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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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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5화 왕녀의 부탁


사람이 수행으로 얻은 힘은 남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용사 아방이 말했다.

힘이 곧 정의다.
대마왕 버언이 말했다.

마족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힘을 축적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무엇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

 

 

제로의 대모험 제5화
- 왕녀의 부탁

 

 

트리스테인 학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흙 계통의 메이지를 총동원해 본탑의 복원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한편, 모든 학생들을 동원해 학원을 단장했다. 이를 위해 하루 동안 모든 수업을 쉬기도 했다. 시조 브리밀의 강림제에 버금가는 이런 준비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공주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누구, 공주님을 본 사람 없어?”

“내가 봤어! 지난번 왕궁의 무도회에 겨우 초청받아 갔었는데, 공주님이 개회인사를 하셨어. 그 부드러워 보이는 장밋빛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가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아아.”

조잘거리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포프는 파푸니카의 공주 레오나를 떠올려 보았다. 앳되 보이면서도 카리스마를 가지고 마족과의 싸움을 지휘한 고귀한 소녀. 자신이 마암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오나와 타이는 잘 지내고 있겠지.’

마족과의 싸움이 끝난 이상 모두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스승 아방도 귀환했으니 카알의 재건은 신속하게 진행될 테고, 이미 상당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을 파푸니카가 이를 뒷받침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싸움에만 집중되었던 모든 힘이 창조와 재건을 위해 쓰여갈 것이다. 인간은 모두 일치단결된 상태이고, 크로코다인이나 롱베르크처럼 소수의 ‘괴물’이나 ‘마족’들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겠지. 섣불리 그들을 건드렸다간 레오나 등에게 벼락을 맞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 있더라면……
포프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감상에 젖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저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일은 요원하고, 당장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는 금방 잡념을 털고 부산한 학생들 사이를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등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제 오냐! 약속을 기억해!

“미안. 그래도 금방 왔잖아.”

-이렇게 오래 놔 둘 거면 차라리 날 차고 다니란 말야!

“그건 좀 곤란해. 너, 너무 시끄럽잖아. 그리고 너무 번쩍번쩍해진 것도 좀 문제고. 학생들이 놀란다구?”

포프는 방구석에 세워두었던 델프링거를 열심히 달랬다.
지난번 후케와의 싸움에서 땅속에 파묻혀 골렘과 함께 특대 중압주문의 일격을 받았던 델프링거였다. 그 정도 충격을 받았다면 파괴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포프는 서둘러 땅을 파냈다. 그런데 정작 땅 속에서 빠져나온 것은 막 제련한 듯 반짝반짝한 백은의 검이다. 다른 검을 주웠나? 하고 포프가 검을 내던지자 반가운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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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삭제.
한참 떠들게 놔둔 후 검을 잡아보니 6천년 전의 간달브니 뭐니 같은, 이미 알고 있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아는 정보는 건성으로 흘리면서도, 포프는 자신의 검이 6천년 전의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포프의 세계에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검이 아닌 이상 그 정도의 세월을 버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검에도 오리하르콘이 들어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델프링거가 색노망 별볼일없는 아저씨에서 색노망 전설의 명검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강한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증에서 회복……이라고 한다면 반쯤 맞는 말이고, 정확히는 포프의 중압주문을 통해 마력을 흡수해서였을 것이다. 각성한 후의 델프링거는 포프의 마력과 손등의 문장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것을 포프의 신체 강화로 연결시켰다. 다른 무기를 잡을 때도 힘이 나긴 하지만, 이 검은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준다. 아무래도 겉멋으로 6천 년을 지낸 건 아니다.
단 문제가 있다면 검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은 지팡이와 마찬가지다. 한 손에 지팡이, 다른 손에 검을 들고 싸우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느 책에선가 백색의 마법사가 그런 식으로 악마와 맞서 싸웠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포프에겐 아직 무리일 듯 싶었다. 방식을 바꿀 수 없다면 당분간은 둘을 번갈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수행이 필요했다.

“오늘도 활기차게 해 보자, 파트너.”

-당연하지! 잘 따라오지 못하면 베어버린다!

“너야말로. 잘 따라오지 못하면 당분간 상은 없어.”

포프가 히죽 웃었다. 검 자체가 과거의 형태로 돌아오면서 나사가 헐렁해지는 일은 없었지만, 델프링거는 나사를 조여주거나 기름칠해 주는 행위를 여전히 좋아했다. 손질해 줄 때마다 야릇한 신음을 내 하지 말라고 경고했더니 이젠 신음 대신 몸을 부르르 진동하곤 했다.

“그럼 가 볼까.”

영차, 하고 포프가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기숙사의 마당은 검을 수련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데다, 학생들 모두가 메이지이므로 검을 쓰는 자신의 행위가 이질적으로 비칠 것이다. 이미 그 이전에 그는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라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일 건덕지가 없었지만 본인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사용인들의 휴식처. 시에스타가 사용인들의 우두머리인 요리장 마르토에게 양해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델프링거를 들고 도착하자 마르토가 호쾌하게 웃었다.

“여어! 왔나, 우리들의 지팡이!”

“그런 낯간지러운 이름 말고 본명을 ​불​러​달​라​니​까​요​…​…​”​

“앗차. 자네가 있을 땐 본명으로 부르기로 했지. 오늘도 수련인가?”

“예. 오늘은 오후에 공주님이 온다고 하니 오전만 잠깐 하려구요.”

포프가 소탈한 모습을 보이며 사용인들에게 다가오자 그들도 곧 마음을 허락했다. 기슈를 박살낸 사실이 널리 알려진 터라 그들은 포프를 ‘우리들의 지팡이’라고 불렀다. 이는 포프가 자신은 평민이며, 이 힘은 메이지의 사역마로 소환되면서 얻은 힘이라고 거짓말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거대한 힘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들이 ​두​려​워​할​까​봐​서​였​다​.​ 그 생각이 먹혔는지 사용인들은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그가 태생이 평민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갔다.
마주치는 사용인들과 몇 차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아무도 없는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포프는 심호흡을 하고 검을 잡았다. 자연체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는 아방류 도살법 대지참은 이제 마스터했다. 육체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간달브 능력 덕분에 수행은 수월했고, 지금은 아방류 도살법 해파참을 익히고 있었다.

-좋아! 그대로 백 번 더!

델프링거가 호기롭게 외쳤다. 검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골치아팠을 테지만, 포프는 기본이 충실한 데다 머릿속으로 검술을 이해하고 있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하르케게니아의 검술이란 메이지의 마법에 대항할 수 없는, 말하자면 거대한 벽을 앞에 둔 기술에 불과했다. 그것은 6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포프의 검술은 그 벽을 깰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대지참이 모든 물체를 벨 수 있으며 해파참은 공기나 물, 심지어 마법조차 벨 수 있다는 포프의 설명에 오히려 델프링거가 주인보다 더 흥분했다.
순식간에 백 번을 휘두르고 나자 땀이 조금씩 솟았다. 아마 간달브의 힘이 없다면 근육통에 시달릴 만한 수행이다. 검을 검집에 넣고 한숨 돌리고 있자 시에스타가 찾아왔다. 수건과 찬 물, 약간의 간식을 가져왔다.

“포프 씨. 땀 닦으세요.”

“고마워, 시에스타 씨. 그리고 말은 좀 그만 놓아도……”

“이게 더 편해요. 신경쓰지 마세요.”

시에스타는 싱긋 웃으며 수건을 건넸다. 얼굴을 닦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을 때 시에스타가 궁금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런데 포프 씨는 왜 검술을 익히시나요? 포프 씨의 마법은 이미 누구도 당할 수 없지 않나요?”

처음엔 운동삼아 익히는 줄 알았는데, 슬슬 본격적으로 검술을 익히는 듯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포프는 물을 다 마시고 간식을 집어들며 태평하게 말했다.

“일전에 지팡이를 뺏기면 내 자신이 정말 무력하단 걸 알게 돼서 수련하는 거야. 물론 두 번 다시 지팡이를 뺏기면 안 되겠지만, 만약의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기왕에 주어진 능력을 썩히는 것도 내 취향이 아니고.”

취향이란 얘기가 나오자 시에스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럼 전 포프 씨의 취향인가요?’ 그렇게 물어보고 싶다. 진노한 기슈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소년. 아무 힘도 없지만 기슈에게 일격을 날리고, 중상을 입고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지팡이를 되찾은 후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쓰러뜨렸으면서도 목숨을 빼앗는 대신 상처를 치유해 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남자.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시에스타는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프가 그런 쪽으론 괴멸적으로 둔한 신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런 자신의 두근거림이 포프에게 눈치채여지지 않을까 싶어 그저 우물거리기만 했다.
간식을 다 먹자 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시에스타 씨. 이따 루이즈랑 행사에 나가야 하니까, 그 사이 방 정리를 부탁할게. 그리고 그 전에 루이즈가 정장으로 갈아입어야 할 테니 그것도 도와줘.”

“예. 맡겨주세요.”

시에스타가 자신있게 말했다. 포프는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행사에는 별로 관심 없었지만 루이즈와 함께 참석해야 했고, 그러자면 정장으로 입고 있는 편이 낫다. 얼마 전 옷가게에서 찾아온 옷을 입을 기회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루이즈도 정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올 테니, 그 때까진 잠시 누워서 쉬도록 하자. 포프의 ‘정장’은 다소 뒹굴더라도 별 상관 없는 그런 재질이었으니까.
포프는 짚더미에 누워 뒹굴대며 이젠 루이즈의 옷 갈아입기를 돕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기쁘긴 한데……
남자로선 어딘가 서글퍼진다.


공주의 마차가 도착했다. 화려한 장식의 6두마차였다. 그 마차에는 앙리엣타 공주와 마자리니 추기경이 타고 있고, 트리스테인 왕국 최정예인 그리폰대가 이를 호위하고 있다. 그리폰을 다루는 위사들의 모습에 포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수왕의 피리도 없이 저렇게 길들였다는 것은, 그리폰이 새끼일 때부터 길들여야 가능할 것이다.
마차에서 창문이 열리더니 커튼이 살짝 젖혀졌다. 왕녀의 희디흰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도열해 있던 정장 차림의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남학생과 여학생 할 것 없이, 왕족의 존귀한 얼굴을 본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오직 한 사람, 기슈만이 의외로 차분한 얼굴로 왕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몽모랑시는 그의 그런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드디어 그가 자신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내심 흐뭇했다.
그리폰대의 대장이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왕녀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왕녀가 손을 내밀자 정중하게 키스했다. 왕녀의 손이 들어가고 커튼이 다시 내려졌다. 남학생들은 실망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여학생들은 그의 멋진 외모에 다시 한 번 환호했다. 깃털모자에 긴 턱수염이 늠름한, 날씬하면서도 난폭해 보이는 젊은 귀족, 왈드 자작이었다.

“왈드 자작님……”

루이즈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포프는 그녀의 소녀다운 표정을 보고 금방 상황을 짐작했다. 자신의 연애 쪽으로 가야 할 직감이 상대방의 연애를 알아채는 쪽으로 쏠린 결과였다.

“어라. 반했나 보네, 주인님?”

“시, 시끄러! 옆에 있는 누구보단 훨씬 남자다워서 잠깐 쳐다봤을 뿐이야!
그보다, 옷은 그렇다 쳐도 망토까지 걸친 건 심하잖아!“

루이즈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옷을 가리키자 포프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 옷은 절대로 이거야. 내 두 명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거니까. 이렇게 입고 있으면 내가 살던 곳과의 연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서 좋아. 그리고 내 망토는 귀족처럼 비단을 사용한 게 아니라, 이곳의 여행자들도 흔히 하는 평범한 거라고.”

포프의 옷은 화려하지 않았다. 실용을 중시한 듯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사시사철 입을 수 있는 재질의 천에, 작은 사람을 닮은 기묘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 옷뿐이라면 상관없을 텐데, 거기에 망토까지 더하고 있다. 하르케게니아에서 망토는 귀족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덧붙이자면 마트리프가 선사해 준 망토는 바란과의 싸움에서 찢어져 버렸지만, 기억을 되살려 다시 만든 것이다.
트집을 잡으려던 게 아니라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었으므로 루이즈는 더 따지지 않고 다시 왈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포프도 방해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소녀를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었다.


공식행사가 끝나자 어느새 밤이 되었다. 포프와 루이즈는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포프만 준비를 하고 있었고, 루이즈는 어딘가 멍한 상태였다. 낮에 왈드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던가 하고 포프는 내심 투덜거렸다.
그때 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약간 급한 듯, 빠른 리듬으로 세 번. 루이즈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포프는 앉으라고 손을 휘휘 젓고 문을 열러 나갔다. 사역마로서 이 정도는 해 줘야 체면이 선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누구일까? 맥스의 큐르케일까, 아니면 마이너스의 타바사일까? 어느 쪽이든 맞상대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는 문을 열었다.

“…………어라? 왕녀님 아니세요?”

“뭐!”

루이즈가 황급히 달려왔다. 문 앞에 서있던 소녀가 후드를 벗으며 루이즈에게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몰래 빠져나온 듯 간소한 차림에 지친 기색이었지만 싱싱한 그 아름다움은 낮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만나는 건 오랜만이야. 나의 친구 루이즈, 들어가도 될까?”

“당연하죠! 어서 들어오세요! 포프는 빨리 다과를!”

루이즈와 포프는 그녀를 방 안에 앉힌 후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 왕녀는 지팡이를 꺼내 몇 차례 가볍게 휘둘렀다. 그때마다 다른 빛깔의 빛이 지팡이 끝에 맺혔다 사라진다.

“어떤 마법을 쓰고 계신 건가요?”

왕녀가 포프의 질문에 지팡이를 거두며 멋쩍게 웃었다.

“혹시 이 방에 수상한 마법이 걸려있을지 몰라 몇 가지 탐지마법을 걸었답니다. 그런 게 없어서 다행이에요.”

“어라라, 그거 다행이군요.”

매일매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포프가 있는 이상 이 방에 포프 모르게 마법을 걸 수 있는 자는 삼계를 모두 뒤진다 해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와 과자를 준비해 탁자에 놓았다. 서둘러 간단한 몸단장을 한 루이즈가 왕녀를 먼저 앉힌 후 자신도 앉았다. 왕녀의 호기심어린 눈이 포프에게 향했다.

“루이즈가 기묘한 사역마를 소환했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이 분이 그 사역마인가요?”

루이즈가 신호를 보내 포프는 자기소개를 했다. 자신의 실력이나 간달브 같은 사실은 모두 빼고,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고만 해 두었다. 얘기를 듣고 나서 왕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스만 님께 당신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어요. 헥사곤 스펠을 쓸 수 있으며 전설의 간달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그 부분을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요?”

‘망할 영감!’ 마트리프 못지않은 능글능글한 노인이다. 포프는 날이 밝는 대로 따지러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별 수 없이 그와 관련된 추가설명을 했다. 기왕 이야기하는 김에 후케를 잡은 것도 이야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루이즈의 공을 대폭 늘리고 자신의 공을 줄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왕녀는 그에게 자기를 소개했다.

“제 소개도 해야겠군요. 전 트리스테인 왕국의 왕녀 앙리엣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이자 포프는 당황스러웠다. 황급히 마주 고개를 숙여 대응했다. 앙리엣타는 그를 향해 가볍게 눈웃음한 뒤 한결 편한 표정으로 루이즈와 대화를 시작했다.

“여기는 추기경도, 어머님도, 친구인 척 하고 다가오는 귀족들도 없는 곳이에요! 아아, 더이상, 나에게는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친구는 없어요. 내 소꿉친구, 내 그리운 루이즈 프랑소와즈, 당신만이라도 예전처럼 절 대해주세요. ”

“공주전하……”

루이즈는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엔 아직 머뭇거림이 있었다. 앙리엣타가 답답한 듯 낮게 외친다.

“어릴 적, 함께 궁전의 정원에서 나비를 쫓아다녔잖아!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부끄러운 표정으로 루이즈가 대답했다.

“예에, 옷을 더럽혀 버려서, 시종인 라 폴트님에게 혼이 났었어요.”

“맞아! 맞아, 루이즈! 과자를 서로 빼앗으려고 맞서 싸운 일도 있어! 아아, 싸우게 되면 언제나 내가 져주었지. 너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혀서, 자주 울었었어.”

“아니요. 공주님이 승리를 거두신 적은 한번도 없으셨어요.”

루이즈가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났어! 우리들이 그때, 아미앙의 포위전이라고 불렀던 그 일전말야!”

“공주님의 침실에서 드레스를 서로 빼앗으려고 하던 때 말이군요.”

어느새 긴장을 풀고 활짝 웃으며 재잘대는 소녀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 세계의 왕녀라면 귀족답게 거만하고 남을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저렇게 예의바르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괜찮은 사람 같다. 대가 센 레오나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이 자리에 자신이 있는 건 어울리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사역마다 보니 그냥 나가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별수없이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만의 추억이 오고가다 보니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델프도 오늘은 포프의 손질을 받고 피곤한지 말이 없어 포프는 좀 심심해졌다.
차나 좀 더 끓여야지, 나는 착한 사역마~ 그가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일어날 때 앙리엣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오늘은 이걸 알려주려 왔어. 나 결혼해.”

“저, 정말인가요? 누구와 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축하드립니다!”

“축하받을 일이 아니야.”

앙리엣타의 표정은 어두웠다. 들뜬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부터 말하는 사실은 트리스테인의 일급 비밀이야. 그러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아줬으면 해.”

“그럼 자리를 비킬까요?”

어쩐지 갑자기 분위기가 거북해져 포프가 물었다. 그러자 왕녀는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겉껍데기만 있는 것 같은, 의미없는 미소처럼 보인 건 기분탓일까.

“괜찮아요. 주인과 사역마는 일심동체니까, 루이즈가 아는 건 당신도 알 권리가 있어요.
루이즈, 내가 결혼하는 상대는…… 게르마니아의 황제야.”

“게르마니아!”

앙리엣타는 하르케게니아의 정치정세를 루이즈에게 설명했다. 알비온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지금이라도 알비온 왕실이 쓰러질것 같은 일. 반란군이 승리를 거둔다면, 다음은 트리스테인에 침공해 올 것이라는 일.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트리스테인은 게르마니아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는 것. 동맹을 위해서, 앙리엣타 왕녀가 게르마니아 황제에게 시집가게 됐다는 것까지를 차분하게 말해 주었다. 덕분에 포프도 이 세계의 정세에 관해 알 수 있었다.

‘뭐, 내 세계의 정세래 봐야 마왕군을 격퇴했거나 그들에게 멸망당했다는 소식뿐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복잡한 정세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15세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주로 전투에 특화된 마법사 소년에게 정치란 한없이 복잡하고 어두운 학문이다.

“그랬었나요……”

포프보다 빨리 상황을 이해한 루이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루이즈,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건, 철이 들었을 때부터 포기했으니까.”
“공주님……”
“예의를 모르는 알비온의 귀족들은, 트리스테인과 게르마니아의 동맹을 바라고 있지 않아요. 두 자루의 화살도, 겹쳐서 하나로 된다면 쉽게 부러뜨릴 수 없으니까 말야.”

앙리엣타는 중얼거렸다.

“따라서, 그들은 나의 혼인을 방해하기 위한 재료를 혈안이 되어 찾고 있어요.”

“혹시, 그런 물건이 발견된다면……”

이야기의 내용보다, 공주의 어투에서 포프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좀 더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럼, 혹시, 공주님의 혼인을 방해하려는 재료가?”

루이즈가 얼굴을 창백하게 해서 물어보자, 앙리엣타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시조 브리밀이여…… 이 불행한 공주님을 구해주세요……”

앙리엣타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포프는 갑자기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왕녀를 조금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틀림없이 뭔가 굉장히 난처한 부탁을 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맛있는 것을 사 달라고 하기 위해 꾀병을 부려 동정표를 산다든가, 싸움을 앞두고 집에 두고 온 자식들 이야기를 꺼내 전투에서 열외되는 그런 종류의 행동일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루이즈는 공주의 그런 모습을 보고 목숨이라도 던질 기세로 덤벼들었다.

“말해줘요! 공주님! 대체, 공주님의 혼인을 방해하는 재료라는 건 무엇인가요?”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앙리엣타는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전에 썼던 한통의 편지예요.”

“편지?”

“그래요. 그것이 알비온의 귀족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들은 곧바로 게르마니아의 황실에 그것을 전하겠지요.”

“어떤 내용의 편지인가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을 읽는다면 게르마니아의 황실은…… 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테지요. 아아, 혼인은 무너지고, 트리스테인과의 동맹은 파기. 그렇게 되면, 트리스테인은 혼자서 저 강력한 알비온과 맞서지 않으면 안되겠지.”

루이즈는 숨을 헐떡이며 앙리엣타의 손을 잡았다.

“대체, 그 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트리스테인에 위기를 불러들이는, 그 편지라는 것은!”

앙리엣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수중에는 없어요. 실은 알비온에 있어요.”

“알비온이라고요! 그럼! 벌써 적의 손안에?”

“아니요…… 그 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알비온의 반란군은 아니에요. 반란군과 골육의 싸움을 펼치고 있는 왕가의 웨일즈 님이……”

“웨일즈 왕자님? 저 늠름하신 왕자님이?”

앙리엣타는 머리를 감싸쥐고 마구 흩뜨렸다. 곱게 단장했던 머리가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엉망이 되어간다.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아아! 파멸이에요! 웨일즈 황태자는, 늦던 빠르던, 반란군에 잡혀버려! 그렇게 되면 그 편지도 밝은 곳에 드러나버려! 그렇게 되면 파멸입니다! 파멸인 것이에요! 동맹 없이, 트리스테인은 혼자서 알비온과 대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루이즈는 숨을 삼켰다.

“그럼, 공주님, 저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일은……”

“무리야! 무리야, 루이즈! 나도 참, 무슨짓을! 혼란스러워! 생각해보면, 귀족과 왕당파가 싸움을 펼치고 있는 알비온에 가는 위험한 일, 부탁할리가 없어요!”

‘우와, 말해버렸어, 이 사람……’

완벽하게 정공법으로 말하는 주제에 마치 돌려 말하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공주의 화법에 포프는 어이가 없었다. 아직 결론난 게 아니었지만, 이대로 갔다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령 지옥의 가마솥 안이라도, 용의 턱 안이라도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향하겠어요! 친애하는 친구, 나아가 트리스테인의 위기를 이 라 바리엘 공작가의 삼녀, 루이즈 프랑소와즈, 그대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루이즈는 무릎을 꿇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흙더미'의 후케를 붙잡은, 이 저에게 그 사명, 부디 맡겨주세요!”

‘우와, 역시 말해버렸어, 이 둔한 주인님……’

이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포프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중간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꽤 위험한 임무 아닌가요?”

“포프는 가만히 있어! 이건 공주님과 나의 대화야!”

“그리고 그 대화가 끝나면 나도 데려가겠지. 아니야? 아니라면 루이즈는 이대로 떠나고, 난 집이라도 보면서 기다릴까?”

포프가 이죽거리자 루이즈는 그를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공주가 난처한 듯 시선을 깔며 말했다.

“여, 역시 곤란하겠지요? 맞아요. 루이즈에게 그런 임무를 시킬 순 없어요. 역시 편지가 공개되더라도, 그래서 트리스테인이 전화에 휩쓸리더라도, 또…… 포프?”

“잠시만요.”

포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확 열었다. 찬 밤공기가 들어오자 얼굴에 확 몰렸던 열기가 조금 식는다. 하마터면 앉은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런 방식은 비겁하다. 설령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잘못을 메꾸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실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비밀이 탄로날 걱정이 없는 소꿉친구에게 몰래 접근해 자신을 위해 사지로 나가달라고 하고 있다. 만약 루이즈가 도중에 죽거나 한다면 ‘역시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하고 또 거창하게 통곡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상대는 이 나라의 왕녀이자 루이즈의 소꿉친구. 어떻게든 좋게좋게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간신히 포프가 평정을 되찾고 돌아서자 루이즈는 앙리엣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와 포프가 간다면 분명 임무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부디 맡겨주시길.”

“아, 그러고 보니, 저 분은 헥사곤 스펠을 쓸 수 있다고 하셨죠?”

앙리엣타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확 밝아진 얼굴로 되묻는다. 반면 포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루이즈! 지난번에 한 말을 잊었어?”

더 참을 수 없어 포프는 노기를 터뜨렸다. 그러자 루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기억하고 있어.”

“뭐……?”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야. 내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달린 데다가, 나아가서는 트리스테인을 위한 길이기도 해. 이런 일에라면 난 당당하게 네게 협력을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어서 준비하도록 해.”

루이즈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더 이상 반론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당장 짐을 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포프가 잠깐 쓰다듬었다. 그러자 루이즈는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탁자에 엎드리더니 금세 새근새근하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면​주​문​(​라​리​호​마​)​로​ 루이즈를 잠시 재운 포프는 의자를 가져와 앙리엣타의 정면에 놓고 그 앞에 앉았다.

“루이즈와의 얘기는 끝난 것 같네요.
그럼 이제 저와 얘기를 해 보실까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그리고 지금 화나신 건가요?”

“당연하죠!”

포프가 낮게 으르릉댔다. 앙리엣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루이즈의 사역마 아닌가요? 그렇다면 루이즈의 명령에 따라야.”

“나는 사역마지만 동시에 인간이고, 그래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명령은 따르지 않을 권리도 있어요. 특히나 그것이 이렇게 비겁한 명령인 경우에는.”

​“​비​겁​…​…​하​다​구​요​?​”​

앙리엣타가 충격을 받은 듯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나약한 모습에 동정을 보내긴 무리였다. 포프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요. 이건 비겁해요. 잘못한 건 당신이고, 그 잘못을 만회해야 하는 건 당신입니다. 그 수단으로 루이즈를 택했다면, 그래요, 그것도 왕족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겠지요. 명령하는 자, 그것이 왕족이니까요.”

마왕군과 맞서 싸우며 수많은 희생을 눈앞에서 보았던 레오나. 전력이 딸리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냉정하게 병사들에게 맞서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라 또다시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파푸니카는 항복을 택하지 않은 그녀의 선택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뭔가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 후에 루이즈에게 부탁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왜 트리스테인의 공주의 명으로 루이즈를 보내지 않고, 이렇게 비밀리에 보내는 거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루이즈는 그런 부탁을 받으면 듣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런 부탁을 이 나라의 공주로서도, 소꿉친구로서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로 무책임하게 하다니!”

항상 최전선에서 모든 사람을 지휘했고, 마왕성의 중심부까지 용사와 함께 걸어갔던 용감한 왕녀. 누구 앞에서도 쉽사리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죽은 병사들의 이름 모두를 기억하며 무덤의 묘비 하나하나에 직접 추도문을 썼던 그녀가 있었기에 파푸니카는 어느 왕국보다 빨리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난 분명 명령하지 않았어요. 루이즈가 먼저 승낙해 버려서. 그리고 루이즈도 당신이 있으면 괜찮다고 했고,”

으드득 하고 포프가 이를 가는 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귀를 거슬리는 마찰음에 앙리엣타가 흠칫했다. 이마에 혈관이 돋은 걸 머리띠로 감출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마구 소리지르고 왕녀를 내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는 마트리프의 조언을 되새기며 최대한 냉정을 되찾으려 했다. 그 와중에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계산에 넣고 있었군요. 오스만 씨가 내 존재를 보고했을 때부터.”

앙리엣타는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앞에서 이런 박력을 보이는 남자는 이제껏 없었기에 그녀는 꽤 위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눈앞의 남자의 화를 더욱 돋구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헥사곤 메이지에다 간달브라면 분명 쓸만한 존재겠죠. 그러니 손에 넣고 싶죠? 하지만 난 루이즈의 사역마이고, 그래서 나만 빼올 순 없어요.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 루이즈를 함께 높여 주거나, 아니면 - 루이즈를 없애거나.”

“틀려요!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어요! 전 그저, 당신이 루이즈의 사역마라면 이런 부탁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앙리엣타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소리쳤다. 포프도 거기까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지금 말한 것은 단지 앙리엣타에게 스스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깨우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공세를 이어갔다.

“어쨌든 절 손에 넣고 싶은 건 맞나 보네요. 그렇죠?”

앙리엣타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생각없이 행동하는데다 솔직하다는 게 그녀의 무서운 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성이 그렇다는 걸 알자 포프는 더 이상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을 가라앉혔다. 늑대 앞의 양처럼 위축된 그녀의 눈동자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를 본다면 ‘공주님을 울리는 천하의 역적!’ 이라며 포프에게 지팡이라도 겨누었을 것이다.
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치우고, 방 안을 빙글 돌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중얼거렸다.

“그냥 편지를 공개하고 사과해요.”

“공개하는 순간 전쟁이 날 거에요!”

“루이즈 말고 좀 더 실력있는 사람들을 뽑아 한 부대로 보내세요.”

“이 일은 다수의 인원으론 불가능해요!”

“알비온에게 정식으로 지원해요. 그 황태자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건 그들의 싸움이에요. 웨일즈 님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을 거에요!”

“아, 정말!”

포프가 다시 소리쳤다. 앙리엣타는 의자가 덜컹거릴 만큼 몸을 떨었다. 자신을 왕녀가 아니라 멍청한 계집애로 간주하고 있는 포프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두려워하기만 하는 그녀였다. 아마 이제야 그녀도 친구에게 무엇을 시키려 했는지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럼 어쩌라고! 얘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잖아! 그리고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 그곳의 왕자란 사람이 패하든 죽든 상관없고, 그 사람이 가진 편지만 가져오면 된다? 애당초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 사람의 뭘 아는데!”

갑자기 앙리엣타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박력에 포프는 놀라 말을 중단했다.

“그분은, 그분은 제 진실한 약혼자였어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미래를 약속한 사이었어요! 나보다 당신이 그분을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나요? 의연하게 적과 맞서 싸우며 죽을 각오를 한 그분을 보며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나요! 이, 이 트리스테인이란 나라의 공주란 신분에 묶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당신이야! 묶여? 무엇에? 당장에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에? 그런 것들은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구석에서 벌벌 떨지 말란 말이에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해서 한 말이었지만 앙리엣타에겐 과격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맺힌 눈으로 포프를 노려본 후 망토를 걸치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 앞에는 이미 포프가 서 있었다. 분명 창가 쪽에 서 있었는데 어느 틈에? 라고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비켜요. 더 이상 당신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당신과 더 얘기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확인할 게 있어요.
웨일즈 황태자를 구하고 싶나요?”

앙리엣타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다른,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눈동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그녀가 걸치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부서져내렸다.

“……구하고 싶어요.”

“루이즈와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전장은 그만큼 위험한 곳이니까. 그래도 괜찮나요?”

​“​…​…​…​…​그​렇​더​라​도​ 좋아요.”

“그건 누구를 위해서인가요?”

​“​.​.​.​.​.​.​.​.​.​.​.​.​.​.​.​.​.​.​.​.​.​웨​일​즈​ 님과 미래를 약속했던 여자를 위해서입니다.”

그제야 포프의 표정이 풀렸다.
계속 둘이 소리친 덕에 루이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차피 최대한 출력을 줄인 주문을 썼기 때문에 효과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걸어가며 포프는 기운차게 외쳤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잠들면 어떡해, 루이즈! 어서 준비해! 내일 아침에 눈뜨자마자 출발할 테니까!”

“으, 응? 응.”

루이즈가 그의 기세에 휩쓸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가에 서 있던 앙리엣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포프에게 말하려 했다.

“저, 저……”

“웨일즈 왕자에게 편지를 들려 배달시키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죠?”

“불경해!”

루이즈의 노성과 함께 손에 들려 있던 빗이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뒤통수를 부여잡고 끙끙대며 그는 자신의 결정이 옳길 바랐다.

어딘가에 이용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 믿고 싶다.

이제 막 희망적인 미래를 본 소녀가 다시 절망하지 않기 위해, 루이즈를 데리고 위험을 무릅쓰려는 자신의 결심이 훗날 후회로 다가오지 않길 소망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인과 사역마의 촌극에 웃음을 터뜨린 앙리엣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 저런 부탁을 하는 건 좋지 않지요.
원작의 저 장면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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