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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6화


“너. 이 카드, 뭐냐?”

카드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후로는 인상을 쓰며 카드를 내팽개쳤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손이 찌릿 하고 반응했다. 게다가 그걸 떠나, 스스로 발광하는 카드가 평범할 리 없었다.
그들의 불안한 표정이 필리시아에게 약간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아아…… 당신들 이제 큰일났네요. 그거 마법사 님이 연락용으로 준 건데, 당신이 쥐고 있었으니 그분이 이상을 알아차렸을 거예요. 어서 도망가지 그래요?”

마법사란 말에 후로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말하는 마법사는 낮에 보았던 그 자가 분명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묘한 언행과 외모, 그리고 자유자재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재주를 선보인 그는 후로와 켄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마법사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해!
켄, 집은 그만 뒤지고 어서 뜨자!”

“하지만……”

“우리가 푼돈이나 찾자고 온 게 아니잖아! 어서 이 계집을 업어! 앙탈부리지 못하게 내가 묶을 테니!”

필리시아는 아차 싶었다. 그녀가 마법사의 존재를 언급했던 게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미 마법사가 진짜임을 눈앞에서 본 두 사람은 이제까지의 느긋함을 버리고 필리시아를 납치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정확히 소녀로서의 그녀를 원하는지, 성녀로서의 그녀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 비참한 결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녀는 팔다리를 힘껏 움직여 버둥대 봤지만, 후로가 그녀의 배를 가격하자 반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애먹이지 말자고. 설마 너 혼자서 우리 둘한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똑똑한 아이니까 얌전히 가자고.”

그녀의 다리를 다 묶은 후로는 팔도 묶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계집이니 둘이 교대로 업고 가면 마법사가 오기 전에 도망칠 수 있다. 물론 큰 길이 아니라 집 뒤에 있는 숲을 통해서이다. 길이 있는 건 아니니 좀 고생이겠지만, 숲에 들어가면 마법사도 자신들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그가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할 때였다.

“물어볼 게 있어요.”

더 반항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후로가 그 손을 홱 뿌리쳤지만 그녀는 용케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손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절 쓰레기라고 하셨죠?”

“왜, 그게 화라도 나냐? 다시 말해 줄까?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 인생 쓰레기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뉜다구. 귀족도, 평민도 아닌 우리들을, 누가 더 잘났네 식으로 구별하는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됐냐?”

어쩐지 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가 알기로 그녀의 힘은 오직 치유일 뿐, 그 외의 폭력적인 수단은 전혀 없었다. 만약 숨겨놓은 힘이 있다면, 지금 무기력하게 잡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나타내는 대신, 필리시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분노를 띠기 시작했다. 이미 온몸에 퍼진 고통을 한데 모아,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그건 결국…… 당신 좋으라고 하는 말일 뿐이죠.
제가…… 이런 힘을 넣은 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몇 년간의 제 고통을 모두 무시하고, 쓰레기라구요!“

“허. 그럼, 얘기를 바꿀까.
지금 쓰레기에게 잡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는 게 쓰레기가 아니면 뭐냐? 그리고, 애당초 내가 왜 네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거냐?“

“…………아아.
그럼,
이해하게 해 드릴까요?”

그녀의 손에 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처럼 순수한 흰 빛을 후로는 본 적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얻은 힘이라는 거겠지. 무의식적으로, 이런 순수한 빛은 자신에게 절대 무해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그는 그 빛이 자신의 체내로 스며들 때까지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심의 대가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크헉!”

돌연 그가 팔을 부여잡았다.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이질적인 고통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을 휘감았다. 게다가 그 고통은 삽시간에 치닫고 올라와 어깨로, 심장으로, 목으로 넘어왔다. 예전에 돈을 훔쳤다 걸렸을 때 치안대에게 두들겨 맞아 팔이 부러진 적 있었지만, 지금 것은 차원이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손가락 끝에서부터 무딘 칼로 잘게 저며지는 그런 느낌?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을 리 없는 그런 고통을 겪자, 후로는 뇌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악! 켄! 나 좀 살려줘!”

“후로!”

집안을 뒤진다는 행동에 대한 미련을 갖고 여기저기를 흘끔거리던 켄이었기에 대응은 약간 느렸다. 그는 필리시아와 후로를 떼어놓기 위해 둘이 마주잡고 있는 손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도 그 빛에 닿을 테니, 방향을 바꿔 후로의 팔을 쳤다. 세 개의 팔이 맞붙어 올라가다 튕겨지더니, 그 팔의 주인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켄의 행동은 신중했지만, 필리시아의 힘은 그 비관적 예상마저 뛰어넘었다. 필리시아의 힘이 흐르고 있는 후로의 팔에 닿는 순간, 켄 또한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크악! 이 년 뭐야!”

뒤로 나가떨어졌던 켄이 고통을 견디며 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다시 소파에 내동댕이쳐진 그녀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품 안에서 손칼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아직 빛이 머물고 있다는 걸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그 손에 닿는다면 자신 역시 저기 뒹굴고 있는 후로처럼 될 것이라는 걸 암시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필리시아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마법사가 오는 중이었다. 그는 필리시아와 후로를 번갈아 바라보고 곧 생각을 정리했다.

“미안하다! 후로, 잘 살아라!”

후로는 여전히 발광하며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부축해서 데려가기 힘들었다. 이런 급한 상황에서 그를 챙겼다간 둘 다 잡힐 수밖에 없다. 둘 중 하나라도 무사한 게 둘 다 잡히는 것보단 백 배 낫다. 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동료를 버리고 열린 문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자신에게는 마법사가 건네주었던 쪽지가 있었으므로, 그가 지금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해 상아탑에 연락하기 전에 냉큼 그리 가 돈을 요구해야 했다. 너무 많이 요구하면 의심을 살 테니, 한 삼사백 피아 정도…… 그러나 그의 장밋빛 꿈은 황혼과 함께 땅 끝까지 처박힐 예정이었다.
문을 나선 순간, 그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담배 두어 대를 한꺼번에 쭉 피운 것처럼, 기분 좋은 나른함이 의식을 표백시켰다. 그는 몰랐지만, 일 초도 아까운 그가 그 기분에 취해 멍하니 서 있었던 시간은 무려 삼십 초 가량이었다. 거기다 생각하는 시간 삼십 초 정도를 더한 후에야, 그는 그 원인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그가 빼앗아 피운 담배.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묘한 기분을 설명할 원인이 없었다. 이런 기분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녀를 다그쳐 담배를 좀 더 피우고픈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자기도 모르는 새 집안을 향해 몸을 돌렸던 켄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 막 도약중이던 시퍼런 불덩이 두 개와 눈이 마주쳤다.

“…………!!!”

그에겐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찢기고, 세 개의 긴 혈선이 얼굴에 그어질 때쯤에야, 숲 속에 공포로 가득 찬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비명은 누군가가 중단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가 뚝 끊긴 채 소멸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시아는 벌써 몇 시간쯤 뛴 것 같았다. 길이 꼬불꼬불해서 전력으로 달릴 수 없는데다, 이젠 꽤 어두워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호신용으로 굵직한 나뭇가지 하나를 챙겨들고 오느라 팔도 아파왔다. 결국 그녀는 잠깐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기로 했다.
얕은 숨을 피하고 최대한 고르게 심호흡을 하던 그녀에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뒤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지만 기척은 점점 가까워진다는 점이었다.

‘유, 유령?’

또래보다 활달하고 겁 없는 그녀였지만, 통상의 인류 모두가 원초적으로 가진 유령에 대한 공포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한기를 느끼고 나뭇가지를 꽉 쥐었다. 과연 유령이라면 이걸로 대항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기에, 그녀의 발상의 전환은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여기 죽치고 앉아 유령을 기다릴 이유 따위 없잖아?’

당연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전력으로 달렸다. 이번엔 나무에 부딪치든 말든, 무턱대고 필리시아의 집이 있을 만한 방향으로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하지만 길과 길 사이의 수풀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시아보다 큰 풀들이 잔뜩 있는 데다, 바스락바스락 하고 자신의 옷이 수풀에 스치는 소리가 더 무서웠다.
기적적으로 넘어지진 않았지만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긴 채, 시아는 가까스로 다시 길에 들어섰다. 이제야 필리시아의 집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은 그 사실에 막 안도하려는 찰나, 시아의 뒤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그렇지? 역시 착각, 히이익!”

안심하고 다시 앞을 바라본 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앞,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흐릿한 형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다음 순간 그보다 먼 곳에, 다시 먼 곳에 나타났다. 발을 움직이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이동하는 그 모습은 순간이동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이동하는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유령의 목표는 시아가 아니라 저 집인 것 같았다.
사기꾼들에 이어 이번엔 유령이라니. 시아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집을 향해 달려갔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갈 순 없었다. 어차피 잠시 후 나호가 올 테니, 유령을 퇴치해 달라고 하면 그의 선에서 해결해 주리라. 괴상한 성격과 외모, 못미더운 체격을 가진 남자였지만, 어쨌든 마법사이지 않은가.
시아가 전력으로 달리니 금세 필리시아의 집이 가까워졌다. 낮에는 조용하던 집 근처가, 지금은 비명소리로 뒤범벅되어 있다는 것을 접근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비명 소리 사이사이에 낀 것은 크르렁거리는 야수의 위협, 즉 그녀에겐 익숙한 소리였다. 펠이 도착한 건가! 시아의 지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잘한다, 펠! 이대로 밀어붙여!”

“아악! 시아 양! 펠을 멈추게 해요!”

그녀의 명령과 비명이 거의 동시에 외쳐졌다. 자신의 목소리에 지워져 비명의 주인공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 시아였기에, 비명을 지른 자가 펠에게 습격받아 그녀 쪽으로 나뒹군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알 수 있었다.

“펠! 멈춰! 같은 편이잖아!”

“캬옹!”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들던 고양이가 잽싸게 방향을 틀어 착지하더니 시아에게 달려와 머리를 비볐다. 펠이야 남자는 모두 적이라는 주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시아는 피가 묻어 있는 녀석의 입과 발톱을 보고도 화내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 어이없어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저보다 먼저 온 건가요, 나호 님?”

분명 뒤에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어야 했을 사람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쓱하게 대답했다.

“시아 양, 잊으신 것 같지만 전 마법사입니다.”

“그런데요?”

그가 휘청 하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외쳤다.

“그런데요, 라니! 마법으로 여기 온 게 빤하잖습니까!”

“하지만 나호 님 마법은 열다섯 걸음 정도만 이동할 수 있잖아요.”

시큰둥하게 그녀가 대답하자 그는 정말 상처입은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설명할 기운이 없어졌는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죠.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입니다.”

“한 번……? 아!”

나호가 한 번이란 말을 유난히 강조한 덕에, 그녀는 그가 어떤 수단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아까 본 유령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그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급해서 처음 시도한 거긴 합니다만 효율은 정말 좋지 않군요. 덕분에 마나도 완전히 바닥났지요.”

“하아. 필리시아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왔는데 마나가 바닥났다구요…… 게다가 몸도 안 좋잖아요? 운좋게 펠이 먼저 와 있었으니 다행이지, 제일 먼저 도착했으면 녀석들에게 어떻게 대항하려 하신 거에요?”

“걱정할 것 없어요. 마법사에게 맨몸으로 맞설 인종은 없습니다. 상아탑의 이름으로 너희를 체포한다고 하면 무릎을 꿇었겠지요.”

​“​당​신​…​…​정​말​…​…​…​…​”​

이 남자, 그러다 그들이 급한 김에 칼부림을 하면 죽기 전까지 자신이 왜 찔렸는지 고민할 타입이다. 시아는 그것을 환기시켜주고 싶었지만 그건 뒤로 미루기로 하고, 나호에게 자신이 들고 온 나뭇가지를 쥐여주었다.

“몸도 안 좋고 마나도 다 썼다면, 일단 여기서 쉬고 계세요. 집 안엔 저와 펠이 먼저 들어갈 테니, 나호 님은 혹시라도 제가 둘을 놓치면 여기서 상대해 주세요. 알았죠?”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역시 제가 가 그들을 무릎꿇리는 게 더 간단한……”

“아뇨! 이런 자들에겐 제가 본때를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가자, 펠!”

그가 더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시아는 최종 목적지인 집 안으로 향했다. 펠 하나만 있어도 어지간한 성인 남자 셋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기에, 그녀는 주위를 경계하지 않고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과연 그녀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문가에 엉망이 되어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의 얼굴에 선명하게 난 발톱자국, 그리고 흥건한 가랑이 사이를 보니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머, 꽤 심하게 당했네. 얼굴에 흉터가 남을라나?
당신들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면 필리시아가 치료해줬을 텐데, 안됐네요.”

의식을 잃은 그를 향해 이를 갈며 빈정거린 후 시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꽤 어두웠고, 게다가 알 수 없는 진한 약초향 비슷한 냄새가 났다. 낮에 보았던 집안의 모습을 떠올려 현관 근처의 등잔을 들어 불을 밝혔다. 빛이 퍼지고 어둠이 마지못해 물러나자 어질러진 집안 모습이 그대로 들어왔다. 거실 저편에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기절한 사내를 보았을 땐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잠시 후로 미루고 필리시아를 찾아보았다. 거실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디로 간 걸까?
시아는 온 집안을 헤매다 마지막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은 돈이 되는 물건이 없었기에 사내들이 뒤지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부엌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길다란 물체는 쉽게 눈에 띄었다.

“필리시아! 괜찮아?”

시아는 등불을 치켜들고 필리시아에게 달려갔다. 다리가 묶이고, 양 손에 반쯤 감긴 줄을 걸치고 있는데다, 뺨이 부어오른 그녀의 모습에선 아까의 단아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주변을 보니 그녀는 묶인 채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기어온 것 같다. 시아는 이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기에, 필리시아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옷차림을 보니 다행히 범해지진 않은 것 같지만, 이런 폭행도 오래도록 몸과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펠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낑낑대며 필리시아를 안고 소파로 와 그 위에 눕혔다. 그런 다음 다리의 줄을 풀어 내버리고, 이어서 팔의 줄도 끄르려 했다. 그녀가 팔을 뻗으려 할 때,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필리시아가 힘겹게 말했다.

“제 손에……손대지 마요.”

“필리시아! 나야, 나! 시아!”

“알아요. 그러니……그러니 손대지 말아주세요.”

갑작스런 필리시아의 거부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럴 때 괜히 아까 일을 떠올리게 해선 곤란하다. 그래서 시아는 최대한 밝게 말했다.

“알았어. 네 손에 손대지 않아. 하지만 이 줄은 마저 풀게. 이대로면 불편하잖아?”

시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손에 걸쳐진 줄을 잡아당겼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건 소녀가 마음의 안정을 찾은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필리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아의 손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다, 그녀가 자기와 닿지 않고 무사히 줄을 벗겨내자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다행이야…… 시아 씨,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호 님 덕분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어. 이따 오면 그분한테도 인사해. 그리고 지금은 말 안해도 되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것 같아. 저 나쁜 놈들을 어떻게 혼내줄까도 생각해 놓고.”

마지막 말에 필리시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런 미소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표시일 것이다. 조금 안심한 시아는 부엌으로 돌아가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왔다. 여기저기 엉망진창인 소녀를 깨끗하게 닦아 주고 싶어서였다. 일단 이걸 그녀의 뺨에 올려놓고, 그 다음엔 두 개의 인간 쓰레기를 타는 쓰레기를 모아놓는 곳에 갖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수건을 꼭 짠 후 돌아오자, 실내에 한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이 상황에 나타날 사람은 당연히 하나뿐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깜짝이야!”

“이제 와서 놀란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지 않습니까, 시아 양?”

나호는 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딴죽만 걸었다. 마나가 조금 회복되자마자 주문으로 들어왔나 보다. 사실 이런 방식은 연속되는 주문 중 하나라도 실패했다간 시전자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무리수를 감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걸 입증했다.

“성녀님. 몸상태를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열이 나고, 맞은 데가 아프네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구요.”

“성녀님. 그것 말고도 더 있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면, 저도 그만큼 진단하는 게 힘듭니다.”

나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필리시아의 이야기 어디에 거짓이 있었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시아는 멀뚱히 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필리시아는 바로 말하는 대신, 난처한 표정으로 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시아는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흠흠. 여기선 어쩐지 제가 빠질 타이밍?
마침 저 녀석들을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니, 일단 나가 있을게요.“

“미안합니다.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마법사는 눈치빠른 그녀에게 살짝 목례했다. 시아는 후로의 옷깃을 잡고 현관으로 질질 끌고 가서, 거기 있던 켄까지 한데 묶어 뻥 차버렸다. 둘이 현관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고양이가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둘에게 다가갔다. 죽이지만 않으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명령은 아직 유효했다.
그 명령을 내린 본인은 문을 닫고 현관 계단참에 주저앉아 턱을 괴었다. 저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는 평범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이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필리시아를 도우면 되는 것이다. 지금 펠을 방치하는 건 순전히 그녀의 화풀이였지만.
실내에 둘만 남게 되자 필리시아의 표정이 변했다. 그나마 약간 평온해 보이던 표정마저 무너져내리자, 남는 것은 무한한 고통에 부서지는 육체뿐이었다. 두 팔로 양 어깨를 으스러져라 움켜잡는 것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내의 방법이었다.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자 금세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시아를 본 순간부터 고통을 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나호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성녀님……”

“이제 그 성녀란 말은 좀 집어치워 주세요! 지금은 그런 소릴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럴까요. 실례지만 비상시라 당신의 마음을 읽겠습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마​음​을​…​…​읽​는​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래봤자 이삼일 분량의 기억 정도만 읽는 게 고작이지요. 게다가 같은 마법사에겐 통하지 않기도 하고…… 그리고 당신 같은 분에게도 통하지 않지요. 지금 확인했습니다.”

시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역시 그녀도 마법 방어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수단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었다. 그 점은 예상했던 바였다. 단 그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는 건 그녀를 존중하기 위해서만 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아, 다행이네요. 저, 그런 건 정말 싫어요.”

그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 더 일그러뜨렸다. 의례적으로 웃음을 보이려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 시도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호는 말없이 소파에 뒹굴던 쿠션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소녀는 피멍이 든 어깨에서 손을 떼 그것을 움켜쥐었다. 애꿎은 쿠션은 순식간에 실밥이 터지고 솜이 삐져나왔지만, 그녀는 그걸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모양이었다.
나호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했다.

“저도 싫어합니다. 마음을 읽을 때마다, 제가 그 상대를 다 안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많아서요.
그러니 성녀님, 아니 필리시아 양. 전 제가 당신을 완전히 알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맹세하겠습니다.“

영민한 필리시아는 금세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으로 나호를 노려보았다. 램프의 불이 그녀의 눈 안에 불똥을 튀기기라도 한 것처럼, 불꽃이 너울거리는 눈동자를 위협적으로 치뜨며, 소녀는 적의를 가득 담아 말했다.

“당신, 절 방심시켰군요. 마음을 읽기 위해.”

“그렇습니다. 치졸한 방식이지만 통했군요. 그렇게 쉽게 경계를 푸시면 안되죠. 소중한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아, 이런 말을 하니 제가 무슨 악당 같군요.”

마지막 말에 그녀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그는 마법사의 입장으로 그녀를 훔쳐본 것이지, 관음증이 있어서 훔쳐본 건 아니라는 걸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훔쳐보았다는 사실이 변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악당 맞아요. 여자 마음을 함부로 엿보다니, 밖의 남자들보다 더 악질인데요?”

시아와 얼마나 이야기했다고, 그새 말투가 비슷해졌다. 농담이라고 한 말에, 필리시아 자신이 속으로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을 얼굴로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고통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지금 눈앞의 마법사에게 고스란히 까발려졌을 것이다. 그녀가 여지껏 지켜온 비밀을, 기적을 기적으로 만들기 위해 꼭꼭 숨겨왔던 사실을 마법사가 끄집어냈다.

“당신의 기적은 더 이상 기적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기적이란 대가 없이 얻어내는 힘, 하지만 당신은 무수한 대가를 치르고 있지요.”

“그럼, 마법사 님은 이걸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생명 순환이라 부르겠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덜어내 남의 생명을 활성화시키고, 이를 위한 매개로 마나 대신 타인의 고통을 원동력으로 삼는 방식. 이런 등가교환은 기적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물의 신 셀레스티네의 기적은 이보단 훨씬 우아한 방식이었습니다. 셀레스티네는 고통을 낫게 했지, 그것을 자기 몸 속에 쌓아놓고 자멸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요.“

마법사는 사형 선고처럼 냉정하게, 자신이 탐구하려 했던 기적을 짓밟았다.
 
나중에 제 소설에 나올 치유주문은 모두 이런 형태입니다.
그래서 전승자 자체가 거의 없고, 사람들은 이런 비밀을 모른다지요.
비상하는 매처럼 허리가 잘려도 뿅뿅 살려대는 수준은 사양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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