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기연
바람이 모래를 부드러운 손길을 쓸어, 그 이마에 서린 땀을 닦을 때, 일렬로 늘어선
기병대의 필두. 청초한 흑발이 인상적인 미인의 옆엔, 그녀의 부하들로부터
경계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기묘한 복색의 남자가 있었다.
대한민국 특전사 소속의 중사, 거의 붙들려가듯 말에 매달린 남자가 바로
천호연, 본작의 주인공되시겠다. 대체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지만 수백년 아니
천년 단위로 시간을 건너뛰어버린 그의 머릿속엔 적어도 사막에서 죽지 않게 됬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다가올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뒤엉켜 마치 종이 펜으로
미친듯이 낙서를 한 것처럼, 그 검은 잉크의 혼탁한 모양처럼.
짜증이 차올랐다.
하지만 내색할 수 있으랴. 내가 여기서 제일 약한 입장일진데.
"저기 보이느냐. 호연."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손목에 있는 시계가 전혀 돌아가지 않아 거리감도
시간감각도 상실해있던 그에게 손가락으로 어스름히 보이는 요새처럼 쌓아올려진 성채와 마을을 가리키는 여인, 스스로를 마초라 밝힌 패기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호연이였다.
"저기가, 아버님의 성인 무위의 본성이니라.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웅장하군요."
솔직한 감상이다. 성문 밖에서 아마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는 병사 무리들,
그리고 성벽 사이사이 마다 배치된 경비병들이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수가 많아지는 게, 여기는 마치 '마 씨 일가'의 영역이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성문 앞까지 접근하자, 팔중기의 기수들 중 하나일 남자. 줄곧 호연을
노려보던 장수들 중 아마 불만이 가장 컸던 성의가 앞으로 나서 크게 소리쳤다.
"팔중기의 대장인 마초님이시다! 어서 문을 열어라!"
"어서 문을 열어라!"
끼이익-!
거대한 철문이 기지개를 켜듯 열리고 그 내부를 그대로 드러나는 광경, 전란이 계속되고 있는 시기에도 성내가 활기차고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은
호연에게 묘한 감동을 주고 있었다. 마등에 대한 평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성들을 핍박하는 군주는 아니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와중에 마초와 몇 번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시내를 지나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관청으로 가는 걸음이
가까워 질수록, 그녀의 긴장감이 육안으로도 느껴졌기 때문이였다.
이윽고 관청에 도착해, 말에서 내려 마초를 따라, 의관을 쓰고 시립해 있던 마등의
가신들이 거지꼴이 다름없는 호연의 행색을 얼핏 보곤 혀를 찼고, 그걸 개의치 않으려
는 데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의 왕이나 다름없는 양주의 최대 호족이자 마초의 아버지일, 남자가
상석에서 통치 중일때 입는 정복인듯, 정갈한 비단옷을 입은 채로 앉아있었다.
마등 수성.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상당한 거구의 장수, 동물의 가죽을 덧대만든 활동하기 편한
갑주를 걸친 채 수염을 천천히 쓸고 있는 또 다른 자가, 마초의 반응으로 보자면
한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왔느냐. 나의 두번째 별이자 사막의 북풍을 인도하는 아이야."
인자한 음색이 눈 앞의 두번째 별, 그러니까 아마도 둘째딸일 마초를 아낀
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내보이는 말이엿다.
"인자하고도 강건하신 사막의 태양이시여. 이제 돌아왔나이다."
마초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석에서 일어나 마초를 향해 달려온 마등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녀의 다정한 포옹이였다. 주위에 있는 가신들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혹시나 마등의 귀이자 눈인 한수에게 걸릴까
초조한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이 이방인은 누구인지 설명해주겠느냐?"
아까 지신의 딸을 볼때 와는 전혀 다른 미소, 감정을 지운 냉철한 눈으로 호연을
관찰하는 마등에게선 묘하게 한기가 감도는 듯 했다.
"이, 이 자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인지, 호연이 보아왔던 성에 도착하기 전의
그녀와는 다른,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약해보이자, 아무래도 대화의 중심을
자신에게로 끌어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서량의 위대한 제후이신 마등 공이 아니십니까? 오래전부터 사해에 걸치신 높은 명성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십 분 인용하는 호연, 마등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
자신에게 쏘아지는 한기는 아마도 의심에서 비롯된 것일테지.
"......호오?"
뇌내의 전 회로를 빠르게 돌려, 호연은 또 다시 자기 자신을 증명할 때라
여겼다. 혹시라도 밉보이거나 쓸모없다고 여겨지면 버려질테니.
"저는 대한민국 소속의 특수부대 출신 천호연이라 합니다."
"대한민국? 그런 제후국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네 놈은
다른 제후가 보낸 첩자 놈 일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반응이 냉담한 것은 당연한 일, 호연은 넉살좋은 얼굴로 시작한 이 말이라는
요리를 어떻게 끝내야 하나 목 안에서 말을 굴리다가.
"...필경 들어보시지 못하셨을 겁니다. 제가 있던 곳은 이 중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대해서 잘 아시고 계실 마등 공이시라면, 이 중원이 제가
속한 대한민국에서 영해 40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에 있다는 걸 아실겁니다."
일생동안 사막과 평야만 봐온 사람이 바다를 알겠는가? 게다가 킬로미터
라는 단위 또한 이 시대의 사람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단위다.
호연의 말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다 쏘아붙이면 바다에 대한
지식이 전혀없는 자로 비춰질 까봐 두려운 마등의 심리를 이용한 괜찮게 차려진
요리인 셈이였다. 비유하자면.
"......그, 그렇지. 꽤나 먼 거리에 있구나."
"저는 이 타국에 와서 갑작스런 이민족들과의 전투에 휘말리게 되었고, 헤매던 것을
여기 계신 마초님이 구해주셨습니다. 정말로 깊은 은덕이지요."
화제를 돌려 자신의 딸을 칭찬하고 보니, 마등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떠들고 있는
자에 대한 관점을 돌리기로 마음 먹은 듯했다.
"네가 이 중원 출신이 아니란 건, 그 특이한 복장만 봐도 미뤄 알 수 있다.
너는 네 입으로 군인이라 말했다. 나는 내 두번째 별이 쓸모없는 자를 주워왔을 것이라
고는 생각치는 않는다만......"
대화의 분위기는 첩자를 잡아 죽이는 분위기에서는 많이 멀어진 듯 하다.
작게 한숨 쉬는 호연을 가리키는 마등의 언사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은 난세다. 아무런 능력 없이 대가를 취하려는 것은 황건적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먼리 타국에서 온 천호연. 너도 다르지 않아."
좌중의 모든 대신들이 동의하는 분위기, 호연 또한 자신이 군인이라도 내뱉은
말에 어떤 결과가 있을 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호연의 뒤에서, 기가 죽어있던 마초가 입술에 목소리를 싣는다.
"무예를 시험하고자 하신다면."
"지금은 무리입니다."
다시금 웅성대는 좌중의 가신들, 갸우뚱 거리는 그들의 반응은 무시한 채로 마초는
차분히 자신의 논리를 펼쳐내려갔다.
"이 자는 황무지에서 오랜 기간 낙오되어 있었고, 방금 오기전 겨우 물과 육포 몇 조각 먹은게 다입니다. 이 일대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자가 타국에서 그것도 제대로운 보급없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로도 범부(凡夫)는 아닐 것이라 사료됩니다."
'......역시 이 여자밖에 믿을 구석이 없구나.'
마초의 말이 끝나자 웅성이던 대신들도 잠잠해지고, 마등 또한 어느정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호연의 예상대로라면 자신의 딸이 보증하는 인물인
호연이 지금 죽을 일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 예상에 확답을 주는 말.
"그렇다면 배불리 먹여 원기를 차리게 되면,내 직접 시험해보리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최고 호족의 선택이자 서량의 왕이 정한 선택,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게 되었다. 낯선 상대를 경계하는 눈에서 평소의 인자한 눈으로
돌아온 마등이 자애로운 음성을 말을 보탰다.
"맹기의 선택을 믿어보도록 하지. 이만 물러가 보거라."
"녜."
그리고 퇴청 허락을 받은 마초를 따라 어느새 흩어진 팔중기들 대신 화사한 의복들을
갖춘 시종들과 함께 움직이게 된 호연이였다.