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3화
그 동굴은 숲의 어딘가에 있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보호장치과 강력한 환상 마법으로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기에 동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은 퍽이나 적었지만 그래도 분명 그 동굴은 존재하고 있었다. 거대한 입을 벌린 바위 야수를 연상시키는 입구를 따라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동굴은 길고 깊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태양볕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동굴의 내부는 그리 어두운 편이 아니었다. 동굴의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푸른 보석이 스스로 빛을 내며 동굴을 비추는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석의 이름은 크렐다르 사파이어라 했다. 대륙에서도 쉬이 찾아보기 힘든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이었으며 마력을 쉽게 받아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마법 지팡이나 수정구를 만들 때 최상급품으로 취급되는 귀한 재료.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 하더라도 그 가격은 같은 무게를 가진 다이아몬드의 수백배로 주먹만한 크기의 보석으로도 왠만한 영지를 통째로 사들일 만한 가치를 가진 물건이었다.
하지만 동굴 안에는 그런 귀한 보석들이 마치 돌맹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주인 역시 마치 그 보석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처럼 돌맹이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인간들이나 소중히 소중하고 드워프들이나 환장하는 돈 같은 건 동굴의 주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혹시라도 인간들의 사이로 나들이를 나갈 일이 생긴다면 그럴 떄나 한 두개 정도 들고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동굴의 한 구석 자그마한 그림자가 꼼지락댄다.
그림자는 마치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회색빛의 동굴 바닥으로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머리카락은 선명한 붉은 색. 크렐다르 사파이어가 뿜어내고 있는 은은한 푸른 조명과 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로 빛나고 있었다. 가볍게 몸을 까딱일때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귀가 쫑긋거렸다. 그건 엘프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엘프의 소녀는 동굴의 바닥에 엎드린 채 바로 앞의 무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살짝 다물어진 앵두빛의 입술 사이로 조금 안타까운 듯한 탄식이 새어나온다. 도마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소녀의 붉은 눈동자는 코 앞까지 바싹 당겨둔 커다란 구슬에 쏠려 있었다. 점쟁이나 마법사들이 예언이나 탐지계 마법의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한다고 하는 수정구슬이었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호수만큼이나 깨끗한 수정구슬의 안에서는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작은 형체들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대로―"
마치 제국 투기장의 경기를 관전하는 관중들처럼 소녀는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수정구 안에는 시체 엘프들과 피범벅 도끼 부족의 오크들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도끼를 든 팔의 근육이 불끈거리며 약동한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젊은 오크가 내려친 도끼는 엘프의 팔을 그대로 잘라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땅 위를 구르는 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프는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깊숙히 들어왔다는 생각에 오크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새 퇴로를 봉쇄당한 오크의 팔에 엘프의 이빨이 깊숙히 박혔다.
「크아아아아악!」
「이미 늦었어! 그대로 없앨 수 밖에 없다!」
먼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젊은 오크에게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떨어진 도끼는 엘프들을 포함해 오크의 몸마저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있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이미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살덩어리들이 땅에 달라붙어 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 오크들의 기합성과 카일란드의 광소가 복잡하게 뒤섞인 소음 속에서 오크들은 끝도 없이 일어나는 엘프들에 의해 다시 마을쪽으로 한 걸음 밀려났다. 그리고 수정구를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는 소녀는 즐겁게 미소지었다. 마치 투견장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개들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처럼. 두 마리의 곤충을 싸움붙이며 응원하는 아이들처럼―
그건 단지 유희였다.
너무나도 길고 지루한 삶을 위해 드래곤들이 고안해 낸 놀이장치.
단지 이번에는 그 즐거움의 대상이 엘프와 오크들이었던 것 뿐이었다.
정말로 단지 그 뿐이었다.
장난감―
올 해로 2284세가 된 레드 드래곤 케르세니아에게 어차피 이 일은 그 정도의 의미일 뿐이었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켈록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 십 수번의 은백색 궤적을 그어낸다. 사지를 절단당한 채 무너지고 있는 엘프의 상체를 두 자루의 칼로 꿰어버린 켈록은 그대로 한 발을 내딛으며 검과 엘프를 휘둘러 뒤이어 덮쳐오는 엘프를 두들겼다. 푸확! 하고 너덜너덜한 살이 부숴지며 썩은 피가 튀었지만 켈록은 멈추지 않았다. '그오오!' 하는 괴성과 함께 켈록은 몸을 낮게 낮춘 채 엘프들 사이로 들어가 두 자루의 검을 휘둘렀다.
공성추와도 같은 크란의 주먹이 엘프의 얼굴을 부쉈다. 머리를 잃어버린 엘프의 어깨를 덥썩 잡은 크란은 거구의 몸을 빙빙 돌리며 엘프의 몸을 그대로 무기로 사용했다. 상대에게 활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닳은 그로그도 어느새 도끼를 들고 엘프 둘과 상대하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엘프들은 단순히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낸 채 달려들 뿐이었다. 그 움직임은 굼떴고 엘프 특유의 예리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점점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들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제기랄!"
켈록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달려드는 엘프의 머리통을 발로 차 올렸다. 뒤로 두 번이나 덤블링을 넘으며 엘프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켈록은 어느새 자신의 근처로 모여드는 전사들을 보며 쯧, 가볍게 혀를 찼다. 30명 가량 되었던 전사들은 어느새 20명 내외로 줄어들어 있었다. 게다가 조금씩 밀리다보니 어느새 싸움터는 마을 바로 앞이 되어 있었다. 파수탑의 오크들이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가벼운 손도끼를 던져대고 있었지만 커다란 도끼에 찍히고 박살나도 멀쩡히 움직이는 시체 엘프들에게 상대적으로 가벼운 투척 도끼의 상처 정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엘프들과의 거리를 벌린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전사들의 얼굴을 살피던 켈록은 있어야 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고르마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사장님은?"
"전사장 고르마크라면, 저기 계시네."
크란은 손을 뻗어 엘프 무리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고르마크와 카일란드가 있었다. 켈록은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한 발만 더 물러나면 마을인데 이런 상황에서 적과 1:1 대결을 하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읺았다. 그 때 켈록의 어깨에 그로그가 가볍게 손을 얹었다.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그로그를 바라본 켈록을 향해, 외눈의 오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무슨 의도가 있는 행동이겠지. 전사장이라면 질 리가 없다. 우리는 이 곳에서 저 송장놈들이 마을 안쪽까지 들어오게 못하게 하면 되는 걸세."
"물론…. 전사장을 믿는 수 밖에 없지요."
켈록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전사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차기 전사장은 있다. 너 자신을 증명해 봐라."
"알겠습니다."
크란의 말에 켈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두 자루의 칼을 엘프들을 향해 겨누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가자! 절대로 저 놈들을 마을 안쪽까지 들어오게 둬선 안된다!"
환호성과 함께 오크들은 다시 엘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라칸의 손과 카일란드의 장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빠득! 고르마크는 이를 악물며 발을 내딛었다. 튕겨나가는 반동을 그대로 힘으로 사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다시 한번 다라칸의 손을 휘둘렀다. 오크들이 보통 사용하는 도끼와는 달리 양날인 다라칸의 손이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공격법. 몸의 뒤편에 감춰져 있었던 도끼가 이빨을 드러내며 카일란드를 덥쳐왔다. 방금의 충돌에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던 카일란드로써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을 날렵한 공격이었다.
"후응!"
카일란드는 입꼬리를 뒤틀며 빈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내밀어진 카일란드의 손이 옅고 푸른 빛으로 감쌓였다. 콰앙! 하고 다라칸의 손이 카일란드와 충돌했을 때 고르마크는 마치 돌로 된 벽을 때린듯한 충격을 느꼈다.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이 손목을 타고 전해져 오른다. 하지만 고르마크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다라칸의 손을 휘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실었다. 써컹! 하는 절삭음과 함께 카일란드의 왼팔이 땅으로 떨어졌다. 풀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는 카일란드를 보며 고르마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과아아아아―연 오크! 날 죽인 자! 훌륭한 실력이다!"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란드를 보며 고르마크는 혀를 찼다. 원래 엘프의 말을 못 알아듣는 고르마크였지만 어째선지 카일란드가 하는 말 만큼은 고르마크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귀를 통해 듣는것이 아닌, 마치 머리 속으로 직접 쏘아드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놈도 그럭저럭 실력이 있군. 엘프 마을에서 달려들었을 때와는 완전 딴판인걸."
"그랬었지! 그 때 나는 살해당했다. 오크! 네놈에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네놈을 죽일 차례다! 내게는 그 때는 없었던 새로운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 이상! 나는 네 놈을 죽인다!"
"새로운 힘이라고?"
"그렇다! 위대한 분― 숲의 지배자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을 내려주셨다. 숲의 수호자 우리 엘프들을 살해한 네노―오옴들! 지저분한 오크놈들을 쓸어버리라고 말이지!"
카일란드는 광소했다. 그 때 고르마크의 머리속에 축제 때 요르다가 했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잠들어 있던 숲의 지배자가 눈을 떴으니 그것은 수 천년 전부터 계획되어지던 어느 오래된 이야기의 종막(終幕).' 카일란드가 이야기하는 '숲의 지배자' 와 요르다가 이야기한 '숲의 지배자' 가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수상한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고르마크를 신경쓰이게 한 것은 카일란드의 말이었다.
"우리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물론!"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게다. 이 곳에서 네놈은 내게 두 번째로 죽게 될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