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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9화


시아는 필리시아에게로 다가가려다 방향을 바꿔 나호에게 갔다. 치유를 시전중인 필리시아를 직접 건드리는 것보단, 나호가 해결책을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몸을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그를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시아가 가까이 가 툭툭 치다가 몸을 흔들어대자 그제야 그녀를 보았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가 아프시다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필리시아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뭔가 당해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것 같다는 추측은 가능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시아는 망설임없이 비상수단을 택하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십오 분만 정신을 차려 주셔야겠어요. 그 뒤엔 여기 누워 주무셔도 뭐라고 말 안 할 테니까……

펠! 충격요법!“

 

고양이가 뒤로 달려가 낮게 포복했다. 녀석이 몸을 웅크린 것은 바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뒷다리에 팽팽한 근육이 일어나더니, 녀석의 몸이 화살보다 빨리 튀어나갔다. 단 두 번의 도약으로 나호에게 날아온 펠은 발톱을 숨긴 앞발로 마법사의 머리에 장렬한 훅을 선사했다. 두개골을 두 개로 쪼개버리는 듯한 묵직한 일격에, 마법사는 정신적 충격을 일시나마 잊을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아프잖아, 이 빌어먹을 고양아!”

 

마법사가 눈에서 불꽃을 내뿜었다. 의식을 헤집고 있던 갖가지 고통의 기억들이 날아가자마자, 그는 빈약한 팔을 휘둘러 펠을 때려잡으려 했다. 하지만 전투고양이 펠이 그런 주먹에 잡힐 리 없었다. 녀석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어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다.

 

“쿠헥!”

 

이번엔 볼에 한 방.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펠이 멋지게 마무리를 가하려던 찰나, 필리시아가 고양이를 뻥 차 버렸다.

 

“너! 누가 두 방이나 때리랬어! 네가 몇 대나 때리면 마법사 님은 죽을지도 모른다구!

나호 님! 괜찮으세요?“

 

“아까보단 한결 낫지만, 지금 인간으로서 굉장히 비참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정신이 든 거 맞죠? 그럼 어서 저걸 봐요!”

 

그녀가 가리킬 것도 없었다. 저녁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 그리고 그 중심의 두 사람을 그가 못 볼 리 없었다. 이제 필리시아는 병자를 무릎 위에 눕혀놓고 이마에 손을 짚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결국 저질러 버렸군! 바보 같으니!”

 

나호는 혀를 차고 공간이동으로 필리시아의 곁으로 이동했다. 필리시아는 그가 바로 옆에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치유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가끔 피 섞인 기침을 하는 걸 제외하면, 그녀는 한결같은 자세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아는 그 빛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호는 빛 너머에 있는 사람에 주목했다. 짧은 관찰을 끝낸 그는 시아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매우 안 좋은 사실과 아주 안 좋은 사실 중 어느 걸 먼저 듣고 싶습니까?”

 

“……그냥 한꺼번에 얘기하지 그러세요?”

 

“그럼 실례. 첫째, 이 환자의 상세는 필리시아 양의 치유에 그리 영향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엔 아까와 비교해 딱히 나아진 것 같진 않으니. 아까 문에 끼였던 팔의 상처는 나은 것 같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것만큼 안 좋은 소식이 또 있단 말이에요?”

 

“내 생각엔 저 빛이 필리시아 양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저게 끝나면 필리시아 양의 생명력도 다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 빛은 점점 사그라드는 중인 것 같습니다.”

 

빛의 중심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시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다. 놀란 시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보다 빛이 미치는 범위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눈을 살짝 감아야 할 정도의 밝기였지만, 지금은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별로 지장이 없었다. 눈이 빛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빛 자체가 약해졌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최선을 말해드릴까요? 가장 최선은 이 둘을 놔두고 도망가 스스로 격리를 자청해 보살핌을 받는 겁니다. 환자와 직접 접촉하진 않았으니, 아직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높을 거요.”

 

“다음은요?”

 

“필리시아 양의 치유를 중단시키고 함께 이동한다. 그렇게 할 경우, 필리시아 양은 이미 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커서 우리의 생존도 힘들겠군요.”

 

“마지막은?”

 

“필리시아 양을 도와 병자를 완치시킨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악의 꽃에 걸려 사이좋게 죽는 수밖에요. 이건 그야말로 기적을 바라야 하겠군요.”

 

선택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필리시아는 이미 그들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나호를 쓰러뜨리고 시아를 거부하면서까지 치유를 행한 필리시아를 굳이 목숨걸고 챙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소녀는 시아에겐 오늘 처음 보았을 뿐인 여자아이였고, 나호에겐 자기 목숨의 무게와 남의 목숨의 무게의 차를 저울질해본 적 없는 철딱서니없는 어린애였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아까 필리시아가 말하다 만 소설, 결말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호가 단박에 대화를 끊었다.

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어떻게든 다음 화제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호는 쐐기를 박았다.

 

“전 그 책을 벌써 읽었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결말 알려드릴까요?”

 

“나호 님 입으론 듣고 싶지 않네요. 전 필리시아한테 듣고 싶다구요.”

 

비건설적인 이야기로 시간만 잡아먹었다. 두뇌 명석한 마법사란 작자가 이런 긴박한 순간에 만담이나 즐기고 있다는 건, 자신과 그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시아에게 떠올랐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호 님, 솔직히 말해 주세요. 필리시아를 구하고 싶나요?”

 

“당신은요?”

 

“구하고 싶어요.”

 

“그럼 재주껏 구해 보시죠.”

 

시아는 입을 다물고 한 박자 쉬었다. 막 터지려던 고함을 억누르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바라는 대답이 이것이기를 빌며 말을 이었다.

 

“도와주세요.”

 

“좋습니다.”

 

​“​…​…​…​…​…​…​…​…​…​…​그​냥​ 도와준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인생 최악의 선택을 제 손으로 직접 하는 것보단 강압에 못이겨 했다고 기억하는 편이 나중에 덜 부끄러울 겁니다.”

 

진지한 얼굴로 나호가 대답하는 통에, 시아는 감동 대신 복잡미묘우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작자가 그냥 새침한 건지, 아니면 새침하면서 부끄러운 건지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이런 어른만은 되지 말자고 그녀는 다짐했다.

나호는 그녀의 괴상한 표정을 보고 한마디 했다.

 

“어른이 애 앞에서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요. 애가 뭘 보고 배울까요? 나중에 저런 어른은 되지 말자는 교훈? 아, 이번에도 마법 안 썼습니다?”

 

“…………”

 

시아는 대답하는 대신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화단 앞에는 꽁꽁 묶어둔 두 사내가 있었는데, 지금의 빛 때문인지 깨어난 모양이었다. 둘 다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는 듯, 욕설을 중얼거리며 밧줄을 풀기 위해 꿈틀거렸다. 시아는 그런 둘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펠, 다시 기절시켜. 최대한 잔인하게.”

 

“히이이익!”

 

몇 초 후 시작된 그들의 비명은 아주 오래 지속되었고, 모든 사건이 끝날 때까지 오케스트라의 반주처럼 지속되었다.

기절의 원인은, 수도 없이 질러댄 비명으로 인한 탈진이었다.

 

 

‘아아. 나는 곧 죽는구나.’

 

자신의 몸에서 나는 빛 때문에 환해진 사방을 바라보며 필리시아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반쯤은 예상한 사실이었다. 고통을 무릅쓰고 최대치의 생명력을 방출했지만, 병자에게 흡수되는 양은 턱없이 적었다. 물론 그에게서 밀려오는 고통의 양은 그보다 많았다. 그녀가 그동안 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불균형 때문이었다.

필리시아의 몸에서 빠져나간 생명력은 덧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녀는 이를 중단하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그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명력과 고통의 순환은 비효율적으로나마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순히 생명력만 준다면 병자의 병만 활성화될 수도 있었지만, 병자의 고통을 가져감으로서 환자의 몸과 마음을 정상일 때와 비슷하게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필리시아의 치유는 일단 유효했다. 비록 그것이 완치로 마무리되기에는 그녀의 생명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소녀는 자신이 안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추레한 턱수염, 냄새나고 더러운 옷,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깊이 패인 주름, 누런 이빨 등등. 그럼에도 살고 싶어하고, 그녀의 목숨을 받아가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걸 알면서도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남이 전염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이곳에 도달했고, 자신과 나호, 시아를 위험에 빠트렸다.

그러한 단편적 사실의 집합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그는 환자였고, 환자는 치유해야 한다. 비록 그녀가 세운 규칙을 어겼지만, 목숨이 위험한 자를 버릴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최후가 될지도 모를 치유를 행하는 도중에서야 필리시아는 확신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환자를 사랑해서 치유를 행한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그녀는 처음으로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힘이 한층 약해졌다. 생명력의 고갈이라기보단 의지의 저하가 문제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치유를 행할 때의 강력한 치유 능력을 떠올려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 그땐 정말 대단한 힘이라 생각했지.’

 

제발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구하던 고아원의 생활. 그 속에서 보내던 무미건조한 나날 도중 갑자기 일어난 기적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어느 날 고아원에 불이 나 많은 아이들이 화상을 입고 죽음을 기다릴 때, 그녀는 친구의 몸을 끌어안고 울면서 친구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갑자기 몸에서 빛이 나더니 아이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고, 친구의 상처는 기적처럼 아물었다. 최초의 치유를 마치고 쓰러졌던 필리시아가 일어났을 때, 그녀가 옷 속에 차고 있던 싸구려 목걸이의 가짜 보석은 바다처럼 새파란 색의 보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 그리고 보석 안에 신비한 힘이 깃들었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후의 일은 필리시아에게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필리시아가 아이들을 고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한 원장은 필리시아의 힘이 그녀에게 무리를 줄 것을 우려해, 그녀가 힘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필리시아는 자신에게 깃든 힘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기적의 힘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원장을 설득해 세상으로 나왔다. 대가 없이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그러면서 성녀라는 호칭도 들었다. 그 호칭보다, 자신이 기적의 힘으로 세상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기분좋아 쉼없이 치유를 행사했다. 그렇지만 고아원에서와 달리, 사람들을 치유해 줄수록 그녀의 몸은 급속히 나빠졌고, 보석의 빛도 점차 퇴색해 갔다……

줄어드는 흰 빛이 그녀의 회고를 방해했다. 치유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환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필리시아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자신은 이 자를,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가며 구하려 하는가? 아까 말한 대로, 그가 자신을 찾아온 중환자란 이유 때문에? ‘마지막’이란 타이밍 때문인지,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는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서 백색 빛과는 다른, 은은한 금빛이 점멸했다.

 

“이건…… 아까의 카드?”

 

아까 후로가 내팽개친 카드를 주워 가슴에 넣었는데, 그것이 빛나고 있었다. 필리시아는 망설이다 카드를 쥐고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아까 쓰러트렸을 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치유를 사용하는 당신들과 접촉 가능한 겁니까? 그게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접촉하면 서로 위험할 것 같아서,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연락하는 겁니다.

 

-……뭐 하시려구요?

 

-그야 당신을 방해하려고 그러죠.

앗! 시아 양, 뺏지 말아요!

 

잠시 저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나호보단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필리시아, 괜찮아?

 

-네. 언니도 저를 방해하려구요?

 

-아, 아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네.

 

-언니와 나호 님은 그런 생각을 하기보단 어서 여길 피하세요. 제 힘은 거의 다했으니까요. 아마 제가 치유를 시전하는 도중에는 병이 전염되지 않을 테니, 얼른 가세요.

 

-시끄러워! 지금 둘이 방책을 생각하고 있다구! 조금만 더 버텨!

 

사실 아무 대책도 없었지만, 시아는 카드에 대고 무책임하게 떠들었다. 외롭게 죽음과 싸우고 있는 필리시아가 조금이라도 힘을 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소녀는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주문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손을 대거나 말을 대는 행동은 최대한 삼가야 했다. 주문이 깨지면 그 충격으로 바로 죽을 수도 있다는 나호의 경고를 새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나호는 정신을 집중해 필리시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힘을 행사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 속을 볼 수 있는 건, 그녀가 자신의 특제 카드에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력이 듬뿍 들어간 카드는 그가 필리시아와 직접 접촉하는 것과 동등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필리시아가 방금 떠올렸던 회고를 뒤지며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찾았다.

 

‘고아원의 아이들 십수 명을 치유해 주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군. 그리고 이때는 보석이 빛나고 있었고, 지금은 빛이 바랬어. 그렇다면 저 보석은 필리시아 양의 상태를 나타내는 건가? 아냐, 그런 단순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힘의 전개방식도 초기와 후기에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집안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비쳤던 빛은 이제 완전히 집 밖, 필리시아의 주변까지 후퇴해 있었다. 사방이 다시 어두워지며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워댔다. 어디선가 한가롭게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가 오히려 시아와 나호를 초조하게 했다.

 

“아직도 뭔가 방법 생각난 거 없어요?”

 

필리시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카드를 잠깐 주머니에 넣은 후 시아가 질문했다. 그러자 마법사는 도리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전 만능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 쓸 만한 방법이라곤 도무지 없군요.”

 

“그럼 우린 필리시아가 죽는 걸 지켜보는 역이 되겠네요. 아, 전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이 자리를 지킬 테니까, 가시려면 나호 님 혼자 가세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쓸만한 방법이 없다고 말했지, 방법이 없다곤 말 안했습니다.“

 

“네?”

 

돌연 나호가 자신의 모자를 벗어들었다. 그러자 우스꽝스럽게 다듬어진 반반의 머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시아가 무슨 반응을 보일 틈을 주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억해 두십시오. 긴 머리와 수염은 기적이 있다는 표시, 박박 민 쪽은 기적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머리와 수염을 박박 밀어서 상아탑에 인계해 주십시오. 반대의 경우야 제가 머리와 수염을 기르면 되는 거니 그쪽 손을 빌릴 일은 없겠지요.”

 

“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이 자리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란 말입니다. 아까 어렴풋이 들었는데, 필리시아 양은 기적을 보고 싶다고 했죠? 저도 평생 소원이 기적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으니, 그녀의 행보에 동참할 생각입니다.”

 

자기 할 말을 끝낸 나호는 시아의 주머니에 꽂혀 있던 카드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필리시아의 옆으로 왔다. 시아가 허둥거리며 이쪽으로 오려 했지만 그는 한 손을 들어 저지한 후 다른 손을 들었다. 마법사의 우수한 두뇌는 필리시아의 마음 속을 헤집어가며 그가 원하는 자료를 연속해서 재생했다.

 

-필리시아 양. 아직 들리겠지요? 지금 재미난 것을 할 생각이니, 정신 바짝 차리세요.

 

-방해하지 말고 얼른 도망가라고 했죠!

 

-아까까진 방해하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너무 재밌어 보여서 끼고 싶어지는군요.

 

그는 심호흡을 하며 팔을 높게 들었다. 소매가 멋대로 펠럭이며 입고 있던 로브가 서서히 부풀어올랐다. 그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며, 지금 막 완성한 공식에 마나를 공급할 것을 온몸에 명령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희끄무레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아의 것보다는 못해도, 어슴푸레한 새벽 빛 정도의 광채가 손을 타고 내려와 온몸을 덮어갔다.

 

“나호 님, 그거……!”

 

-나호 님! 그걸 어떻게!

 

“착각하지 마십시오! 딱히 필리시아 양을 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걸 쓸 수 있는지, 그 효능은 어느 정도 될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주문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지만 그는 짐짓 허세를 부렸다. 이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법사는 망설이지 않고, 필리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자신의 생명력을 그녀에게 들이부었다.

 

-이거 놓으세요! 당신의 생명을 이런 데 쓰지 마세요!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필리시아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카드 너머에서 그가 피식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우리가 왜 당신에게 화를 냈는지 이제 알 것 같나요? 그걸 알아준다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보람이 있군요.

 

-하지만 당신도 지금 똑같잖아요!

 

-자기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여자애에게 인생의 교훈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인생의 오 년, 기적을 보기 위해 다시 오 년을 투자한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면 이쪽이 남는 장사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호는 죽을 지경이었다. 생명의 순환이란 방법은 직접 해 보니 말도 안 될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다. 환자와 고통을 공유하는 건 익숙한 필리시아에게 맡기고 자신의 생명력만 필리시아에게 공급해 줄 생각이었는데, 정말 수명이 마구 깎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남발했으니 필리시아의 몸이 이 지경이 된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필리시아의 방식은,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기력이 다한 나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나무가 쓰러지는 것처럼 전신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그의 몸을 시아가 받쳤다. 나호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빛은 아까보다 확연히 밝아져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하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근심스럽게 쳐다보는 시아를 향해 띄엄띄엄 말했다.

 

​“​시​간​제​한​은​…​…​약​간​ 늘어났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이젠……당신 차례……”

 

“하지만…… 전, 마법사가 아니라구요! 나호 님처럼 그런 걸 쓸 수 없어요!”

 

“그런 걸 쓰라는 게……아닙니다. 기적은 마법이 아니예요. 기적은…… 오롯이 기적일 뿐입니다.”

 

나호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더 말할 기력이 없는지, 자신의 손만 까딱거렸다. 무심결에 그녀가 그 손을 잡자 갑자기 마법사의 손에서 빛이 배어나왔다.

 

“앗……!”

 

시아가 탄성을 질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 그녀에게, 정확히는 그녀의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친구를 끌어안고 우는 어린 필리시아, 빛 속에서 처음으로 치유를 행하는 필리시아, 고아원을 나와 수많은 치유를 행한 필리시아…… 나호가 훔쳐보았던 필리시아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시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필리시아가 행할 수 있었던,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투영하는 방식을 응용한 방식이었다.

머릿속의 영사기가 모두 돌아가자 나호의 손이 시아에게서 떨어졌다. 모든 힘을 다 쓰고 의식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물어볼 건 없었다. 영사기는 필리시아의 기억이 끝난 직후 나호의 추측도 상영했기 때문이었다.

 

필리시아의 방식은 변질되었다.

 

과거의 필리시아의 치유는 지금과 달리 등가교환이 최소화된, 기적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추측과 기억을 맞물려 생각해 보자,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 원인이 시아의 머릿속에 확실히 그려졌다.

쓰러져있는 나호에게 고개를 잠시 숙인 후, 그녀는 카드를 들고 필리시아를 불렀다.

 

-필리시아.

 

필리시아는 카드에 대답하는 대신 시아를 직접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당혹과 초조, 긴장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나호가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생명력을 주었던 게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반칙이긴 했지만, 이제 시아는 소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필리시아의 뒤로 다가갔다. 나호와는 달리 어떤 마법적 대비도 하지 않았지만, 시아의 몸은 흔들림없이 필리시아의 몸 위로 겹쳐졌다. 그녀가 소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것이다.

 

-언니!

 

필리시아가 놀라 외쳤다. 평정을 잃은 탓인지, 빛이 위태롭게 깜박거렸다. 하지만 시아는 더 이상 빛을 보고 있지 않았다. 빛을 둘러쓰고 숨으려 하는 약한 소녀에게 주목할 뿐이었다.

차가워진 필리시아의 몸이 시아의 체온으로 조금씩 따뜻해져갔다. 하지만 필리시아의 마음 속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였다. 최대한 억제하곤 있었지만, 소녀가 지금도 차곡차곡 쌓는 중인 고통은 시아에게도 상당 부분 전달되고 있었다. 한계량을 넘어섰기 때문에 제어가 곤란해진 것이다.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며, 시아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언했다.

 

“기적을 보고 싶다고 했지?

그 소원, 이루어질 거야.”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기적들.
그 파편이 과연 하나로 모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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