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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착륙(희곡 모음)


분신


인물

왕자
거지

국무대신
행정대신
시종 1,2,3
주치의

막이 올라가고 배우들이 등장한다. 무대는 성 내부, 복도이다. 화려하지 않고 딱딱한 느낌이 드는 회색 벽과 단촐한 느낌을 주는 초 몇 자루가 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세 시종이 등장한다. 한 명은 순찰일지를, 다른 두 명은 등불을 들고 있다. 걷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시종 1 요즘 왕자님이 이상해진 것 같아. 병을 앓은 후 사람이 변하셨어.
시종 2 (성호를 긋는다)신이여, 왕자를 보호하소서! 왕자님의 건강이 아직 회복하지 않은 탓이야. 불쌍한 왕자님. 주치의도 왕자님을 고치긴 힘들 것 같다고 실 토했잖아. 병이 나았을 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었지. 시간이 지나 면 나아지실 거야.
시종 3 맞아. 나아지실 거야.
시종 1 넌 매일 호응만 하지 말고 네 의견을 좀 말해 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다) 매일 맞장구만 치지 말고.
시종 3 나도 왕자님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시종 2 그만하고 가자. 으휴. 기대한 게 잘못이지.
시종 3 ​(​어​리​둥​절​하​게​)​내​가​ 틀린 말이라도 한 거야?

시종들이 지나가자 장소가 바뀐다. 화려한 의자가 있는 어전이다. 의자에는 학자 타입의 왕이 검소한 옷을 입고 왕관을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다. 손끝으로 의자를 톡톡 두들기고 이마를 손으로 살짝 짚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왕자가 도착하여 왕 앞에 무릎을 꿇는다. 결벽증을 의심할 정도로 온통 흰 색으로 차려입었다. 얼굴이 빨갛고 비틀거리며 걷는 게 아직 완쾌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왕자 아바마마. 문안드립니다.
왕 내 앞에선 격식 차릴 것 없다. 게다가 너도 아직 덜 낫지 않았느냐. 일어나 내 옆에 와 앉아라. (왕자가 앉자) 네가 보기에 네 병은 얼마나 나은 듯 싶 으냐?
왕자 전 완전히 나았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말한다) 대체 누가 절 병자라 하는 겁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망할 놈의 주치의 때문이겠죠? 보십시오! 전 멀쩡합니다!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방을 한 바퀴 돈다) 아바마마도 그 런 자에게 속아넘어가면 안 됩니다.
왕 내 아들아. 아무래도 넌 변한 것 같구나. 예전의 너는 좀 더 온순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단다.
왕자 (흠칫한다) 아닙니다, 아버님. 전 그대로입니다. 의심되시면 주치의를 보내 확인해 보십시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왕자는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왕은 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왕자의 방은 순백의 침대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병실같은 느낌을 준다. 방에 도착한 왕자는 문을 닫은 후 씩씩대며 팔을 마구 휘저어 사물을 어지럽힌다.

왕자 제길!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녀석처럼은 안 되는 건가! 위험해…… 이러다 들 키기라도 한다면! 하! 아바마마란 작자는 당장 내 목을 치라 명하겠지! 누가 그렇게 둘 줄 알고?
시종 1 왕자님, 주치의가 왔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왕자 (깜짝 놀라 숨을 고른 후) 들어오라고 해.

주치의가 들어온다. 어지럽혀진 방 안을 둘러본 후 시종을 불러 정리하라고 한다. 왕자는 주치의가 이유를 물어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에 띄게 안도한다. 시종이 정리를 끝내고 나가며 문을 닫는다.

주치의 그럼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최근 열이 갑자기 심해지시거나 구역질이 났던 경우가 있습니까?
왕자 농담도 잘 하시는군. 나는 건강 그 자체라오.
주치의 손발이 떨리거나 몇십 초 간 의식을 잃었던 적은?
왕자 술을 마셔도 항상 맨정신을 유지하는데, 하물며 멀쩡할 때야 말할 필요 있겠 소?
주치의 좋습니다. 제 생각이 틀린 것 같군요. 증상이 없으니 더 진료할 필요도 없겠 군요. 하지만 나으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몸에 무리를 주는 행위는 삼가 주 십시오.
왕자 명심하겠소.

주치의가 나간다.

왕자 제까짓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알 게 뭔가! 흥! 이걸로 시간을 벌었군!

한편 주치의는 문 앞에 대기하던 시종을 부른다.

주치의 자네, 이리 와 보게. 최근 왕자님이 발작을 일으키거나 횡설수설한 적이 없나?
시종 1 말도 마십시오.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은 방안을 어지럽히거나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하십니다. 들어가려고 하면 들어오지 말라고 고함치셔서 별 수 없 이 왕자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만 저희가 방을 정리합니다. 아까 보셨죠?

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퇴장한다.
왕자는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다 시종에게 국무대신을 부를 것을 지시한다. 시종은 밖으로 나갔다가 귀족적 옷차림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국무대신을 데려온다. 국무대신은 점잔을 빼며 안으로 들어간다.

국무대신 부르셨습니까.
왕자 음.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조사해줬으면 하는 게 있소.
국무대신 왕자님의 부탁이라면야 당연히 수행해야지요. 그런데 무슨?
왕자 당신은 이 나라의 거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겠지요?
국무대신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일은 국정 전반에 관한 것으로, 다른 나라와의 외교나 우리 귀족들이 쓰는 물품의 수 입 ․ 수출, 국방 등의 굵직한 것들을 떠맡고 있습니다. 그런 더럽고 천한 무 리의 수를 파악하고 있을 리 없지요. 실례지만 이건 행정대신 쪽이 더 적임 이라 생각됩니다.
왕자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나와 함께 이 사회의 쓰레기들 을 청소해 보지 않겠소?
국무대신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왕자 얼마 후면 난 왕이 됩니다. 아버지는 고령이시고, 날 섭정으로 삼는 게 바람 직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요. 그런데 앞으로 내가 이끌어갈 영광스러운 나라에 한 줌의 쓰레기가 깔려 있단 말이오. 대신도 아실 게요. 새 집으로 이사를 갈 땐 그 집에 있던 전주인의 흔적을 없애고 말끔히 청소를 하지 않 소? (대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과 마찬가지라오. 행정대신은 성격이 너 무 무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반대한 바 있소. 그러니 국정대신이 철저하게 파악하여 어전회의 때 발언해 주시오. 그럼 내가 뒤를 밀어 드리리다. (대신 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생각대로 일이 처리되면 당신의 앞길은 지금보다도 더욱 탄탄대로일 게요.
국무대신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저와 왕자님은 잘 맞는 것 같군요. 그런 떨 거지들이 청소되는 건 이 사회가 아직 충분한 정화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도 될 테니까요.
왕자 잘 부탁드리겠소.

국무대신이 나가고 무대 암전 후 장소가 어전으로 바뀐다. 왕은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고, 뒤로는 시종들이, 앞에는 국무대신과 행정대신이 보고서를 들고 서 있다. 귀족적인 국무대신에 비해 행정대신은 소심하고 평범해 보인다. 왕자는 어전 오른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다.

왕 보고를 시작하시오.
국무대신 국내의 수출은 전년도 대비 2% 증가, 수입은 5% 증가했습니다. 저희 귀족 들의 일상용품의 수입이 많아졌는데, 이는 폐하의 높으신 은덕으로 귀족들 이 살 만한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행정대신 결국 사치품이 다량으로 수입되었다는 얘기입니까?
국무대신 말조심하시오. 평민 출신인 당신이 보기에나 그렇지, 그건 엄연한 일상용 품이오. 저마다 생활의 품격이란 게 있다는 점을 무시하지 마시오.
왕 그 문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시오. 다음은 행정대신.
행정대신 최근 세금 중 담배와 의료보험의 인상이 있는데, 이를 철회해주시 길 청원하는 바입니다. 모든 세금이 똑같을 순 없습니다. 서민들의 세금은 저렴하게, 귀족들의 세금은 높게 책정하여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저 두 가지의 인상으로 민심이 소란스러워졌고, 신문에서도 연일 이 사실을 보도 하고 있습니다.
국무대신 (격분한다) 귀족이 무슨 봉인 줄 아시오? 지금 발언 철회하시오!
행정대신 실례. 저는 각하께서 말씀하신 품격의 차이란 걸 적용했을 뿐입니다.
왕 그 문제는 다음 회의 때까지 생각해 보겠소. 그보다 국무대신이 할 말이 있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오?

국무대신은 발언하기에 앞서 왕자를 흘끔 쳐다본다. 왕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국무대신 제 조사에 따르면 최근 거지의 비율이 무서울 정도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전체 인구의 0.04%였던 것이 작년엔 0.1%까지 늘어났습니 다. 그래서 대책을 생각해 봤습니다. (왕에게 보고서를 내민다) 거기에 있 는 제 기획서를 살펴주십시오.
왕 확실히 심각한 일이긴 하구먼. 요즘 불경기다 보니 늘어난 게 이해는 되 지만, 본격적인 대책도 슬슬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어디 보자. 거지들을 수용소에 모아 격리시킨 후 약간의 지원금을 조건으로 다른 나라로 강제 출국시킨다…… 이건 좀 과격한 방식 아니오?
국무대신 아닙니다. 국내의 실업상태도 증가한 상태에서 이들에게까지 일자리를 창 출하긴 힘듭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싹 정리를 해 버린 후, 평범한 서민 실업자를 대상으로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입니다.
행정대신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거지란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고, 서민이란 기준 은 또 누가 정하는 겁니까? 평범한 사람도, 심지어 귀족도 거지가 될 가 능성이 충분하고, 그 반대 또한 충분합니다!
국무대신 현재를 기준으로, 일정한 주거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는 모두 거지로 잡 았소. 그리고 말조심하시지. 귀족과 평민, 거지란 하늘이 내려준 직분이 오. 부침개 뒤집듯 바뀌는 게 아니란 말이오.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 성일 뿐이오.
왕 일리 있는 말이군. 행정대신의 지금 발언에는 문제가 있소. 대신의 발언대 로라면 왕족이란 것도 결코 영구불변한 존재는 아니겠군.
행정대신 (몸을 떨며)폐하. 전 결코 그런 의도로 발언한 게 아닙니다.
왕자 그렇다면 왕실을 모독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시오. 아바마마, 저도 국무대 신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는 바입니다. 거지들을 죽이자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땅에서 새출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기보다 다른 곳 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게다가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나라가 얼마나 깨끗해질까요? 전염병을 옮기거나 행인들을 위협하거나 동정심을 부추겨 구걸을 일삼는 무리들을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을 때, 비로소 이 나라는 살 만한 곳이 될 겁니다.
행정대신 왕자님! 지금 말씀을 철회해 주십시오! 왕자님이 알고 있는 부분만으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주십시오. 거지란 사회의 약자일 뿐 치워야 하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 지배계급은 그들을 일으켜 세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무대신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군. 그래서 그들에게 새출발할 기회를 준다지 않소.
행정대신 그 얘기가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왕자 시끄럽소! 그래서 행정대신은 반대하겠다는 거요?
행정대신 예. 전 반대합니다.
국무대신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친척 중에 거지라도 있어서 그러는 거요? 하하!
행정대신 뭐라고!

행정대신이 격분하여 국무대신에게 달려든다. 국무대신은 주먹을 슬쩍 피한 뒤 그의 얼굴을 후려친다. 행정대신이 다시 달려들려 할 때, 왕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시종들이 달려나와 뜯어말린다.

국무대신 폐하! 보셨습니까? 신성한 어전에서 전 얻어맞을 뻔 했습니다!
왕 맞은 건 행정대신이지 않소.
국무대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먼저 때리려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왕 이대론 얘기가 진행되지 않겠군. 시종들은 행정대신을 모셔라.
시종 1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행정대신의 양팔을 붙잡고 끌고 나간다. 그는 국무대신을 노려보며 퇴장한다. 그러나 국무대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자 이제 좀 얘기가 진행되겠군요. 아바마마, 부디 제 정책을 들어 주십시오.
왕 네 정책이라고?
왕자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아닙니다. 단지 전 국무대신과 의견이 맞을 뿐 입니다.
왕 흐음, 어쩐다……
국무대신 폐하. 조금 방향을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극빈자들은 당연히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뭉쳐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역사적 으로 수없이 많았고, 그 때문에 나라가 멸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예방주사를 맞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적절한 예방조치로 이 나라의 번영을 유지해야 합니 다.
왕자 저도 간청드립니다.
왕 좋소. 그 정책을 따르겠소. 대신은 가까운 시일 내로 구체적인 계획을 짜 오시오. 그리고 아들아. 조만간 내 너를 섭정으로 임명할 것이다. 네가 맡는 첫 일은 이것이 될 것이다. 훌륭히 처리해 네 능력을 보여 다오.

밖에서 시종들이 엿듣다 한숨을 쉰다.

시종 1 저 재수없는 작자가 일을 저질렀구먼. 행정대신 님이 땅을 치겠는걸.
시종 2 이제는 신께서 거지들을 보호하셔야겠군. (성호를 긋는다)
시종 1 그런데 이상해. 왕자님이 어째서 저런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까? 역시 병이 낫지 않았나?
시종 2 잘 모르겠군. 아무튼 걱정이야. 거지들이 없어지면 내가 선행을 베풀 존 재들이 그만큼 사라지는 걸.
시종 1 (질린 듯) 자네는 그렇게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가면 뭘 하고 싶나?
시종 2 글쎄, 왕처럼 떵떵거리고 살았으면 좋겠군.
시종 3 천국에 가면 왕이 되는 거야? 대단하군!

시종들이 퇴장한다. 암전 후 왕자의 방. 왕자와 국무대신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왕자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소?
국무대신 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섭정 폐하. 아직 수용소로 잡혀오지 않 은 거지들도 많습니다. 작업이 끝나봐야 알 수 있습니다.
왕자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나 지났소. 아직 섭정이기 때문에 나서서 처리 할 수 없는 일이오. 어서 서두르시오.
국무대신 예. 그런데 궁금하군요. 왕자님처럼 고귀하신 신분이 어쩌다 그런 천한 존재와 접촉하게 되었습니까?
왕자 소, 소문을 접했을 뿐이오. (손짓으로 문을 가리킨다) 이만 나가주시오. 난 잠시 쉬었다가 어전에 나가겠소.

국무대신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나간다. 왕자는 머리를 감싸쥐며 중얼거린다. 섬뜩한 음악이 흐른다.

왕자 왕자를 죽여야 해. 그 녀석을 죽이지 못하면 내게 미래란 없어!

암전 후 회의장. 왕의 자리에 왕자가 앉아 있다. 그 뒤로 시종들이 시립해 있고, 앞에는 국무대신과 행정대신이 있다. 그들의 앞에 초라한 차림의 거지가 묶인 채 엎드려 있다.

왕자 재판을 시작하겠다. 저 자의 죄는 무엇인가? 어째서 수용소로 가지 않 고 여기에 있는 건가?
행정대신 왕실모독죄입니다.
왕자 거지의 몸으로 어떻게 왕실을 모독했나? 왕가를 비웃기라도 한 건가?
행정대신 그보다 심합니다. 수용소로 끌려온 후부터 자신이 왕자라고 떠벌리고 다 니며 자신의 패거리를 모았습니다. 카리스마가 있어 수많은 자들이 그 에게 동조했고, 반란의 조짐마저 보여 급히 체포해 압송하였습니다. 그때 병사들이 심하게 구타했는데, 그렇게 갇힌 다음에도 계속 그 주 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죄인은 고개를 들어라.

거지가 고개를 든다. 순간 무대의 사람들 모두 경악한다. 맞아서 부은 얼굴이지만 왕자와 매우 닮은 모습이다. 시종2가 성호를 그으며 ‘신이시여!’를 외치고, 시종 3은 ‘왕자님!’이라 탄성을 발하다 시종 1에게 옆구리를 얻어맞는다. 왕자는 부들부들 떨며 당장에라도 옥좌에서 뛰쳐나갈 것처럼 보인다. 거지는 왕자를 보더니 흉측하게 웃는다.

행정대신 실례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처럼 얼굴이 너무 닮아 왕자님께도 보여드리 려 이 자리에 세웠습니다. (거지를 보며) 어디, 진짜 앞에서도 한번 똑같 은 소리를 해 봐라. 얼굴이 닮은 거 하나만 믿고, 이런 결말은 생각하지 않은 거냐?

거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왕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죄인답지 않은 그 기세에 눌린 행정대신이 뒤로 물러난다.

거지 (비꼬는 투로) 이거 왕, 자, 님, 아니십니까. 출세하셨네요. 야아~ 하지만 그만 자리를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 연극은 질렸거든요. 게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거지들을 수용소로 처넣겠다는 발상도 왠지 괘씸하고.
왕자 무, 무슨 소리냐! 이놈! 무엄하다!
국무대신 시종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 어서 이놈을 끌어내라! 더 심문할 필요도 없 는 녀석이다!
거지 (시종들이 다가오자 버럭 호통친다) 네 이놈들!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거냐! 어서 이 밧줄을 풀어라! 그리고 네 녀석! 연 극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어서 옥좌에서 내려와라!

거지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 시종들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왕자와 거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왕자는 거지에게 공포를 느끼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들바들 떤다. 거지가 묶인 채 왕자에게 다가간다.

거지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이렇게 얻어맞은 건 이 안에 들어오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이니 네게 벌을 주지는 않겠다. 하지만 네 녀석이 교대에 끝까지 불응하겠다면 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
왕자 히, 히익! 아아아!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친다)다, 다가오지 마!
시종 1 왕자님, 설마 진짜?
시종 2 우리는 끼어들면 안 되는 분위기인걸. 정말 우리도 헷갈려 버리는데.
시종 1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폐하를 불러야겠어! 네가 갔다와!
시종 3 하지만 폐하는 저기 계시는데?
시종 1 이런 얼간이! 섭정 폐하의 아버님! 선왕 폐하를 모셔오라고!

시종 3이 급히 뛰어 사라진다. 국무대신과 행정대신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국무대신 아냐, 그럴 리 없어! 너같은 미천한 녀석이 여기서까지 왕자님을 사칭하 다니! 네 녀석은 사형감이다!
거지 (그를 차갑게 바라본다) 동태 눈깔 같으니라고.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를 필요로 할 정도로 인재가 모자란 건 아니다. 당신은 오늘 내로 해 임이다. (시선을 왕자 쪽으로 돌린다) 하지만 일단 저 녀석부터.
왕자 다가오지 마라! 시종들! 저 자를 막아라!

시종 1과 2는 내키지 않은 듯 왕자와 거지 사이에 섰지만 움찔거리기만 할 뿐 어느 쪽의 말도 듣지 않는다. 거지는 이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한다. 이때 행정대신이 소리친다.

행정대신 당신이 정말 왕자란 말이오? 그렇다면 증거를 대 보시오! 얼굴이 닮았 다는 것 말고!
거지 무엇을 원하는 건가. 물적 증거? 그런 건 없다. 저 녀석과 신분을 교환 하면서, 잃어버리면 곤란한 것들은 모두 빼 두었다. 하지만 내겐 내 몸 에 밴 기품과 명예, 그리고 수많은 기억들이 있다. 이것으로 불충분한 가? 명예가 돈이나 권력보다 중요하다고 날 가르친 게 당신 아니었던 가?
행정대신 하! 그럼 당신이 궁전에 몰래 숨어든 거지와 역할바꾸기 놀이라도 했다 는 말이오? 그럼 저기 있는 분은 비천한 거지라고?
거지 (흡족해한다)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군!
국무대신 소설을 쓰는군, 미친 녀석! (다급하게)시종! 경비병! 어서 이 녀석을 끌 어내라!

거지는 계속 줄을 풀라고 호통친다. 시종 1이 쭈뼛거리며 줄을 풀기 위해 그에게 다가간다. 왕자는 거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틈에 허리에 찬 단검을 빼든다.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돌진하는 왕자를 아무도 막지 못한다. 거지의 심장에 칼이 박힌다.

거지 이놈이! 감히! 네놈이……! (쓰러진다)
왕자 (숨을 몰아쉬며) 나는 왕자다! 왕자라고! 네 따위 놈에게 모독을 당할 이 유는 없다! (검을 빼고 다시 찌른다) 네까짓 놈이 이제 와서……! (계속 찌른다. 거지 사망)
행정대신 그, 그만 하십시오! (둘을 번갈아 보며) 왕자님! 어째서!
시종 1 큰일났군, 큰일났어! 왕자님이 살인을 저질렀다!
시종 2 살인이다! 살인이야!
왕자 (시종들을 노려보며) 닥쳐라! 난 지금 정당한 법 집행을 한 것이다! 분명 왕실 모독죄는 사형이렷다! 하하! 내가 재판장이며 심판자다! 나의 의지 는 운명마저 바꿀 수 있다! 나는……

왕자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져 발작한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간혹 팔다리를 움찔거린다. 시종들이 왕자에게 달려가 응급처치를 시도한다. 이때 왕이 시종 3과 함께 등장한다. 왕이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르짖으며 암전된다.
다시 어전. 왕이 옥좌에 앉아 고뇌하고 있다. 그새 십년은 더 늙어 보인다. 주치의가 조용히 들어와 왕 앞에 선다.

주치의 왕자님의 상태는 위중합니다. 역시 열병은 나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데도 지나치게 흥분을 하셔서 심각한 발작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마음 의 준비를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왕 (한참 침묵하다) 부검 결과는 어찌 되었소?
주치의 그게…… 폐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왕 뭐라고! (벌떡 일어난다)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 게요?
주치의 알 수 없습니다. 시체를 안치소에 넣고 문을 걸어잠근 후 두 명의 병사가 감시했는데, 제가 열고 들어가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기 한 사실은, 시체가 흘린 핏자국 같은 것까지 함께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그 거지가 있었던 흔적 자체가 소멸되었습니다.
왕 허허. (맥없이 웃는다) 그럼 우리가 상대하고 왕자가 죽인 그 거지는 허깨비 라도 된단 말이오?
주치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합니다. 시체가 실려나갈 때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신체조건과 골격, 외양 등 모든 점에서 왕자님과 너무도 흡사하 였습니다. 제 의학적 소견으로는 그 둘이……
왕 거기까지 결론을 내리려는 건 당신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오. 물러가시오.

주치의는 왕에게 목례하고 돌아간다.
이어서 시종 1,2,3이 등장하여 왕 앞에 선다.

왕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거짓을 말하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시종 일동 하늘에 맹세코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왕 묻겠다. 지난번 불미스러운 사건 때 거지는 심상치 않은 발언을 했다. 그 리고 그의 외양이 왕자와 놀랍도록 닮은 것도 사실이다. 오랫동안 왕자의 곁에 있어온 너희들이라면 알 것이다. 행여라도, 거지의 말이 사실일 가능 성이 있느냐?
시종 1 불가능합니다. 저희는 항상 3교대로 왕자님 곁에 있었습니다. 왕자님은 외 출을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방에 계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저흰 그 앞 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님의 방문객이 누구누구였는지 잘 알고 있습 니다. 저희의 눈을 속이려면 정말 한순간에 바꿔치기했어야 할 테지만, 왕 자님께서는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시종 2 게다가, 애당초 궁전에 거지가 침입 가능할 리 없습니다. 제 생각엔 왕자 님과 용모가 비슷한 거지가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거나 해서 정신이 돌아버 린 것 같습니다.
왕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네게 상을 내리겠다.
시종 3 저도 거지가 돌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나서 왕의 눈치를 보지만 아무 대답 없자 낙담한다)
왕 그렇다면 너희는 바꿔치기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지?
시종 일동 그렇습니다.
왕 알았다. 물러가라.

시종들이 물러가고 국무대신과 행정대신이 들어온다.

국무대신 폐하. 먼저 제 결백을 밝히는 바입니다. 제 정책은 맹세코 왕자님과는 무 관했습니다. 한 점 사심없이 나라를 위했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 니다.
행정대신 (국무대신을 흘겨본다) 마치 박쥐 같군. 어느 쪽이 왕자님이든 자기는 발 을 빼겠다는 말 아니십니까?
국무대신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내 충성을 몰라주다니 이거 섭섭하군. 앞으로 잘 지 내 봅시다. (손을 내밀지만 무시당한다. 머쓱해져 손을 거둔다)
행정대신 폐하. 주치의의 보고는 어땠습니까? 역시 동일인물이라고 합니까?
왕 그건 짐작일 뿐이오. 게다가 시체가 사라져 확인하기 어렵다 하오.
행정대신 그렇다면 제 짐작이 맞을 수도 있겠군요! (조심스럽게) 폐하께서는 혹 도플갱어란 걸 들어보셨습니까?
왕 (무기력하게) 잘 모르겠소.
행정대신 유명한 전설입니다. 도플갱어에 대해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아무것도 없습 니다. 믿을 수 없지만, 한 사람과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 가 가끔 있다고 합니다. 모습은 똑같지만 자신의 인격과 정반대이거나, 혹 은 자신이 꿈꾸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그 모습을 본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 도플갱어입니 다.
국무대신 너무 막연한 소리군. 그건 전설일 뿐이잖소.
행정대신 이건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거지는 아무리 봐도 왕자님과 지 나치게 닮았습니다. 폐하가 보셨다 할지라도 구별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국무대신 그럼, 그 도플갱어란 녀석이 나타나는 이유를 알고 있소?
행정대신 규명된 게 없다고 말했잖습니까.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라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거지를 볼 수 있었으니 우리 모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야 성립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왕 그렇다면 왕자는 죽어야 한단 말이오? (옥좌에서 일어난다) 듣기 싫소! 둘 다 물러가시오!

두 대신은 우물쭈물하다 왕이 한 번 더 호통을 친 후에야 물러간다. 왕은 옥좌에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왕 어쩌다 내게 이런 불행이 생겼을꼬. 이게 내 업보인가? 무능한 왕에게 내리 는 하늘의 심판이던가? 그렇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다! (두 팔을 쳐든다) 신 이여! 한 아비로서 소원합니다. 제 아들을 구해주소서!

조명이 왕을 비추며 서서히 암전한다.
장소는 다시 왕자의 방. 책상 등이 모두 치워지고 흰 침대 하나만 놓여 있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왕자의 모습이 왜소해 보인다. 흐릿하게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왕자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기 시작한다. 음산한 음악이 흐른다.

왕자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야 한다는 건 싫다! 아, 하지만 어째서 벌써 천국에 온 기분이 드는 걸까? 내 몸은 지금도 볼썽 사납게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데, 내 정신은 고결한 이상에 한층 근접해져 있 다니. 그렇지만 이 환상에 몸을 맡기고 승천할 순 없지. 이제야 왕자를 죽이 고 공고히 왕자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시련만 극복하면 난 이 나라의 왕 이 된다!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거지가 재등장한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게 눈에 띈다.

거지 네가 보는 것은 이상이 아니야. 열병의 재발로 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망상일 뿐이지.
왕자 넌 유령인가? 물러가라! 살아서는 왕자였을지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한낱 유령에 지나지 않아! 현실로 돌아오려 하지 마라!
거지 난 유령이 아니다.
왕자 흥! 그럼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비천한 거지였던 나와 잠시의 호기 심으로 자리를 바꾸고, 그 거지의 흉계에 목숨을 잃은 고귀한 왕자님? 하,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건 생전의 직함일 뿐. 이제 네가 갈 곳은 저승밖에 없어.
거지 불쌍한 자.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군. 그렇다면 기억을 떠올려 봐. 네가 거지였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겠어?
왕자 이젠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네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려 주지. 내가 너를 죽이기 전, 국무대신과 공모하기 전, 주치의와 왕의 검사를 받기 전, 열병을 핑계로 앓아눕기 전, 너와 내가 바꾸기…… ​전​…​…​(​혼​란​스​러​워​한​다​)​ 어, 어째 서 기억나지 않는 거지? 그 비참했던 날들이?
거지 그럴 테지. 애당초 넌……
왕자 어째서? 어째서 이런 게 기억나지? 어머니와 왕궁 정원을 산책하던 일, 검술 을 연마하던 일, 행정대신에게 강아지를 선물받은 일,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 하며 국상을 선포하던 아버지의 일. 난 분명 거지였을 텐데! (거지에게 외친 다) 네놈, 네놈의 농간이냐? 네 기억을 억지로 내게 주입시키는 것이냐? 대 답해! 넌 대체 무엇이냐, 이 ​괴​물​아​!​(​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거지 (고개를 젓는다) 내게 그런 능력은 없어. 난 분열된 자아를 먹고 성장한 괴물 일 뿐. 하지만 분열되었어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자아. 추하고 더러운 면과 영광스럽고 고귀한 면, 이 각각의 면이 정반대의 상대방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알겠어? (왕자에게 다가가며)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야. 네 권력을 향한 추악한 의지, 그리고 내 자리를 찾겠다는 내 명예에 대한 자부 심.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필연적으로 둘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두려워하게 돼.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됐지? (자신의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 을 한다) 어느 한쪽의 죽음.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붙여준 도플갱어란 현상이야. (자조적으로) 결국 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이름없는 괴 물일 뿐이지.
왕자 (다시 침대에 주저앉으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군.
거지 내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나도 몰라. 어느 순간부터 난 존재하고 있어. 사 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일부를 부정하며 살아가지. 난 너무 나약하다, 의지가 부족하다, 혹은 패기가 없다, 같은 것들을 고치거나 버리고 싶어해. 욕 망을 이루는 데 있어 불필요한 그런 감정이 무언가를 계기로 그 사람이 이르 고 싶어하는 완전한 이상과 분열되고, 그때 나는 반쪽밖에 되지 않는 불완전 한 인격을 가지고 탄생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반쪽이라면 결점을 완전히 제 거한 모습은 완전한 모습일까? 오히려 그야말로 진짜 괴물이야. 수많은 결점 을 극복한 모습과, 애당초 단 하나의 결점도 없는 모습은 결코 같을 수 없어. 그건 영원히 그 자리에 정체할 뿐,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어. 욕망만을 바라 보며 살지만, 영원히 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지.

거지가 침대로 다가온다. 왕자는 있는 힘을 다 해 일어난다. 허리에서 거지를 죽였던 검을 다시 꺼내든다. 거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거지 지금 그걸로 나를 찌른다 해도 아무 의미 없어. 지금의 난 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어. 죽은 존재를 다시 죽이는 건 불가능해.
왕자 그렇다 해도 나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널 밟고 다시 살아야 해. 그것이 생 명을 가진 자로서의 의무다. 소망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 채, 덧없이 죽을 순 없어!
거지 (슬픈 어조로) 내가 아까 말했지. 욕망만을 바라보고 사는 불쌍한 존재가 누 굴 가리키는 것 같아? 너일까, 아니면 나일까? (왕자는 격분하지만 말을 잇 지 못한다. 너, 너……! 정도가 고작이다.) 난 죽은 다음에야 모든 사실을 알 았어. 열병을 계기로 발작에 시달리다 내 자아의 반쪽을 괴물에게 먹히고, 정신을 차려보니 성 밖에 알몸으로 버려져 있었어. 난 어떻게든 돌아와야겠 다는 생각을 했고, 어렵게 돌아와 정당한 내 권리를 요구하다 네게 죽었지. 내가 죽으면서 내 반쪽의 자아도 함께 죽었어. 그렇다면, 살아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는 누구라고 생각해? (왕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왕자 너, 지금, 설마……!
거지 더 이상 왕자와 거지로 우리 둘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어. 그렇지, 도플갱어? (왕자에게 다가간다) 운명은 분열된 자아를 용납하지 않아. 언제나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죽이고, 자신 역시 사라지고 말지. 그래서 넌 언제까지나 탄생 과 소멸을 반복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이번의 차례는 이제 끝이야.
왕자 내가 괴물? 내가 괴물이라는 건가? 그랬군…… 그랬어! 하하하! 이제 알겠군! 왕자의 욕망, 왕이 되겠다는 결심만을 먹고 태어난 일그러진 괴물이 나란 말 이지!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른다) 그렇다면 난 네놈에게 먹힌다는 건가? 그 럴 수 없어. 하지만 널 죽이고 나서 줄곧 느꼈던 죽음과도 같은 공허와 상실 감이 나를 옭아맨다. 오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선 채로 몸이 굳는다) 다 시 환상이 보인다! 이것이 환상이든, 망상이든 아무래도 좋다. 날 데려가라!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외친다) 이 공허, 이 상 실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내 자신이 무로 돌아가도 좋으리라!

착란상태에 빠져 외치는 왕자를 향해 거지가 천천히 다가간다. 음악이 레퀴엠 풍으로 바뀐 가운데, 무대가 점차 어두워지며 관객의 눈에 둘이 실루엣으로 겹쳐지는 모습이 보인다. 조명이 다시 켜지자, 거지는 사라졌고 왕자의 그림자가 아까와 반대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게 눈에 띈다. 어두운 무대에서 왕자 하나만을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음악이 계속해서 흐르고, 왕자는 아까의 자세 그대로 계속 굳어 있다가 음악이 끝날 무렵 그대로 쓰러진다. 쓰러진 그를 비추다 무대가 서서히 암전된다. 막이 내려간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읽어보시면 나름 ​흥​미​있​을​.​.​.​.​지​도​?​
요새 본 연극들이 이런 분위기들이더군요.
앞서의 비상착륙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연극으로 만들기 쉬우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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