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4화 인간이 만들어내는 평화
버언과의 싸움이 끝나고 지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버언이 말했던 대로
더 큰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위장된 평화였다.
“크로코다인! 어서 거기서 피해요!”
“그럴 수 없어! 저 녀석들이 상륙하면 그땐 끝이야!”
크로코다인은 델므린 섬의 해안에 우뚝 선 채 거대한 군함들이 다가오는 것을 노려보았다. 한 쪽밖에 없는 눈에 어마어마한 군함 세 척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저런 군함을 만들 수 있는 국가는 벵가나밖에 없다. 하지만 벵가나 단독으로 행하는 작전이 아니라, 전 세계의 뜻이 모인 작전이리라.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을 격퇴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애당초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쪽이 안전하게 후퇴하기 위한 전투였다. 각지에서 모여온 핍박받는 몬스터들과 마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워서 간신히 그들을 델므린 섬에 옮길 수 있었다. 허나 그걸로 한숨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완벽한 인간의 세계를 만든다는 구실로 저들은 인간이 아닌 것들의 최후의 안식처인 델므린 섬에까지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항복이나 타협 등은 있을 수 없었다. 저들의 목표는 일방적인 학살과 탈취일 테니까.
노바가 다시 외쳤다.
“조금 있으면 녀석들이 사격을 시작합니다! 일단 해안선을 초토화시킨 다음 본격적으로 상륙을 시작할 거예요! 우리가 노릴 수 있는 건 섬 여기저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의 수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만약 저 인원들의 상륙을 허용한다면 델므린 섬의 생명체 중 8,9할이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그런 상태로 간신히 저들을 쫓아내 봐야 2차 원정군이 오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역시, 인간 따윌 믿는 게……’
막 머릿속에 떠오르려던 생각을 곧 지웠다. 이제 와서 인간을 믿은 걸 후회한다는 건, 버언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동료들을 모욕하는 격이었다. 대다수의 인간은 분명 어리석고 약하며 이기적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존경할 수 있는 인간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런 자들이 이 자리엔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수왕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함성을 질렀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함성이 해안을 채우고 군함을 건너 대륙까지 뻗어나갔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료들에게 고하는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함성을 토해내며 그는 동료들을 생각했다. 타이, 흉켈, 라하르트, 마암, 아방…… 그런 이름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버언에의 승리와 맞바꾸어야 했던, 크로코다인이 처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던 인간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최소한 그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이 썩어빠진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는 그 날, 태양보다 더 눈부신 섬광 속에서 사라져가선 안 될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해안가에는 크로코다인 혼자 버티고 있었다. 표적이 하나뿐이라 수십 개의 대포가 그 하나만을 향해 쏘아졌다. 사격이 개시되자마자 크로코다인은 앞을 향해 뛰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바닥에 막 닿는 순간 첫 번째 포탄이 그의 옆에 떨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십 발의 포탄이 근처에 작렬했다. 온 몸에 투기를 두르고 있다곤 하지만 그의 몸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내달렸다. 거대한 그의 몸이 어느새 물 속에 잠겨가고, 그 주위로 핏물이 번져가는 모습이 노바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크로코다인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인간 측의 총사령관은 그가 바다 속에서 배에 공격을 가할 셈이란 걸 금방 눈치챘다. 대포로는 물 속에 공격을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적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갑판에 비치된 상자들을 열고 그 안에 든 둥근 기뢰를 아낌없이 배 아래로 투척했다. 수중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가져온 물건으로, 물에 젖지 않는 시한폭탄이란 말로 설명 가능했다. 기뢰를 뿌리고 약 15초 정도 지나자 물 아래에서 상당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이 정도면 그 튼튼한 녀석도 걸레가 되었을 거다.”
총사령관은 그렇게 확신했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될 것은 크로코다인과 노바였다. 그들이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이쪽으로서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텐데, 고맙게도 화력에 정면으로 노출되어준 덕에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제 해안선에 정박하며 대포로 주변을 쓸어버린 후 병력을 상륙시키면 그것으로 원정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노바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크로코다인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겼다.
“잊지 마라. 그리고 잘 봐둬라.”
큰 손을 노바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수왕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수왕의 혼의 외침을 기억해 다오.”
군함 아래에서 느닷없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소용돌이는 한 개가 아니라 두 개. 좌우에 있던 군함 두 척이 순식간에 거기에 휩쓸려 비틀거렸다. 이 정도로 거대한 군함을 비틀게 할 정도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생기는 게 자연적인 현상일 거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건 뭐냐! 기뢰가 폭발한 반작용인가?”
“아닙니다! 이 소용돌이는 다릅니다!”
중앙에 있던 총사령관은 눈을 부릅뜨고 좌우의 군함이 삐거덕거리며 점차 부서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을 뱃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노련함은 순간적으로 전진을 명했다. 이대로 두 배의 사이에 끼일 수도 있으니 일단 소용돌이를 피하는 게 중요했다. 구조작업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명에 따라 대장선은 돛을 있는 대로 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전진은 길지 않았다.
“따라옵니다!”
전망대 위에 있던 병사가 악을 썼다. 군함 두 척을 집어삼키는 것으론 모자랐는지, 그 소용돌이는 대장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대장선이 전진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게다가 좌우 어느 쪽으로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정진정명 수왕 크로코다인의 필살기 수왕격렬장. 소문으로만 들었던 전설의 필살기를 직접 목도한 총사령관의 입에서 떨리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신이시여……!”
잠시 후 두 척의 군함이 대장선과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살아남은 병사는 아무도 없었고, 그 막대한 손실 때문에 2차 원정군은 한동안 조직되지 못했다.
갈가리 찢긴 크로코다인의 시체는 불완전하게나마 회수되어 델므린에 묻혔다.
제로의 대모험 제14화
-인간이 만들어낸 평화-
모닥불이 타들어갔다. 브라스의 집에는 모처럼 북적대는 사람들로 생기가 피어올랐다.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잠자리를 준비하는 사람,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 등은 마치 이곳에 작은 마을이 생기기라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 아니 검이 있었다.
-제기랄. 내가 엘프 떼거리 옆에서 검집에 들어가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아마 브리밀이 이런 자리에 있었다면 오줌이라도 지렸을 거다. 그 녀석, 보기보단 소심한 놈이었으니까.
“헤에, 생각보다 인간적이잖아. 그 브리밀이란 작자, 하르케게니아에선 신 취급 받지 않았어?”
-업적이야 대단했지. 지금의 너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도 있었고, 무엇보다 계통 마법이란 걸 최초로 정립했으니까. 하지만 워낙 소심한 놈이라 내가 뭐라고 면박을 줄 때마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음침하게 뭔가 중얼거리곤 했었어. ‘델프 미워’ ‘다른 검을 만들걸’ ‘아아, 왜 난 검에다 남자의 성격을 부여한 걸까. 고분고분한 미소녀 속성으로 했어야 하는데’ 따위 말이지.
“브리밀도 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단 소리구나. 그런 점에서 블랙을 좀 본받지 그래?”
포프가 블랙 로드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지팡이가 낮게 웅웅거렸다. 델프링거는 그 모습에 기가 찬 듯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포프의 곁에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포프 님, 이걸 좀 드시겠습니까?”
한 소녀가 쭈뼛거리며 수프가 든 그릇을 포프에게 내밀었다. 열 서너살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머리의 마족 소녀였다. 그동안 잘 못 먹었는지 바싹 마른데다 푸석푸석해 보이는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릇을 들고 있는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건 단순히 기운이 없어서, 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잘 먹을게. 네가 먹을 것도 충분하지?”
포프는 냉큼 그릇을 받아들고 소녀에게 웃어보였다. 저만치에서 큰 솥 가득 수프를 끓이고 있는 걸 보니 여기 있는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라. 소녀는 수프를 먹기 시작하는 소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저쪽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은 마치 마족을 보고 도망치는 인간의 모습 같았다.
-켁. 입장 역전이잖아. 파트너, 너도 이 세계에서 꽤나 골치아픈 존재였나 보군.
델프링거가 아까의 수모를 잊지 않고 바로 복수했다. 소녀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마족 모두 자신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프는 마계의 신이라 불렸던 대마왕 버언을 꺾은 용사 일행이었던 것이다. 신을 죽인 자와 한자리에서 수프를 먹는다는 건 그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에게 공포와 외경은 느껴져도 적대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아까 노바를 도왔다는 게 호의적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수프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뭔가 끄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끼익 하는 바퀴 소리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로 나오자 포프는 입을 벌렸다. 벌린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노바가 뒤에서 미는 바퀴의자에는 두 다리가 없는 롱베르크가 앉아 있었다.
“롱베르크? 어쩌다……어쩌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포프가 그리로 뛰어갔다. 롱베르크는 평소처럼 싸늘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노바에게 얘기 들었다만, 정말이었군. 누가 보면 네 녀석이야말로 마족 아니냐고 생각하겠어.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지금 그런 말 할 때에요?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거에요!
사고입니까? 아니면……!”
“후자다.”
그는 바퀴의자 옆에 매달아놓은 술병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주당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팔에 붕대가 감겨있지 않은 걸 보니 거의 다 나았거나 완치된 것 같은데, 다리가 이 모양이라서야 마계 제일의 검사란 과거의 이름이 무색해진다.
술병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둔 후 그는 얼굴의 십자 흉터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그간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네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지만, 일단 여기의 일을 알려주는 게 우선일 거야.
노바, 자리를 옮기자.“
“네. 포프, 따라와.”
노바는 바퀴의자를 밀고 브라스의 집에서 멀어져 갔다. 포프는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예전 같으면 열 걸음을 걷는 사이 두어 마리의 몬스터 정도는 손쉽게 발견할 만큼 그 수가 많았는데 지금은 이만큼 돌아다니는데도 한두 마리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아까의 군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그 군대는 포프가 내쫓아버렸지만(포로로 잡아봤자 제대로 음식도 지급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그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군대가 조만간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이 섬에 사는 모든 것은 전멸할 게 뻔했다.
노바가 향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과거 아방이 드래고람을 사용했고, 이후 해들러와의 싸움에서 메간테를 사용해 지형이 뒤바뀐 곳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그곳은 온통 숲인 델므린 섬에 걸맞지 않게 햇볕이 잘 통하는 작은 초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초원 한가운데에는 조그만 무덤 수십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묘지……입니까?”
“그래. 이곳을 위해 죽은 모든 자들의 묘지다.”
포프는 천천히 묘지를 둘러보았다. 행여라도 낯익은 이름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무덤의 수는 많았지만 묘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중 유독 커 보이는 묘비부터 보기로 했다.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처음으로 본 묘비에는 벌써부터 낯익은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크로코다인……아저씨가?”
“크로코다인. 벵가나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과의 3차 싸움에서 사망했지. 백 문이 넘는 대포에 연속으로 직격당해 육신은 갈가리 찢겨졌어. 하지만 죽기 직전에 날린 수왕격렬장으로 연합군 또한 제대로 피해를 입었지.”
“치우……”
“그 녀석은 그나마 천수를 다하고 죽었지. 천수래봤자 그리 긴 수명은 아니었지만.”
“브라스 할아버지.”
“그 귀면도사는 2차 전투에서 죽었다. 호이미라도 걸어줘야 한다며 무리해서 크로코다인의 옆에 있다가 당했지.”
“힘……!”
“금주법으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가 투기를 갖는다는 것까진 좋았지만, 그만큼 그 생명이 소멸되는 것도 짧았어. 항상 격한 투기를 발산하는 만큼 생명의 소진도 빠르다고 경고했건만, 네 번째의 전투에서 무리하게 그랜드 크로스를 시전하다 생명이 꺼져 버렸지.”
“………………”
무덤을 한 바퀴 다 돈 후 포프는 다시 롱베르크의 앞에 돌아왔다. 롱베르크의 발치에, 포프의 신발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부들거리며 간신히 서 있던 포프의 몸이 끝내 허물어졌다. 50년이란 긴 간격에서 일어났던 추악한 진실과 맞닥뜨린 소년은 통곡하며 비명 같은 신음을 외쳤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그대로 들어라. 네겐 잔혹한 사실이겠지만, 넌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용사의 일행으로서 네 의무이고, 버언을 물리친 데 따른 네 책임이다.”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롱베르크는 통곡하는 포프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주었다.
용사 일행 중 가장 먼저 사망한 것은 치우였다.
치우의 본질은 쥐이고, 쥐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모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 주었다.
다음 사망자는 놀랍게도 흉켈.
부모님의 원수라고 외치며 달려든, 파푸니카 출신의 소년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한다.
분명 피할 수 있는 일격이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심장에 그 검을 맞이했다.
죽은 그의 얼굴은 매우 평화로웠다고 한다.
파푸니카의 현자 에이미는 현자 직을 내놓고 사라지고, 마암은 충격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훗날 소년이 감방 안에서 누군가의 마법공격을 받고 처참한 모습으로 사망한 게 발견되었지만 그 사건은 조용히 묻혀졌다.
은둔 중이던 마트리프가 사망한 사실은 뒤늦게 발견되었다. 시체를 장례시킨 후 그의 물품 일체를 파푸니카 왕실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그러는 사이, 마계에서 마족들이 점차 지상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구심점이었던 버언의 사망으로 인해 투쟁과 살육만이 넘치는 마계에서 더 살 수 없게 된 약한 마족들이 인간계로 귀순해 왔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있어 ‘마족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란 각인을 심어주었다.
모험의 시대는 이렇게 점차 저물어 가고,
다음으로 맞이한 또 하나의 죽음은 이제 전설이 끝났다는 것을 전세계에 선언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
변화는 용사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파푸니카의 여왕 레오나와 결혼한 타이. 그때 타이의 나이 열여덟, 레오나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모두는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 결혼을 축하했다. 델므린 섬에 은거하기로 결정한 크로코다인이나 힘, 브라스 등까지 올 정도로 그 결혼식은 굉장했다. 둘 다 한창 때의 나이였기 때문에 레오나는 곧 임신했고, 나라에는 번영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버언과의 싸움에 직접 참여했다는 이유로 파푸니카 왕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사실상의 맹주국 역할을 하게 된 것도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레오나 여왕의 임신 7개월 무렵, 타이는 갑자기 쓰러졌다. 원인은 심각한 육체의 쇠약. 원래 용의 기사란 신이 창조해 낸 최강의 생물. 다시 말하자면 ‘신이 상정한 범위 내’에서 최강의 힘을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신의 상정 범위마저 뛰어넘고, 용마인이란 굴레마저 벗어던진 채 버언과 싸운 것은 타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겨주었다. 그 사실을 애써 감춰왔던 용사에게 결국 갑작스런 최후가 찾아온 것이다.
타이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직후, 레오나는 아기를 유산했다. 죽은 아기의 시체를 끌어안고 사흘 동안 침실에서 농성을 벌이다시피 하는 그녀를 걱정한 동료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를 매몰차게 내쫓았다. 특히 인간이 아닌 동료들에겐 더욱 매정하게 대했다. 결국 타이의 죽음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던 전투들 때문이었고, 그 전투의 원인은 마족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냉철한 이성을 자랑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용사와의 사랑이었는데, 그 굴레가 떨어져나가자 파푸니카의 여왕으로서, 인간의 여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그녀의 앞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녀의 고결한 지성은 점차 관용을 잃고 한 방향으로 편중되어갔다.
매사에 치밀한 그녀가 진행하는 일이었기에 그것이 가시적으로 변했을 무렵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진행이 된 뒤였다. 게다가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인물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죽음을 맞이한 시점이었다. 라하르트는 타이의 죽음을 애도한 후 마계로 돌아갔고, 나머지 무리들은 델므린 섬에 은거했다. 버언과의 싸움에 참여했던 각 나라의 왕들은 대부분 죽고 2세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런 그들을 구워삶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카알 왕국의 아방이었지만, 그 역시 오십이 넘어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게 되어 잦은 투병생활을 반복했다. 레오나는 참을성있게 기다렸고, 아방이 54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플로라 여왕이 상심해 반 년 후 그 뒤를 따라간 직후 전 세계에 포고령을 내렸다.
-이 지상은 인간의 것이며, 마족이 지상에 있다는 것은 삼계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마족과 몬스터들은 1년 내로 모두 마계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지상에 버티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서 과거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희생들의 핏값을 받아낼 것이다-
전세계는 그 말에 환호했다. ‘지상은 우리의 것’ 그 얼마나 감미로운 말인가. 게다가 인간들은 아버지 대로부터, 아니 수십 대 이전부터 물려받은 마족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 있었다. 마계에서의 본성을 억누르지 못해 사고를 치는 마족들의 사례가 연일 알려지고, 대마왕 버언과 그 무리가 지상을 어떻게 날려 버리려 했던가 하는 사실들이 각 나라의 왕실을 통해 발표되었다. 인간은 지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고, 그 때문에 자신과 다른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곳에 온 마족들 대다수는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마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계에서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질서가 상실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마족들은 때론 저항하고, 때론 숨고, 때론 한탄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 행위도 레오나를 주축으로 한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숱한 마족들을 고문해 알아낸 마계와의 연결 게이트를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살의 장이 열렸다 -
포프는 털썩 주저앉았다.
“거짓말이야. 어떻게 레오나가…… 레오나는 마족들과도, 괴물과도 연합해 버언과 싸웠어요! 그들을 진심으로 동료라고 여겼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난 너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포프.”
롱베르크는 포프의 말을 자르며 얼음장같은 시선을 그에게 꽂았다.
“과거 동료였단 사실만으로 현실을 미화하려 하지 마라. 난 그녀가 그 포고령을 내렸을 때 오히려 쉽게 납득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잘 생각해봐라. 그녀는 왕족이면서도 늘 최전선에 서려 했다. 그건 그녀의 적극성과 집념을 잘 말해주지. 하지만 사람이 한 번 뭔가에 집중했다가 그만두게 되면 상당한 허탈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돼. 마족과의 싸움이 끝나고, 타이와의 짧았던 행복마저 끝난 그녀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선 다시 한 번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 명제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지상을 인간만의 것으로 만들자, 란 거지. 마침 마계는 혼란한 와중이고 지상에는 떨거지 급의 마족밖에 없으니 기회라 생각한 거겠지.“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주도권을 잡아서, 용사의 죽음으로 세계에서의 입지가 다소 흔들린 파푸니카를 다시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겠군요.”
정치엔 약한 포프였지만 그 정도 그림은 보여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정치라기보단 과거의 동료였던 그녀의 심리를 읽어낸 것에 가까웠다.
롱베르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각지의 마족과 괴물들이 학살당하고 내쫓겼지만 난 살던 곳을 떠나지 않았어. 당장 피할 곳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고, 그곳은 마계에서 떠난 뒤로 쭉 살아오던 곳이라 제법 애착이 가는 곳이었거든. 또 그때까진 설마 과거의 동료까지 건드리진 않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남아있었지.”
“하지만 그 년은 우릴 더 이상 동료로 여기지 않았어.”
그 말을 한 것은 노바였다. 거친 수염과 머리가 백발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혈기는 젊을 때에 비교해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난 스승님을 보호하며 대장장이 일을 배워나가고 있었지. 그리고 과거 ‘북의 용사’란 이름으로 활약한 댓가로 링가이어 왕국의 기사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쪽으로 ‘이쪽은 눈감아 달라’ 라고 부탁해 둔 것도 있었어. 그래서 스승님을 이 땅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나는, 그 년은 수면제를 탄 술을 선물로 위장해 우리에게 건네준 후 우릴 납치했어!“
“이런…… 맙소사.”
당장에라도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버리고 싶다. 아니, 그 전에 구석에 가 토하고 싶어진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지 못한 포프는 기어코 옆에 있는 나무로 가 토악질을 했다. 온갖 오물이 입을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었지만 그보다 더 추악한 어둠은 여전히 뱃속에 남아 있었다. 소년이 괴로운 숨을 헐떡이든 말든 노바는 격정에 못 이겨 계속 외쳤다.
“그 년이 용건이 있던 건 ‘마계의 전설의 명공’이었지. 그년은 날 인질삼아 스승님을 협박했어. 게다가 도망치지 못하게 스승님의 두 다리를 자르기까지 했지. 팔이 재생이 끝날 무렵 다리도 재생이 될 테니, 그 때 무기를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하라고 하면서 말야. 만약 메를르가 우리의 위치를 파악해내고 크로코다인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우린 평생 거기 갇혀있었을 거야. 그렇게 합류한 우리는 힘을 합쳐 마족들과 몬스터들을 이곳 델므린 섬으로 유인해온 거지.”
메를르란 이름을 듣자 포프의 마음 한구석이 쓰려 왔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지금 묻고 싶진 않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경우라도 그녀나 마암은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고, 최악의 경우 사망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최소한 그녀들만은 상상의 여지를 남긴 영역으로 보존하고 싶었다.
노바의 이야기가 끝나자 롱베르크가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레오나가 내게 요구한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기 때문에 난 쭉 고민해 왔다. 내 능력으론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신에게 도전해 보고 싶은 내 욕망이 자꾸만 날 부추겼단다. 날 그 감옥에 묶어둔 것은 노바의 목숨도, 잘려나간 두 다리도 아니라 그 물건 때문이었어. 지금 저 녀석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그 물건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입을 닦고 호이미 주문을 쓰자 몸이 좀 나아졌다.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롱베르크의 말을 경청했다. 전설의 명공이 ‘내가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라고 자신없어하는 물건은 흔치 않을 것이다. 예전 타이의 검을 만들 때도 ‘재료만 있으면 진마강용검을 능가하는 검을 만들겠다’며 호방한 자신감을 선보이던 그가 망설일 정도의 물건이라니. 포프는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레오나는 뭘 만들고 싶어했나요?”
그 말에 롱베르크는 엉뚱한 소릴 했다.
“힘은 죽었다. 하지만 그 신체는 다른 해들러친위대와 달리 그대로 남아 있어. 힘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레오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 그 시체가 그대로 남아있으리란 사실도 가장 먼저 생각해냈었지.”
“…………아아.”
대량의 오리하르콘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포프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롱베르크의 말은 바로 이어졌다.
“대마왕 버언이 지상을 날려버리기 위해 박아놓은 여섯 개의 기둥 위에는 검은 핵이 있지.”
검은 핵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위험천만한 물건이니 빙계주문을 걸어 방치해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 얘길? 하려던 포프의 동작이 정지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물건은, 검은 핵까지 재료로 쓰는 겁니까!”
“그래. 그녀가 원한 건, 버언과 같은 발상이었어. 그녀 스스로는 자신에겐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이 한심할 뿐이야.”
한 박자 쉬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롱베르크는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녀는 마계에의 억지력을 갖기 위해 검은 핵을 뛰어넘는 폭탄을 원했어. 그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공표하고, 마계가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낌새가 보일 경우 가차없이 마계에 그 녀석을 던져넣겠다고 하는 거지. 만약 그 물건이 완성된다면 단 한 발이 필라 오브 버언의 검은 핵 여섯 개와 맞먹는 위력을 가질 테니, 마계는 그야말로 날아가 버리겠지.”
“그걸 허락했어요?”
스케일이 너무 커 기가 찰 지경이다. 포프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물건이야. 물론 마계에 새로운 구심점이 생긴다면 그들이 지상을 정복하러 나설 여지는 있겠지. 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전 마계를 날려버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든다는 게 더 어리석은 생각이지. 그녀는 그걸 억지력이라 표현하지만, 애당초 써선 안 되는 물건은 처음부터 만들면 안 돼. 난 누군가가 그것을 써 주기를 바라며 무기를 만들지, 장식장에 걸어두고 ‘이 정도로 위력적인 검이 있으면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걸 원하지 않아.
게다가 저 깊은 지하에 있는 마계가 통째로 날아갈 경우 지상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하다는 점에서도 난 반대했지. 그녀는 끝까지 이건 억지력일 뿐이라고 우겨댔지만 말야.”
“그래서 저들이 델므린 섬에 쳐들어오는 거군요. 힘의 육체, 그리고 당신을 회수하기 위해서.”
“그렇겠지. 검은 핵의 회수는 이미 끝났고, 오리하르콘과 나만 갖추면 끝날 문제니까. 사실 ‘내가 이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란 생각을 들게 했다는 점에선 매력적이지만, 난 절대 그 물건을 만들 생각이 없어.”
딱 잘라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명공으로서의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버언의 유혹을 두 번이나 뿌리쳤던 남자다웠다. 그는 더 말하는 대신 술병을 툭툭 쳤다.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지. 이젠 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아, 예.”
“그럼 장소를 바꾸죠!”
노바가 주름진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그의 손이 포프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역시 전사답게 힘은 여전해 포프는 얼굴을 살짝 찡그려야 했다.
“모두 먹고 마십시다! 델므린의 주민들에게 포프를 소개시키는 자리를 가져야겠군요. 웃고 떠들며 오늘의 승리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요!”
‘승리……’
묘하게 과장스러워 보이는 노바의 태도를 보고 포프는 금방 눈치챘다. 오늘의 싸움은 델므린 쪽의 명백한 패배였다. 조금 늦게 합류한 마족들은 그렇다 쳐도 몬스터의 피해는 상당했으므로. 그것을 떠들썩한 술자리로 잊고, 재기를 다짐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활짝 웃으며 노바의 말에 동의했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서먹서먹하던 마족들도 이내 마음을 열고 포프와 즐겁게 어울렸다. 포프는 옆에 있으면 저절로 어울리고 싶어지는 유형이다. 말 못 하는 몬스터들도 간만에 먹고 마시며 그간의 피로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노바도 모처럼 어깨의 짐을 덜고 웃고 떠들며 포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롱베르크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잊고, 델프링거를 붙잡고 계속해서 대화했다. 과연 인텔리전스 소드란 게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블랙 로드를 포프에게서 받아들더니 둘을 비교해 가며 묘한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모닥불에 던져넣은 마지막 장작이 사그라들 무렵에야 잔치는 끝났다. 몬스터들은 숲으로, 마족들은 숲 외곽에 마련해놓은 거처로 향했다. 브라스의 집이 노바와 롱베르크가 거처하는 곳이었기에 남은 건 셋 뿐이었다. 만취해 고꾸라진 노바를 포프가 침상에 눕힌 후 롱베르크와 포프는 긴 대화를 나누었다. 노바는 문 밖에서 들리는 그 대화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중간중간 고성이 오가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속삭임도 섞여 있었기에 그가 간신히 잡아낸 말은 몇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만들어요……
……아니, 위장하는 거죠.………
………저와 같이…
…정말 만들어야 하는 건…………
....................................."
“그래! 그거라면 내 자존심을 걸 수 있겠어! 만들어주마! 내 육신을, 내 영혼을 모두 바쳐서라도!”
뭔지는 몰라도 스승님이 저렇게 환희하는 건 처음 본다.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띄우며, 노바는 간신히 유지하던 의식을 미련없이 수면의 바다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