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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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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18화 인간을 위한 만가


호킹스의 결단은 하르케게니아에 퍼질 전란의 불꽃을 20년은 후퇴시켰다. 동시에 가증스런 공화주의자들의 야욕을 분쇄하고 알비온이 신성한 왕국으로 재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브리밀이여, 그의 혜안을 칭송하소서!
                                         - 트리스테인 재상 마자리니의 회고록 중 -  

알비온의 7만 대군이 트리스테인의 웨일즈 왕자에게 귀순을 요청했다.
이 사실은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비온이 연합군을 궤멸시킨다는 것은 확실했고, 이로 인해 트리스테인과 게르마니아가 알비온에 흡수되면 갈리아와 양강 체제로 갈 거라는 게 여러 군사 전문가들의 추측이었다. 그런데 알비온이 그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항복할 줄이야.
반면 고개를 끄덕인 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웨일즈. 그는 적의 총사령관이 호킹스란 얘기를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유능하고 청렴하며 충성심이 강한 장수였기에, 여태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에게 돌아서기 위해 크롬웰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라고 공식적인 견해를 밝혔다. 호킹스가 귀화를 요청한 대상이 웨일즈인만큼, 그 역시 그 정도의 도량을 보여야 했다. 과거 알비온을 탈출할 무렵 호킹스의 지휘로 왕정이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사실은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물론 언젠가 꺼내들어야 할 테니 절대 잊어버리진 않은 채.
망명자가 다른 나라의 군을 지휘하면 모양이 좋지 않다는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트리스테인에 남아 있던 왕자는 급히 최전방으로 달려와 7만의 군을 인수받았다. 이 군은 정식으로 망명정부의 군이 되었으니 그가 지휘하는 게 마땅하다. 그는 호킹스를 보자마자 감격해 달려와 끌어안고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 있는 참모들을 모두 거두어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리고 연합군과 합쳐 다시 알비온으로 진격했다. 알비온의 구석구석까지 훤히 알고 있는 그의 군은 이제야말로 더 이상의 장애물 없이 알비온에 진입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착한 선발 부대는,
한참 회의중이었던 듯 자리에 앉아있던,
크롬웰과 그 각료들의 목없는 시체들을 발견했다 -

 

제로의 사역마 제18화
- 인간을 위한 만가 -

 

죠제프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생각에 잠겼다. 포프가 극한 상황에서 7만 대군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설마 그런 식으로 일이 꼬여버릴 줄은 몰랐다. 그 위세좋았던 대군이 난데없이 항복을 할 줄이야. 덕분에 기껏 사용했던 비보, 엔드 발리의 반지도 괜히 쓴 셈이 된다.
일단 알비온의 패배가 확실시된 이상 입막음을 해야 할 것 같아 사역마를 그리로 보냈다.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한다. 아직 그에게는 두 수 정도 남아 있었으니까.

“왕이여. 무슨 생각을 하는가?”

모자를 쓴,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남자가 왕에게 물었다. 그 모자가 벗겨진다면 이곳에 있는 경비병들의 태반이 당장 궁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자 안에는 인간들에게 금기시되는 길고 뾰족한 귀가 있었으니까. 이 궁전 안에서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죠제프 하나뿐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른한 말투가 엘프의 귀로 들어갔다.

“두 개의 패가 있다. 하나는 작고 확실하며, 하나는 크고 불확실하다. 자네 같으면 어떤 걸 쓰겠나? 아니면 둘 다 쓰겠나?”

“안 쓴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이로군. 그걸 쓰는 목적을 알아도 될까?”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수는 적지만 최정예로 이루어져 있겠지.”

“그렇다면 둘 다 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패를 아끼다 당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냐. 엘프도 의외로 화통한 면이 있군. 그러면 너와 요르문간트 동반출격으로 결정이다. 가는 거다, 요르! 아니, 이건 강아지 같은 이름이니 풀 네임으로 불러야 할까. 하지만 자네가 멋진 별명을 지어주길 이 죠제프는 죠제프는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 ”

그 패라는 게 자신과 거대한 골렘을 말하는 것이었나? 엘프 비다샤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횡설수설하는 왕을 잠시 노려보다 곧 부질없는 짓임을 알고 시선을 돌렸다. 왕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눈에 거대한 강철 골렘이 들어왔다. 죠제프가 비밀리에 제작중인 이 골렘은 완성되는 순간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엎는다고 하던데, 과연……? 하지만 비다샤르는 저 골렘보다 저 왕 쪽이 상대하기 훨씬 껄끄러울 거라는 생각을 꺾지 않았다.


갑작스런 크롬웰의 죽음으로 알비온과의 전쟁은 허무하게 그 막을 내렸다. 연합군이 알비온 전역을 점령하기 직전, 갈리아의 대함대가 치고 올라온 것은 연합군의 힘을 쭉 빠지게 했다. 어쨌든 현재로선 갈리아가 가장 강대국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으니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생색만 냈다고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웨일즈 왕자가 직접 군을 이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알비온은 순식간에 연합군과 갈리아의 각축장으로 변했을 수도 있으리라.
회담은 일주일 후에 열리기로 했다. 갈리아 왕이나 다른 연합국들의 왕이 이곳에 와 여독을 풀고 본격적으로 회의를 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어쨌든 당장의 전쟁은 끝났고 공화주의자들은 분쇄되었다. 알비온 군의 주력이 웨일즈에게 일찌감치 넘어간 터라 군부에서 솎아낼 자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행정관료 쪽에 공백이 상당히 많이 생겨서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웨일즈와 함께 고락을 함께했던 망명정부의 귀족들은 잽싸게 원래 위치로 돌아가 반란분자들을 색출해내 사형시키고 나라를 원래의 모습으로 바꿔놓기 위해 애썼다. 공화정부는 왕정제에 비해 특별히 평민들에게 더 나은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불어닥치는 피바람을 무심히 지나쳤다. 마침 계륵과도 같은 존재가 된 호킹스가 홀연히 사라짐으로써 귀족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

알비온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앙리엣타 왕녀였다. 그녀는 웨일즈와 진한 포옹과 입맞춤을 주고받아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이제 둘은 당당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눈뜨고 앉아서 앙리엣타를 놓친 게르마니아 왕이 딱하다는 동정론은 이들의 애정 앞에서 가볍게 무시되었다. 망명의 아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나라를 되찾은 왕자, 그리고 그런 그를 꿋꿋하게 보좌해 준 공주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 대륙에 퍼지는 아름다운 미담이 되었다. 브리밀 교의 중심지인 로마리아에서도 축전을 보내 둘의 아름다운 미담을 축복해 주었다.

이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로 남을 두 사람의 모습이 승전 기념 파티에서 사라진 것은 늦은 밤이었다. 기묘한 주문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되돌려놓았다는 이유로 영웅이 된 기슈가 안에서 주정부리는 소리가 들려 둘은 풋 하고 웃었다. 이걸로 간신히 공식행사는 마무리지었고, 이제 왕들과의 회담만 끝내면 된다. 말하자면 그를 위한 전초전인 셈이었다. 왕족에게 파티와 회의는 음식이 차려져 있느냐, 차려져 있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밀한 각축과 심리전은 동일하다. 신경이 굵은 두 사람도 며칠간 계속된 파티로 심신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지치든 말든 한참 불타오르는 중인 두 사람의 애정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문앞에 시립해 있던 시녀를 물리치고 직접 문을 열어 들어간 후, 뜨겁게 키스를 나누며 침대로 향하던 두 사람은 문득 찬 바람을 느끼고 창문을 보았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지상보다 가까운 밤하늘의 아름다운 모습이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쌍월의 은은한 빛은 창틀에 앉아 있던 사람의 그림자를 두 갈래로 늘어뜨렸다. 전쟁 직후라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게 경비되는 왕궁에 아무렇지 않게 숨어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둘의 반응은 약간씩 늦었다.
상대를 먼저 알아본 것은 앙리엣타 쪽이었다.

“포프? 포프 맞나요?”

“……”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창틀에서 엉덩이를 뗐다. 따뜻한 방에 그가 막고 앉아 있던 찬 공기가 밀려오며 그의 망토를 가볍게 펄럭였다. 앙리엣타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살짝 그의 손을 보았다. 양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걸 보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헥사곤 메이지 앞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다는 건 어떤 상황이든 간에 썩 마음편한 상황이 아니겠지만, 그 메이지도 무방비라면 분명 충돌할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보니 등 뒤로 은으로 만든 화려한 단검을 차고 있었지만, 마법사에게 단검이란 평민에게 지팡이를 쥐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무기로서의 뜻은 없을 것이다. 잠시 계산해보던 앙리엣타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일까.
자신은 지금 포프를 ‘적’으로 규정하려 하고 있다 -
그 사실이 막 인지될 무렵, 바람을 가르며 다가온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꺅!”

포프의 손에 얻어맞은 왕녀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맞고 나서도 자신이 왜 맞았는지 모르는지 멍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이유를 모르는 웨일즈가 급히 다가가 포프를 제지하려 했다.

“무슨 짓이냐, 포프! 왕녀가 네게 무슨 잘못, 컥!”

그는 망설이지 않고 웨일즈의 명치께에 주먹을 꽂았다. 이제 룬의 보정도 사라져 포프의 주먹이 그리 센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헤쳐온 아수라장 덕분에 훈련받은 병사 정도의 수준으로 싸움 기술을 알고 있었다. 급소에 일격을 맞은 웨일즈는 잠시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바닥에 엎어지려 했다. 왜? 라는 의문과 경악에 찬 그 얼굴을 향해 포프는 다시 주먹을 날렸다. 퍽! 코에 주먹이 꽂히며 웨일즈가 몇 걸음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만해요! 무슨 무례를 저지르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앙리엣타의 손이 치맛자락 사이에 끼워놓은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것으로 포프를 겨누면서도 그녀는 포프가 냉정하게 생각해서 여기 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냉정한 머리로 생각해서 왔다면 지팡이를 놔두고 왔을 리 없으니까. 일단 진정시킨 후 얘기를 해 보고, 마법은 그 뒤에 써도 될 것이다. 왕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사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그때 포프가 하얗게, 정말 텅 비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얗게 웃으며 중얼거린 두 마디의 말은 그런 그녀의 충동을 날려버렸다.

“타르브, 루이즈.”

“…………!”

포프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이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대화 따윌 하자고 온 게 아니었다. 전멸해버린 타르브에 무슨 연유가 있는지는 잘 몰라도, 루이즈에 대해서만 하더라도 포프에겐 이곳으로 올 수많은 이유가 생긴다. 긴 드레스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려주는 게 그녀에겐 그나마 다행이다.

“타, 타르브? 거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저도 그곳의 일은 정말 안타까웠어요. 하지만 우린 그곳을 도울 수 없었어요. 알잖아요? 트리스테인은 그때 고립되어 있었고, 병력을 재편성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걸.”

그녀의 말이 거짓인 건 아니었다. 알비온이 제일 먼저 공격한 곳은 평야가 있어 식량의 보급과 병력의 주둔이 용이한 타르브 일대였다. 알비온은 빠져나간 주민들이 수도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그들의 공화정이란 평민에 의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게 아니라 그저 새로운 세력들이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이란 이름의 왕정을 세운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평민을 학살한다고 해서 특별히 불명예스러워지는 건 아니었다. 점령지의 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드는 건 하르케게니아의 거의 모든 전쟁에 있어서 승자의 권리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 포프가 살던 곳에는 인간끼리의 전쟁, 즉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행위가 결여되어 있었다,
둘, 포프는 타르브 마을에서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을 잃었다.
그녀가 타르브에 대한 자신의 변호를 끝마치자 이번엔 웨일즈가 나섰다.

“루이즈는 처음부터 자신이 자원해서 나간 거야. 무리해서라도 좋으니 날 따라가겠다고 했고, 나와 동승한 자리에서 놀라운 위력의 허무를 발사했지. 그 이후에도 그녀는 적극적으로 우릴 따라다녔고, 우릴 위해 허무의 마법을 주창해 주었어. 그녀가 없었다면 무수한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거다. 비록 그 후유증인지 무엇인지 현재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녀의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긍지는 이번 전투 제일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입지가 강화되었으니 그녀도 만족하고 있을 거다.”

웨일즈 역시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현재 실성한 루이즈가 자신의 행위 덕에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긍지가 올라갔으니 만족해할 거라고?
아니, 오히려 그 행위들이 그녀를 처참하게 붕괴시켰다.
둘의 변명이 끝나자 드디어 포프는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모두 필요가 있고, 인과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이군요. 타르브는 당할 수밖에 없어서 당했고, 루이즈는 너무 나섰기 때문에 저 꼴이 되었다는 게 맞죠?
그럼 저도 당신들에게 물을게요. 앙리엣타 왕녀님, 그리고 웨일즈 왕자님. 당신들은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한 소리다. 힘이 없는 나라는 당할 수밖에 없고, 힘이 있는 나라는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며 더욱 커질 뿐. 이런 판도를 뒤집는 건 힘이 없는 나라가 나서는 게 아니라 정점의 힘에 달한 나라가 세계의 균형을 잡을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이제 알비온과 트리스테인이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들은 갈리아에 맞설 만한 강국으로 거듭날 거다. 타르브와 루이즈는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야. 우린 그에 대해 애도하겠지만,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나 강한 나라를 만들 거다.”

웨일즈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술술 말했다. 포프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앙리엣타를 바라보았다. 역시 아까처럼 하얗게 웃는 채로 포프가 다시 물었다.

“왕자님의 말은 공주님의 말이라 생각해도 되겠죠?”

“그래. 왕자님은 당연한 소릴 하셨어. 내가 반대할 리 없지.”

“그런가요.
그럼, 당신들을 지금 죽여버리면 안 되겠네요.”

아슬아슬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왕자와 공주의 눈빛이 달라졌다.
포프는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우직한 장수, 호킹스의 얼굴이 되었다.

“그, 그런……! 호킹스는 네가 변장한 것이었나!”

웨일즈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포프는 다시 원래대로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 모습으로 변신하자 제가 몰랐던 군사정보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 중 타르브 마을을 전멸시켰다는 말을 보고, 이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온 직후에 바로 그리로 가 보았죠. 조만간 그곳에 갈 약속을 하고 약도를 받았던 터라 금방 갈 수 있었어요.
타르브 마을은 엉망진창으로 되어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데엔 이만한 악의가 소비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불타버린 시체들을 살펴보니 남자는 둘째치고 여자들은 열 살 이상의 여자애 치고 강간당하지 않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니, 한 사람 있었죠. 제가 알던 한 소녀. 그 아이는 집에 있던 검을 빼 들고 반항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집이 포격으로 무너지면서 그 아래 깔려 죽었죠. 동생들을 지키려 했는지 죽는 순간까지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잔해에 파묻혀 있어서 약탈되지 않고 남아 제 손에 들어왔어요. 그것이 이 검이죠.“

포프가 허리에 찬 검을 가리켜 보였다. 한쪽 날의 중간부터 끝까지 톱니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은제 단검. 자루에는 파란 보옥이 박혀 있어 상당히 귀한 검이란 사실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웨일즈와 앙리엣타는 그 검이 오래 전 파푸니카의 왕, 즉 레오나의 아버지가 행방불명될 때 함께 사라졌던 왕가의 검이란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포프는 언젠가 시에스타에게 왜 이렇게 가슴이 큰 거냐고 놀렸을 때, 그녀가 장난스럽게 ‘우리 할아버지는 하르케게니아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오셨거든요’라고 대답했던 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키는 순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군사정보를 보니 ‘허무의 성녀’의 출격 횟수가 꽤 많더군요. 그에 대해 알비온 측은 이런 분석을 했어요. 저 주문은 분명 후유증을 동반하는 주문이니, 그녀를 조기에 쓰러뜨리든지 아니면 그녀가 저절로 자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적도 이렇게 루이즈를 분석할 수 있는데, 어째서 아군은 그녀가 파멸해가는 걸 보고만 있었을까요?”

“아까 말했잖나! 그건 그녀가 자원한 거야!”

“등을 떠밀면 사람은 그 힘에 밀려 자기 발로 몇 걸음 전진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도 그 사람의 의지라 부를 셈인가요?”

“……”

웨일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술을 마셔 충혈된 눈이 긴장으로 더욱 붉어졌다. 지팡이는 어느 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앙리엣타는 바로 그의 곁에 서서 함께 지팡이를 겨누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웨일즈의 체온을, 포프가 없었다면 이렇게 느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과거의 은혜는 잊어야 한다. 눈앞의 남자는 작은 희생에 눈이 멀어 찾아온 운룡 급의 남자이다. 그녀는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되는 순간,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을 내쏘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아직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웨일즈 왕자는 초조하게 지팡이를 쥐었다 폈다 하면서 대화를 재개했다.

“지금 우리에게 저지른 무례는 잊도록 하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그만 사라져라. 타르브와 루이즈에 대해선 향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마.”

포프의 입에서 그때까지 걸려 있던 가느다란 미소마저 사라졌다. 이제는 그냥 텅 비어 하얗게 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자님.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시네요……”

“웨일즈 왕자님! 옆으로!”

포프의 말을 개전 선언으로 받아들인 앙리엣타는 바로 주문을 내쏘았다. 트라이앵글 급의 물의 주문이 기세좋게 날아갔다. 포프는 아무 말 없이 이오라 한 발로 수 발의 물줄기들을 전부 증발시켜 버렸다. 자신의 주문이 너무도 쉽게 분쇄되자 그녀는 웨일즈의 팔을 붙잡았다.

“왕자님! 우리의 비전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포프에게 헥사곤 마법을 쓸 순 없잖소!”

“모르셨나요? 포프는 헥사곤 메이지입니다! 이대로는 어떤 주문을 써도 결코 먹히지 않는단 말입니다!”

“헥사곤 메이지!”

왕자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탄식을 하더니 순순히 앙리엣타의 손을 잡고 함께 주문을 영창했다. 그가 알비온을 탈출할 때 보았던 포프의 모습은 스퀘어 클래스 정돈 가볍게 요리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용으로 변신하기 전까진 힘을 아끼고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앙리엣타의 말이 허언 같아 보이진 않는다. 정말로 포프가 헥사곤 메이지라면 처음부터 가장 강한 수를 내는 게 맞다. 왕가의 사람들은 두 명이 힘을 합치는 것으로 헥사곤 스펠을 제창할 수 있는 것이다. 둘이 거대한 주문을 준비한다는 걸 알면서도 포프는 아까 대화하던 때처럼 말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포프. 이걸로 네 실력의 바닥을 보고 싶군.
하지만, 사실 네가 도망친다면 난 더욱 기뻐할 것 같구나.’

웨일즈는 앙리엣타를 의식해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둘의 주문이 끝났다. 그들과 포프의 사이에 돌연 축축한 수증기가 몰려들더니 그것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들의 방이 알비온 성에서 가장 큰 침실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거대한 주제에 빠른 속력으로 포프에게 다가가는 회오리를 보며 앙리엣타는 살짝 안도했다. 막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포프를 지팡이가 없는 틈에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좀 미안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웨일즈와 국가를 최우선 사항으로 여기고 있었다. 잠시 함께 고민을 나누었던 추억이 있더라도, 웨일즈와 국가를 향해 이를 드러낸다면 역시 없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여왕의 길이고, 결국은 국가와 국민들, 웨일즈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새삼 생각했다.
거대한 용권풍이 점점 커지며 포프에게 다가왔다. 그는 용권풍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꼿꼿하게 선 채 그 너머에 있는, 어딘가 왜소해 보이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죽여야 하나’

시에스타의 시체를 본 순간 그대로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이곳에 도착해 있었고, 경비병들은 모조리 한 구석에 널부러져 있었다.
후방에서 지휘나 일삼다 전쟁이 끝나자 마치 자신들이 전쟁을 끝내기라도 한 양 달려온다. 그 정도의 불평등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포프는 전쟁이란 행위 그 자체에 질린 상태였다. 수많은 인간이 수많은 인간을 죽일 때 어떻게 마족 이상의 악의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과거 해들러가 지상을 지배하던 시절에도 마족의 기사 바르토스는 인간의 마음을 발휘해 고아가 된 소년을 살린 바 있었다. 그에 비해 이곳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정말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타르브를 짓밟았다. 타르브가 알비온에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건 없었는데도 말이다. 시에스타는 건물이 무너져 동생들과 깔려 죽은 걸 강간당해 죽은 것보다 행복해할까? 포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따라서 그 역시도 시에스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포프의 머릿속에 명확히 자리잡고 있었다.
용권풍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피부가 따끔거리며 일어나고, 몸이 슬슬 그리로 빨려들어가려 했다. 그제서야 포프는 처음으로 용권풍을 인식했다. 바람, 바람, 바람, 물, 물, 물의 여섯 개의 속성으로 이루어진 헥사곤 스펠. 바닥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생성시킨 후 바람으로 그것을 고정하고, 위아래의 온도차로 그것을 점점 확산시키는 용권풍. 그에 대한 포프의 감상은,

“방해돼.”

포프의 왼손이 바닥을 향해 마햐드를 발사했다. 타바사의 아이스 스톰보다 범위는 좁지만 위력은 훨씬 강한 빙백의 폭풍이 바닥에서 생성되는 중이었던 수증기들을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포프는 다시 용권풍을 향해 진공주문을 내쏘았다. 대기를 강제로 고정시키는 진공주문의 힘이 전진하던 용권풍을 멈춰세웠다. 회오리는 더 나아가려 용을 썼지만 이미 공급받는 수증기가 없어진 이상 점점 약해져 갈 뿐이었다.

“맙소사……”

왕가의 비전인 헥사곤 스펠이 너무도 손쉽게 막혀 버렸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재차 주문을 영창하여 용권풍의 힘을 키우려 했다. 그때 회오리 너머의 포프가 회오리에 가려 흐릿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전쟁이란 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냥 약한 나라로 살면서, 다른 방법으로 강해지려는 시도는 하지 않나요?”

“그런 시도라면 소용없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군사력이 없으면 다른 나라가 집어삼킬 뿐이야!”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간이란, 결국 같은 인간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던 이 세계에서, 그런 제 정의에 자꾸만 금이 가요. 모두가 다치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다른 사람을 치죠. 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인간이란 구제불능의 머저리이기 때문일까요?”

“포프! 인정해라! 인류의 역사에 전쟁은 늘 있어 왔다! 우린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 이미 수천 년간 행해졌던 사실을 부인하는 것보단, 있었던 역사를 기반으로 대비하는 게 중요할 뿐이야!”

“역사라면 제 세계에도 있어요. 우린 항상 마족과 싸워 왔고, 마족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죠. 하지만!”

회오리가 갑자기 거세게 돌아갔다. 포프의 진공주문이 깨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프의 주문은 회오리를 억제하는 것에서 회오리의 진행을 더욱 부추기는 쪽으로 변화했다. 수증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제 힘을 조절 못하고 폭주하는 바람에 웨일즈와 앙리엣타는 회오리의 제어권을 한순간 잃었다. 곧 끼긱 끼긱 회오리가 방향을 바꾸어 그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방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거대해져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을 분쇄하는 회오리 건너편에서 포프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걸 부인할 수 있는 게 인간이란 말이에요!”

쾅! 드디어 천장이 날아갔다. 천장을 강타한 회오리가 그대로 일직선으로 뻗어 하늘과 연결되었다. 어디까지 길어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높이까지 치솟더니 점차 기세를 잃고 맥없이 사그러들어갔다. 생성에서 소멸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3분 남짓. 그러나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만약 포프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 주문은 이 성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방의 구조는 천장이 평평하지 않고 돔 형식으로 가운데가 둥글게 위로 솟아 있었기 때문에, 가운데가 완파되자 주위의 자재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하나 둘 추락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포프와 두 사람 사이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리며 방벽처럼 쌓여나갔다. 그것은 그와 그들이 결코 연결될 수 없다는 걸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포프! 괜찮냐! 포프!”

웨일즈는 포프의 이름을 소리높여 불렀다. 어째서 이 소년이 지팡이도 없이 주문을 썼는가, 어떻게 헥사곤 스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나 하는 건 지금의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이미 닳아없어졌던 그 고결한 이상을 아직 온전히 가지고 있는 소년에게, 다시 한 번 그것을 듣고 싶었다. 그걸로 자신이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바뀌었다는 증거라는 걸 웨일즈는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포프! 들리면 대답해!”

너무 거대한 주문을 써서 당장은 바람의 주문을 쓰기 버겁다.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한 다음 바위를 치우고 천장을 고정화시켜야 한다. 지금은 그저 소리치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웨일즈에게 포프의 작은 목소리가 닿았다.

“이제 곧, 갈리아의 왕이 바뀔 거에요. 이건 순리를 따르는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전 여기 돌아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왕은 틀림없이 전쟁을 사랑하는 대신 책을 사랑하고,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대화로 일을 해결해나가려 할 거에요.”

“무슨 소리야? 죠제프 왕이 곧 죽기라도 한다는 거야?”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알비온이 모두 가만히 있게 된다면 전쟁이란 당분간 일어나지 않겠죠. 전 그걸로 사람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라는 게 어떤 건지 알길 바라요. 그래서 앞으로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길 바라요.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평화로 인간들이 모두 서로를 ​사​랑​했​으​면​…​…​평​화​가​ 축복이란 걸 깨달으면서…… 윽……”

다시 돌아간 50년 후의 세계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족에 대한 증오가 넘치고 넘쳐서, 마족이 사라진 후까지 인간 세계를 지배했다. 그것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마계에서의 위협 때문이란 건 안다. 그렇지만 인간끼리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면, 지금처럼 증오를 행동력의 원천으로 삼는 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생물과 화합할 수 있다면 마계에서의 위협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고메가 소멸하면서 내뿜은 마지막 빛이 이루어낸, 잠시 동안의 거대한 화합이란 결코 이상이 아니라고 그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자신은 인간을 믿고, 인간을 사랑했다. 그 마음이 대마왕 버언의 정의에 승리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이 세계 또한 자신의 세계와 여러 모로 판박이였다. 브리밀 교라는 종교에 묶여 맹목적으로 엘프를 미워하고, 쏟아낼 길 없는 그 증오를 인간과의 싸움으로 풀어나간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가 아니라 인류에 흐르는 힘의 흐름을 대마도사의 시각에서 풀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천 년에 걸쳐온 그 증오를 다른 세계에서 온 포프가 풀긴 힘들다. 그래서 하다못해 그 단초라도 제공해 주고 싶었다. 또 이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자기 자신마저 잃을 뻔했던 한 소녀가 원래 가졌어야 했을 것을 되돌려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루이즈가 오면 진심으로 사과해요. 그리고 타르브 마을 사람들을 정중하게 장례지내줘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전쟁 같은 건 일으키지 말아요.”

포프의 소리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뚝 끊겼다. 힘을 약간 회복한 웨일즈가 급히 마법으로 돌들을 치워나갔다. 앙리엣타도 이를 도왔다. 그녀가 특별한 악의를 가지고 그를 공격한 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포프에게 지레 겁먹고 주문을 내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증오를 부르는 법이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마찬가지인 단순한 진리이다. 그 오해를 오해로 되돌려주지 않고 조용히 덮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평화와 화합의 시작이리라. 다시 그의 얼굴을 보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앙리엣타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 치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바닥에 희미하게 젖은 두 개의 얼룩 뿐이었다.


-포프 님, 말씀하신 대로 모두 모았어요. 키르케와 실피드, 타바사, 기슈, 몽모랑시, 그리고 루이즈까지요. 키르케는 예정에 없었지만 타바사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 좋다고 발벗고 나섰어요. 기슈와 몽모랑시도 포프가 하는 일이라고 하니까 선뜻 돕겠다고 했구요. 자세한 내용은 오셔서 직접 말씀해주세요.

“…………그래.”

비상주문으로 날아가며 포프는 블랙의 보고를 받았다.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관계없이 마력이 연결되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편리한 일이었다.
타르브 마을로 가기 전 그는 블랙과 델프를 일부러 제외했다. 대신 블랙을 휘즈로 바꾼 후 죠제프와 싸우기 위한 동료를 모으라고 했다. 자신은 조만간 이 세계를 떠나야 하는 몸이기 때문에 타바사가 되도록 자신 외의 다른 동료들의 힘으로 복수를 끝내고 왕위를 되찾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녀의 친우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비록 전력으로는 불충분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더러운 몫은 포프 자신이 몽땅 떠맡으면 된다. 그 순백의 소녀가 더 이상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리고 자신의 주인님이 허무에 먹히는 걸 막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결국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타입이었으므로.
휘즈가 한참 설명하다 말고 놀란 듯 말했다.

-어? 주인님, 혹시 울었어요? 이상한 감정이 느껴져요.

“……응.”

-왜, 왜요! 누가 주인님을 울린 거에요! 말씀만 하시면 당장!

“아냐. 그냥, 답답해서 울었어.”

​-​답​,​답​,​해​,​서​,​요​?​

금주법으로 태어난 휘즈는 아직 신체나 감정의 변화에 익숙하지 못하다. 포프가 말한 개념이 낯선지 또박또박 되뇌며 그 감정의 의미를 생각해보려 하는 모습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처럼 귀여웠다.

-아~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머리를 쥐어뜯는 휘즈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울한 기분이었던 포프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휘즈는 그 웃음을 듣지 못했는지 혼자 씩씩대며 열내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주인님, 루이즈는 그냥 놔두고 가는 게 좋지 않아요? 이제 혼자서는 몸도 못 가눌 지경인데.“

“내가 업으면 돼.”

-하지만 주인님은 이제 룬의 보정도 없는데.

“여자애 하나 업고 다닐 체력은 충분해. 그리고 여차하면 회복주문으로 체력을 회복하면 되는 거고.”

-에에…… 큐르케가 옆에서 전해달래요. 루이즈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자신도 궁금하다고, 좀 더 쉬게 놔뒀다가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기품을 갖춘 후에 데려가는 게 루이즈 본인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하고, 아니, 흔들지 마요, 큐르케! 절 흔들어도 포프 님의 목소리가 직접 나오는 건 아니에요~!!

병상을 박차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단 소린 들었지만, 좀 지나치게 팔팔해진 모양이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포프는 그녀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로 했다.

“전해 줘, 블랙.”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건 귀족의 명예와는 상관없어. 인간의 명예야. 루이즈는 인간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그리 가는 거야.”

-그런, 가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게. 그럼 이만.”

트리스테인까진 멀다. 한 시간 내로 도착하려면 좀 더 속력을 낼 필요가 있다. 포프는 비상주문을 새롭게 발동했다.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몸이 날아가자 그때까지 눈에 맺혀 있던 마지막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신은 인간을 위해 신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인간도 인간을 위해 눈물흘릴 수 있다 -
인간의 대마도사는 사랑하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허공을 질주했다.
스토리 전개를 위해 부득이하게 희생된 시에스타.
잘가... 잊지 않을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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