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3화 귀환, 그러나......
“포프는 아직 살아있다네.”
와병 중에 간신히 몸을 추슬러 파푸니카 왕국을 방문한 마트리프의 한 마디는 왕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마트리프 님! 그게 사실입니까!”
메를르가 뛰쳐나와 외쳤다. 할머니의 힘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지만, 어떤 점괘에도 그가 이 세계에 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검은 핵이란 무시무시한 폭탄의 폭발에서 어떤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그 거리라면 포프가 아니라 버언이 오더라도 확실하게 죽었을 터였다.
노인은 히죽 웃으며 코를 후비적거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이 세계에는 없을 수 있지. 하지만 우리가 아는 세계가 어디 여기뿐이던가?”
“마계!”
이번에 말한 것은 레오나였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대신해 오랫동안 왕녀의 자리를 지키다, 버언의 소멸 이후 정식으로 여왕이 되었다. 현자 클래스의 마법을 구사하며 지식 또한 현자 못지않게 쌓아왔기에 마트리프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마계와 인간계, 그리고 천계. 이들이 아는 세계는 이 삼계의 공존과 균형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마트리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 수 없어. 천계나 마계라면 희미하게나마 내가 눈치챌 수 있었을 게야. 하지만 이건 달라. 내게도 흔적 그 자체가 느껴지지 않아. 물론 천계나 마계의 비밀스러운 곳에 있다면 나도 탐지해낼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마트리프 님은 어떻게 포프가 살아있다는 걸 아신 건가요?”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포프가 살아있다는 걸 확신한다는 게 무슨 소리일까. 마암이 묻자 노인은 손으로 이마를 가리켰다. 대마도사의 기묘한 복장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커다란 모자의 중앙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 보석이 여전히 붉다는 게 그 녀석이 살아있단 증거야. 특별히 이런 순간을 대비한 건 아니었지만, 포프 녀석에게 억지로 떠넘긴 물건이 있거든. 항상 포프가 착용하고 있을 테니, 그 물건의 존재가 사라진 순간 녀석도 죽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녀석이 죽었다면 이 보석의 빛도 변할 테고.”
“그 보석이……?”
“이건 해들러와의 싸움 이전에 고안해낸 물건이지. 이마의 보석과 허리띠의 금속 버클 부분을 서로 연동시켜 마력을 저장했다가 단 한 번 방출할 수 있게 한 일종의 호신도구야. 그래서 하나가 소멸하면 다른 하나도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 나중에 싸움이 끝나고 포프 녀석을 감시할 겸해서 던져주고, 함부로 벗지 못하도록 영구 잠금 주문을 걸어두었는데, 나름 쓸모가 있구먼.”
그 자리에 롱베르크가 있었다면 마트리프가 한 말을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타이의 검에 박아넣은 보석과 같은 원리였으니까. 하지만 이 개념은 왕궁에 모인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했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나마 믿어야 한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이 현재 인간계에 단 한 명뿐인 대마도사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살아는 있는데,”
“어디 있는진 알 수 없다는 말이야.
천계인지, 마계인지,“
그는 한 호흡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세상인지.”
제로의 대모험 제13화
-귀환, 그러나
포프는 힘겹게 눈을 떴다. 허무의 주문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하르케게니아의 마법은 자신의 세계보다 위력이 약하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부순 걸작이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미묘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일직선의 매드로아가 아닌 전 범위에 걸쳐 스멀스멀 접근하는 매드로아라고 할까. 단순한 폭렬주문 정도라 생각했던 자신의 안이함을 자책하며 그는 재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파트너, 괜찮아?
“아, 괜찮아. 그런데 여긴 어디지? 델프, 아는 거 있어?”
그가 서 있는 곳은 드넓은 벌판의 초원 한가운데였다. 탐스러운 이삭들이 한참 영글어가고 있는 대지는 어떤 인간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전쟁 따윈 알지 못하는지, 혹은 오래 전에 잊혀져버렸는지, 작물과 저장고,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집들에서 진한 평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시간이 꽤 늦었는지 하늘에는 달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델프링거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파트너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내겐 능력이 하나 있어. 마법력을 흡수해 두었다가 그걸로 주인을 단 한 번 이동시킬 수 있지. 죠제프 놈이 마법을 썼을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서 이동을 했는데……
“했는데?”
-허무의 마법과 충돌하면서 좌표가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린 것 같아. 미안하군. 괜히 나선 건가?
“아냐. 잘 했어. 나도 대위기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저 정도라면 대위기까지는 아니고 중위기 정도일 것이다. 소년이 헤치고 나온 아수라장은 그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마력소모나 상처가 제법 심하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아직 싸울 여력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래 남아있어도 그들을 제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델프링거에게 사심 없이 감사해했다.
검과 지팡이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포프는 마력을 모았다. 일단 루이즈에게로 돌아가고, 그녀가 허무의 주문을 각성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죠제프와의 싸움은 일단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이다. 이번에야 죠제프와 킬번, 둘만 나왔지만 지금 다시 거기로 간다면 수많은 병사들부터 처리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루라!”
외쳤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아……? 루라!”
역시 반응이 없다. 루라 주문은 포프가 마트리프에게서 배운 최초의 주문. 한번 요령을 익힌 이상, 조금이라도 마법력이 남아 있다면 발동해야 한다. 하지만 루이즈가 있는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으로의 전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다른 마법을 써 보자 메라와 기라 등의 마법들이 문제없이 나갔다. 일단 포프의 마법 구사 능력은 그대로란 소리이다. 그렇다면?
-파트너! 큰일났다!
델프링거가 느닷없이 크게 외쳤다. 이 검은 왜 내가 생각만 하려고 하면 소리를 치는 것일까, 하고 포프는 속으로 투덜댔다.
“무슨 일이야?”
-하늘을! 하늘을 봐!
포프는 하늘을 보았다. 깊은 밤이라 달이 떠 있었다. 별도 반짝반짝, 구름 약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포프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자 델프링거는 아까보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바보냐, 네 녀석은! 잘 봐라! 하늘에 달이! 달이 하나밖에 없다!
“뭐?”
당연한 소릴, 하고 말하려던 포프의 몸이 딱 굳었다. 그는 순식간에 경직된 표정이 되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의 말대로이다. 눈동자에 가득 담기는 검은 밤하늘은,
밤하늘에는,
달이,
하나뿐인,
이 세계는,
분명히 -
더 생각하지도 않고 포프는 다시 주문을 외쳤다.
“루라!”
이번엔 제대로 성공했다. 순식간에 섬광으로 화해 날아간 그의 몸이 곧 아까와 다른 장소에 착지했다.
거대한 숲의 입구. 저 멀리에 커다란 성이 보인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타이와의 모험이 시작되었던 장소.
그 여운을 되새길 여유조차 포기하고 그는 다시 루라를 발동한다.
이번엔 한 항구.
그와 타이, 마암이 흉켈과 최초로 만난 곳.
다시 이동한 곳은 용의 신전이 있는 곳.
이곳에서 타이의 약함을 긍정해 주고, 그가 다시 용사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음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그가, 동료들과 강제적으로 이별해야 했던, 그의 망막에 최후로 새겨졌던 가슴아픈 장소……
“하하…… 하하하!”
포프는 웃었다.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것을 기쁨의 눈물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자신이 죽을 때의 기억, 두려움, 이세계로의 이동, 루이즈와 친구들, 고독, 몇 차례의 전투, 다시 혼자가 되었을 루이즈. 기쁨과 슬픔, 당황 등이 순식간에 뒤섞여 포프를 괴롭혔다.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루이즈를 도우며 보람을 느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었으므로.
-포프……
블랙 로드가 웅웅거렸다. 그녀가 주인에게 한 말을 포프는 듣지 못했다. 델프링거가 다시 뭐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들리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 없이 행해진 느닷없는 이동을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것은 15세의 소년에겐 실로 버거운 일이었다. 그가 좀 더 나이가 있었더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추억을 포기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런 순간에도 두 개의 추억을 저울질해 하나를 가차없이 떨어뜨릴 수 있을 터. 그렇지만 포프는 아직 무언가를 버리기보단 힘껏 움켜쥐는 쪽에 익숙했다. 열다섯이란 나이는 훗날 포기해야 할 온갖 것들을 모조리 끌어안고 끙끙대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나이인 것이다.
그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웃던 포프가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울음도 점차 잦아들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문지르자 얼굴 전체에 흙이 묻어 더욱 형편없어졌다. 손등으로 흙을 털어내고 나자, 그제야 찌릿한 아픔이 밀려왔다. 아까 미처 회복시키지 못한 상처일까? 아니다. 그보다 좀 더 오래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래서 잊고 있었지만 늘 포프를 압박하고 있던 감정.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격한 통증은 그의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두 세계의 무게를 살짝 한 쪽으로 기울게 했다.
-파트너, 괜찮아? 왜 그래?
“델프…… 여긴 내가 살았던 세계야.”
-뭐?
“난,
다시 돌아온 거야.”
루이즈에 대한 죄책감을 애써 억누르면서 포프가 나직하게 말했다.
-뭐? 그럼 여기가 하르케게니아가 아니란 거냐?
포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에 든 지팡이를 꼭 움켜쥐었다. 지팡이가 가볍게 떨리는 것이 손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는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자, 블랙.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야.”
그의 몸이 파푸니카 왕궁을 향해 비상했다.
파푸니카 왕궁 한복판의 정원에 느닷없는 굉음이 일었다. 호위병들이 부산하게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왔다. 포프는 그들에게 느긋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별로 자랑은 아니지만, 용사 일행에 속하는 자신이라면 저쪽에서 먼저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낯익은 얼굴이 전혀 없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그것도 알아서 해결되려니 했다.
“이야, 안녕하세요? 타이의 친구 포프입니다. 타이는 여기 있나요?”
호위병들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전혀 모르는 눈치라 포프는 약간 당황했다. 아무리 아는 얼굴이 없다지만, 이름 듣고도 아무 반응 없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때 호위병 하나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사님께서는 어째서 장난을 치십니까? 이미 왕궁 정원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만 해도 큰 실례입니다. 어서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경우에 따라선 당신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구금할 수도 있습니다.”
“에? 제가 장난을 쳤다구요? 아니, 여기 멋대로 들어온 건 물론 죄송하긴 해요. 하지만 이건 좀 새삼스럽달까, 왜 갑자기……”
“장난이 아니라면 왜 대마도사 포프의 이름을 대는 겁니까? 혹시 그분과 무슨 관계라도?”
“아니, 제가 본인이에요.”
이제야 좀 얘기가 통하나 싶어 포프가 반색했다. 그러나 경비병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들이 숙덕대며 ‘어서 현자님들을 모셔와’라고 속삭이는 게 포프의 귀에 들렸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 그는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아폴로나 에이미가 온다면 얘기가 좀 통할 것이었으므로.
잠시 후 경비병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그로 인해 생긴 공간을 한 남자가 채웠다. 대마도사 마트리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손에는 검은 구슬이 박힌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현자라기보단 오히려 과거 가짜 용사들의 무리였던 마조토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목소리도 갈라지고 틀어져 도무지 현자 같지 않았다.
“넌 누구냐?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데 어째서 궁 안에서 무례를 범하려 하느냐!”
“저기요.”
포프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몸이야말로 파푸니카의 현자 로이언이니라. 나를 모른다는 건 어지간히 깡촌에서 살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것일 터. 그런데 어떻게 루라로 여기까지 온 거냐? 혹시 예전에 이곳에 숨어들어온 일이라고 있는 게냐?”
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아까부터 이런 사람들만 나오는 걸까? 포프는 실룩이는 얼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부탁했다.
“당신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보다 절 아는 사람을 부르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그보다 파푸니카의 삼현자인 아폴로와 마린, 에이미는 어디에 있죠?”
“네 이놈!”
돌연 그가 목청껏 외쳤다. 갈라진 목소리가 고음으로 변하자 매우 거슬리는 소리로 증폭했다. 그는 삿대질까지 해 가며 악을 썼다.
“장난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안 되겠구나! 어린 녀석이 어디 겁도 없이 삼현자의 이름을 들먹이는가! 다들 이 녀석을 잡아라!”
“예!”
경비병들이 무기를 고쳐잡고 포프에게 달려들었다. 몸놀림을 보니 제법 훈련한 티가 났지만, 어차피 포프의 앞에선 평범한 일반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들을 때려잡는다고 해서 포프에게 이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바기 두어 발을 날려 열두어 명의 경비병들을 몽땅 날려버린 후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정말 그들을 만나봐야겠어요. 그들은 어디에 있죠? 그리고 당신은 왜 절 잡으려 하나요? 제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건방진! 마햐드!”
남자의 지팡이에서 빙한계 최고 계열의 주문이 생성되어 내쏘아졌다. 포프는 델프링거에 살짝 마력을 주입해 허공에 휘둘렀다. 포프는 투기를 다룰 수 없지만, 대신 델프링거 같은 마법검을 지팡이처럼 마력을 연결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 힘을 얻은 델프링거가 마햐드를 흔적도 없이 들이마시고 번쩍번쩍 빛났다.
-이런 제길! 이가 시려! 나도 늙었나?
“얌마, 너 이빨 없잖아.
이크, 두 번째 오네?”
이번엔 메라조마다. 문득 장난기가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메라를 내쏘았다. 예전 대마왕 버언에게 굴욕을 당할 당시가 떠올라서였다. 상쇄 정도까지만 생각했는데, 자신의 조그만 메라가 남자의 화려한 불꽃을 파훼시키며 전진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남자보다 깜짝 놀랐다. 불이 막 남자에게 닿으려는 찰나, 포프는 황급히 손을 휘둘러 불꽃을 없앴다.
“뭐, 뭐냐, 네놈은!”
“말했잖아요! 포프라고! 도대체 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까? 그렇다면 레오나, 아니 레오나 왕녀에게 전해요! 내가 왔다고!”
“안 그래도 편찮으신 여왕님께 더 이상 심려를 끼쳐드릴 수 없다! 50년 전 행방불명된 대마도사 님을 자칭하는 네놈 같은 사기꾼을 어찌 들여보낼까 보냐!”
“뭐? 50……년?”
포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려다 문득 든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궁은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정원 주변은 이전과 그리 바뀌지 않았지만, 그 뒤로 새로운 건물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건물인지는 몰라도 저 정도를 지으려면 몇 년은 공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버언과의 싸움을 할 당시에는 저런 건물의 주춧돌 하나도 얹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경비병들의 옷도 이전보다 화려해졌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파푸니카에서 불사기단과 빙염마단을 물리친 후 승리의 상징으로 정원에 심은 백향나무의 묘목이 어느새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해 있었다. 포프의 손이 그 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틀림없는 진짜였다.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경비병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포프가 무겁게 말했다.
“이봐요. 레오나 여왕이라고 했죠? 그럼 지금 그녀는 몇 살이죠? 버언과 싸울 때 14살이었으니, 지금은 64살의 할머니가 되었단 말인가요?”
“할머니라니! 아직 정정하신 분께 무례다!”
“그러고보니 아프다고 했죠? 알았어요. 그럼 물러나죠.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포프는 순간이동주문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경비병들이 움찔할 틈도 주지 않았다. 자신을 현자라 밝힌 남자는 어느새 멀어져가는 빛덩이를 분한 듯 지켜보며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경비병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궁정마법사단이 정원을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 자신이 훈련시킨 마법사들이니, 이 정도라면 다시 돌아오자마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메라조마 대결에선 아슬아슬하게 졌지만, 다음 번엔 보다 다양한 주문들로 반드시 녀석을 무릎꿇리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할아버지인 현자 아폴로에게 자신의 승리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말도 안 돼.’
빛덩이가 동굴 앞에 낙하했다. 쾅 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동물들이 후다닥 달아났다. 포프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 정도의 소리가 들렸다면 안에서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안은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더 참지 못하고 그는 입구에서 크게 외쳤다.
“스승님! 마트리프 스승님! 저에요! 포프가 왔어요!”
역시 반응은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정적을 깨기 위해 일부러 큰 발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라 금방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평소에도 그리 깨끗하지 않았던 방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책장의 책이나 자질구레한 마도구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약간의 가구만 흩어진 채 방치되어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걸 보면 족히 몇십 년 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먼지는 침대 위에도 평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스승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는 사실은 제자인 포프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침대에 없다.
잠시 굳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곧 등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을 집으로 가려 하다가 생각을 바꿔 델므린 섬으로 향했다. 타이와 아방 선생님과의 추억이 어린 곳. 그곳이라면 50년이라는 간격을 무시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를 반겨줄 것만 같았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의 목적지는 귀면도사 브라스의 집이었다. 귀면도사의 수명은 짧지 않다. 브라스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50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쉬면서 상황을 듣고, 과거의 동료들을 찾아보는 게 무난한 선택지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최근까지 누군가가 산 흔적이 있다. 그렇다면 잠깐 외출한 것이 분명하다. 느긋하게 브라스의 귀환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포프는 바로 그를 찾아나섰다. 한시바삐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허리의 델프링거가 서두르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파트너, 좀 침착하라구. 아까 바람의 주문을 흡수해서 한층 쿨해진 날 본받으란 말야.
“너 같으면 침착하겠냐! 원래 세계로 돌아왔는데, 느닷없이 50년 뒤라고 하고 있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몽땅 죽었거나 팍삭 늙었을 거란 말야!”
-이봐, 파트너. 난 육천 년 전의 물건이야. 그런 날 쥐고 있는 네가 고작 50년 정도의 간격으로 허둥대는 건 보기 좋지 않아. 그런 건 머저리같은 행동이라구. 어찌됐든 일단 돌아오긴 했다는 거잖아? 그 점에 기뻐하는 게 어때?
검의 충고는 지극히 합당하다. 머리로는 그 말이 맞다고,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한 번 가속이 붙은 다리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울창한 숲을 헤치고 나자 탁 트인 바닷가가 보였다.
“어……”
포프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몇 초 전과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
-몬스터랑 인간들이 싸우고 있군. 팽팽……이 아니라, 인간 쪽이 유리한데?
델프링거의 눈치없는 촌평대로, 해안가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규군 복장을 한 수많은 병사들과, 델므린 섬의 몬스터들이 싸우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의 몬스터들은 스승 아방의 주문인 마호카토르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흉폭성이 배제되어 있다. 스스로 나서서 인간과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저기 떠 있는 수많은 배들은, 저 병사들이 자위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토벌을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포프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시선을 이리저리로 옮겼다. 델므린 섬의 몬스터들이 모두 저기에 있다면 브라스도 저기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브라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뛰어들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먼 발치서 안절부절하던 포프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자식들아! 날 죽이기 전엔 스승님을 잡을 수 없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칭 파푸니카의 발명 검객인 발닥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었다. 분명 인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몬스터 편에 가담하고 있다. 분명 들어본 목소리였는데 누구지? 하고 있을 때, 저 편에서 흑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왔다. 그는 검을 들어올려 노인에게 예를 표한 후 말했다.
“링가이어 왕국의 헤런이라고 합니다. 왕국의 이름에 먹칠한 당신을 잡으러 왔습니다.”
“오, 그래. 모국에서 날 잡으러 보냈다고? 그럼 한 번 잡아봐라.”
노인은 모래밭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몇 미터인가 올라간 후 머리위에 치켜든 검에 투기를 집중하자 십자 모양의 투기가 맺혔다. 저 모양은 분명 포프가 아는 형태였다. 교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도 엄연한 용사의 일행이었다. 반가움에 막 그의 이름을 외치려던 포프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노바! 조심해!”
“노던 그랑……”
검이 자신의 머리 위로 힘차게 낙하해 왔지만 기사는 맞상대하려하지 않았다.
“쏴라!”
기사가 호령하자 그의 뒤에 있던 궁수 열 명이 장전된 석궁을 한꺼번에 발사했다. 포프가 알던 모양과 다른 걸 보니 과거보다 성능이 향상된 물건인 듯했다. 과연 그 위력도 대단해, 막 검을 내리치려던 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화살꽂이로 전락했다. 열 개의 화살을 모조리 몸에 꽂은 채 그의 몸은 백사장에 맥없이 추락했다. 모래먼지를 날리며 바닥을 기는 신세가 된 노인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네, 이놈! 기사가 승부를……회피하고……!”
“정정당당한 대결이란 기사와 기사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 하물며 당신은 몬스터의 무리에 섰으니 몬스터를 잡는 방법으로 사냥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러냐, 임마!”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젊은 소년의 것이었다. 어디에서 난 소린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기사의 뺨에 주먹이 꽂혔다. 느닷없는 일격에 기사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주먹질엔 익숙하지 않아 손등이 부어올랐지만 회복주문으로 금세 회복되었다. 한 대 더 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중상자를 치료할 때였다. 한때 북의 용사라 불리며 얼음같은 외모와 그 안에 불타오르는 열혈을 간직하고 있던 소년이 지금은 노인이 되어 자신의 발 아래 쓰러져 있다. 얼굴형태나 투기의 느낌 모두 그가 노바란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50년 뒤로 날아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고 쓰게 중얼거리며 화살들을 뽑았다. 그때마다 노인의 몸이 경련했다.
쓰러진 기사가 몸을 일으키며 쏘라고 외쳤다. 포프와 노바를 노린 화살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화살들은 목표를 잃고 백사장에 후두둑 꽂혔다. 목표물은 어느새 몇십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화살이 다시 날아들었지만 이번에도 둘의 몸은 허깨비처럼 다른 곳에 나타났다.
세 번째 리리루라를 시전하며 마지막 화살을 뽑을 때쯤 노바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화살이 꽂힌 채 회복주문을 쓸 수 없어서 무리를 시킨 게 좀 미안했지만, 살아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베호마의 따스한 빛이 몸 구석구석을 흝고 지나가자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워낙 큰 충격이었는지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그를 눕혀놓은 후 다시 현장에 돌아왔다. 완전히 수세에 몰린 몬스터들이 동료들을 수습해 도망가고 있었고, 그들을 병사들이 추격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델므린 섬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아는 사람이 같은 인간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포프 역시 ‘정의’가 이기고 있는 걸로 착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힘차게 던진 창이 슬라임 하나를 관통했다. 슬라임은 맥없이 부서지며 소멸했다. 그것과 비슷한 모습을 얼마 전, 아니 오십년 전에 본 적 있다. 대마왕의 손아귀 안에서 산산조각나던 고메의 모습이, 이름없는 슬라임에 연결되어 포프의 뇌리에 새겨졌다.
“그만 해!”
포프는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들어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외치기가 무섭게 뽑아든 블랙 로드에서 베탄(중압주문)이 연이어 발해졌다.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중력에 병사들의 몸이 우르르 고꾸라졌다. 그제서야 포프의 존재를 눈치챈 몇몇 병사들이 간신히 석궁을 들어 그에게 발사했지만, 그것은 델프링거의 노리개가 될 뿐이었다. 저 멀리에 있는 병사들이 이상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포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가까이 오면 이들과 마찬가지 꼴로 만들 생각이었으므로.
-어라. 파트너, 몬스터를 잡는 게 아니야?
“델프. 그런 말하지 말아줘. 저들은 몬스터가 아니라 타이의 친구들이야. 그리고…… 타이의 친구는 내 친구이기도 해.”
포프가 괴롭게 말했다. 살아서 도망친 몬스터는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몸에 두세 군데씩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저들이 잘못을 저질렀던 거라면 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최소한 지금 상황만으로 볼 땐 병사들이 멋대로 쳐들어온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포프가 병사들의 편을 들어줄 이유는 조금도 없다.
“네, 네놈은 누구냐.”
기사가 검을 땅에 꽂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중압주문을 버티는 걸 보니 상당한 수준이다. 아마 아까의 노바와 상대하더라도 쉽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노바의 늙은 몸에 비해 그의 몸은 젊고 투기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겁한 수단을 썼다는 게 더욱 화가 났다. 포프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일으켜지던 그의 몸이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아까 썼던 게 20%의 중압주문이라면 이번 건 50%의 출력이었다. 너무 오래 방치해 두었다간 뼈가 부서질 정도의 압력이었다.
그때 포프의 등 뒤에 있는 숲에서 요란하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한 무리가 뛰쳐나왔다. 손에는 통일되지 않은 무기들을 들고 있었고, 하나같이 얼굴 가득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십 명 정도의 그 무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해변을 향해 달려왔다. 복색을 보니 병사들의 편 같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델프링거가 외쳤다.
-엘프다! 엘프는 사막에서만 사는 게 아니었나?
“엘프? 그게 무슨 소리야?”
-저들의 귀를 봐라, 파트너!
검이 시키는 대로 그들의 귀를 노려본 포프의 입에서 헛 하는 신음이 나왔다. 모양들은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한결같이 뾰족한 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들을 엘프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족……?”
어째서 마족이 결계 안에? 분명 결계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이 주문은 설령 시전자가 죽는다 해도 마법진만 무사하다면 반영구적으로 작동한다. 즉 지금도 이 섬에는 사악한 자들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위 마족이라면 이런 제약을 힘으로 뚫을 수도 있겠지만, 저들은 아무리 봐도 마족 중에서도 어중이떠중이 급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어쨌든 기세가 흉흉한 걸 보니 우호의 목적으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는 지팡이를 그쪽으로 겨누었다. 그때 마족의 무리에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네놈들이 노바 님을 쓰러뜨린 거냐!”
“복수를!”
“복수를!”
‘얼레?’
포프는 잠깐 자기가 제대로 들었는지 델프링거에게 확인해본 뒤 노바의 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알아본 게 아니다. 분명 그는 인간이 맞다. 그런데 왜 처음 보는 마족들이 그를 구한다고 저 빈약한 전력으로 쳐들어온 걸까? 포프는 지팡이를 내리고, 그들이 접근해오는 것을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주인의 여유있는 태도에 속이 탄 델프링거는 아예 몸까지 바들거리며 계속해서 외쳐댔다.
-바보 자식아, 당장 도망쳐! 시조 브리밀과 그 사역마라도 저 정도 수의 엘프는 당해낼 수 없어!
“좀 조용히 해, 델. 아무래도 저들은 적이 아닌 것 같으니까.”
칼자루를 톡톡 두들기며 포프가 나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