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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깎던 노인(팬픽&패러디 모음)


[소드 아트 온라인] 당신의 목소리



1
언제 들어도 듣기 싫은 소리의 알람이 울렸다. 알람이란 귀에 거슬려야 보다 잘 인식되는 법, 이란 게 내 신조다. 이를 두고 <​풍​림​화​산>​의​ 멤버들은 ‘안 그래도 낙오병 같은 얼굴인데, 알람을 듣는 순간에는 강도의 얼굴로 변한다.’라며 날 놀려대곤 한다. 알람은 내게만 들리는 소리였기에 알람의 정체를 아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를 들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내 얼굴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짐작하는 것이다.

“시간 됐다. 준비됐냐, 얼간이들아?”

“우리야 진작에 끝났지. 네가 알람을 듣는 얼굴을 보려고 기다려 준 거라고.”

“헹. 만족했냐? 엿이나 먹어라.”

난 일어서서 몸을 쭉 폈다. 현실이었다면 등뼈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났겠지만, 여기선 그런 건 없다. 사실 몸을 쭉 편다고 피로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현실의 습관을 잊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미리 사냥터 입구로 가 있으라고 지시한 후, 난 <​풍​림​화​산>​의​ 부길드장 메르와 함께 거리로 나와 <7월의 토끼 정>으로 들어갔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고, 이곳에 여러 명을 데려올 형편도 되지 않았다. 여긴 더럽게 맛없고 비싸기로 악명 높은 식당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한 장점도 없는 게, 찾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 점에 착안한 나는 이곳을 비밀 회합 장소로 애용하고 있다는 형편 좋은 이야기다.

“대장이 사는 거유?”

“닥치고 물이나 먹어.”

가장 싼 메뉴인 물을 두 잔 시켜놓고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보니 ‘그’는 금방 왔다.

“여어. 일찍 왔네? 이런 성격이었어?”

“음. 덧붙이자면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녀석과의 거래는 일단 10% 정도 할인가로 시작하는 성격이기도 하지.”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오늘의 정보는 고급이라구.”

“불러 봐, 아르고. 고급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이름을 불린 여자는 히죽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염소수염을 붙인 채 손을 비비며 웃는 모습을 보면, 대체 현실에서 뭘 하다 왔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하지만 녀석이 물어오는 정보는 꽤 도움이 된다. 뭐든 어정쩡하게 하는 것보단 이 녀석처럼 한 가지에 특화되어 있는 편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대해선 들었어, 나리?”

“그딴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 마. 그리고 그 이벤트야 워낙 유명하니 나도 들었지. 그게 어때서?”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미친 산타를 때려잡으면 갖가지 보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보물의 하나가 밝혀진 것 같아.”

난 자세를 고쳐잡고 아르고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아르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메뉴판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난 혀를 쯧, 찬 후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시켜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정보료의 1/3은 족히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센 가격의 음식이었다. 메르는 아르고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차마 응시하지 못하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외관만은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나오자 아르고는 칼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환혼의 성정석.”

“뭐?”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아르고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물론이고 <​풍​림​화​산>​의​ 두뇌인 메르까지 잠시 안색이 굳었다. 환혼, 이라는 건, 설마? 소드 아트 온라인의 세계에 들어온 이래 가장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단어가 나와서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봐. 그거 설마…… 부활 아이템이냐?”

“정답. 자세한 건 모르지만 존재하는 건 거의 확실해. NPC의 이야기가 있었거든.”

​“​…​…​…​…​…​…​…​…​맙​소​사​.​”​

난 반다나 안쪽이 징징 울리는 걸 느꼈다. 원래 부활 아이템이란 어느 게임에든 나오는 조금 비싼 회복물약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야바 아키히코가 만든 이 미친 게임의 세계에선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인, ‘게임이지만 놀이가 아닌’ 이 세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이 있다? 이미 1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왔던 유저들이 이를 안다면 개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도.

“NPC라면 출처를 확인해도 좋을까.”

“51층의 여관과 52층의 마구간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녀석이 이야기했어.”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확인해봐야겠군.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걸 보니 너도 그 이상은 모르는 것 같고. 그럼, 수고했어.”

내가 눈짓을 보내자 메르는 주머니에서 묵직한 사례비를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우리를 비롯한 많은 길드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를 탓할 순 없었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다른 길드보다 우선해서 받기 위해 최대한 대접해주는 편이 좋다. 이만큼 주는 곳은 우리를 제외하면 kob와 성룡연합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보수를 확이한 아르고는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은 후 다시 능글맞게 웃었다.

“매번 감사~!”

“정말 감사하단 표정으로 인사해 줬으면 좋겠군. 그럼 우린 간다.”

이 여자와 흉금을 터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아르고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보수도 받았겠다, 이런 음식도 얻어먹었겠다 서비스 정도는 해야겠군. 이번 이벤트는 워낙 달려들 사람이 많으니 힘들 거야. 특히 공략파 대다수가 여기 끼어들었으니 힘으로 플로어를 제압하고 아이템을 독차지하는 건 불가능하단 이야기지. 게다가 솔로 플레이어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그 키리토란 녀석은 아주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기세던데.”

“……키리토가?”

내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녀석은 내게 이곳에 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다. 뭐든 혼자 하려고 하는 성격이나 사람을 대할 때의 서투름 때문에 사람들은 녀석을 그리 좋게 평가하진 않지만, 분명 좋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제길.”

와락 구겨진 얼굴을 끝내 펴지 못한 채 난 밖으로 나왔다.
담배가 이 세계에 있었다면, 수천 콜을 주고라도 한 대 구입하고픈 기분이 들었다.

2
악몽이 시작된 그날, 키리토는 머뭇거리다 결국 나를 떠나갔다. 녀석의 입장을 모를 만큼 초짜인 건 아니었기에, 난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그 녀석이 앞으로 오래 살아남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녀석의 모습이 멀어지자 난 급히 광장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광장이라 친구들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울부짖는 자와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로그아웃 창을 찾ㅇ아 허우적거리는 자, 그 자리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는 자, 무기를 꺼내 게임상의 모든 물건을 파괴하려는 자…… 빌어먹을 카야바 아키히코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걸 기대하는지 몰라도, 혹시 지옥이란 게 보고 싶었다면 그 의도는 지금 멋지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기에 내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동료들을 찾아 키리토가 향한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풍​림​화​산>​!​ <​풍​림​화​산>​ 멤버는 이쪽으로 와!”

소드 아트 온라인 시작 전 미리 정해 두었던 길드의 이름을 부르며 난 녀석들을 찾아 헤멨다. 다행히 녀석들은 오프라인에서도 나와 친한 사이였기에, 플레이어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 지금은 오히려 찾기 쉬울 터였다. 하지만 그건 모든 게 정상적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 수라장에서 내 목소리는 채 십 미터도 가지 못하고 다른 소음에 계속 묻힐 뿐이었다.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친구들을 찾다가, 난 광장의 한켠이 묘하게 조용해진 것을 발견했다.

“이건 모두 속임수다! 사기야! 카야바 아키히코는 우리에게 거짓말하고 있을 거야! 내가 이곳을 탈출하면 널 구해줄 수 있어!”

“그러지 마, 아츠시! 제발! 부탁이니 돌아와!”

단순한 커플의 사랑싸움이 아니었다. 아츠시란 남자는 광장 끝에 설치된 난간을 넘어가,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듯한 여자는 그를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수백 명의 대중이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두근.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저기 모인 놈들은 모두 같은 걸 바라고 있었다.
자신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행위를, 남이 대신 해 준다고 하니 말리지 않고 방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 말이 진짜라면? 진짜 저기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로그아웃이 이루어진다면?

“하지 마! 아츠시, 우리 할 수 있는 걸 먼저 다 해보자. 응? 이 방법은 제일 마지막에 해도 되잖아. 그러니 제발, 제발……”

“아니야, 유리. 게임을 싫어하던 널 여기에 끌어들인 게 나니까, 널 구해주는 것도 나야. 널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순 없어.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 널 남겨둘 순 없어!”

“아츠시!”

“사랑해, 유리. 금방 돌아올게.”

그 남자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본 후,
그대로,
공허를 향해 뛰어내렸다.

“아츠시! 아츠시이!”

여자는 절규하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리얼 월드와 99% 같은 이 정교한 세계에서, 애인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건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겠지. 그녀는 이성을 잃었는지 난간을 넘어가려 했다. 여차하면 아츠시의 뒤를 따라갈 것 같아 난 급히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팔짱을 끼고 침을 삼키며 그녀를 지켜보는 관중들이 역겨웠다. 그리고 아츠시가 뛰어내리는 것을 잠시나마 방관한 내 자신도 역겨웠다.

“당신까지 뛰어내리면 안되지!”

다행히 여자가 굼뜬 덕에, 난 그녀가 난간을 넘기 직전 간신히 도달할 수 있었다. 너무 급해 그녀의 긴 머리채를 잡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넘어왔다. 그녀의 몸이 뒤로 쏠리면서 우리 둘은 함께 성대하게 넘어졌다. 이 게임은 인간의 오감도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했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내 위에 겹치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일단 일어나 봐요! 아가씨는 여기서 결과를 지켜봐야지!”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거칠게 버둥거리며 내 손을 할퀴어댔다. 내 HP바가 조금씩 감소하는 것을 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아프지도 않았고, 흉터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현실이었다면 내 손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다섯 개의 고랑이 새겨졌을 텐데.
흑철궁 내부, 본래대로라면 <소생자의 방>이었을 장소의 비석에 남자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전해질 때까지, 난 그녀가 버둥거리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3
대기하고 있던 멤버들과 합류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르고가 이야기해 준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말한 NPC들을 만나고 왔기 때문이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단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아이템이 있을 리 없다고 마음속에서는 계속 부정하고 있었지만, 증거가 모이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까진 아직 멀었기 때문에 정보를 좀더 모은 후 멤버들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으로 멤버들과 사냥터로 향하던 도중, 메르가 나직하게 물었다.

“만약…… 아니, 이제 만약은 아닌 것 같군. 그 황혼의 성정석이란 아이템이 진짜라면, 대장이 그것을 차지할 생각이야?”

“시꺼. 갖고 싶은 건 당연하잖냐. 이 세계에서 그걸 갖고 싶지 않은 녀석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보냐.”

“그건 그렇군. 그럼 묻겠는데, 대장이 살리고 싶은 사람은 역시 유리, 그녀인가?”

“……뭐, 그렇게 되려나.”

그와 난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도, 나도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풍​림​화​산>​의​ 초대 멤버이자 최초의 전사자였던 유리, 그녀의 가련한 모습을.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난 잊고 있었던 과거를 모처럼 끄집어냈다.

4
<​풍​림​화​산>​멤​버​와​ 합류한 후 난 그녀를 데리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아무 저항도 없이 우리를 뒤따라왔다. 우리 멤버는 남자뿐이었지만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 이끌려 유령처럼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혼이 나간 사람과도 같았다. 멤버들은 근심스러운 시선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지만, 사정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이 시작도시 근방을 탐사하러 나간 며칠 동안, 난 숙소에서 쭉 그녀를 돌보았다. 내가 직접 다니는 편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방 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며 발광했다. 내가 오면 비교적 얌전해지는 건, 그나마 내가 얼굴을 약간 익힌 사이이기 때문일까. 그 비교적이란 것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말한 것으로, 물건에 화풀이하던 것을 내 몸에 화풀이하는 것으로 바꾸는 데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사흘이 흘렀을 때,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나가고 싶어.”

또렷한 눈동자와 목소리. 난 급변한 그녀를 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은 도저히 기쁨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그녀에겐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보였다. 긴 흑발을 질끈 묶고 활동하기 쉬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그녀는 방에 굴러다니던 단검 한 자루를 챙겨 내 뒤를 따라나왔다.
난 그저 시작도시의 일부를 보여주며 그녀를 조금씩 적응시켜줄 생각이었지만, 방 밖에 나온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사냥터로 향했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내 안내를 받을 것도 없이, 표지판을 보고 사냥터에 도착한 그녀는 망설임없이 근처의 레벨 1짜리 <리틀 래빗>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 동작은 한없이 엉성했고, 리틀 래빗은 가볍게 이를 피했다. 그러자 유리는 성큼성큼 걸어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애당초 초보들의 경험치 쌓기 용으로 만들어진 생물이었기에, 리틀 래빗은 얼마 못 가 그 칼에 맞았다. 움직임이 느려진 리틀 래빗을 향해 유리는 기계적으로 단검을 내리찍었다. 리틀 래빗의 귀여운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폴리곤이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나조차도 그 모습에 잠시 가슴이 요동쳤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아무 감흥 없이 다음 리틀 래빗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이 잡고 있던 리틀 래빗에도 손을 댔지만, 워낙 기세가 흉흉해 아무도 그녀에게 항의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그녀 대신 내게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의 양만으로도 어깨가 짓눌려질 정도였다.
그렇게 버서커처럼 흉폭하게 사냥하던 그녀가 마침내 사냥을 끝냈다. 아니, 사냥이 종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가까울까. 휘두르던 검을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으므로. 리틀 래빗에게 입은 데미지는 거의 없었지만, 초보가 수 시간 동안 저런 사냥을 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의지가 강한 것과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백 마리가 넘는 리틀 래빗을 사냥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었기에, 그녀가 의식을 잃은 걸 확인하고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그녀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죽은 듯 누워 있다, 나를 채근해 사냥터로 나간다. 그리고 단 1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사냥. 그 요령없음에는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지만, 무지막지한 킬 수가 이를 보충해 주었다. 덕분에 그녀가 사냥터에 등장하면 반경 20미터 정도가 진공지대로 변할 정도였다. 사냥감을 잡을 때의 그녀의 눈빛은 방해하는 플레이어를 용서없이 쳐죽이겠다는 박력을 띠고 있었다. 유리보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도 그녀에게 항의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짜증의 방향은 고스란히 내 쪽으로 향했다.
결국 난 유리가 자력 갱생하도록 돕겠다는 당초의 방침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이봐, 유리 씨. 사냥터를 독점하는 건 매너 위반이라는 사실 알아? 개방되었다곤 하지만, 필드에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해. 적당히 잡은 후 비켜줘야 다른 초보들도 레벨을 올릴 거 아냐."

"......"

"유리 씨? 듣고 있어?"

"......무기 사러 가자."

간만의 대화는 깔끔하게 종료되었다. 그간 여자친구 없는 인생 23년이 지금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지금의 이 여자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내공이 필요할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그녀를 이 모양으로 만든 아츠시란 녀석에게 새삼 불꽃 같은 분노가 일어났다. 이건 연애 진행 중도, 연애 기초 공사도 아니라 그저 공주 대접 아닌가.

"데이트 잘 다녀오슈, 대장."

"여자 길드원이 보호종 수준이란 거 알지? 유리 씨 관리 잘 해."

"시끄러, 이것들아! 레벨이나 올리러 가!"

풍림화산 길드원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난 그녀와 길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내게 사냥터 동행 외의 부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전히 초보자용 옷을 입은 채의 그녀였지만, 이전에 비해선 한결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터 외의 장소에 가는 건 처음이군. 무기 살 돈은 많이 모았어?"

"......."

"어이, 뺏을 생각 없으니까 말해줘. 그래야 뭘 살지 견적이라도 내 보지."

자기 돈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유리에게 난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까지만 해도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돈의 문제도 그렇지만, 길드장인 내가 유리를 돌보느라 길드원보다 레벨이 뒤쳐지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무기까지 구입해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짜증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내 감정을 어렴풋이 읽은 모양이었다.

"......그럼 당신이 다 가져."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유리의 손이 허공에서 몇 차례 움직였다. 곧 내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플레이어 '유리'가 당신에게 3,472콜을 증정하려 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어이.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받아 줘. 밥값......"

"그 얘기가 아니잖아!"

이런. 여자를 상대로 화를 내 버렸다. 그것도 아직 재활이 필요한 여자에게! 하지만 한번 터진 내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계속해서 외쳤다. 불법 접촉 페널티, 즉 유리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 난 흑철궁으로 직행한다는 사실도 이 순간만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내가, 아니, 우리 길드가 널 하숙생으로 생각하고 데리고 있는 것 같아? 넌 우리 동료야! 동료니까 끝까지 함께 살아남고 싶은 거라고! 그러니 정신 좀 차려!"

내 고함을 정면으로 받은 유리는 그대로 몸이 굳더니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은 평상시 사냥터에서 보이는 용맹함과 너무도 달랐다.
그래, 기억난다. 그녀가 애인을 잃었을 때 보였던 그 표정, 그 자세가 지금과 불길하게 겹쳐 보였다. 난 그녀가 항변하기를, 혹은 자신이 우리 동료임을 인정하기를 바랐지만, 이건 어느 쪽도 아니었다.
대로 한복판에서 소리를 꽥꽥 질러대니 구경꾼들이 알아서 모여 주는 게 보였다. 뭐라고 수군대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용은 뻔하다. 나처럼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 약한 여자를 윽박지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겠지. 차라리 거기까지라면 좋겠지만, 세상엔 오지랍이 넓은 자가 너무 많다. 저만치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눈짓을 주고받더니 건수 잡았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고함치는 것만 봤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내 말을 믿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난 놈들에게 말을 붙였다.

"신경 쓰지 마쇼. 길드 내의 일이니까."

"그런가요? 여자분에게도 확인 받고 싶습니다만."

"확인? 너희들이 뭔데?"

이래서는 안 된다 싶으면서도 난 퉁명스럽게 다그쳤다. 그러자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눈빛이나 표정, 자세를 보니 착한 녀석임에 분명했다. 게다가 옆에는 죽이 잘 맞아 보이는 애인까지 끼고 있다. 이 세계에서 사귀게 된 걸까,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내 궁금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 세계에는 권력이란 게 없습니다. 조직이라고 해도 개인들의 연합인 길드 정도가 고작이지요. 그렇기에 거기에 속하지 않은 개인은 타인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전 그런 상황을 막고 싶은 겁니다.”

“얘기가 되지 않잖아. 그러니까 너희가 뭔데?”

“힘없는 자들이 기댈 ’조직’입니다. 지금은 둘 뿐이지만, 우리 생각에 동조하는 이를 모아 활동할 생각입니다.”

밝다. 너무 밝아. 흐트러짐 없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녀석은 사망 플래그를 일찌감치 예약해 둔 거나 다름없다. 아마 현실에서 이 녀석을 만나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난 녀석이 등뒤에 모금함이라도 숨겨둔 걸로 오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항시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소드 아트 온라인>의 세계이다. 이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까지 하는 녀석이 내겐 너무도 눈부셨다.
그래, 인정하자.
난 유리를 구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먹이고 입혔을 뿐, 그녀의 절망을 조금도 받아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자신을 향한 모멸감이 내 혀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를 거두었을 때의 내 각오가 고작 이 정도였나? 난 결국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그녀를 남에게 넘기는 머저리가 되는 건가?
그때였다. 나와 녀석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여자가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신가요? 아가씨의 얘기를 듣고 싶군요. 저 분이 아가씨에게 뭔가 위해를 가한 게 있나요?”

그 말에 유리의 눈에 빛이 조금 돌아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동태 눈깔이 되는 것보단 저 편이 훨씬 낫다. 설령 그녀가 나를 포기하고 저들과 합류하더라도, 그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 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비겁한 회피가 아니냐고 내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지만 난 이를 애써 무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단호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그녀가 <​풍​림​화​산>​에​ 들어온 이래, 다른 사람에게 입을 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사람은.”

유리의 말에 망설임이 살짝 묻어났다. 역시 ‘노’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등을 밀어주는 건 내 역할일 것이다. 난 걱정 말고 떠나란 말을 하려고 했다. 이번엔 제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 예상보다 한 타이밍 빠르게 유리가 입을 살짝 벌렸다. 그 입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대신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내장 속에서 끄집어내듯, 그녀는 말을 토해냈다. 아니, 울부짖었다.

​“<​풍​림​화​산>​의​ 길드장, 내 리더니까!”

그녀도, 나도
그 순간, 조금이나마 구원받았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5
멤버들과 합류한 나는 47층의 사냥터에 도착했다. 우리끼리 ‘개미지옥’이라 부르는, 온통 개미만 득실대는 곳이다. 높은 레벨에 단순한 공격 패턴, 낮은 방어력을 갖고 있어 경험치 앵벌이를 하기 딱 좋다. 이곳이 발견된 이후 이 사냥터에 인적이 끊기는 때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바로 사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앞으로 한 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다. 괜히 새벽에 온 게 아니니까. 대기하고 있던 팀은 <​체​스​토>​,​ 떡대 응원단만 잔뜩 모아둔 듯한 땀내나는 팀이었다. 아무튼 그 팀과는 인사 정돈 나누던 사이라, 리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너희밖에 없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다들 여자 꿰차려고 눈이 뒤집혔나? 결국 이 시기에 이런 데 오는 건 시커먼 남정네들 뿐이구먼.”

“뭐, 너희 팀도 만약…… 아차, 실수. 아무튼 너희도 이리 온 거 보니 인생 막장을 인증하고 있군 그래.”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짐작이 갔다. 보나마나 유리 이야기겠지. 만약 저 말이 끝까지 나왔다면, 내 기분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홀로 거리의 연인을 바라보는 것 만큼이나 얼어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생 막장이라면…... 그렇지, 저기서 한참 레벨업 중이신 경험치 바보 아닐까? 우리는 그나마 여럿이기라도 하지만, 저쪽은 그야말로 솔로니까.”

<​체​스​토>​의​ 리더는 다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짜증이 밴 것을 보니, 꽤 오랜 시간 기다린 것 같았다. 그게 누구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키리토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맵 저편을 노려보았다. 눈에 보일락 말락 한 거리에 있는 골짜기 어귀에서 ‘검은 검사’ 키리토가 날뛰는 게 보였다. 이곳이 경험치 앵벌이 장소라곤 해도 혼자 다니기엔 위험부담이 클 텐데,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쌍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기서 앵벌이라니, 세상 참 좁다. 방금 전 아르고에게 정보를 살 때까지만 해도, 키리토를 만나러 간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지.
멍하니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냥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노매너로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체​스​토>​ 녀석들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며 다른 사냥터로 떠나 버렸다. 이걸로 키리토의 적이 또 늘었군. 솔로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에선 환영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키리토는 강하기까지 하니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십 분 정도 더 지난 후, 드디어 키리토가 사냥을 마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이 먼 거리를 고작 10초만에 주파하다니, 변함없이 엄청난 스피드다. 하지만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달렸는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더니 구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있어서 오른손을 들어 휘휘 젓는다. 상관하지 말고 가란 얘기겠지. 하지만 녀석을 혼자 놔두고 가면 뒤끝이 찝찝한 게 사실이다.
난 팀원들에게 사냥 주의 사항을 내린 후 메르에게 눈짓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팀원들을 통솔해 사냥터로 들어갔다. 녀석이 있는 이상 별 일 없을 것이다. 난 그들이 떠나는 걸 확인한 후 키리토에게 가 회복포션을 건넸다. 나와 둘만 남자, 녀석은 사양하지 않고 받더니 꿀꺽꿀꺽 마셨다.

“노매너 그 자체로구만. 몇 시간이나 있었냐?”

“밤 8시에…… 왔어. 지금 몇 시야?”

내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지금은 새벽 3시였다. 시간을 얘기해주자 녀석은 그게 어쨌냐는 듯 멀뚱하게 날 바라보았다. 내친김에 레벨도 물어보았다. 포션의 답례인지 녀석은 순순히 69,라고 대답해 주었다. 분하지만 그 정도면 나보다 10 이상 차이난다. 이 녀석은 소드 아트 온라인의 세계에서도 상위 3% 내에 들어가는 초고수인데, 그런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레벨업에 매달리고 있다면 역시……

“클라인, 솔직하게 말해 줘. 그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도, 네 본심은 따로 있겠지. 내가 플래그 몹을 노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지?”

……귀엽지 못한 녀석. 기껏 남이 진심으로 걱정해 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키리토, 난 그럴 생각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구. 아르고가 다 불었어. 내가 아르고에게 정보를 샀다는 정보를 네가 샀다는 정보를 다시 내가 샀다……란 이야기지.”

“말하다 혀 꼬이지 않든? 자식아. 그리고 아르고 이 녀석, 자기 입으로 말해 준 정보를 돈을 받고 팔았단 말야?”

“그녀는 돈만 주면 자기 스테이터스라도 팔 걸. 그걸 굳이 궁금해하는 녀석은 없겠지만 말야. 아무튼, 이제 까놓고 이야기할 준비는 되었겠지?”

“그래. 알았다, 이 녀석아. 그럼 제대로 이야기해 볼까? 지금 그 정보를 산 녀석이 한둘이 아닌데, 넌 지금 혼자서 그걸 독차지하려고 레벨업을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당연한 문제였다. 이건 ‘공략’과는 다른 문제였다. 공략은 모두의 생존을 위한 문제인 만큼, 정신나간 솔로가 혼자 보스를 격파한다 한들 대놓고 욕할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플래그 몹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이벤트, 즉 희귀 아이템을 떨어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혼자 잡겠다고 나서는 건, 아이템을 독차지하겠다는 이야기로 비칠 뿐이다. 게다가 정말로 이 녀석은 아이템을 독차지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떠 보기 위해 난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 이야기 때문인가. 소생 아이템, 환혼의 성정석……”

“아아.”

역시 녀석은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난 침을 삼킨 후, 이곳으로 오는 동안 쭉 생각해오던 사실을 다시 이야기했다.

“기분은 알아. 그리고 그 정보가 사실일 가능성도 높지. 하지만 그뿐이야. 소생 아이템? 그런 건 어느 게임에도 늘 존재해 왔어. 하지만 이 세계에선 달라! 최초의 날, 그 개자식이 이야기했잖아! 이건 게임이지만 놀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하지만, 이 세계에서 죽은 뒤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키리토는 약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달라는 애원이 묻어났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키리토에게 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소생 아이템을 향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한 말이었다.

“죽은 뒤에 눈을 뜨면, 저승이 아니라 카야바 아키히코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 지금까지 죽은 녀석은 수천이 넘어. 녀석들 중 하나라도 눈을 떴다면, 그가 모두에게 알려 우리의 너브기어를 벗겼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잖아?
정신차려, 키리토. 이 게임은 진짜야. 우리가 죽으면 너브 기어가 우리의 뇌를 태워 버린다, 그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소드 아트 온라인이란 세계에 짓눌려 죽어 가면서,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던 놈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닥쳐.”

키리토가 쉰 목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어느새 진한 살기와 광기가 한데 섞여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 마디만 더했다간 그대로 칼을 빼들 듯한 흉흉한 기세였다. 반론을 허용하지 않은 채 그는 제멋대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랑 더 주고받을 이야기는 없겠지. 하지만 지난번 플로어 보스 합동 공략 때, Kob의 히스클리프가 말했잖아. 동료의 생명이 살아날 확률이 1%라면, 그 1%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고, 그것을 할 수 없다면 파티를 짤 자격이 없다고 말야. 그 녀석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은 맞다고 생각해.
클라인, 넌 이 세계에서의 죽음이 현실의 죽음과 연결되는 걸 100% 확신할 수 있겠어? 결국 직접 보지 않은 이상 100%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어. 그리고 이럴 수도 있잖아. 이 세계에서 죽은 사람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닐 수도 있지. 크리스찬이 말하는 연옥처럼, 게임 클리어 때까지 대기 상태가 되는 거야. 그렇다면 소생 아이템이 성립할 여지도 있지 않겠어?”

쉰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금씩 흔들렸다. 아마 그 본인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가설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거기 매달리려 하고 있다. 그 나약함을 보니 방금 치밀었던 화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난 솔로인 키리토가 어째서 이렇게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

난 말을 꺼낸 후 잠시 고민했다. 내가 유리의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녀석도 이 이야기를 듣는 걸 진심으로 싫어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키리토의 기억에서 이를 끄집어내야 했다. 끄집어낸 뒤, 할 수 있다면 이를 뿌리째 뽑아내야 했다. 내가 그러지 못하고 있는 만큼, 키리토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키리토, 넌 아직 잊고 있지 않았군. 네가 잠시 몸담았던 길드…… 이제 반 년이나 되었잖아. 솔로로 지내는 것도 그 때문이지?”

키리토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 표정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그런 성질일 것이다.

“고, 고작 반 년이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모두 전멸했어. 나 이외에……”

“<달밤의 검은 고양이 단>이었지? 상황은 잘 알고 있어. 그걸 네 잘못이라 부르는 머저리는 아무도 없어. 벅찬 난이도란 사실을 알고 들어간 던전에서 알람 트랩을 건드린 녀석이 잘못했을 뿐이지. 살아남은 너를 칭찬했으면 칭찬했지, 혼자 살아났다고 꾸짖을 순-“

“그 뒷이야길 못 들었나 보네, 클라인. 난 혼자 살아 돌아온 후, 새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더와 만났어.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리더가 그러더라. ‘비터 주제에, 우리와 관련될 자격은 없어.’라고. 그리고 내 눈앞에서 뛰어내렸지.”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달밤의 검은 고양이 단>은 던전에서 전멸한 게 아니었던가? 리더는 어째서 참가하지 않았었나?그렇지만 키리토의 말이 맞다면, 난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리토에게 어떤 저주보다 강력한 한 마디를 남기고 자살한 남자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단지,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키리토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키리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모두…… 모두 나의 책임이었어. 길드원의 레벨업을 위해 빠른 속도로 진행하던 걸 멈추는 것도, 보상을 무마하는 일도, 알람이 울린 후 전원을 탈출시키는 것도 모두 가능했을 거야. 내가 내 레벨만…… 제대로 말했다면!”

키리토의 말은 반 정도만 맞았다. 그가 사건이 터지기 전에 레벨을 제대로 말했다면, 아마 십중팔구 팀에서 축출당했을 것이다. 길드원들의 눈에는 키리토가 레벨이 낮은 자신들을 희롱하려고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보였겠지. 그렇게 해서 상처를 입고 쫓겨나게 된다면, 그 역시 행복할 리 없는 결말인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키리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1퍼센트도 아니겠지. 내가 크리스마스 보스를 찾아낼 가능성, 그 녀석을 솔로로 쓰러뜨릴 수 있을 가능성, 소생 아이템이 실재할 가능성, 그리고 죽은 놈의 의식이 보존되고 있을 가능성…… 이를 전부 합하면 대체 확률이 얼마나 내려가는 걸까.
하지만 0.0001%, 아니 ​0​.​0​0​0​0​0​0​0​0​…​…​나​유​타​의​ 저편이라 해도 충분해. 결코 제로가 아니야. 제로가 아니니까, 나는 노력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미쳐버릴지도 몰라…… 내가 그때 살아남았던 건 지금의 마지막 기회를 붙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

“……그러냐.”

어느새 내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절절한 키리토의 심정이 내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넌 이만큼 노력했냐고, 네가 환혼의 성정석을 차지할 자격이 있느냐고, 내 심장에 직접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난, 난 대체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 사정은 알겠지만 환혼의 성정석은 내가 가져야겠다고? 아니면 둘이 협력해 보스를 쓰러뜨리고 아이템은 드랍된 쪽이 갖자고?

“……클라인. 그러고 보니 너도 따로 돈이 부족해서 보스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너도, 너도 혹시 살릴 사람이 있는 거야?”

정신차려 보니 키리토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자처럼 곱상한 얼굴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지금 막 생기기 시작한 약간의 동정이 떠올라 있었다. 평소에 짓던 넉살과 허세가 완전히 지워지자, 그간 감추고 있던 연약함이 완전히 드러나 버렸다. 막 그의 비참한 과거를 듣고 난 후라, 그와 몇 마디만 더 주고받았다간 확 끌어안아 버릴 것 같았다. 난 애써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너와 재회하기 전의 이야기야. 우리 길드도 예전에 한 사람이 당했어.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나도 물러설 수 없겠지.”

“그래. 그런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키리토는 위로도, 동조도 하지 않은 채 한숨쉬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세를 보아하니 우리 팀이 사냥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것 같았다. 녀석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건 잠을 자려는 게 아니라 나와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란 걸 알고 있었다. 소생 아이템을 죽은 사람에게 쓰겠다는 목표가 같다면, 그 목표의 우열을 가리는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때가 닥치면 가슴으로, 혹은 몸으로 부딪쳐 결판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그런 서투름을 덮으려, 난 키리토에게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걱정한 건 네놈이 아니라 네놈이 가진 정보일 뿐이야. 네가 이런 데서 뒈지든 말든 소생 아이템은 써줄 생각 없으니 적당히 좀 해.”

6
그날 밤, 유리는 나와 몸을 겹쳤다.
윤리코드의 해방에서부터 처음으로 하는 행위에 허둥대는 나를 리드하는 것까지, 모든 걸 그녀가 주도했다. 난 맹세컨대 그녀에게 이런 행위를 하자고 조금이라도 압박을 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자신이 <​풍​림​화​산>​소​속​이​라​는​ 선언을 한 그날, 내 손을 잡고 여관에 갔다. 유리의 표정에는 약간이나마 홍조가 떠올라 있어, 그녀의 감정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아무 말 하지 말아줘.”

그녀의 그 한마디가 그날 밤 그녀가 한 유일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유리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사냥터만 가면 눈이 뒤집혔다. 이전과 그나마 다를 게 있다면, 내가 하는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한 난 부길드장 메르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렇군. 유리와 대장이 드디어……”

말을 꺼낸 지 4초 후에 바닥에 나뒹굴며, 난 메르에게 상담을 요청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풍​림​화​산>​의​ 브레인인 녀석이었으니까 주먹질 두어 방으로 끝났지, 다른 녀석이었다면 무기를 사용하는 듀얼을 요청했을 것이다. 녀석들에게 유리는 우리 길드의 여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연애 경력이 처음이라 이런 상황이 정상인 줄 모르겠단 말이지.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제3자의 입장에선 뭔가 보일지도 모르잖아?”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메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몸의 3D 세계 애인 없음 경력을 이런 데서 자랑하게 되다니 슬프군. 할 수 없이, 여기선 2D 애인 경력을 바탕으로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거 믿을 만한 거야?”

“일단 들어보기나 해. 유리는 앞장서서 대장과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애정표현이 전혀 없다. 이거잖아?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네. 유리는 그냥 은혜를 갚은 거야.”

“뭐라고?”

“좀 잔혹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들어줘. 유리는 그날 길드 선언을 하면서, 새삼 자기가 대장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걸 그제야 느꼈던 걸 거야. 그래서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보답을 한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죽은 애인이 너무 크게 자리잡았잖아? 안 될 거야, 아마.”

“너, 너…… 그런 얘기를 잘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아……”

난 힘이 빠진 나머지 의자째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다.

“완전히 내 생각이랑 똑같으니 때릴 수도 없네, 이것 참.”

일어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누워 있자니 메르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자 메르는 올백인 머리를 괜히 또 쓸어넘기더니 진중하게 말했다.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제일 나을 거라 생각해. 유리에게 지금 뭔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건 위험해. 그냥 그녀가 선택하도록 놔 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 제기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열심히 고민해. 유리와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끝까지 책임져…… 나쁜 놈! 맹세를 어긴 배신자! 유리랑 잘 먹고 잘 살아라!”

새삼 감정이 북받쳤는지 메르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생각났다. 소드 아트 온라인에 들어오기 전 <​풍​림​화​산>​이​ 결성되었을 때, 전원 25살까지 동정을 유지해 마법사가 되자고 맹세한 바 있었다. 요새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사실 계속 잊어도 상관없었다. 대체 그런 상황에서 ‘전 마법사가 되어야 하니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보냐! 어쨌든 나름 입이 무거운 녀석이라 어디 가서 퍼뜨리진 않겠지만, 소문이 퍼지면 유리와 함께 어딘가로 도망가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겠다.
가상세계에서나마 체리를 졸업했는데, 뿌듯하기는커녕 도리어 짐이 더 는 기분이 들었다. 유리와의 이 어정쩡한 관계를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길드장 대 길드원으로서? 남자 대 여자로서? 소드 아트 온라인 세계에서 일어난 최초의 죽음의 당사자와 목격자로서? 설령 카야바 아키히코라 해도 지금의 내 고민을 해결해주진 못할 것이다. 물론 녀석이 여기서 꺼내준다면야 얘기는 다르겠지만.

유리의 레벨은 그녀의 활약만큼 올라가진 못했다. <​풍​림​화​산>​ 전원의 레벨이 30을 돌파할 무렵에도 그녀는 20대 초반을 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몬스터를 배제하려 했다. 고효율 사냥을 위해선 잡몹은 버리고 경험치를 많이 주는 녀석들을 골라 사냥하는 게 필요한데, 그녀는 <리틀 래빗>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해치워댔다. 내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고민하던 난 결국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녀가 1층부터 꾸역꾸역 진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번 돈을 전이 크리스털에 쏟아부었다. 크리스털로 우리가 진행하는 사냥터에 바로 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녀와 사냥을 함께 진행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크리스털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기에 ? 그래서 다른 멤버들은 크리스털을 사지 않고 직접 이동했다 - 그녀의 무기와 방어구를 구입할 돈이 부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으로 뭉친 길드지만 길드원에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순 없었고, 나 또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신 그녀를 늘 시야에 두면서 유리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회복 포션을 먹였다. 길드원들은 보모 역할은 대장이 전담하라며 내게 모든 걸 떠맡겨서, 난 사냥하는 틈틈이 유리에게 포션을 먹이고 다시 합류하는 식으로 정신 없이 진행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유리의 돈을 관리하기 위해 두 사람의 인벤토리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이걸 가리켜 진도를 나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냥터를 바꾼 덕분에 유리의 레벨이 25가 된 날. 유리가 사냥을 마치고 크리스털로 귀환한 후, 난 멤버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먼저 내려왔다. 숙소에서 쉬고 있던 유리에게 축하인사를 건네자 뜻밖에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클라인은 만족해?”

“뭐, 뭐가?”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단숨에 빨개진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유리는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

“그거였냐……”

그거라면 그나마 답해주기 편했다. 난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물론 지금도 나가고 싶은 생각은 간절해. 하지만 그 생각만으로 살 순 없어. 지금의 난 이 세계에 상당히 적응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유리 당신도 꽤 적응된 것 같고. 처음 봤을 때보다 좋아져 안심했다구. 지금은 나름 사냥을 즐기고 있으니 말야.”

“그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파직, 하고 금이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본 순간 난 섬찟해졌다.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그녀의 무언가를 제대로 건드린 느낌이었다. 조금씩 맑아지던 진흙탕에 막대기를 쑤셔넣고 휘휘 저어대는 게 연상된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뭔가 큰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클라인에겐 그렇게 보였구나…….”

“그, 그래, 맞아.”

이제 와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난 어물쩡 대답했다. 자, 이제 그녀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렇지만 유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가, 내 존재를 시야에서 지운 것처럼 보였다. 조금 빈정상하긴 했지만 원인제공을 내가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이내 납득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밤, 유리는 아무도 모르게 숙소를 빠져나와 투신했다.
흑철궁의 비석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걸 본 것은 다음 날이었다.

7
여전히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며칠째 잠을 거의 자지 못해 난 상당히 볼썽사나운 몰골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이, 메르가 <​풍​림​화​산>​을​ 지휘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맘은 정한 거야?”

난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 숙였다. 다행히 녀석은 어느 쪽이냐고 묻지 않았다.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장비로 무장한 <​풍​림​화​산>​은​ 은밀하게 출격했다. <배교자 니콜라스>의 출현정보는 이미 식상해졌을 만큼 널리 알려진 정보라, 어지간한 길드는 모두 사냥터로 떠난 뒤였다. 그 큰 흐름 속에서 우리만 살짝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았다면 의아해 할 만한 길이었지만, 내겐 확신이 있었다. 키리토라면 반드시 정확한 포인트를 찾아냈을 것이란 예상. 난 이를 철저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미행과 추적 스킬이라면 이 세계에서 월등한 인재인 솔로 플레이어 ‘한조’를 섭외해 그를 계속 감시하게 했고, 마침내 오늘 키리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한조가 길 곳곳에 남긴 신호를 따라 가며, 난 잠시 후 ‘녀석’과의 대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은 나름 건설적이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엔 그럴싸한 변명과 표정 연기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풍​림​화​산>​을​ 발견한 ‘녀석’의 표정을 본 순간, 내 안에 있는 계획들은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클​라​인​?​”​

숲 속에 고독하게 서 있던 <검은 검사> 키리토의 눈에 혼란과 충격이 그대로 떠올랐다. 자신만이 아는 비밀 장소를 어른에게 들킨 아이의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상처받은 그 눈빛은 ‘못 본 척해 줘! 그냥 여길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 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마음의 외침을 외면했다. 이제부터 그와 나눌 눈빛,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리란 사실을 무겁게 새기며, 난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가는 길이라고 하진 않겠어. 형편 좋게 우연히 만났다고도 말 못하겠군.”

“…………너, 내 뒤를 밟은 거냐..”

“그래. 솜씨 좋은 녀석에게 널 미행하게 했어. 너라면 반드시 제대로 된 이벤트 장소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

키리토의 얼굴에서 급속도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메마른 얼굴로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와서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권해 보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녀석을 같이 잡자. 아이템 이전에, 보스급인 몬스터를 너 혼자 잡을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는 거야? 오기는 그만 부리고 우리에게 붙어. 최단시간 내에 녀석을 썰고, 아이템은 드랍된 쪽이 갖는 걸로 하자고! 네가 원한다면 마지막 일격은 네가 하게 해 줄 수도 있어!”

이게 현 상황에선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배교자 니콜라스>를 빠른 시간 내에 잡지 못하고, 그 사이에 다른 길드가 끼어들어 뒤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그리고 키리토가 아무리 짧은 시간에 노가다를 했다 한들, 보스 몬스터를 혼자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짓이다. 또한 아이템 드랍률을 대폭 상승시키는 마지막 일격을 양보해 준다는 카드까지 내비쳤다. 키리토에게 아직 충분한 이성이 있다면 분명 구미가 당길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그에게 그럴 이성도, 여유도 없다고 한다면?

“그래선 의미가 없어, 클라인.”

“뭐라고?”

“쥐새끼, 찾았다.”

키리토가 나른하게 중얼거린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그의 손이 내게도 간신히 보일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검은 그의 오른편 허공에 묵직한 궤적을 그은 후 빠르게 검집 안에 도로 수납되었다. 그 직후, 내가 잘 아는 목소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으캬아아악!”

허공이 일그러지며 폴리곤이 튀더니, 강제로 은신이 풀린 한조가 중상을 입은 채 나뒹굴었다. 직전까지 우리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한조의 은신술은 수준급이었는데, 키리토는 ‘은신한 자가 근처에 있다’란 정보만으로 이를 단숨에 읽어낸 것이다. 대체 어떻게? 라며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키리토는 어느새 다시 검을 빼들고 한조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멈춰!”

난 카타나를 빼는 것과 동시에 키리토에게 달려들었다. 키리토는 한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는 그야말로 텅 비어 있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연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에 절망해야 나올 수 있는 심연의 눈동자. 키리토에 앞서 그런 눈을 완성했던 사람을 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눈을 감는 대신 그 눈을 마주보았다. 지금 당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눈을 피할 순 없었다.  
키리토의 시선이 잠시 옮겨진 걸 기회로 판단한 것일까. 빈사상태일 한조가 마지막 힘을 쥐어짠일격을 키리토에게 날렸다.

“엿먹어라, 살인자 새끼!”

한조의 손에서 독이 묻은 단검이 번뜩였다. 한조만 아는 배합으로 만들어진 저 독은 스치기라도 하면 수면과 중독 증상이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키리토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몸을 뒤로 젖혀 피한 후 옆으로 힘껏 뛰어 내 공격까지 피해냈다. 그 순간은 정말 찰나였기 때문에, 공격을 한 우리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할 정도였다.

“제길, 키리토! 너 미쳤냐!”

한조에게 회복 크리스탈을 던져준 후 난 꼭지가 돌아 외쳤다. 지금 키리토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살인 미수였다. 만약 한조의 레벨이 지금보다 3정도만 더 낮았다면 그의 육체는 지금쯤 너브기어에 의해 통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한조나 나의 행위는 분명 노매너였지만, 죽을 죄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키리토의 과격한 행동을 목격한 단원들은 어느새 굳은 얼굴로 무기를 꺼내 키리토를 겨냥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키리토는 여전히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전부 베어버릴까.”

그가 무심히 중얼거린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다른 녀석들도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키리토의 레벨은 소드 아트 온라인 세계의 최상위. 게다가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친다 해도, 저 녀석을 제압하는 사이 반 이상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방금 우리가 이용했던 워프 게이트가 다시 한번 빛을 뿜더니 대규모 인원을 토해냈다. 얼핏 봐도 서른 명은 넘을 듯한 머릿수였다. 게다가 전원 할버드를 장비한 게 이색적이었다. 할버드에 미쳐 사는 놈들이라면 분명 <​성​룡​연​합>​일​ 게 뻔했다. 비겁한 수단, 심지어 살인까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글러먹은 패거리가 바로 녀석들이다. 그런 놈들이 이렇게 우리와 거의 동시에 여기 도착할 수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라면……

“한조, 네녀석! 이중으로 정보를 팔았냐!”

“응. 미안하게 됐군.”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그는 개운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실 돈은 저쪽이 더 줬는데, 당신이 먼저 의뢰했던 걸 우선시해서 특별히 먼저 모셔온 거라구. 성룡연합엔 5분 늦게 전갈을 보냈으니까. 게다가 하마터면 저 미친 놈에게 죽을 뻔했으니, 이정도면 억울하진 않겠지?”

“빌어먹을 놈, 꺼져 버려!”

메르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한조를 섭외한 게 메르 본인이었던 만큼, 지금 얼마나 엿 같은 기분일지 짐작이 간다. 한조는 나와 메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공간이동 크리스탈을 사용해 사라졌다. 녀석도 이중 계약이 들통나면 곤란하니 잽싸게 도망친 거겠지.
자, 이제 어쩐다? 성룡연합의 절도 있는 발소리가 우리를 무겁게 압박했다. 이 정도 인원 차이라면 필패는 확정. 게다가 녀석들과 그리 친하지 않은 만큼 타협의 여지도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꽁지를 말고 도망치긴 싫었다.

“클라인, 같은 수법으로 당하니 어때?”

등뒤에서 키리토가 내게 말을 건넸다. 조롱하는 내용이었지만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어쨌든 그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난 성룡연합과 싸우며 <배교자 니콜라스>를 잡을 수 있을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곁을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착각하지 마.”

내게 등을 보인 채, 키리토는 검을 꼬나쥐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풍​림​화​산>​ 멤버가 아닌 <​성​룡​연​합>​ 쪽이었다.

“널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날 방해하는 놈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싶을 뿐이니까.”

“어, 어이. 너 설마……”

“그러니까…… 넌, 이 빌어먹을 세계를 좀더 즐기라구.”

-클라인, 이 세계가 너와 함께 행복해지려는 게 싫었어.

키리토의 처참한 미소 속에 그녀의 마지막 말이 겹쳤다.
그녀와 같은 눈을 보여준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런 말까지 하는 건 반칙이란 말이다!!!

“젠장! 거기 서!”

난 <​성​룡​연​합>​에​ 돌격하려는 키리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녀석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급히 소리쳤다.

“가! 키리토! 여긴 우리가 막는다! 넌 보스를 쳐죽여! 그리고 죽기만 해봐, 자식아! 이렇게 보내줬는데 내 눈앞에서 죽어버리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아아.”

키리토의 고개가 희미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내 손을 뿌리치고 전력으로 숲을 향해 달려갔다. 인사를 바라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니 길드에 더더욱 면목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오늘 출발할 때부터 난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며칠간 <환혼의 성정석>이 나와 키리토 중 누구에게 더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저울질했지만, 그 추가 내 쪽으로 기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은 이를 향한 서로의 애정을 비교한다면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것을 원하는 절박함이었다. 그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모두 키리토의 압승으로 끝났다. 만약 키리토가 그 아이템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그는 다음 날에라도 폐인이 되거나 자살할 수도 있으리라. 대체 <달밤의 검은 고양이 단>의 누구를 살리려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 절박함은 내가 유리를 살리려는 희망을 압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유리가 과연 자신이 살아나는 걸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나와 키리토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길드원들에게 힘껏 허리를 숙였다. 처음부터 방침을 확실히 정해야 했다. 이 바보 같은 쟁탈전에 참여한 건 길드의 의지가 아니라 순전히 내 독단이었다. 길드원들은 묵묵히 내 의견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성룡연합과의 전면전이었다. 설령 이런 내가 용서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죄해야 했다.

“이렇게 됐다. 미안.”

진심을 담아, 난 간결하게 사죄했다. 이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기껏 싸워 준다는 키리토를 왜 물렸냐고 따지지 않을까…… 싶었을 때, 갑자기 내 등을 유쾌하게 두들기는 손이 있었다.

“괜찮아, 대장. 덕분에 돈 좀 벌었어. 대장이 마지막에 키리토를 돕는다는 쪽에 제대로 걸었거든.”

“뭐, 라고?”

난 허리를 들었다. 메르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나머지 멤버도 <​성​룡​연​합>​을​ 향해 무기를 겨눈 채 이쪽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사실 우리 전부 그쪽에 걸었어. 대장이야 처음에 <환혼의 성정석>을 자기가 갖겠다고 큰소리쳤으니 내기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당연히 반대쪽이겠지? 그러니 돌아가면 한턱 거하게 내셔야겠어.”

나와 눈이 마주친 메르가 눈을 찡긋 했다. 남자 놈에게 윙크를 받는 걸 바란 적은 일분 일초도 없었지만, 지금만은 그냥 순수하게 감사하기로 했다. 이놈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나를 따르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이 녀석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뿐이다.

“그래. 네놈들이 이겼다. 돌아가면 아주 길드 비자금을 탈탈 털어서라도 한턱 낼 테니까, 모두 살아서 돌아가자.”

이 말은 거진 나를 위한 다짐이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우리는 필패.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 단 하나 있었다. <​성​룡​연​합>​의​ 두목인 <​학​살​자>​ 듀라스가 듀얼이라면 환장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줄 열쇠였다.

“어이, 듀라스! 나랑 승부하자! 깔끔하게 대장끼리 붙는 거다!”

“대장!”

이런 일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메르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난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지척까지 다가온 거한을 노려보았다.

“호오, 클라인. 조무라기 길드 대장 주제에 간이 크군.”

<​성​룡​연​합>​의​ 리더인 듀라스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녀석과는 과거 몇 차례 일면식이 있었지만,적으로 두고 보니 과연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고릴라처럼 거대한 덩치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성​룡​연​합>​의​ 길드원들이 히익 하며 물러났다. 우리 길드원들도 표정이 매우 볼만해졌지만 물러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헹, 보고 본받으라지. 이런 일당백의 요원들을 한 사람이라도 잃는다면 난 오늘 부로 길드를 해체하고 아인크라드에서 뛰어내려 버릴 테다.

“시답잖은 거래나 요청하려고 했다면 단숨에 쳐죽이려 했는데, 의외로 배짱이 좋구나.
하지만 내게 듀얼 신청이라니, 도전을 받은 게 얼마만이려나?””

듀얼 전적 21전 19승 2무. 무패의 전적에 더해, 듀라스는 그중 10명의 상대를 저승으로 보낸 화려한 공적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듀얼을 할 땐 갑옷을 벗곤 했다. 공격할 테면 해보라는 자신감일 테지만, 그에게 치명타를 입힌 자는 여지껏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할버드를 풍차처럼 돌리는 그의 전법에 한번 말려들면 그대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몸서리쳐지는데, 그는 쓰러진 상대방을 단숨에 죽이는 게 아니라 발로 가슴을 서서히 짓밟아 죽이는 걸 즐겼다. 덕분에 놈은 ‘절대 듀얼을 해서는 안 되는 인물’ 순위에 키리토나 히스클리프 등을 제치고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위용 덕분에 <​성​룡​연​합>​이​ 짧은 시간 동안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지는 쪽은 깨끗하게 물러가기로 하는 거다. 불만 없겠지?”

“상관없다. 네 놈의 목숨 값이라면 그 정도는 되야겠지. 네 부하들에겐 손대지 않으마.”

“헹. 벌써부터 거만해하지 말라고, 형씨.”

난 카타나를 고쳐잡으며 듀라스에게 듀얼 신청을 했다. 모든 기술 사용 가능, 한 가지만을 뺀 모든 승리 조건 활성화. 듀라스는 듀얼 메시지를 받고 자신의 갑옷을 해제하며 일부 조건을 수정했다. 내가 체크한 승리 옵션은 모두 해제되고, 내가 유일하게 찍지 않은 ‘상대의 HP 소멸’만이 그의 승리 조건으로 변경되었다. 즉 내 쪽에선 듀라스의 무기를 파괴하거나 녀석의 HP를 위험 영역으로 진입하게 하면 승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듀라스 쪽은 날 죽이는 것으로 승리. 난 망설이지 않고 수정된 요구를 받아들였다.

“빨리 끝내자구. 우리 길드원들이 배가 고프다고 울고 있어서 말야.”

-지금부터 30초 후 듀얼을 시작합니다.

극단적인 승부 조건 때문에 시간이 평소보다 길게 주어졌다. 30초라는 시간은 사용하기에 따라 굉장히 유용하다. 그 시간 안에 난 녀석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녀석은 나보다 레벨도, 장비도 우위였다. 다만 내 쪽이 스피드에서 앞서고 있다. 일격이탈 전법으로 가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하다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그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걸 버리고 일격에 승부를 봐야 할까? 아니, 그건 더더욱 바보짓이다. 여지껏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놈들이 어떤 식으로 박살났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역시 여기선 어떻게든 일격이탈 쪽이 무난해 보인다…..
 
“기대하라구. 유리라고 했나? 그 아가씨 옆으로 보내 줄 테니까.”

“뭐?”

난 내 귀를 의심하며 듀라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초. 그는 축축한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내게 다시 말했다.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그 까만 머리 여자가 뛰어내리려던 걸 네 녀석이 붙잡았던 걸. 나도그때 그 자리에 있었지. 그때 그 여자를 내가 구했더라면 당분간 재미있게 굴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꽤 후회했다고. 그래서 네 녀석이 그년을 머저리처럼 관리해 죽어버렸다는 걸 알고 매우 안타까웠지. 얼굴이나 몸매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말야.”

이제 기억났다. 듀라스는 항상 승부 전 상대를 도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기 말로는 상대의 실력을 처음부터 100퍼센트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보단 흥분한 상대를 차분하게 요리하려는 고약한 심보일 것이다. 그러니 침착해야 한다. 녀석의 도발에 말려들어가는 짓은 해선 안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머리속에 섬광처럼 작전이 떠올랐다.

-듀얼을 개시합니다.

“개자식, 넌 죽었어!”

급히 떠올린 작전을 명심하며 난 무모하게 돌격했다. 방금 전 폐기했던 가장 무모한 전법, 일격필살 자세였다. 달리느라 흔들리는 내 시야에 듀라스가 할버드를 들고 휘두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피하기 가장 어려운 방향으로 할버드의 날이 매섭게 날아왔다. 아마 내가 이성을 잃었다면 저걸 맞고 끝장났을 테지만, 지금의 난 분명 냉정했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어 보였기에, 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힘껏 할버드의 날을 걷어냈다. 콰창! 쇠와 쇠가 거칠게 부딪치는 순간, 내 몸은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디딤발에 힘을 잔뜩 주고 있어서 뒤로 밀려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장! 힘내!”

“듀라스 대장, 녀석을 죽여 버려요!”

모두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나와 듀라스는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듀라스는 내가 분노로 이성을 잃은 거라 생각해 주는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변칙을 섞는 게 가능해진다. 힘겨루기는 내가 질 게 당연했기에, 난 버티는 시늉을 하다 갑자기 손에서 검을 반쯤 놓으며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했다. 그러자 목표물을 잃은 할버드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날이 완전히 지나가자마자 난 공중에 떠 있는 카타나를 움켜잡고 다시 듀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할버드가 완전한 가속도를 얻지 못한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큭, 우오오!”

듀라스는 당황했는지 할버드를 급히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재차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엔 충분한 속도가 붙지 않았다. 난 망설이지 않고 내 왼팔로 할버드를 막았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팔이 잘려 나가고, 그 마찰로 할버드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졌다. 난 그순간 내 사정거리에 들어온 그의 팔을 용서 없이 베어넘기고, 다음 동작으로 녀석의 복부에 카타나를 쑤셔넣었다. 갑옷이 없었기에 내 검은 녀석의 근육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

쿵, 하고 할버드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HP가 레드 존에 돌입했다. 이것으로 승리조건 두 개를 클리어. 듀라스가 입을 열 틈도 없이, 허공에 메시지 창이 새롭게 떴다.

-클라인 님의 승리입니다. 듀얼을 종료합니다.

“들었지? 이걸로 끝이다…… 꺼져 버려.”

난 카타나를 빼 검집에 집어넣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니, 사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리속이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듀얼의 최고수 듀라스를 상대로 팔 하나만 내주고 이겼다니! 생사의 고비를 막 넘긴 뒤라 기쁨 같은 감정보단 얼떨떨한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난 이런 표정을 <​성​룡​연​합>​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 길드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내 표정을 본 메르는 막 환호하려던 길드원들을 제지한 후 날 부축해 앉혔다. 여기서 녀석들을 자극하는 것보단 ‘너희들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란 기백을 보이는 정도로 그치는 게 가장 좋았다.
<​성​룡​연​합>​의​ 멤버들은 내가 자리에 앉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듀라스에게 달려갔다.

“대장! 회복 크리스탈을!”

“……저리 치워!”

듀라스는 부하가 내민 크리스탈을 거칠게 쳐냈다. 상처입은 자존심 때문일까.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는 날 노려보았다.

“네놈…… 앞으로 마음 편히 다닐 생각은 접어야 할 거다.”

“상관없어. 도전은 언제라도 받아주지.”

결정했다. 오늘 돌아가는 대로 듀라스가 찾지 못할 만한 곳으로 아지트를 옮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난 짐짓 호기롭게 대답해 주었다.

“크…… 네놈들은 먼저 돌아가! 난 다른 볼일이 생겼다!”

듀라스는 이를 부득 갈더니 <​성​룡​연​합>​에​게​ 명령을 내리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키리토가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랑하던 할버드를 놔 두고 갈 만큼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성​룡​연​합>​ 멤버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대장과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할버드만 수습해 자리를 떴다.
<​성​룡​연​합>​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풍​림​화​산>​은​ 환호했다.

“멋졌어, 대장! 정말 다시 봤어! 저 괴물을 단칼에 이겨 버리다니!”

“단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운 좋게 이겼어. 녀석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접근 한 번 못해보고 졌을지도 모르지.”

만약 듀라스가 날 도발한다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패했을 것이다. 녀석은 분명 유리 얘기만 나오면 내 눈이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속아넘어간 척 했을 때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거겠지. 하지만 요 며칠 간 키리토와의 기싸움 때문에 머리가 차가워져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내 체력은 레드 존까지 가진 않았기에 난 회복 크리스탈을 쓰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탈이야 언제든 쓸 수 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키리토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이다.

“서둘러 움직이자. 키리토가 살았으면 그걸로 된 거고, 죽었다면 녀석의 복수를 한다. 모두 지금 출발한다!”

“오오!”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어느 쪽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우렁차게 대답했다. 나도 정신적으론 매우 피곤했지만 여전히 싸울 수 있었다. 아마 키리토는 지금도 싸우고 있을 테니, 우리 길드가 가서 적당히 도와 주면 녀석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이템 배분은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일단 녀석이 죽지 않게 돕는 게 우선이었다.
막 움직이려는 찰나, 메르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살아 돌아왔잖아!”

“뭐?”

난 뒤를 돌아보고 마찬가지로 입을 벌렸다. 방금 쏜살같은 속도로 사라졌던 키리토가 그 방향에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이벤트 몹을 잡았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벤트 몹인 만큼 공격력에 비해 체력이 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스 몹을 키리토 혼자 잡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키리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걸어왔다. 무거운 발소리에 우리까지 괜히 기분이 무거워져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아까와 달리 피가 튀고 구멍이 뚫려 넝마가 된 검은 코트 안에서 그의 축 처진 어깨가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냥을 마치고도 저런 기분인 걸까. 혹시 <환혼의 성정석>이란 정보가 잘못되었던 것이었을까?
지척에 다가온 후에야 그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흘끔 보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머리수를 확인하는 듯했다. 그 짧은 시선이 내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대체 무슨 위로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비참한 표정이 그의 지친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여어, 클라인.”

“……키리토. 어떻게 된 거야……?”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난 그에게 물었다. 지난 일주일 간 그를 지탱해주었던 그 아이템을 보스 몹이 떨어뜨리지 않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키리토에게 우선권을 양보한 것뿐이지, 나 또한 여전히 그 아이템에 흥미가 있었으니까.
내 질문을 들은 키리토는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내게 던졌다. 난 엉겁결에 받아들고 헛숨을 삼켰다. 영롱하게 빛나는 그 아이템은 분명 <환혼의 ​성​정​석>​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걸 내게 준 걸까? 그는 뜸들이지 않고 바로 말해 주었다.

“그거, 소생 아이템은 맞더라. 죽은 지 10초가 안 된 놈만 쓸 수 있다고 하니, 네 주변에 누가 뒈지면 써 주지 그래.”

“……!”

<​풍​림​화​산>​ 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죽은 지 10초라니! 그렇다면 이미 죽은 자들에겐 그림의 떡도 되지 않는 물건 아닌가. 물론 여전히 유용한 물건인 건 맞지만, 그렇다면 키리토와 내가 지난 일주일 간 고민했던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난 새삼 카야바 아키히코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사람에게 무책임한 희망을 안겨 주었다가 그 배의 절망을 떠넘겨 버리는 이 이벤트 덕분에 키리토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 버렸다. 차라리 난 중간쯤부터 키리토에게 이것을 양보할 생각을 갖게 되었기에 미련이 덜했지만, 키리토는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목숨마저 내걸고 홀로 고독하게 싸워 왔던 것이다.
키리토는 날 빤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난 그가 행여라도 대시를 써서 이 자리를 이탈할까 봐 그의 어깨를 잡았다.

“키리토…… 키리토……”

입은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절망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결국 그뿐이었다. 희망을 잃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을 도무지 생각해낼 수 없었다.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말뿐이었다.

“키리토…… 넌 살아남아라.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살아서 무사히 현실로 돌아가……”

이대로 놔두면 키리토는 분명 죽는다. 그가 어떤 방식의 죽음을 택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그를 보내면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난 진심으로 그가 살기를 바랐다. 살아서, 이곳을 함께 빠져나간 후 현실에서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키리토는 대답 대신 내 손을 뿌리쳤다.

“그럼.”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 같은 육체를 질질 끌며 키리토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저거……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메르가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난 손 안의 <환혼의 성정석>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며, 키리토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약한 희망이 거대한 절망으로 바뀌는 그 불합리한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갔다.

“대장!”

메르가 날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 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내 손은 <환혼의 성정석>을 움켜쥐고 그대로 으깨 버리려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행동으로 아이템이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메르의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보였겠지.

“유리를 다시 보진 못하겠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쓰잘데기없이 이게 무슨 꼴이냐.”

“대장…… 아니, 클라인……”

“두 시간 뒤에 돌아갈 테니 너희 먼저 돌아가라.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키리토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게 너무 많았던 걸까. 나를 위한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난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맞춘 후 <환혼의 성정석>을 손에 쥔 채 걷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키리토가 이벤트 몹을 잡은 곳. 왜 거기로 향하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메르가 뭐라고 외쳤지만 내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풍​림​화​산>​멤​버​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아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먼저 돌아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난 키리토가 싸웠던 장소에 도착했다. 격전이 벌어진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기에 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파괴 불가능한 전나무들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바닥의 눈이 패인 정도만 보더라도 어떤 싸움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현장을 살피던 내게 문득 이질적인 풍경이 눈에 띄었다. 저만치에 사람 한 명이 뒹군 듯한 흔적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것은 전투 때문에 생긴 자국이 아닐 것이다. 주변은 깨끗했지만 그곳만 유난히 움푹 패었다. 그렇다는 건, 키리토가 그곳에서 홀로 뒹굴었다는 얘기였다. 어째서 뒹굴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다 끝이군. 너도, 나도.”

유리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내 희망은 키리토의 희망과 더불어 산산히 소멸되었다. 난 <환혼의 성정석>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드러누웠다. 키리토가 이미 내 몫까지 몸부림쳤기에, 새삼 뒹굴거릴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고 싶을 뿐이었다. 유리의 마지막 유언을 어기고 그녀를 도로 살려내려던 바보짓의 대가가 바로 이것이었다. 키리토에 비하면 매우 싼 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그런 비교를 하기엔 너무 비참했다.

“유리…… 유리, 보고 싶어……”

메말랐던 내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엔 유리를 위한 눈물인 걸까.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것이 사랑이든, 애정이든, 혹은 동료애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살리지 못한 사람, 내 눈앞에서 최초로 죽은 그녀가 몸서리쳐지게 그리웠다. 눈앞에 존재하는 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난 과거에 느꼈고,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눈물은 얼마 나오지 않고 그쳐 있었다. 눈물이 그치자 허무가 밀려올 뿐이었다. 눈밭에서 홀로 허무를 곰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그 사실마저 곧 허무해졌다. 지금 무엇을 하든 간에 여기서 홀로 뒹굴거리는 것보단 생산적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키리토가 어떻게 되든 이젠 내 알 바 아니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돌아가 볼까, 유리.”

혼잣말이 많아 지면 미쳐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던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유리의 이름을 불렀던가? 난 지난 몇 달간 의식적으로 입밖에 내지 않았던 그리운 이름을 다시 불러 보았다.

“유리.”

대답은 없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이런 디지털 세상에서는 유리의 유령마저도 기대할 수 없을 터였다.

“소생해, 유리.”

그래도 난 <환혼의 성정석>을 손에 쥔 채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리운 울림이 적막 속에서 울려퍼졌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가 소생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내가 설정한 알람이 조용히 울렸다.

-클라인, 이 세계가 너와 함께 행복해지려는 게 싫었어.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유리의 유언이었다.
그녀가 돌연 투신했을 때, 내 인벤토리에는 약간의 돈과 녹음 크리스탈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를 틀어 보자 그녀의 냉정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와 함께 행복해지기 싫었다는 그녀의 말은 언제, 어느 때든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며칠 동안이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숙소에서 뒹굴던 나는 겨우 해결책을 발견했다. 차라리 그녀의 저 말을 내 알람으로 설정해 두기로 한 것이다. 저 말이 환청으로 하루 종일 내 귓가를 떠도는 것보단 차라리 매일 몇 번씩 직접 듣는 게 나았다. 얼마나 피곤하든, 얼마나 정신이 없든 간에 저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으므로 알람으로 딱 적격이었다.
내가 유리를 살리려던 건 결국 이 말을 왜 한 거냐고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렇게 네게 잘못했냐고, 벗어나지 못할 세계를 즐기려던 게 그렇게 잘못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죽은 자를 애써 되살리려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불순한 의도에 과연 유리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남아 있긴 했던 걸까. 지금의 난 그 질문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한 시간 전에 맞춰 둔 알람이었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난 알람을 끄려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했다.

“돌아와 줘, 유리……”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등줄기에 서늘한 금속이 파고들었다.

“…………!”

난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겨우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보았다. 먼 발치에서 거한이 나를 향해 소리지르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몇 자루의 단검을 보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저 녀석이 내 등에 단검을 던진 게 분명했다. 난 애써 조소하며 그를 조롱했다.

“하……. 자랑하던 할버드는?”

“닥쳐!”

날 따라온 건지, 아니면 이 자리에 매복하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건 빠르든 늦든 언젠가 일어났을 일이 지금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온 듀라스는 문답무용으로 날 걷어찼다. 듀얼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인 공격은 그에게 조만간 살인자 표식을 달아줄 터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항상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응, 클라인?”

그는 내 가슴에 발을 올려놓고 힘껏 짓밟았다. 우드득 하며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현실이었다면 이 고통만으로도 까무라쳤을 터였다. 게임에선 고통이 일정 영역을 넘어가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힘은 거의 없었다. 스테이터스 창을 열지 않아도 내 HP가 위험 영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듀라스와 싸운 데미지가 회복되지 않은 데다, 아까 내가 갖고 있던 유일한 회복 크리스탈을 한조에게 줬기 때문에 이 데미지를 회복할 길이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얼른 죽어버려!”

듀라스의 거대한 발은 바위처럼 날 눌러 왔다. 그 서슬에, 등줄기에 박혀 있던 단검이 마침내 내 심장을 관통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치명적인 일격’이란 메시지가 뜨며, 내 HP는 마침내 보라색이 되었다. 그와 함께 눈앞에 ‘Game Over’란 메시지가 섬뜩하게 출현했다.
이것이,
죽음이란 걸까.
추락하던 그녀는 언제 이 메시지를 보았을까?
내가 죽으면,
난 그녀와 같은 곳에 갈 수 있는 걸까?
이제,
그만,
이 세계를 떠나도 되는 걸까?
.
.
.
-……클라인.

몽롱해지던 내 의식이 튕겨지듯 부상했다. 내 가슴에 여전히 발을 올린 채 히죽대는 듀라스 때문이 아니었다. 내 녹음 크리스탈에서 울리는 유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마지막 순간까지 싸늘했던 유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당신 때문이 아냐. 나 때문이야…… 하지만, 이런 날 용서해줘……

맙소사! 그제야 난 내 실수를 깨달았다. 녹음 크리스탈을 처음으로 재생했을 때 그녀가 한 마디만 남겼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실상은 처음으로 말한 뒤 한참의 간격을 두고 다시 말했던 것이었는데, 난 그 간격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이를 알람으로만 쓰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꾸물거리지 않고 알람을 껐기 때문에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도 당연했다.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난 더 이상 이를 여유 있게 들을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10초의 유예가 곧 끝나려 하고 있었다.

“소생, ​클​라​인​!​!​!​!​!​!​!​”​

내 주먹 안에 있는 <환혼의 성정석>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난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내 몸을 감싸며, 보라색 영역에 있던 HP가 단숨에 반전하며 치솟았다. 동시에 나를 관통하고 있던 단검이 쑥 밀려나 바닥에 떨어졌다. 키리토가,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내가 그렇게도 바랐던 ‘소생’은 이렇게나 간단했고, 또 허무했다.

“네, 네 녀석! 어떻게…… 아! 그 아이템!”

애초에 아이템을 노리고 뒤치기를 하러 왔던 주제에, 한번 크게 데이고 나니 그 사실마저 머리속에서 날아간 모양이었다. 난 녀석의 둔함에 감사하며 검을 뽑아 나를 누르는 다리를 그었다. 듀라스의 발목 부분이 그대로 날아가며 폴리곤으로 변해 흩어지자,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그의 위로 올라탄 나는 볼 거 없이 주먹을 날렸다. 그 와중에 검으로 그를 찌르지 않았던 것은, 아직까지 살인을 저질러본 적이 없었던 내 최후의 양심 덕분이었을 것이다.

“개자식아, 기분이 어때? 응? 네가 했던 거랑 똑같은 방식으로 죽여줄까?”

난 녀석의 배 위에서 으르렁댔다. 여기서 이 녀석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회복 크리스탈을 쓰지 않았기에, 발목이 베인 것만으로도 녀석의 HP는 다시 레드 존에 돌입했다. 게다가 먼저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녀석을 죽인다 한들 살인자 표식은 뜨지 않을 것이었다. 또 이 근방에는 우리 둘을 제외하면 목격자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듀라스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려줘, 클라인. 잘못했다.”

“내가 왜 널 살려둬야 하는지 한 열 개 정도 이유를 더 대 봐.”

“그, 그건! 일단 내가 죽으면 <​성​룡​연​합>​이​ 너희를 몰살시킬 테고……”

듀라스는 되는 대로 주워섬겼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 목줄을 죄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녀석을 죽여 없애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게다가 만약 내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리더를 잃어 쇠약해진 <​성​룡​연​합>​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했다. 거기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 녀석을 여기서 처단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 느낌이었다.

“조잘조잘 시끄럽네. 너 원래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잖냐.”

“네 녀석이….. 아니, 네가 말하라고 했잖아!”

벌써 여섯 개쯤의 이유를 주워섬기고 있던 녀석은 억울한 어조로 외쳤다. 하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녀석의 손이 아까 떨어진 단검으로 슬금슬금 향하고 있다는 데서 그의 진심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네가 죽을 이유를 스스로 말하느라 수고했어. 그럼 잘 가라.”

“잠깐……!”

난 더 듣지 않고 있는 힘껏 녀석을 후려갈겼다. 그 한 방으로 녀석의 HP는 제로가 되었다. 듀라스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몸이 투명해져 갔다. 녀석의 입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게임 오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음성을 발하는 게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것이다.
듀라스의 거구는 고작 10초라는 시간 동안 폴리곤 가루로 분해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죽는 당사자에게도, 죽음을 내린 나에게도 영원처럼 느껴졌다. 사르륵 흩어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듀라스는 끊임없이 입을 벌렸다. 난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이 분해될 차례가 되자, 그는 날 노려보며 뭐라고 외쳐댔다. 음성이 지원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보나마나 살인자 새끼 어쩌고 하는 게 뻔했지만, 거기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몸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그의 소지품이 와르르 드랍되었다. 이것이 그의 죽음의 증거였다. 어차피 흑철궁의 비석에 지금 막 그의 이름이 새겨졌을 테니, 이를 놔두고 가는 것보단 모두 회수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그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으니, 이걸 가져간다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아이템은 제법 비싼 것들이 많았다. 이것들을 가져가 팔아 길드 회식이라도 열까……
그렇게 생각하며 듀라스의 소지품 하나에 손을 댄 순간, 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튕겼다.

“아, 아아아아아!”

죽였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게임이 아니었다. 아니, 게임이긴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죽었다. 지금 이 녀석은 현실 속에서 맹렬한 기세로 뇌가 구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망각한 채, 난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의 아이템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이게 아냐.”

난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듀라스가 누워 있던 흔적과 그의 아이템은 여전히 그가 한때 존재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물론 난 누가 보더라도 정당방위였다. 실제로 그에게 한번 죽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를 살려둔다고 해서 그가 날 다시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난 살아있고, 그는 내 손에 죽었다. 현실에서의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난 희희낙락해 죽은 이의 아이템을 챙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간신히 팔을 움직여 바닥의 아이템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듀라스가 갖고 있던 귀환 크리스탈이었다. 워낙 비싸서 난 장만하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듀라스는 이것을 갖고 있고, 또 유리도 이를 종종 사용했다……
생각이 유리에게로 미치자 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난 비명을 지르며 귀환 크리스탈을 사용했다.

8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듀라스를 죽였다는 내 고백을 들은 메르는 말없이 멤버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성​룡​연​합>​의​ 동정을 살피려는 것이겠지. 길드의 리더를 죽였다는 사실이 유야무야 넘어갈 리 없었다. 이쪽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넘어가리라 생각하지만, 신중한 메르는 만의 하나 범인이 발각될 경우를 생각한 듯했다.

“……힘내라, 클라인.”

그는 한 마디만 남긴 채 내 방을 나가 길드원들에게 분주히 지시를 내렸다.
정말 이런 녀석을 부길드장으로 둔 것은 이 세계에서 맞은 몇 안 되는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을까.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난 조금씩 깨어났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난 주섬주섬 녹음 크리스탈을 꺼내들고 그것을 재생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울먹이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유리의 마지막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당신 때문이 아냐. 나 때문이야…… 하지만, 이런 날 용서해줘……

유리는 한참 울먹이다 겨우 진정하고 다소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클라인.
난 말이지, 이 세상을 부수고 싶었어.
아츠시가 죽은 다음에도 난 그가 죽었다는 걸 믿지 못했어. 게다가 이런 게임을 처음 해 보았기때문에 게임에서 무언가가 죽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 클라인은 놀라겠지만, 난 베타 시절 한 번도 사냥을 성공한 적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그이는 자신이 날 지켜 주면 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고, 난 그것으로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날 지켜주겠다던 아츠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그는 죽었던 거야. 당신의 길드에 거둬져 며칠간 생각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
그를 내게서 빼앗아 간 이 세계를 부수자고.
그래서 난 끝없이 사냥을 했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걸 죽이면 이 세계도 파괴될 거라고, 그땐 진심으로 믿었던 거야. 바보 같지? 돌아서면 새로운 몬스터가 리젠되었지만, 난 목표를 바꾸지 않았어.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난 정말 설 자리가 없었으니까.
지금이니까 솔직히 말할게, 클라인. 그날 당신과 몸을 겹쳤던 건, 게임 속이니 이런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 게임이 연인의 목숨을 빼앗았는데도, 그때의 난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있었어. 그리고 난 당신이 날 거둔 이유가 몇 없는 여성 유저이기 때문일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의 보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진실은 훨씬 가혹했다. 결국 그녀는 조금도 날 사랑하지 않았다. 유리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현실이었지만, 유리가 나를 대하는 기분은 가상이었다. 결국 난 허상의 폴리곤 여인을 사랑하고 말았다는 것일까.

-그날 클라인이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난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어. 내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이 세계를, 사실은 내가 즐기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내가…… 나 또한 게임 속 폴리곤으로 구현된 인물이란 사실을 말야.
언젠가부터 난 느끼고 있었어. 지금의 내 몸은 가짜이고, 현실의 몸은 진짜야. 하지만 영혼은 이곳에 넘어와 있어.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가짜 몸 속에서 영혼이 생각하는 모든 게 과연 문제 없이 옳은 걸까? 이미 오랜 시간 가상 세계 안에 있으면서, 난 종종 내가 변질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렸어. 그래서 더더욱 사냥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지. 그 순간만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과정이 즐거워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난 혼란스러워졌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동물들을 때려잡고 있지만, 과연 바깥에 나가면 강아지 한 마리라도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동물들만 보면 칼로 베어버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유리는 여기서 잠시 침묵하다 띄엄띄엄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클라인…… 당신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항상 내 곁에서 날 지켜주었어. 그것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무서웠어. 난 아츠시를 버릴 수 없었으니까, 클라인에게 애정을 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깨달았어. 난 역시 지금의 클라인을 싫어할 수 없어. 아니,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지……좋아해, 클라인.
지금의 난, 당신을 좋아해.
그게 지금 내가 뛰어내리려는 이유야.

“말도 안 돼! 그럴 순 없다고, 유리!”

나도 모르게 크리스탈 너머의 유리에게 소리쳤다. 생각지도 못하게, 생애 최초로 여자에게 고백이란 걸 들었다. 그런데 유리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경우가 또 있을까? 하다못해, 하다못해 날 사랑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아 줬더라면! 그랬다면 난 언제라도 웃으면서 그녀를 떠나보내줬을 텐데!

-이 말을 들었다면 당신은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난 이럴 수밖에 없어. 날 위해 죽은 아츠시를 배신할 수 없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난 고민해야 했어. 이런 가짜 몸뚱이에서 생겨난 감정이 과연 진실된 것인지를.
미안해. 지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난 이 세계에 접속하기 전의 내가 맞는 걸까? 아츠시는 정말 죽은 것일까? 나도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아츠시가 기다리는 저 세상으로 가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이 세계이고, 당신이 웃으면서 날 반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젠 지쳤어. 이제 여태껏 궁금했던 사실을 확인할 순간이라고 생각해. 내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그리고 당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단 하나의 사실이야.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당신에게 폐를 끼치는 걸 용서해 줘.
……클라인, 당신을 정말 좋아해.
이것이 내 진심이었으면 정말 좋겠어.

유리의 말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아마 그녀는 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녹음 크리스탈의 용량은 여기까지가 한계였으므로.

“하하.”

내 손에서 크리스탈이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이를 주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됐잖아.”

유리가 이 가상 세계에서 혼란을 겪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언제든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녀는 두려웠을 뿐이다. 그 감정의 부딪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산산히 깨질 것을 무서워했기에, 결국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면으로 그 문제에 부딪쳤다면, 아마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아츠시에 대한 감정, 혹은 그녀의 나를 향한 감정, 이렇게 셋 중 한두 개는 부서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식엔 최소한 남는 몫이라도 있었다. 그녀가 택한, 투신이란 극단적 방법으로 살아남은 감정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것을 추측하는 건 철저하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흔들리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자신의 문제에 부딪치는 걸 두려워했던 그녀의 전철을 밟을 순 없었다. 난 이곳에서 한 차례 죽었고, 내가 살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 현실이었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난 그 덕분에 살아 있다. 현실로 돌아가 그의 인적사항을 알아낼 수 있다면 난 그의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겠다. 나의 잘못에 짓눌려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유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일 것이다.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것도 게임 프로그래밍의 일부일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방 안의 풍경도, 바깥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새벽의 태양도, 내가 걸치고 있는 의복도, 내 몸뚱아리도 모두가 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타인에 의해 정교하게 짜여진 가상의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 이 자리에 있었다.

“……가볼까, 그 바보에게로.”

난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아 몸이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워졌다. 적어도 유리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없었다. 만약 그녀를 살릴 수 있었다면, 그건 아마 내 손으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그녀에게 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던졌고, 아마 만족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의 난 이 사실에서 한 가지도 더하거나 뺄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키리토는 달랐다. 절망에 빠진 채 이 세계를 저주하고 있을 녀석을 어떻게든 구원해 줘야 한다. 게임이지만 놀이가 아닌 이 세계에서 우린 여전히 살아 있다고, 살아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키리토의 앞에서 말해 주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비록 이 몸이 폴리곤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이 영혼만은 진실하다.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가 이 세계에서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크리스탈이 발에 채였다. 습관적으로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으려다,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크리스탈을 방 안의 서랍 속에 던져넣었다. 언젠가, 내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유리를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면, 그때 저 서랍은 다시 열릴 것이다.
난 어둠 속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을 키리토에게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몇 줄 안나온 클라인을 위해 쓴 팬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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