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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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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12화 허무의 메이지


나는 누구일까.

나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난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은 마계. 발 아래는 들끓는 마그마로 시뻘겋게 달구어져 있고, 머리 위는 시커먼 구름만 가득한 곳. 이런 환경에서도 마계의 생물들은 꿋꿋하게 살아간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안의 샘물을 마시면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 헤멜 필요가 없는데, 더 이상의 환경을 바랄 순 없다.
하지만,
고독하다.

이 구덩이 안에는 나와 이 자동인형밖에 없다. 자동인형은 내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내가 손을 떼면 곧 움직임을 멈춘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인형도 말하지 않는다. 이 깊고깊은 구덩이 안에서, 손바닥만한 하늘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인형을 조종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순 없었다. 뭔가 특수한 주문이 구덩이의 유일한 출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외로워.
외로워.
난 구석에 웅크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하면 저 절망적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나와 말해줬으면 좋겠어.
누구라도 좋아.
아니, 괴물이 날 잡아먹으러 온대도 좋아.
나는 웅크린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이젠 포기하자.
아무도 오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여기 오지 않았다는 건,
내 속삭임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는 건,
혹시 내가 시끄럽게 굴어서이기 때문일까.

난 스스로 낸 결론에 만족해 결심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혼자 중얼거리지 않겠어.
어떤 감정도 갖지 않겠어.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행동하겠어.
이렇게 다시 십 년을 살고, 그 뒤에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년 후,
마계가 거칠게 요동쳤다.
검은 하늘이 순간이나마 밝게 빛나고,
어두운 바깥 세상이 환하게 빛났다.
그것은 오직 파괴를 위한 불꽃의 해일이었다.
난 그것을 무감동하게 바라보았다.
불꽃이 구덩이를 덮더니 맹렬하게 바닥을 향해 추락해 온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곳에서, 이 순간 나의 고독이 종료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니까.
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팔을 벌리고,
구덩이 전체가 흔들리며 토사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내 옆에 검은 거울 같은 형체가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제로의 대모험 제12화
-허무의 메이지-

 

갈리아의 왕, 통칭 ‘무능왕’이라 불리는 죠제프 왕이 나른하게 물었다.

“뭘 주워온 거냐, 사역마?”

“특이한 메이지.”

자동인형은 손으로 포프를 가리켰다. 블랙 로드와 델프링거는 왕궁 입구에서 압수당한 상태였다. 이 둘을 압수하고 나자 병사들은 별 거리낌없이 포프를 들여보냈다. 밧줄로 묶는 시늉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메이지는 육체적으로 결코 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확실해 보였다.
죠제프 왕은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포프를 바라보았다.

“자기 소개를 해 보지 그러나.”

“저요? 전 갈리아의 죠 뭐시기란 녀석을 매우 싫어하는 평범한…… 사역마죠.”

“그 죠 뭐시기란 녀석은 왜 자기가 미움받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미움받는 건 잘 몰라도, 자기가 애먼 집안 하나를 말아먹었다는 건 알고 있겠죠.”

사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이지만 엄연히 병사들이 호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포프의 불손한 말에 놀라며 창을 꼬나쥐었다. 왕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 표정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사실에 포프는 조금 감탄했다.
죠제프는 깍지를 끼며 미묘하게 웃었다.

“허무의 메이지의 사역마는 배짱이 좋군.”

포프는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과 갈리아 왕궁과의 거리가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데, 대체 이 자는 어떻게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까놓고 얘기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는 이런 대단한 말을 내뱉는 주제에 표정이나 어투 모두 나른하기 짝이 없다. 포프는 상대방의 내심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이 남자는 상궤를 벗어난 듯하다. 생각이 깊은 건지, 아니면 그냥 괴짜인 건지 알 수 없다. 버언처럼 카리스마나 지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걸 보면 도무지 속이 보이지 않는다. 뱃속이 어지간히 시커먼 모양이라고 포프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어댔다.
그때 자동인형의 그림자에서 소녀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포프를 가리키며 죠제프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저 남자, 다른 세계에서 온 자.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듣고 싶다.”

“이런이런, 내 사역마가 돌아갈 방법을 묻는군. 어쩌면 좋지, 포프 군?”

이젠 이름까지 대놓고 말하는 걸 보니 그의 주인이 루이즈란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부분은 확실히 까발려졌다고 생각하고 체념하기로 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죠? 트리스테인에 첩자라도 심었나요?”

“내가 왜 그걸 말해야 하지?”

​“​…​…​…​…​…​…​…​…​…​…​싫​으​면​ 그만둬요, 왈드의 주군 나리.”

오호, 하고 죠제프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제야 대화라는 행위에 대한 의욕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내가 괜한 소릴 지껄였군. 카운터로는 훌륭했네.”

“천만에요.”

엉킨 실타래처럼 보여도 잡아당기면 술술 풀리는 논리의 집합이다. ‘허무의 메이지’라는 루이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는 학원 내에서도 전무하다. 오스만이나 콜베르가 눈치챘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갈리아 왕국과 내통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루이즈의 정체를 아는 동시에 그 사실을 이곳에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된다. 마침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가진 인물이 있다면 결론을 내기는 더욱 쉬웠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좋아할 여유는 없었다.

“당신, 레콩키스타랑 무슨 관계죠?”

갈리아가 레콩키스타에 가담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매우 심각해진다. 정치는 몰라도 정세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기에, 트리스테인은 신생 알비온과 싸우기도 벅찬 국력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갈리아가 신생 알비온을 직, 간접적으로 후원해준다면 트리스테인은 어떤 식으로 싸워도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죠제프 왕은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좌에서 내려와 무방비 상태인 포프에게 다가갔다. 죠제프가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는 지팡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눈동자엔 살기 따윈 조금도 없었고, 오직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기쁨과 호기심만 가득했다. 죽일 생각을 전혀 갖지 않고도 손쉽게 잠자리의 날개를 떼어내 개미굴에 던지는 아이의 모습이 언뜻 겹쳤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건들거리는 자세로 포프를 겨누었다. 반격해야 하나? 피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빨리 선택해야 한다. 초조한 기분에 침을 꿀꺽 삼키자 죠제프의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병사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왕에 대한 두려움이나 곧 저질러질 참극에 대한 호기심 대신, ‘또 시작이군’이란 귀찮은 표정이다. 물론 왕 앞에서 대놓고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게 아니라, 얼굴근육이 움직이는 미묘한 변화를 포프가 잡아냈다는 소리이다. 설마?
지팡이가 포프의 턱에 가볍게 닿았다.

“빵!”

가벼운 폭발음은 지팡이 끝에서 나온 게 아니라 죠제프의 입에서 나왔다. 병사 몇몇이 고개를 약간 저으며 탄식했다. 죠제프가 지팡이를 서서히 거두며 낄낄대는 모습은 광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그가 포프에게 한 방 먹이는 걸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단순한 허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포프의 두뇌는 순식간에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다른 세상의’ 사역마를 가진, 마법을 쓰지 않는 메이지.

“당신 설마……”

상대방을 떠보기 위해 포프는 슬쩍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 했다. 그의 표정을 본 죠제프가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느끼하게 윙크했다. 그 손가락에 난 새까만 털을 보며 포프가 마저 말했다.

“…………변태?”

“정답이다.”

죠제프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기어코 병사들 사이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병사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포프에게 블랙 로드와 델프링거를 다시 건네주었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감사히 받는 포프였다. 사실 그는 여차할 경우 블랙 로드를 소환해 한바탕 깽판을 칠 각오도 하고 있었다. 마계의 전설의 명공인 롱베르크의 작품은 주인이 어디에 있든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설령 무기를 땅 속 깊숙이 파묻는다 해도 주인이 부르면 땅을 뚫고라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럼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볼까.
레콩키스타를 갈리아가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이 자리에서 내 목이라도 칠 건가, 소년?”

호위라곤 킬번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메이지라면 킬번이 호위하든 말든 없앨 순 있다. 베탄(중압주문)만 난사해도 끝나는 문제이니까. 하지만 그런 건 포프의 신조에 맞지 않는다. 여태까지 인간을 본능적으로 적대하는 마족들만 상대해 오던 소년에게, 자신을 상대로 무방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인간을 향해 살의를 뻗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는 포프를 보며 왕은 재미없다는 듯 쯧 하고 탄식하더니 킬번에게 손짓했다. 킬번은 날렵하게 구석에 가더니 테이블을 통째로 들고 왔다. 그 위에는 포프도 익숙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체스?”

“그래. 네 시대에도 이게 있다지? 어떤가. 한 판 두지 않겠나?”

체스판 위에는 여러 말들이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여놓아진 말들의 모습은 이 판이 한창 진행 중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흑과 백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각자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에서 포프는 그리운 몇 개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느라 포프는 왕의 설명을 약간 놓쳤다.

“……그래서 이 룩이 레콩키스타라는 거지. 일직선상으로만 돌진하며 옆은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놈들 아닌가. 하지만 이런 놈의 곁에 비숍이 있다면 얘기가 틀리지. 룩이 놓친 부분을 꼼꼼하게 되짚어 가며 취약점을 보완해주니까.”

딱, 하고 비숍이 체스판에 강하게 꽂혔다. 그 소리에 포프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죠제프는 연극을 하는 것처럼 감정을 잔뜩 실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룩과 비숍, 레콩키스타와 갈리아가 힘을 합쳐 상대방을 유린하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지. 그들을 막기 위해 왕을 중심으로 방어벽을 형성할 수밖에 없어. 그러는 사이 측면은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네.”

다시 딱. 이번에 움직인 건 폰이었다. 백색의 폰은 어느새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공격하는 측도 룩과 비숍이 부재한 자리에 빈틈이 생기지. 이미 반수 이상의 말을 소진한 상대편에게 마지막으로 비장의 수단을 허용할 정도로 말야.”

그는 반대편 말을 움직였다. 검은색 폰이 한 칸 앞으로 전진했다. 룩과 비숍의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위치였다. 백색의 왕은 아직 그 폰을 보지 못한 것처럼, 온 신경을 흑색의 왕을 잡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포프는 말없이 그 판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말을 잡았다. 그가 잡은 것은 아까 움직였던 흑색의 폰이었다. 백색 편이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 흑색 말이 움직이는 건 반칙이었지만 죠제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따악……!
폰이 거칠게 판에 내동댕이쳐졌다. 마치 무거운 금속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폰이 내려앉은 칸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당신이 바라는 게 이런 거야?”

말에서 손을 떼며 포프는 나직하게 말했다. 죠제프는 테이블에서 물러나 옥좌에 몸을 맡기며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포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로서의 냉정함, 포프의 가장 큰 장점인 그것이 죠제프가 전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분석해 주고 있었다.

“결국 세계를 체스판 삼아 한 판 놀겠다는 거 아냐? 레콩키스타든 갈리아든, 그런 거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지? 말해봐! 당신이 원하는 건……!”

​“​프​로​모​션​(​승​격​)​이​지​.​”​

죠제프가 짝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자신만의 흥에 겨웠는지 그는 연속해서 두 번, 세 번 박수를 쳤다. 히히히, 하고 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천박하게 웃다가 느닷없이 자리에서 뛰쳐내려와 체스판을 두 손으로 마구 휘저었다. 말들이 사방에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쳐 깨져나갔다. 레콩키스타가, 갈리아가, 트리스테인이 산산조각나는 모습을 포프는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가 손을 멈추자 절대자의 그 폭풍에서 살아남은 말들이 눈에 띄었다. 죠제프가 마지막으로 잡았던 폰, 그리고 포프가 마지막에 잡았던 폰이었다. 둘 다 끝칸에 도착해 있었다.

“말해보게, 소년…… 자네는 체스를 두면서 프로모션을 몇 번이나 성공해 봤나?”

“실전에선 한 번도 없었어요.”

이건 포프의 실력 이전의 문제였다. 한 칸씩밖에 전진할 수 없는 폰이 어느 세월에 상대방의 진영 끝까지 전진하고, 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일은 동수 사이에선 벌어지기 힘들다. 대부분 그 이전에 왕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죠제프가 벌인 이 판은 다르다.

“룩이 죽어도, 비숍이 죽어도, 왕이 죽어도 이 판은 끝나지 않아. 이 판의 규칙은 그 어렵다는 프로모션을 성공시키는 것뿐이지. 그것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나이든…… 아니면 상대방이든 간에……말야…… 힉, 힉!”

죠제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의 나른한 표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지금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떨고 있는 광기의 산물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포프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정도의 광기를 보유한 인간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단순한 악인이거나 선인에 불과했던 추억 속의 인물들과는 다른, 마족과도 같은 악의와 인간의 천진함이 마구 뒤섞인 질척질척한 광기가 죠제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왜 타바사의 집안을 멸망시킨 것인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더 이상 이 자와 얘기를 할 필욘 없을 것이다. 포프는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잡고 괴이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 홀을 집어삼키고 있는 광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죠제프에게 한 방 먹인다는 계획을 다음으로 미룰 정도였으니 알 만했다. 그러자 포프의 머리 위에서 처음에 들었던 죠제프의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벌써 가는 건가? 더 있다 가지 그러나.”

그렇게 미친 놈처럼 웃던 주제에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원래대로에서 ‘무능왕’으로 포장된 가면으로 돌아갔다. 이중인격에 버금갈 만한 그 신속함은 그가 정상이 아니란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의식적으로 그런 광기에 찬 모습을 연기해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능력은 뛰어나지 않다.

“미친 자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들을 것도 대충 다 들은 모양이고, 어차피 당신이 제게 세부적인 계획까지 알려주진 않을 테니까.”

포프의 발이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할 때 죠제프가 툭 내뱉었다.

“트리스테인은 일주일 내로 멸망한다.”

발이 멎었다.

“왜 그래? 어서 떠나. 난 여기서 마음대로 지껄일 테니.
레콩키스타의 일차 침입은 대규모 공습, 그리고 이차 침입은 약 9만 가량의 지상병력의 습격. 일차만으로도 트리스테인 같은 소국은 붕괴되지. 자네, 아직도 안 갔나? 왜? 미친 놈에게서 나오는 말이 그렇게도 의미가 있나? 응?“

포프가 다시 돌아섰다. 지팡이를 쥔 손에 땀이 끈적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긴장과는 다른, 말하자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온갖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오던 마족들 중에도 이런 남자는 없었다. 힘이 아니라 어둠의 감정만으로 따지자면 이 남자는 당장 군단장 급의 서열로 올라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포프의 얼굴을 보게 된 죠제프가 환호성을 질렀다.

“옳거니! 이제야 뒤돌아봐주는군, 사역마 소년! 이래서야 마치 내가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 보내는 소녀 같잖나! 그래,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당신이 지금 원하는 용무는 내게 있는 것 같네요.”

체스판을 통해 자신의 목적이 세계를 엉망으로 휘젓고 싶을 뿐이란 걸 알려주고, 게다가 향후 전쟁 계획까지 알려준다. 그러고 나서 잘 가라고 손이라도 흔들어준다? 그럴 리 없다!

“킬번이냐!”

챙! 아슬아슬하게 검을 뽑은 포프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사신의 낫을 막아냈다. 포프의 신체능력으론 그 정도의 반응속도를 낼 수 없겠지만 간달브의 룬이 이를 보조해주었다. 델브링거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목덜미에서부터 느껴져 오는 낫의 한기 때문에 포프는 죠제프를 노려보는 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막을 생각인가!”

“그 반대다, 소년이여. 네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다.”

-파트너! 마법을 써! 검으론 이 녀석에게 안 돼!

델브링거가 절규했다. 실제로 왼손이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포프가 룬의 힘을 끌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신의 힘은 그를 웃돌았다. 애당초 포프 자신이 전사 체질이 아니긴 하지만, 사신의 괴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인형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명령.”

“이 바보야! 날 죽일 셈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낫의 힘이 조금 약해졌다. 그 틈에 포프는 한 손으로 바기크로스를 시전했다. 킬번의 몸이 붕 떠오르자 그를 공격하는 대신 죠제프를 향해 날아갔다. 킬번 녀석은 죠제프의 사역마이니 죠제프를 잡으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리라면 토베루라로 날아가 단숨에 뒤를 제압할 수 있다. 그건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래, 그것은,
적어도 죠제프가 지팡이를 들어올릴 때까지는 확신이었다.

-피해!

델프링거의 외침이 들리기 무섭게 날아가던 포프의 몸이 급격히 다른 방향으로 꺾어졌다. 포프가 살던 곳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하고 섬뜩한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포프가 있던 자리에 돌연 눈부신 빛이 뿜어지며, 주변의 사물이 빛무리 안에 휩쓸려가 소멸되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눈 팔지 마! 또 온다!

공중에서 자리를 잡은 킬번이 토베루라로 날아온다. 다시 바기크로스를 써 보았지만 이번엔 사신의 낫에 막혔다. 자세가 흐트러져 델프링거로 막는다 해도 금방 무너질 것 같다. 하지만 포프는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챙캉! 아까보다 더 파괴적인 마찰음이 홀에 퍼졌다. 킬번의 낫과 포프의 검은 한 치의 양보없이 움직이지 않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오. 신기한 마법이군.”

죠제프가 즐겁게 웃었다. 포프의 왼팔이 강철의 색을 띤 채 굳어있었다. 자신의 팔에 연금과 고정화를 동시에 걸어 자세와 힘의 부족을 잠시나마 메꾸는 수법은 임기응변치곤 훌륭하다. 저렇게 하면 한 번의 공격은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어떨까? 그는 다시 주문을 영창했다. 허무의 마법, 익스플로전. 영창시간이 긴 게 단점이었지만 그 위력은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어떤 사대 계통의 마법도 허무의 마법과 비교할 수 없다. 아마 포프에게 시간과 자료를 주고 분석하게 한다면 그 역시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느긋하게 주문을 외우는 죠제프와 달리 포프는 최대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죠제프가 허무의 메이지란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본 허무의 주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흡사 매드로아처럼 범위 안에 있는 것을 소멸시키는데다, 주문이 시전자에게서 방출되는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에너지가 응집된다. 그렇다면 마호칸타를 쓰더라도 마호칸타 안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포프는 당황한 나머지 사신의 일격을 이렇게 꼴사나운 방식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론을 부여한 왼쪽 팔이야 무사했지만, 사신의 일격은 왼쪽 팔을 제외한 전신에 충격을 미쳤다. 회복주문을 써야 할 정도로 몸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상대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

킬번이 다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느껴졌다. 당혹스러운,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하지만 그 감정과는 상관없이 낫이 다시 날아들었다. 별수없이 아스트론을 풀고 왼팔로 낫을 쳐냈다. 그러자 낫을 쥐고 있지 않았던 사신의 오른팔이 포프의 복부를 강타했다. 신음조차 토하지 못하고 포프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 포프는 충돌 직전에 겨우 아스트론을 주창할 수 있었다. 쾅! 하는 굉음이 들리며 단단한 바닥이 움푹하게 꺼졌다.

‘아…… 이대로 주문이 들어오면 끝장이야!’

아까의 주문을 아스트론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게다가 아스트론을 두르고 있어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포프는 주문을 해제하고 급히 회복주문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딱 1초, 상처회복은 미루고 체력만 회복한 후 그 자리를 이탈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주문은 날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사신에게 주의를 집중하며 죠제프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죠제프는 지팡이를 겨눈 채 포프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역시 대단해. 너도, 저 인형도 내 말로 손색이 없다.”

체스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두 개의 폰이 떠올랐다. 그랬나, 자기의 말은 저 킬번이고 상대방의 말은 포프. 하지만 결국 두 개의 말 모두 자신이 움직이겠단 소리이다. 그는 큭큭대며 웃다가 더 참을 수 없었는지 폭소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상황이 있나! 저 인형을 손에 넣었을 때도 그랬지만, 네 녀석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싱겁게 끝날 뻔했군! 정말로 네 녀석에게 감사한다!
자아! 어서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라! 그리고 인형! 넌 저 녀석을 쓰러뜨려라! 너희들은 내 구상의 조커다! 내 예상을 뛰어넘어, 내 계획을 완성시켜라! 내 계획을 무너뜨려라! 서로 피흘리고, 서로 죽여 자기를 관철시켜라!“

포프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저 광기는 인간의 수준 정도가 아니라 마족의 수준도 넘어섰다. 혹시 허무의 마법이 사용자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그러고보면 루이즈도 지극히 평범한 성격, 이라고 말할 순 없다. 간혹 드러나곤 하는 그 과격함은 평소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요정처럼 청순해 보이는 그 외모와 너무 동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무사히 돌아가면 이것도 연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킬번에게 외쳤다.

“젠장! 나나 킬번 녀석이나 네 녀석 도구란 거냐!
 어이! 킬번! 저런 녀석을 정말 따르고 싶은 건가!”

부질없을 걸 알면서도 포프는 한 번 찔러 보았다. 하지만 대답 대신 날아든 건 킬번의 낫이었다. 낫을 정신없이 막아내는 와중에 소녀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말이 포프의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란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정신에 혼란이라도 온 것일까? 사용자의 혼란은 자동인형에도 미치는 모양이다. 아까보다 일격 일격이 묵직해진 대신, 공격루트가 단조로워졌다. 단순히 힘과 속도에만 의지한 휘두르기라면 막아낼 수 있다. 포프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이오라!”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룬의 보정으로 간신히 들어올려 주문을 내쏘았다. 강력한 불의 구슬이 포프의 손에서 발출되더니 얼마 전진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자동인형과 시선을 공유하던 소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시력을 상실했다.
그 짧은 순간에 포프의 몸이 죠제프를 향해 날아갔다. 폭발력을 이용한 반동으로 튕겨져나간 것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주문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죠제프의 빈틈을 찌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아까의 주문은 목표를 소멸시킬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상대는 맞출 수 없을 거란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포프를 맞이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느닷없는 폭발이었다.

“큭!”

아까의 이오라보단 약한 위력이었지만,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만큼 충격은 이쪽이 더 컸다. 갑자기 눈앞에서 일어난 폭발로 포프의 몸이 다시 튕겨졌다. 그의 몸이 바닥에 충돌해 몇 차례 굴렀다. 이번에야말로 내장이 역류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그는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기침 끝에 피가 섞여 나왔다.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죠제프가 말했다.

“자네 주인도 이런 걸 쓰지 않던가?”

“아아.”

포프는 겨우 대답했다. 루이즈가 쓰는 ‘마법의 실패’가 저 자의 손에선 무시 못할 위력으로 구현화되었다. 이오나즌을 생각하고 훌쩍 뛰어 피했는데, 이오나즌 대신 이오라 수십 발이 날아왔다고 해야 하려나.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회복주문을 시전하려 하는 중에 죠제프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난 믿네. 자네는 조커야. 다른 세계에서 온, 나의 계획을 저지하려 날뛰는 변수란 말일세. 그래서 난 자네를 이렇게 공격하고, 그래도 자네는 살아남을 걸세. 만약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건 신이 이 세상에 없다는 좋은 증거가 될 거야. 틀림없이, 자네가 없으면 - 난, 세계를 엉망진창인 허무에 빠트릴 테니까.”

“방법! 방법을!”

소녀의 외침이 들렸다. 이제야 정신차리고 포프와 나눴던 말을 떠올린 걸까.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하지만 죠제프는 냉정했다.

“지금 네가 그걸 들을 필요는 없다, 인형. 넌 이 세계가 파멸되거나, 혹은 구원되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자, 그럼 소년이여, 선택해라. 파멸이냐, 구원이냐? 난 이 주문으로 네 대답을 듣겠다.“

두근두근.
포프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간달브의 룬이 밝게 빛났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몸이 천천히 일어났다.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이 순간 깨끗하게 날아갔다.

“지금…… 파멸이 어쩌고 했겠다?”

죠제프의 지팡이가 휘둘러졌다.

“인간, 주제에.”

마족은 강대하고 인간은 나약하다.
마족은 지상을 뚜껑으로 생각하고 날려 버리려 했다.
마족은 지상의 파멸만을 원했다.
인간은 구원 직전까지 마족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이런 세계에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허무의 기운이 전신을 둘러싼다. 이 기운은 실로 허무, 실로 파멸. 목표는 그 기운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
그러나,
파멸의 중심지에 서 있는 것은,
압도적인 파멸 앞에서도 섬광처럼 빛났던 존재였다-

“어린애 투정을 지껄이지 말란 말이야!”

흑과 백의 전우가 주인을 찬양하기 위해 허공에서 노래했다.
그와 동시에, 완성된 허무의 주문 ‘익스플로전’이 그의 전신을 둘러싸며 섬광을 발했다.

-파트너!

-포프!

두 개의 안타까운 외침을, 포프는 아득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이 팬픽을 쓸 당시 제로마 최신권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죠제프의 모든 마법은 이 팬픽 고유 설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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