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기 전, 나우루에 대한 사전지식(http://m.enha.kr/wiki/%EB%82%98%EC%9A%B0%EB%A3%A8)을 돌아보는 걸 권해드립니다.
———————————————————————————————————-
나우루, 淚淚淚
-열대 섬의 이국적 풍경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부수는 곳이지.
선배의 말이 선경의 귀에 맴돌았다. 불편한 좌석에서 선잠이 든 채, 선경은 그가 언제 그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헤어지기 이 주 전쯤이었던가? 그때 이미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했었다. 선배는 그녀의 나우루 행을 알고 바로 짐을 싸 뉴욕 특파원이란 명목으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그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라 쓸쓸하단 핑계로 잠깐 불장난을 했지만, 가족과 재결합할 기회가 생기니 그간 즐겼던 상대가 퍽도 거치적거렸을 테니까.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비행기 안은 바깥 못지않게 무덥고 눅진했다. 더위 때문에 선잠에서 깬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사이로 잿빛 섬의 모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쓰레기 더미가 뭉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구색만 겨우 갖춘 몇 그루의 나무들 정도로는 잿빛 섬을 치장하기 역부족이었다.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듯한 게 딱 자신의 신세인 듯해 선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파우치에서 싸구려 선크림을 꺼내 얼굴이 허옇게 뜨든 말든 신경질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드문드문 낀 하늘에 문득 새하얀 점 하나가 피어났다. 이쪽으로 다가오며 점점 커지는 점을 본 섬의 아이들이 환호하며 뛰어갔다. 사흘에 한 대씩 오는 저 비행기는 이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이자 수입원이었다. 구멍난 고기잡이 그물을 성의 없이 수선하던 어른들 몇도 잠시 일손을 놓고 어슬렁어슬렁 따라갔다.
새하얀 비행기는 과연 저 잿빛 섬에 내려도 좋은지 망설이는 듯 하늘을 몇 바퀴 돌다 착륙했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공항 입구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이들의 손에는 꽃이나 구슬로 만든 목걸이, 생선뼈로 만든 공예품 등이 들려 있었다. 한 개만 팔아도 몇 주치 용돈을 버는 셈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간절한 표정을 연습했다.
이윽고 공항 게이트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섬사람들 사이에 모처럼 외지인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아이들의 기념품을 잘 사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환호하며 여자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시도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안 사. 비켜."
선경은 눈을 험악하게 치켜뜨고 아이들에게 딱 두 마디를 내뱉었다. 싸구려 선크림에 얼굴이 허옇게 뜬 그녀가 노려보니 아이들은 제풀에 뒤로 물러났다. 들꽃을 대충 꺾어온 여자아이 하나는 꽃을 떨어뜨리고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돈 벌기 참 쉬워, 하고 선경은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곳에서 어떤 거라도 하나 사는 순간 전부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 굵은 아이 몇은 용기를 내 선경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해 이들을 뿌리쳤다.
"가이드! 가이드 어딨어요?"
여행사에서 미리 섭외해 둔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과연 제 시간에 나왔을까? 그녀는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비교적 마른 편이었지만, 어른들은 하나같이 뚱뚱한데다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못 사는 나라인데 왜 이렇게 뚱뚱한 거야?' 라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얼른 호텔이든 민박이든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를 알은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정말! 누구 조지라는 사람 알고 있어요? 영어 잘 하는 조지!"
'조지'란 이름을 듣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이드의 이름이 조지라는 것만 알고 있는 선경은 절박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모인 사람의 2/3가 'My name is George'라며 손을 드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Shit!'하고 혀를 차야 했다.
이 섬에 조지란 이름이 정말 흔한 건지, 아니면 모두가 사이좋게 구라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거기 당신, 모레까지 가이드 할 수 있어요?"
선경은 '조지' 중에서 가장 젊고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옷은 허름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흐리멍텅하진 않았다. 그녀가 겪었던 현지 가이드 중에는 굼벵이처럼 느려터지거나 그녀를 얕보고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조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보였다.
"문제 없습니다, 아가씨."
'조지'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짐을 받아들었다. 보수 얘기부터 꺼냈다간 길바닥에 서서 흥정을 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는 보수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무슨 얘기를 꺼내든, 지금 보여준 그의 쿨한 태도가 선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마워요. 영어는 잘 하나요, 조지?"
"적당히."
"알았어요. 이틀 동안 잘 부탁해요, 조지. 난 선경이라고 해요. 그럼 어서 호텔로 안내해 줘요."
벌써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선경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였다고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청년은 꼿꼿한 그녀의 등을 보고 잠시 감탄하다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급히 뛰어갔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선경은 궁금했던 것들을 속사포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섬 사람들 모두 영어를 잘 하나요?"
"아마 아가씨…… 아니, 선경 씨가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다고 보면 될 걸요."
"흠. 그럼 말조심해야겠네요. 그래도 인터뷰를 할 땐 편하겠는데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손수건을 파우치에 넣더니 조지의 손에 들린 여행가방에서 DSLR 카메라 가방을 꺼냈다. 원래 이런 취재여행은 사진사와 동행하는 게 맞지만, 선경은 부득부득 자기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우겼던 터였다. 사실 그녀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잘 나가는 여행 블로거였으니 회사가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이번 나우루 행은 상당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편집장이 '나우루라는 섬이 며칠 전 뉴스에 나왔었는데 말야. 이번 바캉스 특집 여행 섹션에 실어볼까?' 라고 반 농담으로 얘기했던 걸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다. 잠시 열대의 섬에서 기분을 전환해야겠다는 충동도 있었고, 회사에서 확 줄어버린 입지를 조금이나마 늘리려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하지만 뷰 파인더에 비치는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섬이 좀…… 지저분하네요."
'거지 같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선경은 투덜거렸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아스팔트 위로 진흙이 덕지덕지 처발라진 걸로도 모자란지, 길에는 오만가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길 옆에 쓰레기가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장 사이를 뚫고 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각종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가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어지간한 선경으로서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사진 찍는 걸 포기하고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현지인 앞에서 좀 유난을 떨었나 싶어 선경은 손수건 너머로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좀 예민해진 것 같네요."
"아니요. 종종 있는 일이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도로 집어넣었다. 선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느닷없이 정곡을 찔러 왔다.
"당신 역시 이 섬에 환상을 품고 왔군요. 그렇죠?"
선경은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녀의 안에서 나우루라는 이름은 제멋대로 부풀고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었다.
'인류에 의해 가라앉고 있는 섬'
투발루와 함께 조만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릴 나우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섬이 가라앉는 이유가 지구온난화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일에는 인류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짊어진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호사가들은 이런 섬에 고상하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마치 산호초로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 훌라춤을 추는 순박한 원주민들이 서서히 잠겨들어가듯이.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우루의 모습은 오히려 과거 방치되었던 난지도 쓰레기처리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지에서 느끼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행 전 현지조사를 최대한 삼가는 게 그녀의 여행법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듯했다.
쓰레기더미를 지나자 간신히 거리 같은 거리가 나왔다. 개성 없는 집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고, 사이사이 말라비틀어진 야자수 비스무리한 나무가 볼품없이 서 있었다.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도로도 거리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차종을 알 수 없는 몇 대의 차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사람이 창 너머로 선경과 조지를 흘끔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돌아갔다. 선경은 그들의 눈빛에서 생기란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 사는 도시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방글라데시니 부탄이니 하는 가난한 국가들을 다녀본 적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곳은 없었다.
“이 나라는 똥이죠.”
“네? 뭐라고요?”
속삭이듯 말한 조지의 말이 선경의 귀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치기도 조금 애매했다. 조지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군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글쎄요. 그냥 이곳이 엿 같다는 말과 동의어 아닌가요?”
갑자기 유식한 척 하려 드는 조지의 태도에 짜증이 난 선경은 생각나는 대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조지는 화내는 대신 아예 배를 붙들고 크게 웃어댔다.
“오, 이런! 대체 여기에 뭘 보러 온 겁니까? 이 섬이 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해요. 여긴 알바트로스의 똥으로 이루어진 섬이니까.”
"저, 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고말고요. 옛날부터 알바트로스가 싼 똥이 굳어서 인광석이 되고, 그 인광석이 무한정 있던 곳이 이곳이죠. 그걸 파내서 팔던 시절엔 우리는 지상 최고의 갑부였어요. 쓸 만한 인광석을 몽땅 채굴한 지금은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처럼 똥 같아졌지만.”
선경의 뺨이 순간 빨개진 것은 당연히 더위 외의 이유였다. 이런 열대 섬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조사를 해오지 않았던 실책이 또다시 드러나 버렸다. 게다가 자신을 약올리려는 의도인지 똥 같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도 짜증났다. 그래서 선경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딴지를 괜히 걸었다.
“허풍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인광석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그걸 팔아서 돈이 얼마나 나온다고……”
“연간 소득 3만 달러.”
순간 선경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한국도 GDP 2만 달러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조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1980년대에.”
이번에야말로 선경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지간히 걸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둘은 호텔 앞에 도착했다. 한 20년 전까진 번듯했을 것 같은 호텔이었다. 간판은 몇몇 글자가 떨어져나갔고, 정문 앞에는 콜라 캔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유리문 한쪽엔 바람만 불어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처럼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망설이지 않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 작은 섬에 호텔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선경도 그냥 들어갔다.
의외로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그 사이 선경이 나우루에 적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했다. 하루에 전기가 3시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입구에서 들었던 터라 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손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선경은 조지와 가이드비를 협상했다. 조지는 생각보다 가이드비를 싸게 불렀다. 어차피 회사 돈이지만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선경은 쾌히 승낙했다.
조지가 요구한 건 단 하나, 선금을 달라는 것뿐이었다.
“우리, 내일 볼 수 있는 거 맞죠?”
돈 먹고 튀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말 튀어버리면 선경으로선 잡을 도리가 없었다. 그땐 선경 혼자 섬을 돌아다니면서 세 걸음에 한 번씩 ‘조지, 이 개새끼!’하고 욕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섬은 고작해야 여의도 정도의 크기니 큰 무리 없이 취재를 마칠 자신이 있었다.
배짱 두둑한 선경을 보며 조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말고, 오늘 밤은 어때요?”
순간 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괜찮은 녀석이다 싶었더니 사실은 그냥 짐승이었나? 그때 그녀의 안색을 살핀 조지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오해할 만했군요.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본 거였어요.”
“확실하게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오해해버릴 테니까.”
그는 뭔가 말하려 하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악동처럼 씩 웃었다.
“안돼요. 그걸 지금 말하면 재미 없을 걸요. 하지만 장담해요. 당신은 절 보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올 거라는 걸.”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기자마자 그녀는 방문으로 뛰쳐가 문고리를 잡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다행히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선경은 조심조심 문을 걸어잠근 후 긴장이 풀려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생각 없이 그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던 게 하마터면 큰 일로 번질 뻔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긴장이 풀리자 긴 여행에 지친 그녀의 몸이 삐그덕거렸다. 한국에서 호주로, 호주에서 다시 이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과정은 역시 힘들었다. 게다가 이 섬이 산호초 대신 쓰레기로 가득 덮인 동네였다는 허탈함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냉장고 안에 가득한 맥주를 발견한 순간 그녀가 환호성을 지른 건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곯아떨어졌던 선경의 귀에 클랙션 소리가 시끄럽게 파고들었다. 베개를 머리 위에서 누르고, 이불까지 모아 덮어써도 클랙션 소리는 귀신같이 귀에 도달했다. 참다 못한 선경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한국말로 외쳤다.
“아, 차 좀 빼, 씨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제야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다. 한국에선, 그녀가 사는 서울의 반지하 집에선 흔히 겪곤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기는 나우루였다. 굴러다니는 차도 없는 동네에 무슨 클랙션이란 말인가?
선경은 팬티 바람에 시트만 대충 두른 채 비틀비틀 창가로 걸어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는데도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원래 주량은 맥주 한두 캔이었는데,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계속 홀짝이다 보니 다섯 캔이나 마셔버린 것이다. 그것도 빈속에! 아무래도 창가에서 계속 클랙션을 울리는 나쁜 놈의 새끼 머리 위에 토해야겠다고 선경은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클랙션의 주인공은 선경이 그 생각을 접어야 할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었다.
“어때요, 데리러 온댔죠?”
조지는 새하얀 차 안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렸다면 10분 안에 이마와 클랙션의 원치 않는 접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귀라도 먹었는지,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한 건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예요, 이 밤중에. 뭐하러 왔어요?”
“낮에 말했잖아요. 다시 온다고.”
그는 냉큼 대답하더니 차 안에서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차 문이 위로 스르륵 열렸다.
“……어?”
선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차 문은 날개를 딱 붙인 새처럼 위로 열려 있었다. 차에 문외한인 선경이라도 그렇게 열리는 차가 어떤 차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 내가 아는 그 차가 맞다면 놀라서 토해버릴 것 같은데…… 차종 좀 알려줄래요, 조지?”
“바로 놀라지 않는 걸 보고 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맞네요.”
조지는 혀가 살짝 꼬부라진 그녀를 보더니 호텔 1층에 바짝 갖다댔던 차를 조금 후진했다. 선경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다. 안전권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알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람보르기니를 모르는 여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으니.”
“우웩!”
2층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토사물을 본 조지는 스스로의 선택을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의 예상대로 선경은 밖으로 나왔다. 물로 입을 헹구긴 했지만 지독한 술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에 누워 그의 비웃음을 열심히 상상하고 있느니 차라리 눈앞에서 그의 비웃음을 보는 편이 나았다. 막상 그가 전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긴 했지만.
“이게 몇 억 한다는 그 차 맞죠? 가짜 아니죠?”
“네, 맞아요. 아버지가 물려준 제 차예요.”
“아니, 아버지가 물려주다니, 무슨 갑부예요?”
“한때 갑부였던 분이죠. 이 섬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랬겠지만. 자, 타요.”
조지가 권하는 옆자리에 그녀는 구르다시피 들어와 앉았다. 아직 남아 있던 술기운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면 람보르기니란 차를 대체 언제 타보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만 있자, 안전벨트, 안전벨트……”
“그런 건 안 매도 돼요.”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쑥스럽게 들렸다. 이런 좋은 차를 갖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경의 의문은 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은 후에야 풀렸다.
“어…… 엔진 소리가 어딘가 특이한데요?”
“한 십 년 넘게 정비를 받지 않아서 그래요.”
엔진이 아니라 흡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라도 돌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선경은 들어본 적 있었다. 고향에 있는 수십 년 묵은 트랙터 소리가 지금의 소리와 가장 유사했다.
“그럼, 이 속도는 안전운전? 아니면 당신의 스타일?”
“아니요, 이건 차의 스타일이죠.”
털털거리며 시속 30km로 가는 람보르기니라니, 그야말로 선경이 죽었다 깨어나도 경험할 수 없을 신세계였다. 그녀는 조지의 손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이 멋쩍었는지 조지는 애써 차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이 차는 물려받고 나서 처음으로 몰아보는 거예요. 돈을 모아 차를 수리하는 동안, 시동 꺼진 차 안에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며 독학으로 운전을 익혔죠. 그리고 오늘 당신이 준 가이드 비 선금으로 기름을 사서 넣어 봤어요.”
“아, 이런, 맙소사.”
그러니까 자신은 장롱면허도 아니고 운전대를 두 번째 잡은 녀석의 옆에 올라탄 거였다. 선경은 화가 나기 전에 어이가 없어 킬킬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장롱면허에다 술까지 마신 자신보단 그래도 상태가 나아 보이긴 했다.
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도로가 워낙 짧다 보니 금세 도로 끝까지 도착했다. 도로 끝에는 ‘총 길이 18km, 제한속도 40km'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도 이딴 도로에서 람보르기니가 달렸네요.”
“뭘요, 아버지는 포르쉐도 갖고 있었던 걸요.”
“네, 네. 어련하셨겠어. 그러면 물려준 재산도 어마어마했겠네요.”
조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맛이 갔다 해도 코너링은 슈퍼카로서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 급격하게 요동치자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조지의 몸에 매달렸다.
“물려준 재산? 맞아요. 이런 슈퍼카들을 물려줬죠. 그리고 똥만도 못해진 삶의 터전도 함께 말이죠.”
그의 발이 액셀을 몇 번이나 거칠게 밟아댔다. 차의 육중한 신음이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계기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선경은 아까보다 차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지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자신에게도 옮겨왔기 때문인 걸까? 그는 조금 흥분했는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또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곳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돈이 많았던 시절 뭐든 돈의 힘으로 다 처리하다 보니, 돈이 바닥났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똥을 누고 자기 손으로 닦는 정도만 할 수 있었죠. 이 섬을 만들어 준 알바트로스는 똥을 누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었죠. 바로 하늘을 나는 것 말이죠.
난 이 섬에서 써먹지도 못할 똥으로 굳어지고 싶지 않아요. 난 언젠가 반드시 이 섬을 벗어날 거예요. 그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거예요!”
점점 억세지는 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선경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차는 그가 말하고 있는 알바트로스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지상에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저기, 이 섬에는 지금도 알바트로스가 살아요?”
“이젠 살지 않아요. 농작물도 키울 수 없는 땅에 살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주 가끔 날아다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럼 알바트로스가 어떻게 비행을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그걸 알고 있어요? 말해 줘요. 알고 싶어요!”
그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막 도로를 벗어나려던 람보르기니가 신음을 내며 방향을 비틀었다.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방향으로 기울자 그는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포옹에서 성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 살짝 걸친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선경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도 선경과 마찬가지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안하게 약동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선경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차 주인이 잠시 선경에게 집중했던 사이, 차는 다시 도로 끝까지 와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돌렸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U자를 그리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라고. 알바트로스는 날기 위해 언제까지고 앞으로 달려야 한다고. 방향을 바꿔 속도를 줄이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를 위해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등신아, 꽉 잡아!”
선경의 손이 드디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움켜쥐고 풀어냈다.
여지껏 타이어를, 엔진을 움켜쥔 족쇄였던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자 람보르기니의 RPM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힘을 받은 슈퍼카가 전력을 다해 질주를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정지상태에서 100미터를 지날 때까지 고작 4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자동차다웠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속도감에 조지는 비명을, 울음 같은 환호를 지르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불빛마저 드문 거리에서 그가 내지르는 괴성은 엔진 소리와 섞이며 수천 마리의 알바트로스가 일제히 우는 듯한 소리로 퍼져나갔다. 아마 지금의 자동차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짝짓기를 하러 내려오라고 호소하는 알바트로스와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선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의 클랙션에도 꿈쩍 않던 주민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그와 춤을 추자, 라고 선경은 결심했다. 조지의 짧은 도약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고 나면, 어디로든 좋으니 조지와 함께 가 춤을 출 것이다. 달빛을 받아 춤추며, 대지에 발을 구르며, 저무는 자들과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기도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은 조지의 성공적인 비행을 기원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기도의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이 섬이 똥 같지 않았다면, 난 여기서 섬과 함께 죽고 싶었을 거야.”
선경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첫 도약을 마무리할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
나우루, 淚淚淚
-열대 섬의 이국적 풍경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부수는 곳이지.
선배의 말이 선경의 귀에 맴돌았다. 불편한 좌석에서 선잠이 든 채, 선경은 그가 언제 그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헤어지기 이 주 전쯤이었던가? 그때 이미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했었다. 선배는 그녀의 나우루 행을 알고 바로 짐을 싸 뉴욕 특파원이란 명목으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그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라 쓸쓸하단 핑계로 잠깐 불장난을 했지만, 가족과 재결합할 기회가 생기니 그간 즐겼던 상대가 퍽도 거치적거렸을 테니까.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비행기 안은 바깥 못지않게 무덥고 눅진했다. 더위 때문에 선잠에서 깬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사이로 잿빛 섬의 모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쓰레기 더미가 뭉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구색만 겨우 갖춘 몇 그루의 나무들 정도로는 잿빛 섬을 치장하기 역부족이었다.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듯한 게 딱 자신의 신세인 듯해 선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파우치에서 싸구려 선크림을 꺼내 얼굴이 허옇게 뜨든 말든 신경질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드문드문 낀 하늘에 문득 새하얀 점 하나가 피어났다. 이쪽으로 다가오며 점점 커지는 점을 본 섬의 아이들이 환호하며 뛰어갔다. 사흘에 한 대씩 오는 저 비행기는 이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이자 수입원이었다. 구멍난 고기잡이 그물을 성의 없이 수선하던 어른들 몇도 잠시 일손을 놓고 어슬렁어슬렁 따라갔다.
새하얀 비행기는 과연 저 잿빛 섬에 내려도 좋은지 망설이는 듯 하늘을 몇 바퀴 돌다 착륙했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공항 입구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이들의 손에는 꽃이나 구슬로 만든 목걸이, 생선뼈로 만든 공예품 등이 들려 있었다. 한 개만 팔아도 몇 주치 용돈을 버는 셈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간절한 표정을 연습했다.
이윽고 공항 게이트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섬사람들 사이에 모처럼 외지인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아이들의 기념품을 잘 사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환호하며 여자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시도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안 사. 비켜."
선경은 눈을 험악하게 치켜뜨고 아이들에게 딱 두 마디를 내뱉었다. 싸구려 선크림에 얼굴이 허옇게 뜬 그녀가 노려보니 아이들은 제풀에 뒤로 물러났다. 들꽃을 대충 꺾어온 여자아이 하나는 꽃을 떨어뜨리고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돈 벌기 참 쉬워, 하고 선경은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곳에서 어떤 거라도 하나 사는 순간 전부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 굵은 아이 몇은 용기를 내 선경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해 이들을 뿌리쳤다.
"가이드! 가이드 어딨어요?"
여행사에서 미리 섭외해 둔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과연 제 시간에 나왔을까? 그녀는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비교적 마른 편이었지만, 어른들은 하나같이 뚱뚱한데다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못 사는 나라인데 왜 이렇게 뚱뚱한 거야?' 라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얼른 호텔이든 민박이든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를 알은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정말! 누구 조지라는 사람 알고 있어요? 영어 잘 하는 조지!"
'조지'란 이름을 듣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이드의 이름이 조지라는 것만 알고 있는 선경은 절박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모인 사람의 2/3가 'My name is George'라며 손을 드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Shit!'하고 혀를 차야 했다.
이 섬에 조지란 이름이 정말 흔한 건지, 아니면 모두가 사이좋게 구라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거기 당신, 모레까지 가이드 할 수 있어요?"
선경은 '조지' 중에서 가장 젊고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옷은 허름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흐리멍텅하진 않았다. 그녀가 겪었던 현지 가이드 중에는 굼벵이처럼 느려터지거나 그녀를 얕보고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조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보였다.
"문제 없습니다, 아가씨."
'조지'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짐을 받아들었다. 보수 얘기부터 꺼냈다간 길바닥에 서서 흥정을 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는 보수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무슨 얘기를 꺼내든, 지금 보여준 그의 쿨한 태도가 선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마워요. 영어는 잘 하나요, 조지?"
"적당히."
"알았어요. 이틀 동안 잘 부탁해요, 조지. 난 선경이라고 해요. 그럼 어서 호텔로 안내해 줘요."
벌써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선경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였다고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청년은 꼿꼿한 그녀의 등을 보고 잠시 감탄하다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급히 뛰어갔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선경은 궁금했던 것들을 속사포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섬 사람들 모두 영어를 잘 하나요?"
"아마 아가씨…… 아니, 선경 씨가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다고 보면 될 걸요."
"흠. 그럼 말조심해야겠네요. 그래도 인터뷰를 할 땐 편하겠는데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손수건을 파우치에 넣더니 조지의 손에 들린 여행가방에서 DSLR 카메라 가방을 꺼냈다. 원래 이런 취재여행은 사진사와 동행하는 게 맞지만, 선경은 부득부득 자기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우겼던 터였다. 사실 그녀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잘 나가는 여행 블로거였으니 회사가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이번 나우루 행은 상당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편집장이 '나우루라는 섬이 며칠 전 뉴스에 나왔었는데 말야. 이번 바캉스 특집 여행 섹션에 실어볼까?' 라고 반 농담으로 얘기했던 걸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다. 잠시 열대의 섬에서 기분을 전환해야겠다는 충동도 있었고, 회사에서 확 줄어버린 입지를 조금이나마 늘리려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하지만 뷰 파인더에 비치는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섬이 좀…… 지저분하네요."
'거지 같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선경은 투덜거렸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아스팔트 위로 진흙이 덕지덕지 처발라진 걸로도 모자란지, 길에는 오만가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길 옆에 쓰레기가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장 사이를 뚫고 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각종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가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어지간한 선경으로서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사진 찍는 걸 포기하고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현지인 앞에서 좀 유난을 떨었나 싶어 선경은 손수건 너머로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좀 예민해진 것 같네요."
"아니요. 종종 있는 일이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도로 집어넣었다. 선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느닷없이 정곡을 찔러 왔다.
"당신 역시 이 섬에 환상을 품고 왔군요. 그렇죠?"
선경은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녀의 안에서 나우루라는 이름은 제멋대로 부풀고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었다.
'인류에 의해 가라앉고 있는 섬'
투발루와 함께 조만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릴 나우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섬이 가라앉는 이유가 지구온난화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일에는 인류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짊어진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호사가들은 이런 섬에 고상하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마치 산호초로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 훌라춤을 추는 순박한 원주민들이 서서히 잠겨들어가듯이.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우루의 모습은 오히려 과거 방치되었던 난지도 쓰레기처리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지에서 느끼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행 전 현지조사를 최대한 삼가는 게 그녀의 여행법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듯했다.
쓰레기더미를 지나자 간신히 거리 같은 거리가 나왔다. 개성 없는 집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고, 사이사이 말라비틀어진 야자수 비스무리한 나무가 볼품없이 서 있었다.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도로도 거리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차종을 알 수 없는 몇 대의 차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사람이 창 너머로 선경과 조지를 흘끔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돌아갔다. 선경은 그들의 눈빛에서 생기란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 사는 도시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방글라데시니 부탄이니 하는 가난한 국가들을 다녀본 적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곳은 없었다.
“이 나라는 똥이죠.”
“네? 뭐라고요?”
속삭이듯 말한 조지의 말이 선경의 귀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치기도 조금 애매했다. 조지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군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글쎄요. 그냥 이곳이 엿 같다는 말과 동의어 아닌가요?”
갑자기 유식한 척 하려 드는 조지의 태도에 짜증이 난 선경은 생각나는 대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조지는 화내는 대신 아예 배를 붙들고 크게 웃어댔다.
“오, 이런! 대체 여기에 뭘 보러 온 겁니까? 이 섬이 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해요. 여긴 알바트로스의 똥으로 이루어진 섬이니까.”
"저, 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고말고요. 옛날부터 알바트로스가 싼 똥이 굳어서 인광석이 되고, 그 인광석이 무한정 있던 곳이 이곳이죠. 그걸 파내서 팔던 시절엔 우리는 지상 최고의 갑부였어요. 쓸 만한 인광석을 몽땅 채굴한 지금은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처럼 똥 같아졌지만.”
선경의 뺨이 순간 빨개진 것은 당연히 더위 외의 이유였다. 이런 열대 섬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조사를 해오지 않았던 실책이 또다시 드러나 버렸다. 게다가 자신을 약올리려는 의도인지 똥 같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도 짜증났다. 그래서 선경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딴지를 괜히 걸었다.
“허풍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인광석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그걸 팔아서 돈이 얼마나 나온다고……”
“연간 소득 3만 달러.”
순간 선경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한국도 GDP 2만 달러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조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1980년대에.”
이번에야말로 선경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지간히 걸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둘은 호텔 앞에 도착했다. 한 20년 전까진 번듯했을 것 같은 호텔이었다. 간판은 몇몇 글자가 떨어져나갔고, 정문 앞에는 콜라 캔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유리문 한쪽엔 바람만 불어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처럼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망설이지 않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 작은 섬에 호텔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선경도 그냥 들어갔다.
의외로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그 사이 선경이 나우루에 적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했다. 하루에 전기가 3시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입구에서 들었던 터라 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손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선경은 조지와 가이드비를 협상했다. 조지는 생각보다 가이드비를 싸게 불렀다. 어차피 회사 돈이지만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선경은 쾌히 승낙했다.
조지가 요구한 건 단 하나, 선금을 달라는 것뿐이었다.
“우리, 내일 볼 수 있는 거 맞죠?”
돈 먹고 튀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말 튀어버리면 선경으로선 잡을 도리가 없었다. 그땐 선경 혼자 섬을 돌아다니면서 세 걸음에 한 번씩 ‘조지, 이 개새끼!’하고 욕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섬은 고작해야 여의도 정도의 크기니 큰 무리 없이 취재를 마칠 자신이 있었다.
배짱 두둑한 선경을 보며 조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말고, 오늘 밤은 어때요?”
순간 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괜찮은 녀석이다 싶었더니 사실은 그냥 짐승이었나? 그때 그녀의 안색을 살핀 조지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오해할 만했군요.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본 거였어요.”
“확실하게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오해해버릴 테니까.”
그는 뭔가 말하려 하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악동처럼 씩 웃었다.
“안돼요. 그걸 지금 말하면 재미 없을 걸요. 하지만 장담해요. 당신은 절 보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올 거라는 걸.”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기자마자 그녀는 방문으로 뛰쳐가 문고리를 잡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다행히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선경은 조심조심 문을 걸어잠근 후 긴장이 풀려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생각 없이 그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던 게 하마터면 큰 일로 번질 뻔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긴장이 풀리자 긴 여행에 지친 그녀의 몸이 삐그덕거렸다. 한국에서 호주로, 호주에서 다시 이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과정은 역시 힘들었다. 게다가 이 섬이 산호초 대신 쓰레기로 가득 덮인 동네였다는 허탈함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냉장고 안에 가득한 맥주를 발견한 순간 그녀가 환호성을 지른 건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곯아떨어졌던 선경의 귀에 클랙션 소리가 시끄럽게 파고들었다. 베개를 머리 위에서 누르고, 이불까지 모아 덮어써도 클랙션 소리는 귀신같이 귀에 도달했다. 참다 못한 선경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한국말로 외쳤다.
“아, 차 좀 빼, 씨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제야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다. 한국에선, 그녀가 사는 서울의 반지하 집에선 흔히 겪곤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기는 나우루였다. 굴러다니는 차도 없는 동네에 무슨 클랙션이란 말인가?
선경은 팬티 바람에 시트만 대충 두른 채 비틀비틀 창가로 걸어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는데도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원래 주량은 맥주 한두 캔이었는데,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계속 홀짝이다 보니 다섯 캔이나 마셔버린 것이다. 그것도 빈속에! 아무래도 창가에서 계속 클랙션을 울리는 나쁜 놈의 새끼 머리 위에 토해야겠다고 선경은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클랙션의 주인공은 선경이 그 생각을 접어야 할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었다.
“어때요, 데리러 온댔죠?”
조지는 새하얀 차 안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렸다면 10분 안에 이마와 클랙션의 원치 않는 접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귀라도 먹었는지,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한 건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예요, 이 밤중에. 뭐하러 왔어요?”
“낮에 말했잖아요. 다시 온다고.”
그는 냉큼 대답하더니 차 안에서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차 문이 위로 스르륵 열렸다.
“……어?”
선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차 문은 날개를 딱 붙인 새처럼 위로 열려 있었다. 차에 문외한인 선경이라도 그렇게 열리는 차가 어떤 차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 내가 아는 그 차가 맞다면 놀라서 토해버릴 것 같은데…… 차종 좀 알려줄래요, 조지?”
“바로 놀라지 않는 걸 보고 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맞네요.”
조지는 혀가 살짝 꼬부라진 그녀를 보더니 호텔 1층에 바짝 갖다댔던 차를 조금 후진했다. 선경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다. 안전권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알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람보르기니를 모르는 여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으니.”
“우웩!”
2층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토사물을 본 조지는 스스로의 선택을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의 예상대로 선경은 밖으로 나왔다. 물로 입을 헹구긴 했지만 지독한 술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에 누워 그의 비웃음을 열심히 상상하고 있느니 차라리 눈앞에서 그의 비웃음을 보는 편이 나았다. 막상 그가 전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긴 했지만.
“이게 몇 억 한다는 그 차 맞죠? 가짜 아니죠?”
“네, 맞아요. 아버지가 물려준 제 차예요.”
“아니, 아버지가 물려주다니, 무슨 갑부예요?”
“한때 갑부였던 분이죠. 이 섬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랬겠지만. 자, 타요.”
조지가 권하는 옆자리에 그녀는 구르다시피 들어와 앉았다. 아직 남아 있던 술기운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면 람보르기니란 차를 대체 언제 타보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만 있자, 안전벨트, 안전벨트……”
“그런 건 안 매도 돼요.”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쑥스럽게 들렸다. 이런 좋은 차를 갖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경의 의문은 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은 후에야 풀렸다.
“어…… 엔진 소리가 어딘가 특이한데요?”
“한 십 년 넘게 정비를 받지 않아서 그래요.”
엔진이 아니라 흡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라도 돌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선경은 들어본 적 있었다. 고향에 있는 수십 년 묵은 트랙터 소리가 지금의 소리와 가장 유사했다.
“그럼, 이 속도는 안전운전? 아니면 당신의 스타일?”
“아니요, 이건 차의 스타일이죠.”
털털거리며 시속 30km로 가는 람보르기니라니, 그야말로 선경이 죽었다 깨어나도 경험할 수 없을 신세계였다. 그녀는 조지의 손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이 멋쩍었는지 조지는 애써 차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이 차는 물려받고 나서 처음으로 몰아보는 거예요. 돈을 모아 차를 수리하는 동안, 시동 꺼진 차 안에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며 독학으로 운전을 익혔죠. 그리고 오늘 당신이 준 가이드 비 선금으로 기름을 사서 넣어 봤어요.”
“아, 이런, 맙소사.”
그러니까 자신은 장롱면허도 아니고 운전대를 두 번째 잡은 녀석의 옆에 올라탄 거였다. 선경은 화가 나기 전에 어이가 없어 킬킬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장롱면허에다 술까지 마신 자신보단 그래도 상태가 나아 보이긴 했다.
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도로가 워낙 짧다 보니 금세 도로 끝까지 도착했다. 도로 끝에는 ‘총 길이 18km, 제한속도 40km'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도 이딴 도로에서 람보르기니가 달렸네요.”
“뭘요, 아버지는 포르쉐도 갖고 있었던 걸요.”
“네, 네. 어련하셨겠어. 그러면 물려준 재산도 어마어마했겠네요.”
조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맛이 갔다 해도 코너링은 슈퍼카로서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 급격하게 요동치자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조지의 몸에 매달렸다.
“물려준 재산? 맞아요. 이런 슈퍼카들을 물려줬죠. 그리고 똥만도 못해진 삶의 터전도 함께 말이죠.”
그의 발이 액셀을 몇 번이나 거칠게 밟아댔다. 차의 육중한 신음이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계기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선경은 아까보다 차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지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자신에게도 옮겨왔기 때문인 걸까? 그는 조금 흥분했는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또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곳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돈이 많았던 시절 뭐든 돈의 힘으로 다 처리하다 보니, 돈이 바닥났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똥을 누고 자기 손으로 닦는 정도만 할 수 있었죠. 이 섬을 만들어 준 알바트로스는 똥을 누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었죠. 바로 하늘을 나는 것 말이죠.
난 이 섬에서 써먹지도 못할 똥으로 굳어지고 싶지 않아요. 난 언젠가 반드시 이 섬을 벗어날 거예요. 그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거예요!”
점점 억세지는 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선경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차는 그가 말하고 있는 알바트로스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지상에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저기, 이 섬에는 지금도 알바트로스가 살아요?”
“이젠 살지 않아요. 농작물도 키울 수 없는 땅에 살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주 가끔 날아다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럼 알바트로스가 어떻게 비행을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그걸 알고 있어요? 말해 줘요. 알고 싶어요!”
그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막 도로를 벗어나려던 람보르기니가 신음을 내며 방향을 비틀었다.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방향으로 기울자 그는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포옹에서 성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 살짝 걸친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선경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도 선경과 마찬가지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안하게 약동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선경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차 주인이 잠시 선경에게 집중했던 사이, 차는 다시 도로 끝까지 와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돌렸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U자를 그리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라고. 알바트로스는 날기 위해 언제까지고 앞으로 달려야 한다고. 방향을 바꿔 속도를 줄이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를 위해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등신아, 꽉 잡아!”
선경의 손이 드디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움켜쥐고 풀어냈다.
여지껏 타이어를, 엔진을 움켜쥔 족쇄였던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자 람보르기니의 RPM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힘을 받은 슈퍼카가 전력을 다해 질주를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정지상태에서 100미터를 지날 때까지 고작 4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자동차다웠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속도감에 조지는 비명을, 울음 같은 환호를 지르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불빛마저 드문 거리에서 그가 내지르는 괴성은 엔진 소리와 섞이며 수천 마리의 알바트로스가 일제히 우는 듯한 소리로 퍼져나갔다. 아마 지금의 자동차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짝짓기를 하러 내려오라고 호소하는 알바트로스와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선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의 클랙션에도 꿈쩍 않던 주민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그와 춤을 추자, 라고 선경은 결심했다. 조지의 짧은 도약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고 나면, 어디로든 좋으니 조지와 함께 가 춤을 출 것이다. 달빛을 받아 춤추며, 대지에 발을 구르며, 저무는 자들과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기도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은 조지의 성공적인 비행을 기원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기도의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이 섬이 똥 같지 않았다면, 난 여기서 섬과 함께 죽고 싶었을 거야.”
선경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첫 도약을 마무리할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
———————————————————————————————————-
나우루, 淚淚淚
-열대 섬의 이국적 풍경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부수는 곳이지.
선배의 말이 선경의 귀에 맴돌았다. 불편한 좌석에서 선잠이 든 채, 선경은 그가 언제 그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헤어지기 이 주 전쯤이었던가? 그때 이미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했었다. 선배는 그녀의 나우루 행을 알고 바로 짐을 싸 뉴욕 특파원이란 명목으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그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라 쓸쓸하단 핑계로 잠깐 불장난을 했지만, 가족과 재결합할 기회가 생기니 그간 즐겼던 상대가 퍽도 거치적거렸을 테니까.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비행기 안은 바깥 못지않게 무덥고 눅진했다. 더위 때문에 선잠에서 깬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사이로 잿빛 섬의 모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쓰레기 더미가 뭉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구색만 겨우 갖춘 몇 그루의 나무들 정도로는 잿빛 섬을 치장하기 역부족이었다.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듯한 게 딱 자신의 신세인 듯해 선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파우치에서 싸구려 선크림을 꺼내 얼굴이 허옇게 뜨든 말든 신경질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드문드문 낀 하늘에 문득 새하얀 점 하나가 피어났다. 이쪽으로 다가오며 점점 커지는 점을 본 섬의 아이들이 환호하며 뛰어갔다. 사흘에 한 대씩 오는 저 비행기는 이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이자 수입원이었다. 구멍난 고기잡이 그물을 성의 없이 수선하던 어른들 몇도 잠시 일손을 놓고 어슬렁어슬렁 따라갔다.
새하얀 비행기는 과연 저 잿빛 섬에 내려도 좋은지 망설이는 듯 하늘을 몇 바퀴 돌다 착륙했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공항 입구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이들의 손에는 꽃이나 구슬로 만든 목걸이, 생선뼈로 만든 공예품 등이 들려 있었다. 한 개만 팔아도 몇 주치 용돈을 버는 셈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간절한 표정을 연습했다.
이윽고 공항 게이트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섬사람들 사이에 모처럼 외지인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아이들의 기념품을 잘 사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환호하며 여자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시도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안 사. 비켜."
선경은 눈을 험악하게 치켜뜨고 아이들에게 딱 두 마디를 내뱉었다. 싸구려 선크림에 얼굴이 허옇게 뜬 그녀가 노려보니 아이들은 제풀에 뒤로 물러났다. 들꽃을 대충 꺾어온 여자아이 하나는 꽃을 떨어뜨리고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돈 벌기 참 쉬워, 하고 선경은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곳에서 어떤 거라도 하나 사는 순간 전부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 굵은 아이 몇은 용기를 내 선경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해 이들을 뿌리쳤다.
"가이드! 가이드 어딨어요?"
여행사에서 미리 섭외해 둔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과연 제 시간에 나왔을까? 그녀는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비교적 마른 편이었지만, 어른들은 하나같이 뚱뚱한데다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못 사는 나라인데 왜 이렇게 뚱뚱한 거야?' 라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얼른 호텔이든 민박이든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를 알은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정말! 누구 조지라는 사람 알고 있어요? 영어 잘 하는 조지!"
'조지'란 이름을 듣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이드의 이름이 조지라는 것만 알고 있는 선경은 절박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모인 사람의 2/3가 'My name is George'라며 손을 드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Shit!'하고 혀를 차야 했다.
이 섬에 조지란 이름이 정말 흔한 건지, 아니면 모두가 사이좋게 구라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거기 당신, 모레까지 가이드 할 수 있어요?"
선경은 '조지' 중에서 가장 젊고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옷은 허름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흐리멍텅하진 않았다. 그녀가 겪었던 현지 가이드 중에는 굼벵이처럼 느려터지거나 그녀를 얕보고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조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보였다.
"문제 없습니다, 아가씨."
'조지'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짐을 받아들었다. 보수 얘기부터 꺼냈다간 길바닥에 서서 흥정을 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는 보수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무슨 얘기를 꺼내든, 지금 보여준 그의 쿨한 태도가 선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마워요. 영어는 잘 하나요, 조지?"
"적당히."
"알았어요. 이틀 동안 잘 부탁해요, 조지. 난 선경이라고 해요. 그럼 어서 호텔로 안내해 줘요."
벌써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선경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였다고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청년은 꼿꼿한 그녀의 등을 보고 잠시 감탄하다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급히 뛰어갔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선경은 궁금했던 것들을 속사포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섬 사람들 모두 영어를 잘 하나요?"
"아마 아가씨…… 아니, 선경 씨가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다고 보면 될 걸요."
"흠. 그럼 말조심해야겠네요. 그래도 인터뷰를 할 땐 편하겠는데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손수건을 파우치에 넣더니 조지의 손에 들린 여행가방에서 DSLR 카메라 가방을 꺼냈다. 원래 이런 취재여행은 사진사와 동행하는 게 맞지만, 선경은 부득부득 자기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우겼던 터였다. 사실 그녀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잘 나가는 여행 블로거였으니 회사가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이번 나우루 행은 상당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편집장이 '나우루라는 섬이 며칠 전 뉴스에 나왔었는데 말야. 이번 바캉스 특집 여행 섹션에 실어볼까?' 라고 반 농담으로 얘기했던 걸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다. 잠시 열대의 섬에서 기분을 전환해야겠다는 충동도 있었고, 회사에서 확 줄어버린 입지를 조금이나마 늘리려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하지만 뷰 파인더에 비치는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섬이 좀…… 지저분하네요."
'거지 같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선경은 투덜거렸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아스팔트 위로 진흙이 덕지덕지 처발라진 걸로도 모자란지, 길에는 오만가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길 옆에 쓰레기가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장 사이를 뚫고 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각종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가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어지간한 선경으로서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사진 찍는 걸 포기하고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현지인 앞에서 좀 유난을 떨었나 싶어 선경은 손수건 너머로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좀 예민해진 것 같네요."
"아니요. 종종 있는 일이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도로 집어넣었다. 선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느닷없이 정곡을 찔러 왔다.
"당신 역시 이 섬에 환상을 품고 왔군요. 그렇죠?"
선경은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녀의 안에서 나우루라는 이름은 제멋대로 부풀고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었다.
'인류에 의해 가라앉고 있는 섬'
투발루와 함께 조만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릴 나우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섬이 가라앉는 이유가 지구온난화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일에는 인류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짊어진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호사가들은 이런 섬에 고상하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마치 산호초로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 훌라춤을 추는 순박한 원주민들이 서서히 잠겨들어가듯이.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우루의 모습은 오히려 과거 방치되었던 난지도 쓰레기처리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지에서 느끼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행 전 현지조사를 최대한 삼가는 게 그녀의 여행법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듯했다.
쓰레기더미를 지나자 간신히 거리 같은 거리가 나왔다. 개성 없는 집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고, 사이사이 말라비틀어진 야자수 비스무리한 나무가 볼품없이 서 있었다.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도로도 거리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차종을 알 수 없는 몇 대의 차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사람이 창 너머로 선경과 조지를 흘끔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돌아갔다. 선경은 그들의 눈빛에서 생기란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 사는 도시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방글라데시니 부탄이니 하는 가난한 국가들을 다녀본 적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곳은 없었다.
“이 나라는 똥이죠.”
“네? 뭐라고요?”
속삭이듯 말한 조지의 말이 선경의 귀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치기도 조금 애매했다. 조지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군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글쎄요. 그냥 이곳이 엿 같다는 말과 동의어 아닌가요?”
갑자기 유식한 척 하려 드는 조지의 태도에 짜증이 난 선경은 생각나는 대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조지는 화내는 대신 아예 배를 붙들고 크게 웃어댔다.
“오, 이런! 대체 여기에 뭘 보러 온 겁니까? 이 섬이 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해요. 여긴 알바트로스의 똥으로 이루어진 섬이니까.”
"저, 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고말고요. 옛날부터 알바트로스가 싼 똥이 굳어서 인광석이 되고, 그 인광석이 무한정 있던 곳이 이곳이죠. 그걸 파내서 팔던 시절엔 우리는 지상 최고의 갑부였어요. 쓸 만한 인광석을 몽땅 채굴한 지금은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처럼 똥 같아졌지만.”
선경의 뺨이 순간 빨개진 것은 당연히 더위 외의 이유였다. 이런 열대 섬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조사를 해오지 않았던 실책이 또다시 드러나 버렸다. 게다가 자신을 약올리려는 의도인지 똥 같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도 짜증났다. 그래서 선경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딴지를 괜히 걸었다.
“허풍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인광석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그걸 팔아서 돈이 얼마나 나온다고……”
“연간 소득 3만 달러.”
순간 선경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한국도 GDP 2만 달러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조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1980년대에.”
이번에야말로 선경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지간히 걸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둘은 호텔 앞에 도착했다. 한 20년 전까진 번듯했을 것 같은 호텔이었다. 간판은 몇몇 글자가 떨어져나갔고, 정문 앞에는 콜라 캔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유리문 한쪽엔 바람만 불어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처럼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망설이지 않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 작은 섬에 호텔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선경도 그냥 들어갔다.
의외로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그 사이 선경이 나우루에 적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했다. 하루에 전기가 3시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입구에서 들었던 터라 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손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선경은 조지와 가이드비를 협상했다. 조지는 생각보다 가이드비를 싸게 불렀다. 어차피 회사 돈이지만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선경은 쾌히 승낙했다.
조지가 요구한 건 단 하나, 선금을 달라는 것뿐이었다.
“우리, 내일 볼 수 있는 거 맞죠?”
돈 먹고 튀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말 튀어버리면 선경으로선 잡을 도리가 없었다. 그땐 선경 혼자 섬을 돌아다니면서 세 걸음에 한 번씩 ‘조지, 이 개새끼!’하고 욕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섬은 고작해야 여의도 정도의 크기니 큰 무리 없이 취재를 마칠 자신이 있었다.
배짱 두둑한 선경을 보며 조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말고, 오늘 밤은 어때요?”
순간 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괜찮은 녀석이다 싶었더니 사실은 그냥 짐승이었나? 그때 그녀의 안색을 살핀 조지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오해할 만했군요.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본 거였어요.”
“확실하게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오해해버릴 테니까.”
그는 뭔가 말하려 하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악동처럼 씩 웃었다.
“안돼요. 그걸 지금 말하면 재미 없을 걸요. 하지만 장담해요. 당신은 절 보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올 거라는 걸.”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기자마자 그녀는 방문으로 뛰쳐가 문고리를 잡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다행히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선경은 조심조심 문을 걸어잠근 후 긴장이 풀려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생각 없이 그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던 게 하마터면 큰 일로 번질 뻔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긴장이 풀리자 긴 여행에 지친 그녀의 몸이 삐그덕거렸다. 한국에서 호주로, 호주에서 다시 이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과정은 역시 힘들었다. 게다가 이 섬이 산호초 대신 쓰레기로 가득 덮인 동네였다는 허탈함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냉장고 안에 가득한 맥주를 발견한 순간 그녀가 환호성을 지른 건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곯아떨어졌던 선경의 귀에 클랙션 소리가 시끄럽게 파고들었다. 베개를 머리 위에서 누르고, 이불까지 모아 덮어써도 클랙션 소리는 귀신같이 귀에 도달했다. 참다 못한 선경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한국말로 외쳤다.
“아, 차 좀 빼, 씨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제야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다. 한국에선, 그녀가 사는 서울의 반지하 집에선 흔히 겪곤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기는 나우루였다. 굴러다니는 차도 없는 동네에 무슨 클랙션이란 말인가?
선경은 팬티 바람에 시트만 대충 두른 채 비틀비틀 창가로 걸어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는데도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원래 주량은 맥주 한두 캔이었는데,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계속 홀짝이다 보니 다섯 캔이나 마셔버린 것이다. 그것도 빈속에! 아무래도 창가에서 계속 클랙션을 울리는 나쁜 놈의 새끼 머리 위에 토해야겠다고 선경은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클랙션의 주인공은 선경이 그 생각을 접어야 할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었다.
“어때요, 데리러 온댔죠?”
조지는 새하얀 차 안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렸다면 10분 안에 이마와 클랙션의 원치 않는 접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귀라도 먹었는지,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한 건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예요, 이 밤중에. 뭐하러 왔어요?”
“낮에 말했잖아요. 다시 온다고.”
그는 냉큼 대답하더니 차 안에서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차 문이 위로 스르륵 열렸다.
“……어?”
선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차 문은 날개를 딱 붙인 새처럼 위로 열려 있었다. 차에 문외한인 선경이라도 그렇게 열리는 차가 어떤 차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 내가 아는 그 차가 맞다면 놀라서 토해버릴 것 같은데…… 차종 좀 알려줄래요, 조지?”
“바로 놀라지 않는 걸 보고 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맞네요.”
조지는 혀가 살짝 꼬부라진 그녀를 보더니 호텔 1층에 바짝 갖다댔던 차를 조금 후진했다. 선경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다. 안전권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알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람보르기니를 모르는 여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으니.”
“우웩!”
2층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토사물을 본 조지는 스스로의 선택을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의 예상대로 선경은 밖으로 나왔다. 물로 입을 헹구긴 했지만 지독한 술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에 누워 그의 비웃음을 열심히 상상하고 있느니 차라리 눈앞에서 그의 비웃음을 보는 편이 나았다. 막상 그가 전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긴 했지만.
“이게 몇 억 한다는 그 차 맞죠? 가짜 아니죠?”
“네, 맞아요. 아버지가 물려준 제 차예요.”
“아니, 아버지가 물려주다니, 무슨 갑부예요?”
“한때 갑부였던 분이죠. 이 섬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랬겠지만. 자, 타요.”
조지가 권하는 옆자리에 그녀는 구르다시피 들어와 앉았다. 아직 남아 있던 술기운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면 람보르기니란 차를 대체 언제 타보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만 있자, 안전벨트, 안전벨트……”
“그런 건 안 매도 돼요.”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쑥스럽게 들렸다. 이런 좋은 차를 갖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경의 의문은 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은 후에야 풀렸다.
“어…… 엔진 소리가 어딘가 특이한데요?”
“한 십 년 넘게 정비를 받지 않아서 그래요.”
엔진이 아니라 흡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라도 돌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선경은 들어본 적 있었다. 고향에 있는 수십 년 묵은 트랙터 소리가 지금의 소리와 가장 유사했다.
“그럼, 이 속도는 안전운전? 아니면 당신의 스타일?”
“아니요, 이건 차의 스타일이죠.”
털털거리며 시속 30km로 가는 람보르기니라니, 그야말로 선경이 죽었다 깨어나도 경험할 수 없을 신세계였다. 그녀는 조지의 손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이 멋쩍었는지 조지는 애써 차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이 차는 물려받고 나서 처음으로 몰아보는 거예요. 돈을 모아 차를 수리하는 동안, 시동 꺼진 차 안에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며 독학으로 운전을 익혔죠. 그리고 오늘 당신이 준 가이드 비 선금으로 기름을 사서 넣어 봤어요.”
“아, 이런, 맙소사.”
그러니까 자신은 장롱면허도 아니고 운전대를 두 번째 잡은 녀석의 옆에 올라탄 거였다. 선경은 화가 나기 전에 어이가 없어 킬킬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장롱면허에다 술까지 마신 자신보단 그래도 상태가 나아 보이긴 했다.
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도로가 워낙 짧다 보니 금세 도로 끝까지 도착했다. 도로 끝에는 ‘총 길이 18km, 제한속도 40km'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도 이딴 도로에서 람보르기니가 달렸네요.”
“뭘요, 아버지는 포르쉐도 갖고 있었던 걸요.”
“네, 네. 어련하셨겠어. 그러면 물려준 재산도 어마어마했겠네요.”
조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맛이 갔다 해도 코너링은 슈퍼카로서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 급격하게 요동치자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조지의 몸에 매달렸다.
“물려준 재산? 맞아요. 이런 슈퍼카들을 물려줬죠. 그리고 똥만도 못해진 삶의 터전도 함께 말이죠.”
그의 발이 액셀을 몇 번이나 거칠게 밟아댔다. 차의 육중한 신음이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계기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선경은 아까보다 차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지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자신에게도 옮겨왔기 때문인 걸까? 그는 조금 흥분했는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또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곳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돈이 많았던 시절 뭐든 돈의 힘으로 다 처리하다 보니, 돈이 바닥났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똥을 누고 자기 손으로 닦는 정도만 할 수 있었죠. 이 섬을 만들어 준 알바트로스는 똥을 누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었죠. 바로 하늘을 나는 것 말이죠.
난 이 섬에서 써먹지도 못할 똥으로 굳어지고 싶지 않아요. 난 언젠가 반드시 이 섬을 벗어날 거예요. 그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거예요!”
점점 억세지는 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선경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차는 그가 말하고 있는 알바트로스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지상에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저기, 이 섬에는 지금도 알바트로스가 살아요?”
“이젠 살지 않아요. 농작물도 키울 수 없는 땅에 살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주 가끔 날아다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럼 알바트로스가 어떻게 비행을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그걸 알고 있어요? 말해 줘요. 알고 싶어요!”
그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막 도로를 벗어나려던 람보르기니가 신음을 내며 방향을 비틀었다.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방향으로 기울자 그는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포옹에서 성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 살짝 걸친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선경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도 선경과 마찬가지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안하게 약동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선경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차 주인이 잠시 선경에게 집중했던 사이, 차는 다시 도로 끝까지 와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돌렸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U자를 그리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라고. 알바트로스는 날기 위해 언제까지고 앞으로 달려야 한다고. 방향을 바꿔 속도를 줄이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를 위해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등신아, 꽉 잡아!”
선경의 손이 드디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움켜쥐고 풀어냈다.
여지껏 타이어를, 엔진을 움켜쥔 족쇄였던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자 람보르기니의 RPM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힘을 받은 슈퍼카가 전력을 다해 질주를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정지상태에서 100미터를 지날 때까지 고작 4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자동차다웠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속도감에 조지는 비명을, 울음 같은 환호를 지르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불빛마저 드문 거리에서 그가 내지르는 괴성은 엔진 소리와 섞이며 수천 마리의 알바트로스가 일제히 우는 듯한 소리로 퍼져나갔다. 아마 지금의 자동차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짝짓기를 하러 내려오라고 호소하는 알바트로스와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선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의 클랙션에도 꿈쩍 않던 주민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그와 춤을 추자, 라고 선경은 결심했다. 조지의 짧은 도약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고 나면, 어디로든 좋으니 조지와 함께 가 춤을 출 것이다. 달빛을 받아 춤추며, 대지에 발을 구르며, 저무는 자들과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기도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은 조지의 성공적인 비행을 기원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기도의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이 섬이 똥 같지 않았다면, 난 여기서 섬과 함께 죽고 싶었을 거야.”
선경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첫 도약을 마무리할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
나우루, 淚淚淚
나우루, 淚淚淚
-열대 섬의 이국적 풍경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부수는 곳이지.
선배의 말이 선경의 귀에 맴돌았다. 불편한 좌석에서 선잠이 든 채, 선경은 그가 언제 그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헤어지기 이 주 전쯤이었던가? 그때 이미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했었다. 선배는 그녀의 나우루 행을 알고 바로 짐을 싸 뉴욕 특파원이란 명목으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그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라 쓸쓸하단 핑계로 잠깐 불장난을 했지만, 가족과 재결합할 기회가 생기니 그간 즐겼던 상대가 퍽도 거치적거렸을 테니까.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비행기 안은 바깥 못지않게 무덥고 눅진했다. 더위 때문에 선잠에서 깬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사이로 잿빛 섬의 모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쓰레기 더미가 뭉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구색만 겨우 갖춘 몇 그루의 나무들 정도로는 잿빛 섬을 치장하기 역부족이었다.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듯한 게 딱 자신의 신세인 듯해 선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파우치에서 싸구려 선크림을 꺼내 얼굴이 허옇게 뜨든 말든 신경질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드문드문 낀 하늘에 문득 새하얀 점 하나가 피어났다. 이쪽으로 다가오며 점점 커지는 점을 본 섬의 아이들이 환호하며 뛰어갔다. 사흘에 한 대씩 오는 저 비행기는 이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이자 수입원이었다. 구멍난 고기잡이 그물을 성의 없이 수선하던 어른들 몇도 잠시 일손을 놓고 어슬렁어슬렁 따라갔다.
새하얀 비행기는 과연 저 잿빛 섬에 내려도 좋은지 망설이는 듯 하늘을 몇 바퀴 돌다 착륙했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공항 입구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이들의 손에는 꽃이나 구슬로 만든 목걸이, 생선뼈로 만든 공예품 등이 들려 있었다. 한 개만 팔아도 몇 주치 용돈을 버는 셈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간절한 표정을 연습했다.
이윽고 공항 게이트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섬사람들 사이에 모처럼 외지인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아이들의 기념품을 잘 사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환호하며 여자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시도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안 사. 비켜."
선경은 눈을 험악하게 치켜뜨고 아이들에게 딱 두 마디를 내뱉었다. 싸구려 선크림에 얼굴이 허옇게 뜬 그녀가 노려보니 아이들은 제풀에 뒤로 물러났다. 들꽃을 대충 꺾어온 여자아이 하나는 꽃을 떨어뜨리고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돈 벌기 참 쉬워, 하고 선경은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곳에서 어떤 거라도 하나 사는 순간 전부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 굵은 아이 몇은 용기를 내 선경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해 이들을 뿌리쳤다.
"가이드! 가이드 어딨어요?"
여행사에서 미리 섭외해 둔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과연 제 시간에 나왔을까? 그녀는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비교적 마른 편이었지만, 어른들은 하나같이 뚱뚱한데다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못 사는 나라인데 왜 이렇게 뚱뚱한 거야?' 라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얼른 호텔이든 민박이든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를 알은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정말! 누구 조지라는 사람 알고 있어요? 영어 잘 하는 조지!"
'조지'란 이름을 듣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이드의 이름이 조지라는 것만 알고 있는 선경은 절박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모인 사람의 2/3가 'My name is George'라며 손을 드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Shit!'하고 혀를 차야 했다.
이 섬에 조지란 이름이 정말 흔한 건지, 아니면 모두가 사이좋게 구라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거기 당신, 모레까지 가이드 할 수 있어요?"
선경은 '조지' 중에서 가장 젊고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옷은 허름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흐리멍텅하진 않았다. 그녀가 겪었던 현지 가이드 중에는 굼벵이처럼 느려터지거나 그녀를 얕보고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조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보였다.
"문제 없습니다, 아가씨."
'조지'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짐을 받아들었다. 보수 얘기부터 꺼냈다간 길바닥에 서서 흥정을 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는 보수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무슨 얘기를 꺼내든, 지금 보여준 그의 쿨한 태도가 선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마워요. 영어는 잘 하나요, 조지?"
"적당히."
"알았어요. 이틀 동안 잘 부탁해요, 조지. 난 선경이라고 해요. 그럼 어서 호텔로 안내해 줘요."
벌써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선경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였다고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청년은 꼿꼿한 그녀의 등을 보고 잠시 감탄하다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급히 뛰어갔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선경은 궁금했던 것들을 속사포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섬 사람들 모두 영어를 잘 하나요?"
"아마 아가씨…… 아니, 선경 씨가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다고 보면 될 걸요."
"흠. 그럼 말조심해야겠네요. 그래도 인터뷰를 할 땐 편하겠는데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손수건을 파우치에 넣더니 조지의 손에 들린 여행가방에서 DSLR 카메라 가방을 꺼냈다. 원래 이런 취재여행은 사진사와 동행하는 게 맞지만, 선경은 부득부득 자기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우겼던 터였다. 사실 그녀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잘 나가는 여행 블로거였으니 회사가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이번 나우루 행은 상당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편집장이 '나우루라는 섬이 며칠 전 뉴스에 나왔었는데 말야. 이번 바캉스 특집 여행 섹션에 실어볼까?' 라고 반 농담으로 얘기했던 걸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다. 잠시 열대의 섬에서 기분을 전환해야겠다는 충동도 있었고, 회사에서 확 줄어버린 입지를 조금이나마 늘리려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하지만 뷰 파인더에 비치는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섬이 좀…… 지저분하네요."
'거지 같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선경은 투덜거렸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간 아스팔트 위로 진흙이 덕지덕지 처발라진 걸로도 모자란지, 길에는 오만가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길 옆에 쓰레기가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장 사이를 뚫고 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각종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가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어지간한 선경으로서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사진 찍는 걸 포기하고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현지인 앞에서 좀 유난을 떨었나 싶어 선경은 손수건 너머로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좀 예민해진 것 같네요."
"아니요. 종종 있는 일이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도로 집어넣었다. 선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느닷없이 정곡을 찔러 왔다.
"당신 역시 이 섬에 환상을 품고 왔군요. 그렇죠?"
선경은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녀의 안에서 나우루라는 이름은 제멋대로 부풀고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었다.
'인류에 의해 가라앉고 있는 섬'
투발루와 함께 조만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릴 나우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섬이 가라앉는 이유가 지구온난화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일에는 인류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짊어진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호사가들은 이런 섬에 고상하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마치 산호초로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 훌라춤을 추는 순박한 원주민들이 서서히 잠겨들어가듯이.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우루의 모습은 오히려 과거 방치되었던 난지도 쓰레기처리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지에서 느끼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행 전 현지조사를 최대한 삼가는 게 그녀의 여행법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듯했다.
쓰레기더미를 지나자 간신히 거리 같은 거리가 나왔다. 개성 없는 집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고, 사이사이 말라비틀어진 야자수 비스무리한 나무가 볼품없이 서 있었다.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도로도 거리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차종을 알 수 없는 몇 대의 차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사람이 창 너머로 선경과 조지를 흘끔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돌아갔다. 선경은 그들의 눈빛에서 생기란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 사는 도시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방글라데시니 부탄이니 하는 가난한 국가들을 다녀본 적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곳은 없었다.
“이 나라는 똥이죠.”
“네? 뭐라고요?”
속삭이듯 말한 조지의 말이 선경의 귀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치기도 조금 애매했다. 조지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군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글쎄요. 그냥 이곳이 엿 같다는 말과 동의어 아닌가요?”
갑자기 유식한 척 하려 드는 조지의 태도에 짜증이 난 선경은 생각나는 대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조지는 화내는 대신 아예 배를 붙들고 크게 웃어댔다.
“오, 이런! 대체 여기에 뭘 보러 온 겁니까? 이 섬이 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해요. 여긴 알바트로스의 똥으로 이루어진 섬이니까.”
"저, 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고말고요. 옛날부터 알바트로스가 싼 똥이 굳어서 인광석이 되고, 그 인광석이 무한정 있던 곳이 이곳이죠. 그걸 파내서 팔던 시절엔 우리는 지상 최고의 갑부였어요. 쓸 만한 인광석을 몽땅 채굴한 지금은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처럼 똥 같아졌지만.”
선경의 뺨이 순간 빨개진 것은 당연히 더위 외의 이유였다. 이런 열대 섬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조사를 해오지 않았던 실책이 또다시 드러나 버렸다. 게다가 자신을 약올리려는 의도인지 똥 같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도 짜증났다. 그래서 선경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딴지를 괜히 걸었다.
“허풍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인광석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그걸 팔아서 돈이 얼마나 나온다고……”
“연간 소득 3만 달러.”
순간 선경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한국도 GDP 2만 달러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조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1980년대에.”
이번에야말로 선경은 할 말을 잃었다.
어지간히 걸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둘은 호텔 앞에 도착했다. 한 20년 전까진 번듯했을 것 같은 호텔이었다. 간판은 몇몇 글자가 떨어져나갔고, 정문 앞에는 콜라 캔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유리문 한쪽엔 바람만 불어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처럼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망설이지 않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 작은 섬에 호텔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선경도 그냥 들어갔다.
의외로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그 사이 선경이 나우루에 적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했다. 하루에 전기가 3시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입구에서 들었던 터라 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손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선경은 조지와 가이드비를 협상했다. 조지는 생각보다 가이드비를 싸게 불렀다. 어차피 회사 돈이지만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선경은 쾌히 승낙했다.
조지가 요구한 건 단 하나, 선금을 달라는 것뿐이었다.
“우리, 내일 볼 수 있는 거 맞죠?”
돈 먹고 튀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말 튀어버리면 선경으로선 잡을 도리가 없었다. 그땐 선경 혼자 섬을 돌아다니면서 세 걸음에 한 번씩 ‘조지, 이 개새끼!’하고 욕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섬은 고작해야 여의도 정도의 크기니 큰 무리 없이 취재를 마칠 자신이 있었다.
배짱 두둑한 선경을 보며 조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말고, 오늘 밤은 어때요?”
순간 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괜찮은 녀석이다 싶었더니 사실은 그냥 짐승이었나? 그때 그녀의 안색을 살핀 조지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오해할 만했군요.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본 거였어요.”
“확실하게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오해해버릴 테니까.”
그는 뭔가 말하려 하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악동처럼 씩 웃었다.
“안돼요. 그걸 지금 말하면 재미 없을 걸요. 하지만 장담해요. 당신은 절 보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올 거라는 걸.”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기자마자 그녀는 방문으로 뛰쳐가 문고리를 잡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다행히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계단 아래로 사라져갔다. 선경은 조심조심 문을 걸어잠근 후 긴장이 풀려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생각 없이 그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던 게 하마터면 큰 일로 번질 뻔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긴장이 풀리자 긴 여행에 지친 그녀의 몸이 삐그덕거렸다. 한국에서 호주로, 호주에서 다시 이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과정은 역시 힘들었다. 게다가 이 섬이 산호초 대신 쓰레기로 가득 덮인 동네였다는 허탈함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냉장고 안에 가득한 맥주를 발견한 순간 그녀가 환호성을 지른 건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곯아떨어졌던 선경의 귀에 클랙션 소리가 시끄럽게 파고들었다. 베개를 머리 위에서 누르고, 이불까지 모아 덮어써도 클랙션 소리는 귀신같이 귀에 도달했다. 참다 못한 선경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한국말로 외쳤다.
“아, 차 좀 빼, 씨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제야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다. 한국에선, 그녀가 사는 서울의 반지하 집에선 흔히 겪곤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기는 나우루였다. 굴러다니는 차도 없는 동네에 무슨 클랙션이란 말인가?
선경은 팬티 바람에 시트만 대충 두른 채 비틀비틀 창가로 걸어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는데도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원래 주량은 맥주 한두 캔이었는데,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계속 홀짝이다 보니 다섯 캔이나 마셔버린 것이다. 그것도 빈속에! 아무래도 창가에서 계속 클랙션을 울리는 나쁜 놈의 새끼 머리 위에 토해야겠다고 선경은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클랙션의 주인공은 선경이 그 생각을 접어야 할 정도로 낯익은 사람이었다.
“어때요, 데리러 온댔죠?”
조지는 새하얀 차 안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렸다면 10분 안에 이마와 클랙션의 원치 않는 접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귀라도 먹었는지, 아니면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한 건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예요, 이 밤중에. 뭐하러 왔어요?”
“낮에 말했잖아요. 다시 온다고.”
그는 냉큼 대답하더니 차 안에서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차 문이 위로 스르륵 열렸다.
“……어?”
선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차 문은 날개를 딱 붙인 새처럼 위로 열려 있었다. 차에 문외한인 선경이라도 그렇게 열리는 차가 어떤 차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 내가 아는 그 차가 맞다면 놀라서 토해버릴 것 같은데…… 차종 좀 알려줄래요, 조지?”
“바로 놀라지 않는 걸 보고 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맞네요.”
조지는 혀가 살짝 꼬부라진 그녀를 보더니 호텔 1층에 바짝 갖다댔던 차를 조금 후진했다. 선경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다. 안전권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알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람보르기니를 모르는 여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으니.”
“우웩!”
2층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토사물을 본 조지는 스스로의 선택을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의 예상대로 선경은 밖으로 나왔다. 물로 입을 헹구긴 했지만 지독한 술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에 누워 그의 비웃음을 열심히 상상하고 있느니 차라리 눈앞에서 그의 비웃음을 보는 편이 나았다. 막상 그가 전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긴 했지만.
“이게 몇 억 한다는 그 차 맞죠? 가짜 아니죠?”
“네, 맞아요. 아버지가 물려준 제 차예요.”
“아니, 아버지가 물려주다니, 무슨 갑부예요?”
“한때 갑부였던 분이죠. 이 섬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랬겠지만. 자, 타요.”
조지가 권하는 옆자리에 그녀는 구르다시피 들어와 앉았다. 아직 남아 있던 술기운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면 람보르기니란 차를 대체 언제 타보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만 있자, 안전벨트, 안전벨트……”
“그런 건 안 매도 돼요.”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쑥스럽게 들렸다. 이런 좋은 차를 갖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경의 의문은 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은 후에야 풀렸다.
“어…… 엔진 소리가 어딘가 특이한데요?”
“한 십 년 넘게 정비를 받지 않아서 그래요.”
엔진이 아니라 흡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라도 돌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선경은 들어본 적 있었다. 고향에 있는 수십 년 묵은 트랙터 소리가 지금의 소리와 가장 유사했다.
“그럼, 이 속도는 안전운전? 아니면 당신의 스타일?”
“아니요, 이건 차의 스타일이죠.”
털털거리며 시속 30km로 가는 람보르기니라니, 그야말로 선경이 죽었다 깨어나도 경험할 수 없을 신세계였다. 그녀는 조지의 손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이 멋쩍었는지 조지는 애써 차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이 차는 물려받고 나서 처음으로 몰아보는 거예요. 돈을 모아 차를 수리하는 동안, 시동 꺼진 차 안에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며 독학으로 운전을 익혔죠. 그리고 오늘 당신이 준 가이드 비 선금으로 기름을 사서 넣어 봤어요.”
“아, 이런, 맙소사.”
그러니까 자신은 장롱면허도 아니고 운전대를 두 번째 잡은 녀석의 옆에 올라탄 거였다. 선경은 화가 나기 전에 어이가 없어 킬킬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장롱면허에다 술까지 마신 자신보단 그래도 상태가 나아 보이긴 했다.
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도로가 워낙 짧다 보니 금세 도로 끝까지 도착했다. 도로 끝에는 ‘총 길이 18km, 제한속도 40km'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도 이딴 도로에서 람보르기니가 달렸네요.”
“뭘요, 아버지는 포르쉐도 갖고 있었던 걸요.”
“네, 네. 어련하셨겠어. 그러면 물려준 재산도 어마어마했겠네요.”
조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맛이 갔다 해도 코너링은 슈퍼카로서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 급격하게 요동치자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조지의 몸에 매달렸다.
“물려준 재산? 맞아요. 이런 슈퍼카들을 물려줬죠. 그리고 똥만도 못해진 삶의 터전도 함께 말이죠.”
그의 발이 액셀을 몇 번이나 거칠게 밟아댔다. 차의 육중한 신음이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계기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선경은 아까보다 차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지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자신에게도 옮겨왔기 때문인 걸까? 그는 조금 흥분했는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또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곳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돈이 많았던 시절 뭐든 돈의 힘으로 다 처리하다 보니, 돈이 바닥났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똥을 누고 자기 손으로 닦는 정도만 할 수 있었죠. 이 섬을 만들어 준 알바트로스는 똥을 누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었죠. 바로 하늘을 나는 것 말이죠.
난 이 섬에서 써먹지도 못할 똥으로 굳어지고 싶지 않아요. 난 언젠가 반드시 이 섬을 벗어날 거예요. 그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거예요!”
점점 억세지는 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선경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차는 그가 말하고 있는 알바트로스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지상에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저기, 이 섬에는 지금도 알바트로스가 살아요?”
“이젠 살지 않아요. 농작물도 키울 수 없는 땅에 살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주 가끔 날아다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럼 알바트로스가 어떻게 비행을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그걸 알고 있어요? 말해 줘요. 알고 싶어요!”
그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막 도로를 벗어나려던 람보르기니가 신음을 내며 방향을 비틀었다. 선경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방향으로 기울자 그는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포옹에서 성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 살짝 걸친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선경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도 선경과 마찬가지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안하게 약동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선경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차 주인이 잠시 선경에게 집중했던 사이, 차는 다시 도로 끝까지 와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돌렸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U자를 그리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선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라고. 알바트로스는 날기 위해 언제까지고 앞으로 달려야 한다고. 방향을 바꿔 속도를 줄이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를 위해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등신아, 꽉 잡아!”
선경의 손이 드디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움켜쥐고 풀어냈다.
여지껏 타이어를, 엔진을 움켜쥔 족쇄였던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리자 람보르기니의 RPM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힘을 받은 슈퍼카가 전력을 다해 질주를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정지상태에서 100미터를 지날 때까지 고작 4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자동차다웠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속도감에 조지는 비명을, 울음 같은 환호를 지르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불빛마저 드문 거리에서 그가 내지르는 괴성은 엔진 소리와 섞이며 수천 마리의 알바트로스가 일제히 우는 듯한 소리로 퍼져나갔다. 아마 지금의 자동차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짝짓기를 하러 내려오라고 호소하는 알바트로스와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선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의 클랙션에도 꿈쩍 않던 주민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그와 춤을 추자, 라고 선경은 결심했다. 조지의 짧은 도약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고 나면, 어디로든 좋으니 조지와 함께 가 춤을 출 것이다. 달빛을 받아 춤추며, 대지에 발을 구르며, 저무는 자들과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 기도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은 조지의 성공적인 비행을 기원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기도의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이 섬이 똥 같지 않았다면, 난 여기서 섬과 함께 죽고 싶었을 거야.”
선경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첫 도약을 마무리할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