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1화 뒤바뀐 인질
제11화
사신.
주무기는 거대한 낫으로, 낫에 장착된 피리를 불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또한 낫을 휘두를 때 생기는 고주파 음으로 사람의 전신을 마비시킨 후 천천히 죽이는 수법을 즐긴다. 하지만 낫을 사용할 때의 실력은 전력이 아닌 듯. 칼을 잡으면 숨겨진 실력이 드러난다고 한다.
몸에는 마계의 마그마와 같은 성질의 피가 흐르고, 이 피는 오리하르콘도 부식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산성이다.
항상 쓰고 있는 가면 아래에는 대륙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검은 핵’이 장착.
무엇보다도, 자동인형이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상대방을 방심시킨 후 일격을 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좀 부족한 것 같군.”
명룡왕 벨더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뛰어난 성능이지만, 어딘가 균형이 덜 잡혀 있다는 느낌이다. 이미 제작된 시험기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성능도 탁월하다. 그러나 그는 마계 제일의 지혜를 가졌다는 대마왕 버언과 맞먹는 지혜를 가진 용왕. 그는 단순히 전투에 특화된 살육병기가 아닌, 좀 더 다른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인간의 마음과 용의 전투력, 마족의 마력을 고루 갖춘 용의 기사와 맞먹는 최상의 인형을.
분명,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결코 용의 기사 바란에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제로의 대모험 제11화
-뒤바뀐 인질
포프는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타바사 일행이 아직 이 저택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저택을 날려버릴 정도의 대주문은 쓸 수 없었다. 일단 녀석을 저택 밖으로 이끌어내고, 실피드를 회복시켜 일행을 구해낸다. 포프는 계획을 짜고 진공주문을 사방에 뿌렸다. 포프의 주변 15미터 정도가 순식간에 진공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일단 움직임을 묶은 후 단숨에 날려버릴 작정이었다.
킬번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가 아냐. 그래도 계속할 생각?”
“네 말을 어떻게 믿냐!”
진공주문 안에 있어 움직임이 느려진 킬번에게 공기의 칼날이 매섭게 다가왔다. 킬번은 낫을 들어 주문을 막아냈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주문을 써서 피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믿어?”
자동인형 뒤에서 소녀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아서 마치 그녀 또한 자동인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포프는 그러한 추측에 미심쩍어하면서 되는 대로 말했다.
“일단 타바사 일행을 모두 밖으로 풀어주고, 저택 밖에서 인형을 물려놓고 얘기할 생각이라면 믿어주지!”
“……”
침묵을 대답으로 본 포프는 주문을 내쏘려 했다. 그러자 소녀는 침묵하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킬번이 공기의 압박을 뚫고 포프에게 달려들었다. 폭렬주문을 난사하려던 포프는 멈칫하더니 마햐드를 연속해서 두 방 내쏘았다. 킬번의 가면 아래 있을 검은 핵에 불똥이라도 튄다면 갈리아는 물론이고 저 멀리에 있는 트리스테인까지 날아갈 것이다. 마햐드가 킬번에게 적중하기 직전, 킬번은 기묘한 동작으로 낫을 크게 휘둘렀다. 마햐드가 낫에 닿더니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그 낫에는 피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포프는 몰랐지만 그것은 마계의 마그마와 같은 성분이었기 때문에 마햐드로 상쇄시킬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냐!’
사신이 낫을 빙글빙글 돌렸다. 포프는 그 낫에서 나는 고주파음이 사람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하기 전에 그는 비상주문으로 밖으로 도망쳤다. 아니, 정확히는 킬번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탁 트인 곳에서 싸우는 게 포프에게 그나마 유리하다. 그리고 킬번 역시 적이 혼자라는 걸 안 이상 끝까지 승부하려 할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킬번은 느긋하게 현관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왔다. 킬번이 여유를 부려준 덕분에 포프는 실피드를 회복시킬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큐이~ 아저씨? 저 방금……”
“실피드, 잘 들어. 내가 신호하면 얼른 저택으로 날아가 잡혀있을 사람들을 구출해. 한 사람도 놓쳐선 안돼.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전속력으로 학원으로 돌아가서 루이즈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알았지?”
“아저씨는요?”
“난 시간을 벌겠어. 나중에라도 도망칠 수 있으니 걱정마.”
포프는 실피드에게서 지팡이를 뗐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킬번을 노려보았다. 그때 킬번의 입이 열렸다.
“그들을 데려갈 순 없어. 난 내 명령을 완수해야 해.”
원조 킬번처럼 복화술을 쓰지 못하는지, 킬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여전히 소녀의 목소리였다. 이러면 위장의 의미가 없잖아, 라고 포프는 투덜대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았다.
“명령? 버언이 죽었으니 이제 네 주인은 벨더 아니야? 벨더가 어째서?”
킬번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벨더 님을 알아? 그럼 어떻게 마계로 가는지도 알아?”
“뭐?”
이건 흡사 새가 인간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격이다. 마계와 인간계를 어떻게 오갈 수 있는지를 아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 편으로 전향한 롱베르크 같은 이들도 섣부른 충돌을 우려해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족이 인간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달라니.
그렇다면.
이 소녀는 마족인데, 마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어떻게 이 세계로 왔는가.
그렇다면.
“……너도, 사역마냐?”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포프는 물었다.
“응. 난 죠제프 님의 사역마야.”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제프라면 낯익은 이름이다. 타바사와 그녀의 모친을 수 년이 넘게 짓밟았던, 제대로 된 악인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 몰랐기에 포프는 혀를 찼다.
“쳇. 그 녀석, 어디서 묘한 걸 뽑아갖고.”
자신도 만만찮은 주제에 포프는 괜히 투덜거렸다.
“마계, 가는 법 알아?”
소녀가 다시 물었다. 아까는 킬번의 그림자 속에서 말했지만, 어느새 빠져나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저 본체만 해치운다면 킬번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포프였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고 공격을 망설였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말투도 달라진 건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기묘한 호소력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잠시 전력 점검. 포프는 과거 킬번과 직, 간접적으로 두 번 싸웠다. 한 번은 죽음의 대지에서, 또 한 번은 킬번의 함정에 빠져서. 두 번 다 그의 완패였다. 지금은 마력도 크게 향상되었고 검도 쓸 수 있다지만, 여전히 싸우기에는 껄끄러운 상대이다. 포프가 아무리 자신의 실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킬번은 그와 상극인 존재였다. 빠른 이동과 넓은 사정거리, 그리고 틈만 나면 뿌려댈 함정과 암습. 이 녀석을 상대하기에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전사가 낫다. 애당초 전사와 마법사라는 상성 자체에서 포프는 살짝 불리했다.
게다가 지금은 지켜야 할 사람이 부지기수다. 타바사 일행에 실피드까지 지켜야 한다. 킬번을 없애는 것보다 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게 백 배 낫다. 여기서 킬번과 꾸물대다 갈리아 정규군이라도 들이닥치면 더욱 골치아파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 혼자서 이들을 순간이동주문으로 옮겼다간 빈틈을 노린 킬번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저택 어디에 타바사들이 있는지 모르는 것도 그의 결심을 꺾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포프는 천천히 입을 열고 대답했다.
“응, 갈 수 있어.”
“정말?”
“아아.”
소녀는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싸웠던 상대의 말을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믿어버린 모양이다. 포프는 그 모습에 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잠시나마 주도권을 잡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말을 걸지 않고 포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마계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걸 방해해선 안 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실피드도 소녀와 포프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저씨, 언니는요? 언니 어떻게 할 거에요?”
“맞다! 타바사!
야! 킬번! 타바사는? 큐르케는? 무사해?”
“아마 놔두면 죽을,”
“뭐가어째이나쁜놈아진작말해야지~!”
기세좋게 외치고 킬번을 노려보았다. 잠깐 그들을 까먹은 건 자신의 실수가 맞지만.
“일단 내 조건은 그녀들을 놔주는 것! 네가 상처입혔다면, 죽기 전에 치료해야 해! 내가 치료해주겠어!”
“그건 안 돼. 방해잔 해치워야,”
“시끄러, 이 악당 녀석아! 모습은 어린 여자애 주제에 하는 짓은 먼저 녀석이랑 똑같구만!”
먼저 녀석보다 외형은 볼만하지만 속은 여전히 흉악하기 그지없다. 소녀는 그런 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란 머리가 상처를 얼려놨으니 당장은 괜찮을 거야.
그리고 네가 저들을 회복시키면 바로 같이 도망갈 테니 안 돼.”
포프가 무릎을 쳤다. 상처를 얼려 지혈시킨다는 건 자신도 해 본 적 없는 일인데, 저 소녀는 킬번에게 당하는 와중에도 그런 걸 생각해냈던 모양이다. 전투경험이 제법 있는 걸까? 하지만 사신의 뒷말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이런 제길. 그럼 저 녀석들이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으라고?”
“저 용으로 날라.”
소녀의 손가락이 실피드를 가리켰다. 제법 용의주도한 선택이다. 포프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에 응했다. 다 같이 도망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무리라면 일단 다른 사람들부터 보내놓고 자신도 틈을 봐 몸을 빼는 게 차선책이다. 그가 실피드에게 신호를 보내자 용의 몸이 허둥지둥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조건 완료했어. 이제 알려줘.”
“아직이야. 왜 저 녀석들을 습격했지?”
“주인의 명.”
“죠제프라면…… 타바사를 감시하고 있었나?”
소녀의 고개가 까딱 움직였다. 포프는 자신의 멍청함에 혀를 내두르고 싶었다. 타바사가 왜 모친을 갈리아에 두고 학원에서 지내야 했던가. 그것은 모친이 단순히 거동하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포프가 저택에 있을 땐 별다른 기척이나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원거리에서 이곳을 관찰하거나 하는 마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메를르의 수정구 같은 방식이라면 포프로서도 관찰당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그렇게 관찰해오다 모친이 정신을 차리자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타바사는 놓쳤어. 느닷없이 난입한 나 때문에, 용이 타바사 일행을 태우고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없었어. …………그렇게 전해. 아니, 그렇게 말하도록 하지.”
“그럴 순 없다. 이건 임무.”
“그러니까, 내가 저항하느라 실패했지만, 대신 내게 흥미를 느껴 데려갔다, 라고 하면 되잖아?”
포프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호기롭게 말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대신 인질로 삼으란 소리였다. 원거리에서 보고 있었다면 자신과 킬번의 싸움을 보았을 테고,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충분히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지금 킬번과 자신이 하고 있는 대화까지 엿듣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들으라고 대놓고 하는 소리이다. 자신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면 언젠가 다시 사신을 보내 처리할 수 있는 타바사보다, 사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메이지에게 더 흥미를 보이리란 게 포프의 속셈이었다.
저택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푸른 용이 지붕을 뚫고 날아올랐다. 정원을 초과해 다소 느린 비행이었지만 얼추 트리스테인까지는 무사히 갈 것 같았다. 소녀는 용의 모습을 흘끔 보더니 킬번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자동인형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면 따라와.”
‘죠제프, 어떤 놈인지 낯짝 구경을 할 수 있겠군.’
적의 심장부에서 깽판을 부리는 건 분명 유쾌한 일일 것이다. 갈리아 왕 죠제프의 본거지도 구경하고, 덤으로 화풀이도 할 수 있는 기회이다. 킬번은 약점을 잡아놨으니 약발이 떨어질 때까지 우려먹으면 된다. ‘내가 죽으면 마계로 가는 길은 영원히 알 수 없을걸!’ 이란 떡밥이 언제까지 통할지 기대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킬번만 없다면, 그리고 인질만 없다면 포프는 이곳의 메이지가 몇 명이 되었든 그들의 포위를 뚫고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사신이 토베루라로 날아오르자 포프도 그 뒤를 좇아 주문을 외쳤다. 두 개의 빛덩어리가 갈리아 왕궁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이것이, 허무의 주문.”
루이즈가 오랜 명상에서 돌아왔다. 그녀의 전신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오한 같은 게 아니라, 방금까지 책이 말해준 놀라운 주문에 대한 환희 때문이었다. ‘제로’인 그녀가 사용 가능하게 된 최초의 주문, 익스플로전. 그녀가 그것을 몸으로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자신의 사역마 앞에서 최초로 써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등 뒤에서 떠밀어주고 앞에서 잡아당겨준 고마운 존재에게 자신의 첫 마법을 보여주고 싶었다. 만약 부모님이 눈앞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부모님보다 포프의 앞에서 마법을 시전했을 것이다.
책을 내려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의식이 길어서 잠시 나간 모양이다. 약간 속상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밖을 향해 외쳤다.
“시에스타!”
“시에스타는 없습니다만, 부르셨어요?”
시에스타가 휴가를 떠난 것을 깜빡했다. 다행히 다른 메이드가 있었는지 복도 저 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노크를 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연 사람은 그녀가 몇 차례 본 적 있는 시에스타의 동료였다. 가슴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동지의식을 느끼고 주의깊게 본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루이즈는 대뜸 지시를 내렸다.
“포프를 찾아와. 어디에 있든, 급한 일이라고 말하고 데려와.”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봐요?”
“그, 그래보여?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튼 빨리!”
그녀가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갔다. 루이즈는 그녀가 방문을 닫자마자 신나게 방안을 뛰어다녔다. 녀석이 오는 대로, 나도 이제 진정한 메이지가 되었다고 말하는 거다. 그것도 전설의 메이지, 전설의 허무! 트리스테인의, 아니 하르케게니아의 그 누구도 쓰지 못하는 허무의 주문을 쓸 수 있다고! 이 정도 마법을 보여주면, 아무리 헥사곤 스펠이라도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겠지. 포프의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며 루이즈는 멋지게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늘 자포자기해 축 처졌던 동작이 오늘은 싱싱한 활력을 얻어 매우 민첩했다.
복도 저편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포프일까? 루이즈는 방방 뛰던 것을 멈추고 자못 진지한 태도를 갖췄다. 얼굴이 빨개져 화끈거렸지만, 표정을 최대한 엄숙하게 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계통을 밝히고 메이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는 진지하게 하고 싶었다. 망토가 비뚤어지지 않게 다듬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기고, 와이셔츠의 구김을 살짝 펴고, 준비 오케이.
그러나 문이 열리자 루이즈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포프를 찾지 못한 거야?”
루이즈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메이드는 그녀가 익히 알던 단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헉헉대며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그보다 큰일이 나서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타바사 씨와 큐르케 씨가 지금 중상을 입고 실려왔대요!”
“뭐?”
루이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들과는 후케 사건에서의 협력전 이후 친구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불과 얼음의 멋진 콤비의 모습은 루이즈에게 메이지의 싸움이란 어떤 것인지를 강하게 각인시켜준 바 있었다. 그런데 둘이 동시에 중상? 둘을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루이즈는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어디야? 어디에 있어, 그 둘?”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요. 자세한 건 저도 더 이상은……”
“알려줘서 고마워. 당신은 어서 포프를 찾고, 찾는 즉시 의무실로 보내. 포프의 마법이 있다면 금방 회복시킬 수 있을 거야.”
“아, 예!”
그녀는 숨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다시 뛰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것과 반대방향으로 루이즈도 달리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달그닥거리는 지팡이의 촉감을 느끼며, 그녀는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녀석에게 자신의 마법을 두 번째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의무실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은 학원 내의 물의 메이지들이 모두 모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오스만이 그들을 인솔해 차례로 물의 마법을 쓰게 했다. 루이즈는 까치발을 하고서야 환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 개의 침대에는 타바사와 큐르케, 그리고 이름모를 여성과 노인이 누워 있었다. 여성과 노인은 상처가 전혀 없는 반면 타바사와 큐르케는 중상을 입은 게 확실했다. 그 증거로, 시트는 하얀 부분보다 붉은 자국이 더 많다고 해야 할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항상 혈색 좋은 얼굴로 유들유들하게 농담을 지껄여대던 체르프스트와, 냉막한 표정이지만 어쩐지 같이 있으면 정을 주고 싶어지던 타바사가 저런 큰 상처를 입었다. 루이즈는 울컥해 지시에 여념이 없던오스만에게 외쳤다.
“학원장님. 범인은 누구입니까!”
“힉! 큰 소리 내지 말게!”
오스만은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루이즈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손짓으로 나가서 얘기하자는 표시를 했다. 루이즈가 알아듣고 의무실을 빠져나와 복도의 구석으로 향했다. 오스만이 곧 따라나와 루이즈의 앞에 섰다. 이렇게 금방 나오는 걸 보니 일단 그들이 고비는 넘긴 것이리라.
“저들은 일단 고비를 넘겼네. 저만큼이나 메이지가 달라붙어 있다면 하루 정도면 깨어날 걸세. 하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당분간 요양해야 할 것 같다네.”
오스만은 한숨 돌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코털을 뽑았다. 좀 진정되자 평소 습관이 나오는 것 같다. 루이즈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털을 세 개쯤 뽑은 후 입으로 후 불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저들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네. 원래 소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학원의 기밀로 남겨야겠지만, 자네는 지난번에 이들과 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사태에 대해 알려줘야겠지.”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좋아. 지금부터 말하는 건 비밀로 하게.
이십 분 전에 타바사의 사역마인 풍룡이 네 사람을 싣고 왔네. 노인과 저 여성은 상처가 없었지만 타바사와 큐르케는 이미 중상을 입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네. 상처는 낫에 의한 자상. 타바사가 응급처치로 상처를 얼린 흔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확실히 목숨을 잃었을 게야. 하지만 그녀가 의식을 잃고 얼음이 녹으면서 피가 다시 흘러나왔지. 그나마 저 풍룡이 본능적으로 이곳에 돌아와줘서 아슬아슬하게 구해낼 수 있었다네.“
“그렇다면 범인은, 범인은 누구입니까!”
“나도 그걸 알고 싶다네.”
오스만의 쥐가 찍찍거리며 그의 팔에 기어올라왔다. 노인은 그것을 쓰다듬으며 유능했던 비서인 롱빌을 떠올렸다. 그녀가 있었다면 재빨리 정보를 수집해서 자신에게 건네줬을 것을.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오히려 이 빈약한 정보를 비밀인 것처럼 포장해 학생에게 건네주고 있다. 새삼 인재의 중요성을 느끼며 그는 루이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내 나름대로 조사해 보겠네. 그러니 자네도 자네 나름대로 범인을 추측해보게나. 우리에게 단서라곤 풍룡이 갈리아 방향에서 날아왔다는 것뿐이라네. 노인과 여성이 깨면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구먼.”
“알겠습니다. 꼭 범인을 찾아내겠습니다!”
씩씩하게 말한 후 루이즈는 꾸벅 인사하고 저편으로 뛰어갔다. 필시 사역마 소년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오스만이 노린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그가 괜히 루이즈에게 정보를 흘린 게 아니었다. 루이즈가 나서게 된다면 사역마인 포프도 덩달아 나설 테니 이쪽에서 부탁하지 않아도 한시름 덜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 후케를 잡은 실력을 보면 이번에도 깜짝 놀랄 만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오스만이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을 이용할 생각만 가득해진 걸 보니 정말 자신이 늙기는 늙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젠 습관이 된 코털뽑기를 다시 시작했다.
달리던 루이즈가 코너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쳤다. 포프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많이 지쳐있어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살짝 엉덩방아를 찧자 상대가 당황하며 다가왔다. 상대에게 불평을 내뱉으려던 루이즈가 순간 당황해 중얼거렸다.
“타, 타바사의 언니……?”
눈앞에 있는 여성은 타바사가 성장한다면 딱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타바사와 판박이였다. 차이가 있다면 큐르케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잘 빠진 몸매일까. 타바사의 얼굴을 하고서 저 정도의 몸매를, 그것도 체르프스트의 옷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건 반칙이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한탄하기 시작한 루이즈를 보고 그녀 또한 당황했다.
“동생이에요! 큐이큐이! 전 타바사 언니의 동생!”
“뭐야, 동생인가……가 아니라, 동생이면 대체 몇 살인데 그런 반칙 몸매를 가진 거야!”
울컥한 루이즈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적당한 그녀는 어리둥절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팔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언니는 데려왔지만 아저씨가 위험해요! 아저씨랑 나쁜 놈이 어딘가로 날아갔어요! 아저씨만큼 센 놈이에요! 큐이!”
“아니, 잠깐. 아저씨가 누군지 말해줘야지. 그리고 나쁜 놈은 또 누구야?”
“귀가 뾰족한 엘프가 타바사 언니랑 큐르케 언니를 베었어요! 포프 아저씨가 구하러 와서 엘프랑 싸웠다구요! 큐이~ 제가 모두를 구하는 사이에 아저씨가 엘프에게 밀리다 둘이 같이 날아갔다구요!”
“뭐!”
허무의 마법을 있는 힘껏 주창한 직후에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파란 머리의 소녀의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이명을 느끼며 루이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헥사곤 스펠을 쓸 수 있는 포프에 대한 믿음보단, 역시 루이즈의 인생에 걸쳐, 나아가 하르케게니아의 역사에 걸쳐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공포심. 시조 브리밀조차 이길 수 없었던 존재, 엘프…… 제아무리 포프라 해도 위험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싸늘하게 식은 포프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의 메이지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의 모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브리밀이시여……”
루이즈는 이를 덜덜거리며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