딱 계약을 마치자.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다시는 나나 내 동료에게 손을 대지 마. 그럴 때는 바로 계약을 끊고 먼지도 안 남기고 소멸시킬테니까.”
“핫, 마력밖에 장점이 없는 쓰레기 주가 잘도 짖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레비나 슈테른에게 해를 끼쳤다간, 문자 그대로 쓰레기로 매립해 주마.”
계약 마법진 중앙 위에서, 디아키와 적의를 가득 드러내며 서로를 노려본다.
“의외로 둘은 닮았나?”
““같은 취급 하지 마?””
나노하의 말에 나와 디아키의 소리가 겹친다.
“겹쳤다!”
“윽.”
“큭.”
즐거운 듯한 레비의 말에, 우리의 분한듯한 소리가 이어진다.
“아하하, 역시 닮았어.”
“이러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네요.”
“……너희들은 한 번, 뇌를 헹구고 와.”
나노하와 슈테른을 향해 내뱉은 말은,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부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