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8화 알비온 탈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 이젠 더 살 수 없어.”
나이트 시그마는 쓰러진 적에게 고개를 잠시 숙였다. 처음에는 주인의 명을 받들어 싸우게 되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반쪽과도 같아진 최고의 호적수. 그는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해 순위를 매기라면 그는 망설임없이 눈앞에 쓰러진 자를 제 1순위로 매길 것이다.
“예의도 제대로 표하지 못하고 가는 걸 용서하게…… 나의 호적수여.”
시그마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짧은 애도가 끝나자 그는 다시 해들러의 친위대로 돌아왔다. 어서 다음 적을 상대하고, 해들러 님이 용사와 승부를 벌일 수 있도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 잠시 생각한 후 그는 가장 가까운 반응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렸다.
“잠깐……기다려……”
시그마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뼈가 부서졌을 텐데도 저 마법사 소년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상처에 대고 회복주문을 쓰고 있었다. 마법사가 회복주문이라니! 그렇다면 여태까지 그와 호각으로 싸웠던 것도 몰래 회복주문으로 상처를 치유했기 때문인 것인가?
“넌…… 현자로군!”
“아냐. 난 현자가 아니야……”
소년은 한동안 침묵했다. 시그마는 공격하는 대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더 나은, 더 나아진, 최강의 적을 상대하고 싶었다. 기사로서의 정정당당함과 승부욕이 초조하게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소년은 그 기대에 응했다.
“대마도사.”
포프는 말했다.
“대마도사 포프라 불러줘.”
제로의 대모험 제8화
-알비온 탈출-
“루이즈는 네 놈을 믿고 있었다.”
블랙 로드를 손에 쥔 채 포프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드물게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항상 동경한다고, 어린 시절에 마법을 쓸 수 없는 자신을 위로해주었다고…… 그래서 난 진심으로 너희가 잘 되기를 바랐지. 그 마음 때문에 난 널 조금이나마 믿고 싶었어. 그런데, 대답은 이거냐.”
“처음부터 날 의심했나?”
“아니. 사역마로서의 감이다.”
포프는 쓰게 웃었다. 왈드가 의심스럽다는 정도의 생각은 가져본 적이 있다. 놀라야 할 상황을 덤덤히 넘기는 모습들은 그가 처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일단 트리스테인으로 돌아간 후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기로 결심했다. 이곳에 체류하는 짧은 시간 동안 꼬리를 잡긴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그는 느닷없이 루이즈와 결혼한다고 선언했고, 그래서 포프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결혼식이 진행되도록 방치해 두었다. 단, 왕자에게 걸었던 캐슬링은 딱히 왈드를 겨냥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곧 시작될 전란에서 왕자를 상처없이 귀환시키기 위한 보험 차원에서 걸어둔 것이었다. 한마디로 별로 촘촘하지 않은, 넓은 그물코에 대어가 걸린 셈이다.
왈드는 입을 다물고 공격을 시작했다. 몸을 날리며 바람의 마법을 난사한다. 보통의 메이지들이 정지한 상태에서 마법을 쓰는 것에 비해 훨씬 대응하기 어렵다. 게다가 바람의 마법은 신체의 이동속도까지 향상시켜 주는 듯하다. 아마 일반 메이지였다면 그의 마법이 아니라 움직임을 좇는 것만도 버거웠을 것이다. 실제로 포프도 델프링거를 든 상태에서 그에게 고전한 바 있다.
‘분명 스퀘어 급의 물의 메이지일 터. 회복할 틈을 주지 말고, 단숨에 접근해서 목을 꿰뚫어 버린다.’
어째서 물의 메이지가 검까지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싸웠던 경험으로는 검 뿐이라면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이길 수 있다. 거기에 물의 마법 몇 개가 더해진다 해도, 그것을 쓰기 전에 이기면 그만이다. 물의 마법 쪽에는 바람의 마법에 비해 변변찮은 공격계열 주문이 없다. 결국 주로 사용하는 수단은 일전의 검일 것이다 -
옆구리에 강철의 봉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달릴 때까지, 왈드는 그렇게 계산하고 있었다.
“커허억!”
현란하게 움직이던 왈드의 몸이 속도를 더하며 예배당의 벽에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벽이 부서져내릴 정도였다. 회벽의 덩어리를 헤치며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왈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숨에 늘어나 적을 강타하는 지팡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숨이 잠시 막혀 콜록거릴 때 포프가 태연하게 말했다.
“일단 네게 파트너의 성능을 보여주고 싶어서 말야. 어쩐지 평소보다 강한 위력이 나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 파트너가 화가 많이 났나봐.”
“네……이놈, 이상한 무기를……”
“정정해. 지팡이야.”
“그딴 지팡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
왈드는 빠르게 주문을 주창했다. 그 사이에 공격을 먹일 수 있었지만 포프는 일부러 놔두었다. 왈드는 이 싸움에서 자신의 모든 힘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를 상대로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주창을 끝낸 왈드의 몸이 빛나더니 순간 다섯 개로 분열했다.
“어째서 바람의 마법이 최강으로 불리는지 깨닫게 해 주지! 바람의 편재, 바람은 한곳에 치우쳐 존재하고 있지. 바람이 부는 곳, 어디선가 떠돌다가……”
“거 참 말 많네. 한 명이든 다섯 명이든, 쓰러뜨리면 그만이란 소리잖아? 게다가 나도 스트레스를 다섯 배로 풀 수 있어서 좋은걸?”
포프가 히죽 웃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려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 왈드는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섯 명의 왈드가 다섯 방향에서 포프를 포위하며 빠르게 다가왔다.
“일단 다섯 명이니까, 세 발씩 먹어랏!”
포프의 양 손에서 십수 개의 빛의 공이 튀어나왔다. 자랑하는 이오라 주문이었다. 이오라는 포프의 사방으로 날아가 왈드의 진로를 막았다. 한 발 한 발이 무시 못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왈드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오라는 눈이 달린 것처럼 그들을 따라왔다. 회피가 여의치 않자 왈드의 편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지팡이를 마구 휘둘렀다. 이오라들이 한꺼번에 그를 적중시키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굉음이 울리고, 눈부신 빛이 실내를 휩쓸었다. 힘없이 쓰러져 있던 루이즈는 눈과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있을 수 없다! 어째서 물의 메이지가 불의 계통을 다루는 거냐!”
빛과 폭음을 틈타 포프의 뒤로 돌아간 왈드는 그렇게 외치며 포프에게 돌진했다. 포프에 대한 두려움이 대폭 커졌지만, 아까 같은 주문을 두 번 연속으로 쓰진 못할 거란 계산도 있었다. 빛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있던 포프가 그대로 지팡이를 들었다. 그는 살짝 실눈을 뜨며 네 명의 왈드를 노려보았다.
“그게 불만이면 둘 다 써 줄까?”
“뭣이?”
“마햐드! 메라조마!”
포프의 양 손에서 전혀 다른 성질의 주문이 분출한다. 이글대는 지옥의 화염과 모든 것을 얼리는 한파가 두 명의 왈드를 직격했다. 왈드들은 잠시 몸부림치다 허상답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왈드가 그 모습에 기가 질려 굳어 있자 포프는 태평하게 말했다.
“나도 참 뽑기 운이 없네. 벌써 셋이나 없앴는데 아직도 본체가 없다니. 어쨌든 남은 둘 다 쓰러뜨리면 하나는 본체란 얘기겠지?”
“네 이놈! 라이트닝 클라우드!”
자랑하는 접근전이 먹히지 않자 왈드는 비장의 주문을 내쏘았다. 번쩍이는 전류가 포프를 중심으로 안개처럼 방전된다. 위력을 줄인 대신 범위를 늘려 상대의 호흡기를 파고들게 하는 수법이다. 위력을 늘려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이런 사도의 수단을 쓰는 것이다. 저 안에서 숨을 들이키는 순간 끝장이다! 주문이 완전히 발동한 것을 보며 왈드는 쾌재를 불렀다.
“거 참, 귀찮은 주문이네.”
포프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블랙 로드에 마력을 주입한 뒤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순수한 마력이 포프의 주위에 퍼진 전류를 끌어당겼다. 범위를 넓히느라 위력이 줄어들어 있던 라이트닝 클라우드는 그 마력의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고 블랙 로드에 빨려들어갔다. 순식간에 블랙 로드에 주문이 흡수되자 포프는 다시 지팡이를 잡았다. 잡은 순간 앗 뜨거, 를 연발하며 손을 후후 부는 그의 모습을 왈드와 루이즈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머리만 쓰면 간단한 문제야.
그런데, 이제 둘 남았네?“
포프가 다시 싱긋 웃었다. 별 것 아닌 소년의 외양이었지만 왈드에겐 그 웃음이 거대한 공포를 잠재한 마왕의 웃음처럼 비쳐졌다.
“네, 네놈. 간달브…… 그렇다면 이건!”
왈드가 약속된 전개로 루이즈를 잡기 위해 빠져나가고, 그 사이 다른 왈드가 라이트닝 클라우드를 다시 내쏘았다. 이번엔 순수한 위력전개였기 때문에 그 위세가 강맹했다. 이걸로 루이즈를 잡을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찰나, 주문을 내쏘았던 왈드의 시야에 느닷없이 그 주문이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편재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지만 왈드의 본체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 저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일단 루이즈를 잡은 후 그녀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옳다. 편지도 자신에게 있으니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임무는 어느 정도 일단락지을 수 있다. 어차피 웨일즈는 이곳에서 죽을 몸이니까.
“루이즈, 내게 와라!”
“시, 싫어!”
루이즈가 황급히 지팡이를 찾아 더듬거렸다. 지팡이는 근처에 떨어져 있었지만, 이미 패닉 상태가 된 그녀는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왈드는 피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쾌재를 부르며 오른손을 뻗었다. 그때, 소년의 속삭임이 귓가에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루이즈에게 더러운 손 대지 마.”
털썩.
“그 더러운 피도 뿌리지 마.”
한기.
“…………어?”
왈드는 루이즈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왈드의 거친 숨소리가 루이즈의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왈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왈드의 눈이 멍하니 루이즈를 바라보고, 이어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폰에서 루이즈를 지탱했던, 여관에서 루이즈를 껴안았던, 결혼식장에 가기 위해 루이즈를 이끌었던, 그리고 지금 다시 루이즈를 잡으려던 그 팔이 없었다.
그것은 루이즈의 옆에 물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어?”
다시 한 번 자신의 팔을 보았다. 잘린 단면이 매끈하다. 그 단면에 어느새 얼음이 두텁게 덮여 있다. 이상하다. 불의 마법이나 물의 마법으로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나? 아니. 그가 알기로 이렇게 매끈한 단면을 보이는 건 분명 바람의 주문이다. 내가 언제 내 팔을 잘랐지? 아니, 저 녀석이 자른 건가? 하지만 저 녀석은 검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바람의 계통을 썼을 리가. 이미 불과 물의 계통을 스퀘어 클래스로 쓰는 녀석인걸, 그런데 이상해 상처가 얼어 있어 피가 나오지 않아 게다가어째서어떻게내바람의계통과맞먹는수준의-
“싫어~!”
루이즈가 지팡이를 간신히 잡아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느닷없이 전신으로 퍼진 폭발로 인해 그는 이미 반쯤 놓아버린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쳤다.
왈드가 쓰러졌지만 루이즈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변을 지렸는지 바닥의 양탄자가 살짝 물든 게 보였다. 하지만 루이즈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왈드의 검게 그을린 몸에서 시선을 돌려 포프를 바라보았다.
“왜, 말리지 않았어.”
“루이즈.”
“왜, 말리지 않았어!”
루이즈는 크게 고함쳤다.
“어째서! 어째서야! 난 네가 말리면, 이 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어째서 가만히 놔두다, 정말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을 때에 와 버린 거야!”
“……미안해.
결국, 널 이용한 셈이 되었네.“
포프의 몸에서 아까의 살기는 사라져 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갑자기 지친 듯한 소년의 모습에 루이즈의 가슴이 세차게 조여들었다.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경감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미안해하지 마! 네가 미안해하면, 난 정말 구제할 길 없는 제로가 되는 거야! 넌 결코 사과하면 안 돼!”
“하지만, 난 너의……”
“기억해 둬. 내가 왈드를 동경했던 건 제로의 제로였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루이즈일 때 이야기야. 지금의 난 달라. 난 스스로 일어설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제로의 메이지야!
난, 난 더 이상 아무도 동경하지 않겠어!“
어느새 동경하게 된 소년이 자신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새로운 동경이란 건, 결국 자신의 나약함을 새롭게 증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그 나약함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다울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정이 아닐까 - 루이즈의 한 쪽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이즈.”
포프가 루이즈에게 다가왔다. 잠시 상념에 젖었던 루이즈가 놀라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제야 다리 사이가 따뜻한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았다. 포프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며 등을 내밀었다.
“자, 업혀, 주인님.”
“흥이다! 이런다고 내가 널 용서할 것 같아?”
“용서해달라곤 하지 않았어.”
등을 돌린 채로 포프가 말했다. 분노에 차 왈드와 싸울 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묻어있는 짙은 피로가 루이즈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난 전지전능하지 않아. 힘없고 나약한…… 평범한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네가 꾸짖어주면 돼. 할 수 있겠지?”
“………네 주인님이니 그 정도야 당연하지!”
‘그건 무리야’란 말이 순간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루이즈는 애써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더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포프의 등에 업혔다. 포프가 루이즈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자 루이즈는 그 축축한 느낌에 살짝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포프는 여전히 모른 척하며 예배당을 박차고 나가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완전히 늘어진 육체를 포프의 넓은 등에 기대면서 루이즈는 이 등이 과거 많은 무거운 짐을 짊어져 본 등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향한 곳은 어제 루이즈와 포프가 대화를 나눴던 창가였다. 예배당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루이즈가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웨일즈 왕자님!”
“진정해. 살아 있어. 아까의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을 뿐이야.”
포프는 루이즈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달려갔다. ‘캐슬링’을 위해 왕자에게 떠맡겼던 델프링거가 포프에게 걸쭉한 욕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해들러와 룩의 캐슬링은 그들이 부모와 자식처럼 이어진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포프는 이를 대신하기 위해 매개체를 그에게 맡기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결혼식을 준비하던 왕자에게 다짜고짜 델프링거를 맡겼던 것이다. 덕분에 캐슬링 자체는 성공했지만, 역시 오리지널의 성능에는 미치지 못해 왈드에게 받은 충격을 포프와 왕자가 똑같이 받게 되었다. 그나마 왕자에겐 충격만 가고 상처는 포프가 뒤집어썼다는 게 다행일까. 포프가 베호마를 발하자 왕자는 곧 정신을 차렸다.
“포프……인가? 왈드는!”
튕겨 일어나는 왕자를 제지하며 포프는 빠르게 말했다.
“왈드는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보다 시간이 없습니다. 왕자님, 모두는 어디에 있죠?”
“자네가? 대단하군. 어떻게……우리 편은 아마 어제 파티 홀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걸세.”
“파티 홀입니까. 가 봤던 곳이라 다행이군요. 단숨에 가겠습니다.”
포프는 다짜고짜 왈드를 붙잡고 주문을 시전했다. 리리루라, 아방이 카알의 동굴에서 익힌 최상위의 이동주문을 통해 그와 왕자, 루이즈는 순식간에 파티 홀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왕자를 기다리며 결전을 준비하던 귀족들이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에 놀라며 달려왔다.
“왕자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오신 겁니까? 저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이 소년이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군.”
포프는 루이즈를 내려놓고 델프링거를 허리에 찬 후 그것을 뽑아들었다. 흑색 로드와 백색 검이 포프의 팔 바깥에서 교차했다. 룬의 문장이 빛나며 그의 몸이 생기를 되찾았다. 포프는 심호흡을 한 후 있는 힘껏 외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트리스테인은 여러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뭐라고?”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프는 할 말을 계속했다.
“저희 일행 중 하나인 왈드가 레콩키스타의 첩자로 판명되었습니다! 그가 왕자님과 루이즈를 해치려 했고, 다행히 신속히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트리스테인은 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여러분 전원을 망명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포프!”
포프의 등 뒤에서 루이즈가 외쳤다. 그녀가 트리스테인의 대사를 자청했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임명된 게 아닌 만큼 권한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포프는 태연하게 엄청난 소리를 내뱉는 것이다.
‘도박이다. 왈드의 사건 때문에 차라리 잘 풀릴 가능성도 있어.’
기왕 예상치 못한 왈드의 배신이 일어난 김에 그는 이를 이용하기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분 때문에 이 자리에 남아있다. 그 명분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선 망명이란 절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젠 왕자에게만 귀띔했던 내용을 새삼 지금 와서 얘기한다 해도 이들이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처럼 불상사가 생기고, 이를 트리스테인이 책임지는 형식으로 한다면 말을 들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 성사여부는 웨일즈의 납득에 달려 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웨일즈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국왕이 자신의 의자에 앉은 채 그에게 말하라는 표시를 했다. 국왕의 옆에 선 왕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트리스테인의 호의, 고맙게 받겠다.”
왕자의 눈이 귀족들을 한 차례 흝어보았다. 포프의 갑작스런 선언 때문에 모두는 조금씩 동요하고 있었다. 그 기색을 읽은 웨일즈는 확고하게 선언했다.
“정통 알비온 왕가 왕당파 군은 그 제의를 기쁘게 받는다. 탈출할 사람은 서둘러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결코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리스테인으로 가, 살아남아라. 그리고 알비온을 재건해라.”
“왕자님! 당신은!”
“난 남겠다!”
왕자가 망토를 거칠게 펄럭이며 지팡이를 불끈 쥐었다. 그 늠름한 모습에 귀족들은 환호를 질렀다. 잠시 흔들리던 귀족들도 그를 보며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포프가 웨일즈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지팡이와 검, 양쪽에서 엄청난 기세가 발산되었다. 곧 있을 최후의 전투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던지려 했던 귀족들이 포프의 기세에 눌려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삼백 명이 둘러싼 둥근 원이 쪼개지며 왕자를 향해 길이 트여졌다. 흑백의 무구는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그 기세를 더해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왕자를 암살하기 위해 접근 중이라고 판단을 내릴지도 모를 정도였다.
왕좌 앞에 도착한 포프는 국왕에게 고개를 숙인 후 정중하게 말했다.
“폐하. 잠시 왕자님을 좀 빌리겠습니다.”
“빌려?”
속된 표현을 알아듣지 못해 왕이 주름을 지으며 묻자 포프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팡이를 왕자에게 겨누자 지팡이 끝에 화염이 맺혀 갔다. 설마설마 하다 정말로 포프가 왕자를 공격하려 하자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때 왕자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며 물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당신 입에서 망명하겠다는 소리를 나오게 하려구요.”
“…………포프. 뜻은 감사하다만 그만해라. 더 이상 내 신념을 무시하지 마라.”
“당신의 신념을 무시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당신, 그리고 당신들의 신념이라고 지금 생각하는 것들은,
무시할 가치조차 없는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니까.“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일거에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노기가 파티 홀을 가득 채워나갔다. 귀족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알비온 인이 한 마음이 되어 포프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웨일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진노하며 자신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포프는 여전히 그를 겨냥한 채였지만 왕자의 행동에 아무 대응도 취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구나! 포프, 루이즈! 지금 당장 여길 떠나라! 관계없는 인간들은 우리의 숭고한 뜻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개죽음과 숭고를 똑같이 취급하지 마시죠.”
포프에 대한 호의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했던 웨일즈가 결국 폭발했다. 그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뭔가 주문을 발하려 했던 그의 지팡이는 채 주문의 첫 마디가 입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동강나 땅에 떨어졌다.
-켓!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
델프링거의 경박한 고함소리가 정적에 찬 홀을 메웠다.
“저, 저!”
한 귀족이 그 정적을 깼다.
“네놈들이야말로 레콩키스타의 첩자가 아니냐! 그런 감언이설로 우릴 속여 손쉽게 승리를 챙기려 하는 거냐?”
“감언이설?”
포프가 피식 웃으며 지팡이를 아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 귀족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엄청난 충격을 받더니 튕겨 날아가 버렸다. 늘어났던 블랙 로드가 다시 회수되는 모습은 하르케게니아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라는 점에서 귀족들에게 어딘가 모를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제가 지금 감언이설을 하는 걸로 보이시나요? 천만에요. 전 여러분들이 발상의 전환을 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다들 좀 진정하시는 게 어떨까요? 마법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쿨해야 한다는 게 제 스승님의 신조거든요.”
그 스승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한바탕 독설을 퍼붓다 여기의 사람들과 대판 싸우고 등을 돌렸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포프는 자신이 이곳에 와서 쭉 생각했던 점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여러분은 삼백, 적은 오만입니다. 여러분이 저항을 해서 적을 일만 명 가량 줄였다고 치죠. 그래서 여러분은 만족해하며 장렬히 전사하고, 레콩키스타는 꽤 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쳐 보자구요. 그 다음은?”
“그들은 우리를 상대한다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가질 거다.”
“하, 그런가요? 그런데 듣기로 이 세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레콩키스타 쪽이 정의롭고 여러분은 불의한 게 아닐까요?”
“헛소리!”
그렇게 외친 것은 어제 이글 호를 마중나왔던 노 메이지였다.
“우리의 힘은 비록 약해졌지만, 우리의 의기와 우리의 투지, 우리의 명예는 그 힘을 채우고도 남는다! 이방인이 어디서 알지도 못하고 헛소리인가!”
“그래요? 그런데, 그 의기와 투지, 명예라는 거, 제가 보기엔 그게 여러분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가 어째!
전하, 신에게 결투를 허용해 주십시오! 저희의 영광스런 마지막 길에 저 녀석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노 메이지가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포프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웨일즈 왕자님께 묻고 싶습니다.
귀족 삼백 명, 여기 계신 분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베테랑.
이분들에게 새롭게 군대가 주어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아. 같은 수를 지휘한다면 단연코 이쪽이 이긴다. 레콩키스타의 지휘관들은 오합지졸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 오합지졸에게 목숨을 던진다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으신가요?”
웨일즈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포프는 마왕군과의 전투를 회상해 보았다. 전투는 길고 가혹했다. 막강한 마왕군은 그에 맞서는 나라들을 착실하게 분쇄해 나갔다. 전력차는 실로 무시무시했지만 인간들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단 옥쇄만은 최후의 최후까지 피하며, 필요할 경우 후퇴를 서슴지 않았다. 마족에 맞서는 인간이라는 자존심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후퇴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기사도 정신에 찬 긍지높은 기사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사지로 밀어넣는 행위가 된다. 혹 후퇴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결사대가 나서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건설적인 행동이다. 그들의 목숨 덕분에 나머지는 전력을 보존해 다음 전투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포프는 자신의 진심이 먹히길 간절히 바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여러분이 죽으며 정통 알비온 왕가의 맥은 완전히 두절됩니다. 즉 향후 레콩키스타가 괴멸한다 해도 정통 알비온 왕가가 없으니 나라는 혼란에 빠지겠죠. 그때 여러분이 남겼던 의기와 명예 등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삼백 명 분의 명예와 의기가 혼란한 나라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과, 그 자리에 왕자님이 딱 버티고 있는 것. 어느 쪽이 과연 백성들을 위한 길일까요?”
포프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나라의 재건에는 지도층의 생존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애당초 썩어빠진 지도층이 되돌아온다는 발상까진 해 보지 않았지만 - 최소한 포프의 세계에선 썩어빠졌다고 할 정도의 지도층은 없었으므로 - 이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왕가와 목숨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삼백 명이나 된다면 왕가의 인품은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포프의 투박하지만 핵심을 찌른 말에 귀족들은 쳐들었던 지팡이를 내리고 웨일즈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자는 잠시 생각하다 반박했다.
“하지만 이곳을 탈출할 순 없어. 이미 이글 호가 떠난 이상 탈출 자체는 불가능해. 나로서는 왕가 전용의 그리폰으로 너희를 트리스테인에 보내는 정도가 고작이야. 게다가 결사항전을 준비하던 왕가가 도망간다면 레콩키스타에게 대의명분을 주게 돼.”
“그런 거, 줘 버려요. 대의명분? 그런 건 본인 스스로의 신념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그래서 내 신념에 따라 행동하려 하고 있지 않잖나!”
“그러니까 의도는 좋지만 아직 포기하고 자폭할 때가 아니라구요! 정말 여러분들이 막다른 위기에 몰려서 자폭하는 거라면 전 여러분들을 칭찬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살 길이 있는데도 이렇게 모여서 쑥덕거리고만 있을 건가요?”
“……자네, 설마 우리에게 항복을 권하는 건 아니겠지.”
왕자와 포프의 논쟁을 지켜보던 왕이 무겁게 물었다. 포프는 그 말에 바로 손사래쳤다.
“천만에요. 단지 이 자리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으니, 트리스테인에서 세력을 보전하라는 소리입니다.”
“아까 말했잖나. 우리에겐 이동수단이 없어. 두세 명이 간신히 탈 만한 그리폰 한 마리가 전부라네. 이글 호는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실어보냈지. 애당초 그 배에 다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네.”
그 말에 생략된 의미를 루이즈는 눈치챘다. 이들이 남은 이유는 비단 명예와 신념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글 호의 정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노약자들에게 승선의 기회를 양보한 것이다. 애당초 이들에겐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리였던 것이다.
‘포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널 믿을게.’
루이즈는 흔들리지 않는 곧은 마음으로 포프를 바라보았다.
왕은 포프의 대답이 없자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밖에는 반란군의 5만 병력이 대기중이고, 비밀통로는 노출되었다고 하고, 탈출수단은 없다네. 이런 상황에서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이런 생각요.”
포프가 창가에 가더니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거대한 창문이 활짝 열리며 평소의 아침처럼 따스한 햇살이, 그리고 그 햇살 사이에 아이가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이질적인 네 줄기의 선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이건, 승선신호 아닌가!”
웨일즈가 연기를 보고 외쳤다. 어제까지 공적선의 선장이기도 했던 그가 이 신호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 연기를 가리키며 포프는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어제 웨일즈 님이 나포했다 풀어주었던 화물선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여기 있는 거의 모두가 탈 수 있습니다. 모두들 지금 즉시 비밀 통로 쪽으로 내려가 주세요. 서두르면 저쪽의 총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포프, 넌 어제 우리에게 잡힐 때 이미 그 생각을 해 둔 게냐?”
“아니요. 저도 겨우 떠올린 생각인 걸요.”
이글 호는 전함이기 때문에 애당초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 그렇게 판단했던 포프는 한밤중에 리리루라를 이용해 어제 탑승한 바 있던 화물선에 잠입했다. 약간의 협박과 공주에게서 받은 돈을 통째로 찔러 주는 대범함을 번갈아 이용해, 선장에게서 아침까지 알비온에 배를 대겠다는 허락을 받은 바 있었다. 포프는 선장이 약속을 어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약간의 협박’에는 배가 오지 않으면 내일 중으로 배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다고 한 것도 있었으니까.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웨일즈와 국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뭐래도 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귀족들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때 노 메이지가 크게 일갈했다.
“모두들 배에 타라! 책임은 이 알비온 수석메이지, 패리가 지겠다! 내가 먼저 이곳을 탈출하자고 말했고, 트리스테인으로 망명하자고 말했다! 이 모든 책임은 트리스테인에 도착한 후 처벌받는 것으로 하겠다! 알비온 만세!”
모든 오명을 덮어쓰려는 노 메이지와 노왕의 눈이 마주쳤다. 노왕은 한번 미소지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동작에는 어제까지의 무기력함에 어울리지 않는 박력이 있었다.
“가라! 알비온 국왕, 제임스 1세가 말한다! 모두 살아남아라!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우왕좌왕하던 귀족들은 그들의 외침에 정신을 차려 일제히 달려갔다. 몇몇이 왕과 노메이지를 부축해 선두에 섰다. 신속하면서도 질서 있게 나가는 그 모습은 살 길을 찾아 악다구니를 쓰는 아비규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나마 매도했다는 사실에 포프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포프. 넌 정말 대단하군.”
잠깐 동안 드러냈던 불쾌함과 적대감을 씻어낸 웨일즈의 모습이 포프의 눈에 들어왔다. 포프는 잠시 망설이다 웨일즈에게 물었다.
“왕자님, 지팡이를 박살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예비 지팡이가 있으신지요?”
“음. 하나 있다. 원래 메이지는 예비지팡이까지 착용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만, 오늘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들고 왔지.”
웨일즈는 품에서 또 하나의 지팡이를 꺼냈다. 역시 왕족쯤 되니 예비지팡이란 것도 있는 것 같다. 포프는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열 명 정도 남아 적의 발을 묶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웨일즈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열두어 명의 메이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메이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저 비행선을 데려온 걸 밝혔을 때부터 적의 발목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군. 이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자라며 수업을 받아온 실력 있는 메이지들이다. 생과 사를 나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 이 정도라면 든든할 게다.”
나름대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왕자는 모두가 탈출하기 위해선 결사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배가 비밀통로에 안착하고, 삼백에 가까운 인원이 탑승하고, 다시 출발하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반란군이 이 틈을 타 공격하고, 배가 발견된다면 이들은 배에 탄 채 통구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결사대가 반란군의 시선을 끌 필요가 있었다.
그때 루이즈가 달려와 포프의 등에 매달렸다.
“포프! 왜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어? 어서 가자!”
“아니, 난 가지 않아.”
포프는 부드럽게 말했다. 루이즈의 눈이 커졌다. 포프는 다시 한 번 루이즈에게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라리호마로 재운 후 배에 실어버리게 하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루이즈에게 평생 저주를 받을 것이다.
루이즈는 설명을 다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래.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럼 가자.”
말을 마치더니 폴짝 뛰어 포프의 등에 매달린다. 포프가 루이즈를 떼어놓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때 루이즈가 포프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꾸욱꾸욱꾸욱.
“게, 겍…… 루이즈, 숨이……”
“놔두고 간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조르겠어. 데려갈 거야?”
“루이즈, 이……건 목숨……이……켁켁, 알았어.”
베스트리 광장에서의 사건 다음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포프는 루이즈의 동행을 허락했다. 그 귀에 대고, 루이즈가 속삭였다.
“잊지 마. 난 너를 소환한 주인님이고, 넌 사역마야. 주인은 결코 사역마 혼자 위험에 빠지게 하지 않아.”
“…………그래.”
다소 부루퉁하게 포프가 대답했다. 그러자 루이즈는 포프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귓구멍에 대고 크게 외쳤다.
“꾸물대지 말고 얼른 가! 레콩키스타 따위, 아까 왈드처럼 날려버리고 얼른 돌아가자! 오늘 저녁은 우리 방에서 먹는 거야!”
“귀, 내 귀!”
갑작스런 고함에 귀가 멍해진 포프가 울부짖으면서 뛰어갔다. 루이즈는 그런 포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아슬아슬한 자세로 매달렸다. 웨일즈와 메이지들은 그들의 촌극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곤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앞장서 뛰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뉴캐슬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방어탑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방어탑에 자리를 잡자마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의 대부분은 함포사격이었다. 정밀도는 그리 높지 않아 간간히 정확하게 날아오는 포탄만 힘을 합쳐 처리했다. 방어탑에 병력이 있음을 깨달은 레콩키스타의 함대는 함을 가까이 근접시키는 한편 병력을 상륙시킨 후 1층에서부터 돌입하기로 했다. 레콩키스타에 있어서 이 전투의 목적은 왕당파의 완전한 섬멸이었으므로 시간이 들더라도 하나씩 확실히 처리하는 편이 무난했다.
“루이즈! 꽉 잡아!”
루이즈가 다리까지 이용해 찰싹 달라붙었다. 지상으로 적이 진입하려는 것을 본 포프는 창을 열고 뛰어내려 단숨에 아래에 도착했다. 플라이 주문과 달리 무서운 기세로 지상에 낙하하는 포프에게 적군이 당황했다. 그 당황은 그가 비행주문을 시전하는 도중에 다른 주문을 영창하면서 더욱 커졌다.
“중압주문, 20%!”
출력을 줄인 중압주문이 적을 강타했다. 출력을 줄였다곤 해도 수십 명의 병사가 순식간에 땅에 널부러지는 걸 보면 대단하다. 적의 일차 공세를 막아낸 포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저 편에서 수 개 부대가 탑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루이즈. 내 뒤에 바짝 붙어. 여차하면 탑 안으로 도망갈 테니까.”
“도망이란 말을 참 쉽게 쓰네, 포프는.”
“작전상 후퇴, 란 말보단 솔직하잖아?”
평상시와 다름없는 웃음에 루이즈는 한결 안심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온기를 포프에게 건네주기 위해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두근두근하는, 들릴 리 없는 루이즈의 심장소리를 옷 저 편에서 느끼며 포프는 검과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루이즈를, 그리고 그가 구하기로 결심했던 모든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지고, 그 마음의 떨림이 손등의 문장을 더욱 밝게 빛나게 했다. 델프링거가 환호성을 지른다.
-좋아, 좋다고! '간달브'의 강함은 마음의 떨림으로 정해진다! 분노! 슬픔! 사랑! 기쁨! 뭐든 좋아! 아무튼 마음을 떨리게 하라고, 나의 간달브!
“델프링거! 네게 왼손을 맡긴다! 왼손은 너 좋을 대로 해!”
포프가 백색의 전우에게 외쳤다. 그 말 뜻을 이해한 델프링거가 웅웅 진동했다.
-좋다, 파트너! 오늘은 정말 남자다워서 맘에 드는군!
“변태 검에게 칭찬듣고 싶진 않았는데!”
포프가 외치며 블랙 로드를 움켜쥐었다. 블랙 로드 또한 웅웅거리며 포프의 명령을,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기다린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지 포프는 소리높여 외쳤다.
“가자! 루이즈!”
-이, 얼간이! 바보!
어딘가의 여자의 절규는 적군의 함성소리에 묻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됐다! 출발한다!”
“폐하! 왕자님이!”
"그리폰이 있다. 왕자라면 어떻게든 탈출할 것이다!“
국왕은 비통하게 외쳤다. 결사대의 존재를 묵인한 댓가가 이것이다. 자원한 사람은 트리스테인의 소년과 소녀를 포함해 열다섯.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돌아온다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기적이 되도록 왕자에게 일어났으면 한다. 국왕이 아닌,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제임스 1세는 시조 브리밀에게 간절히 기원했다.
“배는 출발했겠지?”
웨일즈는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옆에 드러누운 메이지에게 묻는다. 메이지는 핏기없는 하얀 얼굴로 애써 대답한다.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출발했겠지요. 왕자님도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그리폰을 타십시오.”
“아니, 이미 늦은 것 같다.”
무수한 비행선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어지간히 담력이 센 웨일즈였지만, ‘하늘 가운데의 배’ 가 아니라 ‘배 가운데의 하늘’ 같은 풍경이 펼쳐진 마당에는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리폰 한 마리로는 이륙과 동시에 산산조각날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들에겐 미안하군.”
왈드를 격퇴하고, 자신들을 설득해 트리스테인으로 보내고, 거기다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보기 위해 창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후 벌어진 사건은 웨일즈가 평생 잊지 못할 정도의 각인을 그의 심장에 새겼다.
-더 쏴! 더 쏴 봐라! 카핫!
델프링거가 광소하며 포프에게 다가오는 마법을 흡수했다. 저쪽에서는 수를 믿고 원거리 공격 위주로 나오고 있었다. 근거리였다면 루이즈를 지키기 어려웠겠지만 원거리라면 얘기는 다르다. 델프링거에게 왼팔의 제어권을 내 주고 쏟아지는 주문을 흡수하게 하고, 오른팔의 블랙 로드로는 최일선에 나온 적들을 착실하게 무찌르고 있었다. 뒤늦게 최일선에 방패부대가 나오지만 블랙 로드의 파괴력을 막아낼 수 없다. 거기다 물리공격 뿐 아니라 이오라, 마햐드, 메라조마 등의 고급주문이 줄을 이어 레콩키스타의 일선을 맹폭했다. 메이지의 수가 몇 되지 않았던 레콩키스타 군은 눈뜨고 고스란히 주문을 맞아야 했다. 쓸데없는 살상을 막기 위해 마력은 최저로 조절되어 있었고,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포프는 주문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았다. 게다가 델프링거에게 왼손을 내주면서 델프링거 자체와 마력라인이 이어져, 델프링거가 마법을 흡수할 때마다 일정량의 마력이 포프에게로 흡수되었다.
-맘에 드냐, 파트너! 실컷 빨아먹어라!
“빨아먹다니! 변태 검 주제에!”
루이즈의 눈앞을 흑과 백의 선들이 연달아 교차했다. 루이즈는 포프의 손에 들린 무기를 바라보고, 다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포프를 지켜보러 나오긴 했지만 결국 지금의 자신은 포프의 손에 들린 무기만 못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포프! 배가 떠났어!”
루이즈가 환성을 질렀다. 배가 비밀통로를 지나 알비온 대륙을 빠져나오며 올린 신호탄이 그녀의 눈에 잡힌 것이다. 신호탄은 상공의 레콩키스타 군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색이었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포프는 그것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좋아! 잘 말해줬어, 루이즈!”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이다. 포프는 포효하며 검과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동시에 그에게서 무수한 폭렬주문이 발산되어 무차별로 사방을 폭격했다. 이제까지의 정밀한 주문제어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에 레콩키스타 군이 잠시 당황했다. 폭연이 자욱하게 일어나고, 굉음이 곳곳에 들리며 아비규환이 전개되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이 짧은 혼란을 틈타 포프는 검을 허리에 꽂고 지팡이를 부여잡으며 위를 향해 외쳤다.
“왕자님! 모두 뛰어내려요!”
웨일즈와 메이지들에게 포프의 외침이 들렸다. 포프는 이곳에 오기 전 웨일즈 일행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의문을 갖지 말고 그대로 따라 줄 것을 요구했던 바 있었다. 어차피 방어탑 안에 있어봤자 목숨이 다소 연장될 뿐이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방어탑 밖으로 몸을 던졌다.
“루이즈, 눈을 감아! 그리고 내게 꼭 매달려~엇!”
포프가 모든 마력을 집중하며 꽉 억눌린 음성으로 내뱉었다. 루이즈는 목이라도 조를 기세로 포프에게 덥석 매달렸다. 자신에게 충만한 마력을 한 점으로 모으고, 다음 순간 온 몸으로 발산하며 이미지를 구현화한다. 이제까지 써 본 적 없는 주문이지만 그 사용법은 이미 수십 번을 사용한 적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잘 깨닫고 있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이어 그 몸을 사방으로 활짝 펴며 포프는 마력의 응축을 폭발시켰다. 그의 울부짖음이 웨일즈에게, 루이즈에게, 그리고 허공을 가득 메운 레콩키스타의 함선들 모두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드래고람!”
5만을 사로잡은 짧은 외침이 곧 허공으로 사라지고, 폭연도 걷혔다. 하지만 폭연이 걷히기 전부터 지상의 레콩키스타 군은 슬슬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상공의 레콩키스타 지휘부에서는 그들을 질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급히 후퇴신호를 발하고 있었다.
알비온의 지상에 느닷없이 자리잡은 거대한 용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맙소사……! 운룡인가!”
지휘부의 옆에서 느긋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물의 메이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노려보았다. 용과 직접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었지만, 그 커다란 눈동자에 비쳐지는 모든 함선에서는 그 메이지와 마찬가지로 엉덩방아를 찧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맙소사! 운룡이라니! 포프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웨일즈는 공포에 가까운 심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낙하했다간 저 용의 입에 착지할 판이다. 급히 방향을 꺾으려는데, 용이 입을 열어 말했다.
-왕자! 어서 내 등에!
“왕자님! 이 용이 포프에요! 어서!”
루이즈는 용에 목에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아까까지 포프에게서 느껴지던 온기가 지금의 용에게서도 느껴지고 있다. 루이즈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용은 분명 포프다. 웨일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메이지들을 인도해 차례로 용의 등에 안착했다.
-모두 잘 잡아! 단숨에 돌파한다!
거대한 용이 날개를 펴고 비상했다. 함선들이 급히 포를 쏘았다. 거대한 몸 여기저기에 포탄이 박혀들어갔지만, 용은 곳곳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의연하게 상공을 향해 비상했다. 용의 진로상에 있던 함선들이 급히 대열을 이탈했다. 총사령부에서 노기에 차 고함질렀지만 대열에서 이탈하는 함선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지며 용이 마침내 함선의 바다에서 이탈했다. 기본적으로 수평으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함선들로서는 용이 머리 위로 빠져나간 이상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일부는 공포감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고, 또 일부는 시조 브리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나타난 ‘전설의 운룡’은 그들의 시야 너머로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
아득한 하늘 저편에 일찍 뜬 샛별을 향해, 용은 그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 그 등 위에서, 어른 몇 사람이 있어도 감싸지 못할 굵은 목을 짧은 두 팔로 감으며, 루이즈는 상냥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마치 모험 같았어, 포프.”
-내겐 일상이지.
용이 입을 벌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