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로 점철된 인생
구라로 점철된 인생
-저는 삼남 일녀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2인자라는 위치는 제게 항상 위와 아래를 동시에 바라볼 것을 요구하였고, 그 덕분에 전 중간관리자로서의 재능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지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 이번 건 그나마 술술 써지는 편이었다. 만약 의뢰인이 네 명의 형제 중 셋째였다면, 자소서에는 조금 더 애매한 표현이 쓰였을 것이다. 네 명 중 셋째란 건 그만큼 떨떠름한 위치라는 것이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그는 곧 손을 다시 움직였다.
-제 장점은 사물을 넓게 바라보는 것, 그리고 거기에 숨겨진 핵심을 빠르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전 어려서부터 반장을 도맡아하다시피 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학회장 등의 직책을 꿰차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전 남들이 보지 못하던 길을 제시할 수 있었기에, 모두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등록금 인상 문제로 학과가 우왕좌왕할 때, 전 과감하게 학장과의 공개 대화를 제안해 학생 대표로 나감으로써 등록금 최소 인상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구라다.
자소서를 완성한 지욱은 기지개를 켰다. 열흘 전부터 아프기 시작한 오른쪽 어깨가 기분 나쁘게 쑤셨다. 몇 번 팔을 휘둘러 봤지만 그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지욱아, 일어났니? 오늘은 다른 병원에 갈 거지?”
문 밖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지욱은 혀를 찼다. 어제 저녁에 무심코 어깨가 계속 쑤신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일주일 넘게 병원에 다녔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큰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를 들들 볶는 중이었다.
“제대로 푹 잤더니 다 나았어요. 신경 안쓰셔도 돼요.”
밤샘으로 푸석해진 눈을 비비며 지욱은 2연속 구라를 쳤다. 어머니는 안심한 듯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담배 연기 자욱한 방 안을 보기 전에, 지욱은 신속하게 방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집의 식사 시간은 지욱이 기상했다고 어머니가 판단한 지 삼십 분 후에 시작되었다. 즉 밥이 나오기 전 씻을 시간은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전기밥솥에는 아직 김도 나지 않았고, 국냄비도 아직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기세를 살려 오늘은 대충 콘프레이크로 때울까 하는 생각을 하다 곧 접었다. 콘프레이크를 먹었다간 점심, 저녁 내내 ‘아침을 그렇게 때웠으니 허기지지 않겠니’란 배려 하에 막대한 양의 밥을 선사받게 된다. 체중 관리에 신경써야 하는 지욱에게 있어선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샤워를 해 졸음기를 없애고 입맛도 겨우 끌어올린 후 그가 나오자, 마치 요술처럼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사실에 무감동해진 자신에게 투덜대며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앉았다.
“국이 맛있네요. 우거지가 잘 삶겼어요.”
꽤 짜다는 이야기는 뺀 채, 지욱은 어머니가 끓인 국에 대해 구라를 쳤다. 아버지는 국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은 뒤로 다시 국에 손대지 않았지만, 지욱의 말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어머니는 아침에 국을 드시지 않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지욱은 국 한 그릇을 모두 비워야 했다. 그가 물 석 잔을 연달아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아버지는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친 그는 식탁 위를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어머니의 몫, 식탁 정리는 지욱의 몫, 그 시간 동안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아버지의 몫으로 이미 굳어져 있었다. 싱크대에서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를 켜고 아까의 자소서를 확인한 후 지욱은 의뢰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곧 반응이 왔다. 답장을 읽은 후 그는 자신의 계좌를 조회했다. 이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지욱은 속칭 말하는 자소서 대필을 하고 있었다. 모든 기업이 잘난 자소서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자소서를 잘 쓰는 것은 아니었다. 지욱은 그 사실에 주목했다. 밖에서 몸을 쓰며 일하는 걸 싫어하는 그에게, 방안에서 할 수 있는 데다 그의 주특기인 글쓰기에 주력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늘이 내려준 떡밥이었다. 때마침 공무원 공부를 하느라 저금을 거의 다 써버린 마당이라 그는 바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쪽 세상은 블루 오션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광활했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에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그동안의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욱에게 매달렸다. 지욱은 그런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적당적당하게 그들의 이력을 뭉뚱그려 포장하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제출한 이력서 중 몇 개가 합격하자, 알음알음으로 그에게 오는 일거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만약 집에 들킨다면 중요한 시기에 무슨 짓이냐며 제대로 혼날 것 같아서 그는 이 작업을 최대한 은밀하게 했다. 집에 말을 하진 않았지만, 사실 그는 올해 치러진 세 차례의 공무원 시험에 모두 탈락한 마당이었다. 떨어진 이유는 그야말로 구라 같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시험장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의 시간이 달랐던 걸 까먹었다가 시간에 걸리고, 마킹 중 실수해 답안지를 새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 줄을 통째로 잘못 옮겨적어 버리고, 긴장을 많이 했는지 땀방울이 마지막에 답안지 위에 똑 떨어져 번져 버리고…… 게다가 이렇게 해서 잃은 점수만 만회할 수 있었다면 이번 시험은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구라에 능한 그였기에, 사실 같은 구라보다 구라 같은 사실 쪽이 좀더 골치아프다는 걸 잘 아는 터였다.
그때 어머니가 문 밖에서 지욱에게 말했다.
“양복 다려 놨어. 오늘 무슨 넥타이 매고 갈 거니?”
“밝은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어머니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리자 지욱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미 부모님께 구라를 친 후였다. 먼저 공무원시험 합격자 명단을 다운받은 후 그 안에 자기 이름을 슬쩍 집어넣고, 이를 프린트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자신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자신의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으며, 그는 면접 날짜를 말씀드렸다. 그가 말한 날짜는 원래 정해진 공무원 면접일과 달랐는데, 이를 설명하려면 또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이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기 전에 써 두었던 이력서를 인터넷에서 보고 한 기업이 면접을 제의했다. 보험이나 텔레마케팅이 아님을 확인한 그는 면접 제의를 덥석 받아들인 바 있었다.
지욱의 계획은 이랬다. 공무원 면접을 보러 간다고 말한 후 이 회사 면접을 보고, 돌아와서 몇 주 후에 아쉽게도 공무원 시험은 면접에서 탈락한 것 같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필기 불합격이나 면접 불합격이나 결과는 같았지만, 그래도 후자 쪽이 좀더 보기 좋은 모양새라고 지욱은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회사에 채용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부모님께 ‘더 이상 부모님을 고생시켜 드릴 수 없어 남몰래 취직을 준비했다’라고 둘러대고 밀어붙이면 된다. 3년 간의 수험생활은 그에게서 적지 않은 것들을 앗아갔기에, 기나긴 수험생활이 타성적으로 1년이나 늘어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어머니가 챙겨준 양복과 넥타이를 몸에 걸치고 지욱은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쨍한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젊은 남자는 더욱 없었다. 평소엔 자신이 이 시간에 거리를 다니는 것 자체가 백수인증을 하는 것 같아 영 껄끄럽던 그였다. 하지만 양복을 걸치자 근거없는 자신감이 그의 안에서 피어났다. 온라인 게임에서 비싼 갑옷을 입고 사냥터를 활보하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간만에 여기저기 힘주고 나온 터라, 그는 오늘 하루를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역에 도착해 지하철에 탄 그는 노선도를 살펴보았다. 회사는 꽤 먼 곳에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방금 산 캔커피를 훌쩍 마신 후, 지욱은 미리 프린트해 둔 회사 정보들과 자신의 이력서를 뒤적거렸다. 나이 서른에 무직인 자신을 왜 불렀나 했더니, 역시나 꽤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업무내용은 맘에 들었다. 감성 마케팅이란 취지하에 고객들에게 여러 메시지를 날리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런 거라면 자신있는 지욱이었다. 당장 지금도 면접관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수많은 문구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메시지 작성이 어지간히 힘든지 아르바이트를 상시 채용한다는 문구가 보였지만, 자신의 실력이라면 정규직으로 너끈하게 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회사 정보를 집어넣고 이번엔 자신의 이력서를 꺼냈다. 어딘가를 노리고 쓴 게 아니라 순전히 이력서 대필 아르바이트를 위해 연습삼아 끄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내용은 제법 진지했다. 글쓰기 실력에 자신있으며 이를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은 제법 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세상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지욱은 글쓰기와 관련해 이미 무수한 좌절을 겪었고, 공무원 시험에서도 몇 년간 쓴맛을 보았으며, 이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회사는 지욱이 내린 역 근처에 있었다. 생각대로 그리 큰 곳은 아니었지만, 안에 들어가보니 의외로 정갈했다. 그를 맞이한 회사 측의 면접관은 세 명이었다. 면접이란 것을 처음 보기 때문에 지욱은 살짝 긴장했다.
“어디 봅시다. 자기소개는 여기 다 있으니 할 필요가 없겠네요. 사회운동을 하셨다구요?”
“네. 졸업 후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이제부터가 구라의 시작이었다. 지욱이 이력서에 적어낸 사회단체는 사실 예전에 우연히 관람했던 인권 연극을 만든 곳이었다. 그는 그 연극에 감명을 받아 그 단체에 가입했고, 활동은 전혀 없는 유령회원인 채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력서를 쓸 당시에 막 이곳에 가입했던 터라 휑한 란을 채우기 위해 무심코 써넣었는데, 오늘이야말로 이를 활용할 때가 되었다. 대놓고 공무원 공부를 했다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글을 공무원 카페에서 본 적이 있는 지욱이었기에, 졸업 후 지금까지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이 단체를 골랐다. 지금 이 단체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이십 분이라도 줄줄 읊어댈 수 있을 정도로 지욱은 예습을 제대로 해왔다.
“……하겠네요?”
“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예상과 완전히 딴판인 질문이 나와서 지욱의 머리가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면접관이 두 번째 말하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운동을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생계를 부모님께 의존했겠군요. 지금 불효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면접관은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치 내 자식이면 지금 한 대 때렸을 텐데 하는 표정이었다. 이게 압박면접이란 건지 아니면 정말 시비거는 건지 판단할 수 없어서 지욱의 등줄기에 땀이 새어나왔다.
“제 밥벌이는 제가 하고 있습니다. 졸업 후 정규직으로 길게 일한 적은 없지만, 다양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게 어떤 일이죠?”
“과외나 학원 강사, 자기소개서……아니,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고 있습니다.”
자소서 대필은 어쩐지 말하면 안될 것 같아서 지욱은 그건 빼고 이것저것 열거했다. 사실은 모두 구라였다. 대학생일 땐 지욱도 이것저것 해본 일이 많지만, 졸업 후엔 공무원 공부만 3년가량 해왔다. 다양한 사회 경험이란 점에서 플러스가 되지 않을까 싶어 지욱이 급조한 구라였지만 지금은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그런 게 불효라는 겁니다. 정규직에 떡하니 들어가서 추석이나 설에 선물세트를 들고 오는 게 진정한 효도라구요. 사회운동이 밥을 먹여 줍니까? 왜 청춘을 그딴 데 낭비하다 이제야 이 자리에 왔나요?”
실수였다. 지욱은 면접관이 어떤 성향인지를 재빨리 파악했어야 했다. 지욱이 자소서를 쓸 땐 보편적인 면접관을 기준으로 작성하기 때문에, 이처럼 그의 예상을 확 벗어난 면접관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욱은 대답으로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신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
면접관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차더니 다음 질문을 했다.
“어디 다른 곳에 지원해서 면접 본 적이 있습니까?”
“예. 두어 군데 있습니다.”
지욱은 눈에 힘을 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여러 군데에서 탐내는 인재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함이었다.
“거기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겠어요?”
“네. 한군데는 신문사 기자 자리이고, 또 한군데는 수험서 출판편집부 직원 자리였습니다.”
“구체적인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지욱은 미리 생각해둔 이름들을 말했다. 만약 그들이 그곳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전조사를 끝낸 터였다. 하지만 면접관의 질문은 지욱의 예상과 달랐다.
“그런데 왜 거기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또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지욱은 당황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하지만 구라를 만드느라 단련된 그의 뇌는 곧 그럴싸한 스토리를 하나 만들어냈다.
“둘 모두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신문사는 경영악화 때문에 구인광고와는 달리 영업과 판촉, 수금까지 해야 한다고 했고, 출판사의 경우엔…… 다짜고짜 제게 1개월 내로 혼자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하나씩 차근차근 배우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출판사를 말할 때 막힐 뻔했지만, 지욱은 간신히 대답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면접관은 기다렸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가족적인 분위기를 가진 기업이 있을 것 같나요? 기업은 살아남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곳이지, 서로 챙겨주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영업이랑 판촉, 수금 같은 걸 같이 하면 또 어떻구요? 왜 지욱 씨는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말한 게 전부 구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반박당하면 지욱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전 구인광고와 실제로 하는 말이 다른 게 싫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1개월 안에 뚝딱 만들어낸 책을 시장에 팔라고 내놓는 건 부끄러운 일이죠. 그건 저와 소비자 모두를 놀림감으로 만들 테니까요.”
“1개월 안에 잘 만들면 되는 거지, 왜 그 생각을 하지 않고 포기부터 하려고 합니까? 멘탈이 너무 약한 거 아닙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지욱 씨는 사회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네요.”
“그럼 제가 거기서 일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당연하죠. 일할 기회를 줬는데, 그걸 걷어찼다는 건 본인 멘탈이 약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이니까요. 일을 줬으면 열심히 할 일이지, 시도도 안 해보고 나옵니까?”
거기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면 당신들이랑 나랑 어떻게 지금 마주보고 서 있겠냐? 소리가 지욱의 목구멍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구라의 기본은 침착을 유지하는 것이다. 평정을 잃어 가슴속에 꽁꽁 숨겨둔 진실이 살짝 머리를 내밀기라도 한다면 그때까지 한 구라들은 모조리 한데 묶어 폐기처분당해야 하는 것이다.
창백해진 지욱의 얼굴을 보고 만족한 면접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다른 면접관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질문들에는 이미 맥이 빠져 있었다. 처음에 질문을 던진 면접관이 가장 높으신 분인 모양이었다. 그가 결론을 냈으니 자신들이 거스르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지욱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나 하는 회한을 느끼며 건성으로 대답해 나갔다.
이윽고 처음 면접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느끼셨겠지만, 아무래도 지욱 씨의 멘탈은 너무 부족합니다. 얼마 전 10년 경력의 우수한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는 2주 후에 도망가 버렸습니다. 경력자도 그 모양인데, 하물며 신입이 그런 멘탈을 가지고 있으면 우린 뽑아줄 수 없어요.”
참으로 아리송한 논리였기에 지욱은 대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지욱의 그 표정을 패배자의 표정으로 받아들인 면접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아르바이트 생각 있습니까? 아르바이트라면 써줄 수 있습니다.”
“……”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욱은 그대로 일어섰다.
구라의 패배였다.
날씨는 쓸데없이 좋았다. 다들 적당히 헐벗은 차림으로 서로의 팔짱을 끼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그 가운데에서 우중충한 양복을 입고 만사 뒤틀린 표정으로 걷던 지욱은 곧 참지 못하고 넥타이를 풀어 가방에 구겨 넣고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쳤다. 더위가 조금 가시나 했더니, 곧이어 아까 면접관이 한 이야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아르바이트라도, 라고? 지욱은 면접한 시간,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그리고 어제 이 기업에 대해 조사하며 희망을 품었던 시간까지 몽땅 기억에서 쳐내고 싶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 때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지욱이니?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요?”
그가 퉁명스럽게 물어보자 어머니는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뉴스를 봤는데 공무원 면접일은 몇 주 뒤더구나. 그래서 오늘 무슨 면접을 봤나 해서.”
지욱은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제까지 해왔던 구라들이 시험받는 순간이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구라를 치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지만, 그가 그랬던 것은 두 분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구라들이 모조리 들통났을 때 자신이 느낄 자괴감보다 부모님의 실망이 더욱 클 것을 알기에, 그의 구라는 늘 예술적으로 섬세했다. 다행히 그건 코너에 몰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뉴스에 나온 건 굵직한 거고, 오늘 본 건 기능직이라고 해서 몇 명 안 뽑는 거예요. 뉴스에 나온 날짜에도 나가니까 걱정 마세요.”
“그러니?
…………알았다. 집에 바로 들어오렴.”
한참 침묵한 끝에 어머니는 낮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침묵이 지욱에겐 못 견딜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설마 눈치챈 건가? 그럴 리 없었다. 어머니가 기능직 시험의 면접일까지 꿰고 있을 리 없었으니, 자신의 구라는 이번에도 성공한 게 틀림없을 것이다. 쇼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구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지욱은 그렇게 애써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걸음은 몇 걸음 못 가서 멈췄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발걸음을 돌려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6시 남짓했지만 그는 바로 소주 한 병을 꺼내들어 계산했다. 편의점 옆에 있는 작은 공원에 들어간 그는 안주도 없이 병을 따 몇 모금 들이켰다. 짜르르한 느낌이 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주 없이 혼자 강소주를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술기운은 그가 아까 끄집어내지 못한 질문을 억지로 끌어올려 주었다.
자신은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길 바라는 걸까?
혹시, 누군가 이 모든 게 구라라고 지적해 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미 자신에게도 수많은 구라를 쳤던 지욱이었기에, 지금의 질문이 구라인지 아닌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기어이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언제 샀는지 가방 안에서 곤죽이 된 자일리톨 한 통을 모조리 씹어댄 후 지욱은 역으로 향했다. 아직 가슴속에 남은 생생한 분노와 경멸 덕분에 취기는 말끔히 날아갔다.
역 안은 매우 한산했다. 지금 있는 장소가 서울의 맨 구석이라 그런지, 아직 퇴근길 끝물인데도 사람은 고작 두세 명 뿐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만취한 모양이었다. 몸을 흔들거리며 이리저리 위태롭게 움직이다 벽에 쿵 부딪치고, 욕을 지껄이며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옮겼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를 피해 멀찍이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몸을 피하려던 지욱에게 뜻밖의 생각이 났다. 예전에 몇 번, 선로에 추락한 취객을 구한 사람이 용감한 시민상을 받으며 지하철공사에 특채로 들어간 기사를 본 적 있었다. 어쩌면 자기에게 마지막 기회가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취객은 선로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쿵 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지욱은 흘끔 옆을 보았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취객의 눈과 지욱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지욱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이딴 건 구라가 아니라 비겁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욱의 손은 취객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그 순간 지욱에게서 아까까지의 계산은 날아가 버리고, 요새 통 보지 못했던 양심의 가책이란 감정이 발동되었다.
“모두 도와줘요! 사람이 떨어졌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그는 선로로 뛰어내렸다. 지욱은 그새 선로에 거하게 토한 취객을 등 뒤에서 껴안고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 자신도 운동을 요새 통 안 한데다, 취객이 거칠게 반항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 위에선 어느새 약간 불어난 사람들이 ‘어쩌지, 어쩌지’하거나 폰카를 들어 이곳을 찍어대고 있었다. 번쩍대는 폰카가 자신의 선행을 증명해주는 증거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 자신을 혐오하며 그는 외쳤다.
“보고만 있지 말고 손 좀 뻗어 줘요! 이 사람 좀 잡아당겨 줘요!”
구체적인 주문을 한 후에야 사람들이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은 혼자 구할 자신도 없으면서 뛰어들어갔냐는 힐문 같았다. 특히 토사물에 더럽혀진 취객의 손을 잡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구조는 좀 더 늦춰졌다. 참다못한 지욱이 자신의 양복 상의를 쓰라고 던져준 후에야 취객은 구출될 수 있었다. 머리 위에서 자신의 옷이 더럽혀지는 장면을 비통하게 바라보며, 그래도 이 정도라면 아까 했던 생각에 대한 죗값은 되지 않겠냐며 지욱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취객이 완전히 올라온 후에야 지욱은 스스로 올라왔다. 말을 하지 않으니 누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힘들게 올라오고 나니 아주 가관이었다. 취객은 토사물을 묻힌 채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빙 둘러싸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무원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
“하, 이 양반 또 이 난리네. 지하철 출입 금지를 시켰으면 좋겠는데 규정도 없고 말야. 이봐요! 일어나 봐요! 이번에도 또 술 먹고 선로에 떨어졌네, 아저씨!”
“누가 아저씨래, 이 양반아! 확 고소해 버린다! 공무원이 그래도 되냐?”
“시끄럽고 얼른 딴 데로 가 버려요!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겁니다?”
“경찰? 불러! 나도 할 말 있어! 난 밀려서 떨어졌어! 저 새끼가 날 밀었다고!”
취객은 느닷없이 지욱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지금 뭐라는 거야? 지욱은 어이가 없어 취객에게 맞고함쳤다.
“지금 구해줬더니 무슨 소릴 합니까? 밀긴 누가 밀어요?”
“니가 밀었잖아, 이 새끼야!”
“뭘 밀긴 밀어!”
자신의 계산이, 양심이, 노력이 한데 섞인 채 하수구 아래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지욱은 필사적으로 그의 말을 부인했다. 취객이 떨어질 당시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 서 있었기 때문에 취객이 우겨대도 아니라고 말할 증거가 없다는 것을 지욱은 이제야 안 것이다. 그런 지욱의 모습이 즐거웠는지 취객은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아, 지금 구라 치고 앉았네, 이 새끼가!”
그 말만은, 그 말만은 결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작자에게 들을 게 아니었다.
사실 지욱은 진작에 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모두는 속거나 혹은 속아줄 뿐, 지욱의 구라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욱은 오늘에서야 바랄 수 있었다. 자신의 구라를 구라라고 말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그 사람 앞에서 구라가 아닌 말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기를. 그런 소망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자 지욱의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산산히 부서졌다.
“이, 개새끼가!”
지욱은 주먹을 쥐고 주정뱅이에게 달려들려 했다. 선로에서 구해준 게 유감이라면 다시 선로로 처박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러자 취객은 갑자기 그 자리에 엎드리더니 엉엉 울며 싹싹 빌어댔다.
“거짓말이었어요, 선생님! 때리지 마요! 제가 구라를 친 게 맞습니다!”
또 구라 이야기였다. 마지막 말이 지욱의 이성을 다시 돌려놓았다. 자신의 발 밑에 꿇어 엎드린 남자에게서, 지욱은 구라의 종말이 무슨 모습일지를 어렴풋이 투영해낼 수 있었다. 자기에게서 구라가 박탈되었을 때 이런 모습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자 지욱은 도저히 쳐들었던 주먹을 내려칠 수 없었다.
역무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양반 맨날 이럽디다. 역에서 술 먹고 날뛴 적도 많이 있고, 아까 cctv 봤는데 혼자 떨어진 거 맞아요. 신경쓰지 말고 가세요.”
“저, 세탁비는요?”
“그건 이 사람한테 물으셔야죠. 그런데 이 사람 지금 노숙자나 마찬가지라 받아내긴 힘들 걸요.”
“그, 그럼 혹시…… 이 사람 구해준 게 위에 보고될까요?”
이제 타산적이 되어도 상관없을 듯했다. 이런 질문은 넌지시 하는 게 맞았지만, 지욱은 다급한 나머지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그러자 역무원은 딱하다는 듯 지욱을 바라보며 낮게 소근거렸다.
“지금 혹시 상이라도 받을까 하고 말하는 거라면 포기하세요. 하루에도 몇 명이나 선로에 떨어지는데, 그 사람들 구해낸 거 일일이 다 신경써줄 것 같아요? 그 자리에 기자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런 구석에서 저런 하찮은 사람 하나 구해준 것 따윈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 딱한 양반아.”
지욱은 승무원 뒤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귀에는 역무원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폰카질을 하고 있는 작자들은 이제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는 엉망이 된 양복 상의를 집어들고 힘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되는 대로 물을 묻혀 걸레짝이 된 양복 상의를 대충 구겨든 채 지욱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래도 냄새가 지독하게 났기 때문에 지욱의 반경에 충분한 공간이 생겼다.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건 말건, 그는 사람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맹인이 자비를 호소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구라였다. 잡상인이 들어와 중소기업이 망해 제품을 싸게 들여왔노라고 열변을 토한다. 구라였다.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슬쩍 돌려 맞은편의 글래머를 훔쳐보고 있었다. 구라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저런 소규모 구라들이 범접하지 못하고 있는 구라의 화신이었다.
그는 싫다는 세탁소 주인을 달래며 양복 상의를 세탁소에 맡긴 후 집에 들어갔다. 늦게까지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맞아주었다. 아침에 입고 간 양복이 어디로 갔는지 어머니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으므로 지욱도 구라를 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라인지 진심인지는 양쪽 모두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 구라는 위태위태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잘 갔다 왔냐, 잘 갔다 왔다, 어떠냐, 아무래도 합격할 것 같다, 하는 사소한 구라들이 오늘도 쌓여 갔다. 작대기 하나 꽂아넣는 순간 무너져 내릴 테트리스의 블록들이 지욱의 목구멍까지 쌓여 있었다. 그것이 이윽고 작대기를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쌓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옷을 갈아입은 지욱은 컴퓨터를 켜고, 예전에 썼던 이력서를 꺼냈다. 이제는 이력서를 새로 쓸 때였다. 구라에 찌들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잠시 바라보다 그는 이력서의 내용을 몽땅 삭제했다. 그리고 여백이 한가득한 표 안에 커서를 들이밀었다. 취미는 독서와 웨이크보드, 특기는 클레이사격, 경력은 인턴 3회. 구라였다. 지욱은 그와 똑같은 내용을 나흘 전 작성한 바 있었다. 그것들을 지우고 다시 쓰려 했지만, 여전히 과거 대필했던 이력서와 내용이 겹쳤다. 글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의 이력서는 이미 마지막 한 글자까지 꾸역꾸역 채워져 있었다.
지욱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리고 천천히 이력서를 다시 작성했다.
취미는 구라,
특기도 구라.
자기소개서에는 딱 한 줄만 썼다.
구라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이력서에 쓴 것만은 모두 사실이라고 보장합니다.
여기까지 쓰는 데에도 지욱은 모든 힘을 소비했다. 그는 이력서를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그제서야 오른팔이 쿡쿡 쑤셔 왔다. 내일은 정말 병원에 가겠다고 지욱은 다짐했다.
샤워할 기운도 없었기에 그는 곧장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지욱의 온기만으로 곧 따스해졌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는 오늘 밤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