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우는 것을 멈췄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슬프고 또한 아프지만, 이곳에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슬퍼하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린 소녀. 진작에 어디론가 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곳에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보고 있었을 것이다.
…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 돌아가자."
소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소녀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굳은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내민 손을 붙잡았다.
소년은 소녀를 그대로 끌어안아 올린 채 뛰어올랐다.
그 순간, 소녀는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다른 풍경에 휩싸였다.
─사람의 몸으로, 이만큼 높이 뛰어오를 수 있을 리 없다.
─사람의 몸으로,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그것조차도, 자신이라는 '짐'이 있기 때문에 억제하고 있는 것이겠지. 조금 전 싸움에서 보여준 속도는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흥미가 생기면서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렸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정말로 강하다고 생각했다.
벌써 감정을 정리하고 평정을 되찾다니, 자신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아리사는 곧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소년은 감정을 정리한 것이 아니다. 그저 슬퍼하는 것을 뒤로 미룬 것 뿐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용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그 이외의 이런 상념도 저런 상념도 전부 가슴 한구석에 몰아넣고, 나중으로 미뤘다.
왜냐하면, 그녀가 있었으니까.
자신에게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데려다줘야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계속 슬픔에 잠겨 불안만 안겨줄 순 없다.
그 생각의 밧줄 하나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실제로 이미 그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감정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았다. 그에게 안겨있는 소녀조차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위로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의 슬픔을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리사 버닝스는, 지금 이 순간만큼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IRREGULAR HUNTER - X
31화
[…… 어이.]
<뭐냐.>
[저건 뭐야?]
턱짓으로 저 멀리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저거에 손 안댔다.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에 손댈 상황이 아니거든.>
[그럼 저건 뭔데? 넌 알 거 아냐.]
<나라고 해도 모르는 건 있다. 뭐, 짐작의 범위 내라면 이야기해줄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반역자가 무언으로 입을 다물어버리자, 그것을 "빨리 말해라"는 재촉이라고 받아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다지 놀랄 물건은 아냐. 단지 이 세계도 우리가 있던 곳보다 뒤떨어지기만 한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 증명 정도겠지.>
[호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좀 드문데.]
'인간'에 대해선 한없는 적의와 살의를 불태우는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약간 놀랐다.
곧 쓴웃음이 섞인 말을 돌려받았다.
<'인간'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별개니까. 하긴, 과학을 발전시킨 게 인간이니까 완전히 떼놓고 생각할 수도 없겠지만─>
[그딴 건 됐고, 저거 뭐냐고.]
무자비하리만치 거침없게 말을 끊어버리고 질문한다.
잠시 동안 침묵했던 그는 결국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말을 잇는다.
<레플리로이드가 아닌 건 확실하다. 그렇다곤 해도, '로봇'과도 좀 다르지만. 게다가 저건 세상에 공개된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것 같더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높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지만.>
어떤 기술이 사용됐을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지금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조차도 아직까지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것을 부르는 명칭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저것의 제작자는 저것을…
<자동인형(自動人形).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군.>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 사."
"…………"
"…… 리사."
"…………"
"아리사 짱!"
"에, 에, 에?!?!"
느닷없이 들려온 큰 소리에, 아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스즈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나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 건 나노하인 모양이다.
평소같았으면 바로 거세게 받아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다.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 무슨 일이야?"
일단 대답은 해주었지만.
그러자 큰 소리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하고 있던 나노하와 스즈카는 오히려 그 조용함에 놀랐다.
"아리사 짱?! 무슨 일 있었어?!"
"… 아무 일도."
그렇게 말하며 아리사는 책상 위에 축 늘어졌다.
그녀를 알고 있는 나노하와 스즈카에게 있어서는 비상 사태. 수업 시간 때에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질문 공세를 받고─그 와중에도 전부 대답해냈다는 것은 놀랍지만─, 쉬는 시간이 되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저 그 자세 그대로 멍. 심할 때는 아예 쿵쿵쿵하고 머리를 몇번 책상에 박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 일 아니다"라고 일관하고 있었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 이렇게까지 심했던 것은 예전에 세 사람이 친구가 되기 전, 스즈카의 문제로 나노하와 크게 싸우고 났을 때 이래로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것이 3일 째 이어지고 있다고 하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무리다.
"집에 무슨 일 있는거야? 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뭔가 아끼는 물건이 부서지기라도 했어?"
"………"
책상 위에 엎드린 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마 나노하가 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 이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어떡하지…?'
'글쎄… 생각같아선 기분 정리할 시간 정돈 주고 싶지만 수업 시간에까지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그렇지? 선생님들도 상당히 화가 난 것 같고.'
친구들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리사는 엎드린 채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리사를 반 강제에 가깝게 끌어내어, 평소처럼 옥상으로 데리고 간 다음 도시락을 펼쳤다.
하지만.
"……"
"저, 아리사 짱?"
"… 응, 응?!"
"도시락은?"
"응. 그거라면… 어? 어라? 어라?!"
없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시락이 없다.
설마하니 교실에 두고온 걸까. 아리사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학교에 도시락을 들고 오긴 했던가? 생각해보니 기억이 없다.
"… 미안. 나 도시락 두고 온 거 같아."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내고, 친구들은 그녀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무표정, 무언으로 일관. 평소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아리사는 온데간데 없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스즈카와 나노하는 몇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할 수 없네. 오늘은 우리들 거 나눠줄게."
"…… 진짜로 미안."
기분과는 별개로, 배는 고팠다. 친구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아리사는 두 사람에게서 도시락을 나누어받았다.
"그래서, 아리사 짱.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노하는 물론이고 스즈카도 걱정이 섞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까지 걱정을 끼친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여기까지 걱정해주는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느껴졌다.
생각해보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할까.
… 역시 말할 수 없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할지 아리사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동료를 싸워서 쓰러트리고 그 때문에 비탄에 잠긴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같은 것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물어보기 어렵다. 친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했다간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두렵다. 자신은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알고 있고 또한 믿고 있지만,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밖엔 들리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아리사가 모르는 사실이, 두가지 있다.
첫째. 친구 중 한 사람은, 그녀가 고민하는 원인인 소년과 함께 세계의 위기를 헤쳐온 적이 있다는 것.
둘째.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소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비밀을 몸과 마음 속에 품고 있다는 것.
그것을 모르는 아리사로서는 아무래도 두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아리사는 이야기를 적당히 숨기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쩌면 생각외로 쓸만한 조언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저기 말이지… 스즈카는 벌써 잘 알거고, 나노하도 지난번에 봤지? 그 녀석."
"… 아."
아리사가 저렇게 부르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되어있다. 거기에 '스즈카가 잘 알면서 나노하는 안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는 조건이 더해지면, 그것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단 1명으로 압축된다.
"그 녀석한테 말야. 그, 좀… 일이 생겼다고 할까… 그런 거거든."
'좀 일이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근데 그것 때문인지 그 녀석 기분이 상당히… 좀 그런데, 어떻게든 해줄 수 없을까 해서 말야."
그걸 고민하고 있었던가.
한순간 가볍게 생각할 뻔했지만, 나노하도 스즈카도 곧 생각을 바꿨다.
다름아닌 아리사다. 그 성격에 다른 사람의 일로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건, 그 소년에게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 것도 상당히 큰일임에 틀림없다.
'혹시… 그때 거미 씨 일 때문에 아직도…?'
나노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아는 사람이 두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버렸다고 하면, 자신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단지, 굉장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일거라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엑스 씨한테…"
스즈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을 보면서 아리사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게 또 골치아픈게 말야. 그 녀석 자신은 또 나름대로 그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할까 내색하지 않고 억지로 괜찮은 척 하려고 한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헤어질 때의 그 소년은 웃고 있었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있었는데도, 그 바보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고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이런거야. 오늘 하루 진짜 최악이었어…"
자각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노하가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고?"
"으응… 말 못해."
"… 그건, 알고 있다는 이야기야?"
"노 코멘트.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냐."
거짓말을 할 바엔 차라리 숨긴다. 그것이 이 두 친구에 대한 아리사의 존중이었다. 두 사람도 그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엑스 씨는 그것을 숨기고 싶어한다는 거지? 그 일어났다는 일이 아니라, 그것때문에 기분이 안좋다는 걸."
"응."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곧이어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묻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무 일도요."
"그렇다고 믿기엔 상황이 안좋습니다만."
시그넘과의 대련에서 6전 전패. 그것도 평소의 그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을─설령 밸런스 회로가 손상되어있다고 하더라도─ 실수를 저지르고, 거기에 허를 찔려 그대로 뒤집혀져 바닥에 메다꽂힌 것이다.
이를테면 시그넘이 살짝 건 페이크에 냅다 걸려들었다던가, 횡으로 휘둘러지는 레반틴을 피하지 않고 파고 들다가 카운터로 무릎 차기에 맞아 날려간다던가, 최후에는 탐색이라고 날려본 주먹을 그대로 붙잡혀 메치기를 당했다던가.
하나같이, 그답지 않은 실수들 뿐이었다. 이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봐야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지난번에 엑스와 겨루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맑고 깨끗하며, 일절의 흐림이 없는 순수함. 그것이 주먹과 검의 교환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 느꼈던 엑스가 맑은 하늘이라면, 지금은 먹구름이 가득 찼을 뿐만 아니라 폭풍까지 몰아치고 있으니까.
같은 인간이 이 짧은 시간이 이렇게까지 변했다는 건, 상식적으론 있을 수 없다.
… 왠만큼 커다란 일을 겪지 않고서는.
역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 주인 하야테는 당신에 대해 스스로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저희들도 거기에 동의했고요."
그 당시 하야테는 당장이라도 엑스에게 물으려고 하던 볼켄리터들을 그렇게 막았다.
볼켄리터들 역시,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고.
"그리고 주인 하야테가 말했던 대로, 당신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엑스, 비타와 함께 밖으로 나갔던 하야테가 돌아왔을 때, 그녀의 주인은 상당히 기뻐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엑스 군은 일이 생겨서 조금 늦게 들어올 것 같다"고 했던 하야테의 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그런데.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그때보다 심합니다."
애초에 방에 틀어박혀있는 엑스를 강제로 끌어내서 이렇게 대련을 건 것도 그 이유다. 물론 엑스는 거절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시그넘이 문답무용으로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결국 반격할 수밖에 없었고, 대련이 성립됐다.
그리고 결과는 보는대로,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런데도, 우리들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당신은 주인 하야테만이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말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주인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녀들의 새로운 주인.
그리고 그 주인과 함께, 자신들을 '인간'이고 '가족'이라고 불러준 이 소년.
이 소년이 자신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이 소년을 내버려둘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겁니다. 가족이니까요."
그렇기에 말해주길 바랬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있다.
가족이니까. 걱정하고 있으니까.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엑스가 시그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마치, 야단을 맞고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와 같은 얼굴.
그것을 보고 한순간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가슴을 찌르지만, 참아냈다.
"……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시그넘이 들어가고도, 한참동안.
엑스는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가족. 그녀들을 그렇게 부른 것은 틀림없이 자신이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은 그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면서, 이러고 앉아있다.
… 이런 자신은, 얼마나 한심한가.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웹 스파이더도 마그마 드래곤도, 그 누구도 지금 자신이 이러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욕하고 걷어차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렇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그의 감정은 그것을 털어내버릴 수 없었다. 머리의 이해와 감정의 느낌은 별개니까.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아무리 묻어두려고 해도 그렇게 되질 않는다.
지난 세월 동안 봉인해온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반동은, 그렇게도 컸다. 더이상 이성으로 억누르기 어려울만큼.
착신음이 울렸다.
시그넘은 들어가버렸고, 애초에 그녀는 휴대폰이 없으니까 자신의 것일 것이다. 물론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휴대폰은 아니지만.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휴대폰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확인한다. 지금 것은 문자 착신음이다.
… 기분이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한 지금인데도 불길한 예감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심호흡을 하고, 열어본다.
『와.』
… 불러내고 싶으면, 최소한 장소 정돈 적어달라고 하고 싶다. 아무리 자신이 그녀의 휴대폰 위치를 역추적할 수 있다곤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을까.
발신자는 아리사 버닝스. 설마, 그런 일을 겪은지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자신과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건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일수도 있다. 지금까지 엑스가 겪어온 아리사의 성격은 문자 그대로 외강내유니까.
생각같아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하면 걱정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겠지.
그러니까 적어도, 만나서 이야기하자. 오늘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힘들 것 같다고.
"…… 아리사."
"응?"
"이건 대체……?"
아리사가 불러낸 장소는 평소와 달랐다.
버닝스 가의 저택에도 뒤지지 않는, 커다란 저택.
─바로, 스즈카의 집인 츠키무라 저택이었다.
"자자, 빨리 들어오기나 하라니까."
아리사가 엑스의 손을 잡아끌자, 엑스는 그대로 끌려들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즈카와 나노하가 엑스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엑스 씨."
"… 저기, 이건…"
"아, 제가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지난번엔 아리사의 집이었으니까 이번엔 저희 집이 좋지 않을까 해서. 여기라면 왠만큼 시끄럽게 놀아도 문제없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까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자신은 왜 지금 여기에 와있는걸까.
영문을 모르겠다. 무언가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을 생각하면서도 엑스는 아리사와 스즈카에 의해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아리사. 나 오늘은… 좀…"
"기각."
"뭐?!"
엑스가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고 데리고 들어간다.
─이 녀석에게는, 이 정도로 강압적인 게 좋다. 아니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려고 들테니까.
아리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츠키무라 저택의 현관문이 열리면서, 메이드 차림을 한 여성─ 노엘 K 에어리히카이트가 걸어나왔다.
"연락은 미리 받았습니다. 아리사 아가씨, 나노하 양, 그리고 손님 분. 어서 오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만, 엑스는 그녀를 보고 잠시동안 걸음을 멈췄다.
"……"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 아니오, 아무것도."
엑스는 고개를 젓고, 세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노엘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파린과 함께, 담벼락을 손본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은 자기 소개부터 할까나. 제가 이 저택의 주인 츠키무라 시노부라고 합니다만 일단 딱딱한 건 별로 안좋아하고, 스즈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 편하게 있어, 편하게."
스즈카를 그대로 성장시킨 것 같은 이 소녀─그래도 외형은 엑스 쪽이 어려보이지만─는 엑스를 보자마자 좀 지나치게 프렌들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걸어왔다. 실제 차림도 이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게 T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고.
그녀의 이름은 츠키무라 시노부. 나노하의 오빠인 타카마치 쿄우야의 연인인 동시에, 스즈카의 언니였다.
"…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까놓고 묻는 건데, 우리 스즈카랑은 무슨 관계?"
"무, 언니?!"
… 정말로 대놓고 물어온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노부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으면 기력이 빠져서 반격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스즈카는 얼굴을 빨갛게 하고는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뒤를 이어 들어온 노엘이 그녀를 보고는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시노부 아가씨. 손님을 그냥 이렇게 세워두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엇보다 쿄우야 님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응? 아, 그렇지. 준비는 다 해뒀으니까, 저쪽으로 가서 천천히 식사하면서 이야기할까? 아주 천천히 말야."
사람의 미소란 이토록 공포스러울 수 있었던 것인가. 한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자신에게 거부권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이미 한 사람의 청년이 자리에 앉아있었고, 또 한 사람의 메이드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아, 어서 오세요! 식사 준비는 다 됐습니다!"
"아니, 저는…"
"자자, 여기에 앉아주세요."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반 강제로 착석.
엑스의 왼쪽 옆자리엔 스즈카가, 반대쪽 옆에는 아리사가 착석한다. 맨 윗자리이자 청년의 옆 자리에는 시노부가 앉고, 나노하는 청년의 반대쪽 옆. 이렇게 총 3명씩 서로가 마주보는 형태로 앉게 되었다. 노엘과 또 한 사람의 메이드는 양쪽 옆에서 대기.
맨 윗자리에 앉아있던 시노부가 입을 열었다.
"알고 온 사람도 있고 모르고 끌려온 아이도 있는 것 같지만,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이건 그냥 단순히 모여서 점심 먹는 것 뿐이니까. 뭐, 스즈카가 갑자기 이런 일을 부탁해왔을 땐 놀랐지만 지금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뭣보다 재밌을 거 같고."
─그녀가 자신을 직시하며 웃어보인 것은 기분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소개는 아까 했고… 거~기. 스즈카의 보이 프렌드는─"
"아니라니까!!"
"… 네, 네. 스즈카의 손님은 우리들에 대해서 모를테니까,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 소개 부탁해."
"타카마치 쿄우야. 여기 있는 이 녀석의 오빠야. 동생에게선 한두번 이야기를 들었어."
"이 저택의 메이드로 일하고 있는 노엘 K 에어리히카이트라고 합니다. 노엘이라고 불러주세요."
"동생이자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파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받고 나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엑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엑스입니다. 동생분들께는 이런저런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 엑스?"
시노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쿄우야나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약간이나마 굳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 이건 또, 뭔가 사정이 있나본데.'
보통 아들 이름을 알파벳 한글자로 짓진 않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시노부였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뭐, 괜찮아. 오늘은 그런 거 아무 상관없이 식사하자고 이 자리를 마련한 거니까, 긴장풀고 다들 먹으면서 이야기해."
시노부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먼저 손을 움직였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시노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엑스 군. 아까도 물었던 거지만, 스즈카랑은 어떻게 알게 된거야?"
"… 정확히는 여기 있는 버닝스… 아리사와 먼저 만났고, 그녀를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이 도시에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리사와 동생 분께는 여러가지로 안내를 많이 받았고요."
"흐음… 그것 뿐?"
"……?"
엑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노부는 짧게 쳇, 하고 혀를 찼다. 역시 이 정도로 뚫릴 가드는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질문해봐도 될까?"
"네, 얼마든지."
"내 동생하고는 어떻게 만난거지?"
마도사 둘이서 마법대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끼어들어가 같이 싸운 걸로 알게 됐습니다,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지금 나노하의 표정만 봐도, 쿄우야가 '마법'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 정돈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만, 동생분께서 트러블에 말려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번, 그 일과 관련해서 만나긴 했습니다만."
쿄우야가 자신을 돌아보자 나노하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쿄우야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럼 다시 이쪽 질문. 해도 돼?"
시노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엑스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시노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은 어떤 사람? 아니, 이 질문은 조금 잘못됐으려나."
그녀의 얼굴에는, 확실히 '적의'라고 할만한 것이 깃들어있었으니까.
"당신은, 어떤 '존재'야?"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