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10화
시아의 갑작스런 말에 어안이 벙벙했던 필리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크게 움직이면 환자와의 접촉이 해제되어 주문이 실패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어깨만 들썩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에 시아가 떨어질 리 없었다.
-어서 제게서 떨어져요! 제가 아무리 치유를 쓰더라도, 직접 접촉했을 경우의 전염까지 막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알아. 넌 네 주변 사람들이 네 생각보단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 예를 들면, 네 초기의 치유와 후반의 치유가 다르다는 거? 미안하지만 나호 씨가 네 기억을 들여다봤던 걸 내게 가르쳐줬어.
필리시아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치유를 하는 건 전데, 잘도 말씀하시네요. 그야 다르긴 하겠죠. 제가 사람들의 고통을 흡수하면 할수록 몸에 무리가 가고, 그건 다시 치유의 효율을 저하시키고…… 이 보석이 그 증거에요.
그녀가 머리를 살짝 흔들자 목걸이가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광택 없는 푸른 보석이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그 보석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약간이나마 빛나고 있긴 했지만, 필리시아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제가 치유의 힘을 깨달았을 때 저절로 생겨난 거예요. 처음에는 새파랬지만 갈수록 흐릿하게 변해 갔죠. 이는 제 능력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변질되었어요.
-난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넌 중요한 걸 모르고 있어.
네가 처음으로 고아원 아이들을 치유할 때, 그때도 넌 그 아이들의 고통을 흡수했니?
-…………!
그 순간, 필리시아가 발하고 있던 치유의 빛이 확 사그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는 장난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 시아를 덮쳤다. 그것이 필리시아의 치유의 힘이 극도로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라는 걸 시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호의 경고가 자칫하면 사실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런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참다 못한 그녀가 막 필리시아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땐 지금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희미하게, 메아리가 돌아오며 소멸되는 것처럼, 필리시아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고통 때문에 힘이 약해진 게 아니라, 제가 점차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요?
-그래. 그리고 우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해.
본인에겐 고통스럽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몇 년에 걸친 변화라면 본인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한순간에 그 변화과정을 모두 살펴본 타자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독심술에 특화된 나호가 아니었더라면 시아는 필리시아의 힘에 대해 추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 떨치려 했던 팔을 억지로 움직여 시아의 옷깃에 옭아매며, 시아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말해 주었다.
-네 기억을 본 것만으론 한계가 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지지. 네가 고아원의 아이들을 치유해줬을 때랑, 나중에 일반인들을 치유해줬을 때의 차이는 분명해. 전자가 편한 옷과 신발로 달리기를 하는 거라면, 후자는 발에 납덩이를 매달고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거야. 즉, 전자는 그냥 지치는 거고, 후자는 발에 무리가 가는 거지.
그렇다면 다음은 네가 답할 차례야. 필리시아, 넌 아는 사람을 치유해 줄 때와 모르는 사람을 치유해 줄 때 각각 어떤 기분으로 그들을 대한 거니?
-그건 구별될 수 없어요. 다친 사람은 다친 사람일 뿐이에요. 전 누구도 구분하지 않고 제게 온 사람 모두를 치유해주기 위해 노력했다구요!
-아니야. 치유해줬는지를 묻는 게 아니잖아.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유해 주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야.
네가 말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말할까? 너와 친했던 고아원 아이들은 당연히 치유해줘야 할 대상이야. 네가 진심으로 낫게 하고픈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너와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전후 사정도 모르고,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혹해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로 관계를 정리하는 이들을, 네가 친구들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할 수 있었니?
-아니에요! 그들도 모두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정말이야, 치유의 성녀님?
시아가 꺼낸 한 단어에 필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단어가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게 그녀를 옭아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듣기 시작했던 그 말이 좋아서, 그래서 더욱 힘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필리시아라는 소녀의 삶을 밀어내 버릴 만큼 강력했다. 치유하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언젠가부터 치유하는 것만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치유의 성녀라는 이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를 느꼈다.
-……놀리지 마세요.
-난 놀리는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제게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한 건가요! 전 힘이 생겼을 때보다, 이 명칭을 얻었을 때가 더욱 기뻤어요! 그래요, 전 고아고, 이 힘이 없었다면 아까 저 자식들처럼 쓰레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운명이었어요! 그런 제가 세상에 필요하다는 자격을 얻은 거라구요! 평범하게 태어나 행복하게 자란 시아 언니가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나요?
-있어.
시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필리시아. 네 처지는 잘 알겠어. 난 네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네 심정을 직접 겪어볼 수 없어.
하지만 말이야, 난 네가 되는 상상을 할 수 있어.
-그러세요?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요?
되돌아오는 소녀의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시아의 얘기는 그녀에겐 뜬금없는 얘기일 뿐이었다. 자신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상이라니? 하지만 시아는 그런 필리시아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치유의 성녀님께서, 몸소 그 갑옷을 벗고 16세 소녀라는 맨몸으로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남의 고통은 우직하게 모두 끌어안으려 하면서 자기 고통은 태연히 무시하던 소녀가 비로소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상상할 수 있어. 그 점에서 난 특별하지 않아.
하지만 난 필리시아라는 소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고, 그 점에선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지.
-그래서요? 언니가 상상하는 제 모습이란 건 어떤 거죠?
-세상의 쓰레기란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잡고 있는 고집불통의 여자애.
-그렇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고아원이란 곳을 와 본 적 있긴 한가요? 매일매일,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만을 꿈꾸며, 혼자 살아가기엔 세상의 벽이 너무 높다는 걸 수도 없이 실감해야 하는 그곳을, 상상만으로 알 수 있다구요?
-고아원에서만 그럴 것 같지? 하지만 바깥에서도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상황이 달랐을 뿐, 나 또한 그런 생각으로 십대를 보냈으니까. 그렇게 내가 현실을 이겨내는 걸 상상하고 상상하며, 어느덧 지금의 꿈 많은 시아가 된 거야.
-그건 말바꾸기일 뿐이잖아요.
결국 언니도 세상을 이기지 못했다는 걸 시인하는 건가요?
-이기지 못했지. 하지만 그게 어때서? 상상 속의 나는 언제나 현실을 이겨 왔고, 현실 속의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어. 적어도 그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물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이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지만, 난 내 손을 벗어난 문제에는 신경을 끄자는 주의니까.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필리시아가 초조하게 되물었다. 주문에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 아까보다 빛이 더욱 약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추면 그나마 억제하고 있는 악의 꽃의 기운이 사방에 퍼져 이들 모두 감염되고 만다. 그런 자신의 고생을 시아 언니는 알기나 한 걸까? 하지만 그 대답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깨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아의 손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자신의 등에서. 지금의 시아가 필리시아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는 카드를 통해 흐트러짐 없는 밝은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카드가 아니라 소리내어 하는 대화였다면 둘 다 이렇게 긴 대화를 소화하지 못하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이미 한계에 왔다는 걸 시아는 알고 있었다. 고통에 침식당한 육체에선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은 무수한 가시덩굴에 휘감겨 찌부러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모아 눈앞의 소녀에게 의식을 전달했다.
-필리시아, 네게 부탁하고 싶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란 이유로 치유의 성녀가 되려 하지 마.
그 이름 안에 숨으려 하지 마.
그 이름이 없었을 때야말로, 넌 순수하게 친구들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어.
그게 아니라면, 상대의 고통을 그저 끌어안아 가져올 뿐인 방식이라면, 너는 끝내 치유되지 못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
-그 이름이 없다면 넌 필리시아란 소녀로 남겠지. 이 험한 세상에 맨몸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럴 때야말로 상상할 때야.
상상으로 현실을 이기란 말까진 하지 않겠어. 그렇지만 너 또한 상상하길 좋아했잖아. 네가 읽었던 ‘기적의 기사’는, 네게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만 주었니? 주인공이 보았던 환상은 그에게 파멸을 안겨주었을 뿐이니?
제발, 필리시아.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전, 전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냐. 넌 알고 있는걸.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아의 의식이 덜컥 끊겼다. 필리시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그녀의 등을 감싸던 따뜻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언니!
“언니!”
필리시아는 카드를 내던지며 쓰러진 그녀를 껴안았다. 하지만 필리시아와의 접촉면이 넓어지자 시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더 이상 그녀에게 무리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치유의 힘을 중단했다. 빛이 모두 사라지자 시아에게 가해지던 고통이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안심하려던 찰나, 필리시아의 뇌리에 벼락이 쳤다.
“아아…… 아! 아아앗!”
필리시아가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가 치유하려 했던 병자는 이미 숨져 있었다.
극심한 허탈감에 빠진 그녀는 그대로 시아의 옆에 엎어졌다. 땀에 흠뻑 젖은 몸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지저분해지고, 얼굴도 흙투성이가 되었다. 어느새 흐려진 밤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자신도 저 비처럼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실패할 걸 알고 있었고, 실패했다. 그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병자를 구원할 수 있다던 치유의 성녀가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이로서 그 이름을 시궁창에 파묻어 버렸을 뿐이었다.
하늘과 땅은 모두 캄캄하고, 빛은 모두 사라졌다. 집에 켜 두었던 램프도 꺼진 지 오래였다. 달과 별이 없는 밤의 숲에는 쓰러진 사람들과 고양이 한 마리,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꼭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 딱히 확인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 엎드려 있는 건 누구일까?
‘난 누구일까.
난 누구일까.
난 누구일까.
난……
아아, 필리시아.
그런 이름이었지‘
짧은 시간, 그녀를 지탱해 준 원동력을 잃었기에, 필리시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도 힘들었다. 굵어진 빗줄기가 고막을 멍멍하게 하고, 온몸이 흠뻑 젖자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단실처럼 부드럽던 머리카락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보기 싫게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헤치던 그녀에게 목에 걸린 줄이 만져졌다. 더듬어 보니 둥근 보석 모양이 손에 잡혔다. 자신이 차고 있던 목걸이였다.
‘언제부터였지? 이 빛이 사라진 게?’
그녀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억과 사고가 모두 어둠 속에 삼켜져 버린 느낌이 들었기에, 필리시아는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나타내 주는 유일한 물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둠 속 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빛나고, 있어?”
목걸이에 달린 보석은 조금씩 빛나고 있었다.
‘왜?’
그것이 빛나는 이유를 필리시아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일 년 넘게 사라졌던 빛이 다시 돌아온 걸까? 그 이유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며 멍하니 푸른 빛을 응시하자, 그녀의 기억이 점차 되살아났다.
“맞아…… 언니!”
목걸이의 빛이 조금 더 환해졌다. 그녀는 목걸이를 벗어들고 바닥에 쓰러진 형체를 비쳤다. 시아가 일그러진 얼굴인 채로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좋았을 텐데,
시아의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안돼! 안돼! 맙소사!”
그녀는 황급히 시아를 눕힌 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나호를 비쳤다. 나호 또한 붉은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그렇다면 저 쪽에 묶여 있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팔을 걷어 보니, 거기에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만사 끝장이었다. 한 명도 치유하지 못한 그녀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줄 수 있을 리가……
-상상해.
필리시아는 멈칫했다.
-너 또한, 상상하길 좋아하잖니.
아까 시아가 했던 말이, 지금 그녀와 직접 대화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 순수하게 친구들의 치유를 바랐던 자신의 모습을. 게다가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친구들을 치유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치유의 성녀로서의 마지막 업무를 마친 지금, 필리시아로서는 더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치유를 행하는 본인이 가장 치유가 필요하다는 역설적 사실을 그녀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눈을 감고 그동안 아등바등 지켜오려 했던 것들을 포기하자, 이제껏 끌어안아왔던 고통이 빗물에 씻겨 흘러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안고 있는 고통은 그 출처가 어떠하든 결국 그녀 자신의 것이다. 멋대로 끌어안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을 다시 벗어던지는 것도 가능하다. 등가교환이란 허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힘을 제한하고 몸을 망쳤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등가교환 따위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기적이다.
목걸이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었다. 푸른 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지친 몸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오고, 고통이 감소했다.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던 목걸이의 용도란 이런 것이었다. 빛나고 있을 땐 몰랐다가, 빛을 한 번 잃은 연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보석은 자신의 분신이다.
그리고 이 보석은 자신이 다시 한 번 빛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시알.”
필리시아는 자신의 소중한 분신에게 지금 막 지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필리시아와 시아, 두 시아가 교차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와, 두 번째로 소중한 존재가 만난 기념이었다.
보석이 그 이름에 반응했는지 놀라울 만큼 밝아졌다. 그 빛은 아까 시아가 전력으로 회복주문을 쓸 때의 밝기와 맞먹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치유의 힘까지 발동시켰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필리시아를 위해서야.”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았다. 신께 기도하는 자세였지만, 실상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몇 년 만의 기원이었다.
마주잡은 손에서 흰 빛이 퍼져나가고, 그것은 푸른 빛과 엉키며 허공에 빛의 수를 놓았다. 소모되었다고 생각했던 생명력이 다시 몸 안에 충만해졌고, 그녀는 그것으로 다시 한 번 빛의 장막을 펼쳤다. 장막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고, 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차단했다. 여전히 사방은 어두웠지만, 빛의 장막 안쪽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래도,
모두는 살아가겠죠,
그렇죠?”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그녀는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개방했다.
에필로그
보슬비가 마른 가을의 대지를 적셨다. 모처럼의 비는 상쾌하다기보다 어딘가 끈적끈적했다. 밤비는 소리만으로 청량한 기분을 주지만, 오는 듯 오지 않는 듯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사람의 마음을 축 늘어지게 한다. 늘 상쾌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자랑이던 시아도 이런 날씨는 싫은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지으며 의자에서 다리를 흔들어댔다.
“야, 시아. 다리 흔드는 거 그만 좀 해.”
“싫어.”
“시아,”
“네에. 그만할게요.”
휴드와 브릭 교수가 거의 동시에 한 말에 시아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 주었다. 다리 흔들기를 멈추자 휴드가 그녀를 살짝 째려보았지만, 그녀가 마주 째려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서류 정리를 계속했다.
가뜩이나 좁은 브릭 교수의 연구실에 세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까지 들어차 있는 건 상당히 답답해 보였다. 게다가 휴드와 브릭 교수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둘은 작업 현장에 멋대로 들어와 고양이와 놀고 있는 시아가 못마땅했지만 차마 나가라고 하진 못했다. 시아는 차와 과자 외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곳의 잡무를 도와주곤 하는 귀중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시아가 이 방에 있는 것은 단순히 놀러온 것만은 아니었다.
“슬슬 면담 시간이 되었네. 일어나야겠어.”
창 밖의 시계탑을 흘끗 본 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필리시아와의 인터뷰와 시아가 적은 소설이었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걸 작성하기 위해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호와 시아가 거의 동시에 깨어났을 때, 둘은 필리시아가 무엇을 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명이 죽긴 했지만, 악의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모두를 치유해 주고 탈진해 쓰러진 그녀가 죽은 줄 알고 한동안 허둥댔지만,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의외로 생명력이 약간 채워져 있었다. 그녀를 갉아먹던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나호가 밀어넣어준 생명력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 잘못된 방식으로 치유를 남발한 탓에, 필리시아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마법사는 설명해 주었다. 그렇지만 필리시아는 담담했다.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치유의 성녀로서가 아니라 필리시아라는 소녀로 살아가겠노라고, 노부인에게 받았던 돈으로 은거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며 웃는 모습은 참 풋풋해 보였다.
“시아, 낮부터 멍하기야? 설마 낮술이라도 한잔 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미처 다 쓰지 못한 리포트에 대해 피셔 교수에게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는 거야?”
시아의 회상에 휴드가 초를 쳤다. 늘상 있는 태클이었지만 이번엔 특히 타이밍이 절묘했다. 한참 좋은 장면에서 회상이 끊긴 시아가 볼을 부풀렸다.
“뭐야! 내가 너같은 줄 알아? 그리고 리포트는 완성했어!”
휴드 따위! 이런 모험을 절대로 겪지 못했을 휴드가 감히 자신과 맞먹으려 드는 게 괘씸해서 시아는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그러나 휴드는 반성하긴커녕 그녀의 숙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점수 잘 받으려고 새로 낸다는 게 고작 그 정도 양이야? 이거 글렀어, 글렀어.”
“무슨 소리! 이거 작성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넌 상상도 못할 일들을 잔뜩 겪은 다음에 쓰는 거라구!”
“아아, 어련하시겠어. 펠이랑 하루종일 나갔다 오더니 뚝딱 써냈다는 그거 말이지? 하긴, 피셔 교수님이 고양이 애호가라면 펠과 하루종일 같이 있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르겠군.”
“흥! 나중에 성적 나오는 대로 네 얼굴에 던져 주지!”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시아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펠이 당당한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지만, 그녀는 매정하게도 잽싸게 나가 문을 닫아 버렸다. 문 너머로 드물게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좀 미안했지만, 점수 잘 받자고 가는 자리에 흉악한(시아는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렇다는 이야기다) 인상의 고양이가 끼는 건 절대 이득이 되진 않을 거란 충고가 여기저기에서 있었기에 시아는 마지못해 혼자 가기로 했다.
게다가 그녀는 피셔 교수를 만나러 가기 전에 들릴 곳도 있었다.
미리 면담 시간을 잡은 터라 교수는 안에 있었다. 노크한 후 그녀가 들어가자, 피셔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벌써 리포트를 작성한 건가? 생각보다 빠른데?”
“꽤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어디 보자…… 필리시아? 치유의 성녀 아닌가? 맙소사! 자넨 그녀를 인터뷰한 건가?”
“네.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인터뷰였답니다.”
피셔 교수는 종이를 눈으로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인터뷰를 살펴보았다. 치유의 성녀에게 평소부터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의 질문은 대체로 소소한 내용이었지만 그런 만큼 그녀의 일상을 잘 알 수 있게 했고, 덕분에 평소 보던 삼류 소식지가 주던 부정적 이미지를 말끔히 걷어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단 보류한 채, 교수는 그 리포트를 바탕으로 시아가 작성했다는 소설을 읽었다. 그가 수업하던 기사도 문학이 아니라 동화에 가까운 형태였다. 하지만 지난번과 달리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해 보였다. 이 소설은 분명 ‘치유의 성녀’를 독자로 해서 쓰여졌을 것이므로,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추리해 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잘 읽었네. 지난번보다 확실히 낫군. 독자를 지정했기 때문일까?”
“아니요. 독자가 필리시아이기 때문입니다.”
“허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단 말이군. 부럽네.”
“교수님.”
피셔 교수의 말을 시아가 끊고 질문했다.
“교수님은 상상과 환상, 그리고 기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수는 시아의 질문을 듣고 의자에서 고쳐앉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에는 의문이라기보단 확인해보고 싶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 그녀는 이미 나름의 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 답이 무엇인지 피셔는 궁금해졌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교수님이 대답하시면 대답해 드릴게요.”
“그런가. 좋네. 먼저 대답하지.
교수로서의, 사전적 의미로서의 답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개인적 견해만 말하겠네. 난 상상하는 자에게, 환상을 꿈꾸는 자에게 기적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네.“
“‘기적의 기사’말이죠? 교수님이 그 이야기를 쓰신 건, 그 답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이거 들켰군그래.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텐데, 어떻게 구했나?”
“교수님 팬이 있어서 빌렸어요. 마지막 한 장만 남겨놓고 모두 읽었답니다.”
“저런. 마지막 장은 찢기기라도 한 건가?”
“아뇨. 오늘 듣고 난 다음 읽을 생각이에요.”
“들어?”
뭔가 생략된 시아의 말을 듣고 피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작품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학생이라면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재밌는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가 질문하기에 앞서, 시아가 선수를 쳤다.
“그럼 제가 답할 차례겠네요.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괜찮은가요?“
“점수 말인가?”
“역시 감 하나는 일품이시네요.”
“이 두 개만으론 평점 정도야. 자네가 깎아먹었던 점수가 워낙 커서 말일세.
하지만, 지금 자네가 대답을 잘 한다면, 점수를 좀 더 높여줄 수도 있지.“
피셔 교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과연 쉽게 점수를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쯤은 예상했던 범위였으므로 시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필리시아에게 상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상상을 통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자신도 그 말을 확신하진 못했어요.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제가 믿든 믿지 않든 그 말 이외에는 해줄 말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 예상을 뛰어넘고, 정말로 현실을 이겨냈어요.”
그녀가 제출했던 인터뷰엔 뒷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으므로, 피셔 교수는 이 이야기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끊기보단 이야기가 끝난 후 질문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에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현실을 이겨냈기에, 우린 환상을 꿈꿀 자격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필리시아와 저는 같은 환상을 꿈꾸었고, 그것은 기적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답니다. 기적이란, 끊임없이 환상해 구체적인 소망의 형태를 갖추어야 일어나는 까다로운 녀석이니까요.”
“재미있는 답변이군. 그렇다면 기적은?”
“기적 말이죠? 자신에게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소녀에게, 지금 이 순간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자, 제가 데려온 손님들을 소개합니다!”
시아는 그 말을 하더니 돌아서서 교수실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거기엔 좌우비대칭인 수염을 기른 남자, 그리고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기적의 기사’ 초판본을 들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소녀가 서 있었다.
“소개할게요. 상아탑의 마법사 나호 님, 그리고 전직 치유의 성녀 필리시아입니다.”
“허억!”
피셔 교수가 몸을 튕겨 일어났다. 아무리 소설가라 해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이서 볼 일이 거의 없는 마법사, 그리고 치유의 성녀라니! 그녀를 다음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쓸까 생각해보던 그였기에, 본인의 방문은 횡재를 넘어서 기적 그 자체였다.
“마, 맙소사. 이건 정말 기적이잖나.
자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가?”
“그거 말하면 최고점 줄 건가요?”
“주고말고!”
“에에,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 사실 나호 님도 그 때문에 오신 거니까요. 교수님, 나호 님과 필리시아가 앉을 자리를 준비해도 될까요?”
“아아, 물론! 어서 준비하게! 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눌 테니!”
나호와 필리시아, 피셔가 인사를 하는 사이, 시아가 의자를 네 개 가져와 방 중앙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수염과 머리를 기르는 중인 나호가 화장실에서 모발을 정돈하고 돌아온 후, 교수가 직접 차를 끓이고 쿠키를 꺼내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다.
넷이 자리에 앉자, 필리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기적의 기사’의 마지막 장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시아는 싱긋 웃었다. 그날 밤의, 그녀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기적이란, 가끔은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발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것으로 얻을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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