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시대는 마법과 검이 공존하는 중세 판타지이며, 이야기의 주 무대는 왕국과 마왕령이다. 왕국이 오랫동안 학정을 거듭해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리다, 그중 하나에게 어둠이 깃들어 마왕이 된다. 마왕은 마물을 소환해내 인간의 왕국을 공격하지만, 무작정 인간을 죽이기보다는 그 땅을 점령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이 때문에 전쟁이 수 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2대 마왕은 보다 전략적으로 행동해 예전보다 더 강한 세력을 구축한다. 그 때문에 전쟁은 십 수 년을 끌고 있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자가 용사의 무구를 입고 마왕을 기습해 이긴다.
소설 초반부에는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 과정 위주로, 중반부에는 마왕이란 이름에 가려졌던 인간의 추악한 현실을 서술하고, 말미에는 용사 부자의 노력으로 한결 나아진 현실을 그려 해피엔딩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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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엘미르(전대 용사):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마왕을 쳐부수기 위해 자원한 청년. 의협심이 강하고 사람들을 위하며 자신이 믿는 정의를 지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왕국의 마법검과 갑옷을 하사받고 동료들과 길을 떠난다. 왕국군이 마물을 막는 사이 마왕성을 기습해 마왕과 싸워 이기지만 마왕의 저주를 받는다. 저주의 정체를 모른 채 저주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는 걸 막기 위해 홀로 여행을 나서 자신이 구한 세상을 돌아보지만, 현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저주의 영향으로 마왕이 된다. 그러다 결국 마왕을 잡으러 온 자신의 아들에게 죽고, 자신의 혼을 마법검에 덧씌워 진실을 아들에게 전해준다. 이후 마법검과 자아가 합쳐져 공주와 재회한다.
엘시드(후대 용사): 전대 용사의 아들. 항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래서 성장한 후 아버지처럼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남긴 무구로 무장해 마왕을 물리쳤지만, 마왕이 검에 남긴 지식 덕분에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자아가 검에 남아 있어, 그의 조언을 토대로 훌륭한 왕이 된다.
조안: 공주. 전대 용사의 연인. 용사가 마지막으로 출격할 때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용사가 저주에 걸려 스스로 떠났다고 말해줘서 크게 상심하지만, 그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이를 달랜다. 훗날 아들이 엘미르의 혼이 깃든 마법검을 가져와 그와 재회하고, 이후 검을 차고 다니며 그와 밀린 대화를 나눈다.
기븐 왕: 공주의 아버지. 마왕과 국경이 닿아 있어 끝없이 전쟁을 벌이느라 지쳐 있다. 용사가 저주를 받고 돌아오자 그 저주가 자신의 딸에게 영향을 미치는 걸 두려워해 그가 떠나도록 설득한다. 손자 엘시드가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그에게 왕위를 넘겨 준다.
마왕: 세계의 어둠이 낳은 존재. 끊임없이 마물을 생산해낸다. 정신체에 가까운 존재로, 수탈받던 백성의 원한을 이용해 그 몸에 깃들었다. 용사에게 죽으면서 3년 안에 마왕이 되는 저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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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태양이 비춘 적이 없다고 알려진 마왕성. 왕국의 북쪽 끝, 험준한 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마왕성은 그간 단 한 번도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항상 구름이 끼어 있어 마족의 보금자리로 적격이었던 그곳에, 오늘 한 줄기의 태양빛이 비추고 있었다.
빛이 비추는 것은 피바다가 된 성 안이었다.
“크아악!”
마왕은 지금 막 자신의 심장을 파고든 검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호응하는 마물은 아무도 없었다. 성 안에 살아 숨쉬는 건 용사와 마왕 둘 뿐이었고, 이제 곧 하나로 줄어들 터였다.
“정말......길었다.”
용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왕국에 대대로 전해지는 자아가 있는 마법검과 성스러운 갑옷을 착용한 채 지금까지 수많은 마물을 베어 왔다. 마물에게 당한 가련한 병사들을 보며 울부짖기도 했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그를 위해 망설임없이 희생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마왕성의 방어가 가장 취약해지는 때가 지금이란 사실을 알기 위해 희생한 사람만 백 명을 넘어갈 정도였다.
이제 검을 빼고, 마왕이 무너지는 걸 보며 승리를 외치면 된다. 마왕이 무서운 것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물들이 주위에 저절로 생성된다는 데 있다. 즉 마왕은 마물들의 부모이므로 그가 사라지면 남은 마물도 속절없이 약해질 것이다. 마왕이 강림한 지 무려 오 년, 이제야 지상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였다. 마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용사여, 넌...... 이긴 게...... 아니다......”
“헛소리!”
용사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손이 용사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최후의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용사에게 저주와도 같았다. 아니,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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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녹초가 되어 한밤중에 왕도에 돌아왔다. 문지기는 그를 환영하며 기븐 왕에게 용사의 귀환을 알렸다. 마왕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왕과 귀족들은 급히 뛰어나왔다.
“정말 대단하오, 용사여! 당신이 해낼 줄 알았소!”
하급 기사의 자식에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길 수 없다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했던 대귀족이 활짝 웃으며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급히 뒤로 몸을 뺐다. 어리둥절해하는 대귀족을 향해 용사는 낮게 말했다.
“전...... 마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마왕은 그에게 ‘앞으로 3년 안에 넌......’이란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말은 끝맺지 못했지만, 그 희열에 찬 마지막 표정은 용사의 남은 수명이 앞으로 3년이라고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용사의 주위로 진공의 원이 생겨났다. 용사는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차분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기븐 왕은 난색을 표했다.
“자네의 고생 덕분에 우리는 평화를 되찾았네. 하지만 난감한 것도 사실이네. 사악한 마력을 지닌 마왕의 저주는 무엇보다 강력할 테니, 자네와 접촉한 사람이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겠지.”
노회한 왕은 용사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정한 처사였지만 용사는 왕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주가 자신과 닿는 사람에게 전염되거나 하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용사는 자신의 마지막 미련을 깔끔하게 떨쳐 내기 힘들었다.
“제가 떠나야 하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조안 공주에게 한 번만 키스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븐 왕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마왕을 물리치고 오면 용사에게 자신의 딸을 준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둘은 연인 사이였다. 하급 기사 출신이었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무예와 성실한 인품 때문에 공주는 그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경쟁자를 제치고 정식으로 용사라고 인정받자 공주는 사랑을 고백하고 그와 떨리는 입술을 맞댈 수 있었다. 처음엔 탐탁찮게 생각했던 왕도 용사의 명성이 높아지자 둘 사이를 묵인했다. 그 결과, 지금 조안 공주의 몸에는 용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매정한 것 같지만 이해해 주게. 차라리 자네가 말 없이 떠나는 편이 낫네. 자네를 눈앞에서 보면 그 아이는 반드시 자네를 따라가겠다고 할 테지.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용사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검을 성문 앞 비석에 꽂았다. 왕실에서 그에게 준, 자아가 있는 마법검이었다. 검은 체념한 듯 아무 말 없이 주인의 손을 떠났다. 이어서 그는 왕실에서 받은 성스러운 갑옷도 벗어 그 앞에 놓았다.
“모두의 몸을 지켰지만 제 몸을 지키지 못했고, 모두의 마음을 기쁘게 했지만 조안 님의 마음은 갈갈이 찢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전 용사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모두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은 급히 그에게 충분한 사례금을 주었다. 그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마치 모래주머니를 받은 듯 무심했다.
“이제 전 용사가 아니라 기사 엘미르로 돌아왔습니다.”
가슴에 맺힌 수많은 말을 애써 한 마디로 압축한 후, 그는 홀로 돌아섰다.
엘미르는 정처없이 걸었다.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었다. 아니, 왜 걸어야 하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잠시라도 멈췄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는 사흘 밤낮을 걸었다. 그러다 산골짜기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짚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초라한 침대와 거친 나무 테이블이 방의 전부였다. 그곳에 노파가 죽 한 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일어났으면 이거 들어요, 나으리.”
노파는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굽신거렸다. 그녀의 태도에 엘미르가 오히려 거북해졌다.
“이러지 마십시오.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한테 이렇게까지 인사하실 건 없습니다.”
“하지만 말이우...... 사실 나으리를 이리 옮긴 후 짐을 살펴보았지유. 이렇게나 부자이신데, 저 같은 것이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있겠수. 큰 보답은 바라지 않으니, 적선하는 셈치고 이 늙은 것에게 조금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수다.”
엘미르는 감동했다. 자기를 죽이고 돈을 빼앗거나, 돈만 훔쳐 달아날 수도 있는데 노파는 굳이 자신을 구해내고 정직하게 약간의 대가만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자루에서 돈을 한 움큼 쥐어 노파에게 건네주었다. 금화 한 줌을 받은 노파는 입을 벌리고 경악하다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돈, 이 베라먹을 돈이 세 달만 일찍 들어왔어도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가요?”
“그야 세금 때문이지유. 원래 이 집에는 나와 아들, 손자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밀린 세금을 낼 수가 없어서 둘 다 군에 끌려가 버렸수. 그리고 손자는 마왕군과 싸우다 전사했지. 뼛가루만 덜렁 돌아온 걸 돈이 없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이 산에 뿌린 게 다라오.”
손자 생각에 슬피 우는 노파를 보니 엘미르는 선뜻 자신이 마왕을 잡았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을 구했지만, 아직 세상은 완전히 평화로워진 게 아니었다. 이제 국가는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를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걷을 것이고, 마왕군의 잔당도 자연 소멸되기 직전까지 행패를 부릴 것이다. 대귀족은 모를, 아니 관심조차 없을 이런 사실을 엘미르는 새삼 곰씹어 보았다.
어쨌든 노파와 오래 접촉하는 건 그녀에게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 엘미르는 곧장 길을 나섰다. 그녀가 더러운 주머니에 금화를 넣고 목에 거는 걸 보자 이전보다 한결 기분이 진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구한 세상을 좀 더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일단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 허름한 여관에 묵으며 분위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신분을 숨긴 채였다.
그렇지만 그의 예상만큼 세상이 축제분위기로 바뀐 건 아니었다. 마왕이 죽고 위업을 달성한 용사가 모든 명예를 사양한 채 떠났다는 소식은 발빠르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 영주는 축제를 열었지만, 이는 시늉뿐이었다. 신 맥주 한 잔과 소시지빵 하나가 은사의 전부였다. 게다가 축제가 끝나자마자 축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구실로 특별세를 걷기까지 했다. ‘용사가 마왕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딴 세금을 내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란 농 섞인 푸념이 엘미르의 폐부를 따갑게 찔렀다. 이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골똘히 떠올려 보았지만, 지금까지 기사로 살아온 그가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울해하던 엘미르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마을 주변에 산적이 출몰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던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약한 사람을 구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다시 떠올리며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검과 방패를 구입한 그는 곧장 산적 소굴로 향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그는 눈먼 화살조차 맞지 않고 손쉽게 산적들을 척살했다. 마물이 인간을 죽이는 것도 혐오스러웠지만, 같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건 끔찍할 정도로 저주스러웠고, 그래서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산적 두목은 도망치지 않았다. 제법 지긋한 나이의 사내는 원망과 저주를 가득 담아 엘미르를 노려보았다.
“난 개새끼가 맞지만, 너도 개다. 왕의 개, 아니면 귀족의 개겠지. 어디 한번 개싸움 식으로 물어뜯어보자,”
“......난 개가 아니다.”
엘미르의 검이 가볍게 산적 두목의 검을 튕겨내고 그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그렇게 산적을 전멸시킨 엘미르는 산채를 뒤졌다. 여기에서 나온 것들은 최대한 주인을 찾아줄 생각이었다. 순진하게 영주에게 신고하면 영주가 몽땅 차지하리란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대로 놔 두는 게 나을 뻔했다. 두목의 품 안에서 낯익은 주머니가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 본 노파의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본 순간 엘미르는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달렸다. 저주의 영향인지 몸이 예전처럼 가볍진 않았지만,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노파가 살던 오두막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그의 무릎은 저절로 꺾였다. 노파의 집은 불에 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그 안에는 검게 탄 시체가 조용히 썩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항했는지, 시체는 칼로 무수히 베어진 흔적이 보였다.
깊은 산의 정적을 한 남자의 절규가 오래도록 찢어발겼다.
자신의 온정이 쓸데없는 화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 엘미르는 행동노선을 다시 짜기로 했다. 산적이나 마물이 있다고 알려진 곳을 일일이 찾아가 제거하고, 그 일대가 안전해진 게 확인되면 자신의 돈을 은밀히 풀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의적이나 의인 행세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마왕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해질 계기를 얻은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해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 공주와 행복하게 살며 이런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겠지, 라며 그는 자조했다. 하지만 공주와 그녀의,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 그가 만들어낸 밝은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다시 힘이 나곤 했다.
늘 단독행동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유명해졌다. 숙련된 기사 한 부대도 할 수 없는 일을 혼자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사람과 마물을 막론하고 시체만 남았기에, 음유시인들은 그를 ‘파멸의 사냥꾼’이라 부르며 두려움을 담아 노래했다. 정작 노래의 주인공은 자신을 향한 칭송이나 두려움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의 몸은 거듭되는 전투에 혹사되며 마모되어갔다.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휴식 없이 방랑하는 생활도 문제였다. 그래도 그는 전투로 얻은 돈과 갖고 있던 돈을 합해 고아원을 세우고 수도원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웃음이 돌아오면 멀찍이서 조용히 웃은 후 발길을 돌리곤 했다. 세간에는 파멸의 사냥꾼이 돈독에 올랐을 거란 추측만 무성했을 뿐, 그의 선행을 아는 자는 없었다. 이는 노파의 사건이 행여나 자신에게 저주가 옮아 벌어진 비극이 아닐까 하는 엘미르의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이제는 전성기의 반도 되지 않는 몸으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며, 지금의 삶은 마왕과 대결할 때보다 더욱 가혹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은 한 개인의 노력을 미약한 산들바람처럼 무력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법이다. 엘미르가 마왕과 대결한 지 삼 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라에 대기근이 닥쳐 왔다. 농사로 먹고 살던 대다수의 사람은 그나마 수확한 곡물을 세금으로 모조리 빼앗긴 후 유랑걸식으로 연명해 나갔다. 그에 따라 아직 2할 정도 남아 있던 엘미르의 돈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산적의 수는 늘었지만, 엘미르는 그들을 차마 칠 수 없었다. 어제까지 평화롭게 굶어죽어가던 사람이 오늘 무기를 들고 벌벌 떠는 모습은 도저히 벨 수 없었다. 그간 산적들의 명분을 그리 헤아리지 않았던 그로서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근을 해결해준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영주의 환대에 녹아 돌아가는 건 예사였다. 몇 차례 탄원서를 제출하던 엘미르는 결국 영주의 성으로 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오랜 고행으로 걸인처럼 변한 그의 모습은 과거 영광스러웠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젠 노인만큼이나 쇠약해진 그의 몸은 성까지 갔다 돌아오기도 힘들어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길바닥에 쓰러졌다. 수많은 걸인들은 자신들보다 초라한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다. 아니, 그 중 하나가 되돌아오더니 그를 안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뒤져 동전 몇 닢을 뺀 후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 얼굴을 엘미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첫 번째 고아원에서 행복하게 놀던 아이였다. 그의 공허한 눈에는 세상에 대한 어떤 희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세상을 위한 그의 모든 행보가 세상의 손으로 부정된 순간,
엘미르의 몸 안에서 꿈틀대던 마왕의 저주가 완전히 발현되었다.
-앞으로 3년 안에,
그의 몸이 어둠에 휩싸였다.어둠은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점점 불어났다. 그 어둠에 닿은 자는 순식간에 기력이 흡수되어 사망했다. 스멀스멀 손을 뻗는 사람들의 절규 속에서, 엘미르의 혼은 가장 어두운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넌 마왕이 될 것이다.
마왕의 토막난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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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부활했다!
처음 그런 소문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마왕을 물리치는 데 걸린 시간은 5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얻은 평화가 고작 3년이란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마왕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곧 잊혀졌다.
대기근이 물러가고 산 자는 그럭저럭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다. 늙은 왕은 공주가 낳은 손자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고, 그사이 대귀족들은 슬금슬금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몇몇 성급한 자들은 국력을 회복했으니 슬슬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라고 왕에게 바람을 넣기까지 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전공을 올릴 길이 마땅치 않으니, 새롭게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은 곧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왕은 부활했노라!
이제는 폐허가 된 땅, 마왕성에서 마왕 자신이 그렇게 선포했다.
십 년 간이나 세력을 축적한 마왕은 무서운 기세로 왕국을 침공했다. 지난번 마왕과는 달리, 이번의 마왕은 넓은 전략적 사고로 왕국군을 유린했다. 마왕은 삽시간에 과거의 영토를 되찾더니, 그 지역을 완전히 자신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무조건 죽이고 약탈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게 하면서 생산물을 적당히 가져가는 식이었다. 마왕이 생산하는 마물들은 인간 병사처럼 유지비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마왕령이 살기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왕국에서 유리걸식하던 백성들은 슬금슬금 마왕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왕국군은 입단속을 하고 탈주자의 목을 베는 등 강경책에 나섰지만, 이탈을 완전히 잠재울 순 없었다. 그렇게 수 년 간의 정전 아닌 정전이 지속되자, 왕국은 파탄이 날 지경이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기븐 왕은 대귀족들에게 병사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어째서 앞장서서 희생해야 하냐는 태도였다. 중앙군이 힘을 못 쓰는 이상, 자신의 군을 갖다 바친다 해도 병력만 낭비하는 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도 나라가 멸망하면 자신들이 무사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쾌히 병사를 내줄 만큼의 계기가 부족하다는 게 모두의 인식이었다.
그때 한 소년이 일갈했다.
“인간의 세상이 위기에 빠졌는데 어째서 경들은 이리 미적지근합니까! 경들이 인간이라면, 지금 당장 검을 뽑아들고 나서란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선두에 제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를 부끄럽게 한 주인공은 용사의 손자인 엘시드 왕자였다. 아직 소년이었지만 이미 왕국 내에서 당해낼 기사가 없을 만큼 빼어난 실력을 가진 엘시드였다. 아버지가 남긴 성스러운 갑옷과 마법검을 든 늠름한 모습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조안 공주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건 그녀로서도 가슴 아팠지만, 이 자리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대귀족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다. 동시에, 이는 지금 왕자를 따르지 않는 이는 왕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숙청되리란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오오!”
“용사의 재림이로다!”
용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소년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감동했다. 그리고 대귀족들도 별수없이 군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어차피 군대를 바쳐야 한다면, 모두가 함께 바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만드는 게 좋았다. 그래야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었다. 마왕군의 수는 이보다 몇 배가 더 많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걸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새로운 용사의 인상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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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갑옷을 입은 소년의 이마에는 땀과 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닦아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저것이 마왕성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암흑의 대지에 웅장하게 솟아 있는 마왕성을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던가. 수많은 전투 끝에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왕국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바로 별동대를 이용해 마왕을 직접 치는 작전이었다. 이는 과거에 전대 용사를 마왕에게 보내기 위해 썼던 전략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한 번 성공한 전략이었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왕국이 여러 방향으로 소규모 부대를 파병해 교란작전을 펼치자, 마왕은 각각의 병력에 맞서면서 별동대를 풀어 은밀히 움직이던 왕자의 부대를 찾아내려 했다. 게다가 마왕령의 백성들도 왕국의 편이 아니었다. 마물의 탐색과 인간의 밀고는 끊임없이 그들의 위치를 마왕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왕국의 최정예 기사로만 이루어진 왕자의 부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간신히 마왕성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땐 왕자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크고 작은 상처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왕자가 앞으로의 작전을 고민할 때, 상처투성이가 된 기사단장이 왕자에게 제안했다.
“저흰 이대로 도망치겠습니다, 왕자님.”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아요.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요?”
지친 목소리로 왕자가 묻자, 기사단장은 씩 웃었다.
“간단합니다. 저흰 마왕성을 습격하고, 그대로 도망칩니다. 그러면 성 안에서 마물들이 뛰쳐나오겠지요. 그 뒤에 왕자님이 은밀히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들은……”
소년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본 기사단장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도망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럴 땐 우리를 믿어도 됩니다. 어린 당신이 이렇게 분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거라도 해야 체면이 서겠지요.”
한쪽 다리를 다쳐 절름거리는 이도 있었다. 팔뚝 아래가 날아가 더러운 붕대로 간신히 지혈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눈은 처음 출진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왕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곧 활짝 웃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그럼 제가 한 칼에 마왕을 죽이고 올 테니, 다들 잘 도망다니세요. 절대,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항복하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만, 목숨을 소중히 하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왕자님!”
이제 다시 못 보게 될 이들이다. 왕자도, 기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살짝 맺힌 눈물을 감추려, 왕자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기사단장의 예측대로,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마물이 뛰쳐나왔다. 기사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마물을 유인했다. 다리를 다친 기사가 마물의 파도에 휩쓸리는 걸 눈에 담은 채, 왕자는 활짝 열린 성문에 뛰어들었다. 모든 마물이 출격했는지 성 안은 텅 빈 상태였고, 그래서 그는 어렵지 않게 마왕의 옥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마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은 해골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신과 흡사했다. 의외로 덩치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힘이 얼마나 강대할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용사여. 부하들을 모두 내보냈으니 방해는 없겠군.
“설마, 우리 작전을 알고 있었던 거냐?”
-물론이다. 지난번 숙주는 어리석은 평민이라 능력을 끌어낼 수 없었지만, 이번 숙주는 인간 중 최상품이라 머리가 잘 돌아가더군. 하지만 모처럼 이곳에 왔는데 내 얼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나도 여흥을 즐기고 싶고 말이야.
‘숙주’란 얘기에 왕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마왕은 육체가 없는 정신체가 인간에 깃든 것이란 말인가?
“네놈…… 네놈은 인간의 몸에 깃드는 마물인 거냐?”
“그래. 내 자신은 강대하지만, 육체가 있어야 이 힘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 특히 어둠에 물든 인간에 깃들수록 내 힘은 더욱 올라간다. 그리고 육체를 얻은 후엔 내가 가장 살기 좋은 환경인 어둠의 세상을 만드는 거지. 너희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이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아무래도 마왕이란 존재는 세계정복 같은 목표가 아니라 세계를 어둠에 물들이는 게 목적인 모양이었다. 왕자는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많은 걸 알아내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그렇지, 마침 이 숙주엔 질렸는데 다음 숙주는 너로 할까? 이대로 널 죽이는 건 재미없지. 한 삼 년 정도 굴리다 보면 딱 알맞게 익을 것 같구나.”
가면 속 붉은 눈이 뱀처럼 그를 핥고 지나갔다. 소년의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왕은 진심이었다.
“닥쳐라!”
노호성을 발하며 왕자는 마법검으로 마왕을 찔러들어갔다.
마왕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푹!
예리한 마법검이 단숨에 마왕의 배를 파고들었다. 기습이라 하기도 힘든 공격이 성공하자 왕자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무언가 반격을 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그는 방어하지 않았을까?
그때였다. 마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용사여, 넌...... 이긴 게...... 아니다......”
“헛소리!”
왕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손이 왕자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최후의 말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 말은 왕자에게 저주와도 같았다. 아니,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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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컸구나…… 아들아. 내가 네…… 아비, 엘미르다.”
“헛!”
-그런……! 네 의식은 가장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을 텐데!”
셋의 목소리, 정확히는 두 개의 목소리와 하나의 사념파가 교차했다. 왕자나 마왕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당장은 마왕의 충격이 더 컸다. 마왕은 용사의 검을 받아 죽는 것으로 이번의 유희를 끝내며, 저번처럼 용사에게 저주를 내리려 했다. 마왕이 죽는 순간에만 내릴 수 있는 저주인 ‘3년의 윤회’는 저주를 받은 이가 3년 동안 어둠에 물든 끝에 마왕의 육신으로 거듭나게 되는 무서운 저주였다. 그런데 마왕의 육체가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수고했다…… 개자식아.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널…… 지켜보고 있으니, 네 약점도 알겠더군…… 불사신이지만, 자살하면 죽는……거지……?”
-이익!
마왕은 용사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육체의 주도권은 엘미르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마법검이 배를 관통하는 그 짧은 순간, 마법검의 기운을 이용해 엘미르가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은 것이다. 그의 한 손이 서서히 들리고, 그 끝에 어둠의 칼날이 맺혔다. 노리는 건 자신의 심장. 이대로 찌르면 그의 심장은 날아갈 것이었다.
그렇게 손을 고정한 채, 엘미르는 엘시드를 향해 싱긋 웃었다.
“네가…… 와 준 덕에…… 살았다, 아들아.”
“마, 말도 안 돼……!”
엘시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홀로 떠났는지 알 수 없어 끝내 증오했던 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둘의 얼굴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는 건, 더군다나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찔렀다는 건 소년에겐 저주만큼 가혹했다.
엘미르는 애정 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들이 있는 세상에서…… 꺼져 버려.”
-안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어!
마왕의 외침을 무시한 채, 엘미르는 자신의 심장에 자신의 팔을 꽂았다. 검은 피가 솟구쳐 나오며, 단말마의 무시무시한 비명이 성을 가득 채웠다. 피는 분수처럼 허공을 까맣게 적시며 알 수 없는 마법진을 만들었고, 그렇게 완성된 마법진에서 무수한 손이 뻗어나오더니 엘미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을 끄집어냈다. 검은 기운은 발버둥치며 저항했지만 끝내 마법진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었고, 목적을 달성한 마법진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서서히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가는 시체뿐이었다.
“아, 안돼…… 안돼!”
엘시드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법검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소년은 이를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자신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까? 이 짧은 시간에 비하면, 그간 자신이 했던 모험과 전투는 모두 빛바랜 기억일 뿐이었다.
“돌려줘…… 돌려달란 말이야!”
텅 빈 마왕성에 소년의 절망적인 고함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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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사는 말했다.
-돌아왔어요, 조안.
“맙소사…… 당신! 당신 맞죠?”
조안 공주는 무사히 귀환한 아들이 들고 온 검을 끌어안았다. 검이 검집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공주는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엘시드의 영혼을 담은 외침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엘미르의 영혼의 힘이었을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마법검은 느닷없이 엘미르의 목소리를 발했다. 원래 자아가 있는 마법검이었기에, 엘미르의 영혼이 이런 식으로 깃들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원리를 파악하려면 마법사나 장인에게 맡기고 연구해야겠지만, 십 수 년 만에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당신, 각오해요. 당신은 이제 잠들지 않아도 되는 거죠? 지금부터 저랑 얘기 좀 해요. 적어도 닷새 정도는 쉴새없이 떠들어야 할 거예요.”
울다가 웃다가 하다 겨우 감정을 추슬린 조안이 검에 키스하며 선언했다. 엘시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이 영구히 어머니의 소유가 되는 걸 지켜보았다.
그때, 엘미르가 둘에게 말했다.
-그전에 하나만 말하고 싶은데.
“무엇을요?”
-아들아, 나를 대신해 사랑하는 아내에게 키스해 다오.”
엘시드는 폭소를 터뜨리며 어머니의 야윈 뺨에 열렬히 키스를 남겼다.
소설 초반부에는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 과정 위주로, 중반부에는 마왕이란 이름에 가려졌던 인간의 추악한 현실을 서술하고, 말미에는 용사 부자의 노력으로 한결 나아진 현실을 그려 해피엔딩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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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사는 말했다
캐릭터: 엘미르(전대 용사):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마왕을 쳐부수기 위해 자원한 청년. 의협심이 강하고 사람들을 위하며 자신이 믿는 정의를 지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왕국의 마법검과 갑옷을 하사받고 동료들과 길을 떠난다. 왕국군이 마물을 막는 사이 마왕성을 기습해 마왕과 싸워 이기지만 마왕의 저주를 받는다. 저주의 정체를 모른 채 저주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는 걸 막기 위해 홀로 여행을 나서 자신이 구한 세상을 돌아보지만, 현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저주의 영향으로 마왕이 된다. 그러다 결국 마왕을 잡으러 온 자신의 아들에게 죽고, 자신의 혼을 마법검에 덧씌워 진실을 아들에게 전해준다. 이후 마법검과 자아가 합쳐져 공주와 재회한다.
엘시드(후대 용사): 전대 용사의 아들. 항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래서 성장한 후 아버지처럼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남긴 무구로 무장해 마왕을 물리쳤지만, 마왕이 검에 남긴 지식 덕분에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자아가 검에 남아 있어, 그의 조언을 토대로 훌륭한 왕이 된다.
조안: 공주. 전대 용사의 연인. 용사가 마지막으로 출격할 때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용사가 저주에 걸려 스스로 떠났다고 말해줘서 크게 상심하지만, 그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이를 달랜다. 훗날 아들이 엘미르의 혼이 깃든 마법검을 가져와 그와 재회하고, 이후 검을 차고 다니며 그와 밀린 대화를 나눈다.
기븐 왕: 공주의 아버지. 마왕과 국경이 닿아 있어 끝없이 전쟁을 벌이느라 지쳐 있다. 용사가 저주를 받고 돌아오자 그 저주가 자신의 딸에게 영향을 미치는 걸 두려워해 그가 떠나도록 설득한다. 손자 엘시드가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그에게 왕위를 넘겨 준다.
마왕: 세계의 어둠이 낳은 존재. 끊임없이 마물을 생산해낸다. 정신체에 가까운 존재로, 수탈받던 백성의 원한을 이용해 그 몸에 깃들었다. 용사에게 죽으면서 3년 안에 마왕이 되는 저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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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태양이 비춘 적이 없다고 알려진 마왕성. 왕국의 북쪽 끝, 험준한 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마왕성은 그간 단 한 번도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항상 구름이 끼어 있어 마족의 보금자리로 적격이었던 그곳에, 오늘 한 줄기의 태양빛이 비추고 있었다.
빛이 비추는 것은 피바다가 된 성 안이었다.
“크아악!”
마왕은 지금 막 자신의 심장을 파고든 검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호응하는 마물은 아무도 없었다. 성 안에 살아 숨쉬는 건 용사와 마왕 둘 뿐이었고, 이제 곧 하나로 줄어들 터였다.
“정말......길었다.”
용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왕국에 대대로 전해지는 자아가 있는 마법검과 성스러운 갑옷을 착용한 채 지금까지 수많은 마물을 베어 왔다. 마물에게 당한 가련한 병사들을 보며 울부짖기도 했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그를 위해 망설임없이 희생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마왕성의 방어가 가장 취약해지는 때가 지금이란 사실을 알기 위해 희생한 사람만 백 명을 넘어갈 정도였다.
이제 검을 빼고, 마왕이 무너지는 걸 보며 승리를 외치면 된다. 마왕이 무서운 것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물들이 주위에 저절로 생성된다는 데 있다. 즉 마왕은 마물들의 부모이므로 그가 사라지면 남은 마물도 속절없이 약해질 것이다. 마왕이 강림한 지 무려 오 년, 이제야 지상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였다. 마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용사여, 넌...... 이긴 게...... 아니다......”
“헛소리!”
용사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손이 용사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최후의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용사에게 저주와도 같았다. 아니,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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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녹초가 되어 한밤중에 왕도에 돌아왔다. 문지기는 그를 환영하며 기븐 왕에게 용사의 귀환을 알렸다. 마왕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왕과 귀족들은 급히 뛰어나왔다.
“정말 대단하오, 용사여! 당신이 해낼 줄 알았소!”
하급 기사의 자식에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길 수 없다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했던 대귀족이 활짝 웃으며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급히 뒤로 몸을 뺐다. 어리둥절해하는 대귀족을 향해 용사는 낮게 말했다.
“전...... 마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마왕은 그에게 ‘앞으로 3년 안에 넌......’이란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말은 끝맺지 못했지만, 그 희열에 찬 마지막 표정은 용사의 남은 수명이 앞으로 3년이라고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용사의 주위로 진공의 원이 생겨났다. 용사는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차분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기븐 왕은 난색을 표했다.
“자네의 고생 덕분에 우리는 평화를 되찾았네. 하지만 난감한 것도 사실이네. 사악한 마력을 지닌 마왕의 저주는 무엇보다 강력할 테니, 자네와 접촉한 사람이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겠지.”
노회한 왕은 용사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정한 처사였지만 용사는 왕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주가 자신과 닿는 사람에게 전염되거나 하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용사는 자신의 마지막 미련을 깔끔하게 떨쳐 내기 힘들었다.
“제가 떠나야 하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조안 공주에게 한 번만 키스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븐 왕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마왕을 물리치고 오면 용사에게 자신의 딸을 준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둘은 연인 사이였다. 하급 기사 출신이었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무예와 성실한 인품 때문에 공주는 그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경쟁자를 제치고 정식으로 용사라고 인정받자 공주는 사랑을 고백하고 그와 떨리는 입술을 맞댈 수 있었다. 처음엔 탐탁찮게 생각했던 왕도 용사의 명성이 높아지자 둘 사이를 묵인했다. 그 결과, 지금 조안 공주의 몸에는 용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매정한 것 같지만 이해해 주게. 차라리 자네가 말 없이 떠나는 편이 낫네. 자네를 눈앞에서 보면 그 아이는 반드시 자네를 따라가겠다고 할 테지.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용사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검을 성문 앞 비석에 꽂았다. 왕실에서 그에게 준, 자아가 있는 마법검이었다. 검은 체념한 듯 아무 말 없이 주인의 손을 떠났다. 이어서 그는 왕실에서 받은 성스러운 갑옷도 벗어 그 앞에 놓았다.
“모두의 몸을 지켰지만 제 몸을 지키지 못했고, 모두의 마음을 기쁘게 했지만 조안 님의 마음은 갈갈이 찢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전 용사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모두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은 급히 그에게 충분한 사례금을 주었다. 그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마치 모래주머니를 받은 듯 무심했다.
“이제 전 용사가 아니라 기사 엘미르로 돌아왔습니다.”
가슴에 맺힌 수많은 말을 애써 한 마디로 압축한 후, 그는 홀로 돌아섰다.
엘미르는 정처없이 걸었다.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었다. 아니, 왜 걸어야 하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잠시라도 멈췄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는 사흘 밤낮을 걸었다. 그러다 산골짜기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짚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초라한 침대와 거친 나무 테이블이 방의 전부였다. 그곳에 노파가 죽 한 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일어났으면 이거 들어요, 나으리.”
노파는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굽신거렸다. 그녀의 태도에 엘미르가 오히려 거북해졌다.
“이러지 마십시오.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한테 이렇게까지 인사하실 건 없습니다.”
“하지만 말이우...... 사실 나으리를 이리 옮긴 후 짐을 살펴보았지유. 이렇게나 부자이신데, 저 같은 것이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있겠수. 큰 보답은 바라지 않으니, 적선하는 셈치고 이 늙은 것에게 조금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수다.”
엘미르는 감동했다. 자기를 죽이고 돈을 빼앗거나, 돈만 훔쳐 달아날 수도 있는데 노파는 굳이 자신을 구해내고 정직하게 약간의 대가만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자루에서 돈을 한 움큼 쥐어 노파에게 건네주었다. 금화 한 줌을 받은 노파는 입을 벌리고 경악하다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돈, 이 베라먹을 돈이 세 달만 일찍 들어왔어도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가요?”
“그야 세금 때문이지유. 원래 이 집에는 나와 아들, 손자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밀린 세금을 낼 수가 없어서 둘 다 군에 끌려가 버렸수. 그리고 손자는 마왕군과 싸우다 전사했지. 뼛가루만 덜렁 돌아온 걸 돈이 없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이 산에 뿌린 게 다라오.”
손자 생각에 슬피 우는 노파를 보니 엘미르는 선뜻 자신이 마왕을 잡았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을 구했지만, 아직 세상은 완전히 평화로워진 게 아니었다. 이제 국가는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를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걷을 것이고, 마왕군의 잔당도 자연 소멸되기 직전까지 행패를 부릴 것이다. 대귀족은 모를, 아니 관심조차 없을 이런 사실을 엘미르는 새삼 곰씹어 보았다.
어쨌든 노파와 오래 접촉하는 건 그녀에게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 엘미르는 곧장 길을 나섰다. 그녀가 더러운 주머니에 금화를 넣고 목에 거는 걸 보자 이전보다 한결 기분이 진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구한 세상을 좀 더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일단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 허름한 여관에 묵으며 분위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신분을 숨긴 채였다.
그렇지만 그의 예상만큼 세상이 축제분위기로 바뀐 건 아니었다. 마왕이 죽고 위업을 달성한 용사가 모든 명예를 사양한 채 떠났다는 소식은 발빠르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 영주는 축제를 열었지만, 이는 시늉뿐이었다. 신 맥주 한 잔과 소시지빵 하나가 은사의 전부였다. 게다가 축제가 끝나자마자 축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구실로 특별세를 걷기까지 했다. ‘용사가 마왕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딴 세금을 내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란 농 섞인 푸념이 엘미르의 폐부를 따갑게 찔렀다. 이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골똘히 떠올려 보았지만, 지금까지 기사로 살아온 그가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울해하던 엘미르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마을 주변에 산적이 출몰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던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약한 사람을 구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다시 떠올리며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검과 방패를 구입한 그는 곧장 산적 소굴로 향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그는 눈먼 화살조차 맞지 않고 손쉽게 산적들을 척살했다. 마물이 인간을 죽이는 것도 혐오스러웠지만, 같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건 끔찍할 정도로 저주스러웠고, 그래서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산적 두목은 도망치지 않았다. 제법 지긋한 나이의 사내는 원망과 저주를 가득 담아 엘미르를 노려보았다.
“난 개새끼가 맞지만, 너도 개다. 왕의 개, 아니면 귀족의 개겠지. 어디 한번 개싸움 식으로 물어뜯어보자,”
“......난 개가 아니다.”
엘미르의 검이 가볍게 산적 두목의 검을 튕겨내고 그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그렇게 산적을 전멸시킨 엘미르는 산채를 뒤졌다. 여기에서 나온 것들은 최대한 주인을 찾아줄 생각이었다. 순진하게 영주에게 신고하면 영주가 몽땅 차지하리란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대로 놔 두는 게 나을 뻔했다. 두목의 품 안에서 낯익은 주머니가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 본 노파의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본 순간 엘미르는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달렸다. 저주의 영향인지 몸이 예전처럼 가볍진 않았지만,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노파가 살던 오두막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그의 무릎은 저절로 꺾였다. 노파의 집은 불에 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그 안에는 검게 탄 시체가 조용히 썩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항했는지, 시체는 칼로 무수히 베어진 흔적이 보였다.
깊은 산의 정적을 한 남자의 절규가 오래도록 찢어발겼다.
자신의 온정이 쓸데없는 화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 엘미르는 행동노선을 다시 짜기로 했다. 산적이나 마물이 있다고 알려진 곳을 일일이 찾아가 제거하고, 그 일대가 안전해진 게 확인되면 자신의 돈을 은밀히 풀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의적이나 의인 행세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마왕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해질 계기를 얻은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해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 공주와 행복하게 살며 이런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겠지, 라며 그는 자조했다. 하지만 공주와 그녀의,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 그가 만들어낸 밝은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다시 힘이 나곤 했다.
늘 단독행동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유명해졌다. 숙련된 기사 한 부대도 할 수 없는 일을 혼자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사람과 마물을 막론하고 시체만 남았기에, 음유시인들은 그를 ‘파멸의 사냥꾼’이라 부르며 두려움을 담아 노래했다. 정작 노래의 주인공은 자신을 향한 칭송이나 두려움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의 몸은 거듭되는 전투에 혹사되며 마모되어갔다.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휴식 없이 방랑하는 생활도 문제였다. 그래도 그는 전투로 얻은 돈과 갖고 있던 돈을 합해 고아원을 세우고 수도원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웃음이 돌아오면 멀찍이서 조용히 웃은 후 발길을 돌리곤 했다. 세간에는 파멸의 사냥꾼이 돈독에 올랐을 거란 추측만 무성했을 뿐, 그의 선행을 아는 자는 없었다. 이는 노파의 사건이 행여나 자신에게 저주가 옮아 벌어진 비극이 아닐까 하는 엘미르의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이제는 전성기의 반도 되지 않는 몸으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며, 지금의 삶은 마왕과 대결할 때보다 더욱 가혹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은 한 개인의 노력을 미약한 산들바람처럼 무력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법이다. 엘미르가 마왕과 대결한 지 삼 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라에 대기근이 닥쳐 왔다. 농사로 먹고 살던 대다수의 사람은 그나마 수확한 곡물을 세금으로 모조리 빼앗긴 후 유랑걸식으로 연명해 나갔다. 그에 따라 아직 2할 정도 남아 있던 엘미르의 돈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산적의 수는 늘었지만, 엘미르는 그들을 차마 칠 수 없었다. 어제까지 평화롭게 굶어죽어가던 사람이 오늘 무기를 들고 벌벌 떠는 모습은 도저히 벨 수 없었다. 그간 산적들의 명분을 그리 헤아리지 않았던 그로서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근을 해결해준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영주의 환대에 녹아 돌아가는 건 예사였다. 몇 차례 탄원서를 제출하던 엘미르는 결국 영주의 성으로 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오랜 고행으로 걸인처럼 변한 그의 모습은 과거 영광스러웠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젠 노인만큼이나 쇠약해진 그의 몸은 성까지 갔다 돌아오기도 힘들어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길바닥에 쓰러졌다. 수많은 걸인들은 자신들보다 초라한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다. 아니, 그 중 하나가 되돌아오더니 그를 안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뒤져 동전 몇 닢을 뺀 후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 얼굴을 엘미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첫 번째 고아원에서 행복하게 놀던 아이였다. 그의 공허한 눈에는 세상에 대한 어떤 희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세상을 위한 그의 모든 행보가 세상의 손으로 부정된 순간,
엘미르의 몸 안에서 꿈틀대던 마왕의 저주가 완전히 발현되었다.
-앞으로 3년 안에,
그의 몸이 어둠에 휩싸였다.어둠은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점점 불어났다. 그 어둠에 닿은 자는 순식간에 기력이 흡수되어 사망했다. 스멀스멀 손을 뻗는 사람들의 절규 속에서, 엘미르의 혼은 가장 어두운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넌 마왕이 될 것이다.
마왕의 토막난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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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부활했다!
처음 그런 소문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마왕을 물리치는 데 걸린 시간은 5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얻은 평화가 고작 3년이란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마왕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곧 잊혀졌다.
대기근이 물러가고 산 자는 그럭저럭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다. 늙은 왕은 공주가 낳은 손자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고, 그사이 대귀족들은 슬금슬금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몇몇 성급한 자들은 국력을 회복했으니 슬슬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라고 왕에게 바람을 넣기까지 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전공을 올릴 길이 마땅치 않으니, 새롭게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은 곧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왕은 부활했노라!
이제는 폐허가 된 땅, 마왕성에서 마왕 자신이 그렇게 선포했다.
십 년 간이나 세력을 축적한 마왕은 무서운 기세로 왕국을 침공했다. 지난번 마왕과는 달리, 이번의 마왕은 넓은 전략적 사고로 왕국군을 유린했다. 마왕은 삽시간에 과거의 영토를 되찾더니, 그 지역을 완전히 자신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무조건 죽이고 약탈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게 하면서 생산물을 적당히 가져가는 식이었다. 마왕이 생산하는 마물들은 인간 병사처럼 유지비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마왕령이 살기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왕국에서 유리걸식하던 백성들은 슬금슬금 마왕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왕국군은 입단속을 하고 탈주자의 목을 베는 등 강경책에 나섰지만, 이탈을 완전히 잠재울 순 없었다. 그렇게 수 년 간의 정전 아닌 정전이 지속되자, 왕국은 파탄이 날 지경이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기븐 왕은 대귀족들에게 병사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어째서 앞장서서 희생해야 하냐는 태도였다. 중앙군이 힘을 못 쓰는 이상, 자신의 군을 갖다 바친다 해도 병력만 낭비하는 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도 나라가 멸망하면 자신들이 무사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쾌히 병사를 내줄 만큼의 계기가 부족하다는 게 모두의 인식이었다.
그때 한 소년이 일갈했다.
“인간의 세상이 위기에 빠졌는데 어째서 경들은 이리 미적지근합니까! 경들이 인간이라면, 지금 당장 검을 뽑아들고 나서란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선두에 제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를 부끄럽게 한 주인공은 용사의 손자인 엘시드 왕자였다. 아직 소년이었지만 이미 왕국 내에서 당해낼 기사가 없을 만큼 빼어난 실력을 가진 엘시드였다. 아버지가 남긴 성스러운 갑옷과 마법검을 든 늠름한 모습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조안 공주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건 그녀로서도 가슴 아팠지만, 이 자리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대귀족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다. 동시에, 이는 지금 왕자를 따르지 않는 이는 왕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숙청되리란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오오!”
“용사의 재림이로다!”
용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소년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감동했다. 그리고 대귀족들도 별수없이 군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어차피 군대를 바쳐야 한다면, 모두가 함께 바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만드는 게 좋았다. 그래야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었다. 마왕군의 수는 이보다 몇 배가 더 많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걸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새로운 용사의 인상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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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갑옷을 입은 소년의 이마에는 땀과 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닦아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저것이 마왕성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암흑의 대지에 웅장하게 솟아 있는 마왕성을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던가. 수많은 전투 끝에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왕국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바로 별동대를 이용해 마왕을 직접 치는 작전이었다. 이는 과거에 전대 용사를 마왕에게 보내기 위해 썼던 전략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한 번 성공한 전략이었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왕국이 여러 방향으로 소규모 부대를 파병해 교란작전을 펼치자, 마왕은 각각의 병력에 맞서면서 별동대를 풀어 은밀히 움직이던 왕자의 부대를 찾아내려 했다. 게다가 마왕령의 백성들도 왕국의 편이 아니었다. 마물의 탐색과 인간의 밀고는 끊임없이 그들의 위치를 마왕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왕국의 최정예 기사로만 이루어진 왕자의 부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간신히 마왕성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땐 왕자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크고 작은 상처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왕자가 앞으로의 작전을 고민할 때, 상처투성이가 된 기사단장이 왕자에게 제안했다.
“저흰 이대로 도망치겠습니다, 왕자님.”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아요.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요?”
지친 목소리로 왕자가 묻자, 기사단장은 씩 웃었다.
“간단합니다. 저흰 마왕성을 습격하고, 그대로 도망칩니다. 그러면 성 안에서 마물들이 뛰쳐나오겠지요. 그 뒤에 왕자님이 은밀히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들은……”
소년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본 기사단장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도망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럴 땐 우리를 믿어도 됩니다. 어린 당신이 이렇게 분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거라도 해야 체면이 서겠지요.”
한쪽 다리를 다쳐 절름거리는 이도 있었다. 팔뚝 아래가 날아가 더러운 붕대로 간신히 지혈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눈은 처음 출진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왕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곧 활짝 웃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그럼 제가 한 칼에 마왕을 죽이고 올 테니, 다들 잘 도망다니세요. 절대,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항복하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만, 목숨을 소중히 하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왕자님!”
이제 다시 못 보게 될 이들이다. 왕자도, 기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살짝 맺힌 눈물을 감추려, 왕자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기사단장의 예측대로,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마물이 뛰쳐나왔다. 기사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마물을 유인했다. 다리를 다친 기사가 마물의 파도에 휩쓸리는 걸 눈에 담은 채, 왕자는 활짝 열린 성문에 뛰어들었다. 모든 마물이 출격했는지 성 안은 텅 빈 상태였고, 그래서 그는 어렵지 않게 마왕의 옥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마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은 해골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신과 흡사했다. 의외로 덩치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힘이 얼마나 강대할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용사여. 부하들을 모두 내보냈으니 방해는 없겠군.
“설마, 우리 작전을 알고 있었던 거냐?”
-물론이다. 지난번 숙주는 어리석은 평민이라 능력을 끌어낼 수 없었지만, 이번 숙주는 인간 중 최상품이라 머리가 잘 돌아가더군. 하지만 모처럼 이곳에 왔는데 내 얼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나도 여흥을 즐기고 싶고 말이야.
‘숙주’란 얘기에 왕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마왕은 육체가 없는 정신체가 인간에 깃든 것이란 말인가?
“네놈…… 네놈은 인간의 몸에 깃드는 마물인 거냐?”
“그래. 내 자신은 강대하지만, 육체가 있어야 이 힘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 특히 어둠에 물든 인간에 깃들수록 내 힘은 더욱 올라간다. 그리고 육체를 얻은 후엔 내가 가장 살기 좋은 환경인 어둠의 세상을 만드는 거지. 너희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이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아무래도 마왕이란 존재는 세계정복 같은 목표가 아니라 세계를 어둠에 물들이는 게 목적인 모양이었다. 왕자는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많은 걸 알아내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그렇지, 마침 이 숙주엔 질렸는데 다음 숙주는 너로 할까? 이대로 널 죽이는 건 재미없지. 한 삼 년 정도 굴리다 보면 딱 알맞게 익을 것 같구나.”
가면 속 붉은 눈이 뱀처럼 그를 핥고 지나갔다. 소년의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왕은 진심이었다.
“닥쳐라!”
노호성을 발하며 왕자는 마법검으로 마왕을 찔러들어갔다.
마왕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푹!
예리한 마법검이 단숨에 마왕의 배를 파고들었다. 기습이라 하기도 힘든 공격이 성공하자 왕자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무언가 반격을 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그는 방어하지 않았을까?
그때였다. 마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용사여, 넌...... 이긴 게...... 아니다......”
“헛소리!”
왕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마왕의 손이 왕자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최후의 말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 말은 왕자에게 저주와도 같았다. 아니,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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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컸구나…… 아들아. 내가 네…… 아비, 엘미르다.”
“헛!”
-그런……! 네 의식은 가장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을 텐데!”
셋의 목소리, 정확히는 두 개의 목소리와 하나의 사념파가 교차했다. 왕자나 마왕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당장은 마왕의 충격이 더 컸다. 마왕은 용사의 검을 받아 죽는 것으로 이번의 유희를 끝내며, 저번처럼 용사에게 저주를 내리려 했다. 마왕이 죽는 순간에만 내릴 수 있는 저주인 ‘3년의 윤회’는 저주를 받은 이가 3년 동안 어둠에 물든 끝에 마왕의 육신으로 거듭나게 되는 무서운 저주였다. 그런데 마왕의 육체가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수고했다…… 개자식아.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널…… 지켜보고 있으니, 네 약점도 알겠더군…… 불사신이지만, 자살하면 죽는……거지……?”
-이익!
마왕은 용사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육체의 주도권은 엘미르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마법검이 배를 관통하는 그 짧은 순간, 마법검의 기운을 이용해 엘미르가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은 것이다. 그의 한 손이 서서히 들리고, 그 끝에 어둠의 칼날이 맺혔다. 노리는 건 자신의 심장. 이대로 찌르면 그의 심장은 날아갈 것이었다.
그렇게 손을 고정한 채, 엘미르는 엘시드를 향해 싱긋 웃었다.
“네가…… 와 준 덕에…… 살았다, 아들아.”
“마, 말도 안 돼……!”
엘시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홀로 떠났는지 알 수 없어 끝내 증오했던 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둘의 얼굴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는 건, 더군다나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찔렀다는 건 소년에겐 저주만큼 가혹했다.
엘미르는 애정 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들이 있는 세상에서…… 꺼져 버려.”
-안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어!
마왕의 외침을 무시한 채, 엘미르는 자신의 심장에 자신의 팔을 꽂았다. 검은 피가 솟구쳐 나오며, 단말마의 무시무시한 비명이 성을 가득 채웠다. 피는 분수처럼 허공을 까맣게 적시며 알 수 없는 마법진을 만들었고, 그렇게 완성된 마법진에서 무수한 손이 뻗어나오더니 엘미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을 끄집어냈다. 검은 기운은 발버둥치며 저항했지만 끝내 마법진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었고, 목적을 달성한 마법진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서서히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가는 시체뿐이었다.
“아, 안돼…… 안돼!”
엘시드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법검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소년은 이를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자신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까? 이 짧은 시간에 비하면, 그간 자신이 했던 모험과 전투는 모두 빛바랜 기억일 뿐이었다.
“돌려줘…… 돌려달란 말이야!”
텅 빈 마왕성에 소년의 절망적인 고함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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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사는 말했다.
-돌아왔어요, 조안.
“맙소사…… 당신! 당신 맞죠?”
조안 공주는 무사히 귀환한 아들이 들고 온 검을 끌어안았다. 검이 검집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공주는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엘시드의 영혼을 담은 외침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엘미르의 영혼의 힘이었을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마법검은 느닷없이 엘미르의 목소리를 발했다. 원래 자아가 있는 마법검이었기에, 엘미르의 영혼이 이런 식으로 깃들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원리를 파악하려면 마법사나 장인에게 맡기고 연구해야겠지만, 십 수 년 만에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당신, 각오해요. 당신은 이제 잠들지 않아도 되는 거죠? 지금부터 저랑 얘기 좀 해요. 적어도 닷새 정도는 쉴새없이 떠들어야 할 거예요.”
울다가 웃다가 하다 겨우 감정을 추슬린 조안이 검에 키스하며 선언했다. 엘시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이 영구히 어머니의 소유가 되는 걸 지켜보았다.
그때, 엘미르가 둘에게 말했다.
-그전에 하나만 말하고 싶은데.
“무엇을요?”
-아들아, 나를 대신해 사랑하는 아내에게 키스해 다오.”
엘시드는 폭소를 터뜨리며 어머니의 야윈 뺨에 열렬히 키스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