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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레이디


파멸 7화




바람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정적 속에서 그 목소리만이 고르마크의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린 고르마크는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색채를 잃어버린 흑백의 세계 속에서 고르마크는 달빛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를, 무릎을 굽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의 형태를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긴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로브 겉으로 드러난 실루엣의 윤곽은 그것이 인간의 여성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고르마크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를 입 바깥으로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선 채 후드속에서 흘러내려온 긴 머리카락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누군가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복수를 도와준다고…

누구지 이 자는…

"내 이름은 아니에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마법사야."

다시 한 번 방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고르마크는 그 목소리가 카일란드의 때처럼 자신의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있을 리 없는 비정상적인 정적. 고르마크는 이미 자신의 귀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침묵의 세계 속에서 머리 속으로 직접적으로 쏘아지는 듯한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후후…' 하고 작게 소리내어 웃으며 그 목소리는 다시 한번 말했다.

마치 고르마크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몸으로는 말하기 힘들겠지? 머리속으로 생각해…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화할 수 있으니까."

고르마크는 일단 그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스스로를 '평범한 마법사' 라고 소개한 인간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고르마크는 이미 차갑고 뜨거운 걸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쿨럭 쿨럭! 고르마크는 기침을 하며 그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스스로를 아니에스. 평범한 마법사라고 소개했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너는」

"방금 이야기 헀잖아. 아니에스. 인간. 평범한 마법사. 나이도 궁금해? 키라던가?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오크가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고."

「그 '인간'의 평범한 마법사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거지. …어째서 내 복수를 돕겠다는 거지.」

그 목소리는 조금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왓… 재미없어. 아니 오크는 다 그런건가?"

「대답해라. 나는 너를… 신용할 수 없다.」

고르마크는 의심이 담긴 사고를 전달했다.

피범벅 도끼 부족이 살고 있던 숲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즐기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셰르네일 숲이라 불리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호전적인 피범벅 도끼 부족의 오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에서는 셰르네일 숲을 A급의 위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었고 근처를 지나는 여행자나 상인들은 숲을 가로지르기 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크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크의 기준으로는 이젠 거의 황혼을 바라볼 나이인 고르마크조차 숲 속에서 인간을 보았던 횟수를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보기 힘든 인간. 그것도 마법이라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상황 좋게 나타나 버렸으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이나 나나 그런걸 가릴만한 사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것도 싫으니까 말할게. 나는 한 괴물을 쫓고 있었어. 붉은 날개를 가진 악마. 이 세상의 모든것을 속이고 놀리고 그 마지막에는 파멸시키는 괴수. 응― 당신들 오크들을 이 꼴로 만들어버린 녀석이야."

「너도… 그 괴물에게 복수의 업을 지고 있는건가.」

"응…. 그래서 그 괴물을 쫓던 중 간신히 이 숲까지 오게 된 거야. 그런데 또 이런 모습을 보게 되어버렸네."

「이런 모습이라…?」

하하… 하고 아니에스는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마을이랑… 똑같은 모습인걸."

고르마크는 잠시 생각을 잊은 듯 했다.

「… … ….」

"대답이 되었을까?"

「너는 나를 너 자신의 복수에 이용할 생각인가?」

실루엣이 작게 흔들린다.

가볍게 숨을 고르며 아니에스는 다시 말했다.

"응. 하지만 당신의 복수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 내가 그 괴물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내 뒤를 이어 그 괴물을 좇을 새로운 복수자를 만들어주는 것 정도니까. 내 힘이면 당신에게 당신의 부족을 이렇게 만든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물론 그것도 당신이 원한다면, 의 이야기지만."

「최선의 복수?」

"응. 조금 무리한 모양이니까. 나는 그리 오래 못 가는걸. …당신은 다르겠지? 당신도 그 상태로는 이제 슬슬 한계인 모양이네. 빨리 정하지 않으면, 더 기회는 없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고르마크는 말했다.

「그 괴물 앞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나는 내가 지키고자 맹세했던 것들을 하나도 지킬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괴물은 우리들을 비웃으며 모욕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과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악마의 손이라도 빌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네가 나타났지. …너는 무엇이냐. …악마인가?」

대답은 없었다.

고르마크도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던 것 처럼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혹여 이것이 악마의 계약이라 하더라도 나는 이 만남을 다라칸의 축복이라 생각하리라.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래…."

다시 아니에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안심. 사실은 거절하면 어쩔까~ 하고 생각했어. 내게도 시간은 없고 그 때까지 괴물에게 죽음을 전달해줄 다른 전인을 찾을 수 있을거라곤 확신하지 못했거든. 그럼… 당신에게는 이걸 줄게. 이게 죽어가고 있는 당신의 몸을 회복시켜 줄 거야."

갑자기 귀가 뻥 뚫린 것 처럼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정적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갑작스러운 소음에 고르마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니에스는 로브의 안쪽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손에 들려 나온 건 자그마한 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아니면 다른 색인지 모를 액체가 담겨 찰랑거리고 있었다.

살짝 무릎을 꿇고 아니에스는 그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고르마크의 입으로 흘려넣었다. 단순히 미각이 마비되었을 뿐인지 아니면 원래 아무런 맛이 없는 것인지 고르마크는 그대로 무미무취의 액체를 들이마셨다.

「이건…」

고르마크는 갑자기 머릿속이 핑― 하고 도는 걸 느꼈다. 흑백으로 물들어 있던 세계는 어느새 새하얀 빛으로 뒤덮여 버렸다. 졸음이 몰려온다. 온 몸에서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으며 고르마크는 그대로 고개를 툭 하고 떨궜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건 텅 비어버린 자그마한 유리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아니에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괴물의 이름 말야… 알고 있어? 케르세니아야. 레드 드래곤… 케르세니아."

「케르…세니아.」

그 사고를 끝으로 고르마크의 의식은 어둠의 저편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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