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6화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고르마크는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떨어뜨렸던 다라칸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마을을 집어삼킬 듯 치솟았던 불기둥은 금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불기둥에서 뿜어져 나온 수백개의 불꽃들은 마치 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뱀같은 꼬리를 움직이며 마을과 그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저 멀리로 불타고 있는 마을의 입구가 보인다. 마을까지는 아직도 꽤나 떨어져 있었지만 바람을 타고 살을 태울것만 같은 지독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고르마크는 팔을 들어 불어닥치는 열풍을 받아내었다.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을 입구의 나무기둥이 넘어진다.
"무슨 일이지. 이건… 도데체!"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고르마크는 기가 찬듯 헛웃음을 흘렸다.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고르마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안쪽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안쪽으로 사람의 모양을 한 자그마한 그림자가 춤이라도 추듯 일렁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밀어닥치는 열기에 숨마저 막힐 지경이었만 고르마크는 발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가린 채 달려오던 고르마크는 어느새 무너져 버린 마을의 입구까지 당도했다. 그때 가볍게 숨을 고르는 고르마크의 시선에는 불꽃속에서 뛰어오르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익숙한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이여어업―!"
"켈록!?"
하늘을 향해 두 칼을 치켜든 채 작은 그림자를 향해 떨어지는 것은 켈록이었다. 하지만 켈록의 칼은 그 그림자에 닿지도 못했다. 퍼엉! 갑작스런 폭음. 그리고 켈록의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주먹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힘없이 튕겨나갔다.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허공에 떠오른 켈록의 몸은 축 늘어진 채 검게 타버린 땅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움직임이 멈춘 것은 얄궂게도 고르마크의 발 앞이었다.
고르마크는 자신의 발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켈록을 내려다보았다. 치지지직 하고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켈록의 몸은 불타고 있었다. 점액질처럼 달라붙은 불꽃이 점점 그의 몸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팔을 뻗어 켈록은 고르마크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손길에서는 단단한 열매도 손안에서 으스러뜨릴 만큼 강력한 아귀힘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가볍게 발을 들어올리는 것 만으로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만도 못한 힘이었다. 하지만 고르마크는 그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고르마크의 발목을 잡은 손에 아주 약간 힘을 넣으며 켈록은 거세게 기침을 했다. 그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서… 전사장님을… 이대로는…"
"켈록 나다! 전사장 고르마크다! 켈록―! 이럴…수가!"
하지만 고르마크의 목소리는 켈록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채 켈록의 손은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쓰러져 있는 켈록을 향해 황급히 손을 뻗으려던 고르마크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이미 손을 뻗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망연한 표정으로 켈록의 시신을 불타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던 고르마크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자리에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은 채 고르마크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가슴 속에서 터질것만 같이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고르마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표정. 격렬한 분노로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로 고르마크는 불꽃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불꽃 안쪽의 그림자가 빙글 돌았다. 불꽃 안쪽에서 불꽃보다도 더 붉은 눈동자가 번쩍 빛난다. 고르마크는 그 그림자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박 자박 하는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기둥을 잃어버린 천막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섞이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 발걸음 소리만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라칸의 손을 다시 고쳐쥔 고르마크의 팔에 두꺼운 핏줄이 솟았다. 잔뜩 당겨진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근육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꿈틀댄다. '나오기만 해 봐라 그대로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리겠다' 빠득! 이빨을 갈며 고르마크는 낮게 중얼였다. 하지만 불꽃 속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고르마크는 깜짝 놀라버린 나머지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지각한 오크 발☆견. 바로 도망갔으면 혹시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다― 그치?"
불덩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건 자그마한 소녀.
날개뼈 근처까지 길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으로 몸을 감싸듯 휘감고 있는 엘프의 소녀였다. 타오르는 불꽃에 정면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에는 희열의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본 고르마크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고르마크는 그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엘프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자그마한 엘프가 지금 자신의 앞에 있었다. 고르마크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고르마크를 알아본 듯 소녀는 생긋 웃었다.
"어떤 오큰가 했더니 아저씨였구나. 응, 우린 구면이지?"
"뭐라고?"
이상한 일이었다.
고르마크는 소녀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카일란드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속으로 전해오는 듯한 말도 아니었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엘프 소녀는 지금 틀림없이 오크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엘프의 언어로 오크의 발음만을 따라하는 것처럼 억양은 어색함이 남아있었고 오크들 특유의 거칠고 탁한 콧소리가 섞인 발음은 매끄러웠지만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나 문장의 구조는 틀림없이 오크들이 사용하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고르마크에겐 엘프가 어째서 오크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지 같은 '사소한' 문제에까지 신경쓸만한 여력이 없었다.
"너는 틀림없이 그때 엘프 마을에서…."
"기억하고 있었어? 킥킥, 조금 기뻐☆"
소녀는 두 손을 짝! 맞부딪히며 웃었다. 마치 지옥과도 같은 풍경, 수많은 오크들의 시체와 건물의 잔해들을 뒤로 한 채 소녀는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의 이야기대로 정말로 기쁜 것처럼 에헤헤― 하고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소녀는 어깨를 뒤로 돌려 두 팔을 허리 뒤쪽에서 모은 채 고르마크를 향해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자박, 하고 소녀의 발이 바싹 말라붙은 흙을 밟자, 그 곳에서부터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오른다. 고르마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 엘프가 아니로군."
쥐어짜내듯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고르마크는 말했다. 소녀는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르마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새 그 표정을 스스로 무너뜨리며 키득 하고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고르마크를 향해 몸을 비스듬이 기울여 얇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곤 아래서부터 잔뜩 일그러진 늙은 오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응. 맞아. 의외로 눈치 빠르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 오크들은 야만적이고 무식한 몬스터라고 들었는데. 전부 그런건 아닌 모양이야. 그러엄― 내가 엘프가 아니라면 뭐라고 생각해?"
소녀는 귀를 쫑긋이며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도 고르마크를 경계한다던가 의식하고 있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어느새 소녀와 고르마크의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2~3걸음 정도의 거리. 이 정도라면 손에 들려있는 도끼를 휘두르기에 더없이 적당한 거리였다. 단단한 갑옷도, 두꺼운 가죽도 없는 자그마한 엘프를 반으로 토막내는 것 정도는 고르마크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이 엘프라면―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터무니 없는 괴물이다.
그래도!
눈 앞의 괴물은 자신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고양이가 쥐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지금이라면…!
"에?"
고르마크의 체중이 앞으로 흔들렸다. 쿵! 하고 발을 내딛으며 다라칸의 손을 휘둘렀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와 함께 백은색의 궤적이 그어진다. 눈 한번 깜짝 할 틈도 없는 순간, 소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느다란 눈썹을 늘어뜨리며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가볍게 숨을 내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던 입술이 작게 움직인다. 틈새로 새어나온 가느다란 목소리가 고르마크의 고막을 흔든다.
"멈춰."
덜컥! 하고 고르마크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을 묶고 있는 것처럼, 다라칸의 이빨이 엘프의 자그마한 몸을 탐하기 직전 그 상태 그대로.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더 휘두르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어깨 아래로 이어진 팔이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위화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르마크의 잇사이로 빠드득 하고 이빨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고르마크가 도끼를 휘두르지 못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태평스레 몸을 빙그르르 돌려서 자박자박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대로 서."
네 다섯 걸음쯤 떨어진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고르마크를 돌아본 소녀의 옆얼굴에는 조금 곤란한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게 질문에 대한 답이야? 그 바보가 실컷 떠벌인 것도 별 소용이 없었던건가. 역시 오크는 오크?"
그 바보가 카일란드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숲의…지배자"
응! 하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제대로 알고 있잖아. 그럼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지 도끼를 휘두르다니. 심술궂게―"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고르마크는 소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엘프 때문이냐."
"호에?"
소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키득― 하고 소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웃었다.
폭소.
뻥 터져버린 듯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숲을 울리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
웃음이 갑자기 뚝―
그쳤다.
소녀는 고르마크를 바라보았다. 너무 웃었던 탓인지 그 눈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소녀는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으며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고르마크를 향해 말했다.
"그럴 리 없잖아. 어차피 엘프나 오크나 내게는 비슷한 가치밖에 없는걸. 엘프들이 맘대로 숲을 돌아다니는 오크들이 맘에 안들어서 죽였던 것도 엘프들의 자유. 그런 엘프가 싫은 오크들이 엘프들을 죽인 것도 오크들의 자유. 그런 오크와 엘프들의 관계에 내가 귀찮게 끼어들 이유도 없잖아."
"그렇다면…"
"이제 질려버렸어. 오크들이랑 노는 거. 그러니까 정리하러 온 거야."
"뭐, 뭐라고…?"
소녀는 불만스레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매끈한 미간에 톱날같은 주름을 잡은 소녀는 찌푸리고는 곤란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르마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비슷한 말 여러 번 하게 만들지 말아줄래? 그러니까 낡은 장난감은 이제 필요없어.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기 전에 놀았던 자리를 정리하러 온 것 뿐이야. 남아있으면… 지저분하잖아?"
그 터무니없는 말에 고르마크는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오랫동안 삶과 죽음을 오고가며 단련된 전사로써의 본능이 그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달아날 수 있을때 당장 도망가라고― 하지만 다라칸의 손을 휘두르지 못했던 것처럼 무언가가 그의 발을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이 고르마크는 멈춰선 모습 그대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했다.
생글생글 미소짓고 있는 소녀는 손가락 한번의 까딱임 그리고 한 마디 말만으로도 고르마크를 없애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크 같은건 단지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고. 실컷 가지고 놀다가 필요 없게 되어버리면 치우면 끝인 존재인 것이다. 오크같은 건 어차피 세상에 차고 흐를 정도로 있으니까.
빠드득 이빨을 갈며 고르마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네 장난감이라는 소리냐."
"응."
소녀는 대답했다. 마치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그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장난감인 너희들은 날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의무라니까. 그걸 하지 못하게 된 이상… 필요없어."
그럴지도 모른다.
눈 앞의 소녀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도 안되는 걸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다.
고르마크의 팔에 핏줄이 솟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천천히 팔이 들어올려지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네놈의 장난감 따위가 아니다."
팔이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힘에 묶여있던 다리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르마크의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다라칸의 손을 가로로 들고는 거리를 좁혔다. 치이이익― 하고 발과 마찰을 일으키며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소녀는 조금 놀란 것처럼 입을 동그랗게 만들며 '오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녀의 시야를 가로막은 모래먼지 안쪽에서 분노로 붉게 물든 눈동자가 번뜩였다.
"웃기지 마라!!"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라칸의 손이 휘둘러진다. 하지만 고르마크의 양날도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소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고르마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바로 앞에 있었던 소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보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나 있었다. 직접 눈 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었다. 다라칸의 손이 휘둘러지기 직전, 소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애초부터 그 곳에 있었다는 것 처럼 순식간에 그의 눈에서 사라졌었다.
"나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해받을 거라곤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는걸."
심드렁히 대답하며 소녀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땅 아래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불꽃이 고르마크를 휘감았다.
"그아아아아아악―!!!"
불꽃에 휘감긴 고르마크를 올려다보며 소녀는 자신의 뺨을 손으로 만졌다.
"어라… 피?"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고르마크에게 들리지 않았다.
고르마크는 무력했다.
부족의 모두를 마을을 불태운 적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웠던 용맹스러운 전사들과 그들을 뒤에서 지원했던 마을의 모두를 실컷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버려버리는 장난감처럼 취급하고 모욕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엘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건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오랫동안 자랑처럼 갈고닦았던 솜씨도 두려움을 모르던 용기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불타오르는 마을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들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서 고르마크는 죽어가고 있었다.
단순한 실수였는지 아니면 일부러 고통스럽게 죽일 생각이었는지 고르마크의 몸을 휘감았던 불꽃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고르마크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받는다고 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고르마크는 용하게도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으…으으윽."
고르마크는 신음했다. 고개를 들자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르마크는 억지로 몸을 움직이며 땅을 엉금엉금 기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가 바닥에 쓸릴 때마다 진물과 함께 살이 찢어져나가고 피가 쏟아졌지만 고르마크는 마치 고통을 모르는 것 처럼 마을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뼈대마저 무너진 건물들은 그저 새카맣게 타서 숯이 되어있는 나무토막들로 그 존재를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고 오크들의 시체들은 이미 그 형태를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고르마크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저 멀리로 그와 천막이 있었던 장소가 보였다.
고르마크는 고개를 떨구었다.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처럼 계속해서 꿈틀댔지만 어차피 거기까지였다. 눈 앞이 점점 흐려져가는 걸 느끼며 고르마크는 이 참상을 만들어냈던 그 자그마한 엘프 소녀를 저주했다.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을 저주했다.
복수…
복수 하고 싶었다..
그의 가족…
그의 마을…
그의 동료…
그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빼앗아간 괴물은 그것을 단순한 …놀이… 라고 했다.
목적은 심심풀이
이유는 단순한 변덕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 무엇이라도 상관 없으니 다시 한번 일어나 부족과 모두의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건네줄 수만 있다면 그 괴물이 자신과 그의 부족에게 했었던 것 처럼 그 괴물의 모든 걸 짓밟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하지만 그런 생각마저도 점점 머리속을 뒤덮어가는 새하얀 안개속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그 때 사라져가고 있는 의식의 저편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하고 싶니? 내가 널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