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오크 레이디


파멸 4화




"뭐하는 거야. 정말―"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던 케르세니아는 가느다란 눈썹을 불만스레 모은 채 입술을 삐죽였다. 수정구의 안쪽에서는 나이를 잊은 듯 거칠게 공격해 들어가는 고르마크와 그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카일란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켈록이 이끄는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들도 필사의 각오로 엘프들을 점점 밀어내는 중이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씰룩거리며 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케르세니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엎드리고 있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재미없어―.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주절주절 쓸데없이 떠들기나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의식같은 건 남겨두지 말걸 그랬어. 뭐 그래도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말야. 원판이 불량품이라고 해도 이 걸 두개나 사용했는걸."

옆에서 데굴거리는 크렐다르 사파이어를 손에 쥐어들며 케르세니아는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실수한 모양이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은 언데드를 만들 때 '자유의지를 남겨두만 안된다' 라는 것. 혹시라도 다음에 다시 한 번 해볼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 때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지. 조금 흥이 가신듯한 표정으로 케르세니아는 두 팔을 동굴 천장을 향해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우으―응♬' 하고 길게 콧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 케르세니아는 입가에 천진한 미소를 띄운 채 다리를 뻗어 동굴바닥의 수정구를 자신에게 굴려왔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봐 줄 테니까, 이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봐. 이젠 이 숲의 패자잖아? …어라라?"

케르세니아는 깜짝 놀라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근처에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된 것이다. 그 마력은 케르세니아보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습게 볼 수준은 아니었다. 틀림없는 드래곤 클래스. 보통 인간들이 마법사라고 부르는 얼간이들이나 자기 멋대로 지상을 돌아다닐만한 하등한 마족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마력은 왠지 모르게 굉장히 낯익은 느낌이었다.

"이 마력은 틀림없이… 그런데 왜?"

입 안에서 작게 중얼거리며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갸웃였다. 찌릿찌릿 할 정도로 느끼고 있는 마력의 주인이 누군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 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 자신의 마력을 감추지도 않은 채 보란듯이 풀풀 흘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의 주인이 케르세니아가 기억하고 있는 '그 녀석' 이 맞다면 아직은 이런 외진 숲 속이 아닌, 인간 사이에서 즐거운 대체 라이프를―

그 때 케르세니아의 머리 위에서 전구가 반짝였다.

"아― 그 일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안 좋은 때에 오네."

케르세니아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문 연락같은건 받지 못했지만, 일단 찾아온 이상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었다.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려면 빨리 들어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지?"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텅 비어있던 공간에 갑자기 한 청년이 나타났다. 아직 앳된 외모를 하고 있는 막 20대에 접어든 것 처럼 보이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케르세니아는 한눈에 그 청년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너무도 닮은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은 청년도 그녀와 같은 레드 드래곤 일족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온화해 보이는 청년은 동굴의 바닥에 사뿐이 내려앉고는 케르세니아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어딘지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오래간만이네. 누나."

"뭐야…, 너였니?"

케르세니아는 맥이 풀린 듯 한심스런 얼굴을 하며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청년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눈썹을 움찔였다. 텅 비어있는 동굴의 안. 두 사람 아니 드래곤 사이에 조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청년 쪽. 눈썹을 늘어뜨린 곤란한 표정의 청년은 케르세니아를 향해 조심스런 태도로 물어보았다.

"혹시… 내가 안 좋을 때 찾아온 거야?"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케르세니아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여기서 농담으로라도 '그래 당연하지 이 바보야, 한창 재미있을 때 와서 방해를 하고 그래? 한번 혼나볼래?' 라고 말했다가는 잔뜩 삐져서 코를 훌쩍거리며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지만 나중에 기분을 풀어줄 때의 수고를 생각해보면 영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아니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놀라버렸다고나 할까. 봐― 너 성룡식 할때 참관했었던 것 이후로는 처음이잖아? 300년 아니 400년인가?"

케르세니아는 말을 하면서도 뒤로 손을 뻗어 수정구를 자신의 엉덩이 뒤로 바싹 붙여 숨겼다.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취미생활을 동생에게까지 보여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500년이라구. 누나 전혀 기억 못하는구나?"

다행히도 청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케르세니아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500년인가… 정말로 시간 빠르네. 벌써 500년이나 지났다니."

"이제는 나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런 말 하니까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는거라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 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청년을 보며 케르세니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하고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보통이라면 키가 180cm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청년이 목이 아플정도로 고개를 들지 못하면 눈을 맞출 수도 없는 자그마한 소녀 앞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어쨋든 무슨 일이야. 일부러 이런 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지? 네 나잇대에는 칙칙하게 다른 드래곤 레어를 찾아다니는 건 인기가 그다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게 보통인걸. 혹시 내가 모르고 있던 사이 유행이 바뀌었다던가? 크롬 군?"

그게 청년의 이름이었다.

크로말라스.

그를 알고 있는 드래곤들은 크롬이라는 이름으로 줄여 부르곤 했다.

나이는 올 해로 906살. 1000년 가량을 살아가는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들에겐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이었지만 드래곤 사이에서는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꼬마같은 취급을 받을 나잇대였다. 선천적으로 흉폭하고 잔인한 기질이 있는 레드 드래곤의 일족이면서도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특이한 성격 때문에 드래곤들 사이에선 나름대로 유명인사.

그러니까―

"나들이도 제대로 하고 있다구. 그러니까… 가이우스 제국의 신흥 귀족 도련님이라던가…. 그보다 누나. 아까부터 계속 신경쓰이는 게 있는데…."

이런 반응이라던가.

"응? 뭔데? 말해 봐."

"어째서… 옷을 안 입고 있어?"

"에…?"

뾰옹☆ 하는 효과음과 함께 케르세니아의 머리 위 커다란 노란색 물음표가 튀어올랐다. 붉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갸웃였다. 왜 옷을 안 입고 있냐고? 그럼 옷을 입고 다니는 드래곤도 있나?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해 보이는 크롬의 시선을 따라 케르세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뽀얀 우유빛 피부가 그 커다란 눈동자 속에 담긴다. 보일 듯 말듯 작게 솟아오른 가슴이나 보기좋게 살이 붙어있는 허벅지나 그런데 이게 뭐 어때서?

어차피 보여준다고 닳아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케르세니아는 크롬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상관 없잖아?"

"그, 그래? 나는 상관없다고 해도 혹시 다른 드래곤들이 찾아올 때도 그러고 있는 거야?"

"응."

"난 그래도 역시 옷은 입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에―"

케르세니아는 불만스레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동굴의 바닥을 꼬옥 누르며 몸을 크롬 쪽으로 기울이곤 손가락을 척 내밀어 보였다. 고개를 들어 크롬을 올려다보고 있는 표정은 말 그대로 누나의 표정. 그러니까 크롬으로써는 거의 칠백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다. 크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크롬 군! 원래 드래곤은 옷 같은걸 안 입는다고? 그런 건 그런 도구에 의존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종족들이나 사용하는 거야. 물론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옷에는 조금 관심이 있기도 하지만, 뭐 그건 차치하고!! 나들이를 나갔을 때라면 너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내 레어 안에서 케르세니아라는 이름으로 있을 때라면 상관없잖아? 로드도 그다지 신경 안 쓰는 모양이었고."

"그야 드래곤의 모습으로라면 이런 말도 안 한다구. 그리고 로드라니… 그 할아버지 이야기는 좀 안 했으면 하는데."

"에헤헤― 사실은 피부를 스치는 옷감의 감촉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역시 이 편이 더 편하기도 하고. 그런데 뭐야? 크롬 군은 내가 레어에서 홀딱 발가벗고 있는 걸 지적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걸까나나나?"

크롬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르며 마치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효…'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가볍게 숨을 내쉬는 케르세니아. 정말이지 이 동생이란 녀석은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크롬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크롬은 조금 침착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좀처럼 말을 꺼내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케르세니아는 크롬을 조금 거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 녀석이 일부러 이런 곳까지 찾아 온 이유는 '그 일' 을 빼고는 딱히 없을테니까.

"역시 그거야?"

크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나. 요즘 몸은 괜찮은거야?"

케르세니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다. 크롬이 조금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케르세니아는 그런 크롬의 표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혹시, 누가 물어보라고 했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거짓말이다. 그런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드래곤 로드나 레드 드래곤 혈족의 수장인 레오고스가 한 번 가서 물어보라고 시킨 것이 분명했다.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크롬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그마한 소리로 혀를 찼다. 칫― 궁금하면 직접 와서 물어볼 것이지 엘프의 모습을 하곤 있지만 보통의 엘프들보다 배는 날카로운 이빨을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부딪힌다. 물론 크롬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곤 있었지만.

난폭하게 일그러졌던 얼굴 표정을 최대한 활짝 펴며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는 스스로 물에 비춰 본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크롬은 잘못이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겠지.

케르세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꼴사납게 꽈당! 하고 엎어지는 일은 없었다. 케르세니아는 크롬을 올려다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누나라고 해도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부끄러울까… 그래서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그대로 크롬을 와락! 하고 껴안았다.

"으, 으악!? 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누나!"

"욘석! 욘석! 누가 맘대로 누나 걱정같은걸 하라고 했어!?"

크롬의 부드러운 비단 의복에 얼굴을 부비부비 비비던 케르세니아는 고개를 들어올려 크롬을 바라보았다. 와하―☆ 하고 얼굴 가득이 활짝 편 미소를 띄운 채 한쪽 눈을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정말 이 누나는 크롬이 걱정같은걸 해야 될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말야! 앞으로 수천 년 정도는 아무 문제 없다니까."

다행히 크롬은 순순히 돌아가 주었다.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단지 눈치채고서도 모른 척 했을 뿐인지 끝까지 오크들과 언데드가 된 엘프들의 싸움이 비추어지고 있는 수정구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케르세니아 입장에선 쓸데없는 변명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지만―

다시 잠잠해진 레어 속에서 케르세니아는 자신의 매끈한 배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치?"

대답같은 건 없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케르세니아는 다시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크롬이 오고 간 동안 어느새 엘프와 오크의 싸움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이 떨어진다.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축 늘어진 팔을 내려다보며 카일란드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고개를 들어 눈 앞의 상대를 본다. 빛을 잃어가는 카일란드의 눈 앞에는 늙은 오크가 있었다. 날카로운 도끼에 몸이 꿰뚫리고 있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어째서? 카일란드는 자문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죽은 몸이니까 이 몸은 이미 사악한 마력에 이끌린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서서히 흐릿해져 가는 세계 속에서 카일란드는 오크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그의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긍지도 자존심도 없는 빈 껍데기를, 그들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검은 마력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번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줄까? 나도 이대로 소중한 심심풀이 꺼리를 잊어버리는 건 좀 아까우니까 말야. 아 미리 말해두지만 두 번은 없다구? 모처럼이니 네 친구들도 다 같이 노는건 어때? 혼자 보다는 모두가 좀 더 맘도 편할 것 같고. 혹시 싫으면 너 혼자라도 나는 상관없어? 어떻게 할래. 특별히 네가 정할 수 있게 해 줄게.」

'무엇을…'

"끝이다!"

오크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카일란드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일란드의 귀에는 그저 콧소리가 과하게 섞인 취익거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카일란드의 몸이 크게 떨렸다. 울컥, 하고 몸 안에서 썩은 피가 역류한다. 입가에서 검게 변색되어버린 피를 흘리며 카일란드는 오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헷― 하고 카일란드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오크의 의아한 표정도 우스꽝스러웠지만, 카일란드는 다시 한 번 웃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툭 떨궜다.

"두 번째인가…"

경직되어 있던 세계가 무너져간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린 카일란드는 마지막으로 오크, 고르마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흔들림이라곤 없는 그 눈동자를 보며 카일란드는 납득할 수 있었다.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은 자신이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리고, 온 세계가 검게 변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에 카일란드의 저주받은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흩뭉개지는 카일란드의 몸을 보며 고르마크는 다라칸의 손을 회수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쓰러질 줄을 모르던 엘프 시체들 역시 카일란드의 패배와 함께 소멸해가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을 무시한 채 카일란드와 싸움을 걸었던 것은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을 잃고 쓰러져가며 바람에 흩어지는 엘프들을 본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듯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크오오오오!!"

다라칸의 손을 높이 들어올리며 고르마크는 포효했다. 그재서야 상황을 이해한 것처럼 오크들은 자신의 무기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며 승리의 포효를 외쳤다.

"끝나버렸네…."

그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보고 있던 케르세니아는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은 조금 더 선전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들과 고르마크의 솜씨는 케르세니아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뛰어났다. 무엇보다 마력을 잔뜩 집어삼킨 크렐다르 사파이어 두 개분의 마력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도 간단하게 쓰러뜨릴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었다. 물론 싸움이 지속되고 있던 도중 데스 나이트의 정신적인 면에서 문제가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으며 케르세니아는 승리에 환호하는 오크들을 보며 두 손을 맞부딪혔다.

짝 짝 짝―

"참 잘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어. 응, 만족☆했다구. 자 그러면 다음에는 뭘 하고 놀까?"

수정구 속에 비추어지고 있는 오크들의 모습을 보며 케르세니아는 귀여운 얼굴에 기대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띄웠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꼬옥 누르며 턱을 살짝 들어올려 동굴의 천정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사안(死眼)의 바실리스크? 아니 그건 너무 약했다. 그렇다면 눈의 폭군(Eye Tyrant) 비홀더는 어떨까? 다른 지역의 오크 부족을 데리고 와 싸움을 붙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고―

"히익!?"

조금 흥분한 것처럼 말랑말랑한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망상을 계속하던 카르세니아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새하얗게 벌어진 눈 속에 쪼그라든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한 손으로는 동굴의 바닥을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꾸욱 누르며 케르세니아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한 쇼크 다음에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려왔다. 후에― 후에―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케르세니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니까."

스스로에게 말하듯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케르세니아는 가슴이 빵빵해질 정도로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폴리모프가 제대로 제어되고 있지 않은 탓인지 별로 뜨겁지 않은 불꽃이 숨에 섞여 새어나온다. 이래서야 크롬이 레어에 찾아왔었을 때 했던 이야기가 우스워질 뿐이다. 물론 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부렸던 허세가 섞여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간신히 발작이 진정되었는지 케르세니아는 휴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력이 불안정한걸까… 다시 조금 조정을 할 필요가―"

조금 마음을 놓은 듯이 늘어진 표정을 짓는 케르세니아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언가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목으로 밀고올라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케르세니아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내장을 전부 쏟아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토악감에 케르세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감고 있는 눈 사이로 찔끔 눈물이 새어나온다.

"엑, 우에엑, 켁 켁"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오는 것은 없다. 생명체라면 필수적인 '식사'를 그만둔 지도 꽤나 오래 지났으니까. 나이가 차오른 드래곤은 넘쳐흐르는 마력을 연소시키는 것만으로 목숨과 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마력이 부족해진다면 주변에 넘쳐흐르는 마력 그 자체를 집어삼키면 되는 일이었다.

케르세니아는 두 손으로 동굴의 바닥을 짚은 채 헛구역질을 했다.

위액이 밀려올라왔는지 입안이 쓰다. 하지만 계속되는 토악감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제발, 우엑, 그만, 우에에, 부탁, 이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케르세니아는 그 후로도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힘없이 벌어진 입에서는 떨어진 침이 동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고, 깨끗했던 얼굴은 어느새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한 케르세니아는 그대로 두 팔을 대(大)자로 펼친 채 동굴바닥에 축 늘어졌다.

손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케르세니아는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세 안 부릴게요. 이상한 걸로 장난도 안 칠게요. 그러니까―"

덥썩 말을 멈추며 케르세니아는 가늘게 눈을 떴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아프지…않아. 안 아퍼. 괜찮아. 응, 나는 괜찮은걸."

'웃차―' 하고 케르세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의 격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케르세니아는 동굴 바닥의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네​크​로​맨​시​(​N​e​c​r​o​m​a​n​c​y​)​의​ 술법으로 엘프들을 부활시킬때 함께 만들어두었던 감시 패밀리어와 연결되어 있었던 덕분에 수정구는 오크 마을의 안쪽을 비추고 있었다. 마을의 무사에 안도하며 즐거워하는 오크들을 바라보고 있던 케르세니아의 눈썹이 삐죽 섰다.

"뭐야… 기분나쁘게―"

맘에 안 든다.

케르세니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심술맞은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수정구를 보던 케르세니아는 손가락을 뻗어 수정구를 쿡 찔렀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구에 균열이 만들어진다. 수정구를 꾹 누르고 있는 손가락을 중심으로 난 균열은 점점 수정구 전체로 퍼져나가, 결국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구는 산산히 부숴뜨렸다. 수정구와 연결되어 있는 패밀리어도 마력의 공급을 끊었으니 금새 생명력을 잃고 소멸하겠지―

케르세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잔뜩 샘이 난 듯한 목소리로 케르세니아는 말했다.

"정했어. 이제 오크들이랑은 그만 놀래."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