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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깎던 노인(팬픽&패러디 모음)


[슬레이어즈]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루오는 검을 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그의 실력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한쪽 눈에 깊숙한 흉터가 새겨진 마른 사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떨림이 좀 진정되자 그는 가만히 타일렀다.

"역시 넌 안되겠다.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여길 떠나라. 어서."

"싫어요! 저도 그리폰 윙의 어엿한 일원이라구요!"

"네가 일원이 아니라고 했냐?"

루오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팔은 풀리지 않았다. 남자는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루오의 검을 빼앗아 그의 허리춤에 도로 매달아 주었다. 그리고 루오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며 나직하게 말했다.

"잘 들어라. 지금 오는 녀석들은 우리 힘으로 벅차다. 우리가 상대가 될진 모르겠지만, 우리 역시 지켜야 할 자존심이란 게 있어서 물러날 수 없다. 하지만 신참인 네 녀석이 낄 정도로 어설픈 전투가 될 것 같진 않아. 그러니 가라."

"싫어요!"

"시끄러! 이건 명령이다! 신참 주제에 내 말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

남자는 잽싸게 품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떠넘겼다. 짤랑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금화가 가득 들어있는 듯했다. 저 돈이 어떤 돈인지 루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폰 윙의 두목인 이 남자가 이 산줄기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고 길을 낸 뒤 수 년간 통행료를 징수하여 모은 돈이었다. 영주의 수탈에서 몸을 피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그 댓가로 정당한 요금을 받아내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산적이라 매도했다. 산적? 웃기는 소리다. 통행료를 내면 들여보내주고, 내지 않으면 다른 길로 가라고 할 뿐이다. 칼을 들어 민간인을 해한 적도 없고, 썩어빠진 영주의 군대가 왔을 땐 위협사격만 몇 차례 한 게 다다. 그리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가족들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이제 그는 떠돌아다니는 유망민들도 거두기 시작했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우연히 그 산에 흘러들어온 루오 또한 그렇게 거두어졌다.

'행복? 그딴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이틀 만에 본 음식에 정신없이 달려드는 루오를 바라보며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난 그냥 내 눈앞에 배곯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 날부터 루오는 이 남자의 부하가 되어 목숨을 바치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쾅! 저 아래에서 굉음이 울렸다. 멀리서 들렸는데도 루오 옆의 나무가 부르르 흔들리며 잎사귀를 떨구었다.

"칫... 벌써 왔나. 1단계 함정은 눈치챘는지?"

"두목!"

"어서 가라. 저 속도라면 이곳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다! 우린 싸울 테니, 넌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져라!"

남자는 검을 빼들고 불꽃이 일렁이는 전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루오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숲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루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휙 돌아서 달려갔다.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달려가야 하는데, 눈물이 넘치며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는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루오의 등 뒤로 연속적인 폭음이 들려왔다. 그 폭음 속에 섞여 낯익은 목소리들의 절규와 단말마가 아프게 파고들어왔다.

 

'그게 반 년 전의 일이었지'

루오는 자신의 애검을 바라보았다. 반 년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수련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실전에서 경험을 쌓고 나니 이제 어지간한 어른 두어 명이 달려들어야 할 정도의 실력이 붙었다. 그의 이런 비정상적인 성장은 반년 전의 무력함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겠다는 결의 덕분이었다. 열네 살이란 핸디캡 때문에 근력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일격의 찌르기만은 일품이라는 소리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가 속해있던 그리폰 윙은 그리 강한 조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침입자에 대비한 함정은 철저히 만들어두었다. 적은 수로 다수의 영주군을 상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함정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한 그 마법사의 실력은 분명 보통을 넘을 것이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마법사, 라고 기억하고 있다. 도망치던 중이라 얼굴까진 보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 머리를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으므로.

"도적 킬러, 리나 인버스."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나 도적들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흉폭한 마법사. 그녀의 손에 박살난 도적단만 수십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는 정말로 악독한 자들도 있었을 테고, 그리폰 윙처럼 모함을 받은 자들도 있었을 터. 그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처럼 복수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하고 돌아다녀 봤지만, 생존자들 모두 그녀를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긴 루오는 그녀의 마법을 직접 본 게 아니었으니 그들의 공포가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 막연함이 그 자신의 공포로 이어졌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공포 따위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처참하게 박살나고 불에 탄 시체들을 정리하며 통곡하던 가족들의 모습은 소년의 가슴에 한 인간을 향한 거대한 증오만을 자라나게 해 주었다.
루오는 그리폰 윙의 상징인 연두색 복면을 꺼내 얼굴을 덮고, 애검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독을 꼼꼼히 발라둔 칼날이 검은 광택을 발했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는 맹독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직접 심장을 찔러 죽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거기에까지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치게 하는 정도라면 가능할 것이다.
숲길에 매복하고 있으려니 슬슬 발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리나 인버스의 행적을 조사해, 그녀의 이동로 앞을 선점해 기다린 게 정답이었다.
이제, 복수할 수 있다.
크큭 하는 낮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철저히 숨어 있다가 그녀가 지나가는 순간 기습하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마법사란 근접전에 약한 법. 마법을 쓸 시간을 주지 않고 한 칼만 찌르면 된다. 그 뒤에는 전력으로 도망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와 그녀의 최후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리나, 정말 내일은 밥 사주는 거지?"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사는 거야."

"그럼 할 수 없지. 오늘은 내가 사는 걸로 할까.
그런데 이상한 게, 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대화를 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경쾌한 쥘부채 소리가 숲 안에 퍼졌다.
...설마 동료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동료도 함께 죽여야 하는 걸까? 루오는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와 금발머리 검사가 만담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사라면 지금 자신이 세워둔 계획에 상당한 방해물이 된다. 하지만 그는 검사까지 죽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은 저 학살자와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원한이 있는 자를 처단할 뿐, 관계없는 자는 굳이 죽이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리나 인버스는 루오가 숨은 수풀 쪽에 있었고, 검사는 머리를 움켜쥔 채 구석에서 훌쩍대고 있었다. 기회다! 루오는 벌떡 일어났다.

"리나 ​인​버​스​으​으​으​.​.​.​.​.​.​!​!​!​"​

거리는 약 3미터.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실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간 기억 속에서나, 혹은 수배 전단에서나 봤던 모습과 달리 겉모습만은 가녀린 소녀였다. 가슴이 거의 없어 자칫 미소년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이나 체형이 소녀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입이 무언가를 달싹이려는 찰나, 이미 루오의 검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이런 거 휘두르면 위험하잖아, 꼬마야."

어느새 다가온 금발머리의 검사에게 검을 빼앗기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은?"

리나 인버스가 눈을 살짝 치뜨며 말했다.
검을 빼앗기고 가우리에게 팔이 잡혀 제압된 채로 루오는 이를 악물었다.

"이거 놔! 난 저 년에게 볼일이 있어!"

"입이 험한걸? 하긴 이 정도 성깔이 있으니 다짜고짜 칼을 들고 덤빈 거겠지. 애송이 산적일까?"

검사가 태평하게 중얼거리자 소년은 발끈했다.

"리나 인버스! 네년에게 박살난 그리폰 윙의 일원인 루오다!"

"흐음. 그런데?"

리나는 턱짓으로 검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검사는 칼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그대로 휙 던졌다. 힘껏 던진 것 같지도 않은데 거의 자루까지 나무에 박히더니 푸스스 연기를 냈다. 나무가 순식간에 시들시들해졌다. 아마 그는 루오의 검을 보자마자 독을 발랐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저 반응속도에 저 눈썰미라면 이미 루오와는 하늘과 땅 차이의 실력이었다. 리나 인버스만으로도 아슬아슬했는데 이런 자가 옆에 붙어있으면 자신의 복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루오는 그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부츠에 꽂아놓은 단검을 뽑아들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간단하게 제압당했다.

"이봐, 도적 씨."

검사에게 꼼짝 못하고 구속당한 루오에게 리나가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어느새 작은 불꽃이 맺혀 있었다.

"리나, 적당히 해. 아직 아이인데."

"날 죽이려 했잖아? 그리고 산적은 별로 살려둘 가치가 없는걸. 저 애도 자라서 산적이 될 거 아냐."

"틀려! 리나 인버스, 네가 멸망시킨 그리폰 윙은...!"

"변명은 지.옥.에.서~"

그녀의 손끝에서 불덩어리가 쏘아져 루오를 덮쳤다. 루오의 전신에 화염이 엉기고, 그는 고통에 몸을 비틀며 몸을 굴렸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은 쉬 꺼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오그라드는 손발을 어떻게든 움직여 수풀 옆에 아주 얕게 흐르는 냇물에 몸을 던졌다. 치직 하며 살을 태우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희미해져가는 루오의 의식 저편으로, '야, 리나! 나까지 죽이려고 했냐?'라는 검사의 항의가 아스라이 들려 왔다.


루오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점멸하는 의식과는 달리,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은 격렬했다.

"제기랄... 제길... 흑..."

그 참사 이후 두 번 다시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죽음을 앞두게 되자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하지만 아까의 화염 때문에 온몸의 수분이 증발하기라도 한 건지, 눈물은 눈가에 살짝 맺히기만 할 뿐 더 흐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복수도 하지 못하고?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하나, 리나 인버스를 죽이는 것뿐이었다. 어제까지는 막연하게 오늘 시도해본 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좀 더 실력을 키운 후 다시 도전해 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설마 아직 어린아이인 자신을 죽이지야 않겠지, 란 느슨한 생각도 조금은 해 보았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나 인버스가 악마 같은 마법사라는 루오의 생각과는 달리,

리나 인버스는 이미 악마 그 자체였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
두려움은 아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통한의 신음이었다.

"리나, 인버스르을... 내 ​손​으​로​.​.​.​.​.​.​!​"​

-좋은 독기다.

갑자기 가슴 속에 거대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무도 큰 파장에 가슴과 머리, 아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고통마저 초월하는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절망, 어둠, 공포.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까? 루오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한 후 결론을 내렸다. 이건, 죽음 그 자체라고.

-인간의 아이야. 네 증오가 맘에 드는군.

'사신...?'

-그보다 내 질문에 답하라. 네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죽으면 억울하겠지? 그 몸을 내게 다오. 난 네 목적을 알고 있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수 있다.

​'​정​말​.​.​.​.​.​.​.​.​.​.​.​.​?​'​

-리나 인버스의 타도라. 정말 사소하고 하찮은 목표이지만, 그것이 우연히도 내 목표와 부합하는군. 네가 가진 절망의 기운도 내겐 아주 향기롭구나.
자, 소년. 네 몇 초 남지 않은 생명 전체로 답하라. 내게 몸을 내주고, 그것으로 리나 인버스를 파멸시키겠나?

의문이나 부정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이 목소리는 절대적이고, 자신의 소망을 반드시 들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 그 자체이므로. 그래서 루오는 고통마저 잊고 환희에 차 대답했다.

'물론!'

-좋아. 네 몸, 네 영혼, 유용하게 써 주마.
영광으로 여겨라, 인간의 아이야. 마왕 샤브라니구드의 오대 심복 중 하나, 명왕 피브리조를 그 몸에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고 루오의 의식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두워.
어두워.
어두워.
아니,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빛이 아니라고,
내 몸을 차지하고 있는 명왕이 울부짖고 있다.
아아, 나도 느껴진다.
이것은 빛이 아니라,
금빛의 어둠-
그리고 다음 순간, 난 처음으로 명왕의 제어를 뿌리치고 내 몸을, 내 입을 움직여 소리쳤다.

"대체 어째서! 왜 리나 ​인​버​스​가​아​아​아​아​아​아​!​!​!​"​

-소멸해라.

금빛의 어둠이 전신을 뒤덮고,
의식은 다시,





 
명왕 피브리조의 껍데기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추측하다 생겨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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