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2화
"또 두 명이나 실종되었나."
그 날 이후로 몇 일인가가 지났다. 숲의 엘프들을 몰아냈다는 기쁨도 그것을 위해 스러져 간 용사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도 서서히 사그라들어 갈 즈음부터 묘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마을의 한복판에 내리 떨어진다거나 지금껏 숲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해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나간 오크들이 차례로 실종되는 일이었다.
농경 기술이 없는 오크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약탈과 사냥을 이용했다. 하지만 숲의 주변에는 약탈할만한 마을도 없었고 숲을 둥글게 끼고 만들어져 있는 제국 가도를 따라 순회하는 인간들의 상단은 오크들의 습격을 대비해 언제나 다수의 호위를 고용했기 때문에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피범벅 도끼 부족의 오크들은 대부분의 식량을 사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사냥패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이야기들이 돌고 있더군. 두 명이서 상대하기 벅찬 괴물이라도 나타나나 싶어 어제 밤에는 2인 1조에서 3인 1조로 편성을 바꿔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소. 전사장. 뭔가 대책을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피범벅 도끼 오크 부족의 사냥 대장 그로그는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와이번을 쏘아 떨어뜨린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고르그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오크들 사이에서 유독 침착하고 사려깊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휘하에 있는 사냥꾼들의 실력에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다른 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르마크에게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함을 의미하고 있었다.
"실종된 것은 두 명. 하지만 세 명을 한 조로 편성했으면 실종된 두 사람과 함께 사냥을 나갔던 한 명은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뭐 일단 돌아오기는 했지. 돌아오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봐도 별 도움은 안 될 겁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듯 했으니까. 죽은 엘프들이 땅에서 기어나와 오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소. 허 참 죽은 엘프가 땅밑에서 기어나온다니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하지만 살아남은 엘프들의 기습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네. 만약 엘프 마을에도 생존자가 있다면 우리 오크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테지."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변하지 않소. 맨 처음 실종된 녀석들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엘프 마을의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바로 지난 밤 실종된 녀석들은 마을 앞의 별쉼터 근처에서 실종되었소. 전사장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까?"
고르마크의 인상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녀석들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그것도 이 마을을 향해 일직선으로."
―뎅뎅뎅뎅뎅
"아니!?"
"종 소리라고? 이런 시간에―!"
종이 울리고 있었다.
피범벅 도끼 부족은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마을의 파수대 옆의 종을 울려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 소리가 다섯 번 울렸다는 것은 마을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병들 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그로그는 재빨리 고르마크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천막의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느낌이 좋지 않군."
고르마크는 몸을 일으켜 천막에 기대어 두었던 다라칸의 손을 쥐어들었다. 평소와 달리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다라칸의 손을 어깨에 걸쳐올리며 고르마크는 천천히 천막의 문을 나섰다. 나이를 잊은 듯 콩닥 콩닥 뛰는 심장의 박동이 싸움 속에서 오랫동안 날카롭게 단련되어온 전사로써의 감각이 고르마크에게 말 없는 경고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지."
마을의 입구에는 이미 종소리를 듣고 모여든 전사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허리에 두자루의 칼을 찬 켈록이나 피범벅 도끼 부족의 오크 중 가장 힘이 장사라고 하는 크란의 모습도 보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고르마크와 사냥패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그로그도 나무로 만들어진 단궁을 빗겨맨 채 자리하고 있었다. 파수대 위의 젊은 오크가 고르마크의 모습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전사장님이 오시고 계십니다!"
집결한 전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마을의 입구까지 당도한 고르마크는 고개를 슥 돌리며 전사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전사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들 중에서도 노련한 축에 속하는 크란이나 용감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켈록의 얼굴에서도 바싹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사들의 얼굴을 살핀 고르마크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갑작스런 비상경고 때문에 소란스러운 속에서도 껄껄 웃는 고르마크의 웃음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꽤나 많이 모여있군.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전사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고르마크는 가볍게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귀가 멀었나? 아니면 입이 틀어막혔나?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나!"
"전사장."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뗀 것은 그로그였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었던 것 같소. 그 녀석은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었소. 그리고 착각한 것도 아니었지. 저 쪽을 보도록 하시오."
그로그는 손을 들어 마을의 앞으로 길게 이어진 길을 가리켰다. 잔주름으로 가득한 미간을 불만스레 찌푸리며 그로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던 고르마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숨을 집어삼키며 고르마크는 다라칸의 손을 들고있는 손을 다시 한번 꼬옥 말아쥐었다. 너무 깜짝 놀랐던 나머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 다라칸의 손을 떨어뜨릴 뻔 했다는 것은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뭔가 저건!"
"엘프들입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켈록이었다.
켈록의 말대로 그것들은 틀림없이 엘프들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와 엘프 특유의 길고 뾰족한 요정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마을의 입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엘프들은 그 대부분이 정상적인 몸이 아니었다. 팔이 떨어져 나간 엘프. 몸통의 반쪽이 찢겨져 나가 너덜너덜한 고깃덩이를 땅에 질질 끌고 오는 녀석도 있었다. 심지어 두 다리가 없어 두 팔로 땅 위를 헤엄치듯 기어오는 놈도 보였다. 가끔 섞인 사지가 멀쩡한 녀석들도 가슴 등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복수를 하러 왔는가."
크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고르마크는 혀를 차며 크게 웃었다.
확실히 움직이는 시체 엘프는 깜짝 놀랄 만 했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움직이지 말아야 할 시체가 움직인다면 철저히 두들겨 부숴 다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되는 일이다.
"웃기는군! 죽은 자들의 복수는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사자(死者)의 복수라고? 허튼 소리 하지 마라!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착각하고 덤벼오는 녀석들은 땅 속으로 되돌려 줄 뿐이다. 맞서 싸운다. 무기를 들어라!"
흐업! 하고 가볍게 기합성을 내지르며 고르마크는 다라칸의 손을 크게 휘두르곤 앞서 달려나갔다. 어린 아이들이나 힘이 약하거나 사고로 인해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도 있는 마을 안쪽까지 싸움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끔찍한 모습의 엘프들 앞에서도 전혀 주늑듬이 없는 고르마크에 고무된 것처럼 오크 전사들도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며 고르마크의 뒤를 따랐다.
도끼의 무게가 느껴졌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고르마크의 손에 들린 다라칸의 손은 여느 때처럼 깃털처럼 가벼웠다. 싸움 직전의 흉포한 미소를 띄우며 고르마크는 맨 앞서 걸어오고 있는 엘프의 허리를 통째로 절단했다.
"크오오오오!"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엘프의 상반신을 발로 세게 밀쳐내며 포효하는 고르마크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은…!"
고르마크의 눈에 들어온 건 엘프 마을을 공격할 때 엘프들을 지휘하던 포레스트 가디언의 리더 카일란드의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긴 칼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고르마크의 손에 떨어졌던 목을 든 채 카일란드는 시체 엘프들의 대열 뒤에 묵묵히 서 있었다. 목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이던 카일란드의 시선이 고르마크와 맞부딪혔다.
"오오―!"
카일란드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웃었다. 입을 벌리며 활짝 웃는 카일란드의 얼굴에 고르마크는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옆에서 덥쳐오는 엘프를 빈 주먹으로 한방 먹이며 고르마크는 카일란드를 노려본 채 다라칸의 손을 다시 한번 반월형으로 크게 휘둘렀다.
"오크――!!"
비척거리며 땅에서 몸을 일으키는 시체 엘프들의 뒤에서 카일란드는 괴성을 지르며 떨어져 있던 머리를 자신의 목에 붙였다. 빛을 잃어버린 퀭한 눈구멍에서 짙푸른 안광을 흘리며 두 팔을 넓게 펼친 카일란드는 광기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자의 의지다! 그 분을 위하여 춤춰라! 죽은 자는 죽을 것이고. 살아남은 자 역시 죽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그 분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