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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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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15화 모험의 주인공


대마왕은 낮게 말했다.

“내기를 해도 좋다.”

그는 광마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두 손을 벌리며 타이를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네가 날 쓰러뜨렸다고 치자. 지상에 돌아간 널 과연 사람들은 반길까? 처음엔 반긴다고 착각할 정도론 환영하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광은 두려움으로 바뀔 거다. 대마왕조차 쓰러뜨린, 인간이 아닌 자가 바로 옆에 있다면 과연 편한 기분이 들까?”

“……”

“결국 그뿐이다. 용사란 허울은 곧 벗겨지고, 넌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인간계를 구한 용사인 주제에 인간을 피해 숨어서 자신의 이름이 잊혀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을 텐데?“

킬번이 초룡군단을 빌려 타이 일행을 습격했을 때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 타이는 문장의 힘으로 몇 마리나 되는 용을 잡아찢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구원받고도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 때문에 타이는 상처를 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했었다.
버언은 진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진지하게 그를 설득했다.

“용의 기사여. 내게로 와라. 힘이 정의라는 진리를 거부하고 평생 허우적대며 살 셈이냐? 네게도 힘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나와 이렇게 마주보고 서 있을 수 있는데도, 그 진리를 부정할 셈이냐?”

“…………네 말이 맞아, 버언.”

타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용사의 곁에 있던 레오나가 놀란 표정으로 타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말이 맞아. 분명 인간들은 날 미워하고 멀리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뭣이?”

“난……이 싸움이 끝나면 지상을 떠날 테니까.”

너무나도 담담한 그 말에 레오나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녀는 타이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있어, 동료들이 있어! 우리는 절대 타이를 버리지 않을 거야!”

확인하기 위해 타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타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 말을 긍정했다. 레오나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타이의 품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말은 타이를 조금이라도 안심시켜줄 것이다.

자신의 말은 이 싸움이 끝난 후 타이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것이다.

가슴 속에서 죄책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분명 인간들은 그를 멀리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과거 해들러를 물리친 아방 일행도 인간들의 경원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데, 하물며 인간도 아닌 타이에게 인간들이 어떤 시선을 보낼지는 뻔했다. 결국 타이의 괴로움은 치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달랠 수밖에 없는 성격인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대마왕의 말로 인해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얼른 지우며 레오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럴 때 포프라면 타이에게 무슨 말을 해 주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던 그녀는 대마왕이 타이가 아닌 그녀를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흠칫했다. 그 눈빛은 호기심도, 찬탄도 아니었다. 그저 경멸만이 가득한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밑바닥까지 흝어보고 있는 것 같아 레오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마왕은 광마의 지팡이를 다시 손에 쥐며 한탄했다.

“그래……결국 그런 길을 택했단 말인가.
인간이란, 참으로 업이 깊은 생물이구나……!“

그리고 싸움은 재개되었다.

 

제로의 대모험 제15화
-모험의 주인공-

 

델므린 섬에 백기가 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병사가 흥분해 외쳤다.

“백기입니다! 저 괴물들이 백기를 올렸습니다!”

“뭐야?”

헤런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난번 그 마법사 소년에게 당한 뒤 여러 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상당한 수의 마법사들을 새로 충원했다. 두 달이란 시간 동안 병력을 완전히 재편해 그 섬의 모든 생물들을 쓸어 버릴 각오로 이렇게 왔는데 싸우지도 않고 항복이라니.
동행하고 있던 현자 로이언이 혀를 찼다.

“싸우지 않고 항복이라. 역시 지난번 헤런 님이 입힌 피해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할 일은 별로 없겠군요.”

“현자님이 나서실 것도 없이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연합군이라 해도 그 맹주는 파푸니카. 그곳의 왕실마법사 단장인 로이언은 헤런보다 그 위치가 높다. 자칫 미묘한 외교적 마찰로 이어질 수 있기에 헤런은 로이언에 대한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신경썼다.
망원경으로 백기를 발견한 병사가 다시 외쳤다.

“해안가에 한 소년이 백기를 들고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항복의 사자라는 거겠지. 협상이라도 하고 싶나 보군. 그 바람을 들어주자.”

헤런의 명에 따라 보트가 내려지고, 열 명 정도가 델므린으로 향했다. 로이언이 의욕적으로 동행의사를 밝혀 그를 포함했다. 만약 저들이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라 해도, 이 인원만으로 충분히 그 함정을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보트가 해안가에 가까워지자 소년의 얼굴이 이들에게 보였다.

“저, 저놈!”

로이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말릴 틈도 없이 루라를 시전해 섬에 들어가려 했다. 하짐나 해안가에 착지하기 직전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치더니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졌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했던 헤런이 급히 노를 젓게 해 그를 구출했다. 코피를 흘리는 그를 일단 배에 눕혀놓은 뒤 대표들은 검을 뽑아들고 소년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네 이놈! 현자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사람이 멋대로 들어오려 한 게 잘못이죠. 미리 말했으면 결계를 해제해뒀을지도 몰랐는데.”

백기를 장난스럽게 붕붕 휘두르며 포프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로이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첨벙거리며 그에게 뛰어왔다.

“역시 그 사기꾼이 맞구나! 이번에야말로 지난 번의~!!”

“은혜를.”

“은혜를 갚겠다!”

포프의 딴지에 무심코 대답했던 로이언이 잠시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헤런과 그 부하들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는 걸 보자 짜증과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주문을 난사해 소년을 시체로 만들어버리려 하자 헤런은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펴면서 그를 제지했다.

“참아 주십시오. 우리의 일차 목적은 이들의 몰살이 아닙니다.”

‘그럼 이차 목적이 몰살이란 거네.’

자기 딴에는 자기가 머리를 굴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포프에겐 너무 빤한 수작이다. 그렇기에 포프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저희는 인간들과의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의 유감스러운 사태 때문에 인간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 물건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얘기가 빨라서 좋군. 그런데 드리다니? 롱베르크가 설마……”

“롱베르크 님은 그 물건을 이미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요.”

“거짓말할 생각이라면 지금 그만둬라. 아무리 그가 대단한 명공이라 해도, 그 정도 위력을 보이는 물건을 그리 쉽게 만들 리 없어. 이건 우리와 협상하면서 그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는 시도가 아니냐? 그를 불러라! 직접 말하겠다!”

“현.자.님. 여왕님의 건강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포프가 갑자기 로이언을 불렀다. 그는 씩씩대며 반응했다.

“건강해지셨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나!”

“현자님은 용사의 검이 얼마 만에 만들어졌는지 아시나요?”

“용사 타이의 검 말인가? 그걸 모르고서야 파푸니카의 현자 자격이 없지. 그 검은 롱베르크가 패자의 왕관을 녹여 만든 물건. 꼬박 하루 밤 하루 낮이 걸렸다고 알고 있다.”

현자답게 꼬박꼬박 대답은 잘 한다. 검을 만든 시간은 실제론 더 짧았지만 일단은 원활한 대화를 위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역시 현자님답게 방대한 지식을 알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용사의 검도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이 그런 간단한 폭탄을 몇 년씩 만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건……으음, 듣고보니 그렇군.”

전 마계를 날려버릴 만한 무시무시한 위력의 폭탄이었지만 그 원리가 딱히 복잡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검은 핵이란 물건 여섯 개를 합쳐놓았을 뿐인 간단한 원리이니 어쩌면 식후 차 한 잔 하는 시간으로 단숨에 만들었을 수도 있다. 여왕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납득이 가는 소리였다.

“그럼 목적했던 물건도 넘겨드릴 테니 이쪽의 요구도 들어주셔야죠?”

포프가 백기를 땅에 꽂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압도적인 전력차 따윈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 자신감에 헤런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을 잘 파악해라. 물건이 만들어진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허나 그걸로 협상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장 저 뒤의 전력들로 너희를 쓸어버리고 가져갈 수도 있다.”

“그래요? 저 대포로요? 저거, 사정거리가 얼마나 하죠?”

“상륙을 방해하는 걸 쓸어버릴 정도론 충분하지.”

“흠. 상륙해서 머릿수로 밀어붙이시겠다?”

히죽 웃더니 포프는 허리춤의 델프링거를 뽑아들었다. 이미 모두 검을 빼든 상태였기에 헤런은 당황하는 대신 사납게 웃었다.

“그걸로 뭘 할 셈이지?”

“칼싸움. 당신들이 좋아하는 걸로 승부해 보려구요. 마법 안 쓸 테니, 당신들 전원이 덤벼 보시죠?“

역시 저 소년은 미친 게 맞다고 로이언은 생각했다. 마법사는 어디까지나 원거리에서 승부를 보아야 한다. 단거리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싸우는 건 마법력이 떨어진 마법사나 하는 추한 짓거리일 뿐이다. 그런데 지팡이도 아니고 검으로 기사들에게 이기겠다는 헛소리를 저 소년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느낌이 꺼림칙했다. 그는 가만히 자신의 지팡이를 들었다. 한편 헤런은 요 녀석 봐라, 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녀석을 처리한 후 시체를 들고 가면 그 물건을 내주는 건가?”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건 제게 있으니까.”

“그래. 그럼 죽어라.”

가만히 서 있던 그가 느닷없이 질풍처럼 검을 베어갔다. 저 녀석이 진심으로 마법을 안 쓰겠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비가 안 된 마법사는 후다닥 해치우는 게 속편하다. 젊은 시절의 ‘북의 용사’와 비견할 만하다는 뛰어난 전투력에 두뇌까지 갖춘 링가이어 제일의 기사다웠다. 이 거리에서 휘두르는 그의 검은 기사도 받아내기 힘든데, 하물며 마법사 따위가 장난처럼 휘두를 검에 막힐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검을 포프는 가볍게 피했다.

“뭣?”

“시작한 건가요? 저기 뒤의 분들도 사양 말고 같이 덤벼요. 이 분 만으론 벅찰 테니까.”

“시, 시끄러! 너흰 절대 참여하지 마라!”

명예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그였지만 마법사의 도발을 참고 넘기는 건 지나친 굴욕이다. 자세를 다시 잡은 후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포프의 검이 그것을 받아냈다. 챙!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욱신거리는 게 느껴지자 헤런은 경악했다.

“너, 너…… 혹시 용사냐!”

아마 마법과 검을 동시에 쓰냐고 묻고 싶었던 거겠지. 어쨌든 어이없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 포프가 픽 웃어버렸다.

“제가 아는 용사는 타이와 아방 선생님 뿐이에요. 뭐, 노바도 굳이 분류하자면 그 계열이겠고. 난 마법사일 뿐이에요.
그런데 두 번이나 공격을 실패했는데, 뭐 느끼는 거 없나요?“

“느끼는 거라면…… 전원! 이 녀석을 둘러싸라!”

그의 호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포프를 포위했다. 이래서야 검 휘두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공간이다. 하지만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건 아니니 여전히 1대 1은 맞다. 포프는 새삼 헤런의 야비함에 박수를 보내며 검을 맞부딪쳤다. 헤런의 검이 튕겨나가자마자 그는 한 바퀴 돌며 검을 있는 힘껏 사방에 뿌렸다. 기사들의 검이 거기에 맞부딪치며 맥없이 튕겨나갔다.

“메라조마!”

기사들이 수수깡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다못한 로이언이 외쳤다. 하지만 그 지팡이 끝에선 어떤 불꽃도 나가지 않았다.

“어……어? 마햐드!”

재차 주문을 시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놀란 그는 급히 자신의 마법력을 체크해 보았다. 마법력에는 이상없고, 마법봉인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그는 바기를 시전했다. 바기는 산들바람처럼 맥없이 나아가 포프의 머리칼을 가볍게 휘날려 주었다. 평소와 달리 턱없이 약해진 주문을 보고 비로소 로이언은 이 기현상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결계다! 우린 모두 결계 안에 있어! 이 안에서 우리의 힘은 줄어들었어!”

“네, 정답~ 그럼 현자님, 섬 전체에 둘러진 이 결계의 정체도 알아보실 수 있나요? 이것도 파푸니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을 텐데.”

포프가 마치 학생처럼 짖궂게 질문했다. 로이언은 급히 자신의 기억을 뒤졌다. 상대방의 힘을 줄이는 결계라면, 그리고 그것이 역사에 기록된 것이라면 해당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프레이저드의……”

말도 안 돼, 하고 로이언은 작게 중얼거렸다. 파푸니카가 빙염마단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레오나 왕녀가 있는 버질 섬을 습격했던 프레이저드가 펼친 결계. 그 결계는 시전자를 제외한 나머지의 힘을 1/5로 줄여 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그 결계라면 기사들이 이 소년에게 몽땅 당한 것도, 자신이 고급 주문을 쓰지 못하게 된 것도 납득이 간다. 그는 더듬거리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걸 네가…… 펼친 겁니까?”

“당연한 말씀.”

포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치기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에겐 결코 단순하게 비치지 않았다. 결계라는 건 상당한 고위 마법사이거나, 아니면 결계 쪽으로만 매진한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로이언은 현자이긴 했지만 자신만 지킬 수 있는 수호결계만 겨우 펼 수 있었고, 그나마 결계를 편 동안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반면 이 소년은 이만한 결계를 섬에 둘러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카알의 국왕이었던 아방이 이 섬 전체에 마호카토르를 펼친 적이 있다지만, 로이언에겐 이 쪽이 더 대단해 보였다. 이런 대단위 결계를 펼칠 정도의 실력자는 현 시대엔 결코 없다. 그렇다는 것은 포프의 정체가 사기꾼이 아니라……
로이언이 무릎을 꿇었다. 포프에게 반격하려던 헤런이 그의 움직임에 놀라 검을 거두었다. 그는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더니 탁한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고 정중하게 말했다.

“정말, 정말…… 당신은 포프 님이십니까?”

“이제야 알아보네. 본인 맞아요.”

“맙소사……! 대마도사 님, 이전의 무례에 대해 용서를!”

로이언이 두 번 세 번 이마를 땅에 짓찧었다. 모든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정점에 섰던 대마도사 포프. 그 전설을 사기꾼이라 매도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앞머리가 엉망이 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들에게 외쳤다.

“검을 거둬!”

“그렇지만……”

“파푸니카를 적으로 돌리고 싶나! 그리고 자네들이 수백 명이 있어도 이 분은 당해낼 수 없어!”

‘파푸니카’란 말이 나오자 헤런이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검을 집어넣었다. 그와 그 부하들이 차례로 검을 넣고 현자의 뒤로 물러났다.
포프는 정신없이 절을 하는 로이언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이곳을 공격하라는 명령은 거둘 거죠?”

로이언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머뭇거리다 송구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제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왕님이 직접 정하신 문제라 오직 여왕님만이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미 승산이 없어진 싸움이다. 포프가 저 편에 가세한 데다 결계의 힘까지 있으면 수천 명이 있다 해도 저 해안선 안으로 들어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델므린 섬은 대형 선박이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함포사격할 수 있는 거리에도 한계가 있고, 그나마도 포프가 두고보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명령 또한 절대적이라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댔다. 포프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전투는 어쩔 수 없더라도 전투를 늦추는 건 가능하죠?”

“예. 가능합니다.”

“그럼 전투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후퇴가 아니니 그 정도는 관계없겠죠. 그 사이 전 레오나를 직접 만나 이 문제에 대한 담판을 지을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파푸니카를 향해 날아갔다. 이들과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결계의 위력을 보여줬으니 무턱대고 습격하지는 않을 테고, 당장의 전투는 피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롱베르크가 빙마탑과 염마탑의 대체물을 만들어준 데다 검은 핵 하나를 통째로 결계의 유지에 돌려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리 포프라도 이 정도의 대단위 결계를 쉽게 만들 순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레오나와 만나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한다. 대화할 준비도, 비장의 카드도 모두 마련되어 있다. 이 두 달 간의 공백은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으므로.
졸지에 소 닭 보는 신세가 된 로이언과 헤런은 서쪽으로 쏘아올려진 빛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에도 포프는 지난번과 같은 장소에 착지했다. 병사들이 놀라 그를 포위하자 포프는 바기로 이들을 날려버렸다. 앞을 막는 자들을 거침없이 뿌리치며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실내구조가 상당히 바뀌어 있어서 리리루라로 이동할 순 없으니 귀찮더라도 하나하나 뒤지는 게 낫다. 대가 약한 자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뒤로 물러났다. 빙글빙글 웃음을 머금은 소년의 얼굴은 간곳없고, 무섭게 가라앉은 대마도사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네 놈은 뭐냐! 무엇을 목적으로!”

“제길! 로이언 님만 있었어도!”

옆에서 뭐라고 시끄럽게 굴든 신경쓰지 않고 포프는 몽땅 날려버리며 실내의 대전에 들어섰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는 화려한 홀에는 몇 명의 신하가 옥좌를 향해 뭔가 보고하는 중이었다. 느닷없이 침입한 소년을 보자 그들은 당황해 위병을 불렀다. 위병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들도 날려버리려 손을 들자 옥좌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포프군요.”

그 목소리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였다.
포프는 몇 개의 계단 위에 설치된, 자신의 눈높이 위에 있는 옥좌를 바라보았다. 옥좌 앞에는 작은 커튼이 쳐져 있어 왕이 옥좌에 앉아있는 그림자만 보였다. 그 그림자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모두 물러나세요. 제 친구입니다.”

“폐하!”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물러나시오!”

당장에라도 여왕을 습격할 것처럼 살기등등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년을 두고 물러날 순 없었다. 그러나 여왕의 명은 절대적인 것. 그들이 갈등하는 것을 본 포프는 걸어가면서 바기를 시전해 이들을 문 밖으로 우르르 날려버렸다. 이어서 문잠그기 주문으로 문을 단단히 잠궜다. 어차피 위병들이 모두 뻗은 이상, 저 문이 열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계단을 모두 오른 포프는 커튼을 확 제쳤다. 난폭한 서슬에 커튼이 찌익 찢어졌다. 부드럽게 나풀거리는 비단 커튼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아마빛 머리를 가진, 왕녀답지 않게 씩씩하며 항상 올바르기 위해 노력했던 소녀. 아방의 마지막 제자이자  현재 인간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늙은 여왕이 얼굴의 잔주름을 펴며 웃었다.

“오랜만이네.”

“음. 오랜만.”

포프는 간단하게 인사하고 그대로 옥좌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왕 앞이라곤 믿을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겠지만 이들에겐 이런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정말. 난 변했지만,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로이언이 보고했을 땐 설마 했지만, 정말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명해야 하는 건 네 쪽이야.”

포프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그녀를 노려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프게 와 닿는다. 50년 전의 그녀였다면 이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여왕. 이 정도의 적대감은 무난하게 흘려보냈다.

“대충의 이야기는 들은 것 같군. 아마 롱베르크나 노바에게 들었겠지? 거기에 내가 덧붙일 만한 내용이 있을까?”

“없다면 그걸로 됐어. 단, 넌 네 행동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질 거라고 생각해.”

“꿈자리가 사나운 경험이라면 벌써 많이 경험했어. 이십 년 전부터 밤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지. 날 말리거나 따지러 온 거라면 그건 의미가 없는 일이야.“

“그런가. 이젠 의미없는 일인가.”

포프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자, 아까 보지 못했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옥좌 위, 손이 닿지 않을 만한 높이에 화려한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그 검 역시 그에겐 낯익은 것이었다.

“추억의 물건이네. 저 검은 지금까지 새 주인을 찾지 못했지?”

“그래. 저 검의 주인은 타이 뿐이야. 타이가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도 하지.”

지금은 떠나간 남편을 그리는 듯 레오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포프도 말없이 타이와의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타이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지금의 평화. 비록 그 본질이 거짓된 평화라 할지라도, 그와 그녀가 공유하고 있는 추억은 틀림없는 진짜였다. 레오나는 눈앞의 포프가 아닌, 그 너머에 있는 추억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때는 모험의 시대였어. 나쁜 마왕이 설치고, 용사 일행이 일어나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였어.
그런데 어째서 마왕은 용사 일행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걸까? 꼭 부하들을 먼저 보내 용사의 실력을 향상시켜주고, 그렇게 해서 성장한 용사에게 당할 뿐이잖아?”

“그건……”

준비했던 말이 날아가고, 포프는 그녀에게 휘둘려 더듬거렸다. 소년의 당황한 표정을 본 레오나가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가르쳐 줄까? 그건, 모험이라는 이야기를 완결시키기 위해서야. 모험이니까 마왕은 용사의 성장을 지켜봐야 하고, 결국 그에게 당할 수밖에 없어. 그래, 우리가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우린 정말 마법같은 시대를 살았잖아? 생각해봐. 타이가 델므린 섬에서 나온 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우린 대마왕의 수천 년에 걸친 계획을 철저히 부숴버렸어. 만약 이게 우리들이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서 본 내용이었다면, 그 이야기가 사실을 써 놓은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레​오​나​.​”​

“계속 들어, 포프.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 지는 짐작하고 있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넌 오십 년 전의 네 모습 그대로이고, 이런 나를 보면 반발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 만약 오십 년 전의 내가 여기 온다 해도 지금의 날 거부할 거라 생각해.”

“그걸 알면서 왜!”

“그건 말이지,
모험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야.”

여왕의 눈빛이 달라졌다. 꿈꾸는 듯한 표정이 사라지고, 오십 년을 넘게 한 자리에서 나라를 통치한 군주의 매서운 표정으로 변했다.

“상식보다 기적이 통용되던 그 시대는 용사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어. 우린 용사 타이의 대모험에 동참할 순 있었지만, 모험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어.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해. 현실이 어땠는지 말해 줄까?
타이를 잃은 뒤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날 일으켜세운 건 메를르의 신탁이었어. 천계가 버언의 혼을 봉인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벨더의 봉인이 약해져 있다는 내용이었어. 버언과 벨더 모두 지금의 신보다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둘을 동시에 봉인하는 건 천계로서도 무리라더군. 그래서 천계는 우리에게 귀찮은 짐을 떠넘긴 거야. 봉인이 곧 풀릴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여차하면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라, 라는 거지.
하지만 벨더가 봉인에서 풀려난다 한들,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거야? 용의 기사는 이 세상에 없고, 버언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죽거나 약해져 있었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새로운 용사를 찾는 게 빠를까, 아니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빠를까?“

갑작스런 얘기에 포프는 충격을 받고 할 말을 잃었다. 그녀 또한 여태껏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소리였다. 벨더의 봉인이 조만간 풀린다는 건 그녀와 메를르, 아니 메를르가 노환으로 죽은 이상 그녀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노바나 다른 이에게 누설할 게 두려워 롱베르크에게도 끝까지 숨겼던 괴로운 사실을 그녀는 포프에게 마음껏 토해냈다.

“모험이란 용사가 있어야 성립할 수 있어. 용사는 용기를 가지고 기적을 만들어내지. 해들러와 맞선 아방 선생님이 그랬고, 버언과 맞선 타이가 그랬어. 내가 듣기론 벨더와 싸울 땐 바란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했지. 하지만 더는 없어. 용의 기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테고, 인간의 힘만으론 버언과 대등한 존재인 벨더를 상대할 수 없다구!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어.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를 마족과 괴물을 이 세상에서 소거하고, 인간만의 지상을 만들어 결속을 공고히 하는 것. 그리고 이 지상에 마족이 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하는 것. 난 이 두 가지를 위해 내 평생을 바쳤어.
자, 포프.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로 온 용사의 친구여. 말해봐. 이런 내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내 행동이 정의라고,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해 줄 텐가?“

“…………”

“말해줘, 포프. 제발……”

대답이 없자 여왕이 안절부절못하며 포프에게 애원했다. 이제까지의 냉철함이 일순간 벗겨지며,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포프에게 보였다. 포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너​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어.”

포프가 씹어내듯 조각조각 말을 뱉어냈다.

“그래.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여왕은 만족한 듯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고,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게 아니란 걸 증명받고 싶었다. 아방이 살아있었을 당시에 스승인 그에게라도 진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곤 했다. 용사 출신인 아방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봤자 그녀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이상론을 들먹일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포프에게 인정을 받자 지난 수십 년간 느끼지 못했던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포프는 그녀의 중얼거림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응. 틀리지 않았어. 과연 레오나야. 그런 큰 비밀을 유지하면서 세계를 하나로 묶고, 나아가 마계까지 억제하려 하다니. 지금의 넌 명실공히 인간의 여왕이야.”

“포프……?”

중간부터 어조가 변한 것 같아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안도감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아까까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포프가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십년 전, 최후까지 절망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소년의 눈은 그가 채 입으로 말하지 못할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넌 인간의 여왕이야.
인간만의, 인간을 위한 여왕님.
넌 틀린 게 없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 인간이야!”

“맞아. 난 인간이야. 다만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닐 뿐이지.”

“……”

자신은 그녀를 책망할 수 없다. 오십 년의 세월을 반칙으로 뛰어넘은 자신이, 그녀의 긴 생애의 끄트머리만 보고 전 생애를 모욕할 수 없다. 그녀에게 이제 와서 델므린이나 다른 나라에서의 학살극의 책임을 묻기 이전에, 벨더를 염두에 둔 그 대응이 과연 적절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대응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감탄이 나올 만큼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이었다. 그로 인해 희생될 수많은 생명을 단지 활자로만 여긴다면, 틀림없이 명군주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포프는 그녀의 길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레오나가 수십 년간 지켜온 그 고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도.
인간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를 막기 위해, 동시에 정보의 유출로 인한 전세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수십 년의 고독을 견딘 레오나. 포프는 왕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문제를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는 건 포프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다만 레오나는 앞으로도 저 위치에서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야 하고, 자신은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주기는커녕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포프는 조용히 손을 옆으로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돌연 일그러지고, 새까만 암흑의 균열이 나타났다. 과거 버언이 광마의 지팡이를 보관하던 것과 마찬가지의, 공간의 틈에 물건을 보관하는 주문이었다.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꺼내자,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수정구 정도 크기의 둥근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으며 그는 레오나에게 물었다.

“벨더의 봉인은 정확히 언제쯤 풀리는 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메를르는 내가 죽는 해에 그 봉인이 풀릴 거라고 했지.
‘파푸니카의 여왕의 별이 떨어지며 용왕의 봉인을 부순다’란 신탁을 그녀가 해석해 내린 결론이었어.”

“그런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다. 포프는 슬픔을 느끼며 그 공을 옥좌 옆 테이블에 살며시 놓았다. 그게 무슨 물건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레오나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물건이군. 완성한 건가…… 발상 자체는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워질 정도로 유치했지만, 그 남자는 잘도 완성시켜 주었어.
포프, 네가 이 물건을 가져왔다는 건 나와 교섭하기 위해서겠지. 아마 델므린 섬을 가만히 놔두라는 것이려나? 그거라면 응해줄 수 있어. 대륙의 마족은 이제 전부 솎아냈고, 델므린 섬에 모두 모였으니 감시하기도 편할 테니까. 만에 하나, 벨더가 부활한다 해도 그의 전력이 될 수 없을 만큼 약체화시키는 것도 성공했고.“

역시 포프가 직접 온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오히려 더 자세하게 말해줬기 때문에 포프는 그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고 다른 용건을 꺼내들었다.

“이 폭탄은 아직 미완성이야.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또 다른 재료가 필요해.”
 
“오리하르콘과 검은 핵으로도 부족한가?”

“롱베르크는 제어부의 불완전성을 언급했어. 검은 핵의 사악한 기운을 억누를 촉매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 물건이 뭔지 알겠어?”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옥좌의 옆에 달린 작은 단추를 눌렀다. 오른쪽 팔걸이 부분이 덜컥 열리더니 작은 서랍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포프는 말없이 응시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핑 도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구나.”

서랍 안에는 세 개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선대 용사 아방의 제자임을 나타내 주는 휘성석 목걸이. 겉보기에는 별 특징 없는 수수한 목걸이였지만 그것이야말로 용사와 그 일행의 모험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더불어 사악한 힘을 막아주고 마력을 저장하는 최고급 아이템이기도 했다.
레오나는 그 목걸이 위에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올려놓았다. 포프도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벗고, 네 개의 목걸이에 그것을 합쳐 들었다. 둘 다 어째서 마암의 목걸이까지 이곳에 있는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걸로 됐어. 롱베르크가 이 물건을 마무리해 줄 거야. 단, 이 물건을 쓰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어. 가동하는 데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하니까. 그러니 내가 갖고 있다가, 써야 할 때가 왔을 때 쓰겠어. 그 시점을 네가 판단하면 난 따르겠어.”

귀로는 포프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목걸이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건성으로 대답한 뒤 다섯 개의 목걸이가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목걸이가 마치 최면을 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오나는 자신도 모르게 독백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목걸이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 것은.”

그녀는 늘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미나카토르의 계승의식에서 밝힌 대로, 악을 무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인간들이 지금까지 계승해온 것들을 지키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목걸이는 더 이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모험의 시대가 끝난 좋은 증거라고 말한다면 그건 궤변일 것이다. 목걸이는 주인의 영혼에 반응하는 물건이므로. 그렇다면 변한 것은 목걸이일까, 아니면 그녀일까? 소리없는 질문에 답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포프가 목걸이를 챙겨들자 레오나는 서랍 아래 깔려있던 봉투를 건넸다.

“이건……?”

“마트리프 님이 네게 남긴 유언장이야. 은거하고 계신 동굴 안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어.”

“……그런가. 스승님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믿고 있었구나.”

편지의 굳은 봉인은 레오나가 그 편지에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봉인을 뜯고 편지를 열었다. 스승 특유의 악필을 본 순간, 스승의 목소리가 마음 속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포프 보거라.
네 녀석이 살아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널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금주법을 난사한 주제에 백 살을 넘겼다는 건 뻔뻔한 놈이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꼴이니, 이젠 정말 가야 할 때 같다.

역시 괴짜 스승님다웠다. 눈물이 맺힌 눈과 달리 입가에는 웃음이 살짝 걸쳐졌다.

-난 해들러를 물리친 후 인간의 추악함에 질려 은거하게 되었다. 아마 네가 되돌아오더라도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 과정에서 네가 인간에게 실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다.
하지만 포프야.
난, 네가 나와 다른 길을 걷길 바라고 있단다.
그런 상황에 처하고, 사람들이 네 힘을 두려워하더라도, 거침없이 전진해라.
가로막는 건 뻥 걷어차버리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놈들을 날려버려라.
당당하게 네 존재를 드러내고,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숨지 말거라.
일찍이 나 마트리프가 보인 소심한 짓거리를 네가 되풀이해선 안 될 말이다.
또한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타이도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을 테지.
잊지 마라. 넌 용사의 동료이고, 용사가 가는 길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도와주어야 한다. 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용사의 길은 끝났어요, 사부님……
전 말씀하신 걸 지킬 수 없었어요.’

눈물이 뺨을 적시고 편지지를 적셨다. 낡은 편지지는 눈물의 무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룩을 사방에 남겼다. 눈물을 황급히 닦은 후 얼마 남지 않은 내용을 마저 읽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신의 눈물에 관한 것이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슬라임이 신의 눈물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것을 안 순간부터 그 녀석을 순수하게 동료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아 말하진 않았다.
버언이 신의 눈물을 파괴했지만, 그건 영원한 재생성을 가진 도구이기에 몇십 년에 걸쳐 재생된다.
테란의 고문서에 그 내용이 숨겨져 있었더구나.
그 장소는 카알에 있는 파사의 동굴 최심부.
그곳에서 재생을 마친 신의 눈물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단다.
네가 돌아왔을 때쯤 재생이 완료되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 보거라.
난 더 이상 네게 남겨줄 것이 없으니(마트리프의 목걸이를 만들어놓을 걸 그랬구나) 이것을 내가 남기는 마지막 선물로 받아줬으면 좋겠다.

그럼 잘 먹고 잘 살아라.
스승을 뛰어넘은 건방진 녀석아,
항상 모든 면에서 날 뛰어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라.
                                              -마트리프가

“스승님……! 마트리프 스승님…………!”

편지지를 와락 구기며 포프는 참았던 눈물을 내쏟았다. 편지지가 젖으며 엉망이 되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오열했다. 마법사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지도해 주었던 대마도사 마트리프는 죽는 순간까지 포프의 스승으로서 조언과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다른 이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것보다 더욱 사무치게 다가왔다. 시그마와의 싸움에서 대마도사임을 선언한 후, 싸움이 끝나면 제일 먼저 스승에게 달려가 자신도 대마도사가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다. 스승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스승이 홀로 고독하게 죽는 것을 방치해야 했다.
오열하는 포프의 모습은 레오나에게도 찡한 감정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감정이 자라나는 것을 억제했다. 자신은 포프와 다르다.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동료들까지 희생시킨 바 있는 그녀가 이제 와서 그 죽음을 애도할 순 없다. 그래서 스승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포프의 모습은 차라리 부럽기까지 했다.
포프는 한참을 통곡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목걸이를 챙기고, 아까의 은빛 구를 다시 공간에 쑤셔넣었다. 이제 루라로 이 자리를 벗어나면 된다. 아마 레오나가 사망할 때까진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도, 그녀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옛 동료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포프.”

그녀의 앙상한 두 손이 포프의 옷깃을 붙잡았다.

“내게, 당신의 빛을 보여줘.”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레오나는 타인에게 애원했다.
포프는 자신의 목걸이를 꺼내들고 조용히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녹색의 은은한 빛이 사방에 포프의 손에 퍼졌다. 과거 무수한 착오와 실패 끝에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용기의 빛. 그 빛에 시선을 둔 채 포프는 말했다.

“이제 네 개의 목걸이는 빛나지 않아.
하지만, 내 목걸이는 아직 빛나고 있어.”

레오나는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빛은 정말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얻은 것이야.
난 절대 이 빛을 꺼트리지 않겠어.

늙어빠진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고, 혈관을 돌던 차가운 피가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그녀는 이미 꺼져버린 자신의 목걸이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모험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 네 말대로일지도 몰라. 세월이 흘렀고, 많은 사람들과 작별해야 했으니까. 용사와 그 동료, 그 적 모두 지금은 이 세상에 없어. 네가 타이의 대모험이라 말했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아직 내가 있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내가 있어.
아직, 내 모험은 - 끝나지 않았어!“

여왕의 망막 너머,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얼음 송곳이 포프의 빛나는 모습에 녹아내려갔다.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고 지내온 오랜 세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옥좌와 왕관의 한기가 이제야 시리게 느껴졌다. 온기가, 온기가 필요하다 - 라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몸은 포프의 품 안에 폭 안겨져 있었다.

“잘했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정말 고생했어.“

레오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면서, 더 이상 흘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여왕의 팔이 포프의 등에 둘러졌다. 그 앙상한 팔은 가냘프게 그 등을 움켜잡았다. 포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는 희미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띄엄띄엄 토해냈다.

​“​고​마​워​…​…​고​마​워​,​ 포프.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누군가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소리내어 마음껏 울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철혈이라 불리는 인간의 여왕이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한기를, 그리고 포프가 그녀에게 가졌던 거리감을 흔적도 없이 녹여냈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신하들이 도끼를 동원해 문을 부수고 우르르 들어왔다. 드넓은 대전에는 레오나 여왕이 홀로 서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열려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도망갔습니까?”

시종장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여왕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 질문에 답해 주었다.

“아니. 그는 모험을 떠났다.”

“예에?”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시종장과 신하들이 당황했다. 누군가가 내의를 불러 여왕님의 이상을 확인해야 한다고 외치는 게 레오나의 귀에 들렸다. 자신은 확실히 이상해진 건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쿡쿡 웃었다. 그 웃음은 점점 커져 대전을 가득 채워 갔다. 배까지 움켜잡고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어준 상대를 향해 여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포프. 넌 네 길을 가.
내가 죽어도 계속될 네 모험을, 포프의 대모험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봐 줄게.‘
'포프의 대모험'이란 말을 싫어하는 분도 있지만,
이 팬픽 안에서만큼은 저 말이 정당화될 수 있도록
특히 신경써서 적었던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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