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네기가 에반젤린의 제자로 들어 간지 약 1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요란스런 사건들이 몇가지 있기는 했지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나저나 이곳은 보면 볼수록 엄청난 곳이군...”
일을 하던 도중 바벨탑의 내부를 살피는 에반젤린은 담담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극도로 놀라고 있었다. 전설 속에서 존재하는 바벨탑이 공간의 틈새... 아니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바벨탑 내부에 존재하는 문들은 수많은 공간에 연결되어있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비술들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寶庫). 마법사로서 상당히 탐구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어때 에반젤린, 잘 되어가고 있어?”
시로의 물음에 에반젤린은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어둠의 복음, 불사의 마법사 에반젤린이다. 이정도야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지.”
지금 에반젤린이 하고 있는 일은 에반젤린의 별장과 바벨탑을 연결하는 이동 마법진을 일이였다. 물론 상당히 고난이도의 마법이 필요하지만 에반젤린은 이미 세수 500을 넘기고 수많은 마법을 연구해온 강대한 마력을 지닌 진조흡혈귀... 이동 마법진 설치 정도는 우습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에반젤린이 시로를 보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 어느새 나타난 쌍둥이 자매가 에반젤린의 뒤에서 말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바벨탑에 연결될 틈을 열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 했을걸?”
“크으...”
에반젤린은 분하지만 반론 할 수가 없었다. 이곳 바벨탑은 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철저한 공간 단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는 수많은 공간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은 바벨탑에서 저쪽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었다. 바벨탑을 통하지 않고 그쪽에서 바벨탑 쪽으로 올수는 없었다. 물론 차원의 틈새속이라 이동마법도 불가능 했다. 만약 두 마녀가 공간의 틈새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에반젤린으로서도 이곳에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 이였다.
“두 사람 다 그쯤 해둬. 그보다 에반젤린 네기의 훈련은?”
“일단 마력제어를 위한 정신력훈련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어. 코노카도 같이 말이야... 네기와 코노카 둘의 마력용량은 그야말로 엄청나니까... 아마 학원 내에서 마력 양으로 그 둘과 비견될 만한 마법사는 거의 없을 걸? 있다면 나와 이리야 정도일까... 그런 엄청난 마력을 낭비 없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정신력을 단련 시키고 있어. 그나저나 학원장 이 녀석은 언제 내가 네기를 훈련시킨다는 것을 알고 코노카까지 맡긴 거지?”
네기의 훈련 상황을 말하던 에반젤린은 갑자기 떠오른 학원장의 얼굴에 분통을 터트렸다. 학원장은 언제 정보를 입수했는지 네기의 훈련에 코노카도 덤으로 끼워 버렸다. 번거로운 것은 둘째치더라도 학원장에게 한방 먹은 것이 꽤나 뼈아픈 에반젤린 이었다.
“으으... 열받아...”
분통을 터트리는 에반젤린의 등 뒤에서 무서우리만큼 살벌한 오라가 뿜어졌다. 이전에도 보았던 붉은 악마의 오라였다.
“자자... 진정하고... 그 보다 차차제로와 차차마루에게 맡겨놓은 네기의 훈련 상황이나 보러갈까?”
“뭐... 그쪽이 좀더 건실하겠지...”
시로는 가까스로 폭주직전까지 갈 뻔한 에반젤린을 진정시키고 현재 네기가 훈련 중인 에반젤린의 별장으로 향했다.
그 시각 에반젤린의 별장.
“늦어!”
차차제로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칼이 네기에게 떨어졌다. 네기는 아슬아슬하게 차차제로의 칼을 피하며 차차제로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그런 네기의 공격을 눈치 채고 있었는지 차차마루가 네기의 일격을 막았다. 네기의 공격이 막히자마자 네기를 향해 날아오는 단도.
“크윽- 바람의 방패!”
네기는 바람의 방패를 전개해 차차제로의 단도를 막았다. 하지만 바람의 방패가 사라지자마자 차차마루의 손이 네기를 억눌렀다. 강한 힘에 눌린 네기는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네기의 얼굴 바로 옆에 차차제로의 검이 박혔다.
“히익-!”
“네기 꼬맹이... 파고드는 타이밍은 괜찮지만 아직 약해...”
차차제로는 네기의 옆에 박힌 자신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차차제로가 등을 돌리자 차차마루도 네기를 누르고 있는 손을 떼었다.
“흐음... 벌써 1주일째 인데 도통 발전이 없네...”
“뭘 그렇게 중얼 거리냐 네기 꼬맹이.”
네기가 차차제로와 차차마루와의 대련에서 진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스터.”
“고작 1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겨우 1주일로 강해질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고생하지 않아!”
에반젤린의 말에 네기는 약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차차마루와 차차제로와 대련한지 벌써 1주일이나 되어가는 데도 버티는 시간은 1초도 늘지 않았는걸요...”
그랬다.
네기는 차차제로와 차차마루와 대련할 때마다 45초에 깨지고 있었다. 거기서 1,2초의 가감도 없다. 오차는 0.001초정도... 항상 같은 시간에 깨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의 농락수준인 것 이였다.
“뭐, 지금 네 수준으로 볼 때 그것도 잘 버틴 거다. 차차마루나 차차제로, 둘 중 하나만 상대한다면 네가 이길 가능성이 있지만 둘의 콤비네이션은 꽤나 엄청나거든.”
“실전이었다면 벌써 5번 이상 죽었겠지. 대련이라 그 정도 버틴 거야”
에반젤린과 시로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왠지 불만인 네기였다.
“흐음... 여기에 네기선생님이 있는 거지?”
“아마도...”
요즘 들어 피곤해 보이는 네기가 걱정이 된 아이들(아스나를 필두로 한, 코노카,세츠나,카즈미,카에데,이리야,마리,유에,노도카)은 네기가 피곤해하는 원인을 밝히기 위해 네기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에반젤린의 집... 모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들어가자니 불법침입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다.
“뭘 그렇게 우물쭈물 거리는 거야, 가자고!”
카즈미는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마법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은 카즈미는 마법사의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기사,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지...”
“그래, 그래!”
결국 의문을 이기지 못한 모두는 몰래 에반젤린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몰래(라고 할 수 있다면...) 들어간 아스나들은 네기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주택을 살폈다. 그러나 주택 내에는 네기는 커녕 인기척조차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네기선생님은 이곳으로 들어왔을 텐데...?”
네기를 찾으러온 아이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 위층과 지하실을 뒤졌다. 위층을 뒤지고 있던 아스나와 코노카,세츠나,이리야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아래층으로 간 아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아래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먼저 나갔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간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지하실에 있다는 소리였다. 아스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지하실로 향했다.
“없어...”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의 빠진 아이들 중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세츠나와 이리야가 입구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들어온 흔적뿐, 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게 생각한 아이들은 지하실을 살폈다. 온통 인형과 마술적 물품으로 가득한 지하실... 특별히 수상해(일반인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겠지만...)보이는 구석은 없었다.
“그럼 남은 것은...”
“저 병속에 들어있는 미니어처 같은 건가?”
이리야는 미니어처의 분석을 시작했다. 시로 만큼은 아니지만 일단 일류마술사 대략의 구조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런 거로군!”
“뭐가?”
이리야를 제외한 나머지는 마법사가 아닌 터라(코노카는 마법사기는 하지만 아직 기초도 제대로 소화 못시킨 초짜 중 초짜, 세츠나는 주술은 보조니까 약간밖에 모른다.) 이리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모두 내 손을 잡아.”
갑작스런 이리야의 말에 모두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이리야의 말대로 이리야의 손을 잡았다. 모두가 손을 잡은 것을 확인한 이리야는 안에 미니어처가 든 병의 입구를 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이리야와 아이들은 지하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여... 여긴 어디인거지?”
“와... 넓다~”
아스나와 코노카는 갑자기 바뀐 주위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세츠나는 이 공간을 둘러보며 이리야를 향해 물었다.
“이리야... 여... 여기는...?”
“그 미니어처 안이야. 공간의 왜곡정도로 봐서는 시간이 흐르는 정도도 약간 다른 것 같아... 일단 더 조사해 봐야 겠지만...”
그렇게 모두가 주위를 살피고 있을 무렵 다리 쪽에서 한명의 인영이 다가왔다. 지하실 쪽을 탐색하러간 유에였다.
“늦었네.”
“어떻게 된 거야?”
아스나의 물음에 유에는 담담히 대답했다.
“여긴 아무래도 그 미니어처의 안인 듯 해.”
“그건 알고 있어.”
“먼저 이곳에 오게 된 우리는 약 1시간동안 이곳 주위를 살폈어.”
유에의 말에 아스나는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자... 잠깐! 1시간이라니! 우리들이 나뉘어서 네기를 찾으러 간지는 5분정도 될까 말까 한데...?!”
아스나의 의문에 이리야가 나서서 설명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공간이 왜곡되어있어. 더불어 시간도 왜곡되어있지. 유에의 말과 우리가 있었던 시간을 비교해보면 대략 여기의 하루가 밖에서의 1시간 정도 인 것 같아. 뭐 비유하자면 우라시마 타로가 있었던 용궁과는 정반대라고 봐야겠지.”
“그런 거구나...”
“과연...”
이리야의 알아듣기 쉬운 설명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마친 이리야는 주위를 살피며 유에에게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 지금 다른 곳을 둘러보고 있어.”
“그래, 일단 모여서 둘러보기로 하자. 만약에 뭐라도 잘못 건드렸다가 위험에 처하면 곤란하니까.”
“그러는 편이 좋겠군. 알았어, 내가 아이들을 모아올게.”
유에는 그렇게 말하고 다른 아이들을 찾으러 갔다.
다 모인 아이들은 이리야를 선두로 해 네기를 찾았다. 그렇게 네기를 찾던 중 주위의 경치를 보고는 아스나가 유에를 보며 말했다.
“진짜... 비상식적인데도 정도가 있어야지... 유에 너는 이런거 이상하지 않아?”
“그래? 난 요 근래에 일어난 비상식적인 일들에 가슴이 뛸 정도야. 따분한 학교수업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충실한 매일을 보내고 있는 걸.”
“잠깐 조용.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이리야는 대화중인 두 사람을 조용히 시킨 후 강화마술로 청력을 강화했다. 굳이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세하게 소리를 판별하기 위해서였다.
“타핫!”
“아직 느려!!”
들려오는 목소리로 보아 저번에 본 차차제로와 네기가 대련 중 인듯 싶었다. 이리야는 아이들에게 따라오라고 신호를 준 후, 벽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였다. 이리야가 고개를 내밀자마자 이리야의 눈앞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차차제로의 투척용 나이프였다. 이미 회피하기도 마술로서 방어하기도 아슬아슬한 상황... 이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었건만 나이프가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번에 죽었는가 하고 생각 해봤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런 고통도 없을 리는 없었다. 이리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약간은 가무잡잡한 두 개의 손가락에 의해 잡혀있는 차차제로의 나이프를 볼 수 있었다. 이리야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싱긋 웃고 있는 시로와 이마에 혈관을 띄운 채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 에반젤린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붉은 악마가 강림한 에반젤린의 서릿발 같은 물음에 시로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뭐, 네기를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너희들 바보냐?! 그리고 남의 집에 무단침입? 죽고 싶은 거냐?!!”
에반젤린은 마☐전☐ 디☐가☐아에 나오는 마왕 라☐르와 같은 분위기에 살기를 뿌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시로는 그런 에반젤린을 최대한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불쾌감 탓인지 쉽사리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에반젤린이 다른 아이들을 향해 화를 풀고 있던 중...
꼬로로록-
“어라?”
갑자기 이리야에게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이리야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시로는 이리야의 배에서 난 소리를 듣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이해가 갔다. 아마도 네기를 쫓아오느라 밥먹는 것도 잊었으리라...
시로는 에반젤린을 향해 물었다.
“부엌 사용해도 괜찮지?”
“뭐... 상관은 없지만 그냥 차차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아?”
여기서 차차들은 차차마루의 언니들인 인형 차차시리즈들 이였다. 하지만 시로는 싱긋 웃으며 거절했다.
“괜찮아, 나도 간만에 실력발휘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지.”
시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용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로가 부엌에 들어간 지 30분... 부엌에서 엄청난 진수성찬이 나왔다. 일식부터 시작해서 양식, 중식, 그리고 옆 나라인 한국의 요리까지... 양도 모양도 엄청나기 그지없었다.
“우와... 역시 시로~!”
“오라버니는 정말 엄청나시군요...”
“에미야선생님의 요리 실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이... 이 맛은?!”
“맛있어~”
모두는 시로가 한 요리를 먹으며 행복감에 젖었다. 에반젤린도 시로의 요리를 먹으며 감격에 젖었다(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가에 물기가 촉촉하게 젖어있다.). 더불어 뒤늦게 온 쿠페이도 시로가 만든 진수성찬을 보더니 무서우리 만큼 빠른 속도로 시로가 만든 요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시로의 요리를 평했다.
“흐음... 사츠키와 대등... 아니 그 이상일지도...”
그렇게 별장에서의 밤이 깊어져 갔다.
“뭐?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아이들이 별장을 뒤져서 꺼낸 와인을 홀짝이고 있던 에반젤린은 유에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싫어,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저쪽에 선생님이 있으니 그쪽에 부탁해 보던지. 마법선생님께 말이지.”
“에~?! 마스터?!!”
갑자기 지목당한 네기는 당황하며 에반젤린을 향해 소리쳤다. 에반젤린은 귀를 막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네기에게 말했다.
“어차피 별 상관없잖아. 이미 들킨 지 오래고... 게다가 이쪽은 바깥보다 마력도 상당한 편인지라 의외로 간단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에반젤린의 말과 아이들의 강력한 염원에 의해 네기는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요란한 헤프닝이 많았지만 일단 넘어가자.
별장 안 심야.
“흐음...”
갑자기 잠에서 깬 에반젤린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잠도 안 오는 터라 잠시 산책 겸해서 밖으로 나섰다. 바닥에는 술에 취한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걷기는 힘들었지만 조금씩 밟아주는 것으로 그 불편을 대신했다.(물론 밟힌 아이들은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인상을 조금씩 찌푸렸다.)
“진짜... 이런 바보들과 노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에반젤린은 웃음을 머금었다. 15년 전, 그 바보와 함께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은 언제나 혼자였었다. 그런데 이 별장에 사람을 들이게 되다니...
“응?”
산책을 하고 있던 에반젤린은 별장 한쪽에서 달을 구경중인 시로를 발견했다. 그런데 달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고 황량해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에반젤린은 기척을 죽이고는 시로의 뒤에 섰다.
“훗... 벌써 20년도 넘은 일이건만...”
시로는 와인을 병째로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술기운 탓인지 에바가 주위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달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는군... 아버지가...”
“그 아버지라는 사람... 누구?”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로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기척을 숨기고 서있던 에반젤린이었다.
“놀랐잖아!”
“그보다 네 아버지라는 사람의 얘기 좀 해주지 않겠어?”
한동안 고민을 하던 시로는 잠깐 하늘의 달을 올려다 보았다.
“뭐... 괜찮겠지?”
시로는 와인 병을 에반젤린에게 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진짜이름은 몰라. 어떤 사고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고 기억도 잃었거든. 뭐 가족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를 구해준 것이 에미야 키리츠쿠. 나와 이리야의 아버지지.”
“흐응~ 그렇다면 시로는 양자라는 거네?”
“그런 거지... 그때당시 아버지와 이리야는 모종의 이유로 떨어져 있었고 나는 이리야의 존재도 모른 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어.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는 아버지가 마술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아버지께 마술을 배우려 했는데...”
“했는데?”
시로의 말에 흥미를 느낀 에반젤린은 시로에게서 받아든 와인 병을 홀짝이며 운을 띄었다.
“재능이 극악하리만큼 없더라고... 마술회로는 마술을 행사할 때마다 만들어야했고 쓸수 있는 마술도 강화와 투영, 이거 두 개밖에 익히지 못했지... 뭐, 그것도 채 익숙해지기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 버리셨지만...”
“마술회로?”
에반젤린은 마술회로라는 생소한 개념에 의문을 표했다.
“아... 이곳의 마법사들은 마술회로를 사용하지 않았지? 마술회로는 우리 쪽 마술사들이 마술을 행사하기위한 마력을 흘려보내는 통로야. 보통 마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수록 회로의 수와 마력 수속(收束)률이 높지... 어쨌든 강화와 투영, 이 두 가지만을 익히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함께 달을 구경했지. 딱 여기에 떠있는 달처럼 만월의 달이었어... 그날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셨지. 과거 자신의 꿈을...”
“뭐였었는데?”
“정의의 아군...”
“에엑~?! 농담이지?!”
시로의 말에 조금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에반젤린이 되물었다. 정의의 아군이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꿈을 가진 녀석이 있다니... 그러나 시로는 담담하게 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진담. 어쨌든 왜 되지 못했냐고 물으니 여러 가지가 있었다는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나이제한 이었고.”
“뭔가 엄청나게 당혹스러운데...”
에반젤린은 시로의 말을 들을수록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이 말을 계속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고민도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이왕 듣기 시작한 이야기 계속 듣기로 결심하고 이야기를 재촉했다.
“어쨌든 그날 아버지가 보였던 눈이 너무나도 슬퍼보여서 내가 아버지의 꿈을 잇기로 결심했어. 뭐 그 결심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 버리시기는 했지만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어. 그렇게 18살이 되었지...”
“그래서?”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 에반젤린은 뒤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시로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는 다음에...”
“뭐야 그게!!”
에반젤린은 시로가 이야기를 그만두자 화를 냈다. 조금 지루하고 어이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서 끊다니...
“뭐, 뒷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하거든... 제대로 말하려면 정리 좀 해야 해서 말이야.”
“이봐... 어물쩍 넘어가지마...”
그렇게 시로와 에반젤린이 토닥거리고 있을 때 별장의 한쪽에서 빛이 일었다. 마력의 잔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저것은 마법사용에 의해 생긴 빛... 시로와 에반젤린은 저 빛에 흥미를 느끼며 토닥거리던 것을 멈추고 그 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마법진을 그려놓고 이마를 맞대고 있는 네기와 아스나를 볼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네기와 아스나의 밑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보며 감탄성을 흘렸다.
“호오... 저건?”
“뭔지 알아?”
“의식 싱크로 마법진. 보통 자신의 기억을 상대에게 보여줄 때 사용하는 마법진이지... 뭘 보여주려고 저러는 걸까?”
싱크로 마법진을 본 에반젤린은 네기가 무슨 기억을 아스나에게 보여주려고 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그러나 궁하면 길이 생긴다던가... 마침 잠을 깬 노도카가 뒤쪽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대번에 노도카를 끌고 온 후 반 협박조로 노도카를 보며 말했다.
“너 그거 가지고 있지? [타인의 표층의식을 탐색할 수 있는 아이템]. 그거 잠깐만 빌려줘. 꼬맹이의 마음 좀 읽어보게.”
“아... 안돼요. 그건!”
노도카는 강력하게 거절했으나 그것이 통할 에반젤린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꼬맹이의 옛날이야기 같은데 궁금하지 않아? 좋아하는 남자의 과거를 알아두면 여러모로 유리할 텐데. 뭐 꼬맹이의 마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게 껄끄럽다고? 걱정 마. 꼬맹이는 다른 이들 에게도 모두 말하겠다고 했으니... 그리고 마스터인 나에겐 그 얘길 들을 권리가 있어. 꼬맹이의 보호자인양 나서는 아스나한테만 얘기한다면 여러 가지로 선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자 어쩔 거야 미야자키 노도카?”
아직 잠이 덜 깬 데다가 사안(邪眼)까지 운용한 에반젤린의 말에 노도카가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아... 아주 조금만이라면...”
“좋아.”
에반젤린은 노도카의 아티펙트를 받아들고 네기의 심층의식을 읽기 시작했다. 시로는 그런 에반젤린을 보며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사안까지 운용하다니...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에반젤린과 노도카 시로만이 있었던 네기의 마음 엿보기 클럽(?)은 한명, 두명씩 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별장 안에 있던 모두가 깨어나 노도카의 아티펙트를 통해 네기의 기억을 엿보고 있었다. 너무나 애절한 사연들에 의해 시로를 제외한 모두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로가 네기를 구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책에 떠오른 무한의 검과 악마의 대군... 그 구절을 본 에반젤린과 세츠나, 이리야는 무척이나 날카로운 눈으로 시로를 보았지만 시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네기 쪽에서 아스나의 외침이 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런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마!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걱정 마! 아빠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 아스나...”
“나한테 맡겨, 내가 반드시... 네 아빠를...! 응?!”
한창 분위기가 올라 말을 하고 있던 아스나는 네기의 뒤쪽에 보이는 그림자에 무척이나 놀랐다. 어느새 모두가 깨어나 있었던 것 이였다. 그리고 노도카의 손에 들린 책으로 보아 네기의 이야기도 다 들은 듯했다.
“네기에게 그런 과거가...”
“네기 선생님...”
네기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당황하며 물었다.
“다... 다 들으신 거예요 여러분?!”
“네기! 힘은 보잘것없지만 나도 네기의 아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께!”
“나도!!”
“나도 도울게해!”
“마... 마스터!!”
당황한 네기는 에반젤린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에반젤린은 시선을 먼 곳으로 응시하며 남몰래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자~ 그럼! 네기가 아빠를 찾게 되기를 기원 하며 한판 더!”
“오옷!!”
결국 다시 놀자 판이 된 아이들 이였다.
마호라 학원 어느 샛길
“네... 네기...!”
피투성이가 된 한 소년이 네기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샛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힘이 다했는지 빗물이 흥건한 바닥에 쓰러졌다.
“네.. 네기... 위험...”
어느새 소년의 목소리가 잦아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