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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깎던 노인(팬픽&패러디 모음)


[시간을 달리는 소녀]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내가 미래에서 왔다면 믿겠어?

라고 말한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다소 붉은 빛이 감도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눈을 가늘게 뜨며 바보, 라는 말을 즐겨 하는,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맞아. 티셔츠 위로 심플한 흰 카디건을 걸치고 다녔던 소년.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다. 아까부터 바라보던 천장에 그의 얼굴을 그리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백열등의 희뿌연 빛이 그를 지우고, 그의 그림자마저 지워나간다.

-웃을 거야?

서글프게 말했던 그의 목소리. 이 목소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그의 이 말을 언제 들은 것일까?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다. 몇 시간 전에 들은 말일 수도, 아니면 몇 백만 년 전에 들은 말일 수도 있다.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닫자 다시 그가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평생 잊지 않을 작정이었지. 하지만… 이제 의미 없겠지. 모든 것이.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한 말인지는 알고 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가족과 티격태격하며 시험성적이 오르길 기도하는 나와 달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림에 대한 염원으로 바꿀 수 있었던 소년. 가끔씩 보이던 어른스러운 모습에서 눈치챌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을 건너뛰고 또 건너뛰어도 그 사이에 비치는 아련한 잔상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마코토.

-응?

-나랑… 사귈까?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석양이 강물을 붉게 적셨던 날. 자전거를 몰던 소년이 망설이며 꺼낸 말. 가느다랗게 떨리는 소년의 등을 바라보며, 내 몸은 그때 굳었다. 언제까지고 셋이 함께 할 수 있으리란 소망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꿈이 노을 속으로 녹아들고, 현실이라는 저녁이 내게 찾아왔다. 그 당혹스러움에 나는 소년을 배신했다. 소년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비겁하게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그 결과가 지금이라는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다. 텅 빈 방,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아다닐 뿐인 적막한 내 안식처.

“치아키.”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매일, 매달, 매년 불러오던 낯익은 이름. 소년의 이름이 잠시 공중에 떴다가 먼지처럼 조용히 내려앉는다.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갓난아이가 말을 연습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이름을 계속 불러댔다. 이렇게 하면 치아키라는 존재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내 안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한 번씩 말할 때마다 기억의 물방울은 내 눈을 타고 흘러내려 심장에 떨어진다. 백열등이, 그 주변을 날고 있는 무당벌레가 똑같이 희뿌연 색으로 보인다. 그날, 치아키가 시간을 멈춘 세계처럼.

​“​…​…​…​…​사​랑​해​.​”​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그때, 아니면 그 다음에라도 했어야 하는 말.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후 난 역시 바보란 걸 깨달았다. 곧은 눈으로 그와 마주했더라면, 적어도 그 석양 아래에서 내가 먼저 그에게 등을 돌리진 않았을 것이다. 치아키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내가, 단지 낯선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그를 타인 취급했다. 수많은 시간의 건너뜀을 통해, 그리고 그의 희생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치아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바보라서, 이해하지 못한 척 눈을 감고 돌아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바라는 소년의 모습은 손만 뻗으면 닿았을 그 거리에서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찾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자기 세계로 피신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고.

손을 보니 정말 뜯겨나간 머리카락들이 손가락에 엉켜 있다. 그것이 나뭇가지라도 되는 양, 무당벌레가 서서히 내려온다. 그 색이 치아키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해 잠시 쳐다보다 손을 휘저었다. 무당벌레가 하염없이 날아오른다. 내가 치아키를 떠났을 때처럼, 미련없이. 난 손을 뻗은 채 내 손이 가리키는 끝을 주시한다. 그 끝에서, 반대로 곧은 선을 따라 팔이 시작하는 곳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무심히 이동하던 내 눈이 낯익은 것을 발견하고 멈췄다. 01. 숫자.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한도. 소멸했지만 현재 부활. 치아키가 마지막 남은 시간의 건너뜀을 쓰기 전까지의 숫자. 복잡한 수학 공식 같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간단하다. 나는 시간의 건너뜀을 아직 쓸 수 있다!

“나 나가요!”

외치자마자 방문을 열고 계단을 구르듯 뛰어내려왔다. 차를 마시던 아버지가 내 박력에 놀라 신문에 차를 흘리는 것이 보인다. 죄송해요, 라고, 아니 뭔가를 중얼거리며 나는 문을 열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대문을 벗어났다. 뒤늦게 식구들이 신발을 신고 나오고 있었지만, 그제서야 내가 맨발로 나왔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건 상관없다. 맨발에 츄리닝 차림으로 미친 듯 뛰어가는 나를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내리막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한 번의 도약. 단언하건대, 이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멀리 뛴 기록일 것이다. 그 기록을 두 번째의 도약이 갱신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나는 노란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세상을 향해 몸을 던지며 외쳤다.

“가라앗~!!”

“멈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눈앞에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뛰어오른 내 몸을 그대로 안았다. 뛰었던 기세를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는 앞으로 넘어져 한참을 굴렀다. 지난번 코스케를 구하려다 구른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는 되었다. 아까 그렇게 울고도 아직 내게 눈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눈을 슥 닦고, 몸에 큰 상처가 있는지 대강 살펴본 후, 내가 깔아눕힌 상대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아까의 신선함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경악의 단계로 발전했다.

“이모?”

“아야야…… 몸은 마른 녀석이 기운은 왜 이렇게 넘치니?”

이모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맵시 좋게 차려입은 치마가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주욱 뜯겨져나가고, 틀어올린 긴 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지저분해 보였다. 항상 단정함을 잃지 않았던 이모였지만, 나와 충돌하면서 다 날려 버리고 간신히 얼굴에만 남겨두고 있었다.

“이모? 왜 여기 있어?”

“혹시나 했고, 역시나.”

간결한 대답이었다.

“설명해 줄 마음 없으면 비켜 줘. 난 다시 시간을 건너뛰어야 해. 이모가 일부러 막은 건 아니겠지만, 한 번 더 방해하면 화낼 거야.”

“그럼 화내.”

“뭐?”

이모가 옷자락을 털며 일어났다. 언제나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던 서늘한 눈이 내 눈을 바라본다.

“난 널 일부러 막은 거야. 시간의 건너뜀을 할 수 없도록.”

진정해야 한다. 갑자기 달려 가빠진 숨을 천천히 고르며, 이모에게 물었다.

“그건 조금 있다 물을게. 내가 마지막 건너뜀을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이모는 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네 얘기를 듣고 짐작했어. 넌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일단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지. 하지만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게 갑자기 떠올라 이렇게 급히 온 거야. 분명하게 말하지만, 네 시간을 건너뛰는 행위는 이제 두 번 다시 쓰면 안돼.”

갑자기 귀에서 윙윙 소리가 들렸다. 아까 넘어지며 귀를 조금 부딪친 것 같다. 이명이 울리며 이모의 말소리가 선명해졌다 흐릿해졌다를 반복한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마구 후벼파자 이명이 한결 덜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모가 말하는 내용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모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건 이래. 네가 시간을 건너뛴다는 건, 말 그대로 시간과 시간의 흐름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오는 거야. 하나의 세계에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있지. 그 세계에 넌 조약돌이나 다름없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 봐. 너라는 조약돌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게 뭐 어땠다는 거야? 난 미래로 가지 않아. 결국 시간은 흘러가고 난 내가 시간을 건너뛰었던 그 시점으로 돌아온다구!”

“그것이 오히려 문제야. 잠시 흐름을 거슬렸던 조약돌이 다시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 와 어딘가에 정착했어. 그런데 그 자리는 처음과 같지 않아. 네가 과거를 바꿨을 테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맨 처음 네가 빠져나간 자리는 네가 그 부근까지 돌아오더라도 여전히 비어 있다는 거지.”

뛰기 위해 한껏 긴장하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보답지 않게, 지금의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순식간에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이모의 말은……”

“네가 지금까지 쓴 시간의 건너뜀마다 세계가 분열되었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시간을 한 번 건너뛸 때마다 네가 없는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냈다는 의미라고.”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아아, 또다. 멈춰버린 세상에 섰을 때의 위화감처럼, 아까까지 돌아온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세상이 삽시간에 빛을 잃는다. 현기증이 나 비틀거리자 이모의 긴 팔이 나를 잡는다. 불가리 향이 나는 손수건이 내 얼굴을 닦고, 눈가를 닦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것 같다. 이모의 손에 내 얼굴을 맡긴 채, 난 이모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치아키를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어쩌라는 거냐구! 이런 마음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라고? 그럴 수 없어! 치아키와, 그리고 코스케와 함께가 아니라면 난 의미가 없어!”

“어리광쟁이.”

“뭐?”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에 이모의 엄한 얼굴이 비친다. 일전에,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 좀 있다고 아주 제멋대로 즐겼잖아.

라고 비꼬아대던 그 얼굴이다.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한다.

“네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코스케와 치아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 녀석들에게도 분명 네가 필요할 거야. 마치 너만 그런 것처럼 해석하지 말라고. 그리고, 넌 지금 그렇게 소중하다는 녀석들을 이 세계에 버려두고 또다시 도망치려 하고 있어.”

내 얼굴에 머물러 있던 이모의 손이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헝클어진 머리가 조금씩 수습되어간다. 머리에 닿는 따뜻한 느낌에 약간이나마 기분이 안정된다. 머리를 붕붕 흔들어 눈물을 떨쳐내고 다시 이모를 보았다. 잠깐 보였던 엄한 얼굴이 풀리고, 내가 아는 이모로 돌아와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어느 세계에서든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았어. 이미 만들어져 버린, 네가 없는 세상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네가 사라지면 우선 내가 슬퍼할 거야. 다음으로 영문도 모를 네 식구들, 그리고 코스케. 마지막으로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을 치아키도 슬퍼하겠지.”

“치아키……가?”

“그래. 이 세상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치아키.”

“하지만, 치아키는”

더 말하려는 내 입술을 이모의 손가락이 막았다. 문득 아래를 보니 가로등 빛에 비친 나와 이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다. 어쩐지 낯선 모습을 한 그림자의 주인공이 마녀다운 미소를 지으며 살짝 윙크했다.

“좋은 거 가르쳐 줄까?”

 

미술관은 늘 그렇듯이 한산했다. 특별히 유명하거나 비싼 그림이 없는 이상, 이곳의 관람객은 이 고장에 사는 주민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천장에 살짝 금이 간 것 때문에 보수공사를 하느라 몇 개의 기둥이 새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그림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하나 바뀐 게 있었다. 규칙적으로 그림이 걸려 있는 모습은 신기할 것 없는 모습이지만, 이곳을 꾸준히 찾았던 사람이라면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가 빠진 듯 항상 비어있던 자리에 드디어 그림이 걸렸기 때문이다. 혼돈의 세계 중심에서, 여신이 푸른 구슬 네 개를 품에 안고 미소짓는 그림. 특별한 기교가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계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을 뚫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붉은 머리의 소년이 천천히 걸어왔다.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기에, 입구를 지키던 경비만 그의 상기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흥분을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미술관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그 그림 앞에 섰다. 친구들에게서 건방져 보인다는 평을 듣던 눈매가, 지금은 매우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면 속에 감춘 불꽃이, 강물에 떨어뜨린 노을처럼 서서히 그의 온몸으로 번져나왔다. 여신을 향해 경배하는 것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시선은 떼지 못한 채, 뒷걸음질치던 그의 몸이 기둥에 와 닿는다. 일평생의 소원을 마침내 이루어 낸 직후의 허탈감이 기둥 너머까지 전달된다. 다소 맥빠진 듯한, 그러나 아까의 여운으로 풍부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기둥을 타고 들려온다.

“마코토.”

“치아키.”

기둥 너머의 내가 대답했다.

한참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치 누가 먼저 입을 여나 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난 이런 종류의 침묵엔 아주 약하다. 예전 같았으면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를 어색한 침묵. 그렇지만,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난 이 자리에서, 처음처럼 다가온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난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구. 벌써 사흘째 기다렸어.”

등 뒤로 쿡쿡거리는 웃음이 들려 온다.

“아아, 그건 좀 미안한데.”

언제나의 그 목소리. 비일상을 일상으로 착각하려 노력하던 내게, 갑작스런 일상의 목소리는 오히려 비일상적으로 들려온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지만 그것을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 울음을 삼킨 후 다시 말했다.

“네가 보지 못하는 틈에 유카타도 입었다, 뭐. 이쁘다고 사방에서 난리였다구요, 야쿠자에게 빚 지고 도망친 아저씨.”

“이런, 이런. 그거 아주 아쉬운걸.

천상 남자애인 녀석이 처음으로 여자답게 하고 왔다는데, 그걸 못 보다니.”

당장 뛰어나와 그를 보고 싶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위치에 그가 서 있다. 하지만 실행할 순 없다. 그가 날 떠난 이유를 잘 알고 있으므로. 아직은 기둥을 맞대고 있을 뿐, 만난 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돌리면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져 버린다. 지금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간신히 꿀꺽 삼켜 아래로 보냈다. 제발, 내 마음이 잠시만 더 슬픔을 위로 분사하는 걸 멈춰줬으면 좋겠다.

그의 독백이 들려온다.

“우리 시대엔 사람이 얼마 살고 있지 않아. 거듭된 전쟁과 유전자 이상으로 인구 수가 대폭 줄었지. 그리운 사람들이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사라지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타임 리프가 개발되었어. 물론 이 기술엔 단점이 있어. 한 사람이 타임 리프를 할 때마다, 그 세계에서 그의 존재는 사라져 버려. 그는 이제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래도 좋았어. 모두는 알고 있으니까. 소중한 것들이 사라진 세계가 얼마나 괴로운지. 그래서 그 소중함의 파편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을 아무도 탓하지 않았어.”

낮은 목소리가 내 마음을 뒤흔드는 격류가 된다. 이모에게 들었을 땐 그저 사실로 다가온 정보가, 치아키의 입에서 나오자 나를 찌르는 격통이 된다. 아아, 그들에 비한다면 난 얼마나 어리석었나. 소중한 것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호기심으로, 이기심으로 수많은 시간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세계를 수없이 창조해 냈다.

수많은 식구들,

수많은 코스케,

수많은,

수많은 치아키.

내가 사라진 강가에서 언제까지고 나를 찾고 있을, 쓸쓸한 눈을 한 치아키.

더 견딜 수 없어 난 이곳에 온 용건을 꺼내들었다.

“왼손… 뒤로 내밀어.”

“응.”

“오른손도.”

“응.”

그의 양 손이 기둥 너머에서 내게 다가왔다. 몸을 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난 그 손들을 잡았다. 내 떨림이 그에게 전달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그의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건방져 보이지만 사실은 섬세한 남자인 치아키의 모습이다. 그리고 쉬운 길을 돌고 돌고 돌아와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선 나의 모습이다.

“잘 들어. 네게 줄 선물이 있어.”

“선물?”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 잠시만, ​이​렇​게​…​…​…​…​…​…​이​제​ 됐어.

이제 이것들은 네 거야.”

손이 조심스럽게 떼어졌다. 서로의 손이 자신의 몸으로 돌아갔다. 등 뒤에서 작은 탄성이 들려온다. 그가 왼손과 오른손의 선물 중 어느 쪽에 놀랐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라면, 그의 왼손에 다시 새겨진 01에 좀더 놀랄 것 같다. 그가 기막히다는 듯 말해 온다.

“맙소사. 신체 접촉으로 타임 리프 횟수를 전송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내 주위에 마녀가 한 명 있거든.”

이모, 고마워요. 어째서 이모가 이런 미래인 틱 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작은 탄성이 들리고, 잠깐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예쁘다, 마코토. 반해 버리겠어.”

“그야 당연하지. 그건 코스케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비장의 무기니까.”

지금 그는 유카타를 차려입고 살짝 화장까지 한 내 스티커 사진을 보고 있을 것이다. 큰 사이즈는 어쩐지 곤란할 것 같아 최대한 작게 뽑은 물건이다. 이 사진은 지금 막 나와 치아키 외엔 누구도 보지 못할,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되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용건을 모두 마치고 나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치아키 쪽도 그런 모양이다. 아까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유지할지, 혹은 이 상황을 바꿀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이런 어색함마저 사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천천히.”

“응?”

치아키가 먼저 말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아.”

억눌렀던 슬픔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흑, 하는 소리가 기둥 너머로 전달되었을 것을 깨닫고 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직은 울어선 안된다.

“감고 있을 테니, 빨리 가버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제멋대로 나온다. 이제 치아키가 이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더라도, 내가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더라도 아직은 울어선 안 된다. 우는 건 이 자리에, 이 시간에 홀로 남았을 때의 일이다. 그 뒤에는 자리에 주저앉아 마음껏 울어댈 수 있다. 1000분의 1초마다 스스로를 억누르며,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끝이다. 내 여름 동안의 마법의 기억도, 짧은 첫사랑의 아픔도. 눈을 너무 꽉 감아서인지 까만 그림자가 내 눈꺼풀 위에 덮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덮였다.

“에?”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입술이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얼굴을 스치고,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지금이야말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생각이 들긴 했다. 비겁해. 첫 키스는 눈을 뜨고 하고 싶었는데.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 온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화악, 하고 짧지만 강한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빛의 여운이 사라지자 난 천천히 눈을 떴다. 짐작대로,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 하하.”

맥없이 웃었다. 어떤 미래? 내가 배나온 아줌마가 된 미래? 내가 늙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는 미래? 아니면 내가 죽어 한 줌의 뼛가루가 된 후의 미래? 그는 자신이 어느 시대에서 왔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그가 있는 시간을 알 수 없다. 문득, 강변을 헤메는 치아키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그 아픔을 이제 나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울어선 안 된다. 나는 이미 수많은 치아키에게 영원한 기다림을 안겨주었다. 그런 내가, 고작 하나의 기다림을 안겨준 미래의 치아키를 향해 원망을 할 순 없다.

내 기억을 허락할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시간은 멈추는 일 없이 흐른다. 능력이 사라지고 나니 새삼 그 거대한 흐름이 느껴진다. 이제는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언젠가 치아키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마침내 기억에서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다. 희미해진 첫사랑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사랑을 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난 기둥에서 몸을 떼고, 수많은 세계의 치아키들이 기다리고 있을 저 강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달소를 본 당시 생겼던 의문을 팬픽으로 풀어내 보았습니다.
모든 시간여행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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