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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몽상(三國夢想)·진(眞)


서장(序章)


​구원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은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4년의 군생활이 너무나도 길어졌을 무렵, 전역날을 하루 앞두고 아마, 그 날은 약간 긴장이 풀어졌던 날이었겠지.

내가 조금만 운이 있었더라도.

지금, 햇살이 강렬하게 부서져 내리는 대지에 서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며칠 동안 감지 못해서 마구 헝클어진 머리와, 조금씩 헤져가는 군복을 입고 정처없이
사막을 걷는 현실조차 피해냈을리라고.

하지만, 그 누구를 원망한다 해도 감히 이 현실에서 도피하게 해줄 순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래의 길바닥, 처음 이 곳에 떨어졌을 때는 정말 어쩔 줄 몰랐다.
훈련 상황도, 내려진 지시도 하다못해 제대로운 도구도 챙겨오지 못한 상황이였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덥​다​.​"​


입고 있는 군복을 모두 벗어던지고 싶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살갗은 저 자비없는 태양에 화상에 가깝게 데이고 말겠지.
쓴 웃음만 나오는 현실에 다시금 절망하고 만다.


흐르는 땀방울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애초에 이 곳에 떨어진 것이 현실이 아니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산들바람에도 지형이 변하는 사막이기에,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현실에.
지쳐있던 내 눈에 드리워진 그림자.


죽어있던 시체들 품을 뒤져 얻은 물병들을 허리에 차고, 다 녹슬어버린 검을 지팡이
삼아 어설프게나마 서 있던 천호연이라는 인간이 만난 운명은,


"네놈은 뭐냐? 마적들 중 하나인가?"


라며 꽤나 살벌한 미소를 짓는, 선혈보다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흑발의 미녀였다.
그녀의 뒤로 정렬한 병사들과, 그녀를 모시듯 곁에서 말을 몰고 있는 남자. 시간이 
남을때마다 읽어제꼈던 수많은 무협지에서 보았던 '기연'이나 다름없는 전개.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퉁명스럽게 답하고 말았다.

​"​.​.​.​.​.​.​지​나​가​는​ 평범한 군인이오."

대답은 분명 들렸을 것이다.
저 여자의 말의 억양과 발음, 그 모든게 한국어가 아니였지만 선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나 자신도 모르게 대답도 한국어라기 보단 이 지방의 언어.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면 중국어에 가까웠을 음성으로 선뜻 답한 것이다.


"뭐? 군인?  후하하핫!  군인의 차림새가 그런 모양이더냐."

여인의 박장대소에 옆에 있던 병사들까지 하나같이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 봤을때
위협적이였던 붉은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어린 여인이 뿜는 아름다움이,
사막에서 이성이라는 얼음이 녹아내리던 나를 자극했다.

가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쥐고 싶은 장미의 매혹처럼.
하지만, 저 미모에 홀려 지금 자신의 본래 목적을 잊으면 안된다.

공손하게 답할 것인가?
아니면 건방지게 굴 것인가.
너무 건방지게 굴었다간 저들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칼이나 창에 
단숨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은, 내 옷차림이나 말투. 그런 것에
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

이런 저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나저나 댁은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데, 왜 ​반​말​로​.​.​.​.​.​.​"​

과감하게 던져보는 미끼에, 그녀보다 다른 자들이 칼을 빼들고 살기를 쏘아올렸다.
하지만 쥐고 있는 창으로 내 목에 넌지시 갖다대는 여인의 얼굴에선
여전히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다. 

​"​.​.​.​.​.​.​반​말​이​ 뭐?"


​"​.​.​.​.​.​.​그​렇​다​면​ 일단 물 좀 주십시오...난 수분이 부족한데 자꾸 말을 ​시​키​시​니​.​.​.​.​.​.​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피부를 찌르던 열기가 조금 주춤해졌지만, 가장 중요했던 목적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일, 호의건 호기심이건 어느것도 마다할 수 없는 나에게 있어선. 지금 
저 여인의 눈길을 계속 해서 끄는 것이 중요했다.


여인의 흑발이 사막에 부는 바람에 살랑, 흔히 말하는 격조있게 휘날린다고도 
볼 수 있을 법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당당하게 입술에서 목소리를 연주했고,
그 목소리를 듣기 전의 그녀의 부하들의 모습과 들은 후의 모습은 흡사 흑과 백이
대비되는 느낌마저 준다.

​"​.​.​.​.​.​.​성​의​.​ 저 놈에게 물을 건네줘라. 저 놈 말대로 사막에서 며칠이나 헤맸다면 
 필경 물을 주지 않으면 저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성의라 불린 무장, 주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나란 인간은 수분 보충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혹시나 내가 본 적이 있는지, 전역하기 전 날까지 끼고 살던 
무협지에서 들은 적이 없는지 뇌내를 풀로 가동시켜 대체 누구인지 
알아보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허나 아가씨. 저런 도적같은 놈에게 시간을 허비하실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비실비실 해보이는 게, 쓸모도 없어보이고요. ​하​물​며​.​.​.​.​.​.​"​


딱 잘라 내 가치를 정해버리는 남자, 전장에서 오래 싸워온 듯한 무사. 라는게
정평이라면 정평일 그의 반응에, 반사적으로 아니 조금은 계획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쓸모 있습니다!"

"이래뵈도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대국에서 정규 군사교육 4년을 마친 국가차원의
 재원이였습니다. 전투 중 잘못되어 이런 곳으로 낙오되었긴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가 이렇게 거짓말에 능숙한지(그렇다 해도 군인이라는 것은
진실이지만)에 놀라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대화의 주도권을 창칼이 쥔 저들이 아닌, 단지 저들의 우두머리가 관심을 가진 
나라는 존재에게 왔을 때. 천호연이 살 길은 자신을 각인시키는 것 뿐이였다.

"배고픔만 덜하다면 하찮은 짐꾼에서부터 싸움까지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성의도, 나도 모두 멈춰버리면 여인의 박수소리. 명쾌하고도 날카롭기 까지한 
대장부의 박수가 몇 초간 이어지고 그녀의 미소에선 조금은 만족했다는 
얼굴이 보였다.

"......광대 같은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곤 꽤나 기개가 있구나."


다행이다. 저 여인의 관심이라는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아서.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군인입니다. 아가씨."

나름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예법. 이라고 해봐야 
포권이지만, 어쨌든 의미는 전해진 것 같았다.

"......내 부하들의 살기에 눌리지 않고 소신껏 지껄이는 게 정말 살고 싶긴 한 가보구나."

약간은 지분거리는 듯한, 그토록 살고 싶으냐? 라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여인의 눈, 피보다도 붉고, 그 어딘가에 있다는 홍해보다도 넓은
눈동자에서 서린 감정이 무엇인가.


그 날의 난 알지 못했다.


​"​.​.​.​.​.​.​사​람​입​니​다​.​"​

내 대답에 그녀가 웃었다. 육성으로, 아주 잠시. 부하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광대처럼
환심을 끌어보려는 이방인인 나를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 아마 저 여인이 
칼을 거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목이 떨어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을 해야한다.


"어찌 살고자 안하겠습니까?"


이것은 나에게 대한 반문이기도 하며, 나를 광대처럼 생각하며 떠보려는 여인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했다. 나는 어차피 그녀에게서 있어서 '유희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기에.


​"​아​가​씨​.​.​.​.​.​.​.​도​대​체​ 뭘 ​어​쩌​시​려​고​.​.​.​.​.​.​"​

성의라는 장수 대신, 아마도 그와 비슷한 직위의 다른 장수가 
나서려하자, 그저 눈짓으로 그 행동을 제지하는 우두머리. 절대적인 카리스마.
호연의 눈 앞엔, 그 힘을 지닌 존재가 있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놈이긴 하나, 그렇다고 강(羌)쪽의 첩자도 아닐 것이다.
 그 쪽의 첩자였다면 이런 황무지에서 헤맬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 말에, 시종일관 반신반의하던 그녀의 부하들도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잠깐. 그럼 내가 정말 한심한 인간으로 보이겠군. ​제​기​랄​.​.​.​.​.​.​.​

자존심이 뭉툭 잘려나간 기분을 간직한 채, 왠지 담배가 피고 싶어지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놈을 살려두겠다. 일단은."


​'​.​.​.​.​.​.​일​단​은​,​ 이라는거로군.'

이 황무지인지 사막인지 하는 곳에서 벗어난다는 안도감이 먼저 밀려왔기에,
깊은 한숨과 함께 잠들뻔한 몸이 굉장한 완력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여인의 손목에 이 정도의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서 붙인채 말을 타게 된 나는, 움직일 준비를 끝낸 여인의 기병대를
보고 작게 탄성을 지르고 예의를 갖춰 입술에 말을 다시금 올렸다.


"저는 대한민국 소속의 중사, 천호연입니다. 존함이 어떠선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뒤돌아 본 그녀가 꽤나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나를 보더니 
그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탐색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내 이름을 알려달라? 후후."

그녀의 부하들이 전,후미를 맡기 위해 흩어져서 다행이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평민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내가 
이 일대의 최고 호족이자 제후의 혈족인 그녀의 이름을 바로 묻는 것은 
굉장한 결례이자, 계급을 무시하는 행동이였다고 한다.

그런 질문에도, 여인은 그 흑단과도 같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우아한 표범처럼 늘씬한 허리를 내게 더욱 더 밀착(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해왔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지도 
흘려듣는 건 용서받을 수 없었다.

​"​.​.​.​.​.​.​.​나​는​ 서량의 제2기수이며 사막의 북풍을 인도하는 팔중기(八衆驥)의
 우두머리. 그리고 마수성의 ​영​애​인​.​.​.​.​.​.​"​


서량, 마수성. 그리고


"마초. 맹기라 한다."
지인의 소개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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