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4화 흑과 백의 파트너
검은 핵.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도의 무기.
지상이라는 ‘뚜껑’을 날려버리기 위한 대마왕 버언의 비장의 수단.
그리고 포프를 희생이라는 선택으로 몰고 갔던 물건.
그 죽음의 병기를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꺼냈을 때,
내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내 무적의 사역마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짐이 되었고,
난 그가 있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서까지 그의 희생을 강요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때 어떤 행동을 취했다면,
이렇게 포프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진짜 용기라는 걸 알고 있던 주제에 내 마음은 끝까지 알지 못했던,
그 멍청한 소년이 내 옆에서 떠나야 했던 걸 막을 순 없었을까?
난 제로의 루이즈.
가장 원했던 걸 손에 넣고도 끝내는 잃어버린 허무의 메이지 -
제로의 대모험 제3화
-흑과 백의 파트너-
루이즈의 손에 들린 검은 핵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육망성의 별이 하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루이즈는 포프에게 물어보려 했다.
“포프!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윽?”
갑자기 루이즈의 다리가 풀렸다. 마법을 많이 사용한 반동일까? 그걸 생각하기에 앞서 포프의 몸은 이미 루이즈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루이즈를 걱정할 새도 없이 검은 핵을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포프는 왜 그녀가 쓰러졌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은 핵은 포프의 마력을 탐욕스럽게 삼키고 있었다.
“포, 포프? 나 이상해. 갑자기 힘이……”
“말하지 마. 마법을 너무 써서 그런 거야. 넌 쉬어야 해.”
대충 둘러댄 뒤 루이즈를 번쩍 들어 공주님 안기로 안았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검은 핵을 든 데다 루이즈까지 든 꼴이 볼썽사나웠지만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급히 아까 숲을 헤치고 뛰기 시작했다. 문장의 힘 덕분인지 루이즈를 안은 채로도 금방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타바사! 큐르케!”
“여기 있어!”
풍룡이 머리 위에서 낙하해 왔다. 막 풍룡을 타고 비행을 시작한 듯,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풍룡이 착지하자 포프는 루이즈를 큐르케에게 던졌다. 큐르케가 그녀를 받으며 무언의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포프는 설명하는 대신 검을 잡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저 편에서 숲을 엉망으로 짓밟으며 골렘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루이즈까지 셋이 탄 상황에서 후케를 요격할 수 있겠어?”
“안 된다고 말할 순 없겠지. 힘들겠지만 해볼게.”
“고마워.
그리고 타바사! 이걸 얼려 줘!”
검은 핵이 혹시라도 충격으로 터질지 몰라 포프는 그것을 손에 쥔 채 타바사에게 내밀었다. 타바사는 그의 손에서 검은 핵을 받아들고 주문을 외우려 했다. 그때 저만치에 있던 골렘이 작은 바위를 뽑아 이쪽으로 내던졌다. 겨냥은 빗나가 있었지만 풍룡이 그 서슬에 놀라 위로 상승했다. 갑작스런 비행에 타바사는 검은 핵을 떨어뜨렸다.
풍룡이 날아오르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그는 다시 검은 핵을 손에 쥐었다. 이 녀석은 주위에 있는 사물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속성이 있는 듯했다. 그 속성 덕에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저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자연 상태로 놔둔다면 주변 환경은 엉망이 되겠지. 아마 ‘파괴의 돌’이란 말도 그래서 붙여지지 않았을까. 혹시 이것을 사용했다면 하르케게니아는 물론이고 이 대륙의 절반이 날아갔을 테니 써 보고 붙인 이름은 아니겠지.
대마도사가 된 이후 포프의 마력량은 버언을 제외하면 지상의 생물 중에선 가장 많았다. 루이즈는 잠시 잡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정도였지만 포프는 최소한 십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타바사가 이 녀석을 얼렸다면 안심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그가 이걸 가지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어딘가에 방치했다가 싸움의 와중에 충격을 받게 할 순 없었으므로. 서둘러 후케를 쓰러뜨리고 지팡이를 되찾아 이 녀석을 해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포프는 자신의 손에 쥔 검을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그래, 어디 해보자 이거야!”
포프의 몸이 움직였다. 문장의 빛이 강해지며, 그는 날 듯한 속도로 골렘의 다리 부분으로 향했다. 골렘이 채 반응하기 전에 포프의 검이 휘둘러졌다.
“아방류 도살법 대지참!”
캉! 하며 검이 골렘의 발목을 파고들었다. 자연체 상태에서 손목과 팔의 힘을 잘 조절하여 쓸데없는 힘을 제외하고 휘두르는 것이 대지참의 요령이다. 타이는 몸으로 익혔지만 포프는 머리로 익혔고, 문장의 힘이 그 검술을 완벽하게 이끌어냈다. 제법 깊은 상흔을 남기고 포프는 뒤로 물러섰다.
-캬하! 파트너, 어디서 검술 좀 익혔나?
“조금. 그보다 이걸로 저 녀석의 한쪽 발목을 부숴버려야겠는데, 할 수 있지?”
-휘두르는 건 너니까 잘 해봐. 끝나고 수리하는 거 잊지 말고!
델프링거가 호기롭게 외쳤다. 포프는 그를 들고 골렘의 뒤로 뛰어가 발목의 힘줄이 있을 부분을 다시 내리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깊숙하게 박혔다. 머리 위에서 후케가 외쳤다.
“그 따위 공격이 먹힐 것 같아? 어서 그 무기를 써 보지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쪽은 사용법을 모르나 보네요?”
후케가 침묵했다. 골렘에게 저것을 쓰도록 유도한 뒤 포프의 지팡이와 맞바꾸려 했는데, 초장부터 엇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말한 포프도 사용법 따윈 알지 못했지만.
“난 이 무기를 쓰지 않아요. 이건 너무 위험한 무기니까. 오직 검만으로 이 골렘을 넘어뜨릴 거에요. 하지만 어떡하죠? 제가 골렘에게 죽으면, 당신은 이 무기의 사용법을 영원히 모를 텐데?”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네.”
갑자기 포프의 머리 위로 뭔가가 낙하했다. 육중한 것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은 포프는 그 자리에서 이탈했다. 쾅! 쾅! 하고 두 번의 소리가 들리자 포프는 아연했다. 위에서 떨어진 것은 포프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골렘 두 기였다.
“혹시 해서 예비로 만들어두길 잘 했네.
그럼 잘 해봐. 네가 그 아이들을 상대하는 사이, 난 학생들을 상대해 줄게.“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골렘들이 포프를 공격했다. 덩치가 작아지면서 한결 민첩해진 것 같다. 포프가 다시 대지참을 써 보았지만 반쯤 베이는 정도로 이리저리 피하며 공격해 들어온다. 기슈의 왈큐레보다 빠른 속도인 데다 큰 골렘의 움직임까지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포프는 괴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상황은 점점 후케 쪽에 유리해졌다. 풍룡이 골렘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지만 골렘이 파리를 쫓는 것처럼 두 팔을 붕붕 휘두르자 접근하기 힘들었다. 후케를 향해 주문을 난사해도 그때마다 골렘에게 막힌다. 무엇보다 풍룡의 속도가 상당히 저하되어 있다. 큐이큐이~ 하고 풍룡이 헐떡거리며 신음한다.
“이대로는 안 돼. 타바사, 좋은 수가 없을까?”
“하나 있어.”
타바사는 빠르게 설명한 후 지팡이를 들었다. 막대한 마력 방출 때문에 아껴뒀던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서둘러 주창을 마치고, 긴 지팡이를 들어 골렘을 겨냥한 후 낮게 외친다.
“아이스 스톰!”
허공에서 눈보라가 생성되어 골렘에게 쏘아졌다.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는 눈 섞인 바람이 아니라, 앞을 가로막는 것을 분쇄하고 찢는 빙백의 폭풍이다. 더구나 광범위한 지역을 쓸어버리기 때문에 골렘이 손을 펴 막아도 손가락 사이 등으로 일부가 빠져나간다. 삽시간에 골렘의 몸이 하얗게 변해 간다. 후케는 한기를 참으며 손으로 얼굴을 보호했다. 만약 눈에 얼음조각이 들어간다면 지금의 유리한 상황은 끝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폭풍은 그쳤지만 후케에겐 그 시간을 잃은 게 뼈아픈 손실이었다. 풍룡을 시야에서 잠시 놓친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기세가 느껴졌다.
“여기야, 후케! 프레임 볼!”
큐르케가 전력을 담은 주문을 내쏘았다. 골렘에 막히면 별 효과가 없겠지만, 기습을 당한 후케로서는 막기 어려웠다. 쳇, 하고 혀를 차며 후케는 주저없이 골렘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플라이 주문으로 서서히 내려오느라 골렘을 조종할 수 없는 그때가 그녀를 잡을 기회였다.
“달링! 부탁해!”
“그래!”
골렘 한 기를 막 부순 후 남은 골렘과 상대하던 포프가 후케의 낙하지점을 향해 뛰어갔다. 무방비 상태로 달려가는 그의 뒤를 골렘이 쫓지만, 원인모를 폭발에 휘말려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보지 않아도 누가 했는지 알 수 있다. 포프는 검은 핵을 쥔 손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풍룡에 엎드린 채 지팡이를 거둔 루이즈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포프를 본 후케는 안색이 변해 다시 골렘에게 붙었다. 하지만 넓은 어깨에 서 있는 것과 달리, 무릎쯤에 찰싹 달라붙은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저 정도 높이라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후 포프는 있는 힘껏 점프해 대지참으로 골렘의 정강이를 찍었다. 검이 깊숙하게 박히자 검을 잡은 채 손목의 힘으로 몸을 한 바퀴 돌려 위에 있던 후케의 몸을 가격했다. 그 충격에 후케의 몸이 흔들렸고, 품 안에 넣어두었던 블랙 로드가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포프는 주저없이 검을 놓고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야이빌어먹을파트너개자식아날버릴셈이냐~!
“나중에 꼭 회수할게!”
더 이상 검을 잡고 있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검을 잡고 있으면 두 손이 차 있어 지팡이를 잡을 수 없다. 검에게 살짝 미안함을 느끼며 포프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지팡이를 잡으려 했다.
짧은 헤어짐을 끝내고 다시 재회하게 된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던 포프의 위로 돌연 거대한 그림자가 솟았다.
-머저리야! 도망쳐!
“늦었어!”
아슬아슬하게 골렘에게 매달린 채로 후케는 골렘을 조종해 지팡이와 포프의 몸을 한순간에 짓밟았다. 원래 포프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힘을 되찾는 순간 그에게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골렘의 발에 가려 후케에게도, 루이즈들에게도 포프의 마지막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직.
골렘의 발은 확실히 지면과 접촉하며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박살냈다.
힘없이 엎드려 있던 루이즈에게 골렘이 땅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을 만큼 지쳤기 때문에 그녀는 큐르케와 타바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포프는 무사해?”
꺼질 듯한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 큐르케는 덜덜 떨리는 어깨를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주먹을 타바사의 차가운 손이 쓰다듬었다. 냉정해야 한다는 표시였다. 성격이 급한 큐르케였지만, 차마 루이즈를 앞에 두고 날뛸 순 없었다. 눈가에서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루이즈에게 보이지 않은 채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루이즈, 잘 들어. 포프는……”
후케는 땅에 내려와 골렘의 옆에 섰다. 골렘은 그녀의 명을 받아 다리를 다시 들어올렸다. 본의아니게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파괴의 돌도 부서졌을 테고, 자신의 신분도 노출된 이상 저 학생들을 죽여 입을 막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어차피 알려지는 게 조금 늦을 뿐이다. 게다가 갑작스런 살인 때문에 그녀는 심신이 허탈해진 상태였다.
골렘의 다리가 들어올려지고 움푹 패인 공간이 드러났다. 분명 끔찍한 모습이겠지만,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시체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이제까지의 그녀의 삶은 분명 의미없어질 것이다. 자신의 첫 살인을 머릿속에 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평생 동안 지고 갈 죄책감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엉망이 된 대지를 바라보았다. 붉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처참한 현장을 예상했던 그녀의 눈에 전혀 의외의 모습이 보였다.
대지에는 끝없이 깊은 구멍이 빠끔히 구멍을 벌리고 있었다 -
“설마!”
후케의 무릎이 풀렸다. 뒤로 물러서려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구덩이에서 물러났다.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잡지만, 이미 그것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주인의 이상에 거대한 골렘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 비스듬하게 움직인 그 머리가, 순간 보이지도 않는 일격을 받아 박살났다.
후케는 공황에 빠져 이리저리 머리를 돌리며 공격을 한 존재를 찾았다. 탐색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골렘의 뒤편에 있는 대지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 하나가 빠끔히 나와 있었다.
곧이어 후케와 골렘이 서 있는 대지 전체가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강력한 흔들림이었다. 대지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하더니 골렘을 중심으로 둥그런 마법의 원이 생성되었다. 후케가 골렘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원은 골렘을 중심으로 오망성을 생성시켰다. 다섯 개의 꼭지점이 빛을 발하는 순간 원 안의 대지가 움푹 꺼졌다. 골렘의 자세가 무너지며 순식간에 생성된 구덩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아, 아아……”
후케는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골렘의 연결이 단절되는 것이 느껴졌다. 미세한 진동을 통해 골렘이 저 안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 가루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이 골렘을 만드는 데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골렘이 사라져 갑자기 텅 빈 듯한 대지의 저 편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포프는……”
큐르케는 말을 이으려다 멈칫했다. 눈물로 흐려진 눈을 급히 손등으로 닦고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골렘의 머리가 박살나고, 그 직후에 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후케가 보기 흉하게 덜덜 떠는 게 보인다. 빌어먹을 계집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지만, 그녀에게 한 방을 먹일 사람은 따로 있다. 대지의 한 귀퉁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무수히 피어오른 흙먼지를 뚫고 하늘로 비상한 -
“달링은…… 살아 있어!”
큐르케의 이질적인 호칭 변경에 긴장했던 루이즈는 이내 긴장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자, 그럼……”
“히이익!”
후케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지만, 다리는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듯 길게 늘어져 있을 뿐이다.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후케를 향해 헥사곤 메이지가 다가온다. 한 손에는 블랙 로드를 들고 있고 허리춤에는 허리띠채로 얼려버린 파괴의 돌이 보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각오는 됐어?”
불. 불. 불.
“내가 경고했지? 지팡이를 내놓지 않으면 화내겠다고?”
불. 불. 불. 불. 바람. 바람.
모든 것을 용서없이 파괴할 뿐인 지옥의 화염이 포프의 양 손에서 구체로 화한다. 일전에 후케의 골렘을 파괴했던 주문이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기에 그 위력을 몰랐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땀샘에 고여 있는 땀까지 증발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 어떻게 할까? 이걸 그대로 내쏠까? 아니면 이걸로 두 다리를 태워버린 후에 섬열주문으로 다시 두 팔을 태우는 건 어떨까? 참, 여자니까 얼굴만 반쯤 익혀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혹시 어딘가 태워줬으면 하는 부분이라도 있어?”
“저…… 저리 가! 악마 같은 녀석!”
후케가 손을 휘저어 보지만 지팡이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포프의 입가에 걸린 비웃는 듯한 웃음이 그녀에겐 참을 수 없이 무섭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를 참을 수 없어 그녀는 결국 도주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열기가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거대한 열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어 헐떡댔다. 공기, 공기가 필요하다. 이대로는 숨이……! 심장이 타악기처럼 빠르게 두근대며 공기를 재촉했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멍해진 머리로 살짝 눈을 떴다.
“뭐야. 벌써 눈을 뜨는 거야?”
“…………? …………………!? ……………………!!!”
“푸, 풉!”
후케의 희미해진 시야에 그녀의 코를 두 손가락으로 꽉 쥐고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포프의 얼굴이 포착되었다. 덤으로 입도 다른 손에 의해 막혀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한 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에서였던건가. 그녀가 눈을 완전히 뜨고 발버둥치자, 포프는 이런이런… 하면서 순순히 손을 놓았다.
단숨에 죽일 수 있는데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뻔했다.
“날, 날 더 이상 희롱하지 마! 죽이려면 죽이란 말야!”
후케가 비통하게 외쳤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재미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포프가 움찔했다.
“내가? 왜? 당신을?”
“그, 그야.”
네 지팡이를 빼앗고 널 골렘으로 짓밟으려 했으니까,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슬픈 일이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포프가 반문했다.
“다소 소동이 있긴 했지만 좋게좋게 끝났는데, 왜 당신을 죽여야 하죠? 다친 사람도 없고, 찾으려던 물건도 찾았어요. 이제 학원장님에게 이 물건을 갖다주면 끝. 그러니 당신에게 볼일은 없어요.”
“에……?”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인간과 인간이 갈등을 빚고, 폭력을 행사할 순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같은 종족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살인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좋든 싫든 힘을 합쳐야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자란 포프 역시 그러한 일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다. 게다가 포프에겐 검은 핵의 출현만 뺀다면 이 정도는 가벼운 소동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후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포프는 덧붙였다.
“몬스터 상대라면 모를까, 사람을 죽인다는 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예쁜 누님에게 손을 대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순순히 죗값을 받도록 해요.”
“그런……”
사람과 사람 간의 싸움과 죽음이 전쟁이라는 행위를 통해 일상화된 이 세계에서 포프의 그런 말은 신선할 정도로 순진한 말이었다. 당연한 논리지만 어느 누구도 떠올리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이제야 기억의 한 구석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하는 소년을 응시했다.
“아하하……”
후케가 웃었다. 맥이 탁 풀린, 체념한 듯한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의 끝에서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졌어, 졌어. 헥사곤 메이지 님은 정말 강하구나. 여러 가지로.”
“왠지 칭찬같지 않은데요?”
“그렇게 순진했다간 어딜 가도 놀림받기 딱 좋다는 말이야.”
포프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후케가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저만치에 착륙한 풍룡에서 일행이 뛰어왔다. 그녀들을 본 후케의 눈이 다소 흔들렸다. 포프와 마주잡은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날, 놔줄 순, 없을까?”
약간 쉰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보기 드물게 절절한 감정이 표정에 배어나 있었다.
“그건 무리 같네요.”
“내가 없어지면 곤란한 사람들이 있어.”
“그건 누구죠?”
“고아들.”
포프 같은 상대에겐 정직이 최선의 무기로 작용할 수 있다. 후케는 무엇이든 대답할 각오로 당당하게 말했다. 고아라는 말에 포프의 표정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돼요. 나 하나라면 모를까, 이미 학원과 연관된 문제이니까요. 게다가 당신을 놓아주면 내 주인님이 크게 곤란해지거든요.”
포프는 고개를 까딱하며 뒤에서 ‘포프~!’하고 외치며 비척비척 걸어오는 루이즈를 가리켰다. 그러자 후케는 자유로운 손으로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포프의 품에 집어넣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재빠른 솜씨였다.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그 아이들의 주소야. 나 대신 원조해 줘. 나를 잡은 걸로 꽤 두둑하게 벌 수 있을 테니.”
포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후케에게는 그의 대답을 그동안 거래했던 누구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었다.
후케는 포프와 맞잡았던 손을 풀었다. 자유로운 양 손이 된 그녀가 돌연 포프의 멱살을 붙잡았다. 포프를 그대로 확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끼리의 짧은 마주침이 아니라 뜨거운 혀가 침입하는 농후한 키스였다. 루이즈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포프는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들의 뒤에서 큐르케가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후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포프의 혼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열적인 키스를 깔끔하게 끝낸 후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당신은 좋은 남자야. 이 흙더미의 후케가 보장할게.”
이들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학원 관계자들은 후케를 신속히 포박했다. 후케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소문의 괴도가 여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관계자들도 그녀에게 혹독하게 대하진 않았다. 그녀가 꽁꽁 묶인 채 수레에 실려 멀어지는 것을 말없이 배웅한 포프는 루이즈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속하게 학원으로 돌아갔다.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학원장은 안심한 기색으로 그를 맞이했지만, 정작 공을 세운 당사자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 말씀하신 파괴의 돌, 검은 핵 대령입니다.”
포프는 허리에 매달린 검은 핵을 거칠게 잡아떼 손에 들었다. 학원장은 상자 안에 있어야 할 물건이 노출되어 있는 걸 보고 흠칫했다.
“그럼 설명해주시죠. 학원장님은 어떻게 이걸 손에 넣게 되었습니까?
부탁드립니다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말씀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 전 학원장님을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포프의 눈에는 말로는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결의가 가득했다.
“그렇지. 어째서 자네가 이 물건을 알고 있는지는 조금 있다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내가 그걸 손에 넣었던 일을 이야기해주겠네.”
노련한 메이지인 오스만은 일단 포프를 맞은편에 앉혀 진정시킨 후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젊었을 때 수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네. 내 마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었지. 또 아카데미에서는 더 이상 늘지 않는 실력을, 현장체험을 통해 더욱 신장시키고 싶었다네. 그렇게 돌아다니다 불길한 이름이 붙은 한 지방에 도착했어. 그 지방의 이름은 바로 ‘죽음의 대지’였다네.”
“죽음의 대지라구요?”
포프의 몸이 의자에서 펄쩍 튕겨일어났다. 죽음의 대지라면 그의 세계에도 있었다. 그가 킬 번에게 죽을 뻔했던, 그리고 나중에 해들러의 안에 있던 검은 핵의 폭발로 먼지가 된 대지. 식물도, 동물도 살지 못하는 저주받은 그 대지의 이름이 뜻밖에도 이세계의 하르케게니아에서 재등장한 것이다. 오스만은 그의 흥분이 진정되길 기다려 다시 말했다.
“그곳은 식물과 동물 모두 살지 못하는 대지였지. 원래 그랬던 건 아니었다는군. 인구밀도는 낮았지만 제법 목축하기 좋은 땅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땅에 메마르고 생물들이 쇠약해졌다고 하네. 급속히 메마른 건 아니었지만 오 년쯤 지나자 그곳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지. 게다가 심각했던 건 그 현상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던 게야.
그래서 내가 조사차 그곳에 가게 되었지. 지도를 보니 그 현상은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넓어지고 있었어. 그래서 난 그 대지를 가로질러 중심부로 향했다네. 그때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내 마력은 어딘가에 흡수당하고 있었고, 적막한 대지에는 망령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네. 심신이 모두 지칠 무렵에야 가까스로 그 중심부에 도착한 나는 그 일대를 조사하다 그걸 발견했다네. 그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반쯤 박혀 있는 상태였지.“
“이게 그 침식의 원인이었습니까?”
“아마 확실할 걸세. 자네도 느꼈지? 그 돌이 자네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을.”
포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케에게 항복을 받아낼 때 그에게 남아있던 마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후케가 다시 한 번 골렘을 소환했더라면 자신은 신속히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 돌을 손에 쥔 순간 난 얼마 남지 않았던 내 마력이 급격히 빨려드는 걸 알 수 있었다네. 침식의 원인은 이 돌이 주변 사물의 생기와 마력을 흡수해서 그렇다는 걸 그 순간 알 수 있었지. 그래서 이 돌을 불 계통으로 파괴하려 했지만, 혹시라도 돌에 쌓여 있을 마력에 영향이 미칠까 봐 그냥 얼리기로 했지. 그 결과가 지금 보이는 그대로이고, 그것은 얼음이 되자 ‘식사’를 그만두었지.”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포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스만이 얼음덩어리가 된 검은 핵에 다시 고정화 마법을 걸어 상자에 봉인한 후 포프에게 질문했다.
“자, 이제 저 물건의 정체를 가르쳐줄 수 있겠나?”
“그전에 먼저 질문. 제 문장의 정체는 무엇이지요?”
언젠가 질문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오스만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 하르케게니아의 시조 브리밀에게는 네 명의 사역마가 있었네. 자네의 룬은 그 중 하나인 간달브의 것이 분명해. 간달브는 그 어떤 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져온다네.”
“그게 왜 하필이면 저에게……?”
“그건 자네를 소환한 루이즈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네. 그러니 자네가 직접 조사해 보게나. 결과가 나오면 내게 꼭 말해주는 걸 잊지 말고. 학생들과 그 사역마의 관리 문제는 이곳 학원이 존재하는 근거니 말일세.”
어떤 식으로 정체가 드러난다 해도 학원에서 최대한 보호해 주겠다는 오스만의 성의가 느껴졌다. 지난번에 포프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포프는 일단 알았다고 약속했다.
“그럼 이제……”
“거절하겠습니다.”
포프는 상큼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오스만은 당황해 손을 붕붕 휘둘렀다.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게! 저 물건이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연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수십 년을 썩혀둔 문제인데, 이 늙은이를 좀 가엾게 여겨주지 않겠나?”
“아니요. 그렇기에 알아선 안 된다는 겁니다.”
포프의 기색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평소의 활발한 그와는 정반대의 우울한 분위기를 뿌리며, 그는 학원장의 눈을 향해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저건, 이 세계에 결코 존재해선 안 될 물건이니까요.”
오스만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포프는 이 물건의 정체를 이 세계의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주인인 루이즈에게도 숨길 작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 물건을 보다 안전하게 지켜야 할 필요성도 느꼈다. 학원의 본탑이 이렇게 어이없게 뚫릴 정도라면 다른 곳에 놓는다고 안전해질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보관하는 게 나으리라. 결심한 그는 오스만의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만이 벌떡 일어났다.
“거기 서게! 그걸 어쩔 셈인가!”
“이번 일에 대한 보수입니다.”
포프가 더 이상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로 딱 잘라 말했다. 그 기세에 오스만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잊었다. 그가 성큼성큼 문을 나서자 그제야 할 말이 생각났지만 이미 당사자는 방에 없었다. 갑자기 골치가 아파져 그가 흰 머리를 움켜쥘 때 느닷없이 문이 다시 열렸다.
“제 보수는 이걸로 끝이지만, 루이즈와 큐르케, 타바사가 나중에 돌아오면 이들에게도 잘 해주실 걸로 믿겠습니다아~”
“자, 자네!”
자기 할 말만 하고 학원장실 문을 쾅 닫자 안에서 오스만의 노성이 들렸다. 아무래도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이 미쳤다.
“아, 델프링거.”
지하 어딘가에서 흙더미에 묻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을 또 하나의 파트너를 떠올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