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5화
"조금만 기다려. 고르마크. 그리 오래는 안 걸리니까."
요르다는 말했다.
"으음―"
피범벅 도끼 부족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다. 바위를 적당히 두들겨 깨 만든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엉성한 비석의 표면에는 피범벅 도끼 부족의 선대 오크들을 기리는 주술적인 표식과 그림이 깨알같이 새겨 있었다. 비석의 제단 앞에 깔려있는 납작한 나무 발판위에 올라선 요르다는 슬며시 눈을 감은 채 손에 들려있는 제사봉을 몇 번이나 가볍게 휘둘렀다. 휙 휘익 하고 잠잠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나뭇잎들이 그 움직임을 멈춘다. 잠을 깨우는 의식. 들릴 듯 말 듯한 자그마한 중얼거림으로 술(術)을 외우는 요르다의 모습을 고르마크는 근처의 나무에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이상해"
한참을 중얼거리던 요르다는 가늘게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였다. 평소와 달리 좀처럼 반응이 없었던 탓이었다. 여느 때라면 긴 술을 다 외우기도 전부터 부름을 받고 잠에서 깨어난 선조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술을 끝까지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고르마크를 바라보았다. 고르마크는 다라칸의 손을 발치에 떨어뜨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은 평소의 그대로였지만 요르다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잘 안 된 것 같아."
"신경쓰지마라.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거라면 나중에 해도 상관없다. 그다지 급한 것도 아니니까."
고르마크의 말에 요르다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두 손으로 제사봉을 꼬옥 틀어쥐며 가슴 근처로 끌어당긴 요르다는 입술을 꼬옥 깨문 고집스런 표정으로 고르마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냐! 이번에 하면 잘 될거야. 방금은 조금 실수…한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맘대로 해라."
요르다는 꾹, 고개를 끄덕였다. 빙글 몸을 돌려 다시 비석을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응. 맘대로 할 거야."
실수? 설마… 이미 수 십번도 넘게 반복해왔던 일이었다. 지금와서 실수같은 걸 할리가 없다. 후아― 후아― 하고 숨을 고른 요르다는 다시 한번 손에 들려있는 제사봉을 휘둘렀다. 휙 휙― 살짝 헐렁헐렁한 가죽옷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바람이 멎는다. 선조의 잠을 깨우는 주문이 살짝 닫혀있는 입술의 틈새로 작게 새어나온다. 평소 그대로의 술. 완전히 입에 붙어버린 주문은 평소와,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반응은
"들리지 않아."
요르다는 자신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범벅 부족의 선대 주술사였던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먼 발치에서만 보던 소문의 전사장 고르마크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손에 딱 맞는 자그마한 제사봉을 받게 된 이후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요르다는 손으로 가슴을 꼬옥 눌렀다. 콩콩 소리를 내며 뛰고있는 박동소리가 자신의 뒤에 있는 고르마크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들려야 하는 건 이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요르다"
고르마크의 목소리에 요르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고르마크를 보며 요르다는 에헤헤― 맥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은거냐."
"으, 으응."
요르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 들리네… 헤헤, 왜 이럴까. 고르마크 말대로 조금 상태가 안 좋은 걸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선조님들도 피곤할 때는 쉬어야 하겠지. 무엇보다 오늘 '놈들' 과의 싸움에서 용맹스런 부족의 전사들을 보호하시느라 지치셨을테니."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고르마크를 바라보던 요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분명 그럴거야. 틀림없을거야. 우응― 미안, 이상한 고집 부려서 기다리게 만들었네."
발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 말하는 요르다를 보며 고르마크는 껄껄 웃었다.
"사과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겠지."
"응. 잠을 깨워버렸다면 죄송해요― 선조님들. 오늘은 푹 쉬세요."
비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요르다를 보며 고르마크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허리를 굽혀 발치에 떨어져 있던 다라칸의 손을 들어올려 어깨에 걸치며, 고르마크는 여전히 비석을 바라보고 있는 요르다를 향해 말했다.
"그럼 돌아갈까."
고르마크를 돌아본 요르다는 헤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먼저 돌아갈래? 난 여기 정리하고 돌아갈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겠나?"
"우―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니까."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미는 요르다. 고르마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돌아오지는 마라. 네 잠자리도 준비해 둘테니까."
"응. 부탁해."
고르마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사실 뒷정리할 것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했지만, 왠지 혼자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며 멋대로 납득하며 요르다는 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정도는 커다란 고르마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요르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돌아갈까―"
밤의 숲은 그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다시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이 이 숲 속에 있는 유일한 소음.
몇 걸음인가를 떼었던 그 때 그 정적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있었구나."
조금 들떠있는 듯한 맑은 목소리에 요르다는 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있었다.
자그마한 그림자―
하지만 그래도 요르다보다는 머리 한 개 정도는 크다.
그 그림자가 살짝 고개를 흔들자 길게 흘러내린 머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흔들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귀가 요르다의 눈에 띄었다. 아주 잠깐, 요르다는 그 그림자가 엘프라고 생각했다. 바로 오늘, 엘프들이 마을을 공격해들어왔던 일도 있었고, 달리 살아남은 엘프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금새 그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림자에게 느껴지는 느낌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짙게 깔린 그림자에 가려 그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주술적인 룬이 새겨진 요르다의 눈동자는 그림자의 본질을 어렴풋이 꿰뚫고 있었다.
터무니 없이 강력한 붉은 영혼―
"엘프…가 아냐. 누구?"
"알아본 거야? 역시♬ 이번 회의 전령-메신저-. 지금부터 이 곳에서 일어날 일에서 넌 빼 줄 생각이거든."
"이 곳에서 일어날 일?"
요르다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그림자는 살짝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소리내어 웃었다.
"지금은 모르는 편이 더 좋을거야. 유쾌한 일은 아닐테니까."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른 새들이 안 그래도 어두운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다. 그 폭음은 피범벅 도끼 부족의 마을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왔다. 느긋하게 숲길을 걸어 마을을 향하고 있던 고르마크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챙그랑! 땅에 떨어진 다라칸의 손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눈을 휘둥그레 뜨고있는 고르마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고르마크의 눈동자에는 하늘을 꿰뚫을 것 처럼 치솟고 있는 거대한 불기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확히는 마을의 방향이 아니었다.
그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그 곳에는 피범벅 도끼 부족의 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